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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옛 일터 거리를 거닐다(11.11.20)

by 이성근 2013. 6. 9.

 

십수년 같이 일했던 동료이자 후배의 부친상이 있어 조문을 하고 무작정 걸었다.  지난 2009년 이후 간간이 얼굴을 마주치긴 했으나 서로가 주고 받은 상처가 많아 더는 보지 않을 거라 마음먹었던 후배다. 그랬던 시간인데 부친상을 당했다고  연락을 받고 나니 망설여 졌다. 솔직히 가야하나 말아냐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내세워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음에도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더불어 지내도 어느 한 순간 마음에 금이 가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길을 가 버린 다음에 다시 돌아 오려면 너무나 힘들다는 것. 하지만 그 금은 사실은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관계의 금이 가지 않기 위해 나는 뭘 했던가.    

 부산역 상해문을 거쳐 일대를 한 바퀴 걸었다.  나날이 바뀌고 단장되고 있었다.

 화교 중학교 담벼락에 전에 없던 그림들이 생겼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삼국지의 주요한 대목들을 벽화로 조성했다. (지도위에 긴 생물체는 지렁이다. 어떻게 안내판으로 들어 갔는지 )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결의 통해 세상에 도전한다. 뜻이 맞는 세 사람만 모이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지난날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있던가 .  아마 그런 만남은 없었던 것 같다. 더러 그런말을 한다. 가장 어려울 때 언제 어느 때라도  달려 와 줄 수 있는 친구 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내게 있어 그 세사람은 누구인가. 또 있기나 한 것일까. 차마 그 이름 올리기가 두렵다.

 삼국지 하면 유비, 관우,장비를 떠 올리겠지만  글쎄다. 시절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조자룡같은 부하, 관우나 장비같은 동생, 공명같은 참모만 있으면 ...    

시방도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사람 사는 세상, 살아 숨쉬는 자연의 평화를 위해 

 부산역, 점차 광장이 없어지고 있다.  불행한 일이다. 

 대신 노숙자들이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다.  露宿者는 말 그대로 한뎃잠을 자는 사람이다. 이제 곧 겨울이다. 1998년 구제금융 이후 이들의 존재가 폭발적으로 늘어 났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찹할 따름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인지 부산역 옛 사무실로 가보았다. 그리고 내친김에 지난 20여년의 흔적을 돌아 보았다.

사무실 이전 동선은 주로 대로변을 벗어나지 않았다.  시민단체로서 누구든 찾기 쉽고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부터다.  그때부터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자 장기 플랜을 계획했고, 에코바움이란 건물명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2009년이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환경과 관련된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건물이다.   1988년 여름 부산의 시사잡지사에서 사회부기자르로 일하던 그때, 합천 원폭 진료소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 역시 환경에는 문외한이었다.   다만 8월 광복절을 앞두고  논의했던 기획이 원폭에 대한 것이었고ㅡ 그 현장을 합천으로  잡았다.  여성민우회회에서 발행한 사진집이 매개가 되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졌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두 도시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77만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10만명은 징병, 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 5만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4만3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7000명은 일본에 남았다 .그중에 합천 사람이 많았고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귀국했지만 그들의 삶이란 비참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대관절 핵이란 것이 뭔가 제대로 알고 싶어 수소문 하던 그 때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의 후신인 공해추방시민의 모임(준) 을 알게 되었다.  그때 구자상씨가  누구에게나 하는 소리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던진 말이 이후 내 생활을 바꾸어 버렸다.  준비모임은 1989년1월31일  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란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나는 창립멤버이긴 하되 본격적인 합류는 1년 뒤인 1990년부터 시작했고 그때 일했던 곳이 중앙동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다니던 명함에 찍혀 있는 주소지가  중구 중앙동3가 19-3 대왕빌딩 3층 301호 였다.  그냥 선전부원이었다. 그리고 선전부장 > 선전교육부장 > 특별기획사업부장 > 자연생태부장> 조직국장 > 시민회원국장 > 사무처장  순으로 직위의 변동이 있었다.   

