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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2009 낙동강 1300리를 가다/ 삼랑진에서 부산 화명동까지 1-아홉날

by 이성근 2013. 6. 7.

 

낙동강이 밀양강과 합류하는 삼랑진입니다. 우측 매봉산 자락에 오우정과 함께 뒷기미 나루가 있습니다. 요산 선생의 '뒷기미나루'로  등장하는 곳입니다. 낙동강과 밀양강 물길을 따라 노를 젓고 강변 모래 품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순박한 박노인 일가의 비극을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광복 이후 이념적 혼란기를 그린 소설입니다.  이 나루터에서 징용과 정신대로 끌려가며 울며 불며 건너던 억울한 사연들이었습니다.

 

뒷기미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마중갈까나

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을랑 보내고 눈물의 나리

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좌측 수변은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땅입니다.  좀더 올라가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를 거쳐 온 화포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이 나오고 좀더 오르면 수산교가 있고, 좀더 오르면 본포교를 만나고 임해진을 돌아 남강과 합류하는 낙동강을 만남니다.

 화포천 하류 2002년 물난리 이후 국내에서 가장 큰 배수장을 세웠습니다.  그 옆에 위치한 마을이 시산마을입니다.

 밀양과 창원 사이를 오가는 수산교에서 본포 방향으로 본 낙동강  

 본포교에서 창령 부곡 임해진 방면으로 본 낙동강입니다.  장면들은 한참 대운하반대 운동을 벌일 당시인 2008년 2~3월 답사때입니다.

 

 

三浪이란 밀양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을  뜻하는 지명으로 지형적으로 세갈래 강물이 부딫쳐서 거센 물결이 이는 곳입니다.  옛부터 삼랑나루는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입지였고, 영조 41년(1765년) 삼랄창이 들어 섰습니다.  삼랑창은 밀양, 현풍,창령, 영산, 김해, 양산의 세곡을 모아두는 곳으로 흔히들 경상도 삼창은 사천의 가산창과 마산의 석두창을 꼽습니다.   

 이런 삼랑진의 풍광을 고려중기 원광스님이 글을 남겼습니다.

 

호수위에 청산이요 / 청산 아래누각인데 / 아름다운 이름이 / 길과 물과 같이 흐르네/  물가의 가계는 / 달팽이 껍질처럼 늘어서 있고

바람개비 춤추는 배는 / 물결을 헤쳐 간다/ 시골집에 연기가 깊어 / 천리가 저물어 가는데/  마름꽃과 연꽃이 늙어 / 온 강에 가을빛이로다

저녁노을에 따오기 소리/ 말을 한 것 같고/ 새로 시를 지으며/ 훌륭한 유람을 기록하도다  

 

아마도 그시절에는 따오기가 흔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사라진 생물이 어디 따오기 뿐이겠습니까만

 삼랑진 철교를 중심으로 위쪽을 상부마을 아래쪽을 하부마을로 나뉘며 그 경계지점은 각거리라 하여 주막이나 점포 등이 잇었습니다.

 지금은 쇠락하여 고기잡이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곳 역시 교통의요충지 답게 수많은 교량이 설치되었거나 되고 있습니다.  헌데 좀 어지롭습니다.  옛날의 그 풍광은 간데 없습니다.

 상부 마을 입구에 있는 점방에서 본 좀 오래된 한국전매공사 담배광고 판입니다.

 철교를 건너 가야진사로 향합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을 고시한 직후 내걸린 현수막입니다.

 붉은 표식이 눈에 들어 옵니다.  아마도 제방 증고사업이 이루어지는 지점인듯 했습니다.

 낙동강역입니다. 역무원이 없습니다.  참 조용합니다.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신 주말이면 낚시꾼들이 인근 삼랑진 습지 등으로 가느라 제법 웅성이기도 한답니다.    

 삼랑진 제방을 지나 삼랑진 쪽 도요나루를 향합니다.

 김해 생림쪽 도요리가 건너다 보입니다.

 하천부지를 빌어 쓰고 있는 농민들이 정부의 4대강 정비에 분노를 표하고 있습니다.  황지에서 창령을 거쳐 와도 보지 못했던 ㄱ겨한 문구이자 최초의 현지 주민들의 입장이었습니다.  

