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그린트러스는 2009년 창립된 공원녹지를 전문활동으로 하는 민,관협치 시민단체다. 혹자는 시에서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관변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지만 말이 안되는 억지다.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들 중에 보조금으로 사업을 벌이지 않는 단체가 몇 개나 될까. 이런 저런 명목으로 금액의 크고 작고가 있을 뿐인데, 대 놓고 그렇게 단정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시민의 회비로 운영되는 소수의 단체가 존재한다. 바람직한 현상이고 그렇게 되고자 한다. 현실적으로 그런 시스템은 소수 핵심 구성원의 정신적. 물질적 희생을 전제로 한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동반하는 어떤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누구나 그렇게 되었음 하는 선망하는 조직은 갑자기 만들어 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섯불리 규정하는 오류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보조금을 받더라도 어떤 활동르 어떻게 펼쳐가고 어떻게 공유하는 가로 귀결되어야 한다.
부산그린트러스는 2012년 2기 체제로 전환하면서 기존 조직을 끌었던 사)100만평공원문화와 한국화훼원예복지회의 체제로부터 독립을 했다. 임원진의 개편을 비롯하여 사무처도 재정비를 했다. 그 시작이 기존 하단과 대연동에 있던 사무실을 하나로 만들면서 백제병원으로의 이전이다. 7월 중순 내부를 단장하고 8월부터 본격 업무에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고민이 많았다. 진로와 전에 다짐했던 일 때문이다. 몇 몇 그릅으로 부터 제안도 있었다. 사)걷고싶은부산의 창립 핵심 주역으로서 또 길과 걷기를 통해 새로운 환경운동으로서의 진화를 꿈 꾸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한 채 격리되었다. 연계된 내부시스템이 그런 작동을 어렵게 했다. 걷고싶은부산이 있게 했던 참여 그릅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나갔다. 최악의 상황은 올해 3월 들어 파트너 였던 국제신문과의 관계가 급변하면서 침몰해버린 것이다. 개인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 가버린 논의와 어처구니없는 결정은 한마디로 비참했다. 심지어 문제를 해소하고자 만든 비상대책위 조차 길을 잃다 못해 급기야 뒷통수를 맞는 꼴을 당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또 관계했던 사람들에게 느낀 실망이란 .... 그 서운함은 한동안 지속됐다. 물론 일부에서는 ‘뭐 이런 일이 다 있냐’며 분개하며 조치를 강구한 사람도 있었지만, 정작 내 자신이 걷고싶은부산으로 부터 손과 마음을 놓게 되니 시들해져 버렸다. 이제는 떠나온 거처지만 걷고싶은부산이 시민을 위한 길걷기 전문 시민단체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오욕의 시간은 분명히 기억해 둘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두고 볼 일이다. 진정한 변화가 확인될 때 그 기억들은 지워질 것이다.
부산그린트러스트와의 인연은 친구의 추천으로 이사를 맡으면서 였다. 어쩌면 2009년 걷고싶은부산을 택하지 않았다면 에나 지금의 부산그린트러스트 창립을 내가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부산환경운동연합을 사퇴를 한 이후 안식년의 시간이 주어졌고, 불안한 미래에 대해 집 내부의 사정이 몹시 날카로웠다. 안식년 후 대간사로서 활동의 경험을 조직에 기여하면서 나의 2기 환경운동도 생각했지만 조직 내부의 상황과 조건은 그런 생각을 부담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생활 그 자체가 무서웠다. 20년 이상 수행했던 환경운동의 결과가 가족 내부로 전이될 때 그 피로도는 말할 수 없이 심했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 지금에사 밝히지만 걷고싶은부산에 대한 선택은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내 나름의 합리를 접목한 결과였다. 시작이 어찌 되었던 매진하기로 했지만 결국 중도하차 헀고 또 다른 미련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길을 통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접목될 수 있는 기회는 많을 것이다,
부산그린트러스로 가는 길은 부산역을 기준으로 정중앙을 설정하면 찾기 쉽다. 일대는 근대부산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남선창고의 운명처럼 그 역사성과 의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중앙동 용두산 동남쪽의 부산유치원, 범일동의 삼일극장도 같은 운명이었다. 백제병원은 그나마 부산시가 근대건조물로 지정하면서 보전을 위한 조치와 함께 매입에 대한 의지도 있어 다행스럽다.
