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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by 이성근 2024. 2. 18.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대한민국 경제의 불편한 진실)/최배근/월요일의 꿈/ 2024.02

최배근-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MBC 자문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0년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세계 100대 교수’, ‘세계 100대 교육자’, ‘21세기 세계의 탁월한 지식인 2,000에 선정되었다. 또한 2017년과 2018년 연속으로 마르퀴즈후즈 후(Marquis Who’s Who)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YTN <변상욱의 뉴스가 있는 저녁>, <김어준의 뉴스공장>,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KBS <최경영의 경제쇼><홍사훈의 경제쇼>, MBC(안동) <허환구의 라디오 오늘> 등에 고정 출연을 했거나 현재 출연 중이며, <한겨레21> ‘지구촌 경제’, <경향신문> ‘경제와 세상에 고정칼럼을 연재했다. 또한 풍부한 데이터를 활용한 냉철하고 날카로운 분석과 명쾌한 진단으로 시작한 유튜브 <최배근TV>는 현재(20241월 기준) 구독자 3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시민들이 주도해 만든 더불어시민당의 공동대표를 맡아 20204·15 총선의 승리를 주도한 후 바로 당 대표를 사임하고 본업으로 복귀했다.

저서로는 세계화, 무엇이 문제일까?,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최배근 대한민국 대전환 100년의 조건,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이게 경제다, 위기의 경제학? 공동체 경제학!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한국 경제 긴급 진단, 코로나 사피엔스, 새로운 도약, 거대한 분기점, 한국사회 대논쟁, 2018 미래 전문가가 말하는 서울의 미래등이 있다.

목차

서문 -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들과 민주주의

1. 화폐와 민주주의

경제는 돈(권력)의 배분 문제

대영제국의 힘의 원천

불환화폐 탄생과 유한책임 회사

정부 채무(원금)는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

11표와 11표는 쌍생아

재정의 진짜 이름은 공공금융

 

2. 대한민국에서 돈의 배분

민주화의 역설, 시장(권력)의 독주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

자본의 하수인, 모피아

정부 채무 겁박론은 가짜뉴스

몸에 맞지 않는 유로존 재정준칙

재정준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자본 탐욕의 이데올로기, 재정 지출 최소주의

재정건전성을 진짜 원하는가?

한국 경제의 출구

한국형 양적완화와 기본주택

교육 혁명

 

3. 화폐 권력의 이동

흔들리는 달러(미국채)의 힘

화폐 권력의 다원화와 성공 조건

 

나오는 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두 개의 바퀴

 

- 대한민국은 어쩌다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이 되었는가

- 대한민국은 어쩌다 불평등과 양극화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 대한민국은 어쩌다 인구소멸 제1순위 국가가 되었는가

- 대한민국은 어쩌다 모피아라는 말을 갖게 되었는가

- 대한민국은 어쩌다 잃어버린 30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되고 있는가

한국이 이렇게 망가진 이유는 한국 사회와 경제가 부동산 카르텔이 만들어낸 사실상의 세습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부동산으로 인해 경제 활력도 잃어버렸고, 인구도 축소되고, 급기야 사회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제 부동산 모래성이 무너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비, 투자, 수출, 소득 등이 모두 마이너스 행진을 하며 지난 2023년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조만간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나가는 글’)

현재, 많은 이들이 한국 경제 상황을 위태롭게 바라보고 있다. 2021년까지만 해도,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했는데, 어떻게 그사이에 대한민국이 (특히 경제 분야에서)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 것일까?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말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대한민국 경제 가정교사로 불리는 최배근 교수(건국대 경제학과)는 신간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월요일의꿈 펴냄)를 통해 경제사적 측면에서 지금 한국 경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진단한다.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도 함께 이야기한다.

저자는 무엇보다 19세기의 이른바 대영제국 시대를 이끈 원동력에 주목한다. 역사가들은, “유럽에서 왕권이 가장 취약한 절대왕정[영국]이 가장 강한 국가가 되었다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가장 취약했던 영국은 어떻게 대영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오늘날 미국의 최대 경쟁력이 군사력이고, 그 군사력을 가능케 한 것이 경제력이고, 경제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힘이듯이, 영국 군사력은 영국 경제력으로 가능했고, 그 경제력은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혁신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그 기술혁신을 가능케 한 것은 근현대 세계라는 새로운 세상을 연 사회혁신이었다. 바로 민주주의와 불환화폐 시스템(중앙은행 시스템과 사실상 동의어), 그리고 유한책임 회사 등으로 구체화되는 사회혁신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1, ‘화폐와 민주주의’) 그런데 불환화폐(신용화폐)라는 중앙은행권은 금 대신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이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조세권이라는 경제력을 갖고 있다. 즉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사회몫(세금)’에 해당하는 생산물이 기존의 금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국민이 함께 만든 생산물로 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해준 셈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공동 왕[윌리엄과 메리]은 자신이 허가해준) 영란은행의 설립 목표를 공공선과 인민의 이익(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촉진으로 설정한 것이다.”(1)

이 이야기는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는, 생계에 필요한 최소소득을 사회소득으로 배분받을 권리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신용 이용에 대한 기본권리를 갖는다는 뜻이 된다.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국민] 자신이 가치를 보증한 화폐를 가지고 은행은 돈놀이에 날개를 달았는데, 정작 [국민] 자신은 가치만 보증하고 권리는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1)

책 속으로

시대 변환기는 (정도 차이가 있지만) 기존 질서나 기득권 대 새로운 변화의 힘 간에 사회 갈등이 증폭된다. 사회 갈등을 조절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하는 것이 정치 리더십이다. 한국 사회는 지구상에서 민주주의 역동성이 가장 큰 사회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세계 각국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민주주의나 정부 자질 등을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스웨덴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세계 179개 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10개 그룹으로 분류하여 매년 3월에 발표하는 민주주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6년에 3그룹에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1등급으로 상향 이동했다가 윤석열 정권 출범한 2022년에 2그룹으로 내려갔다.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더불어 취약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일본은 정치의 세습성과 노인층의 지배 등으로 민주주의 역동성이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미래를 여는 키워드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18~19, 서문중에서

그런데 불환화폐(신용화폐)라는 (중앙)은행권은 금 대신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채권)이다. 왕이나 오늘날의 대통령 등이 아닌 정부의 경제력이 보증하는 것이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마르지 않는 샘에 해당하는 조세권이라는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금 대신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사회몫에 해당하는 생산물이 금의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국민이 함께 만든 생산물로 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하여 (자신이 보유한 금의 양에 의해 제한되었던) 은행에게 돈놀이의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에 (당시 공동 왕은 자신이 허가해준) 영란은행의 설립 목표를 공공선과 인민의 이익(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촉진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불환화폐의 가치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생산 중 사회몫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는 (생계에 필요한 최소소득을 사회소득으로 배분받을 권리가 있듯이) 최소한의 신용 이용에 대한 기본권리를 갖는다. ()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두 함께 불환화폐 가치를 보증했기에 불환화폐의 혜택인 이른바 사회금융혹은 공공금융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를 보증한 화폐를 가지고 은행은 돈놀이에 날개를 달았는데, 정작 자신은 가치만 보증하고 권리는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무엇보다 불환화폐 도입으로 시중은행들이 얼마나 큰 혜택을 입고 있는가를 상상해보라. 우리나라 은행법 제1(목적)에서 은행은 금융시장의 안정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정부에 의해 영업 인가를 받은 기업임을 규정하고 있는 배경이다. 화폐 업무가 한국은행이 아니라 기획재정부(기재부)의 몫인 배경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은행 신용을 이용하지 못하는 많은 국민이 이를 자기가 못나, 즉 신용등급이 낮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은행 등 금융 자본의 논리에 세뇌당한 결과이다.--- p.33~34, 1. 화폐와 민주주의중에서

사회를 복원하고 정상화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양 축인 정치와 경제가 제자리를 잡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사회소득과 사회금융으로 표현되는) 사회몫과 (개인의 가치 창출 과정에서의 기여분인) 개인몫의 배분에서 균형을 만드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사회가 실종된 이유는 사회몫의 배분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사회몫의 배분은 정치의 영역이고, 민주주의의 수준을 반영한다.--- p.222, 나가는 글중에서

일본식 '잃어버린 30' 시작됐다

한국 체제를 받치는 두 기둥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11표제로 법 앞의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체제와 11표 원칙에 따라 부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상호 견제한다. 한국은 이 두 날개로 나는 국가인 셈이다. 힘이 한쪽으로 쏠린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 구체적으로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성행은 반드시 양극화로 이어진다. 이는 사실상 금권 정치로 이어져 민주주의 정신 훼손으로 연결된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의 신간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월요일의꿈)는 이 시스템이 고장났음을 경고한다. 국가 힘의 축이 화폐 권력, 즉 자산으로 집중됨에 따라 오늘날 피폐해지는 한국 사회 모습이 형성됐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최 교수는 막대한 분량의 데이터를 동원해 힘이 시장으로 넘어간지금 한국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명한다.

