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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밥 먹다가, 울컥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

by 이성근 2024. 3. 2.

밥 먹다가, 울컥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박찬일/웅진지식하우스/2024.02.

박찬일-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사력을 다해 쓰는 사람. 서울에서 났다. 1970년대 동네 화교 중국집의 요리 냄새 밴 나무 탁자와 주문 외치는 중국인들의 권설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장면이 식당에 스스로를 옭아맬 징조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탈리아 요리를 전공했으며, 국밥에도 적당히 빠져 있다. 이탈리아 요리는 하면 할수록 알 수 없고, 한식은 점점 더 무섭다.

다양한 매체에 요리와 술, 사람과 노포 등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했다. 짜장면 : 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노포의 장사법,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펴내며 미문의 에세이스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tvN 수요미식회, 어쩌다 어른, 노포의 영업비밀등에도 출연했다. 현재는 광화문 몽로광화문국밥에서 일한다.

목차

먼저 읽은 이들의 말

펴내며 _ 잊지 않으려 쓴다

 

1 | 그렇게 사라져 간다

누구보다 만두에 진심인 사람이 있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녀석의 마음이 왔다

짜장면을 안주로 들면 그가 생각난다

40년 만에 갚은 술값

미디엄 레어가 웰던이 되더라도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너나없이 쓸쓸한 식욕으로 함바집을 찾았다

형은 미움이 없는 사람 같았다

뷔페의 시대가 가고, 친구도 갔다

 

2 | 차마 삼키기 어려운 것들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이야기

성게 함부로 못 먹겠다, 숨비 소리 들려서

요리사를 위한 요리, 스파게티 알라기레빠시

무언가를 입에 대지 못하게 되는 일

사라지는 대폿집 겨우 찾아 아껴 먹는다

그 고생을 해서 일급 제빵사가 되었지만

그대 팔에 불기름 뒤집어쓸지언정

이모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그랬을까

배달의 민족은 온몸이 아프다

소금 안주에 마시는 인생 마지막 술

 

3 | 추억의 술, 눈물의 밥

굶으며 혀가 자랐다

문간방 여섯 식구 밥솥의 운명

카레 냄새가 나던 일요일에는

종로 우미관 개구멍의 추억

찐개는 맞고 나서 만터우를 먹었다

그날 우리는 두부 두루치기를 먹었다 1

그날 우리는 두부 두루치기를 먹었다 2

우리는 그렇게 가난을 겨뤘다

노을이란 이름이 슬퍼서

매운 돼지곱창에 찬 소주만 마셨다

책 속으로

그는 정말 절박하게 학교를 다녔다. 이탈리아 학생들보다 더 악기를 잘 만들었다. 그는 쉼 없이 깎고 조이고 붙였다. 그가 학생 시절 만든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병을 내게 안겨주고 재워준 값으로, 그 막막하던 날을 견디게 해준 그에게 보탠 악기 나무 값이었다. 그런 호의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2023년 가을, 나는 10년 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닫았다. 짐을 정리하는데, 그가 보내준 커다란 원목 도마가 눈에 들었다.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나무를 다듬어 깎은 커다란 도마.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마. 나는 가만히 그 도마를 껴안았다. 마에스트로가 된 그를 기억하며.- 1.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중에서

우리들, 그러니까 오랜 친구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전화한 것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망하는 판에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거래처 빚을 갚았다. 그러고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마지막으로 직원 월급을 주려고 했다.

