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대장정을 마치고 8월 첫주부터 휴가에 들었다. 올여름은 가족들과 같이 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큰애의 학원 방학이 끝날 즈음에 휴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막내와 이기대 낚시를 다녀온 것이 전부다. 문득 구룡포에 있는 권선희시인이 보고싶었다. 박정애시인에게 동행을 묻자 즉각적인 수락이 있었고, 부산시민센터의 김해몽처장이 차를 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선 길이 언양 고금란 소설가에게 들린 다음 청도 운문사 > 경주 산내 외칠리 > 구룡포가 아닌 양포 > 경주 >부산으로 코스가 된 드라이브가 되었다. 운문사 가는 길은 가지산 도립공원 24번국도를 타고가다 탄산유황온천쪽으로 가는 69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운문재를 넘어 자연휴양림이 있는 삼계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삼계계곡은 신원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흐르다 운문천과 합류한다. 합류지점에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면 지룡산을 시작으로 1천m급 가지산, 운문산, 억산이 운문사 주위로 병풍치듯 에워싸 있다.
운수사는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비구니 사찰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雲門面)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사찰로서 560년(진흥왕 21)에 창건된 것을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였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고,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운문사 들머리 소나무숲길은 널려 알려진 명성만큼이나 걷고싶은 길이다. 이 길은 유흥준 영남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더 많이 알려졌다. 그는 운문사의 다섯가지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 길을 그 중 하나로 꼽았다. 헌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점심을 지나서 였고 더위가 만만찮았다. 매표소 입구에서 주차장까지는 약 1.2km 선승들마냥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이른 아침이나 저물녘 걷기가 매력적이다.
길을 따라 걷노라니 인근 암자의 보살들인데 도반의 생일이라 축하노래를 부르는 중이다. 가만보니 와인이 보인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불쑥 끼어들어 덕담을 나누고 와인 한잔에 인사를 나눈다. 가운데 분이 생일을 맞이했다고 한다. 축하합니다.
운문천은 가지산과 운문산 중간 게곡에서 발원하여 매표소를 기준으로 약 5km 하류로 유하하다 운문호로 흘러든다. 나무그늘 아래 탁족(濯足)을 즐기는 분들, 그들 옆에 신발을 벗고 시원한 계곡수에 발을 담구고 싶다. 여름 피서로는그만이다. 이런 날에 띄웠던 편지 한장
배상(拜上)
복날 더위가 더욱 심하온데 형체(兄體)어떠하오시니잇가. 제(弟)는 서증(暑症)으로 앓고 지내옵다가 요사이야 저어기 낫사오오나 더위도 너무 괴롭사오이다.
마침 주효(酒肴)가 있삽기 통(通) 하오니 산수 좋은 곳에 가 탁족이나 하오면 어떠하리잇가. 예글에 일렀으되 관(冠)을 벗어 돌벽에 걸고 이마를 드러내어 솔바람 쐬인다 하얏사오니 이 아니 상쾌하니잇가. 자세히 기별하옵소서
즉일(卽日) 제(弟) 배(拜)
운문천이 휘감는 물길 뚝방에는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낸다.
수종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옻나무, 덜꿩나무, 생강나무, 물푸레나무, 소사나무, 느릅나무 등에 전나무다 식재되어 있다.
오래전 쓸어진 나무둥걸에 작살나무와 어린설, 물푸레나무, 굴참나무 어린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느티나무와 전나무가 맞붙은 연리목이 있어 담아 보았다. 제대로 된 조합이다.
'호거산 운문사'라는 현판이 걸린 이층 범종루밑을 지나 경내로 진입한다. 일반적인 사찰은 일주문-천왕문-루각을 지나 대웅전등의 본존불이 있는 경내로 진입하나 운문사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배치에서 호거산을 등지며, 흐르는 물을 보지 않도록 등을 지고 있는 형국이다.
운문사는 평지위에 세운 가람이다. 주변산세가 절을 에워 싸고있어 연꽃에 비유하가도 한다 운문사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규율이 엄격하다고 한다. 학승들은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는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생활규범을 실천한다.
다들 공부에 정진하는지 스님네들은 보이지 않았다. 운문사가 비구니 승가대학으로서 자라매김 한 때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58년 전문강원이 생기면서부터다. 지금가 같은 4년제( 1학년 치문(緇門)반, 2학년 사집(四集)반, 3학년 사교(四敎)반, 4학년 대교(大敎)반 ) 정규과정의 대학은 1977년 10대 주지 명성스님이 운문사를 일신하면서부터 였다고 한다.
운문사에는 대웅보전이 두 곳 있다. 그러나 원래 법당은 비로전으로 내부에는 단독의 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큰 건물인 대웅보전은 후대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내부에는 천장에는 작은 방울들이 달려 있고 줄을 잡아 당겨서 끝가지 붙어 있는 동자상이 보이는데 악착보살(악찰보살)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법당 밖만 서성이는바람에 보지 못했다. 사전 공부가 필요했다.