현재 부산시는 백제병원을 비롯하여 낙동강 칠백리식당, 양덕운 씨 가옥, 옛 하야리아부대 장교클럽, 부산대 인문관, 동아대 석당기념관 등 6개 건조물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했다. 특히 백제병원의 경우 단순 보호를 넘어 지역재생 자원으로 적극 모색되고 있고 그린트러스트 역시 향후 지역재생의 차원에서 이 영역을 다루어 낼 것이다.
아무튼 남선창고의 경우 명태고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선창고는 경원선(원주-서울)이 개통되기 잔 함경도의 수산물과 강원도의 목재를 부산으로 실어와 전국으로 보내던 물류창고로서 주로 명태,화공약품,합판,러시아상인의 짐등이 거래됐는데, 현재 그 부지에는 붉은 벽돌 벽만 남았다. 대신 서원유통 탑마트 초량점이 영업중에 있다.
백조다방에서 약 70m 직진하면 신세계빌딩(구.백제병원)이 있다. 이 골목은 흔히 텍사스골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전엔 청관거리였다. 필리핀과 러시아 사람들의 많다.
남선창고 옆 건물이 백제병원이다. 1920년 최용해가 개인종합 병원으로 신축했는데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라 할 수 있다. 한때는 독일인,일본인 의사들을 초빙하여 나날이 번창했으나 건축과정에서 과다한 경비지출로 경영에 어려움을 격던 중 행려병 사망자에 대한 인체표본이 알려지면서 내진객이 급감했다. 이같은 상황은 당시 정서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사회적 비난으로 이어져 병원경영에 막대한 장애로 작용하다 적자 끝에 병원이 문을 닫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건물은 중국인 양모민이 인수하여 중국 요리집 봉래각으로 1942년까지 운영되다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아까즈끼부대가 접수하여 장교숙소로 사용되었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치안대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개인에게 불하되어 신세계예식장으로 사용되다 1972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불에 타기도 했다
현재는 내부수리를 한 다음 사무실로 임대중이다. 그 3층에 부산그린트러스가 들어 왔다. 화재 경험은 이 건물에 입주한 각 사무실의 근무시간을 평일 오후 6시 30분, 토요일 오후4시 반까지로 지키겠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한달 여의 시간을 지나면서 건물 내부며 외관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창틀 벽체를 보면 이 건물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벽돌과 나무, 그리고 알미늄샤시에서 최근의 것까지
솔직히 부산그린트러스트(이하: BGT)에 실무 책임자로 일하게 되리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 최초는 6월 BGT 정기 이사회 후 뒷풀이 자리에서 최초로 나왔다. 농담처럼 주고 받았던 이야기 인데 나 모르게 몇 몇 이사들이 진지하게 논의했던 모양이다. 논의는 급진전 됐다. 그리고 몇 몇 이사들과 BGT와 관련된 술자리를 가진 뒤 귀가하는 길 거제역 앞 육교에 붙어 있는 책광고 현판이 마음을 자극했다. 빌 코넬리우스가 쓴 일종의 종교서적인데 그 내용을 떠나 머리문구가 ‘멈춰선 당신에게 던지는 변화와 도전의 메시지’라는 글귀였다.
멈춰선 당신, 변화와 도전 이란 메시지는 바로 내가 당면한 현실이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몇 개 그릅을 저울질하던 중이었는데 술김이었는지는 몰라도 도전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7월3일 경주 산내 모처에서 1박2일 BGT 이사회 업무연찬회가 있었다. 하반기 활동에 대한 논의와 신임 사무처장에 대한 인사위원회가 있었다.
나와 BGT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7월 말서부터 재정비 30일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업무 전반에 걸쳐 정비안을 준비했다.
