9.3~9.5 2박3일의 일정으로 내사랑 부산 운동추진협의회 기획운영위원들이 제주를 다녀왔다. 발전방안과 추진과제의 논의를 비롯하여 회원단체 상호 화합과 결속강화와 역량강화 차원에서 모두 37명이 참여했다. 이번 제주행은 이러한 공식적 목적 외에 개인적으로는 뭔가 뚜렷하고도 명쾌한 답이 보이지 않는 내 현재의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에 휴가의 의미도 담았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현장의 이런 저런 상황과 조건 때문에 연결되지 못했다. 출발 전날 부산에서 전시회를 연 제주올레팀들과 과음을 했다. 비행기에 오르자 말자 잠들었고 도착해서는 일정을 소화하고 교류와 친분을 나누느라 생각만 분주했다.
제주 일정은 첫날의 점심식사 전까지만 잠시 한가로울 수 있었다. 지난주에 왔던 용두암을 다시 본다는 것이 시간적 낭비라고 보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산환경연합 최수영 사무처장과 부산시민센터의 최수미 실장 부산 YMCA 황제문 간사를 불러세워 한컷 담아주고는 바다가 쪽이 아닌 마을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른 참가자들이 근처를 산책하는 동안 용두암 근처 제주의 무덤을 구경했다. 제주 무덤의 특징은 무덤 주위에 사각형으로 주위에 돌담을 쌓는데 이를 산담이라 한다. 소나말이 출입과 거센 바람으로부터 조상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그 돌들은 널부러진 현무암 조각들이다. 제주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 까지, 또 죽고 나서도 돌과 같이 동거한다.
한편 지관이 묘자리를 정하면 그곳이 남의 땅이더라도 그곳에 모셔야 한다는 믿음과 관습이 있다. 원수지간이 아니라면 땅주인도 이를 수용해준다. 봉분 좌우에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지키기 위해 세운 동자석이 있다. 형태는 단순하다. 다만 손에 들고 있는 것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부채는 권위, 술잔이나 술병은 망자의 시중, 방울은 악귀를 물리치기 위함이다. 한편 신문(神門)이라는 것을 두어 영혼이 드나들 수있도록 했는데, 망자의 머리를 중심으로 신문이 왼쪽이면 남자고 오른쪽에 위치하면 여자의 무덤이다. 4대조 이상 되면 문은 닫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동자석은 어느 시절인가부터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주 도시사와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무부시장이 대신하고 제주의 토속 음식을 먹으로 이동했다.
각재기국과 멜조림
각재기는 전갱이의 제주표현이다. 제법 제주를 오갔음에도 각재기국은 처음이었다. 배추잎을 넣고 된장을 풀어 만든 국인데 시원했다.
숙소인 우주항공호텔은 중문 쪽에 있었다. 약 1시간 남짓한 이동거리, 수첩에 적어둔 넋두리와 참담한 현실의 조각들을 다시 보았다. "지쳤간다. 몸도 마음도 BGT와 나의 공존은 얼마나 지속될까 " 거나 "잉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구조" , "BGT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을 붙잡고 스스로와 대화하고자 했는데 ...
호텔에 들자마자 간담회를 시작으로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내사랑부산운동추진협의회는 이념과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야말로 비빔밥 조직이다. 단체들도 그 상황을 수용하고 있었다. 솔직히 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할 때는 이 추진협의회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그래서 참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또 몸 담고 있는 조직의 위치로 보아 몇 사람의 요청으로 지난해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내사랑부산에서도 다양한 의제를 통해 보조금 사업을 벌이는데 지난해 수행했던 마을터줏대감 조사발굴사업이 그것이다. 소액의 예산으로 부산지역 노거수 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를 공유하면서 노거수 조례의 개정까지 이끌어 냈다. 그리고 은근히 욕을 먹기도 했다. 그 비용으로 그런 사업을 수행했다는 것에 대한 예컨데 조사 사업의 시장질서를 왜곡시켰다는 것인데 인정하는 바다. 어쨌든 올해도 마을터줏대감 나무 2차년도 사업을 수행중에 있다. 올해는 부산은행과 부산일보와 더불어 진행중에 있다. 하지만 지방재정법의 개정으로 내년 사업은 불투명하다. 보조금을 통해 사업을 수행하는 거의 모든 단체에 적용되는데, 다들 불만이 많다. 아무튼
별종을 만났다. 특강 강사로서 온 동서대 장재국 총장이 그이다. 그 집안의 내력은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장 총장의 존재는 같은 묶음 꼴로 내게 인식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를 강사로 추천한 김모처장에게 왜 그런 양반을 섭외했냐고 의심하여 묻어 물어 보가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총장의 강의 내용은 들어 되새길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 장총장의 메시지를 실어 본다. 참석자 중에는 분위기를 깨기 싫어 차마 함구한 이도 있지만 어쨌든 되씹을 이야기는 제공했다,.
첫날 저녁은 사형제가 운영하는 횟집에서 그들 형제가 잡고, 손질한 횟감으로 배를 채웠다. 작은 종지에 시식용으로 먼저 나오고 본요리는 나중에 나왔다. 다양한 횟감을 맛보는 차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첫날밤은 그렇게 보냈다. 미련이 남았던 몇 몇은 호텔앞 쉼터에서 잔을 나누기도 했다.
우주항공호텔 이름도 요상한 이 호텔에 묵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호텔 선정에 대해 뒤늦게 입방아가 있었지만 다 내맘 같지 않았다. 또 구태어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 다소 씁쓸해하는 표정만 지을 뿐 , 그랬다.
일대의 변화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프로젝트 중에 하나다. 우주항공호텔은 호텔 옆 우주항공박물관 사업 후속으로 박물관 등과 함께 총 소요된 사업비는 1150억원이었다. 이 사업들은 2013년 6월 JDC이사장으로 왔던 김한욱씨에 의해 입안되었다. 김 이사장은 동사무소 말단직원으로 시작해 행정부지사를 지냈던 '제주 9급공무원의 신화'로 회자되는 사람이다.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인 JDC의 주요 재원은 제주공항 국내선 1곳과 제주항 2곳의 내국인 면세점이다. 그는 제주의 날씨가 년중 맑은 날이 365일 중 78일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실내관광 수요를 주창했고, 우주항공박물관과 우주항공호텔을 진행했다. 그 밖에 제주곶자왈도립공원과 제주신화역사공원 등 대규모 개발사업들을 연이어 개장하거나 추진중에 있다. 문제는 중산간 지역의 곶자왈이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수풀이 우거진 '자왈'이 결합된 제주용어다. 중산간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200~600m 지대로 해안저지대와 한라산을 연결하는 생태축의 역할을 담당하는 지역이다. 일대는 곶자왈에 더하여 지하수 충전지대인 '뱅듸'가 중첩되는 지역이다. 제주도에서 곶자왈이 차지하는 면적은 제주 전체면적의 6%인 109 인데 이중 18.78%에 해당하는 약 20.6 9(여의도 7배) 가 대규모 개발에 노출되면서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왔다.(2014 제주녹색환경지원센터)
우려스러운 현상은 중국 투기자본의 진출이다. 예컨데 백통신원 리조트, 차이나비욘드힐관광단지, 제주헬스케어타운 등 대규모 숙박시설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산간 지역에는 26개의 골프장이 밀집해 있다. 영업중인 29개의 골프장 26개가 중산간에 위치한다 . 곶지왈 전체 면적의 20%가 이같은 개발사업에 의해 사라졌다. 나아가 제주의 특이한 공동체 문화로 해석되는 마을공동목장도 절반 이상 사라졌다. 제주 중산간 개발은 원희룡 지사 취임 후 더 후퇴했다고 한다.
최근 곶자왈 보전관리조례가 만들어 졌지만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고 한다. GIS(보전관리지역)에 의하면 보전가치에 따라 1~5 등급 대상지역이 관리적용이 되는데 등급 상 곶자왈은 2등급으로 개발이 가능한 상태다. 개발이 불가능한 생태계보전지구 GIS 등급 상 1~2 등급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식물이나 제주 특산식물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데, 곶자왈의 많은 곳에서 활엽수림대가 분포하는데, 35% 이렇게 될 경우 3등급이 되어 이 또한 개발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 최대·최후 상록수림 선흘곶자왈이 위험하다 –제주의 소리
화산이 만든 숲, ‘곶자왈’은 제주어로만 존재하고 우리나라에서 제주에만 존재하는 숲이다. 바위를 감싸안고 살아가는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곶자왈은 마을주민과 생활사를 함께했던 숲이었다. 하지만 제주도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곶자왈은 개발의 표적이 된다. 특히,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이라고 불리웠던 선흘곶자왈의 한축은 이미 10여년전 묘산봉관광지구 개발로 사라져버렸다.