상가는 북적였다. 마치 호상 같았다. 바보 같은 친구가 뿌린 씨앗이었다. 돌아서는데 부인이 울면서 우리에게 한 장씩 봉투를 주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인가 했다. 삼우제에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큰돈을 친구에게 빌려준 녀석들이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에는 친구의 사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덟 장의 편지를 모아 삼우제를 한 사찰 마당에서 태웠다. 친구의 마지막 밤은 그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광풍 같았던 뷔페의 시대는 흘러갔고 친구도 갔다.- 1. 뷔페의 시대가 가고, 친구도 갔다중에서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 때였는데, 가게에 웬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고추장 1킬로그램과 마른 멸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그 녀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운송료가 고추장과 멸치 값의 열 배는 들었을, 지구를 반 바퀴 돌다시피 해서 녀석의 마음이 왔다. 밥을 지어서 고추장 두 숟갈쯤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넣고 엑스트라버진 최상급 올리브유로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정작 한국에 와서 진짜로 크게 울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영정 안에서 웃고 있는 후배를 보니 심장이 턱 막혔다. 요즘도 마트에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과 똑같은 빨간 상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나는 발바닥이 쑤욱 꺼지는 것 같다.- 1.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녀석의 마음이 왔다중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며 할매 해녀가 집에 찾아든 손님에게 밥상을 차린다. 그만두시라고 만류해도 주섬주섬, 어머니들이 그렇듯 뚝딱 밥상이 놓인다. ‘천초라고 부르는 해조 무침이 맛있어서 기억해두었는데, 나중에 누구에게 이 말을 듣고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 천초라는 게 바다에 무성하게 자라면 작업하는 해녀 발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합니다. 저 검은 바닷속은 순간에 생사가 갈립니다. 그래서 하늘 천() 풀 초()라고 하는 이도 있어요. 하늘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나요. 바다 밑은 용궁이고, 저 위는 하늘입니다. 어쨌든 그 위험한 천초를 싫어하는 해녀가 많습니다…….”- 2. 성게 함부로 못 먹겠다, 숨비 소리 들려서중에서

옛날엔 제일 좋은 호텔이었는데 오래됐으니까. 내가 지었으니까 마음에 짠하지. 길 가다가 높은 건물이 있으면 그냥 보이지 않아. 계단도 보이고, 비계(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작업대)도 보여. 짓는 모양이 눈에 다 보이는 거지. 사람들은 몰라. 우리가 뼈 빠지게 져다 날라야 건물이 된다는 걸.”

시장통에 가게를 하나 얻었다. 만 원 주고 대폿집이라고 페인트로 써 붙이고 장사를 시작했다.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가 잘됐다. 그렇게 해서 벌써 50년이다. 어디 번듯한 가게들은 노포라고 칭찬도 받는데 이 집은 찾아갈 수도 없는 시장 구석에 반쯤 없는 듯 있다. 낮술이 취한다. 걸어 나오는데 그이가 지었다는 늙은 관광호텔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미지근한 시간이 또 이 지방 도시를 채우고 있다.- 2. 소금 안주에 마시는 인생 마지막 술중에서

페이스북이 진규의 소식을 알려왔다. 다시 중앙시장에서 만났다. 30년 만이던가. 돼지곱창 안주였다. 여전히 매웠다. 아린 속에 찬 소주를 붓는 방식으로 마셨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주 도수만 25도에서 18도로 낮아졌고 우리는 늙었다. 진규는 어쩌다가 그 골목에서 돼지곱창 노점을 인수해서 한동안 장사를 했다고 한다. 장사가 제법 되었다. 한 사람 건너 식당 차리고 카페나 술집을 하는 나라다운 일이었달까. 기술자였던 진규는 곱창을 볶고, 글 쓰던 나는 파스타를 볶는다. 다들 볶고 있으니 사 먹는 건 누구의 몫인지. 하기야 식당 주인들이 돌려막기 하듯 서로 각자의 식당 밥을 팔아주며 버티는 건 아닐까.- 3. 매운 돼지곱창에 찬 소주만 마셨다중에서

 

 

밥 먹다가 울컥, 읽다가 또 울컥

글 쓰는 요리사박찬일이 목구멍을 타고 사라지는 그리운 것들을 책으로 묶었다. 절반은 결핍,나머지 절반은 먹은 음식을 둘러싼 사람의 이야기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213일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시사IN 신선영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SNS에는 맛집 인증 사진이 끝없이 올라오고, 유튜브에는 먹방 영상이 줄줄이 이어진다. 얼마나 흡족한 식사를 했는지, 얼마나 특별한 시간을 보냈는지, ‘나의 경험나의 만족을 뽐내는 말들이 먹음직스러운 음식 위로 쏟아진다.