"2021년 소득활동자들에 대한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소득호라동자는 약 2536만 명이다. 2021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이었다. 이를 연소득으로 환산하면 2187만 원이다. 그런데 2021년 소득활동자 중 상위 60%선이 최저임금 수준의 연소득보다 낮은 2180만 원이었다. 하위 41%의 규모는 약 1040만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980만 원에 불과했다. 25000명에 해당하는 상위 0.1%의 평균 소득은 18.5억 원이니 하위 41%의 평균 소득에 비해 188.8배나 되는 규모이다."

"자산 불평등은 더 극심하다. (...) 2022년 개인의 토지 소유를 보면, 전체의 38%가 넘는 901만 세대는 땅을 한 조각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약 1.2%에 해당하는 29만 세대는 약 1258조 원 가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 지니계수가 0.8이 넘으니 토지 소유가 집중되었던 조선왕조 말기보다 그 정도가 더 심한 것이다."

여러 방송활동과 유튜브 채널을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경제학자인 최 교수는 더불어민주당에 가까운 인사로 인식돼 있다. 그는 실제 지난 총선 때 더불어시민당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최 교수는 책에서 우리 사회 양극화에 특히 민주 정부 책임이 크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책에서 최 교수가 지적하는 이른바 '민주화의 역설'이다.

"경상성장률은 2001~2007년간(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연평균 7.5%에서 2008~2016년간(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연평균 5.3%, 그리고 다시 2017~2021년간(문재인 정부 기간) 연평균 3.6%로 하락하는 동안 부동산자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각각 14.0%, 5.0%, 8.3%로 민주당 정권에서 부동산자산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 한국의 가계 신용은 팬데믹 직전 2년간 연평균 6.5% 증가한 반면, 팬데믹 기간 2년간은 8.3% 증가했다. (...) 문재인 정권에서의 부동산 자산가치 급등은 국내 신용에 대한 통제 실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2020년과 20212년간 (...) 시중 통화량은 700780억 원이나 풀렸다. 그리고 정부 채무도 2475000억 원이 증갛라 정도로 정부가 푼 돈 역시 사상 최대였다. 그런데 시중에 풀린 돈 중 실물경제로 들어간 돈은 시중 통화량의 22%에 불과한 1557000억 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국내 부동산자산은 2년간 GDP의 약 12배에 해당하는 18459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의 경우는 더 끔찍했다. 소득은 80조 원 증가한 반면 부동산자산은 소득의 20배가 넘는 1658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생존 위기로 내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외면하고 열심히 땀 흘리며 살던 무주택자들에게는 날벼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같은 자산 양극화는 특히 부동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각 가계는 거대 신용을 만들어, 즉 빚을 내 집 매매에 나섰다. 부동산이 없이는 부를 얻을 수 없다는 조바심이 전국에 넘쳐났다. 그 결과가 오늘날 GDP의 백퍼센트가 넘는 수준으로 급증한 가계대출 규모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월말 현재 전국 은행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10984000억 원이다.

가계신용 급증은 부작용을 낳았다. 우선 가계의 소비력을 갉아먹었다. 이는 극심한 내수 침체로 이어졌다. 가계의 소비력이 떨어짐에 따라 대외적으로 한국 경제는 더 극단적인 수출 의존형 체제로 나아갔다. 이는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동자 임금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고, 그 결과가 다시 가계 소비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대내적으로는 소비력이 떨어지면서 자영업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다.

"지난 30년간 임금노동자 대비 자영업자의 상대소득과 출산율 간의 통계적 상관성은 0.91(91%)일 정도이다. 1992년 자영업자의 1인당 소득은 임금노동자 1인당 소득의 94%가 넘었으나 202237% 밑으로 떨어졌다. (...) 가계 소비 하락은 임금노동자와 (내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영업자 간의 소득 격차를 확대시켰다. 실제로 가계 소비 비중과 가계 소득 비중이 각각 1%p 감소할 때마다 임금노동자 1인당 소득 대비 자영업자 1인당 소득 비중은 각각 3.6%p4.1%p씩 줄어들었다. 따라서 가계 소비와 가계 소득 비중 하락에 영향을 미치는 가계 부채 비중이 10%p 증가할 때 자영업자 상대 소득 또한 약 9.43%p씩 감소했다."

이처럼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최 교수는 현재 한국 상황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과 닮았다고 경고한다. 즉 한국에서도 잃어버린 시기가 이미 시작됐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 당국이 일본의 실패까지 고스란히 베끼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초기 대응으로 건설경기 붐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인 저출산 구조와 맞물려 과잉 건설 투자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는 지방 경제 파산 부작용을 낳았다. 최 교수는 이대로 간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부동산 건설 경기에 더 크게 의존하는 현재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가계 소비, 기업 설비투자, 그리고 수출 등 성장 에너지가 약화한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자산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고, 이로 인해 소비의 추가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수준으로 성장률이 하락한 상태에서 부동산 시장 침체가 더해지면 향후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일본의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부동산 시장 침체와 경기침체가 맞물린 후 초금융완화 등의 백약이 무효했듯이 한국의 금리 인하 카드 역시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이지 머니 시대를 다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일본의 90년대보다 불맇나 상황이다. 이처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보다 더하다면 그것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내수 의존이 높은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까지 붕괴하며) 한국 경제는 정말로 주저앉을 것이다."

대안으로 최 교수는 사회소득 공급을 제안한다. 일종의 기본소득 개념과 비슷하다. 최 교수는 재정, 즉 공공금융의 역할을 강화해 일정 수준의 사회소득을 전 구성원에게 제공하고, 이를 내수 경기 회복의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극심한 양극화를 해소하고 저소득 가계에 소비 숨통을 틔워주면서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균형점을 되찾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 재원은 당연히 증세다. 구체적인 증세 대상과 기준도 제시돼 있다. 고소득자, 대형 법인, 고액 자산가로부터 추가 증세해 이를 사회소득 강화에 이용한다면 "대부분 가계는 최소 연 300~400만 원의 사회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아울러 최 교수는 책에서 공공주택의 대대적 공급, 한국형 양적완화 등의 대안도 제시했다. 최근 주요 경제 이슈인 재정준칙 논란을 두고 기획재정부 '모피아'를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고, 새로운 기술 혁명에 따라 달러 패권에 금이 가고 있다는 주장도 책에 제시했다.

비단 경제에 관심 있는 이뿐만 아니라, 새롭고 진보적인 정책을 고민하는 이들도 눈여겨 볼 책이다. 마침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경제와 민주주의의 균형을 찾아줄 이에게 신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할 시기다. 이 책을 후보자 선택의 참고서적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이대희 기자 | 프레시안

'부동산 욕망'의 나라 된 한국

대한민국 경제의 불편한 진실, <화폐권력과 민주주의>(출판사 월요일의꿈)를 며칠 전 읽었다. 최배근 교수가 썼다. 이유를 불문하고 다른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을 읽는 내내 사실 마음이 불편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화가 날 정도였다. 저자가 드러낸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 경제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저자는 아예 책 표지에 단서를 붙였다.

저자인 최배근 교수는 주류 경제학자 혹은 주류 언론들이 외면한 한국 경제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데이터)를 제시하며 냉철하게 진단하고 드러냈다.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 일침을 놓았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고,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저자의 절박함이 행간에서도 읽혔다.

 

엄연히 존재하는 모피아 세력

. 저자가 지적한 불편한 진실 중 하나를 언급해 보자. 대한민국에는 '모피아' 세력이 존재해왔고, 그 세력은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다고 말한다.여기서 모피아는 기획재정부와 같은 경제 부처 출신들이 정부의 주요 부처와 금융권을 장악하고,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저자는 이를 '모피아' 또는 '화폐권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피아들은 너무 힘이 세서 심지어 민주정부라고 일컫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물며, 민주적이지 않은 못된 혹은 나쁜 정부에서 모피아들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저자는 모피아로 일컬어지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지 않는 한, 대한민국 경제의 정상화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단적인 예로 1995~2022년 동안 한국의 전체 소득(GDP)437조 원에서 2,205조 원으로 1,768조 원이 늘었다. 반면 부동산 자산은 2,305조 원에서 12,506조 원으로 1301조 원이 늘었다. 부동산 자산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부동산 자산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부동산 자산 소유의 불평등, 그 중 토지자산의 불평등은 더욱 심각하다. 불평등에 대한 자세한 데이터는 책에 나와 있다(126쪽 참조).