▲ 약 1만년 전, 368개의 오름 중 10개 오름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면서 곶자왈과 수많은 용암동굴이 만들어졌다.(사진은 거문오름. 이곳 분화구에서 흐른 용암이 선흘곶자왈을 만들었다) ⓒ양수남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곶자왈의 나이는 약 1만년 내외로 밝혀졌다. 예상보다 훨씬 젊은 숲인 셈이다. 즉, 약 1만년 전에 도내 368개의 오름(독립화산체) 중 10개의 오름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용암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곳이 곶자왈인 것이다. 1만년 전후, 제주도 동서쪽에 흩어져 있는 도너리오름에서, 노꼬메오름에서, 다랑쉬오름에서, 용눈이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땅위를 강물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용암 중에서 점성이 약한 용암은 지면을 따라 빠른 속도로 흐르다가 공기와 만나는 윗부분은 바위로 굳게 되고 밑에 있는 용암은 굳지않고 그대로 흘러가게 된다. 용암이 흘러가 버린 곳은 빈 공간으로 남게 되는데 그것이 용암동굴이다. 반면에 점성이 높은 용암은 천천히 흐르다가 산산히 부서지며 바위로 굳게 된다. 쪼개진 수많은 바위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바위무더기가 자리를 잡자 돌무더기에 흙도 묻고 이끼들이 자라기 시작했을 것이다.
▲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은 수많은 동굴을 만들어냈다.(사진은 선흘곶자왈에 있는 개여멀굴) ⓒ양수남
이끼들이 바위를 덮고 흙이 이끼위에 묻기 시작하자 풀들도 이곳을 넘보기 시작한다. 이들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1년생풀, 다년생풀들이 자라고 죽기를 반복하며 쌓이면서 바위 위에 얕은 토양이 만들어진다. 그러자 이제는 키작은 나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뒤이어 소나무도 들어온다. 하지만 그늘에 약한 소나무는 밑에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종가시나무같은 상록활엽 참나무가 자기 키를 넘은 후에는 서서히 고사한다. 상록활엽 참나무류들은 스스로 도토리를 떨구기도 하고 때로는 새들이 와서 도토리를 먹고는 숲 이곳 저곳에 뿌리기 시작하며 숲을 장악해 나간다.
▲ 곶자왈은 바위위에 자란 독특한 숲이다. 천선과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감싸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양수남
이것이 곶자왈이 만들어진 이야기다. 물론, 점성이 높은 용암(아아용암)위에 자란 숲만이 곶자왈은 아니다. 선흘곶자왈처럼 점성이 낮고 속도가 빠른 용암(파호이호이용암)이 만들어낸 용암동굴 지대에도 숲은 형성되고 그곳도 모두 곶자왈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즉,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만들어낸 바위지대 위에 숲이 형성된 곳을 곶자왈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물론, 현재 제주도에서는 곶자왈 경계설정 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조만간 곶자왈 지대를 구분하는 결과가 나오게 될 예정이다.
▲ 고사리삼. 곶자왈 하부 식생은 고사리가 차지하고 있다. 곶자왈에는 우리나라 양치식물의 80%가 산다. 겨울철에도 곶자왈이 초록숲인 이유는 고사리와 상록활엽수가 있기 때문이다. ⓒ양수남
곶자왈에는 한반도 양치식물 중 80%가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는 제주고사리삼같이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분포하고 있는 식물도 있다. 곶자왈에서 원시림이 느낌이 나는 이유는 나무 아래에 수많은 고사리들이 살고 있는 것도 한몫을 한다. 실제로, 고사리는 공룡이 살던 시절에 초식공룡이 먹던 식물이다. 겨울에 곶자왈에 가도 초록숲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사리와 상록활엽수가 있기 때문이다.
곶자왈은 곶자왈 자체가 하나의 숨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이 빗물이 바로 지하로 유입된다. 곶자왈에 ‘땅 속의 강’ 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지하수 최대 충전지역인 셈이다. 그래서 곶자왈이 있는 부근 지역은 홍수가 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 평지 지역에 남아있는 대규모 숲인 곶자왈은 한라산과 중산간-해안을 잇는 제주생태계의 연결고리이다. 한라산의 노루가 곶자왈을 통해 이동을 한다. 곶자왈은 제주민과 함께 했던 자연유산,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곶자왈은 민가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건축, 가구, 농기구 등 각종 목재를 곶자왈의 나무로 벌채하여 왔고 숯을 많이 구웠다. 거기에다 먹거리를 공급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며 약용식물을 구하는 곳도 곶자왈이었다. 가축을 키우는 목축의 장이기도 하였다.
# 숲, 동굴, 습지가 어우러진 독특한 선흘곶자왈
▲ 선흘곶자왈 전경. 거문오름(서검은이)에서 분출한 용암이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용암동굴계와 지금의 선흘곶자왈을 만들었다. 한반도 최대상록활엽수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수남
거문오름(서검은이)에서 분출한 용암이 알밤오름과 북오름 사이를 흐르며 수많은 용암동굴과 함께 선흘곶자왈이 만들어졌다. 선흘곶자왈 안에도 도틀굴,개여멀굴,목시물굴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굴이 있는 곳은 지면 위에 넓은 바위가 있다는 의미여서 물이 고여 습지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 선흘곶자왈 안에는 특이한 건습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제주고사리삼은 이 건습지에서 살아간다. 제주고사리삼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쪽 지역에만 살고 있는 이유이다. ⓒ양수남
그래서 선흘곶자왈 안에는 특이하게도 숲속 습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동백동산 안에 있는 ‘먼물깍’뿐만 아니라 선흘곶 여기저기에 습지들이 숨어 있어서 생태계의 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선흘곶자왈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곶자왈이 갖고있는 전형적인 숲의 모습과 함께 동굴, 습지 등 다양한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숲 속 안에 있는 건습지에서만 자라는 제주고사리삼이 선흘곶자왈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이유도 이곳의 독특한 지형적․생태적 특성 때문이다.
특히 선흘곶은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면적의 상록활엽수림을 자랑하고 있다. 전국의 상록수 65종 중 31종이나 출현할 정도로 상록수의 천국이다. 선흘곶은 희귀동식물도 풍부하다. 멸종위기동식물인 맹꽁이, 물장군, 순채, 물부추, 개가시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선흘곶자왈 안의 동백동산 중 일부가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것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대규모 습지 지역이거나 갯벌이나 철새도래지도 아닌 숲 자체를 람사르습지로 지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도내 곶자왈 중에서도 선흘곶자왈처럼 숲 안에 습지가 형성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먼물깍 습지를 중심으로 해서 590,000㎡를 람사르 습지로 지정한 것인데 이것은 습지 하나 때문이 아니고 숲 안에 여러 개의 습지가 생성된 특이한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숲과 습지가 상호작용을 하며 생태계 다양성을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흘곶안에 있는 먼물깍(습지).숲안에 습지가 형성된 경우는 드물뿐더러 특히, 곶자왈안에 습지가 형성된 것은 도내 곶자왈에서도 매우 드물다. 선흘곶자왈 안에는 먼물깍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습지가 곳곳에 흩어져있다. ⓒ양수남
# 사라지고 있는 곶자왈
▲ 곶자왈의 중요성이 인식된 것은 불과 10여년이 넘었을 뿐이다. 그동안, 전체 곶자왈의 약 30%가 사라졌고 앞으로도 사라질 위기에 있다. ⓒ양수남
곶자왈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행정당국에서도 중요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불과 10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곶자왈에 대한 보전대책이 전무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곶자왈이 사라졌다.
낙엽활엽수가 풍부한 교래곶자왈에는 에코랜드가, 서부지역 최대곶자왈인 한경-안덕곶자왈에는 블랙스톤골프장이 들어섰고 서광곶자왈에는 신화역사공원이 들어섰다. ‘곶자왈보전 및 현명한 이용대책 마련 연구’(2012,제주녹색환경지원센터)에 따르면 지금까지 도내 곶자왈 가운데 약 31.9%가 사라졌다.
제주도 동서로 분포하고 있는 넓은 면적의 곶자왈이 대규모 관광시설에 의해 상당부분 잠식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별로 변화되지 않았다. 도내 곶자왈의 80%가 생태계 3등급-5등급인데 이 경우 개발이 가능하다. 즉, 현재 법으로는 도내 곶자왈 중 약 20%만이 보전 가능하다는 얘기다..../ 양수남·제주환경운동연합 대안사회팀장 16.6.22
이른아침 주변을산책해 보았다. 숙소 주변은 제주 환경단체와 시민사회가 제기하는 문제의 현장들로 포진하고 있었다.
‘돈먹는 하마’ 항공우주박물관, 타당성 용역부터 ‘엉터리’ 16.7.7 제주의 소리
지난 2014년 4월 문을 연 항공우주박물관 건립에는 1150억원이 투입됐다. 그해 81억원의 당기순손실이 발생한데 이어 2015년에는 93억원으로 적자 폭이 더 커졌다.
