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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2009 낙동강 1300리를 가다/ 구포에서 을숙도까지-열날

by 이성근 2013. 6. 7.

 

 

교통의 요충지여서 남북으로 혹운 동서로 교차하는 수많은 다리가 구포역 일대의 수변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구포는 감동진, 혹은 감동나루로 불렸습니다. 낙동강 3대 나루터의 한곳으로 수로교통과 교역의 시발지로서 강변 언덕에 정부의 세곡을 보관하는 남창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시대 강 건너 대저 배와 삼락의 딸기가 이곳으로 건너와 전국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처리되지 못한 하수가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강가로 가기 위해선  마음 놓고 질주힐 수 있도록 만든 저 도로를 넘어가거나 지하로 건너가야 합니다. 다대항 배후도로의 막강한 위력을 확인합니다. 1996년 착공하여 2006년 완공했는데, 이 도로는 화명에서 양산까지 5.5km 도로와 연결될 예정입니다.  졸지에 구포나루가 사라졌습니다. 약 4km 구간을 원래 구포둑을 통해 이동합니다.  예전 80년대  이 강둑에서 장어구이에 술 한잔 하던 기억이 그립습니다. 

 삼락둔치입니다. 누군가 텐트를 쳐놓고 휴일 하루를 즐기고 있습니다.  부산시는 공식적으로 이곳에다 텐트촌을 만든다고 합니다.

 삼락둔치의 면적은 약140만평 정도 됩니다. 부산시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10억 원의 돈을 들여 축구장 8면과 인라인 등 25개 체육시설과 문화광장 꽃길 등의 산책로를 조성했습니다. 전체면적의 6% 정도이며 친환경 영농지 등 완충녹지 지구는 전체면적의 39.6%입니다.  나머지는 생태보전지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공간 역시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기존 보전구역과 친환경 영농지를 철거하고 선착장 3면과 마리나, 청소년 캠핑장등의 위락시설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삼락 둔치부의 수제인 것 같은데,  원래 수제 설치의 목적은 제방으로 향하는 물의 흐름의 방향을 하천 중심부 방향으로 제어함으로써 제방의 국부적인 세굴을 방지하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용도이기보다 시민들이 와서 강 또는 물과 친해보라고 만든 친수공간의 기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성토가 되지 않은 자연초지와 묵정논 등은 멸종위기 2급인 맹꽁이 집단서식처를 비롯하여 생물종 다양성이 높은 공간입니다.  여기를 역부러 갈대습지원 , 골프연습장등의 이용을 위한 다목적 잔디밭이 게획중입니다.

 

 

 낙동강 둔치 정비와 관련 가능한 인위적 간섭 거리를 멀리하고 수변은 단절이 없는 상태이어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행정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접근로가 없어 주민이 이용하기 힘들고 유지관리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삼락둔치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인라인, 자전거가 달리는 길 외에 유지 관리용 길이 있습니다. 년간  유지비용이 꽤나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길에서 한 떼의 새를 만났습니다.  비둘기떼 였습니다.  어울리는 그림입니다. 

 본류와의 물교환이 의심되는 공간입니다.

 많은 비가 올때 사상구 일원의 침수를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 입니다.  삼락수로나 감전 수로에서 나오는 물길이지 싶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낙동대교의 진입부로 들어 섰습니다.   한가지 의문은  고속도로나 하구둑 큰 교량에는  왜 사자상이 많은지,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고 한데 왜 하필 사자인지, 아무튼 궁금합니다.  

 삼락둔치는 낙동대교를 경계로 경관을 비롯하여 생물상이 구분됩니다.  다리를 기준으로 위쪽은  사람들의 이용권인 반면 아래쪽은 생물공간이라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   

 겨울이 오면 큰기러기를 비롯한 오리류 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이웃한 염막둔치를 오가며 먹이를 찾는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하구에서만 새들이 사는줄 알고 이곳은 상대적으로 건드려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낙동강 하구의 철새도래지는 하구 모래사주와 둔치부의 수로나 호소화된 곳과 논 등의 경작지를 두루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하도 많은 개발이 이루어 지다 보니 하구둑 아래 만은 보존하자는 취지일 뿐이지 삼락둔치나 염막을 개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래 그림은 지난 겨울 같은 장소에서 찍은 장면입니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조망지가 낙동대교입니다. 사실 지평선이 존재할 리가 없는 곳이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한번씩 짬을 내어 방문해보라고 권하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가슴 답답한  날  

 수변 식생대가 잘 발달해 있을 뿐 아니라 경관 역시 뛰어난 곳입니다.  관광자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낙동대교에 서면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

말이 되고 싶다

 

보아라

수수만년 물길이 만든

저 편한 땅과 바다에 누운 하늘을

마냥 달려도 모자랄 듯

 

가슴을 온통 열어두어도

에누리가 없는 곳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

나는 말이 된다

(1985)

 낙동강이 마무리 흐름에 든 곳입니다.  이 강이 있음으로 하여 부산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김해가 존재합니다.