2020~2021년 예다. 코로나 펜데믹 상황이고 피해가 컸다. 정부는 돈을 풀어 경기를 진작했다. 2년 간 시중 통화량은 700780억 원이 풀렸다고 한다. 그 중 실물경제로 들어 간 돈은 22%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자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부동산 자산은 2년 간 GDP의 약 12배인 18459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의 경우 소득은 80조 원 증가한 반면, 부동산 자산은 소득의 20배가 넘는 1658조 원 이상 증가했다(76쪽 참조).

펜데믹 상황은 문재인 정부 시기였다. 부동산을 잡겠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펜데믹 상황으로 경기가 침체되는 것을 막고자 소득주도 성장을 통해 내수를 부양했다. 동시에 주택 공급 정책을 취하면서도 집값을 잡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문 정부는 부동산 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욕망에 발목을 잡혔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도, 차라리 '영끌'해서 부동산을 사면 돈을 번다는 것을 다 아는 상황이었다.

이런 대중들의 욕망은 부동산만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현실 인식과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사회 현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앞서 지적한 대로 대한민국은 이미 비정상의 나라, 부동산 욕망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결국 문 정부는 부동산 이슈로 인해 정권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블랙홀이 되어 버린 부동산... 그럼에도 저자가 희망을 주문하는 이유

경제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버린 부동산 경제는, 결국 정부와 서민 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업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구사할 수 있는 정책은 많지 않아 보인다. 돈이 풀리면 부동산 자산 시장으로 돈이 빨려 들어간다. '영끌'해서 부동산에 쏟아 부은 가계 부채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독려하고 주택 구입을 부추기는 정부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가계 부채를 늘리는 정책이다.

얼마 전 정부가 아파트 준공 통계를 누락한 일도 있었다. 이것은 단순 해프닝인가. 아니면, 누락분만큼 주택 공급이 부족하므로 가계는 주택 구입에 나서야 하고, 주택 건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페이크(속임수)'인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에서 보듯 부동산 피에프(PF) 만기 도래와 그에 따른 자금 상환 부담에 따른 건설업체와 관련 금융사에 위기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가계부채 경고등도 오래 전 켜져 있다.

이런 정부의 행태와 형편을 부동산 경제 위기의 위태로운 ''을 붙들기 위한 안간힘이라고 봐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이를 용납하는 것이 온당하지 저자는 반문한다.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역사이다. 일본은 30년 전 작금의 한국과 같은 유산한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경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혁신(개혁)해야 함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감내해야 했고, 여전히 그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부동산 자산 불평등의 심각성과 부동산 카르텔 외에도 저자가 진단하고 언급한 한국의 불편한 현실은 많다. 자영업자의 위기는 뼈아프다. 얼마 안 되는 월급쟁이의 소득과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의 소득은 늘어가는 가계부채를 메우는데 사용된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줄고 있다. 가계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고, 점점 더 허리가 휘고 있다.

읽어 나갈수록 화가 나고,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가능성, 희망을 주문한다. 그저 막연한 희망고문이 아니다.

정치(민주주의)의 복원을 통해 모피아로 상징되는 '화폐권력'을 제압할 것을 주문한다. 기본주택,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을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에 맞게 사회 혁신, 경제 혁신의 고삐를 단단히 붙들자고 제안한다. 이를 통해 극단적 불평등의 나라로 치닫고 있는 한국 경제현실에 대해 브레이크를 밟고 방향을 급선회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해법은 정치에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정치'의 활발한 역할을 주문하고 기대한다. 경제와 정치는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인데, 굳이 언급하면 결국 정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정치를 통해 기존의 잘못된 경제관행과 이를 묵인하고 좌지우지 해 온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를 의미하고, 모피아는 화폐권력을 상징한다.

이렇듯 이 책은 현실 경제를 진단하고 정치(민주주의)를 통한 긴급 처방전을 제시한 '정치경제학' 필독서에 가까워 보인다.

22대 국회가 시작된다. 국민들은 22대 국회에 많은 과업을 부여했고,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경제의 암울한 현실과 불편한 진실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절박하게 대한민국 경제 개혁과 혁신을 주문하고 있다.

모피아(화폐권력)를 방조하는 누군가가 곧 범인이다.

l강찬호(dmanse) 오마이뉴스 24.5 8

 

 

좀비 민주주의/ 이동직/ 마르코폴로/ 2024.01

목차

서문

민주주의, 인간에 대한 오해 6

민주주의, 진리에 대한 집착 13

, 구원을 꿈꾸는 일 22

 

1- 집단의 꿈

인간의 이름 32

기차 올라타기 42

진리와 정당성 48

민주주의 신화 60

 

2- 빛과 불

국가의 비밀 74

제사 공동체 84

우연의 공동체 90

국민의 발견 98

종교의 시대 105

 

3- 세속의 종교인

민주주의 - 두 개의 가정 116

우상과 광신자들 123

신성함의 붕괴 137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종교 147

민주주의 - 첫 번째 실패 154

 

4- 소수의 지배

대표 제도의 신비 168

우월성과 동일성 177

선택의 이유 185

돈과 공감 192

민주주의 - 두 번째 실패 203

 

5- 자유와 평등

자유와 다른 자유 223

최후의 개인 234

국가의 자유 242

선언과 사실 248

불평등의 신학 259

채식주의자와 고기 먹기 269

 

6- 다수의 반격

분노할 준비를 끝낸 사람들 281

지성의 거부 295

나를 무시한 민주주의 314

대의민주주의의 그림자 332

대중과 마법사 348

 

7- 좀비 민주주의

무덤 없는 부활 370

정치 없는 통치 382

정당한 전체주의 395

문화 전쟁 410

마케팅 민주주의 427

 

8- 민주주의 종말론

기술발전의 생식기관 442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 448

위대한 환상 466

추천의 글 홍기빈

출판사 서평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까지 이어진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의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결과에 대해 깜짝 놀랐고 우리는 그 현실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역사로서의 민주주의,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국민(인민)주권 또는 국민주권과 유사한 의미의 문장들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에서 항상 발견된다. 대한민국 헌법의 앞줄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쓰여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른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쉽지 않는 문제를 만나야만 한다.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은 누구인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다스린다는 자치의 욕망 속에 우리는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이 되기도 하고,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시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Demos)국민이 되어, 우리가 국민으로서, 국가의 최종적 결정권자가 된다는 국민주권의 표어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가장 먼저 말해지는 문장이다. 국가라는 종교성 가득한 집단의 구성원. 국가라는 집단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국민은 무엇인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우리(Demos)는 국민이 되고,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가 되어, 국민인 우리에 관한 최종결정권자가 된다. 즉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다스린다(Cracy). “우리가 곧 국가다”. 사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또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므로 어떤 의미로 해석해도 옳을 수 있고, 바로 그 이유로 언제나 틀릴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모든 교실에서 읽혀졌을 문장들이다. 익숙한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우리가 국민이 되어 국가의 결정권자가 된다는 논리 속에는 많은 가정들과 허구의 개념들이 작동한다.

민주주의(Demos+cracy)의 많은 모순은 “Demos”국민(인민)”이 되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거나, “Demos”국민(인민)”으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우리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자연스럽게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 하는 현실 속의 존재다. 인간은 볼 수 있지만 국민은 볼 수 없는 무엇이다. 민주주의의 국민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각각의 인간들이 하나의 집단. 즉 국민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 즉 현실과 상상이 만나는 과정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성 세바스타인의 순교

좀비 민주주의(Zombie Democracy)

좀비 민주주의. 껍데기는 남았으되 실체는 사라진 민주주의를 말한다.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를 일컫는 다양한 용어들이 있지만, 최근에 이 용어가 눈에 띄게 많이 쓰이고 있다. 21세기로 접어든 후 좀비물의 거센 범람이라는 문화적 현상이 이 용어의 확산에 일조했을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좀비의 주요 특징은 전염성, 공격성, 무지성, 불사(不死)성이다. 좀비에 맞서는 인간은 두려움, 이기심의 본능과 함께 협력과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혼 없는 신체에 맞서는 영혼을 지닌 신체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모순적인 존재다. 좀비 민주주의에 맞서는 모종의 민주주의도 통일된 실체가 아니라 분열된 실체다.

