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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2009 낙동강 1300리를 가다/ 합천보에서 함안보까지 -여덟째날

by 이성근 2013. 6. 7.

 

합천 덕곡면율지리(밤마루) 입니다. 오광대 놀이가 최초로 시작된 곳입니다.  오광대는 양반을 비꼬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영노과정'을 보면 ... 양반: 이놈 네가 무엇이냐?  영노: 내가 사람잡아 먹는 영노다   양반(놀라 떨며) 나는 양반 아니다.   영노: 양반 아니라도 먹는다.  양반: 내가 쇠뭉치다.    영노: 쇠는 쫀득쫀득 더 잘 먹는다.  양반: 내가 그림자다.  영노: 그림자는 거침없이 흘흘 들이 마신다.   양반: 내가 염소다.  영노: 염소도 좋다.  양반: 내가 소매(똥)다.   영노: 그것도 좋다.   양반: 니가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꼬?   영노: 참양반이 호령하면 물러 가겠다.  양반: 옳지!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이요, 아버지는 이조판서, 나는 한림학사를 지냈으니 참양반이로다. 이놈 영노야, 썩 물러가라.  영노: 옳지! 그럼 양반을 잡아 먹고 득천하겠다. ...

 양반풍자는 하층민들의 양반의 지배구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자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항변으로서 조선후기 사회의 정서적 흐름이었습니다. 이 오광대놀음이 현존하여 전파. 재현되는 곳이 고성과 수영입니다.  하지만 정작 밤마리에서는  이곳이 오광대 발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있을 뿐, 그 몸짓은 볼 수 없었습니다.  황강 합류부를 기준으로  합천보를 찾기 위해 '길'을 수소문 했습니다.  세세히 가르쳐 주시는데 제가 경험했던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일입니다.  할 수 없어 관광지도라도 얻을 요량으로  밤마리에 있는 덕곡면 사무소를 찾아 민원 담당에게 물으니,  찾는 시늉을 합니다.  "여기 있을 텐데.."  그때 우리가 원하는 답을 정확히 짚어준 이가 있엇으니,  바로 황강 합류부 건너편 마을이 자신이 사는 마을이라는 직원이었습니다.      

 그 남자의 도움으로 다시 율지교를 건너 창령으로 갑니다.  예전에 밤마루나루는 경남 최대의 농수산물 집산지로서 강 건너 이방장과 함께 낙동 큰장으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밤마리장은 초계군 북쪽 삼십리에 있으며 초하룻날이 장날이다. 한달에 여섯번 장이 서는데 그때마다 고깃배, 소금배, 장사배가 와서 머문다.'(草溪誌)     '강가 나루에 장삿배와 고기잡이배가 숲처럼 왕래하고 노젓는 소리와 뱃노래가 서로 어울려 끊이질 사이가 없다.'( 大韓新地理志) 했듯 상거래가  활발했던 밤마리 장터에 요즘 말로 '딴따라'들인 유랑 예인집단인 광대패가 한바탕 놀며, 장꾼들과 어울렸을 법 합니다.  

 그 번성은 강물처럼 흘러 가버렸습니다.  다리를 갈짓 자로 좌우를 오가며 낙동강의 흐름과 수변을 관찰해도 마추친 차량은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물빛이 썩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나마 1급수 회천(좌측)이 제 몸을 송두리째 보탠 결과입니다.  

 

 율지다리를 건너 1034번 지방도를 따라 1km 조금 더 지나 제방을 따라 걷습니다.  이 강가에 수달이 살고 있습니다.  부산 시인 동길산씨가  걸었던 기록했던 어떤 봄날 사진에는 버들류가 제방 아래 수면과 더불어 참 좋은 그림을 연출하던데,  그 사이 베어져 사라졌습니다.  왜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시점은 2008년 3월입니다.  

 

 이방면 장천리 인데 하도에 습지가 발달하여 장천늪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길산 시인이 그 봄날에 보았슴직한 그림은 창령 이방쪽에 남아 있습니다.  

 황강 합류부가 가까와 옵니다. 뒤돌아 봅니다. 이 밭뙈기에 아침으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던 쥔 양반은 알고 있으려나 ? 

 합천 청덕면 성산을 배경으로 창령쪽 이방면 독지골산이 낙동강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마치 황강 하류 물맞이를 하는 듯 보입니다.

 그 길에서 웬 머서마 하나이 우산을 쓴채 앉아 있습니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서울이라 하더군요 . 일주일째 머문다고 합디다.  4대강 정비, 아니 낙동강 정비와 관련 이 구간은 SK가 맡았나 봅니다.  그 젊은 친구는 SK의 하청을 받아 설계를 하는 회사의 소속인듯 하고... 4대강의 실체가 보다 더 뚜렸하게 다가서는 순간입니다.   보는 이쯤에서 설치될 듯 합니다.   