JDC가 추진하는 사업들 중에서 유일하게 적자를 기록한 사업이 항공우주박물관이었다. 2015년 기준 면세점 사업에서 1098억900만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첨단과학기술단지 13억7500만원 △신화역사공원 28억4000만원 △헬스케어타운 317억3300만원의 순이익을 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에 대해 항공우주박물관 사업의 경우 사업 추진시 타당성조사가 미흡했다는 결론을 냈다. 최초 제안서에서 제안한 사업비 규모는 694억원, 그런데 별도의 충분한 타당성 검증 없이 휴양시설 건립계획이 포함되면서 사업비는 1324억원으로 뻥튀기됐다.
2009년과 2011년 2차례 실시된 수익성 검토 및 사전타당성 용역 결과, 1차 연도에 각각 57억원, 40억원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고, 2차 연도에도 63억원, 79억원의 순이익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하지만 개장 후 실적은 정반대였다. 1차 연도(2014년)부터 81억원의 순손실을 내더니 2015년에는 순손실 규모가 93억원으로 늘었다.
예산정책처는 실제 나타난 수입·순이익 등이 차이가 난 이유로 엉터리 ‘이용객수 예측’을 꼽았다. 용역에서는 연간 118만명 정도가 박물관을 찾을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 관람객은 2014년 17만6000명, 2015년 26만5000명 수준에 그쳤다.
결국 이용객 수의 잘못된 예측은 수익성이 부족한 사업이 마치 수익성이 있는 것처럼 평가하도록 작용, 수익성 확보에 대한 별다른 대책 없이 사업을 추진하는 결과로 이어져 이제는 ‘돈 먹는 하마’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현장에 대한 사전이해 없이 그냥 산책에 들었다면 곶자왈의 문제며 공동목장은 보이지 읺는다.
제주말이다. 흔히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하며,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 제주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생종 말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품종의 제주마를 기르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로, 몽골로부터 지금의 제주마 품종이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키는 암컷이 117㎝, 수컷이 115㎝ 정도로 비교적 키가 작으며, 몸무게는 200kg 정도 된다. 성격은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털색은 밤색이 가장 많고 적갈색, 회색, 흑색 등의 순서이다.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이다.
2011년 제주도청 집계에서 확인된 제주도내 농가 1,157곳에서 기르는 총 22,223마리의 말 가운데 혼혈종 한라마 16,692마리와 수입산 서러브레드 4,179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주마는 모두 1,392마리로 그 가운데 혈통이 등록된 순종은 200마리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전형적 중산간 목장의 모습이다 돌 담 넘어 초지가 펼쳐져 있고 곶자왈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호텔 뒷쪽에 자리잡은 광대한 녹차밭,
중산간지역 곶자왈의 개발은 원형질의 파괴와 더불어 가장자리 지역의 귀화식물의 유입 등 지역 식물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둘째날 추진협의회 발전방안에 대한 참가자 전원의 입장피력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제주문화 특강은 그 어떤 시간보다 반응이 좋았다. 점심을 반납하고 더 듣고 싶다는 주문이 나오기도 했다. 제주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 제주의 속살과 토대를 인상깊게 들었다. 다음은 강의 초록이다. 혹시 이 강의록을 캡쳐한다면 반드시 출처를 명기해주면 좋겠다. 강의를 했던 이는 화가이면서 문화운동가인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이다. 박이사장은 1980년대 ‘그림패 바람코지’ 민중미술운동 이후 개인전 7회와 다수의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제주민예총 창립멤버이며, 4.3자료관 건립 전시기획팀장으로도 활동했다. 저서로는 「바람길 넋살림 칼」,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 「박경훈의 제주담론1」등이 있다. 진짜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제주도민의 85%가 입도조(入島祖)의 후손
‘육지것’과 ‘입도조(入島祖)’
이 두 단어는 모두 제주에 이주해 온 이주민을 부르는 전래어. 물론, 이는 제주가 섬이라서 붙은 말이다. ‘육지것’은 원제주인이 새로 이주해 온 분들에 대한 배타성의 언어. 하지만, 필자는 제주섬에 ‘육지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주민’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오랜 옛날부터 그 래왔듯이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보듬고, 제주섬의 생태를 사랑하고 뿌리 내려 나갈 ‘입도조’만 있다고 생각한다. ‘입도조’는 결국 새로운 ‘제주인’이며, 제주미래를 함께 개척해나가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이주민에서 입도민으로
‘입도조’는 당대에 제주섬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더 정확히는 어떤 성씨가문의 본관이 같은 계열의 선조 중 제주에 가장 먼저 입도하여 정착한 선조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제주에서만 쓰이는 족보용어이기도 하다. 입도한 지역에 따라 육지부의 용어와 다르게 쓰이는 씨족성의 본관명도 따로 있다 이를테면 조천 김씨 김해 김씨 신촌 . , ( ), 홍씨(남양 홍씨), 애월 문씨(남평 문씨), 곽지 박씨(밀양박씨) 등 족보에 기록된 본토의 본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만 통용되는 입도본관명들이 있다. 이러한 입도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제주섬에 정착해왔는데, 특히 조선왕조 500년간 원악유배지로 제주가 이용되면서 유배객으로 와서 정착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은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입도조의 후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용어는 이주 정착해 제주섬 주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정체감’을 지닌 주민들이 ‘불리는’ 또는 ‘스스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제주의 토성(土姓, 그 지방에서 태동된 성씨)이라 불리는 ‘고(高,) 양(梁,) 부(夫)’ 세 성 씨를 빼고 나면(이도신화에 근거했을 때의 이야기) 제주도민은 사실 모두가 ‘입도조’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제주도에 이주민은 따로 없는 셈이다.
오늘 이 섬에 정착한 ‘입도민’이냐 500년, 300년 전 먼저 정착한 ‘입도민’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총 286개, 제주도 내에는 224개 성씨가 분포
이는 제주도가 조선왕조 500년간 유배지로 각광받았던 역사의 유산이다.
이 중 제주의 토성인구수는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고씨 4만 5천여 명, 양씨 3만 7천여 명, 부씨 7천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 합치면 89,000여 명으로 현재 600,000명을 엊그제 돌파한 인구수 대비 15% 정도 된다.
그러니까 탐라국의 후예들이며 이 섬의 연고권자들인 삼성씨도 이제 제주도에서는 소수자인 셈이다.
그렇게 보면, 제주는 ‘육지것’들의 섬이 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육지것’과 ‘섬 것’의 경계는 이미 중요한 변수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육지것 차별이니 하는 볼멘소리를 많이 듣는다. 물론 당연히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 허나 그 정도의 선이주민과 후이주민의 차이, 연고권과 피연고자의 차이마저 차별이라고 한다면, 어디 간들 다르겠느냐는 질문을 되돌릴 수밖에.
최근 4년 동안 제주로 정착한 이주민들이 4만1천여 명
이는 지난 20여 년 만에 보기 드문 인구증가다. 인구 50만의 시대에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인구정체에다 한때는 인구 유출까지 일어나다가 지난 8월 이후 인구 60만의 시대로 진입했다. 50만에서 60만으로 바뀌는 데 26년이 걸린 셈이다. 2009년까지 감소하던 인구추세가 2010년 말부터 증가세로 돌면서 2011년부터 2013년 8월까지만해도 1만 4천 명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현재 4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는 제주의 인구 증가의 역사에서 급격한 이주의 기록이다. 적어도 최소 1만 여 명의 입도민 가족이 정착한 셈이다.
- 2014년 제주인구는 621,550명으로 이중 남자 312,701명 여자 308,849명이다.
다우다습의 섬
제주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다우지역이며 최다습지역
제주도의 강수량은 연편균 1300~1700mm로 전국 최다우지역이다.
특히 성판악 등 한라산 고지에는 하룻밤에 1000mm를 쏟아 붇기도 한다. 동서로 나누어 볼때 섬 동부권이 서부권보다 월들이 강수량이 많으며, 지역별로는 제주산남동부지역이 가장 많이 내린다.
또한 습도가 가장 높은 다습지역이기도 하다. 이는 바다를 끼고 있는 양성기후의 특징이기도 한데, 연평균습도는 70∼80%로 서부지역이 77%로 가장 높고, 북서부지역은 73%와 75%이며, 남부지역은 70%로 가장 낮고, 지역 간의차이는 6% 이내다. 제주섬의 습도는 한반도내륙지방인 서울 등 중부지방보다는 5~10% 정도 더 높다. 하절기 제주도의 습도는 최소한 80% 이상이므로 상당히 습한 기후를 보인다.
제주의 마을 신당 중에는 ‘일뤠당(七日堂)’으로 불리는 신당(神堂)들이 있다.