여기서 우리는 좀비 민주주의의 실체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본디 살아 있는(living)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와 같은 민주주의로 바뀐 것인가, 즉 좀비화된 민주주의가 좀비 민주주의인가? 좀비 민주주의는 단지 여러 민주주의 형태 가운데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뿐인가? 좀비 민주주의는 피할 수 있는 것인가, 피할 수 없다면 박멸할 수 있는 것인가? 피하지도 박멸하지도 못한다면 타협을 통한 공존은 가능한가? 위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하던 이는 민주주의의 기원과 정의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데모스(demos)의 지배 또는 통치(kratia)를 가리키는 민주주의의 어원은 현실의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현대의 민주주의는 이 어원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데모스는 시민을 일컬었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데모스는 인민, 국민, 대중을 일컫는다. 데모스는 분명 한 명(one) 또는 소수(few)의 지배자 또는 통치자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다수(many)를 의미하지만, 데모스는 결코 다수와 동의어가 아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다수와 분명히 구별되는 고유한 집합적 성질이 데모스에 내재한다. 민주주의를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데모스의 특징 때문이다. 데모스가 단지 숫자로서의 다수라면 심오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토크빌과 밀이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 또는 통치와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수결 원칙(majority rule)이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로 나타나는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독재와 반대말이 아니다. 독재와 동의어다.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개헌을 추진하자는 주장이 나온 적 있다. 2심인 서울고법에서도 업무방해·청탁금지법 위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한 법학자이자 전직 법무부 장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명백한 불법의 확인이 없다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기 어렵기 때문에 임기 단축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끌어 내리고 대선을 새로 치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수정당의 과소 대표와 양당의 과대 대표를 낳는 선거제도를 이용하여 30%대의 정당 지지도로 67%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 대통령을 쫓아내자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를 우회하는 의회 다수파의 독재와 동의어다.

현대 민주주의의 구축 과정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곡예와 닮았다. 다수결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면서도 이것이 다수의 전제로 흑화하지 않도록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구체화하고 견제와 균형의 수단을 발달시켜 왔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제도는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전문 또는 헌법 정신에 등장하는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이상과 항상 긴장과 갈등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누구에게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누구에게는 민주주의의 모순으로 현상한다. 민주주의 위기론자는 이상을 그대로 인정한 채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모순을 보는 자는 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이상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현실에 꿰어 맞추는 널리 퍼진 기만을 파헤친다.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 위기론자가 아니었다. 모순에 찬 민주주의를 헤집으며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나섰다. 벌써 반세기도 훌쩍 지났으나 민주주의의 통속적 정의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당시에도 그는 우리가 마주한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이론의 위기라 단언했다. 그는 인민주권의 이상을 부정한다. 절대성을 벗겨내고 신학을 걷어낸다. 그에게 인민은 완전한 주권자(sovereign people)가 아니라 불완전한 주권자(semi-sovereign people)에 불과하다. 완전한 주권자를 불완전한 주권자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다. 완전한 주권자란 처음부터 신화이자 허구라는 것이다. 이 허구적 신화의 끈질긴 생명력 탓에 민주주의는 항상 모순에 가득 찬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표(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대표 민주주의의 특성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대표 민주주의를 귀족정이나 과두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억지 주장이 아니라 경험의 서술이다. 대표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이러한 경험 증거가 늘어난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미디어를 통한 마케팅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귀족정의 성격이 더욱 강화된다. 위성정당 방지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이것이 무위로 끝나자 비례 위성정당에 진심이었던 이탄희 의원은 이재명 대표의 결단이 다가올 무렵 SNS에 엄청난 광고를 뿌렸다. 광고의 키워드는 서울대, 하버드, 판사였다. 이 키워드와 정치개혁 메시지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특출난 사람의 말이니 잘 들어보라는 마케팅이었다. 사회, 문화, 상징, 경제 자본을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은 마케팅에 적합하지 않다. 피선거권은 형식상 주어질 뿐 정당의 후보가 되기란, 또 선거에서 당선되기란 바늘구멍 들어가기다.

대표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유리(遊離)를 전제로 한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유리가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는 있다.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인민의 완전한 자치로 피통치자가 통치자와 동일시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통치자가 피통치자를 완전무결하게 대표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현대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 국가를 소규모 집단의 무정부 상태로 만드는 것은 상상조차 쉽지 않고, 통치자가 인민의 일반의지를 정확히 대표한다는 것은 착각이 아니면 통치자를 신으로 둔갑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민주권의 원칙은 때로 이러한 유리를 부정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면서 민주주의의 모순과 혼란을 증폭한다.

선의를 지닌 자도 악의를 지닌 자도 이 원칙을 떠받들며 모순과 혼란의 대열에 동참한다. 선의를 품은 자는 그저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인민주권의 신자다. 악의를 품은 자는 다수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민주권을 동원한다. 대표 민주주의를 통해 다수는 소수에게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했을 뿐이나 이들은 이 위임된 제한적인 권력의 행사를 인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정치인이 곧잘 소환하는 국민의 뜻은 계량적으로 측정 불가능하다. 일반의지의 존재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일 뿐이다. 각종 편향이 득시글한 여론조사의 다수 의견을 국민의 뜻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비약이다.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이 언젠가 모든 국민의 SNS 활동과 네트워크 접속 기록을 실시간으로 다 뒤질 수 있다고 해도 이를 일반의지로 총합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대표 민주주의가 귀족정이나 과두정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것은 엘리트 민주주의의 도래를 의미한다. 엘리트 민주주의의 등장은 포퓰리즘 민주주의를 동반한다. 포퓰리즘은 엘리티즘의 그림자다. 포퓰리즘과 엘리티즘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한 민주주의의 한 단면이다. 포퓰리즘은 또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좌익 포퓰리즘과 우익 포퓰리즘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다수의 지배라는 신화적 성격을 부여하는 일은 포퓰리즘의 원천으로 연결된다. 트럼프가 만일 귀환한다고 해서 이를 두고 민주주의의 패배와 포퓰리즘의 승리를 선언할 수 없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트럼프의 귀환을 막을 수 없고, 20세기의 민주주의는 히틀러의 출현을 막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의 퇴행을 두고 좀비 민주주의로의 전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좀비 민주주의가 아닌 살아 있는 민주주의였던가? 윤석열 정부에 맞서는 야당은 좀비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는 투사인가? 좀비 민주주의의 한 축은 아닌가? 두 개의 제의 공동체가 있다. 이번에도 위성정당을 통해 신전에 바칠 공물을 준비한다. 한쪽 제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로 작심한 한 소제사장은 역대 제사장의 상징을 마치 제 것인 양 가져다 쓴다. 신앙고백에 바쁘다. 두 개의 제의 공동체에 저항하던 소수의 공동체는 갈수록 눈빛이 흐려진다. 제사장의 지시에 방향을 트는 영혼 없는 신체가 즐비하다. 좀비화된 개인, 좀비화된 정체로 좀비 민주주의가 창궐한다.

좀비 민주주의는 지구적 현상이기도 하다. 형식적 선거 민주주의가 일종의 의례처럼 유지되고는 있으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들이 있다. 동유럽,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포퓰리즘이 극우 민족주의, 파시즘과 만나 좀비화(zombie-isation)를 가속화하고 있다. 인민주권의 교리는 정작 이러한 좀비화에 속수무책이다. 포퓰리즘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교리는 국제적 전염을 막는 공조에도 무력하다. 인민주권은 국가주권의 테두리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인민주권과 같이 민주주의에 내재한 절대적 진리와 아직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신학과 무신학의 긴장과 갈등이 지속하고 있다. ()과 속()이 혼재되어 있다. 신은 이름을 바꾼 채 민주주의에 스며 있다. 인민은 신화 속에서 지배자로 추앙받고, 신화의 장막이 사라지면 피지배자로 추락한다. 신화는 추락의 쓴맛을 무마하는 아편이다. 신화에 중독된 인민은 신화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신화를 제거하고 금단현상을 감내하는 복종의 길과 신화의 주술에 걸려들지 않고 피지배자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길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작성자 가림

좀비민주주의가 온다

수사, 감사, 압수수색, 구속, 기소, 금지, 제한, 엄벌, 엄단, 강제연행.