 정부는 낙동강 하류 경상남도 구간(김해,양산,밀양,창원,창원,창령,함안,의령,합천)에서 169,858천㎥의 모래를 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획된 저수로 폭은 남강~금호강 구간  하폭(m) 평균 736,  최대 1,465  최소 384 에  저수로폭(m)은 평균 250 최대 365  최소 120이며  계획저수로 폭(m) 300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감이 안옵니다. 머리가 아프네요.  머잖아 모래를 실은 덤프트럭들이 강변을 주름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 푼 보상으로  멀찌감치 그 광경을 모래 씹은 듯 지켜봐야 할 이들을 생각하면 ... 

 등림마을로 가는 구비길입니다.

 낙동강과 황강이 합류하는 곳입니다. 거창 가북면()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덕유산()에서 흘러오는 위천()과 만나 황강은 큰 흐름을 가집니다.   하도()경사가 심하고 토사의 퇴적이 많아서 합천읍 하류부에서는 천정천()을 이루는데, 황강이 없다면 낙동강은 심한 목마름으로 허덕일 것입니다.   문득 세상의 큰 흐름을 생각합니다.  목마른 날 황강처럼 지친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기류를 기대해 봅니다.   적포교로 향합니다.  산모퉁이를 돌면 합천 및 의령과 경계를 나누는 창령땅 적포교가 나옵니다.  길이 없기에 이방면으로 가서 현장천과 둔산천을 따라 성산리로 향합니다.

 등림마을 제방에서 황강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망초 수북한 등림마을 제방 끝으로 갑니다.  

좌측 의령 부림쪽에서 합천 청덕으로 가는 20번 국도가 낙동강을 따라 오릅니다.  그리고 우안의 창령 현창리라 보입니다. 

 둔치가 발달해 있고 성분은 점토질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무빛 입니다.

 다리 건너 좌측이 의령 낙서쪽이고 우측이 합천쪽입니다.

 옛날 적포교의 흔적입니다.

 강의 좌안이 창령 유어쪽이고 우측이 의령 낙서쪽입니다.  흰 연기 나는 곳이 신반천 하류로 순전히 의령땅 만을 적신 유곡천이 부림면 오소교에서 합류합니다.

 

             

신반천은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를  발원지로 하여 다섯개의 지천을 거느리고 오다  부림면 손오 마을에서  유곡천을 데리고 낙동강을 만남니다.  길이는 애나 신반천 보다 1km 긴 28km입니다.  발원지는 지난 1982년 우순경 사건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궁류면 벽계 계곡입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제 고향집 앞을 흐르는 상곡천과 합류하여  신반천을 만나 낙동강이 됩니다.

 

 유곡천 중류입니다 . 제 고향은 강의 우측 끝에 있고 상곡천(4.28km)이란 이름으로 유곡천으로 흘러 듭니다.  제 유년의 강입니다.

 

        꽃 3

꼴베러 가던 새벽 산길

메꽃이나 달개비 참꽃같은

하마 잊었던 이름

라일락을 수수꽃다리라 하고

코스모스를 살살이꽃이라 부르던

내 유년의 물수제비 뜨던 유곡천 언저리

물무늬 번져오던 나즉한 속삭임

그새 잊었는가

오늘 낯선 꽃물결 술 마시듯

쉽사리 취해버린 박꽃같은 사람아

이제는 메니큐어 립스틱 요란한

서양도깨비 분칠일랑 지우고

봉숭아 곱게 물든 팔월 저물녘

소 몰고 귀가하는 들길에 서서

패랭이나 쑥부쟁이 개망초 더불어

우리 다시 마주 서 볼 일이다.

(1987)

 

 사실 90년대초만 하더라도 시냇물 수준이었습니다.  그랬던 시내가  태풍 '루사'와 '매미'를 경험하면서 마을 일부가 침수되는 등의 소란에 빠지고 시내는 원형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배수로가 되어 물을 가두고 자시고할 필요도 없이 쓸려 나가버림니다.  가끔씩 고향을 찾을 때 마다 참 허전합니다. 비단 제 고향뿐이겠니까.  조그만 실개천 , 시내고 막론하고  죄다 그렇게 만든 것이 지난 몇년의 하천 정비입니다. 고향의 상실입니다.

어쨌거나 그 시냇물을 기억하며 오늘의 낙동강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흔치는 않은 일인듯 합니다. 