이 당들은 제일(祭日)이 7일자에만 있는 당들이다. 즉, 7일, 17일, 27일에 다니는 신당이기 때문에 ‘일뤠’, 즉 ‘이렛당’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당에만 올리는 독특한 제물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삶은 달걀’이다. 왜 일뤠당에는 삶은 달걀을 제물로 올릴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바로 이 당신이 ‘치병신(治病神)’이기도 하기때문이다. 즉, 일뤠당신은 병을 고쳐주는 신이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병이 나면 이 당에 제물을 바치고 병이 낫기를기원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많았던 것이 피부병이었는지, 일뤠당신은 피부병을 고쳐주는 신으로 받들어진다. 이는 바로 제주의 습한 기후 때문에 생겨난 신앙행위인 것이다. 신앙민들은 삶은 달걀처럼 매끈한 피부가 되게 해달라고 당신께 빌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당들은 대부분의 마을에 본향당과 따로 조성되어 있거나, 본향당 자체인 경우도 있어 섬 전역에 골고루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제주도 전역에서 도민들은 습한 기후 때문에 , 곤욕을 치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제주사람들이습한 기후 때문에 얼마나 피부병을 앓았으면, 이렇게 피부병을 고치는 신께 바치는 제물마저 독특하게 발명되었을까싶은 것이다. 또한 제주에 정배되었던 많은 유배객들의 서찰과 문헌 속에 제주의 습한 기후와 이로 인한 질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이 남아 있어, 섬의 기후환경은 과거에도 이주민들에게 상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제주의 유배객 중 당연 최고의 유배객으로 이름 높은 추사체의 대가 완당 김정희는 제주에 9년간 유배생활 하던 중 풍토병으로 늘 고생하여 그 고통을 편지마다 호소하였는데, 사촌형인 김교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늘상 고루하고 둔한 데다가 갑자기 피풍증(皮風症)을 얻어, 온몸에 비늘처럼 반점이 생겨서 가려움을견딜 수가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예전에 비올 때는 잘 자던 그 잠까지도 이제는 이룰 수가 없으니,이것이 가장 걱정거리입니다.(유홍준, 《완당평전》에서 인용)”
라고 하여 제주섬의 습한 기후로 인한 피부병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추사는 9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특히 절망스러운 유배기간 내내 노구를 이끌고 제주의 풍토와 마주 싸워야 했다. 또한 이러한 풍토병, 그중에서도 습기로 인한 피부병은 제주를 오갔던 많은 유배객들이 반드시 겪었을 유배기간의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유배객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섬에 살기 위해 스스로 찾아 온 이주민들은 이제 이런 섬의 풍토, 즉 바람과 해풍에 실린 비릿한 갯내음의 감각을 익히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 정주하기로 한 이상, 이 느낌이 섬의 맛이고, 섬에 사는 섬사람 특유의 감각임을 즐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주해 오신 분들의 고통이야 그렇다지만,
제주섬의 갯것이마을, 즉 해촌마을의 정주민들은 상황이 다르다. 즉, 제주에서도 해촌의 주민들, 즉 바다를 생업의 현장으로 삼았던 주민들은 ‘보재기(포작인의 방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섬기후에 적응한 이들로 이들에게는 갯내음의 비릿함이 태생적인 것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이 섬의 주민들의 평균수명은 전근대시대인 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연령이 평균 8,90에 이르렀다. 여자들은 오죽 했겠는가? 소위 장수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곳이 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문명의 이기로 유배객들이나 입도조들이 겪었던 습기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문화다양성의 보고(寶庫)
국어학자인 ‘김순자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제주섬의 ‘방언’,즉 ‘제주어’는 단일하지 않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하여 크게 4개의 권역으로 언어의 분포가 특성을 달리한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행정체계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축적된 결과로, 고려시대 제주는 동서도현(東西道縣)체제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삼읍체제로 500년간을 이어왔다. 즉, 제주의 방언은 바로 이 고려시대 동서도의 구분과 조선시대 삽읍체제를 포개어 놓은 것처럼, 4개의 하위 방언권으로 등어선(等語線)이 구획된다. 즉 ① 제주도 동북방언(조천~구좌/우도) ② 제주도 서북방언(제주시~한경/비양도) ③ 제주도 동남방언 (서귀포~성산) ④ 제주도 서남방언(중문~대정/가파도, 마라도)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표준어 ‘쥐’가 제주도 동남부지역에선 ‘중이’, 나머지지역에선 ‘쥉이’로의 변화상을 보인다는 점이다.이 좁은 섬에 사물을 지칭하는 말 한마디가 그리 다르겠냐고 하겠지만, 가령 제주의 특산물로 유명한 ‘옥돔’의 경우도 서귀포시 동부권에선 ‘솔라니’라 부르고 다른 지역에선 ‘생선’, ‘오토미’ 등으로 불린다. 같은 섬에서도 동부냐 서부냐에 따라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후 역시 섬의 북부와 남부가 다르다. 이는 1950m에 이르는 한라산의 높은 고도가 기후의 차이를 만들어내 그 여파로 단축의 남북과 장축의 동서가 각각 다른 풍토를 이루기 때문이다. 제주의 언어 역시 이러한 자연환경을 바탕에 두고, 고려시대 동서도현체제와 조선왕조 500여 년간 고착된, 즉 제주 대정 정의의 1목 2현(1牧 2縣) 삼읍(三邑)체제라는 인문적 요소에 의해 문화권의 차별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작은 섬일지라도 그 속에서의 문화는 독특한 다양성을 보여준다. 제주섬이라는 하나의 공간 속에 각기 다른모습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소중하다. 하지만, 섬의 문화는 슬픈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선택과 배제, 그에 따른 또 다른 소외의 현장 말이다.
실명사회(實名社會)
제주도는 실명사회다.
지역이 협소하고 인구가 적어 가능한 일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옆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다고 할정도로 주민들 간의 이격거리가 짧았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도 세 사람만 건너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의 고리를 찾을 수 있는 게 제주사회였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인구증가와 사회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그렇다고 실명사회의 특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표현에 서툴다.
즉,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보다는 남의 견해에 묻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분명,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후유증일 경우가 많지만, 더욱 크게는 좁은 실명사회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주장이나 본질을 쉬이 내세울 수 없는 불편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조는 지역사회의 비판문화의 부재로나타나 건강한 비판정신이 발붙이지 못하고, 또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담론 형성을 크게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즉, 좁은 사회의 인간관계는 결국 학연 지연 등의 사적인 관계들이 공적 관계를 저해하는 요소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위 궨당문화라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육지부도 . ‘ ’ . ( 이런 혈연 지연에 관한 만만치 않은 전통을 갖고있다. 즉, ‘우리가 남이가’ 주의가 그것이다.) 궨당이라는 것은 바로 혈연적 친연성을 일컫는 제주어인데, 이 말의 의미가 나쁘게 확장되어 제주의 좁은 지연·혈연·학연의 관계가 현실정치의 인맥으로 작용해 궨당정치, 조문(弔問)정치,부조정치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궨당주의는 결국, ‘묻지마 선거’가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명사회에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실명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은 전근대시대부터 공동체적 안전망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앞의 ‘궨당주의’도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희박한 제주섬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대자연의 재해 등에 공동체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에서 비롯되었다. 아니, 애초에 상호부조의 진화론적 발전은 거친 인간사회의 발전방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다만, 섬이라는 격절성과 좁은 공간적 특성 등이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전통을 타 지역보다 훨씬 오래 잔존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공동체적 대응을 위한 항시적인 관계가 궨당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수눌음’이라는 협부(協扶)문화를 만들어 냈는데, 육지부의 품앗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등가형교환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수눌음 문화의 전통은 제주섬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 공동체적으로 함께 해결하는 사회원리였다 이러한 . 수눌음 문화는 제주사회 전체의 문화적 특성 중 가장 범위가 넓으며, 가장 주요한 사회운용원리로 기능해 왔던 전통이기도 하다. 제주의 자연마을에서는 아직도 이 수눌음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알드르 보재기 웃드르 촌놈들의 마을
제주도민들의 생활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고구마 형상의 섬 전체에 걸쳐 고도에 따라 생활문화의 특질이 달라 진다는 점이다.
즉, 섬의 고도에 따라 바다와 연한 마을들인 해촌(또는 포촌)은 반농반어, 양촌은 반농반목, 산촌은 반목화전수렵으로 생업이 달라진다. 이로 인해 그들의 문화나 규범 역시 차이를 보인다.(우락기) 마을의 분포규모로는 해촌과 양촌이 가 장 많고 산촌은 아주 규모가 작다.
제주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주해 온 것으로 보이는 해촌마을은 방사형의 섬을 에둘러 전역에 존재한다. 각 마을과마을의 바다는 마을이 연접하는 곳을 경계로 공동체적 소유관계가 뚜렷하다. 그에 따라 바다에 대한 입어권도 마을에 속해 있다. 일례로 한 마을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 그 처자는 부군의 마을바다에서는 물질이 가능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마을의 바다에는 들어갈 수 없다 반대로 이혼하여 마을로 . 돌아오면 다시 자기 마을의 바다에 대한 입어권을 회복하게 된다. 이처럼 제주의 바다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으로 관리되어 왔다. 또한 바다자원의 남획을 막는 공동체적 어획윤리가 작동하여 자연친화적 생업을 꾸려 왔다.