여기 시선을 반대로 돌린 밥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아니라 밥상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주방에서 김이 펄펄 나는 공깃밥을 담아주던 너를 기어코 기억한다. 너는, 후배의 식당에 철지난 양복을 입고 찾아와 꾸역꾸역 크림스파게티를 먹던 만술이 형일 때도 있고, 일찍 세상을 떠나, 같이 먹던 돼지 껍데기 앞에서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는 옛 친구일 때도 있다. 줄 것이 없다며 달걀말이·홍어회·노랑조개·자랭이·오징어전·부추전을 내오는 홍집 사장님일 때도 있으며, 늦잠 자는 아들을 깨워 간장과 다진 마늘에 파를 넣고 두부조림을 해먹이던 내복 차림의 아버지일 때도 있다.

박찬일 셰프는 밥 먹다가, 울컥서문에 우리는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그렇지만 흘러간 기억 안의 사람들과 먹을 수는 없다. 그게 그립고 사무쳐서 잠을 못 이룬다라고 고백한다.

20226월부터 20236월까지 1년 동안 시사IN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올해 2월 단행본이 나왔다. 단독 저서로 15번째 책이다. 이름난 글 쓰는 요리사답게 침샘과 눈물샘을 동시에 건드리는 절묘한 글맛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연재가 끝난다는 소식에 시사IN한 독자위원은 박찬일 셰프의 글을 계속 보게 해달라는 청원을 남겼다. 연재글에 나오는 대폿집의 위치를 묻는 독자의 메일이 편집국으로 오기도 했다.

213일 오후 3,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봇짐처럼 큼지막한 백팩에 형광색 밴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술 마시고 귀가하던 밤, 오토바이에 살짝부딪힌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을 방지하게 위해 달아놓았다고 한다.

요리사의 책이지만 음식 이야기는 아니다. 먹다가 울컥하게 만든 사람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먹는 얘기를 통해서 내가 살아왔던 삶과 한 시대를 말하고 싶었다. 나는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먹는 순간에 대한 기억들이 선명하다. 그건 결핍 때문이다. 모자라니까 인상적으로 남는다. 책 속에 굶으며 혀가 자랐다라는 글에도 썼는데 사흘 넘게 배를 주리다가 먹었던 덕용 라면의 찐 기름 냄새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덕용 라면은 일종의 대형 포장 라면이다. 다섯 개가 한 봉지에 담겨 있는 제품이라 약간 싸다. 아버지가 어디서 그걸 구해 오셨다. 농심라면이 나오기 전에 있었던 롯데라면이었다. 산패돼서 아주 역한 기름내가 났다. 며칠을 복통으로 고생했지만 그 라면으로 가족들이 살아났다.

왜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나?

나이를 먹고 그러니까 마음속에 자꾸 차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미래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도 그렇고, 내 글도 그렇고 신파다. 눈물 짜내는 글에도 효용이 있다. 과거를 회상한다고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잊힌 것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에도 사람의 존재 가치가 있지 않을까. 옛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삭막하지 않나. 그게 눈물이든, 옛 사람에 대한 기억이든, 그걸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윤활(潤滑)이 된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 볕 들 날 없던 인생들에 대한 얘기가 많은 건 그게 기억에 더 남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에게 바치는 공개적 조사(弔辭)라고 얘기하는 건 과장이고, 씀으로서 해원(解冤)은 좀 하고 싶었다. 걔네들이랑 밥 한 끼, 술 한 잔 더 못했던 빚진 마음을 갚고 싶었다. 실제로 갚아지지는 않겠지만. 대중들은 모르는 내 지인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다. DJ 집에서 먹은 밥 얘기를 쓴 건 아니니까.

정말 오랜만에 녀석과 만난 곳이 모래내 중국집이었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녀석은 짜장면이 불고 있는데도 젓가락을 잘 대지 않았다. ‘미안하다. 못 지켜서. 집사람은 도망갔어.’ (···) 다시 만난 건 적십자병원 빈소였다. 이 글 초고를 써놓고 방산분식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잘 살고 있냐. 거긴 소주 있냐(‘짜장면을 안주로 들면 그가 생각난다).”