 염막둔치가 보입니다.

 염막둔치 역시 친절하게도 체육시설을 6개나 만들었습니다.  77만평 중 8.9% 2십만 6백4 평방제곱미터 입니다. 

 강도 피곤하고 강을 따라 걸었던 사람도 피곤합니다.  물집을 따는 중입니다.  하긴 언제 발바닥이며 발가락에 물집 생기도록 걸어 보겠습니까. 헌데 한 이틀 쉬자니  발가락이 가렵습니다.   

 염막둔치는 하구역 4개 둔치 중 자연도가 가장 높은 곳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에 논이 일조합니다. 11차  창원 람사회의에서는 논습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정비사업 과저에서 대규모 절.성토가 이루어져 습지와 육화나 갈밭중심의 단순 생태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이 일대를 찾는 가창오리나 청둥오리, 큰기러기들의 감소입니다.  2003~2004년 3,984 마리에서 2006~2007년에는 10분의 1 수준인 363 마리나 급감했습니다.   

 대신 어울리지 않게 비둘기가 흔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강을 모독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게획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현재 하구 준설 모래를 적치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No 1 이라고 적힌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마도  하구둑 수문 증설용 조사가 아닌지

 그러거나 말거나 몇 분의 아지매들이 좀주름다슬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재첩도 보입니다.   정말 뜻밖입니다.

 모래를 적치하다 보니 이런 환경을 좋아하는 쇠제비갈매기나 흰물떼새, 꼬마물떼새들이 알을 낳아 번식장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만  적치된 모래를 퍼내는 과정에서 번식기능은 중단되어 버림니다.  그 상황을 볼 수 없어 부산환경운동연합 하구모임이 알을 수거하여 인공부화를 시킴니다.  벌써 4년째인데, 지금까지  얼추 2백여 마리를 부화시켜 방사했습니다.  원래 모래나 자갈밭을 좋아하는 이 친구들은 하구 모래주인 신자도나 무명도 등지에서 번식을 합니다만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이곳에서 번식을 해도 괞찮겠다는 판단을 한 모양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나고 부모로부터 독립한 새들은 고향처럼 이곳을 방문하여 부모새들이 했던 것 처럼 짝짓기를 하고 산란을 하여 자손을 퍼뜨리는 일을 본능에 따라 할 뿐입니다.   

 문제는 준설을 할 경우 그 모래들이 어디로 가는 가 입니다.  예컨데 6m  깊이로 일정하게 파낸 모래들은 그 규모나 양어 어마어마 할 것입니다.  결국, 제대로 지켜져야 할 일대의 둔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용둔치는 시민 휴식 공간을 조성해야 되기 때문, 적치할 장소가 아닐 것이고 ... 하여간 하는 일이란게 이따위입니다.

 

 조정 경기 연습장입니다.  물닭아 참 많았는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이상 정붙일 곳이 못되어서 일까요.  6기의 수문이 증설될 지역입니다. 

 하구둑 입니다.

 을숙도 입구에서 잠깐 다리쉼을 한 다음 남단으로 내려 왔습니다. 1978년 '뿌리깊은 나무'5월호에 의하면 이곳 을숙도에 1954년부터 민가가등장했다고 하며 1978년 94가구  401명이 살고 있다고 전합니다.  물론 지금은 다 이주했습니다. 하구둑 공사가 시작되면서 였습니다.  

 그들은 하단에서 도선을 이용하여 세상과 접촉하며 살았습니다.  물도 사먹었습니다. 주로 재첩을 채취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하단, 장림,엄궁,구포, 삼락, 명지, 가락, 대저 등에 500 여 척의 재첩잡이 배가 있엇고, 채취방식은  간짓대에 매단 갈퀴로 바닥을 뒤져 잡았는데 1인당 하루 150kg 정도를 채취했다니,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재첩은 1975년부터 월 900톤 씩 일본에 수출했는데 30kg당 5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채취한 재첩은 가로세로 1cm크기의 망으로 각을 짠 채로 걸러 큰 것은 일본에 수출하고 작은 것은 국내 내수용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그 내수용 재첩을 1동이 1천원씩 받아 아지매들이 부산시내 골목을 돌며 '재첩사이소"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후 감속기를 이용한 무분별한 채취와 오염, 개발로 인한 서긱환경의 악화로 재첩자원은 고갈의 지경에 이르렀고 엄궁,구포,삼락 어민대 명지,가락,대저어민 간에 패싸움이 잦았는데 그마저도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뜬금없이 재첩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하구둑이란 것이 그만큼 일대의 삶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전체의 흐름 조차 왜곡시킨 구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국내 환경영향평가 대상 1호 사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시방 4대강 정비 역시 엉터리같은 짓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세상을 병신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강을 살리고 경제를 살린다고 참 많이 듣던 이야기 입니다.  내친김에 이야기 하자면 당시 개발론자들은 부산시민 80% 이상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강행했습니다.  그러면서 물은 더 맑아지고 철새는 더 많이 온다 였습니다.  그런 거짓말은 하구둑을 건설한 지 1년만에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을숙도 남단 가는 길은 조심스럽습니다.  헌데 이번에는 구포역에서 합류한 부산 길걷기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가세하다 보니 그 인원이 2백은 넘어 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부탁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명지대교가 이렇게 휘어진 이유를 도입하며 민감지역이라 강의 끝을 보시되 조용히 봐 달라는 부탁을 드렷습니다.   명지대교를 둘러싼 싼 공방이 샘삼스럽습니다.   