윤석열 정부 시대에 우리는 매일 이런 단어를 접하고 있다. 지금 국가는 한 손에 법전을, 다른 손에 회초리를 들고 국민을 준법자와 범법자로 나누어 처벌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 국민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억압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노동자 탄압이다. 건설노동자 양회동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에도 경찰은 노조사무실과 노조원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하청노동자 처우 개선을 호소하며 고공농성하던 금속노련 사무총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강제 연행되었고, 비정규직 노동단체의 문화제도 강제 해산당했다. 이런 국가폭력이 노동현장에선 연일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대통령과 여당은 집회·시위 등 시민들의 집합적 의사표현을 제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통령이 엄격한 법 집행을 연일 강조하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야간집회 금지와 집회·시위 대응에서 경찰력 행사에 대한 면책 조항 신설 의지를 밝혔다. 이는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권력 남용을 고무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때려도 좋다는 신호인 것이다.

경찰의 위해성 장비도 다시 등장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뒤 사라졌던 최루탄 물질 캡사이신 분사기를 배치했고, 살수차의 재도입 가능성도 시사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최루액을 섞어 쏘는 혼합살수, 2020년 사람을 향한 직사살수가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했다.

집권세력은 문재인 정부가 법 집행을 방기해서 질서를 바로잡는 듯이 호도하는데 이는 자가당착이다. 문 정부 시기에 주말마다 서울 도심을 점령하고 초대형 스피커로 극렬한 구호를 외친 것은 우익단체들과 태극기부대였다. 현 정권은 그런 세력과 손잡고 탄생했으니, 문 정부가 집회·시위 자유를 과도하게 보장했다고 주장할수록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공권력과 시민의 관계가 변해온 추이를 보면 윤석열 정부의 시대착오성이 분명해진다. 집회, 시위, 서명운동 등 시민들의 의사표현 행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연구한 학자들은 몇가지 국가별 전통을 유형화했다. 영국의 커뮤니티 경찰모델,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법치국가모델, 북유럽의 대화형모델, 프랑스·이탈리아의 억압적인 왕의 경찰모델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전통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시민들의 자유권에 대한 국가의 제한이 점차 사라지고, 대화와 교섭을 통해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수렴되어왔다. 이에 따라 시민 참여자들도 공권력과 충돌하기보다는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시민 참여 행동과 공권력의 대응은 독재시대 억압-충돌 모델을 탈피하여 선진국형 대화 모델로 발전해왔다. 독재시대 공권력은 정권 유지와 기업 이익에 위배되는 시민, 노동자의 행동을 억누르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청년들을 정권 유지 도구로 희생시킨 전·의경 제도가 폐지됐고, 사복경찰 체포조 백골단도 사라졌다. 경찰은 집회·시위의 자유와 공공질서 유지를 조화시킬 대화경찰개념을 도입했다. 집회·시위 문화도 달라졌다. 불법·폭력 건수는 김영삼 정부까지 연 800건이 넘었으나 김대중 정부 때 100건 이하로 급감한 뒤 계속 줄어 2018년에는 12건으로 거의 사라졌다.

이처럼 한국에서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선진국 모델로 개선되어왔다. 그것은 특정 정권의 편향이 아니라, 모든 정권이 큰 틀에서 합의했던 기본 방향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 모든 역사를 한순간에 깨뜨리고 독재시대 국가관으로 회귀하고 있다. 국민의 신체와 자유에 함부로 위해를 가하고 공권력 행사에 절제를 모르는 국가 말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체제를 독재로 규정할 순 없지만, 독재국가의 특징적인 태도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위중한 징후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방향으로 퇴행을 계속한다면 우리나라는 선거라는 껍데기만 있고 자유의 생명력은 사라진 좀비민주주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희망의 죽음, 미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한겨레* 2023.6.20.

 

반미자주노선: “미 제국반대를 주선으로 해야

다시 쓰는 자··통 운동론(2)

기간 진보운동은 이 땅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실패했다. 북도 2023년 연말 전원회의와 20241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행해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에서 80년간 지속된 동족 개념의 남북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로운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새로운 진보운동을 위한 시론(時論)’ 글을 아래와 같이 연속적으로 기재한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필독을 권한다. / 필자 주

1. 총론; 2024년은 새로운진보운동의 원년이 되게해야 한다

2. 반미자주전선: “미 제국반대를 주선으로 해야

3. 반독재민주전선: 민중정권 수립을 명확히 해야

4. 조국통일전선: 평화담론에서 통일담론으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뤄져야

5. 결론: ··통 운동은 여전한진보운동의 강령이다

2024년은 새로운진보운동의 원년이 되게해야 한다

1987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는 소리를 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수평적 정권교체도 일어나 만년 야당이었던 민주표방 정당이 그 덕택, 6월 항쟁의 덕택으로 집권 여당이 될 수도 있었다. 변화 속도가 하도 빨라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차다는 말들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도 겪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IMF 사태였고, 결과는 국가의 해체였다. 이후 국민은 공동체가 아닌, ‘각자도생하는 방식으로의 생존을 터득했다. 그러함에도 또한 극적인 드라마 한 편도 써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주권이 무시될 때 스스로 헌법 제1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치며 박근해 대통령을 강제하야시켜 낸 촛불민주주의가 그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렇게 19876월 항쟁 이후 각각의 나름 변곡점들을 형성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견인, 긍정도 있었고 부정도 있었다.

1. 들어가며: ‘언급수용’, 그리고 마녀사냥

2024년 새해가 밝았고, 지난 124일 필자도 참여한 긴급 토론: 남북관계 근본변화와 한반도 위기- 평화의 해법 모색, 어떻게 할 것인가?’(이하, 토론회)가 열렸다. 그리고 토론회가 끝난 뒤 여느 토론회와 같이 1주일 동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흘렀다. 그런데 사달은 131일 터졌다.

<조선일보> 1면에 평화 위해서라면 전쟁관도 수용이라는 기사가 게재되면서 모든 종편 , <채널A>, , 더해서 보수언론, 그리고 그 마지막은 윤석열 정권을 위한 공영방송인 와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그 대미를 장식했다. 특히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이들 방송과 보도만 믿고 확인도 없이 국회 친북 토론회 결코 묵과 못 한다라며 그들 마녀사냥에 힘을 보탰고, 결국 윤미향 의원(무소속)과 필자에 대한 국가보안법 고발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마녀사냥 메커니즘이 그렇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잠깐, 그들의 매카시 광풍 논리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패턴이 나온다. 아주 단순한데 북의 전쟁관을 언급했다, 하여 이것을 곧바로 발언자와 주최자, 그리고 토론자와 방청객 모두가 그 개념을 수용했다며 예의 그 사상적 공세를 편다. 마녀사냥도 이런 마녀사냥이 없고,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인식 메커니즘을 잘 작동시키기 위해 악마의 편집기술을 너무나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

어떻게?

첫 번째는, ‘언급정의의 전쟁관 개념을 곧바로 수용으로 인식 왜곡하고, 그렇게 왜곡된 개념에 통일전쟁을 갖다 붙이고, 그렇게 갖다 붙인 통일전쟁은 아무런 연결 과정 없이 북에 의한 전쟁으로 둔갑하고, 그리고 그 전쟁은 곧 정의의 전쟁으로 정의되어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통일전쟁으로 둔갑, 종북몰이에 철저히 활용된다.

두 번째는, ‘결과로의 평화개념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건절과 맥락적 이해 없는 희망적 사고가 잘 작동된다. 이를 위해 악마의 편집은 당연히 이뤄지는데 길지만 그날 토론회에 제출되었던 자료집에 실린 필자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 즉 조선반도에서 평화가 오지 않은 근본요인은 분단에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입니다. 이런 거죠. 이 분단을 극복하지 않으면 늘 전쟁의 그림자와 먹구름를 하늘 아래 이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해서, 분단된 땅에서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저의 평화관입니다. 왜 그런 인식을 가졌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분단되지 않은 국가에서라면 전쟁의 반대는 평화, 혹은 그 반대, 즉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제관계학과 평화학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론적인 국제관계학과 평화학을 넘어서는 실천적담론체계 안에서 이 평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맞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해서 바로 그 고민에 서면 다음과 같은 시각이 보입니다. 그 관점이 바로 저의 졸작이기는 하지만 제가 2021년에 <통일로 평화를 노래하라>는 책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분단된 우리 한반도, 조선반도에서는 평화와 관련된 인식을 국제관계학이나 평화학이 아닌, 실천적 담론과 통일학의 견지에서 평화개념을 성립시켜 내어야 한다라고 했고, 그러면 다음과 같은 평화관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완전한평화는 분단극복(통일)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평화관과, 최후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통일전쟁이 일어나 그 전쟁으로 결과로의 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 전쟁관도 수용해야 한다는 인식의 대전환, 견월망지(見月忘指)이다.”