만세루에 걸려 있는 탱화가 눈길을 끈다. 처진소나무를 상징하는 소나무 아래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만세루는 운문사에는 가장 큰 건물인데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앙국사가 3차 중창할 때의 것이라 한다. 2백여 평의 누각형태로 축구를 해도 될 정도이다. 법고와 조선시대 종이 현재 있으며 큰법회 때 대웅전에 들지 못한 대중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운문사를 대표하는 사람은 화랑오계를 내린 원광법사,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 운문사를 기틀을 잡은 보양국사, 고려무신정권에 항거한 김사미,효심 등이 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 본다면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문득 만세루를 떠받치는 대들보와 공포에 앉힌 봉황과 용이 많다는 사실의 알았다. 그만큼 만세루가 면적이 크기 때문일수도 있다만 아무튼 다리쉼도 할겸 헤아려 보니 용 3마리 봉황 19마리였다. 이 숫자가 의미히는 바가 있을 텐테 ... 궁금할 뿐이다.
수령 5백년의 처진소나무 매년 음력 삼월삼짓날 12말의 막걸리를 드신다.
운문사탱화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은 그림 한점 내가 저렇게 쉬고 싶다는 뜻일려니
대웅보전( 보물 837호)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주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의 두 보살을 봉안한다.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며, 각 여래상의 좌우에 제각기 협시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운문사 대웅보전은 1718년(숙종 44)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평면 구성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기둥의 간격이 넓어 칸수에 비하여 규모가 큰 건물이다.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간에 공포를 받치기 위해 평방, 창방을 짜 맞추어 하부가구를 구성하였다.
지붕 형태는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식으로 주두(柱頭) 위에는 주심포를, 주간(柱間)의 어간에는 4구, 툇간에 3구씩의 공포를 짜 올렸다. 또 측면 어간(御間)에 3구, 양 툇간에 2구씩의 공포를 놓았는데 모두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이다. 상부가구는 후불벽을 설치한 2개의 고주(高柱)와 앞쪽 평주(平柱)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포대공(包臺工)을 놓아 마루보를 받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둥근 서까래에 모난 덧서까래를 붙여 처마의 곡선을 아름답게 했다. 추녀 끝에는 활주(活柱)를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고 있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꽃살 창호이며 단청은 모두 금단청(錦丹靑)으로 칠하였고 벽면에는 벽화를 그려 넣었다. 천장은 중앙부에만 우물천장을 꾸미고 그 외곽은 빗천장으로 처리했다. 전면의 개구부에는 꽃살 무늬를 새긴 분합문을 달았다. 전반적으로 경북 지방의 조선 중기 다포계 건축의 세부기법과 공포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운문사에서 가장 작은 단칸 법당으로 작압전이 있는데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는 전탑처럼 되어 있어 목조 건물이 얹혀져 있어 모전석탑과 목조 건물이 결합된 형태라고 한다. 작압전 안에는 두개의 보물이 있다.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方位神)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속옷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운문사 초입에 있는 느티나무 몇 아름이나 된다. 그 아래 한참이나 쉬다 구룡포로 향한다. 가는 길에 지인이 휴가 중에 쉬었다 가라고 권해준 집이 있는 경주 산내 외칠리 어떤 집을 향해 가다 그 집앞에 흐르는 동창천을 마주했다. 푹 빠지고 싶다.
구룡포로 가던 중 약속 장소가 양포로 바뀌었다. 양포항은 이웃 감포항과 같이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항구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양포는 남북으로 연결된 감포-구룡포 도로와 양포-포항 도로가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런 특성이 예로부터 동해안 큰 항구로 발달할 수 있게 한 조건이 된 셈이다. 양포는 1970년대에 베트남에 모래를 수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항구입지가 좋아서 축항을 만들어 두었고, 그 축항에 학꽁치가 많이 잡힌다. 사실 학꽁치 보다 이곳의 대표하는 어종은 아귀고 아귀요리가 많다. 권선희시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린 곳은 장기천 하류 금곡교 자연발생유원지 앞 신창리 아귀철판구이집이다. 거기서 그녀를 기다렸다.
권선희 시인은 이곳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고 신랑도 비슷한 공장에 다니다 보니 이곳에 머물게 됐는데 구룡포 아니 포항 홍보대사라고 할 수 있다. 올초 지난해 해파랑길 답사 때 포항지역 답사가 미진하여 지인 몇 사람을 꼬드겨 나섰다 처음 만났다. 그녀의 안내로 호미곶이며 구푱포 일대를 새로이 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후 권 시인이 시집 '구룡포로 간다'를 보내왔다. 같이 갔던 다른 사람은 고맙다 어쩌니 하면서 차(茶)도 선물하고 안부전화도 가끔했던 모양인데, 정작 나는 이렇다할 마음표시를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이번 휴가때 권시인이 보고 싶었고, 누님같은 박정애시인에게 또 가지고 하면서 그쪽 상황을 전해 들으니 시집 받고 답도 없는 인간 오니 마니 하는 섭섭함을 토로했다. 순간 어이쿠 했지만 욕바가지 각오하고 간다며 구룡포 길을 강행했다. 그래 가겠다는 놈을 어쩌란 말인가
감포쪽 해상에서 멸치잡이배가 보였다.