구분 |
해촌(海村, 浦村) |
양촌(壤村) |
산촌(山村) |
coastal habitats (해안마을) |
plains habitats (평원마을) |
mountain habitats (산간마을) | |
생업 |
어업, 나잠 |
농업, 목축 |
목축, 수렵 |
주민특성 |
선주도민(포작) |
유배, 이주 |
선주도민(사농바치, 테우리) |
양촌과 대립 |
해촌과 대립 |
| |
(Hall, R. Burnett /우락기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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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내지의 평원지대의 마을들인 양촌은 넓은 토지를 소유한 관계로 전통적으로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생업을 삼아왔다 이 마을들은 양질의 토지가 분포되어 있어 농업생산력이 . , 해촌에 비해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축사육에 있어서도 광활한 내지 평원과 목초지대에 속해 있어 해촌이나 산촌에 비해 훨씬 용이했으므로 타 유형의 마을보다 부유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유교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들이기도 하다.
제주의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생업인 어로와 반농문화는 농업과 목축으로 이루어진 양촌 또는 산촌들과의 문화적 대립양상도 보였는데, 이는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즉, ‘알뜨르 보재기 웃뜨르 촌놈’의 문화대립이 그것이다.
알뜨르, 즉 해촌의 주민들은 양촌산촌의 주민들이 바다의 생리를 알지 못하기에 웃뜨르 주민들을 촌놈이라 비하했고, 웃뜨르마을의 사람들은 해촌주민들을 바다일밖에 모르는 무식자라 해서 ‘보재기’라고 불렀다. 보재기란 포작인(捕作人, 전복 따는 사람)에서 비롯된 방언인데, 이는 해촌주민을 비하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러한 위아래 동네의 대립은 오랫동안 이어진 제주의 전통이기도 하다.
특히 반촌의 분포가 많았던 양촌지대에는 제주에 유배되어 정착한 이들의 집성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문서에는 밝았으나 제주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였다.
또한 해촌민들은 제주의 환경에 대한 지식은 밝았으나 소위 유교문화의 지식은 전무했다. 그러므로 이런 문화대립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물자의 교환과 소비라는 측면에서 이들 마을은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적 구조이기도 했다 즉 해촌은 양촌산촌에서 또는 역으로 . , , 서로 생산하는 물자가 달랐기에 상호 물물교환에 의해 의존적인 경제생활이 이루어졌다.
제주도에서 정주(定住)관습은 크게 동·서로 나뉜다.
특히 제주시 구도심권의 동·서촌사람들의 정주관습은 중앙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뉜다. 즉, 동촌사람은 중앙로를 기점으로 동쪽인 일도동과 건입동 권역에, 서촌사람은 중앙로를 기점으로 삼도동과 용담동 권역에 모여 산다. 이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대부분 지켜지고 있는 공간관습이기도 하다. 최근 신시가지로 들어선 서쪽의 노형동과 동쪽의 화북·삼양동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여기에는 연고지와의 교통편의와 왕래의 편의에 의한 필요성이 우선적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동·서 정주의 편향성은 과거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바가 크다.
그러한 연원의 유래는 동·서촌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의 차이에 근거하는데, 과거 조선시시대 제주성을 중심에 두고정의현을 중심으로 동촌권, 대정현을 중심으로 서촌권의 문화적 역사성을 갖고 있다. 서촌에 비해 동촌의 경우 문화적으로 좀 더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신촌·조천권이 유림지대였던 데 반해, 조선말 민란의 진앙지가 대부분 대정현을 중심으로 한 서촌권에서 일어났다는 점1)에서 서촌의 경우 동촌에 비해 개방성·진취성에 차이가 있다. 종교적으로도 동촌권이 아직까지도 무속문화의 중심지라면 외래종교인 , 기독교·천주교의 경우 서촌이 훨씬 발달해 있다. 과거 혼인에 있어서도 동·서촌의 문화적 거부감이 존재하여 6,70년대까지만 해도 동·서촌 간의 혼인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주문화의 주역들은 역사적으로는 양촌인들일지라도 문화적으로는 해촌인들이었다. 그들이 배를 부리는 기술, 바다라는 위험한 자연환경에 대해 세대를 건너 축적된 지식이 교역과 어로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주섬사람들에게 원양(遠洋)은 해양유목의 평원이었으며, 근해는 양식을 얻는 경작지였다. 제주도는 한반도에 부속된작은 섬이지만, 제주를 중심에 두고 지도를 거꾸로 돌리면, 대해에 가장 멀리 돋아 있는 용의 발톱 같은 형국을 이루는 해양문화의 첨병지(尖兵地)이며, 해중도(海中島)이기도 하다. 과거 고대에 있어서 바다는 그 자체로 문명과 자연의실크로드였다. 특히 섬이 지닌 한계성, 즉 물산의 교통 없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은 스스로 바다를 교역의 교통로로삼아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섬주민들에게는 대륙과의 통교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제주도 역시 고대 탐라시대부터 중국대륙, 한반도, 일본열도, 동남아지역의 고대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물산을 교환했다. 제주인들에게 바다는 곧 세계로 열린 교통로였으며, 또한 해산물의 보고인 경작지이기도 했다. 일명 ‘두무악(頭無岳)’이라고도 불린 제주의 해양민들은 바다를 무대로 삼았기에 용맹했고, 누구보다 바다길과 바다의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좁은 섬에서 각축하기보다는 대해와 외해를 넘나들면서 해양을 유목했던 해양유목민들이었다.
바다를 건너는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인 제주의 배를 보면 해양교통을 , 위해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탐라배(후에 덕판배로 불림)가 중요한 수단으로 쓰였으며, 근해의 해상어로를 위해서는 아직까지 전해지는 테우가 그 역할을 맡았다.
살암시믄 ‘ 살아지기’ 위한 오랜 문화전통 제주섬의 ‘무풍(巫風)’
제주섬의 오래된 종교는 무교(巫敎)다. 제주의 전통적인 기층신앙체계는 무속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현재 400여 개가 넘어서는 신당들이 섬 전역에 골고루 분포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전근대시기에 제주의 종교는 19세기 유교가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이전까지는 모두 무속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도내에서 유일하게 당제와 포제가 함께 이루어지는 즉, 마을제이면서 당제로 치러지는 곳이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이다. 이 마을은 이미 남성 줌심의 유교식 제의인 포제와 여성 중심의 무속제의 인 당제로 분화되기 이전의 마을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 통해 과거 제주의 모든 마을의 신앙은 당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신당들 중 마을제를 모시는 당을 본향당이라고 한다. 본향당은 그야말로 마을의 근본이 되는 신당인 것이다. 대부분의 마을 설촌의 역사와 본향당은 역사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설촌한다는 것은 곧 그 마을의 수호신인 마을신을 모시는 일이요. 마을신이 깃들어 있는 성소가 본향당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향당엔 1년에 4차례의 정기적인 제례가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1년 4번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당제(堂祭)로서, 음력 정월 열사흘날(아랫당은 열나흘날) 치러지는 신과세제는 세속의 정월명절과 그 의미가 같다. 또한 음력 2월 열사흘날(아랫당은 열 나흘날) 치러지는 ‘영등굿’으로서 한 해의 농사가 잘 이루어져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풍농굿이다. 다음 세 번째 제의는 음력 7월 열 사흘날 치러지는 ‘마불림제’로서 이는 장마가 끝난 뒤, 당의 ‘습한 기운’ 즉 마(제주에서는 눅눅하고 곰팡이가 피는 듯한 습한 기운을 보고 ‘마피었저’라고 하는데, 사전에도 마에 대한 다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를 바람에 불리어 성소를 청결하게 하는 청소제의(淸掃祭儀)의 하나로 제주의 여신당에 올리는 신의 옷을 말리는 ‘신의청소제(神衣淸掃祭)’ 또는 백중날 주로 치러진다고 해서 ‘백중제(百中祭)’라고도 불린다. 또한 음력 10월 13일에 올리는 ‘시만곡대제(新萬穀大祭)’는 추수감사제이기도 하다. 일년 농사를 통해 얻은 햇곡식을 신에게 올리는 제의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풍습도 대부분 쇠락해져 년에 정기적인 당제를 , 1 치르는 당도 많지 않으며, 또한 그 당제를 제대로 된 선굿으로 하기보다는 심방 1인만 장고를 두드리면서 비념하는 정도의 약식 제의인 ‘앉은제’를 하는 당도 드물어졌다. 또한 현재 제주도의 어떤 당들도 4당제를 제대로 치루는 당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의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살암시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섬의 척박한 환경과 변방의 고통스런 역사에 휘둘린 제주민중의 한이 서린 말이기도 한데, 그런 와중에서도 삶은 지속되는 것이고, 모진 명줄은 쉬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나온 지혜어린 말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살아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신앙이 바로 제주의 무풍(巫風)이며 무속인 것이다. 삶의 고비마다 힘들고 고난에 찰 때마다 제주의 여인들은 너나 없이 마을의 신당과 작은 당들에 가서 신들에게 정성을 올리고 가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또한 해녀들은 물에 들기 전 갯당에 가서 물질을 할 때 안전하게 해줄 것을 빌었고, 선주들이나 어부들은 돈짓당에 가서 용왕신께 선박의 안전항해를 기원했다.