위 내용을 다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글 논지의 핵심은 철저하게 분단극복이 전제된 실천적 담론체계로서의 평화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종북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식 종북몰이를 하고 싶은 이들은 앞의 전제, 최후의 수단과정으로의 평화, 뒤의 결과로의 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강조, 필자)’도 생략시켜 오직 전쟁관만을 갖고 와서 마치 전쟁결과로의 평화개념이 동일하게 수용한 것처럼 왜곡시켜 버린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이 되어도 좋다는 식의 아전인수가 그것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 위와 같은 전쟁관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수많은 가정의 가정과 같은 인식 단계가 필요하다. 예하면 모든 전쟁이 반드시 통일전쟁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통일전쟁이 결과로의 평화를 보장하는지, 아닌지도 또 판단해야 한다. 이 모든 인식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북에 의한 전쟁은 통일전쟁이고, 그 통일전쟁은 이유 불문 결과로의 평화를 보장하고, 그래서 그런 전쟁을 통한 통일도 수용한다는 그런 황당한 인식을 성립시켜 발제자의 발제 의도를 완전히 왜곡시켜 내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북의 전쟁관을 인정한 대목도, 전쟁관만을 평화관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는데도(=과정으로서의 평화와 결과로의 평화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해 내 통합적 이해를 강조한 것인데), 오직 마녀사냥하기 위해 이들은 그렇게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2. 여전히 필요한 자··통적() 사고(思考)

? 대한민국 세상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위 “1. 들어가며: ‘언급수용의 차이, 그리고 마녀사냥에서 보듯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한 마녀사냥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체제이자 제아무리 선진국 클럽인 OECD 가입국이라 자랑해도 허약한 체질의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 질서 체계가 그대로 드러나서 그렇다. 지구상 그 어떤 선진국도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초유의 악법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놓고, 좀 더 깊게 대한민국 사회를 한번 분석해 보자. 해방 후 우리 대한민국은 희망과 절망, 그리고 항거와 억압의 발생을 교차·반복 해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점차 확대·강화, 한편으로는 분단 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도 분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고통을 받았으며, 상시적 인권유린도 일어나는 아픔도 겪었다.

어떻게?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 공화정을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화 과정은 매우 험난했고, 냉전과 분단 체제라는 구조적인 문제와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작은 용기를 내고 양심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생명과 인생이 위태로웠다.

또한, 3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났지만, 작금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반도는 더더욱 고착되는 분단 체제만 있고, 비례해 동족에 대한 적대는 더 심화한다. 비례적으로 한미일 삼각 동맹체제와 신()냉전적 질서는 더더욱 고착된다. 더해서 국가의 정체성도 친일·독립의 역사 논쟁, 민주 공화정에 대한 해석의 문제, 경제 주권의 안정성 문제 등 그 모든 영역에서 우향우는 더 심해졌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에 위임된 공적 역할은 더더욱 부재하고, 리더십, 공동체, 역사는 실종되고, 권력, 특히 검찰 법비들의 난동과 대국민 겁박은 유신을 능가하며, 영토 및 생명을 위한 국권은 상실되고, 경제의 급전직하와 민생의 파탄은 더더욱 심화하고, 정치는 조폭보다 못한 막장의 정치만이 횡행한다.

결과, 우리 운동-진보운동은 반드시 이 윤석열 체제를 넘어서야만 하는 과제가 매우 분명하게 나선다.

? 천만의 말씀이다. 여기에 미국은 이 시각에도 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꿈꾸며 우리 민족을 핵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미 맥아더에 의해 세워진 핵 공격 작전은 계속 진화하여 수많은 핵배낭, 핵지뢰, 전술핵 등을 배치했고(지금은 철거), 이후 지금은 전략핵우산 정책을 통한 한미동맹체제를 매우 예속적으로 강화해 냈다. 더해서 같은 민족인 북 침략을 전제한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캠프데이비드 협정(20238) 이후에는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훈련으로 대체하려 한다.

덩달아 윤석열 정권은 북을 주적이라 하고,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2024124일 스텔스 전투기 F-35A가 배치된 충북 청주 공군 17전투비행단을 찾아 대비 태세를 점검하면서 장병들을 향해 “(이 최악의 선택을 한다면) 최단 시간 내 적 지도부를 제거하고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선봉장이 돼야 한다(사실상의 김정은 참수 작전)”라며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훈련 또 훈련하라라고 말하는 등 제2의 한국전쟁이 이제 시간문제만 남게 하였다.

북의 정세 인식도 이와 비슷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4년 신년 시정연설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은 실체가 있다고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전쟁의 먹구름미 제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대한민국 사회는 내용적 민주화 과제를 여전히 자기 해결 과제로 안고 있다. 본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사회가 바뀐 것 하나도 없고,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운동 또한 그 좌표와 항로가 바뀔 것이 하나도 없다, 여야 한다.

해서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자··통 해결 과제가 미해결 상태인 미완의 혁명단계이고, 미완의 혁명단계인 만큼 변혁을 향한 진보운동은 여전히 자··통 해결 과제를 위한 전략적 사고만이 더더욱 튼튼히 무장해야 함을 안내한다.

3. 진보운동의 최종 종착점: 분단극복과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북의 2024사실상신년사(조선로동당 제89차 전원회의)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행한 시정연설은 대한민국 사회에 대단한 충격파를 안겼다.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동질관계가 아닌 두 국가관계, 나아가서는 적대적인 교전국 관계로 재정립했고, 더해서 삼천리 금수강산’, ‘8천만 겨레라는 표현이나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까지 했다.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주의·주장에는 통일은 이제 물 건너갔어!’라며 통일 담론 대신, 평화 담론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오류 두 가지와 헌법적 책무 위반이 눈에 띈다.

먼저, 오류 세 가지 부분이다. 첫째는, 평화 개념을 실천적 담론체계 안에서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를 간과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즉 한반도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의 문제가 있다. 다름아닌, 지정학적 운명이 그것인데, 같은 논리로 분단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숙명을 갖게 한다. 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통일담론 체계 안에서의 평화개념이 성립할 뿐인데, 논리적으로는 분단극복 없는 평화없고, 종국에는 통일로 평화가 완성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이다.

둘째는, 민족적 통일담론에 대한 일천한 이해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민족의 통일담론은 서구의 종족개념에 의한 통일론도 아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렇게-‘동족개념을 없애고, ‘주적관계로 전환되었다고 발언했다하여 같은 핏줄,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지역공동체형성에 기반한 민족개념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남과 북은 같은 민족 공동체의 운명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다음, 헌법적 책무 부분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로 되어 있고, 4조에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통일을 향한 여정을 포기할 것인가? 절대 없다.

이로부터 대한민국 진보운동은 지난 124일 진행된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제문과 발제에도 표현했듯이 우리-진보운동은 북이 전쟁을 결심했다 하여 전쟁으로 통일(영토완정)을 이뤄내자!’ 그렇게 구호를 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중운동은 북에 연방·연합방식의 통일전략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강제하여야 하고~”(토론회 <자료집>,14) 바로 그러한-“우리의 대중운동은 북에 연방·연합방식의 통일전략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강제하여야(강조, 필자)” 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운동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투쟁에 더더욱 매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권-자주적 민주정부만이 북이 비평화적 방식 대신 평화적 방식, 6.15식 연방·연합 방식의 통일전략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필자는 동 매체에 이렇게 표현했다. “북이 대한민국의 정부 간 대화와 협상은 단절시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비평화적방식이 아닌 우리 민족의 단합과 단결 방식인 연방통일 투쟁을 더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광수, “북의 전쟁관에 관한 이해” <통일뉴스>, 2024.1.9.)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평화적 통일은 이렇게 그 상관관계를 갖게 되고, 진보운동의 사명과 역할은 그렇게 완성된다. <계속>

1. 들어가며: 제국, 미국의 침략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지구상에 없다

제국으로서의 미국 이해와 관련해 나서는 역사적 진실은 9.11 테러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은 아랍에서의 패권 유지와 이라크의 석유를 노려 거짓 논리, 즉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와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략, 10만 명이 넘는 이라크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지도 보유하지도 않았고, 테러 지원의 흔적도 전혀 없었다.

또 미국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시리아 전쟁은 물론이고 이란, 팔레스타인, 예멘 등 중동지역의 모든 분쟁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개입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국으로서의 미국 참모습은 바로 이렇다.

해서 묻는다. 이런 국가가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 침략 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국가가 이 지구상 침략 국가이겠는가? 타 국가를 단 한 번이라도 침략하거나 농락하지 않은 남과 북이 침략 국가이겠는가? 침략 국가인 미 제국의 본질은 절대 이렇게 숨겨질 수 없다. 그러니 이 지구상 진정한 깡패국가, 불량국가는 다름 아닌 미 제국이다.