 드디어 을숙도 남단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도 하구둑의 영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서 길게 뻗어 나간 저 등의 이름은 '십리등'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등의 끝은  속칭 짤린섬으로 불리우는 명금머리입니다.  하구둑을 만들면서 뱃길과 물길을  만들기 위해 말그대로 잘라내버린 것입니다.  겨울이면 이곳은 한국 최대의 고니떼의 월동지가 됩니다.  저어새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맹금류도 가장 많이 보입니다.  그랬는데 명지대교 시공사인 주)롯데건설이 교각공사를 하면서부터 일대의 갯벌에 이상이 생겼고, 고니와 오리기러기류의 주요 먹이원 새섬매자기의 서식환경에 이상이 생겨 고니류의 급감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제기는 늘 무시되어 왔습니다.  

 순례단 막내인 홍주섭군(18세)의 발을 최연장자인 이용원님이 씻겨 주고 있습니다. 

 박정애 시인의 발을 생명그믈의 구영기 대표가 씻겨 주며 감사를 나눔니다. 참가자들은 발을 딱고 발바닥에 검정 먹물을 입혀 족적을 남겼습니다.  중간에 잠시 외도했다 합류한 저도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정말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순 도보순례라고 하기에는 그렇치 않나싶습니다. 원래 제대로 걷기에만 몰입했다면  아무리 못잡아도 보름 이상은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박정애 시인이 낙동강에 받치는 헌시를 낭독합니다.  그만 또 가슴을 칩니다.

 

아, 낙동강

    -2009년 낙동강 도보순례를 마치고

 

                               박 정 애

 

 

민족의 영산, 태백에서 을숙도까지

산과 물길이 서로 배려하고 응원하는

수려한 우리의 산하를 보았다

달리던 산도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그림자 드리우는 낙동강

반도의 혈관 속에 뜨겁게 울먹이는

건강한 피돌기소리 들었다

 

사람의 길은 그리움을 향해 열려있고

모든 생명이 먼 바다를 건너왔듯

다시 그 바다 향해 낮은 곳 내려선 수천수만

개울이 모여 천을 이루고 거대한 물길을 열어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저 그렇게

서럽도록 처연한

강물과 바람과 모래가 서로 윤기하여

이 땅의 모든 생명을 관장하고

우리를 먹여 살리며 끊임없이 격려하는

거룩한 어머니

 

비에 젖은 몸에 더운 김이 나듯

물씬한 흙냄새는 지친 발걸음에 힘이 올랐다

경모하고 경배할 뿐이겠는가?

땀과 눈물로 얼룩진 흰옷의 역사

아팠던 상처를 씻고 어루만져 달래는

그냥두면 영원할 것을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았다 경각에 놓인 운명을

근심하는 어머니

누가 모반을 꿈꾸는 가

 

무모한 인간의 이기를 눈치 챈

새들도 불안해 저들끼리 수런대는 거

갈 숲에 우는 엄마야 누나야

떠나는 것이 어디 새들뿐이겠는가

가만 두어라 가만가만 두어라

한없이 부드럽고 질긴 곡선 속에

먹줄을 놓고 한 획으로 내리그은

준엄한 말씀의 뼈가 있다 천명의 심줄

누가 거역 하겠는가

 

갇힌 물은 물이 아니므로 흘러야 하고

떠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다는 거

강은 인간을 살리나 인간은 강을 살릴 수 없다는 거

눈 있는 者 보고

귀 있는 者 들어 보라

낙동강 금모래 은모래 우는 소리

살아서 서럽고 외로운 우리 어머니

어찌 살고 어찌 살고

다리 뻗고 우는 소리

 

 해단식을 마치고 이곳 저곳에서 막걸리들을 사와 목을 축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회를 듣기도 하고 저마다 가슴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도 한 자락 불러 보았습니다.  김용택의 시에 정세헌의 곡 '꽃등 들어 님오시면' 이었습니다.

 

긴 어둠을 뚧고

새벽 닭울음 소리에

안개낀 강둑 따라 꽃등 들고 가는

흰옷 입은 행열을 보았나

때론 흐르는 물이 막히우고

때론 흐르는 길이 멀다 해도

아, 흐르는 일이야  행복하질않나

우리네 땅 되살리고

그 길 따라 꽃등 들고 가는

흰옷 입은 행열을 보았나

 

 해가 저물고 낙동강도 이제 비로소 긴 걸음 지친 다리를 누워 바다에 눕습니다.   

Sultans of swing / Dire St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