DJ?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밥 먹은 적이 있나?

그 얘기를 하면 긴데기자로 일할 때다(박찬일 셰프는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34세이던 1998년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특종 기회를 놓쳤다. 1997년 대선 날, 기자라고 얘기 안 하고 DJ 집에 미리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정치인의 집에는 각종 지지자들이 많이 갔다. 야당 정치인은 더더욱 그랬다. 그 집에서 밥 먹고 그냥 뭉개고 있는 식객이 많았다. 자칭 김대중 선생 비서 했던 사람이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저녁에 당선이 확정됐다. 이 양반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왔다. 다른 기자들은 그날 외부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자택 안에 기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때 짧게라도 인터뷰를 했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으면 큰 단독이었다. 카메라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차마 말을 못 걸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완전히 퀭한, 탈진한 모습으로 2층 침소에 올라가는데 질문을 못하겠더라. 나는 기자로서는 글러먹은 사람이다. 거기서 밥만 두 끼 먹었다. 밥은 계속 차려줬다. 아침에는 떡도 줬다.

측은지심이 큰 것 같다.

과잉이다. 연민이 많다. 그래서 문제다. 도움이 안 된다.

책에서 줄곧 그리워하는 대상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통은 외면하거나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다.

나중에 글을 모아놓고 봤더니 화교나 조선족 얘기가 많았다. 어렸을 때 나에게 만터우(중국식 만두)를 준 친구 찐개는 화교이고, 세금을 체납해서 내게 연락이 왔던 찐쩐룽 씨는 조선족 동포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그분들이 한국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더라. 피차별 민족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이 갔다. 어찌 보면 동정이다. 동정이지만, 동정이 깊어지면 관심이 되고, 관심에 논리적인 시선이 더해지면 그 사람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나는 아웃사이더라서 그런 정서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결정돼 있다. 유년기에 가난하게 살아서 결식을 경험하고, 그게 분노가 되고. 살아가는 방식에 계속해서 자극을 줬다.

시장 골목은 그 고장 사람들이 쌓아놓은 세월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박찬일 셰프는 말한다. 사진은 남대문시장의 식당 골목. 시사IN 신선영

먹는 것도 사람을 만들지만, 먹지 못하는 것도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절반은 결핍의 이야기이다. 나머지 절반은 먹은 음식을 둘러싼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왜 밥을 먹을 때 슬픔을 떠올리게 되는가에 대한 한 인간의 고민이 담겨 있다. 눈칫밥, 친구들과 먹었던 허접한 밥, 군대에서 먹었던 강요된 밥, 간도 쓸개도 두고 벌어와 새끼들 먹이는 밥 등등. 밥의 상징이 굉장히 깊으니까.

그냥 회상할 때보다 음식을 매개로 기억을 떠올리면 장면이 더욱 선명해진다.

음식에 관한 글을 그동안 많이 썼다. 사회적인 면을 짚기도 했고, 파스타나 와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런 얘기는 다 배제돼 있다. 짜장면의 면발이 어떠니 그런 것 다 빼고 짜장면이 갖는 감성적 측면, 그때 이 한 그릇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을 썼다. ‘누구보다 만두에 진심인 사람이 있었다에 만두에 관해 썼지만 재료가 어떻고 그런 말은 일절 없다. 오직 찐씨 아저씨의 무허가 인생에 대해서 글로 남기고 싶었다.

눅진한 사람 얘기인데 맛깔나게 읽힌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보인다면, 아까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게 되는데, 오래 생각을 해서 그렇다. 죽은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된 친구를 계속 생각하면서 왜 걔랑 한 번 더 만나서 소주를 못 먹었나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 대상을 소환해서 풀어낼 때 내가 개입을 많이 하게 된다. 파스타 얘기를 하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치대서 이런 맛을 냈다가 아니라 파스타를 준비할 때를 상기하면서 그때 밀가루의 밀도나 내 손에 닿는 감촉, 이런 걸 쓴다. 그러면 사람들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평범하지 않으니까.