문전제와 조왕제가 별상(別床)되어 있는 제주의 ‘싯게’
고인이 별세한 기일에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를 방언으로 ‘싯게’라 하며, 3일재계하여 4대 봉사하는 것이 원칙이다. 기일 전날 근친 부녀자들이 모여 제물을 준비하고 유교식 제례의 원칙을 따르는데 다만 모사(茅沙)가 다르다. 접시에 띠 끝부분 3개를 10㎝ 정도로 끊어 묶어 걸치고 그 위에 고사리채 세 개를 걸쳐 놓아 모사로 대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 감귤 이파리를 따다가 접시에 놓아 모사로 쓰는 곳도 있다. 제주 특유의 제사법으로 문전제상이 있다.
이것은 작은 상에 선조 제상에 올릴 제물 각종을 올리는데, 상이 좁으므로 제물을 몇 접시에 종류별로 겸하여 올린다. 문전제상은 선조제상 옆에 놓아둔다. 자시(子時)가 되면 문전제상을 상방 전면 문 쪽에 내어놓아 단헌단작(單獻單作)으로 재배, 잡식한 후 이 상을 부엌으로 넘기면 주부가 잡식하여 조왕에 고사를 지낸다. 이것은 가신 중 문신과조왕을 위한 토속적인 신앙이 제례에 습합된 것이다. 지방의 서식도 가문에 따라 다소 다르니, 배위의 본관을 밝히는 데도 있고, 신위의 표시를 양위의 중간 위치에 한 줄로 ‘신위’라 쓰는 데도 있다.
남녀 모두가 무속식 제의를 지내다가 유학(儒學)이 들어와 남성 사회에 보급됨에 따라 남성들이 모든 조상 숭배 제의와 그에 관련된 제의를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조상 숭배 제의의 중요한 것은 제사(祭祀)·각종 명절 때의 차례·묘제 등을 들 수 있다. 제사는 조상의 기일(忌日) 자시(子時)에 행하는 제의이고, 명절의 차례는 설·한식·단오·추석 때의 제의이며, 묘제(墓祭)는 5대 조부모 이상의 제의를 청명(淸明) 이후에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의이다.
제법은 집안마다 가문가례(家門家禮)로 집안마다 다르다. 이는 제주의 유교식 문화가 정착하는데, 집안마다의 입도시기의 차이, 각 지방의 제례법이 혼재되면서 도입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차려야 하는 제사음식으로 육지부와 다른 것은 채소 중에는 고사리를 으뜸으로 쳐서 반드시 준비하여 위로 올린다는 점과 또한 상어고기도 으뜸으로 쳐 해촌에서는 이를 주로 산적으로 올린다. 생선류는 육지부는 굴비를 주로 올리지만, 제주에서 옥돔을 으뜸으로 쳤다. 물론 조기도 일부 생선으로 올리기도 했다.
제주의 제사는 끝에 잡식을 하는 데 특색이 있다 제사에 올린 모든 . 음식을 조금씩 뜨거나 끊어서 숭늉 그릇에 넣어 이것을 지붕 위에 올리는 것이다. 제사 다음날 아침 까마귀가 와서 그 던진 음식을 먹으면 제사가 잘 되었다고 생각 한다.
한편 문전제를 지낸 문전상이 부엌으로 넘겨지면 주부는 이를 받아 그 상에 올려진 모든 제물을 조금씩 뜨거나 끊어서 사발에 넣고 부엌의 솥 뒤에 숟가락으로 떠 던진다. 문전제가 집안을 지켜 주는 문신(門神)에 대한 제라면 이것은 부엌을 지켜 주는 조왕신에 대한 고사이다. 이렇게 하여 제의가 끝나면 참석자 일동이 앉아서 음복을 하는 것으로 제 사는 모두 끝난다. 문전신이나 조왕신은 모두 무속제의(巫俗祭儀)에서 위하는 신인데. 조상 숭배가 유교식으로 바뀌어도 이 중요한 가신(家神)만큼은 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유교식 제사에서도 위하는 것이다.
문전[門神]의 할아버지는 해만국, 할머니는 달만국, 아버지는 남선비, 어머니는 여산부인이며, 一門前은 똑똑하고 영리한 녹디생이다. 남선비와 여산부인은 일곱 아들을 두어서 먹고살기 위하여 무곡(貿穀, 시세차익을 이용한 곡식장사)장사를 하려고 남선비는 오동나라 오동고을에 갔다. 오동나라 오동고을에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있는데 간악해서 남선비의 돈을 긁어낼 계책을 세웠다. 작은부인의 악행으로 본부인은 죽고, 아들들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막내아들 녹디생이의 지혜로 모두 응징한다. 그 결과, 남선비는 겁결에 올래로 내닫다가 정낭에 목이 걸려 죽어서 주목지신(柱木之神,정낭을 걸치게 올래 양쪽에 세워 놓은 기둥 정낭신 정살지신 정낭의 )ㆍ , ( 신으로 정낭을 정살이라 함)이 되었다. 계모는 벽을 뜯고 그 구멍으로 변소로 도망쳐서 쉰댓 자 머리로 목매어 죽으니 변소신인[厠道婦人]이 되었다.
일곱 형제는 어머니가 누웠던 자리의 흙을 모아서 시루를 만들었다. 여섯 형제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 주먹으로 찍으니 여섯 구멍이 터지고 녹디생이는 화를 발칵 내며 발뒤꿈치로 한번 찍으니 가운데 큰 구멍이 생겼다. 그때 낸 법으로 시루구멍이 일곱 개다.그 때 이후로 오늘날도 명절ㆍ기일제사 때에 문전제를 지내고, 그 제사의 제물을 조금씩 떠서 지붕 위에 뿌리고, 그제물을 조금씩 떠서 어머니이신 조왕에게 올린다. 또한 조왕과 측도부인은 처첩 관계여서 부엌과 변소는 멀수록 좋으며, 변소의 것은 돌 하나, 나무막대기 하나라도 부엌으로 가져오면 좋지 않다는 말이 생겼다
돗통시이야기
지금은 민속촌에 가서야 볼 수 있는 돗통시문화가 있었다 당연히 . 필자도 보리짚을 비비면서 도새기(돼지의 방언)와 전쟁 같은 볼일을 끝내야 했던 유소년기를 보냈다. 어떤 생태학자가 이 돗통시문화를 보면서 ‘리사이클링의 극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돗통시문화는 사실 제주도만의 문화는 아니다. “북으로는 회령, 양구, 통영, 거창, 합천, 광양 등지, 내몰골서부, 산동성 전부, 산서성 동중부, 만주 용정, 류큐 전부, 비율빈 전역(석주명)” 등이다. 그러나 제주도가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는 인간의 1차분을 다시 돼지사료로 먹여 돼지의 2차분을 지력을 높이는 퇴비로 사용했다. 결국 인간이 남긴 음식쓰레기를 건사하는 한편 생산량이 부족한 농토를 기름지게 했고, 돼지는 대소사에 쓰이는 훌륭한 단백질공급원이 되었다. 제주에서의 잔치는 돼지를 잡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즘 넘쳐나는 음식물쓰레기를 보면서 리사이클링의 과학을 자연가치를 바꿔냈던 기술공학의 유용함처럼 이를 다시 적용할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로 또 같이 사는 가옥구조
제주의 가옥구조는 통상 번듯한 안채인 안거리와 바깥채인 밖거리가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안팍거리가 다 따로 정지(부엌)이 딸려 있다. 이는 2대가 한 울타리에 살면서 생활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개체적대동주의(송성대)의 소산이다. 핵가족시대의 세대 간 소외와 사회안전망의 해결책인 것이다.
육지부는 보통 장자가 본가를 지키지만, 제주에서는 막내가 본가를 지킨다. 이는 제주의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 온 것이다. 즉 성장하는 자식부터 분가를 시키기 때문이다. 한입이라도 덜 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결국 막내가 성장하고 가족을 꾸릴 때가 되면 부모는 밖거리로 나앉는다. 물론 이 때도 식사와 생활은 따로 한다. 부부 중 한 사람이 타계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분리된 생활을 하면서 집안의 대소사 때에나 개입하는 정도로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부모 는 결코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제주의 신화인 문전신화는 이런 가옥생활의 반영이기도 하다.
