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마지막 주말 고향 의령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궁류 벽계계곡이었다. 지난해 여름 애들을 데리고 마땅히 갈만한 곳을 찾지 못한채 전전긍긍하다 선택한 장소가 송산과 신촌 구간 유곡천변이었다. 아이들이 즐거웠 했기에 다시 의령쪽으로 잡되 텐트치기가 용이하고 아이들 물놀이 하기에 알맞은 장소로 궁류 벽계로 잡았다. 올해는 지난해 참여를 하지 못했던 인천 둘째에다 이모님과 삼촌까지 참여한 대가족이 되었다.
출처: 다음 카페. 독도사랑 등산마니아에서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까지는 이런 저런 말도 많았다. 준비시간이 짧은 것과 함께 역할분담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박이 더해지니 부담이 배가 된 것이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결국 목적지는 의령 벽계로 원점화 되었다. 새벽 5시 집을 나섰다. 예약제가 아닌 먼저 자리를 확보하면 텐트를 치고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야영장 입구는 이미 만원이었다. 계곡위쪽으로 20분 정도 올라가 적지를 물색하다 찾아낸 장소가 아래의 장소다.
무엇보다 애들 놀기에는 그만이라는 점에서 ... 준비한 물품들을 옮기고 텐트를 치자니 여름해가 골짜기기를 깨우고 들어 왔다.
조카들과 우리집 막내 신이 났다. 이날 저물도록 아이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능한 현장에서의 조리를 피하기 위해 음식은 주문을 했다. 밥도 고기도... 밑반찬 한 가지씩만 준비했다.
점심때가 되면서 뜨거운 여름해는 계곡마저 데웠다.
그늘을 찾아 이모님과 어머니가 폭포 아래로 이동했다. 이런 모습 참 오랫만이다. 자주뵈었으면 했지만 사느라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햇다.
뒤에 합류한 삼촌은 아버지와 무슨 긴한 말씀들을 나누시는지
그리고 다시 밥때가 되어
물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의 입맛과 체온을 고려하여 라면이 끓였다.
올여름 우리집에서 여름을 제일 잘 보내고 있는 막내. 이틀이 멀다 하고 캠프며 수영장,, 해수욕장이다. 덕분에 유년의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여름 내게 있어 고향은 뭔지, 그리고 휴가란 ? 사실 올여름 휴가는 없다. 걷고싶은부산에서 나온 이후 부산그린트러스트라는 공원.녹지 전문 민관협치기구에서 일하기로 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이다. 약 3개월 남짓한 시간. 처음엔 황당하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음 속에 드리웠던 감정들이 소멸되는 것 같다. 고약한 약이다.
고향이란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게만 적용되는 장소다. 어찌보면 우리집 아이들은 병원이 고향이다. 둘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다. 붙들고 있을 추억거리도 없거니와 친구며 남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고향의 산과 들 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지명사전을 뒤적이거나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단행본들을 구해다 읽었다. 그랬건만 나 태어난 집은 이제 허물어져 머물곳도 없다. 아무튼 이 골짝 벽계저수지란 것도 따지고 보면 80년대 중반에 들어섰다. 유곡천 언저리 들죽날쭉 했던 농지들도 그때 정리되었다. 보다 앞서든가 아니면 비슷한 시기 그러니까 1982년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던 우순경사건이 이곳 궁류에서 터지기도 했다. 하마 30년 전 이야기지만 그 사건은 의병의 고장 의령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로 남았다.