안타까운 노릇은 장기천 하류 신창리(新倉里) 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거니와 남아있는 문서도 없다는 사실이다. 추측컨데 이곳을 창바우[倉岩]라 하는 것은 아닌지....경관이 좋다. 애들 데리고 놀기도 좋고 ....
권시인이 추천한 아귀철판구이를 주문하고 요리가 익을때 까지 술잔이 오간다. 술은 권시인과 나만 마셨다.
좀은 단맛이 나는 아귀철판구이
고기를 건져먹고 난 다음에는 참지름을 듬뿍 넣은 다음 밥을 비빈다. 맛을 비교하자니 양포 삼거리 아귀두루치기가 훨씬 나은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술먹고 밥먹으며 욕대신 새로운 친분을 나누었다.
권시인은 지난달 30일까지 열였던 포항국제불꽃축제 추진위원으로 일했는데, 가는 날이 평가가 있던 날이고, 저녁에는 신랑쪽 사람들이 한 무더기 온다며 두 시간 정도의 시간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구룡포가 아닌 양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쪼매라도 더 만남의 시간을 늘이기 위해 .... 문득 포항에 권선희가 없다면 해 본다.
이날의 마지막 장면, 박정애시인이 국토 종주 후 시커멓게 탄 내 팔 다리를 보며 그얼리지 못한 부분과 비교해서 사진으로 남겨둔다며 포즈를 잡아보라기에 잡았는데 장소가 구룡포로 가는 방향 초입에 있는 카페 '사랑이야기' 문패라 할 수 있는 버섯 상징물이었다. 그래서 한바탕 웃음이 있었다.
너무 일찍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듯 두 시인이 포옹을 한다.
구룡포에서 권시인은 이런 시를 쓴다. 시는 구룡포 맛이 쩔어 있다. 스토리문학 2011년 봄호 시 창작 노트에 시인은는 이렇게 적고 있다. "... 나도 제발이지 나만의 시사냥 비법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 적이 있어. 남들은 뭔가 가진 것 같은데 말이야. 비 온 다음날 무 뽑듯 쑥쑥 써서 읽기만 해도 배가 아파오는 놈들을 지면에 올릴 때 마다 분명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 그래도 나에게 "그 못난 시들을 어떻게 썻느냐고 ? 묻는다면 마지 못해 "그저 고맙게 받아썼다" 고 할 밖에
방금 / 바람이 다녀갔다. 그믈을 꿰고 만선기를 꼽으며 채비했던/ 무수한 사연들이 출항했다/ 은빛 돛대를 세우고 귀환을 약속하는 갈매기떼 / 우루루 비상하는 / 여기 구룡포 / 나는 시를 써지 않았다 / 축항을 치는 파도와 말봉재 골짝골짝 넘나드는 바람/ 그들의 이야기를가끔 받아 적었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 시인의 말>
겸손한 표현이다. 머리굴려 대충 시가 되는 글이 아니라 권선희는 구룡포 그 자체다. 그녀가 보내준 시집은 진작에 독파하고 출판했던 다른 시집을 포함하여 그녀가 이곳 저곳에 청탁을 받아 기고 했던 글까지 닥치는대로 찾아서 보았다. 시인이 쓴 글 속에서 시인을 다시 보았다. 권선희는 이제 나의 구룡포가 되었다.
헤어지고 현내평야를 적시고 흘러 온 장기천의 저물녁을 담았다.
그 길로 밤길을 달려 경주 수호재로 갔다.
거기서 막걸리 두 주전자 비우고
눈에 힘주고 기념사진을 박았다
좌로부터 김해몽부산시민센터장, 고금란소설가, 수호재 주인장 이재호 선배, 박정애 시인, 류은주(김해몽처장과 같이 사는 사람) 술많이 마신 나 혼자 눈이 벌겋다.
경주에서 한팀(고금란,박정애)은 언양으로 가고, 한팀은 부산으로 하여 귀가했다. 호포에서 마지막 지하철을 탔는데, 양포와 수호재에서 마신 술때문인지 깜박 잠이들어 내릴 곳을 한참이나 지나서야 내렸다. 1박의 2일 나들이가 되고 말았다. 심야 귀가, 반기는 것은 집앞 놀이터 한무더기 고양이(12마리)들이었다.
Desper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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