한국 최고의 이혼율- 여권주도의 역사
우리 사회는 지금 혼인한 10쌍 가운데 3쌍이 이혼하는 고이혼율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일차집단인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이혼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전국의 이혼율 통게를 보면 인천이 10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고, 제주는 이혼율 2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데, 인천에 빼앗긴 10여 년을 제외하면 대부분 제주도가 수위를 달렸다. 가족에 관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가 져왔는데, 1946년 통계부터 전국 평균이혼율이 6.0일 때, 제주는 13,9였으며, 1957년 전국이 2.5일 때, 제주는 11.3이었다. 제주도는 1980년대까지 가장 높은 이혼율을 기록했다.(이태영, 1969)
이에 대해 제주도가 왜 이렇게 높은 이혼율을 보일까 궁금했던 사회학자 권귀숙은 지역적, 문화적 특수성의 분석을 통해 접근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원인과 배경을 여성의 경제적 참여와 이혼의 상관관계를 통해 밝혀내고자 했다. 권 박사는 여기에 더해 그 당시 육지여성들과 비교했을 때 여성노동의 자율성이나 이동성 등의 성격이 이혼율과 연관이높은 것을 밝힌 바 있다.
“남녀의 권리는 분명히 경제력에 변행한다. 제주도에서는 여자가 생산하며 따라서 경제권을 가졌으니 남녀의 권리는 동등하다. 그래서 이혼·재혼의 풍이 강하고 따라서 그것을 그리 흠잡지도 않는다. 한림면, 협제리 같은 곳에서는 초혼의 부부는 불과 2할 밖에 안된다고 한다.(석주명, 1943~1945)
이혼율 통계가 시작된 1950년대, 60년대가 제주의 이혼율이 가장 높았는데, 특히 일제시기 잠녀들의 출가물질과 일본 오사카로의 도일임노동이 여성들의 경제적 자주권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가부장제적인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이혼하는 상황이 더 많았던 것이다. 1960년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66%인데 이는 전국 평균 28.4%보다 갑절이상 되는 참여율이다. 결국 경제적 자주권이 확보된 제주여성들의 여권이 그만큼 앞서있었다는 반증이다.
제주도는 사실상 여성에게 많은 사회적 역할이 주어졌다. 트기 조선시대 200년간의 출륙금지령동안 남자들이 담당했던 ‘포작(鮑作)’, 예청(女丁, 남정에 대응하는 여성의 군병역)까지 확대되고 여성의 역할까지 떠 맏는 상황이 지속됨),여기에 이혼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분위기가 굳이 감내하면서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제주가 여다의 섬으로, 일찍부터 잠녀생활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자주권이 보장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가 이혼율로 나타난 것이다. 여성의 사회참여율이 높아진 후의 육지부의 전반적인 이혼율의 상승하게 된 배경과 일치하는데 제주의 경우는 조선시대 때부터 이혼과 축첩이 빈도가 훨씬 높았던 것이다. 적어도 제주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당한 결혼생활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여권이 발달한 지역이었다는 점만은 인정할 수 있다.
수눌음
수눌음은 제주의 대표적인 공동체적 협부노동의 방식이다 필자는 . 수눌음을 수눌음이란 무엇인가? 분명 ‘수눌다’의 명사형이라고 나와 있는데, 수눌다가 무엇이라 딱히 언어학적으로 정리된 게 없다. 수눌다의 어원을 찾아보니 명쾌하게 정리된 것이 없었다. 제주어를 전공한 학자도 수눌다의 정확한 어원은 잘 모르고, 의미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유추해보면 ‘손을 쌓다. 즉 손노동을 보탠다’는 뜻이 아닐까? 작은 손들이 모여 눌을 쌓듯이 쌓아 올리면, 큰 덩어리가 되듯 사람들의 노동력을 보태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 쯤 되지 않을까? (제주어를 전공한 후배학자는 수를 늘어놓는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하는데, 너무 상상력으로 나가지는 말 것을 주문했다.)
수눌음은 섬의 환경이 준 삶의 지혜다. 토심이 1미터도 되지 않는 화산회토에서 농사를 한다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또한 인구수가 희박했던 제주도에서 토질 좋은 육지부에 비해 몇 갑절 노동을 감내해야 소출을 기대할 수 있 는 전작(田作)농업은 노동력의 밀도를 높여, 한 가족이 감당할 경계를 넘어선다. 결국 이러한 노동의 조건은 상호부조를 통해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마을 단위의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수눌음을 중심으로 사회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수눌음을 현대적 의미를 해석한다면 연대와 협동, 돌봄과 배려의 공동체적 사회안전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도 복지가 화두다. 그 말은 그만큼 복지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복지정책의 최전선에 ‘사회안전망’이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사회가 사회구성원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사회보장시스템일 터인데, 이 사회안전망이 구멍이 뚫리거나, 아예 자본주의로 전화된 이후, 시스템 자체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이다. 자살률 1위니 승자독식이니 패자부활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식의 우리사회에 대한 서술들은 바로 이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 승자독식의 악마적 자본주의와 비인간적인 게임의 법칙
○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험사회 전근대시대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인정’이라고 불렀던 사회정서 또는 관습이 바로 사회안전망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임, 전근대의 시기, 가난과 전쟁, 수탈과 저항의 시대에도 우리 사회는 튼튼한 그물망을 갖추고 있었 이러한 제주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시스템이었던 수눌음 문화는 언제부터인가 , ?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사회학자 김창민 은《환금작물과 제주농민문화》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수눌음의 약화배경을 찾았다.
‘현금수입을 위한 환금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대표적인 것이 감귤농업이다. 감귤재배가 시작되면서 토지 이용방법이 바뀌게 되고, 노동의 형태 역시 바뀌게 된다. 생계경제하에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력 동원이 가족노동력과 수눌음으로 특징 지워진다면, 환금작물경제 하에서는 가족노동력과 임노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 시기는 바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즉 한국사회 전반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제주사회의 안전망이자 사회경영의 중요한 시스템이었던 수눌음 문화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욕망의 무한증식과 상품의 대량생산과 이윤추구의 극대화로 상징되는 한국사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소위 착한 자 본주의의 작은 진지들이 필요하며, 이 진지들의 연계망 속에서 공동생산 공동경작 공동이윤의 분배라는 마을 공공영역의 경제분야를 확대시켜나가는 한편, 대량생산을 통한 이윤추구의 길이 아닌, 다른 방식의 농사나 마을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노력들이 이루어진다면, 수눌음문화는 다시 부활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견해 본다.
강의가 재미 있어 미루어진 점심은 고등어 조림 정식이었다.
식후 저지 곶자왈 탐방과 현대미술관 방문이 있었다.
새우란 출처: blog.naver.com/pshadm/220346535933 블로그 운영자가 5월에 보았던 새우란과 이번 탐방길에 내가 본 새우란 저지 곶자왈 방문은 아무래도 봄이 제격인듯 하다. 앞서 언급 했듯 곶자왈이란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제주도만의 독특한 지형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나무, 덩굴식물, 암석 등이 뒤섞여 수풀처럼 어수선하게 된 곳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사람의 발길이 잦아졌는지 다소 산만했다. 모두들 모기에 물려 윤선옥 가이드가 물파스를 발라주느라 수선을 떨기도 했다.
2007년 9월 1일에 개관한 제주현대미술관은 제주시 서부권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내에 위치한 공립미술관으로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활성화 여건마련과 다양한 문화예술 수요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예술 향유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제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돌과 만난다. 제주 지킴이이자 상징인 돌하르방은 마을의 경계와 지킴이로서 기능했다.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인상 깊었던 몇 작품들
권영술 갈망(2013)
Zhang Yuxue 위쒀에 고원사람들 -화선지에 채색 (2014) Shi Wen 스원 잃어버린 -화선지에채색 (2011-2014)
박성진의 억새(2010)
저지리에 있는 해발 390 m 저지오름으로 향했다.
오름은 섬 곳곳에 솟아 있는 봉긋한 봉우리들로 한라산의 기생화산을 일컫는 말이다. 제주에는 360여 개가 넘는 오름 (Oreum)이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화산폭발 당시 백록담에서 용암이 솟구쳐 오르다 옆으로 가지를 뻗어나간 작은 분화구들을 일컫는다.
저지오름은 서부지역 대표 오름으로 2007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 (대상)을 수상한 곳으로 나지막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일반적 오름과는 달리, 저지오름은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원형 분화구를 갖춘 오름이다.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한림일원을 조망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협재해수욕장을 거쳐 비양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역광 때문인지 감잡을 수 없었다. 산정에는 닥나무 군락이 있다.
저지리는 '제주 올레' 마지막 13코스인 저지오름을 중심으로 수동과 중동 남동 명리동 성전동 등 5개동이 촌락을 이루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민 선진적 농촌이다.
올레길을 잠시 구경했다.