 목숨걸고 막아내자 낙동강 정비사업 

 다행스런 현상입니다.   정부는 낙동강에 4.45억 입방미터의 모래를 준설하기 위해 강 주변의 농가에 보상비를 책정했습니다.  2조8천억원이며 토지 규모는 5천 만평인데 국가로부터 점용허가를 받은 하천 구역내 경작지에 대해 2년간 평당 1만원 꼴인 셈입니다. 

 준설이 가시화 될 경우 삼랑진 늪같은 하도습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물그릇을 키운다고 하지만 최악의 방법으로 물그릇을 만들 뿐입니다.  물그릇속으로  몰려드는 그 벌떼같은 지천의 물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또 그물에 딸려오는 모래 등의 골재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결국은 도로아미타물이 되거나 더욱 심각한 재앙만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형사고가 터지면 또 뭐라 할 것인지,      

 1970년에 세운 작원교 아래로 안태계곡의 물이 삼랑진 양수발전소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들고 있습니다.

 양수발전소 참 지긋지긋합니다.  제가 알기론 양수발전소는 핵발전소 가동으로 남는 심야 전력을 이용하여 하부댐  안태호(安台湖)의 물을 상부댐 천태호(天台湖)로 끌어 올려 그 물을 다시 아래로 떨어뜨려 생기는 낙차의 힘으로 생산되는 전기입니다.  전기는 남아도는데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 양수발전소를 만들고 주간시간대에는 전력 소비량이 많아 전력이 부족하다 하여 핵발전소를 증설하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여기서 확인하고 갑니다.

 

 삼랑지 늪으로 불리우고 있는 습지입니다.

 

 삼랑진 읍 검세리 검세터널 앞입니다.  멀리 김해 쪽 무척산과 석룡산이 첩첩으로 한무리의 구름을 이고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곳은 물이 범람합니다.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은 홍수터로 해서 저류기능을 높이는  방향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도 일괄 준설을 하여 수심을 맞출 요량인 듯 합니다.  시방도 삼랑진 철교까지는 선박 운행은 무난합니다.

 토곡산 자락에서 본 낙동강입니다.  옛날 이 길은 영남대로 950리 중 한가닥이었습니다 흔히 이 옛길은 역로(驛路)라 하여 조선 경상좌도 동남단 동래~한양길을 말합니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에 보면 전국을 아홉 갈래 큰길로 분류하고 있는데 제4~6로가 경상 좌.우도를 경유하는 길입니다.  그 길에 의거 하여 본다면 가야진사에서 원동- 토고 내포진- 경파대-황산역(물금)의 길입니다.  낙동강 하류에서도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난 구간입니다.     

 

 

 원동습지입니다  낙동강 본류 좌안 경부선 철도를 따라 이어지는 습지로서  물억새,갯버들,,족제비씨리가 혼재하며  갈대군락, 달뿌리풀이 군락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물그릇이란 이런 습지를 말합니다.  낙동강의 습지는 일제시대 이후 90% 이상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습지는 일반적으로 과습한 환경에서 생육하는 초목이나 이끼류가 덮인 곳으로 동식물의 서식환경을 제공하는 한편  많은 물을 축적할 수 있어 저수지로 기능할 수 있으며, 하천과 지하수의 물공급원이며, 식생이 물의 흐름을 지연시켜 수량의 극심한 변화를 막고 하류의 파괴적인 홍수 발생을 완화시켜주기도 합니다.  람사협약에 따르면 습지란 습원, 늪, 이탄지, 수역을 말하며 천연이든 인공이든, 영속적이든 일시적이든, 정체되어 있든 흐르고 있든, 담수, 기수, 염수를 불문하며, 저조시 수심이 6m를 넘지 않는 해역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습지는 대부분  주변 지역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찌꺼기가 몰려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습지 침전물의 호기성, 혐기성 층은 탄소, 황, 질소, 인의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질소, 인 등을 제거하기도 합니다. 

     

 화재천을 건너 물금으로 향합니다.  거기에 임경대(臨鏡臺)가 있어 낙동강의 명경지수를 바라봅니다.  해운 최치훈이 해안사 가는 길에 잠시 쉬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경파대(鏡波臺)도 이 구간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 지점은 요산 선생의 소설'수라도'에 등장하는 벼리끝 큰 바위가 아닌가 생가들 합니다만  지금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최고운은  임경대에서 이른 글을 남겼습니다.

 

 

 

연기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물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 마주 하고 섰네

어느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없네

 

Pretty Woman - Roy Orb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