관련해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있다. 북의 <조선중앙통신>20231014일과 15일에 걸쳐 중국 <신화통신>이 발표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의 근원 및 현 실태와 그 해독성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번역 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래와 같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2001년까지 세계의 153개 지역에서 248차례의 무장충돌이 발생하였는데 그중 미국이 일으킨 것은 201차례로서 약 81를 차지한다면서 현재 미국은 적어도 세계의 80개 나라에 약 750개의 군사기지를 두고 있으며 유엔의 190여개 성원국 가운데서 175개 나라와 지역에 미군이주둔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신문은 “2001년 이래 미국은 세계의 80여개 나라에서 반테로의 미명하에 전쟁을 일으키거나 군사행동을 전개함으로써 387,000명의 민간인을 포함한 약 929,000명의 사망자를 직접적으로 초래하고 약 3,800만명이 유랑자나 피난민으로 되게 하였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신문은 미국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해치고 주권에 관한 원칙을 유린하며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평화적 발전을 저애함으로써 각국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재난을 들씌우고 세계의 안전과 안정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파괴하고 있으며 인류문명의 발전에 장애를 조성하고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2. 미 제국의 대한반도 침략사: 각종 발언일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외형적으로는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한 국가이다. 하지만 그 주권적 실체가 가려있는 사실상자주권이 미국에 저당 잡혀있는 식민지 속국에 불과하다.

?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우리 민족과 미국과의 악연이 그 증거일 텐데 그 시작은 제너럴 셔먼호에서부터이다.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자체가 침략이었고, 야만이었고, 학살이었다. 이후 그들의 침략적 본성은 19459월 인천 부두 만행, 1980년에는 위컴 사령관의 들쥐발언, 그리고 트럼프의 “They do nothing without our approval·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20181010, 트럼프의 발언)”, 그리고 그 종착지에는 가치동맹과 캠프데이비드 협정까지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선()한 우방인가? 그렇게 묻고 있다.

이를 좀 더 세밀한 사건 일지로 한번 살펴보자. 시간은 조미 수호조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 조약 파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미국은 일본에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식민지화를 보장했고, 지금 현재는 그 연장선상에서 미일동맹의 하청동맹으로서의 한미동맹과 한미일 동맹으로 부활, ()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그렇게 존속시켜 내고 있다.

즉 조선이 해방되자 미국은 19459838선 이남에 맥아더 사령관을 주둔시킨다. 최고사령관인 그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다.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너무나도 분명한 침략자의 모습뿐이다. 참고로 위 내용은 1945924일 당시 <민중일보>가 보도한 맥아더 포고문 제1, 2, 3호 등 6개의 점령 조항 중 일부이다. 명백하게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점령지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재해석도 마찬가지이다. 2021412일 중국인권연구회가 발표한 자료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일으킨 침략 전쟁 중 하나로 한국전쟁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다. 위 폭로 자료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침략자적 성격은 명백하다. 당시 전쟁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면 이는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관련해 그 전제는 명확하다. 이 전쟁을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느냐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전쟁의 성격을 가리기 위한 반공적 접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해서 한국전쟁을 북침이냐, 남침이냐로 구분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한국전쟁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본질적 의미로서의 한국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기본 인식을 분명하게 깔고, 그 전제하에서 내전이자 국제전으로서의 그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해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 전 이미 한반도 상황은 미소 냉전의 하위체제로 존재한 남북 분단 체제가 있었고, 미국의 대외정책은 군사적 봉쇄 정책이었다. 이때 때마침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고, (이 기회는 결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엄청난 규모의 국방비 증대가 필요했지만, 국내의 여러 상황이 이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연히 미국은 지체할 것도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 이로부터 당시 소련 봉쇄를 중심에 놓던 냉전체제의 정당성과 국방비 증액의 명분을 충분히 확보하였다.

[보충 설명]미국은 분단선인 38선을 그은 주범으로서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고, 38선 이남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도록 사주함으로써 분단을 강요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요인이 그렇게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만들어졌고, 실제로도 당시 상황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휴전선을 중심으로는 크고 작은 남북 사이의 교란작전과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른 말로는 분단이라는 비정상과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즉 통일을 위해 전쟁은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내적 요인과 민족사적 숙명은 그렇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를-미국은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잘 활용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편승, 전쟁을 통한 자신들의 이익은 아주 철저하게 챙기고, 전쟁 개입 명분의 절대성은 전쟁의 성격을 통일전쟁에서 남침”, “6.25 전쟁으로 변질시켜 그 합리화를 이뤄냈다.

전쟁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오로지 북()에만 떠넘기는 전략이 그렇게 성공했고, 북을 악마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빙자하며 작전 지휘권을 완전 장악, 사실상 대한민국이 군 통수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좀비 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은 이렇게 이 전쟁-한국전쟁 개입을 통해 자신들이 일찍 구상해 왔던 사실상의 냉전체제를 완성하고, 일본과의 하청동맹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이루고, 대한민국을 완전한 대소 전진기지로 재정립하였다. (<본인 저서, <전략국가, 조선>, 123~147쪽 참조.)

해서 분명한 건, 한국전쟁에로의 참전은 미국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한국전쟁이 미국 참전으로 자신들의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을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미국이 대한민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은혜(恩惠)로운 국가라는 것은 참 진실일 수 없다.

결과, 현대판 재조지은이라 할 수 있는 숭미지은(崇美之恩)에 우리 스스로 속박당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이 허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5·16 쿠데타와 광주학살 개입에 따른 미국의 책임도 매우 크다. 누가 뭐래도 5·16 쿠데타는 미국의 작품이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는 퇴임 후인 19645월 영국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CIA 국장으로 일하면서 해낸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이 바로 5·16 쿠데타였다고 밝혔다. 무얼 의미하겠는가? 한국 정치를 이렇게 미국 정보기관이 좌지우지했음을 알 수 있다.

19805·18 광주학살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동이 된 이 학살에는 미국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때 군대 파병을 승인했던 인물이 바로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었음에 증명된다. 그는 19808월 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해 미국은 새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면서 한국인들은 레밍(lemming, 들쥐)과 같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가 누구든 줄을 서서 그를 따른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한 체제가 아니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한국인을 비하함은 물론, 미국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면서 식민지 속국 취급하는 침략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심지어 촛불 정부임을 자임했던 문재인 정권 때도 미국의 요구는 거침이 없었다. 아름다운 땅 성주에 사드를 배치해 그들의 대중국 견제를 위한 병참기지로까지 만들어 대한민국을 속박했다. 또한 심심하면 주한미군의 방위비 먹튀 인상과 우리 안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니 안보가 위협받는 우크라이나전쟁 등에도 윤석열 정권하에서는 군사협력을 강요받는다.

이렇듯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단 고착화를 철저하게 강제했다. 그 결과 미국은 대한민국의 땅 28곳에는 미군 기지를 강제로 세워 70여 년이 넘게 이 땅을 무상 점유하고 있으며, 온갖 명목으로 북침 전쟁연습을 해댄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3년 한해에만 한미연습은 42차례, 한미일 군사연습은 10차례나 진행되어 횟수로는 365일 중에 무려 200일이 넘게 진행되었고, 이는 사실상 3일에 이틀 꼴로 군사연습이 진행된 것과 같다.(심지어 3월 한 달은 훈련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트럼프의 도 넘은 내정간섭과 바이든 이후 가치동맹으로 포장된 한미동맹이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후 아시아판’ NATO를 그 목적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으로 포박당하고 있다.

결과, 이 모든 사실로부터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대한민국을 영구 지배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수단으로 작동하게 되고, 여기에다 사실상 미국과 동일체인 유엔사는 분단 고착화를 위한 분단 관리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들, 미국이 우리 대한민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로 바라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이 우리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영구 지배하에 존속시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끝이 없다. 그 중심에 친미 인물들을 대거 포섭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름하여 공작원 포섭이 그것인데, 그 대표적 사례가 2006년에 발생한 백성학 간첩 사건이다. 폭로된 자료에 따르면, 백성학 당시 영안모자 회장은 전 CIA 요원인 미() 국방부 부차관 리처드 롤리스에 포섭돼 정치권의 광범한 인사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을 딕 체니 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전달해 왔다고 밝혔다.

또한 흑금성이란 공작명으로 유명한 박채서 씨도 2018831<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그 어떤 내용을 폭로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는 이날 자신이 한미합동정보대에서 일하면서 미 공작원에 포섭된 한국인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각계각층 저명인사 공작원 386명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가수, 연예인 중에도 있었다고 했다. 또 있다. 2011<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내용이다. 자료에 따르면 정부 고위 공무원과 청와대 내에도 미국을 위해 일하는 정보원과 공작원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결론, 정보의 성격상 이 모든 것을 다 일일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위와 같은 예는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3. 반미에 기반한 자주여야 하는가?