 이 골목을 오가며 더불어 지내던 사람들은 박영숙, 신용희, 정영란, 박진관을 비롯하여 최인화, 김태한, 차건봉, 오종민, 등이 있었고 앞서 김정훈인가 하고 손희정 등이 있었다. 당시 최인화는 부산대 환경공학과 4학년이었고 나중에 김태한과 결혼했다. 현재까지 적을 두고있는 사람은 연구소의 최인화 뿐이다. 김태한은 신불산 생태해설사로 있다.

 중앙동에서 첫번째 사무실 이전이 있었다.  1991년이든가. 처음엔 2층만 시용하다 3층까지 세를 내어 사용했다. 그렇지만  건물주가 사기꾼이어서 막심한 손해를 입고 나왔다. 여기서1993년 환경운동연합의 일원으로 전국 조직화 했다. 당시 부산을 비롯하여 서울, 마창, 진주, 을산 등 8개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뜻을 같이 했다. 앞서 지리산에서 지금의 녹색연합인 푸른한반도 등과 전국조직 건설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아무튼 그 두번째 둥지가 중구 중앙동 3가 14-1 한성빌딩 이었다. 빌딩이라고 이름붙였지만 그냥 5층 건물일 뿐이다.  여기서는 민은주, 옥성애, 박설화,  송영경이 멤버가 되었다. 송영경은 공해문제연구소 출신이었다.  이상용이 잠시 있었던 것 같다.

 

부산환경운동연합은 규약 제2조에 존재의 목적을 생명.자치. 평화.참여를 중심 가치로 삼아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힘을 합쳐 우리와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나감을 목적으로 했고 사업 및 활동은

 

1. 국토환경과 지역생태계보전을 위한 시민인식 증진 활동

2. 회원참여의 조직화와 환경문제의 시민 의제화를 위한 제반 활동

3. 기업의 사회기여 활동을 권장하고 시민기금을 조직하는 활동

4. 환경적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고 구제하기 위한 법 대응 활동

5. 도농상생과 지역생명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제반 활동

6. 국제환경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한 지구환경문제 해소 활동

7. 기타 부산환경운동연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사업

으로 한다.

 

 5층 건물에 4~5층은 전세를 놓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  특별히 떠 오르는 이름은 김진희, 박수진인데 지금도 보고 싶다.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나를  欽募했던 당차고 귀여운 여자 권 .. 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진주로 시집을 갔다.  그녀의 집안에서 나같은 사람은 안된다고 ... 울면서 떠나갔다.  이후 지금의 마누라를 만나 1995년 가을 결혼을 했다.

 한성빌딩이 문제가 생겨 세번째 마련한 사무실은 중앙동지하철역 11번 출구 옆이다. 1999년인가 2000년인가 오래있지 않았다. 1층은 전통차를 팔던 다전(茶田)이란 찻집이있었다.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정광민을 비롯 임호, 김달수, 박수항등과 함께  최달호,정미영, 손희정, 오선미, 우정희, 김영숙  등이 있었다.   

그때 물불을 안가리고 일했다. 급기야 큰 병이 왔다. 지금도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다.  스트레스 과로 등이 원안이었는데 전신 류마티스가 왔다.  1999년 코스타리카 람사회의 갔다 온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집에서 대학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반년 가까이 병과 싸웠다.  복직은 2000년 봄에 이루어졌다.  그때의 몰골은 끔찍했다.  완치가 어렵다는 그 병도 내게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회복했고 완치가 이루어 졌지만  사실 그때 좀 더 쉬어야 했다.  담담의사도 그 회복에 놀라움을 표했다. 아무튼  어서 나오라고 성화가 아니었다.  무시하고 복귀준비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한마디로 어벙벙한 상태랄까 물론 차쯤 회복하긴 했으나 ...   

 

 40계단과 그 뒷골목은 이렇게 변했다.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저 양반처럼 나도 혼자 지난 시절을 밟고 있다.