 

  희 망

아버지의 고정관념은 무섭지만 허술하다

오늘도 부자는 테레비젼 앞에서

서로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지만

종국에는 아들의 또박또박 들이 되는 논리 앞에

아버지는 그만 말문이 막혀 뭐 뭐 하다가

아무튼 빨갱이는 안돼라고 우기지만

이쯤에서 나는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일테면 부자가 같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땅 유곡천처럼

아버지는 한사코 남강의 지류라고 하고

나는 낙동강이라 한다 하다못해

아들이 지도를 펴 놓고 이래도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아무렴 어차피

남강이나 낙동강 흐러흘러 남지나 창령에서

한물이 되어 결국 하나되는 남해인 것을(1993)

                                                                                                   사진출처: 의령군

 유곡천이 마두를 휘돌아  낙동강으로 향합니다. 

신반천 하류와 토평천 하류가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우포늪으로 부터 흘러 나온 토평천이 낙동강으로 들어갑니다.  우포늪은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 약 70만 정도의 면적으로 국내 최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포늪은   습지 (濕地, wetland)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로서 예전 의령과 함안, 창령 일대의 수변은 대개가 늪이나 지로 불리울 만큼 질퍽한 땅이 많았습니다.   늪으로의 기능의 유지는 낙동강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예 쓸모 없는 땅으로 방치했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습지들이 변화를 맞이한 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매립 개간되어 농지로 전환되었고, 이후 공업용지나 기타 다양한 용도로 전환되면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사실 습지가 일반인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말 쯤이었습니다. 환경운동 진영에서는 90년대 중반부터 습지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보전운동이 성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우포늪입니다.  지난해 창원 람사회의 개최 역시 같은 선상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부도  1997년 우포늪에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태계보전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 고시하는 한편 최근에는 습지보호구역으로도 지정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환경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3년 주기로 대륙별로 돌아가며 개최되는 람사회의의 한국유치와  작년 11차 창원 대회 역시 환경운동진영이 큰 역할을 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현재(사실은 아주 오랜 세월부터지만 ) 우포늪은  육지로 이행하는 생태적 천이의 중간단계에 있으며 각종 물질의 전환을 비롯하여 생물상의 종 조성에 있어서도 고도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구사에서 가장 높은 생태계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운하사업과 4대강 정비는 이같은 습지 자원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국내외적으로 알려진 우포늪 같은 습지에 대해선 영향을  

최소화 하는 조치가 있겠지만 사실은 더많은 습지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질 운영입니다.

          

의령군 낙서면 진동고개입니다. 낙동강이 낙서면의 이근리, 내제리,여근리,정곡리, 율산리를 휘돌아 내려오는 장면입니다.    

 

강물은 박진교를 거쳐 함안 칠서와 창령 남지를 향합니다   

지정면 성산을 기준으로 보면 의령지역 나루터로는 가장 위에 위치하는 곳으로 웃개나루를 시작으로 연늪나루- 우질포가 있으며, 건너편  창령땅에는 개벼리길이 시작되는 창아지나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강 합류부에 있는 성산 땅에  거름강나리(기강나루, 岐江津)가 있습니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합니다. 사진속의 합류는 2008년3월의 상황입니다.  겨울 갈수기 대구, 고령으로부터 오수를 끌고 들어온 낙동강을 남강이 일정 부분 치유해주고 있습니다.  우안의 칠서 용화산(193m)입니다. 앞으로 강은 이렇게 양지역을 끼고 흐릅니다.

 

창령-이방/유어/남지/영산/도천/길곡 /부곡 밀양-초동/하남/삼랑진 양산-원동/물금 부산-북구 /사상 /사하구

 

                          낙        동        강

의령-낙서/부림/지정 함안-대신 /칠서 /칠북 창원-북면 김해-대산/한림/생림/상동/대동 부산-강서구

 

가만 보면 창령이 낙동강 흐름에 있어 상당히 많은 면적을 물고 있습니다. 창령의 경우 서남쪽이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로 하상과 큰 차이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물이지면 상습적인 범람이 있고 이에 대비하여 곳곳에 제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 제방은 게속 증고를 해왔습니다. 

 

한편 이곳 고로의 말을 들면 안동댐과 임하댐 등이 서고 난 이후와 또 합천댐이 들어서고 난 이후 강의 흐름은 작아졌고, 유량이 줄다보니 그동안 질퍽이던 땅들도 농사를 지을 수있는 땅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거기다 낙동강 상류물은 영천댐 물은 포항제철로 빼가고, 남강물은 홍수방지를 위해 사천으로 빼 내다 보니 유량은 더욱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근의 습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농작물 역시 논농사 보다는 양파, 고추, 마늘 등 밭농사 위주인데, 예전 나루터가 주요운송 수단이었던 시절에는 땅콩, 면화, 삼, 보리, 콩을 박진나루로부터  시작하여 남지(웃개나루), 송진(쇠)나루, 멸포나루, 임해진 나루로 전해 졌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항안 칠서와 창령 남지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남지땅 둔치 넘어 부자 창령건설이란 토끼상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확실히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박통시절 에는 가난과 새마을로 넘치면서 엉망이고, 전두환 시절에는 정의사회 때문에 돌겠더니,  이즘은 부자되세요 라는 말이 새해인사가 된 세상입니다.  부자를 거부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은 부자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얼마나 더 팔아야 할 지... 강물이 해를 담아도 희안하게도 어둡습니다.  제 마음인 것 같습니다.