역시 돌담이다. 돌담의 매력은 뭘까 엉성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허나 이 엉성함은 제주에 허다하게 몰아치는 태풍 앞에서도 끄떡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멍 숭숭난 현무암처럼 제주 돌담은 빈곳이 많고 바람은 그틈을 통과하며 잦아든다. 돌담의 존재는 제주의 토양과 그 땅에 기대어 살아왔던 제주인들의 노력과 슬기의 산물이다. 돌밭에서 작물을 키울 수는 없다. 들어내고 들어내는 수많은 세월이 돌담에 쌓였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사진작가 고 고영일 선생이 1960년대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제주도의 해안마을은 온통 돌로 돼 있다.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리석 고영일 선생 추모사업추진위원회
돌담은 일차적으로 바람을 막았고, 말이나 가축의 농작물 훼손도 막았다. 나아가 밭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구분하여 다툼의 소지도 없앴다. 그렇다고 그 높이가 높은 것도 아니고 건너다 보면 댓거리 할 수 있는 담이다. 혹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돌담의 길이가 9천7백리에 이르러 흑룡만리라고도 한다.
제주 돌담은 제주답다는 인상과 기준의 시작이다. 돌담은 제주 경관의 형성에 있어 기본축이다. 세상 그 어떤 인공미가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돌담은 골목과 밭, 무덤을 넘어 바다에서도 보인다. 조수의 들고 남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바닷가 돌담인 원담도 제주의 모습이다. 그 돌담들은 하나같이 평화롭다. 제주가 사람을 불러들이고 머물게 하는 요소에는 돌담이 큰기여를 한다. 밭 가에는 흔히 삼나무를 심어 방풍수로 활용했다. 제주에서는 이 나무가 잘 자라 ‘쑥대낭’이라 부른다. 귤밭 주변에 많다.
이날 저녁에는 제주지역 시민사회단체 간부들과 같이 저녁을 나누었다. 제주의 현안과 연대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잔 더 , 일찍 잠들어 제주의 새벽을 누리고 싶었지만 허락치 않았다. 대신 원형은 목사와 운동가들의 장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안타깝게도 뚜렷한 답이 없는 현실이다.
마지막날 호텔에서 짐을 챙겨 나섰다. 제주 바다를 만났다.
원담도 보았다. 남해 죽방림처럼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로밥법이다. 헌데 그냥 쌓는 것이 아니다 안과밖의 차이를 두어 조수를 따라 물고기들이 원담으로 쉽게 들어오게 하고 나갈때는 직각으로 안이 파여진게 만듦으 인해 고기가 빠져나갈 수 없게 했다.
한라산이 조와 칸나 넘어 희미하게 보인다.
마을골목 담장은 이렇게 변신하기도 했다.
아마도 행위예술가의 집인듯 해안가에 몰려 온 잡동사니로 용을 형상화 했다. 기발하다.
해안선 끝에 방사탑(防邪塔)이 보인다. 방사탑은 자연석이나 석상을 세워 재앙을 막고자 조성했다. 방사탑은 쌓기 전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는다고 한다. 솥의 밥을 긁어 담듯 마을의 부귀를 염원했고, 뜨겁고 무서운 불길에도 무탈한 솥을 상징화하여 재난을 방비하기 위한 뜻이다. 한편 탑을 쌓는데 있어 첫 돌을 놓는 일은 대개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자청해서 그 역할을 맡았다. 허한 방위에서 나오는 살(煞)을 경계함에 있어 살만큼 살았다고 자부하는 노인들이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매(鷹)의 형상을 한 돌이나 나무를 깍아 꽂았다. 제주에서 매는 제주를 지키는 또 다른 상징이다.
제주에는 신당이 많다. 아이들의 성장과 건강을 돌보는 일뤠당 해녀와 어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돈짓당(갯당)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신의 장소가 있다.
수령 260년 팽나무가 마을언덕에 서 있다.
담장 넘어 빨래줄에 내걸린 갈옷들
마을 쉼터도 단정하다.
기념사진을 찍고
거문오름으로 향한다. 손두부로 만든 두부조림에 한창 꽃대를 올린
정겨운 풍경이다. 나도 머물고 싶었다.
두부집은 이 밭을 통해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거문오름은 분화구내 산림지대가 검고음산한 기운을 띤다고 하여 유래하며 지역에선 ‘신령스러운 산’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거문오름은 해발 456.6m의 분화구 형태의 산등성이다. 거문오름에서 바라보는 분화구는 제주 '7대 비경'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 비경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거문오름은 철저하게 탐방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루 400명만 출입하고 반드시 해설사가 따라 붙는다,
그리고 반드시 출입증을 받아 부착해야 탐방이 가능하다. 이 밖에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일테면
*무단으로 출입하거나, 출입증 없이 탐방 시에는 퇴장조치 및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처벌된다.
*앞트임 샌들(등산용 샌들) 착용 시에는 탐방이 금지된다.
*양산, 우산, 스틱, 아이젠 사용은 거문오름 훼손방지를 위해 금지된다.
*음식물 반입은 금지된다. 등이다.
거문오름은 조천읍 선흘리 및 구좌읍 덕천리 일대에 있다. 2005년 :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 제444호)지정되었고 2007년 : UNESCO 세계자연유산 등재되었다.
해발 456m(둘레 4,551m)거문오름은 용암동굴계를 형성한 모체로 알려져 있고, 분화구에는 깊게 패인 화구가 있으며, 그 안에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거문오름은 북동쪽 산사면이 터진 말굽형 분석구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다양한 화산지형들이 잘 발달해 있다.
제주도는 동서로 약 73km 남북으로 41km 타우너형 모양의 화산섬으로 1,950m 한라산이 섬 중심부에 솟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약 180만년전에서 천만년전까지 화산활이 일어났던 곳이다. 문헌에 따르면 약 1천년전 화산활동을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360여개의 오름과 땅속 160여개의 용암동굴이 존재한다.
제주도의 식물은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식물군과 중국과 제주도, 일본에 걸쳐서 분포하는 식물군, 그리고 열대, 아열대 기원의 식물군 등 다양한 기후에 자라는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또한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600m까지는 난대 상록활엽수림대, 해발 600m~1,400m는 온대 낙엽활엽수림대, 해발 1,400m~1,950m는 아한대 또는 아고산대 식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식물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아열대, 온대, 한대식물 등이 수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그 종류는 2,001종 (백두산 : 500여종, 지리산 : 1,000여종)에 달해 가히 식물의 보고라 할 만하다. 이중에는 8종의 천연기념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한라산 일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라산은 오랜 시간에 걸쳐 육지와 떨어져 있어서 원래의 종류와 약간 다른 아종(subspecies)들이 많다.
152종의 양치식물군 1507종의 종자식물 희귀식물 269종 구름체꽃, 구상나무, 한라개승마 등 특산식물 21종 멸종위기 1급 야생식물 나도풍란, 만년콩, 한란 등 멸종위기 2급 개가시나무,금자란, 매화마름, 솔잎란 등 이 있다.
거문오름의 식생은 조림된 삼나무숲, 낙엽활엽수림, 관목림 및 초지, 상록활엽수림 등 특징적인 4개의 숲으로 구분된다. 용암하도를 따라 다양한 함몰구가 발달한 덕에 독특한 생태적 입지를 자랑하며,난·온대식물이 공존하는 식생과 식물상을 보이고 있다.
이동통로는 테크나 야자수 나무껍질로 카펫을 짜듯 펼친 형태로 토양과 식생의 보호에 중점을 두었다.
용암함몰구: 연중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돼 겨울에도 울창한 숲 유지, 독특한 식생 구성하고 있다. 비가 내려 제대로 된 사진촬영을 기대할 수 없었다.
분화구 내 식생들
식재된 삼나무를 비롯하여 참식나무와 좁은잎천성과 나무, 합다리나무, 머귀나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센달나무, 아왜나무, 녹나무, 쇠당단풍, 꾸지뽕나무, 상산, 말오줌때, 너도밤나무, 때죽나무, 산유자나무, 곰의 말채나무, 예덕나무, 무환자나무, 누리장나무가 많이 보였다.
지피식물로는 탐라수국을 비롯하여 산수국, 나도생강, 죽대, 천남성, 백량금, 자금우 등을 비롯하여 콩짜개덩굴이 지천에 널렸다. 덩굴식물로는 계요등
용암굴이 붕괴되어 만들어진 용암함몰구에는 습도가 높고 암석이 많아 양치식물들이 많다. 주걱일엽이나 좀고등이 서식하고 있다.
화산탄: 거문오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색 암석으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가벼운 현무암의 일종으로 제주 사툴로 '송이'라고 한다. 이 송이들 중에는 분화구에서 공중으로 높이 던져져 회전하면서 굳어져서 고구마 모양을 띠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암석을 화산탄이라 한다.
숯가마터
역시 비는 활동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식물 찾기에는 방해가 되었다. 더이상 소득이 없을 것 같아 병풍바위 코스는 포기했다.
다시 제주공항으로 가는 차내, 첫날의 서먹함은 더이상 없었다.
제주, 가끔씩 나를 위해 올 일이다. 더욱이 이 섬에는 나를 아껴주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이번 제주 나들이에서 내 귀에 들어 와 앉은 제주 말 한마디. 살암시민 살아진다( 어떻게든 살고 있으면 살아진다) 그래 살아야 한다. 내일 다시 답이 궁하더라도 오늘에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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