모 일간지의 머리글처럼 ◎ 한적한 시골마을서 광란의 참극/한밤중 수류탄 던지며 미친듯이 총질/8시간동안 4개 마을 공포의 도가니/젖먹이노인 등 56명 사망 34명 다쳐... 그래서인지 세계 100대 살인사건으로까지 기록되었다. 혹자는 1953년11월 의령 일원에서 토벌된 이른바 남한 빨치산 총책 이현상 휘하의 56명의 이영회 부대원의 악령이 부산 출신 우범곤(禹範坤)에게 빙의되어 살인마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우의 범행은 서울시경의 특별경비단에서 궁벽한 시골로 좌천된 뒤의 열패감에서 비롯된 우발적 사건이자 구조적 사건이었다. (참고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8275.html )
어쨌거나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다. 에나 의령은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던 사람들의 땅이다. 의병장 곽재우로부터 한말의 백산 안희제, 그리고 유신시대 조작된 인혁당사건으로 희생된 이수병같은 이가 태어난 땅이다. 망우당과 백산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수병의 존재는 의령사람도 잘 모른다. 분단시대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고, 이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일수도 있다.
그는 60년 말부터 학생운동에 관여, 그해 11월 경희대학교민족통일연구회를 조직하였다. 61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통전학련 지도부와 함께 검거되었다. 7년간의 옥고를 마친 뒤 변혁운동의 지도자로 남한 사회의 민족민주 운동을 위해 조직활동을 전개하던 중 나섰으나 74년 4월 긴급조치 제 4 호가 내려진 가운데 민청학련사건의 배후 주도인물로 지목, 검거되었고, 1975년 4월 9일 38살의 나이로 박정희 독재 권력에 의해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박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로 진보적이고 민주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간첩으로 잡아 넣었다. 주로 대학생은 민청학련으로 좀 나이든 사람은 인혁당 재건위로 거짓 조직도를 만들어 간첩으로 만든 다음 대법원 최종판결(1975.4.8)이 난 다음날 사형을 시켰다. 국제사법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유신시절에는 저질러 졌다. 결과적으로 이수병은 지난 2007년 무죄판결을 받았다.(민족연구소에서 펴낸 이수병평전이 있다)
아무튼 그 면면한 정신은 의령이 기억해야 할 자산이고, 의령 출신이 본 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갈겨니를 잡기 위해 할아버지와 손자가 파리낚시를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고 있다.
밤늦어 막내가 도착했다.
어른들은 송산 이모님댁으로 가서 주무시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밤 이슬 흠뻑 젓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시 벽계 계곡에 햇살이 드리운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1급수 수질인 이 계곡수 대신 생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룡뇽과 반딧불이가 살고있는 이 계곡에도 불청객이 침투했다. 갈색여치의 등장이다. 낄낄운다고 하여 낄낄이라 불렀던 연두색 계역의 북방여치와는 달리 이 놈은 보기에도 혐오스럽다. 한반도가 아열대화 되면서 부쩍 그 밀도가 증가한 대표적 곤충으로 농작물 및 산림자원의 피해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2005년~2007년 충북지역에서 갑자기 발생한 이후 과수농가에 피해를 주고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있는데 이놈이 남쪽 의령 땅에서도 보였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해살이 계곡으로 들기전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는 마누라
또 물이 더러워지기 전에 물에 몸을 담구어 보겠다고 나선
아들과 같이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귀가를 도모하는 회의가 열리고
너무 신나게 놀았던 막내는 더위를 먹었는지 힘이 없다. 뒤에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
결국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계곡으로 난 도로는 아예 주차장이 되었다. 사실 불편했다. 취사장이며 화장실이 있기는 하되 개보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특히 여성들은 소변 한 번 보기도 어렵다. 물이 많아 그나마 아이들 놀기에는 좋을 지는 몰라도 계곡의 깨끗함과 위생문제를 고려한다면 의령군의 관심과 조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찾게 된다.
주말을 의령에서 보내고 다시 김해 한림 처가집으로 향했다.
장인 내외분을 비롯하여 처남네 식구들과 오리백숙을 먹었다.
먹을 만 했다. 담백하고 양도 그렇고
외할머니와 포즈를 취한 큰아들
처수씨와 딸
그리고 밤에는 고 노무현대통령 묘역을 아이들과 찾았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도 노란 팔랑개비는 돌고 있었다.
정토원에도 들려 보았다.
Rainy Day Lover - Tony Joe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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