 날이 덥습니다. 허기도 지고

 낙동강교 넘어  창령 화왕산 줄기가 어깨를 걸고 있습니다.

 올봄 저 산에서 늘하던 억새태우기 행사가 잘못되어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망우(忘憂)정입니다.  의병장 곽재우가  말년을 은거하다 보낸 생을 마감한 곳이랍니다.  1602년 그는 이곳 창령 도천면 우강리에다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자그마한 집을 짓고 망우정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호도 망우당이라 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채 살았습니다.

파트너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불운한 사람입니다. 적과 싸울 적에는 용맹과 의기가 있는 당대의 호걸들( 이순신 장군이며 김덕룡 장군 등)과 지혜를 나누고 무장으로서 거침없는 진군을 했습니다만  전란이 끝나고 벌어진  참혹한 일(김덕룡의 억울하고도 비참한 옥사 등)들은 애초에 출사를 거부했던 장군으로서 세상과 문을을 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골이 보기 싫었던 것이지만 거듭되는 벼슬 제수(무려 스물 아홉번)에 마지못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의령 유곡면 세간리 그의 집 현고수(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의병을 일어킬 때처럼 전란이 끝나고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 우강에다 삼칸 기와집을 지어 근심과 걱정을 잊고자 했던 것은  세상  덧없는 것에 대한 초연함이 아니었겠는가  싶습니디만 어지 그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초연한 것은 낙동강 처럼 흐르고 흐르는 일인 것을,  문득 그때도 시방처럼 저렇게 많은 모래가 이 강가에 덮여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곽재우가 전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으로 .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래 함안,영산,창녕에서 홍익장군으로

불리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장군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이 뜻을 모아

1789년(정조 13년)에 세운 것입니다.

(높이 180cm 너비 70cm )

 

 임해진을 향합니다.  이 구간 어디 쯤 함안보가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한 떼의 넥타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강에 들어설 보그림을 들고와  어느기관의 고위공무원에게 현장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달려 들었습니다.  거거 뭐냐고? 그림좀 보자고?  그러자 기관쪽 인간  하나가 양미간을 좁히며, 불쾌하고 무례하다는 표정입니다. 해서 저도 양 미간을 좁히며 넌 뭔데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 아 거 그림좀 보자니까" 순간 공무원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업자인 듯한 서울말씨 쓰는 자가 친절하고도 예의 바른 모습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  농민이세요.?"                                                 

 순진하게도 저는 "농민은 아니다." 라고 말했고 그들은 서둘러 사라졌습니다.

 제 눈에 들오 온 것은 "함안 다기능 친환경보" 란 글자 뿐이었습니다. 

 하구둑 다음 낙동강에 처음으로 들어설 보가 함안보 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역 농민 세분이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 어떤 이야기는 들었을 텐데, 말 건네기가 쉽지 않아  그냥 하류로 향합니다.  참 브리핑 장소는 길곡 주유소 앞 이었습니다.

 

 

 양복쟁이들이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 봅니다.

 창녕 부곡 노리 북쪽 임해진(臨海津)입니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이름으로 50년대에는 5일장이 설 정도로 번창했고 노리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 절벽에서 낙동강의 유장함을 맛봅니다.  헌데 이길을 개들이 오가며 열었고, 노리입구에는 그 감사의 개비가 있습니다.

지난 1973년 부곡에서 온천이 발견 된 이후 부곡온천은 1977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월 18일자로 문화관광부로부터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제는 일대에 들어선  부곡하와이를 비롯하여 관광호텔 5개소, 숙박업소 23개소, 상가 21동 등에서 배출하는

오폐수가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그 물은 온정천을 타고 내려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임해진 옆에는 일대의 주민이 상수원으로 이용하는 낙동강  취수탑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 해야 할 지.

         

 그러거나 말거나 낙동강은 흐르고 흐를 뿐입니다.  마치 씨발씨발 투덜거리며 흐르는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피곤한 빛이 역역합니다. 

그런 낙동강을 때마침  자귀나무가 꽃을 피워 위로하는 듯 합니다. 

 

 


Sitin' one The Dock Of The Bay- Otis Redding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