조지 오웰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단호함이 별로 없다. 감정의 분출이 있고, 연민이 있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면 국제의용군에 참여하는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끊임없이 후회하고 빈정거리고 분노하는 오웰이 나온다. 의용군의 수기로 적합하지 않다. 너덜너덜한 생각들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본캐는 요리사이지만 작가도 정체성의 큰 부분일 것 같다.

기자를 그만두면서 그런 것도 다 버리려고 했다. 그 일이 주는 궁색함과 고통이 너무 싫어서. 내가 일찍 죽으면 다 글 쓸 때 생긴 병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섭외는 안 되지. 기껏 섭외했어. 그러면 누가 마감이라도 해주나. 글도 써야 하는데 또 잘 써야 하지. 옛날 어른들 말로 옘병이다.

쇠락하는 상권이나 전통시장 구석에 반쯤 없는 듯 있는 듯한보석 같은 식당들을 눈 밝게 찾아낸다. 비법이 있나?

대포라고 쓰여 있으면 끝내주는 집이다. 그런 상호가 붙어 있으면 들어간다. 요새 대폿집, 왕대폿집 자체가 거의 없다. 요리사들은 점심 장사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니 첫 식사가 보통 오후 3시다. 먹는 시간이 다르니까 자동으로 혼밥이 된다. 3시쯤에 혼밥하고 막걸리도 한잔 할 때가 있는데 요즘은 브레이크 타임이 생겨서 그런 식당이 점점 드물어진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하는 대폿집, 백반집, 그런 곳은 대개 브레이크 타임이 없다. 그분들은 열어두면 계속 장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당은 7~8개 나오는 반찬이 다 맛있는 안주거리다. 막걸리 한잔 마시면서 이런 거 저런 거 물어보곤 한다.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는 박찬일 셰프. 시사IN 신선영

글에 등장하는 주천집의 주소를 물어보는 메일이 시사IN편집국으로 오기도 했다. 강원 영월경찰서 주천파출소에서 보냈다. 지역 민원인이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식당의 실제 이름은 주천집이 아니다. 내가 그냥 술이 샘솟는 집(酒川)’이라고 상상해서 썼는데 영월에 주천면이 있는 줄 몰랐다.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있는 대폿집이다. 오해를 살까 봐 책에 실을 때는 술천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메일을 보낸 경위님에게 이 인터뷰를 빌려서 답을 드린다. 미안하게 됐다. 그 가게의 사연이 곡진하다. 할머니나 자손들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상호명을 밝히지 못했다. 글을 쓰려고 취재를 간 곳이 아니었다. 역마살이 있어서 혼자 많이 돌아다닌다. 요리의 영감을 얻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때도 지방의 시장을 찾았는데 대포라고 쓰여 있는 허름한 식당이 보여서 들어갔다. 낮술 한잔 하면서 잠깐 얘기하는데 어마어마한 삶의 내공이 그 안에 있을 줄은 몰랐지.

내가 벽돌을 마흔 장씩 졌어. 많이 져야 돈도 많이 받아. 그걸로 애기들 먹이고 다 했지. 이 가게에서 애기들이 학교 다녔어. 요기 2층 다락방이야. 아침에 밥 먹이면 여기서 씻고 학교 갔지. 옛날엔 온갖 음식을 이 좁은 데서 다 했으니까 수도도 있고 그랬지. 이 동네 ○○병원, ○○아파트, ○○호텔도 내가 지었어. 15층까지 곰방이야(‘소금 안주에 마시는 인생 마지막 술).”

요맘때면 그리운 음식, 덩달아 그리운 사람이 있을까?

짜장면을 같이 먹던 죽은 그 친구는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우리보다 한 살이 많았다. 군대를 일찍 갔다. 198429. 딱 지금이네. 강원도에 눈이 펄펄 날리는데 면회를 가서는 돌아올 차비까지 술 마시다가 다 써버렸다. 그래서 노숙을 하게 생겼는데 그때 근처 다방에서 불쌍하다며 컵라면을 하나 줬다. 그 컵라면 생각이 난다.

시사인 김연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