사무실 내부 정비도 같이 했다. 들어냈다 다시 꺼집어 내고... 이랬다 저랬다 벌써 꽤나 많은 땀이 스며 들었다.
8월14일 2기 5차 정기이사회가 열였다. 하절기의 특성상 100% 참석은 어려웠지만 조직 재정비와 변화를 기대한 이사들의 참여가 그런대로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몰려드는 일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어깨를 짓누른다. 나아가 앞서 활동했던 두 단체가 남긴 ‘앙금’과 ‘과제’도 떠맡았다. 실무인력도 부족한데다 운용예산 확보도 숙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견지해야 한다.
월요일 첫 사업인 전문공원활동가 양성 ‘공원문화학교’가 개강된다. 언론에 보도된 이후 정상적 업무가 어려울 만큼 많은 문의와 함께 방문자가 있었다. 하여 홈피에 자주 하는 질문에 대해 문답형식의 안내글도 달아 놨다. 준비기간이 부족했지만 수강생이 최적의 환경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수료생들이 그 역량을 최대한 펼 칠 수 있도록 하겠다고자 했다. 아쉽게도 수강 신청 마감이 끝난 지금 20명을 채우지 못했다. 무리한 끌어들이기는 처음부터 선을 그어 차단했다. 수료 후 진로에 대해 정직하게 일러 줌으로써 오해의 여지와 잡음의 싹을 지우기 위해서다. 최선을 다 할 일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부산 '공원 활동가' 양성한다 부산일보 12.8.16
그동안 공원 행정은 주로 공원 안에 있는 녹지나 시설물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시민 휴식공간을 넘어 그 무한한 가능성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그런 가능성을 실현해갈 전문 활동가가 양성된다. 시민들이 공원의 소비 대상에서 벗어나 생산 주체가 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산시와 ㈔부산그린트러스트는 오는 27일 개강하는 공원문화학교의 공원활동가 양성 과정 참가자를 모집한다고 16일 밝혔다. 교육은 오는 11월 7일까지 50강좌로 진행된다.
프로그램 기획·해설 등
공원문화 이끌 전문가 육성
27일 개강 참가자 모집
선착순 20명까지며 수강료는 85만 원이다. 강의는 매주 월·수·금, 오후 2~6시에 동구 초량동 부산그린트러스트 교육관 3층에서 열린다.
공원활동가 양성 과정 개설은 공원행정 변화와 관계가 깊다. 녹지나 시설물 관리에 머물렀던 공원행정에 대한 욕구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 갈 사람이 바로 공원활동가들이다. 과정은 공원 이론, 공원 문화, 동식물 생태, 도시농업 등으로 채워져 있다.
2009년 민·관 협치기구로 출범한 부산그린트러스트가 교육을 맡는다. 강사 면면을 보면 공원활동가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조경학과 교수, 어린이집 원장, 예술단 관계자, 응급치료사, 복지관 관계자, 생태활동가, 귀농학교 관계자 등 다양하다.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성근 사무처장은 "공원활동가는 공원 활용의 매개자이고, 시민이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게 하는 주체다"며 "공원활동가를 통해 지역 공동체가 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시민 참여형 공원 모델로 대표적인 것이 뉴욕 센트럴파크의 '센트럴파크 컨서번시'다. 이 모임은 경찰 업무를 뺀 공원의 관리·운영·예산 등 모든 분야를 맡고 있다.
공원활동가 과정은 80% 이상 출석해야 수료증을 준다. 이후 나루공원, 평화공원, 하늘공원 등에 배치돼 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원 프로그램 기획자 역할이다. 양성 과정 중에도 특정 공원에 대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순서가 있다.
참가를 원하면 부산그린트러스트 홈페이지(www.bgt.kr)에서 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한 뒤 이메일(bgt@hanmail.net)이나 팩스(051-442-3327)로 접수하면 된다. 051-442-3326. 김마선 기자 msk@
Them Changes - Buddy Miles(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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