 주로 이 주변에서 밥을 먹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중앙동은 계속  진화중이다

 

 네번째 이전 사무실은 부산역 앞 동구 초량3동 1200-`12 동주빌딩 6층 이었다.  2005년 겨울까지 있었다. 연구소에  송보영, 박숙경을 비롯하여 서토덕, 김기식,최수영 등이 합류했고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정명숙이 활동가로 합류했다.  그리고 원폭2세 환우의 아픔을 대변하던 고 김형율씨도 잠시 활동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원폭이 야기한 태생적 병마와 싸우다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신입활동가들 중에 김중수와 이승준 등이 활동했다. 그외 잠시 머물다 간 친구들이 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끼던 후배  정미영이 그만 둔 시절도 이때인 것 같다.    

1층 경비실이 있던 곳은 식당으로 변했다. 

에나 우리거 즐겨 찾던 집은 동남초밥이다.  주인내외가 무척이나 반가워 했다.  주로 외부 손님이 오거나 회식 때 이 집을 이용했는데,  손맛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건너편 초량시장은 활동가들이 주로 저녁시간 째 회원을 만나거나 활동가들이 어울려 시간을 보내던 공간이다.   

 다섯번째 사무실 이전은 2005년 겨울에 이루어 졌다.  실공간 100평이 넘는 곳으로  여기서도 일이 많았다.  새로운 활동가들은 정지숙,정현정, 김수현 등이 들어 왔다.  동구 초량3동 국제오피스텔 4층이다.   

 

여섯번째 사무실은 다시 중앙동으로 이전했다.  국제오피스텔의 임대료가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우체국 앞  지하철 4번 출구 3층이다.  평수는 약 60평 여기서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하여 환경과 자치연구소 / 환경교육센터가 한 지붕 세가족으로 지낸다.  그리고 귀농학교가  사직동에서 둥지를 틀었다. 자원순환시민센터는 구서동에 사)에코언니야 를 통해 활동근거지를 따로 마련했다.  현재 활동가는 사무처장을 비롯하여 5명이 있고  그 중 3명은 신입이다. 그리고 연구소에 2명과 교육센터에 3명이 있다.  나는 이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뒤로 물러 났다.   1993년 4월9일 이후 2010년1월28일까지 모두 16차례의 규약개정이 있었다.  부설 전문기관은  부산귀농학교 http//busanrefarm.org    사)환경과자치연구소 www.eni.or.kr   자원순환시민센터 http://www.zerowaste21.org 에코라이프 살림과 에코언니야 두곳의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환경교육센터는 블로그를 통해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http:// blog.naver>com/busaneec

다시 중앙동 시절이 열였지만 MB정권이 들어서 이후 진보적 환경시민사회단체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물론 내부의 아마추어적 시스템도 그 아픔을 만든 원인이 되긴했지만 ,  기본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은 이 정권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삽질정부에 사사건건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혼내고 싶었으라라. 하지만 막상 그 바람은 조직 전체를 뒤흔들었다.  시민운동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  지난 4년 힘겹게 살아 남았다.     

길건너 부산우체국은 1989년 신축된 건물로서 그  가로수는 도심 가로수 사업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은행과 플라타너스가 식재되어 있는데 잘 조성된 사례다.  이 도시의  가로수가 저 정도 수형이며 그늘을 제공한다면 부산의 얼굴은 또 한번 달라 질 것이다.  부산우체국의 경우 1989년 공추협이 창립되던 그때 들어선 건물로 비교적 가격이 저렴했던 지하 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 회원들에게 보낼 우편물을 직접 들고와 우편작업을 하기도 했다.  중앙로 화단과 메티쉐퀘어는 2000년대 후반에 조성됐다.

대청로의 어둠이 깊어 간다.  내 청춘이 저 어둠속에 있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일하다 답답한 일이 있으면 줄겨 찾았던 수미르공원의 수변 

귀가를 위해 발길을 돌린다.  진짜 뜬금없는 행보였다.  그 정체를 모르겠다. 왜, 지난 시절이 좀 억울했기  때문일까.  밤새워 일해던 내 모습이 보이고, 끝내 같이 하지 못했던 순간도 보인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후배들도 


Tonight's The Night (Gonna Be Alright) - Rod Stew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