미국은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철저히 자신들 내정간섭 하에 있는 속국으로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 대한민국 사회 전반을 실제 장악,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정으로서의 그 대한민국 주권을 온전히 회복, 혹은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선결 조건, 즉 미국에 저당 잡혀있는 예의 그 자주권을 반드시 되찾아 와야만 한다.

그 어떤 주권적 회복보다 가장 선결적으로 나서는 것이 반미자주화 투쟁임을 알 수 있다.

(1) 반미 자주를 위해 넘어서야 할 인식 장벽 세 가지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이제껏 역대 그 모든 정권에 의해 미국이 일제 강점당한 조선을 구해준 해방자이자, 한국전쟁 당시 북의 남침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한민국을 지켜준 수호자이고,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대한민국 경제에 엄청난 도움을 준 원조자라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포획돼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옳은인식이 필요하다. 해방 시기의 개입과 통일이 전제된 한국전쟁에로의 개입이 과연 진정으로 대한민국만을 위해서였을까? 다시 말해 정말 미국 자신의 국익 요구와는 전혀 상관없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도와주었을까?

그렇게 묻고, 대답은 천만의 말씀이다, 여야 한다. 해방 시기와 한국전쟁의 개입은 당시 냉전체제라는 세계 질서 하에서 미국 자신의 국익을 극대화하거나, 혹은 수호하기 위한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대한민국 도와주기였을 뿐이고(이는 일본 추종론자들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설파하면서 일본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조선을 병참 기지화한 것을 두고 마치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 도움을 준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논리와 똑같다. 즉 당시 미국은 냉전 질서 하에서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한민국을 도와줬을 뿐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일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궤변임을 우리 국민이 꿰뚫어 보고 있지만, 미국의 해방자·수호자·원조자의 가면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또한 초창기 유·무상원조와 차관을 통한 한국경제 지원도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제국주의 침략 경제이고, 한국경제를 자신들의 하청 경제화하기 위한 수탈 체제로서의 경제 지원이었다. 그러니 어찌 미국을 대한민국에 숨어든 거대한 괴물 권력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그 실체를 우린-국민은 이제껏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해서 다음과 같은 인식 정립, 즉 미국에 대한 세 가지 숭배 신화를 반드시 떨쳐내야만 하고, 그렇게 하여 대중적 반미자주화 투쟁의 길을 반드시 열어 내어야만 한다.

(2) 대한민국이 미 제국에 포섭된 결정적 예속성의 징표들

뭐니 뭐니 해도 첫째는, 다음과 같은 상징이 미 제국에 포섭된 대한민국 예속성의 가장 큰 징표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국의 속국임과 다를 바 없다. “They do nothing without our approval·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20181010, 트럼프의 발언)”

둘째는, 미국의 정치적 지배가 작동하는 불평등한 동맹체제이다. 이름하여 가치동맹에 근거한 한미동맹체제를 일컫는다.

셋째는, 미국의 군사적 지배 부분이다. 대한민국 군 통수권(작전 통제권)을 미국이 갖고, 필요에 따라 전략자산 전개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시도 때도 없이 실시한다. 원래 목적은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전쟁 억지였으나 지금은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전쟁불안정성 주범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대중국 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전락 되었다. 여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이러한 불안정성과 긴장 유지를 통해 자신들의 무기 판매 시장 역할을 한다.

[작전 통제권에 대한 불편한진실]

한 국가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로의 징표는 그 나라 최고통수권자(대통령, 혹은 총리 등)가 작전통제권을 온전히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에 의해 일명 대전협정에서 미국에 작전 통제권이 완전히 이양되었다. 이후 199412YS 정부 때 평시 작전통제권은 환수됐지만 지금껏 전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국이 갖고 있다.

참고로 작전통제권은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된다. 평상시의 작전통제권은 평시 작전통제권이라 하고, 전시에 발동되는 권한을 전시 작전통제권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시 작전통제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가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실상작전통제권은 전시 작전통제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평시와 전시를 결정하는 것도 전시 작전통제권을 갖고 한미연합미사령관(주한미사령관)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해서 5단계로 구분되어 있는 테프콘 발령권한이 사실상한미연합미군사령관(주한미사령관)에게 있다.

결과, 대한민국은 사실상 자주권이 없는 나라와 같다.

넷째는, 다음과 같은 미국의 경제적 지배가 작동한다. 미국은 자신들의 제국경제와 패권 유지를 위해 미국 우선주의를 들고 나왔고, 이를 위해 동맹국에는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을 강요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 등이 이에 해당하고, 이로부터 동맹국인 대한민국은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용 창출과 GDP가 성장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미국의 사상·문화적 지배 방식이다. 중심에 미국식 신자유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확산전략이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내용은 자국 이념으로의 일체화론신세계 질서론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전략에 담긴 불편한진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의미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세계 질서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말한다. 해서 총합하면 미국이 세계의 일체화’, ‘세계화흐름이라는 것을 꾸며낸 것은 전 세계를 미국식 자유세계로 만들며 모든 민족을 미국에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일체화론신세계 질서론은 역사에서 파산당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또는 사해동포주의)’*와 같은 반동적인 이론을 각색하고 변형시킨 새로운 세계 지배 교리로서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세계를 미국 중심의 1극 세계로 만들며 세상만사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이다.

*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매 개인의 조국은 전 세계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은 무국적자’, ‘세계시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적 사상과 이론. 민족자주권을 부인하고 유린하며, 민족 허무주의를 설교하고 민족문화와 그 전통을 허무주의적으로 대하도록 함으로써 미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 책동을 합리화하는 데 복무한다.(‘세계주의’, [조선말대사전] 설명)

(3) 나아갈 길: 두 가지 방향과 들어야 할 구호

‘(2) 대한민국이 미 제국에 포섭된 결정적 예속성의 징표들에서 확인받듯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게 확실해졌다. 그러니 완전한 주권국가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우리 갈 길을 분명히 해야 한다.

먼저, 우리 대한민국이 미 제국의 예속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방향(좌표) 문제이다.

첫자리는 새로운 진보운동이 한미동맹체제를 반드시 해체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이제 더 이상 동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동맹으로 위장된 분단 체제 지속의 장본인이며 한반도 평화 체제를 반대하는 대결 세력이다. 정치적으로는 한미동맹, 군사적으로는 주한미군 주둔을 통해 이 땅에 영구히 평화와 번영, 통일이 깃드는 것을 방해하는 주범일 뿐이다.

그러니 향후 자주통일운동은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비롯하여 각종 군사시설과 전쟁 무기, 주한미군 기지를 몰아내는 투쟁에 매진, 종국에는 불평등한 한미동맹체제를 완전히 해체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미국이 개입할 명분과 제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대한민국 주권과 국민의 이익을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운동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 투쟁을 강력히 견인해 내야 한다.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과 전쟁 위협이 북의 핵 보유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명백하다. 오히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분단체제의 지속이 필요할 뿐이다. 즉 이 분단체제의 지속이 동북아에서의 패권적 지위 유지는 물론이고 마르지 않는 젖줄처럼 자국의 이익을 수탈해 나갈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득이 보장받는다. 그래서 대북 적대정책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이다.

해서 이 적대정책을 그대로 두고서는 결코 한반도에서의 자주와 평화, 통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시켜야만 한반도 비핵화 해법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 투쟁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다음, 그래서 우리 운동이 들어야 할 핵심 구호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 더 이상 한미동맹 필요 없다. 당장 해체하자! , 만악의 근원, 주한미군 필요 없다. 당장 이 땅을 떠나라! , 전쟁 위협만 불러오는 전략자산 전개와 한미합동군사훈련 영구 중단하라! , 북핵 비핵화는 없다, 미국은 핵 없는 인류 세상에 화답하라! 다섯, 대북적대와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즉각 철회하라! <계속>

통일뉴스/ 김광수:()정치학 박사/ , 부산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전략국가, 조선> 저자

김광수-저서로는 가장 최근작인 전략국가, 조선(2023)을 비롯하여 김광수의 통일담론: 통일로 평화를 노래하라(2021), 수령국가(2015),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강의 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거쳐, 지금은 부경대에서 강사직위를 갖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민생민주부산시민행동 건설 주도(제안자) 및 상임집행위원/6.15부산본부 공동대표·공동집행위원장·정책위원장/전 민주공원 관장/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