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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09.1.12~09.12.10

by 이성근 2019. 2. 16.

친일분자 박정희=폭군 박정희

박정희의 친일 행위, 공산주의 활동 따위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18년간 그가 저지른 군인 깡패 두목 짓에는 용서할 구석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즈음해 박정희의 친일 행위가 다시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렸다. 곰팡내 풀풀 날 만큼 해묵은 사실이어서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으련만, 자제 한 사람이 아버지의 이름 기재와 사전 배포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는 바람에 소란이 커졌다. 법원은 이를 기각했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군에 지원하며 썼다는 충성혈서를 다룬 당시 신문 기사 사본을 공개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박정희가 친일분자였다고 판단할 것이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에 맞서 <친북인명사전>이라는 걸 만들고 있다니, 남로당 출신 박정희는 2관왕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박정희 평가에서 친일 여부가 가장 큰 잣대가 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비장하면서도 코믹한 그의 충성혈서에서 열도 우익반도 우익의 맥놀이를 듣는 듯해 귀가 간지럽고 입이 쓰긴 하지만, 그의 친일이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 파시즘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이광수나 김성수 같은 명망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실, 그의 친일이 끼친 해악은 그보다 두 살 위였던 서정주의 친일 시 몇 편이 끼친 해악보다 작다.

 

이리 말하는 것은 박정희의 친일을 그냥 넘기자는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가의 법적·정치적·역사적 기초가 일본 군국주의의 부정이었던 만큼, 일본 육사를 나와 일제 괴뢰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큰 흠이다. 그러나 친일분자 박정희폭군 박정희를 압도하는 세평은 위험하다. ‘남로당원 박정희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일본 제국주의를 떠받든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 건국을 전후해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 따위는, 그가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병영으로 만든 죄에 비하면 크달 수 없다. 그의 친일 행위, 그의 공산주의 활동, 그의 비열한 전향 따위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길게는 18, 짧게 잡아도 7(유신체제 또는 제4공화국이라 불렸던 1972~1979)간 그가 잔인하게 저지른 군인 깡패 두목 짓에는 용서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민족반역자를 넘어선 인륜 파괴자였다.

 

정적 탄압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가 죽이고 싶을 만큼 김대중을 미워하고 불안해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인혁당 사건은 그가 저지른 가장 유명한 인간 백정질이지만, 그것이 널리 비난받았다는 점에서 얼마쯤 정의를 회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을 학대한 것이 아니다. 선거가 다가오거나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터지곤 했던 간첩 사건 가운데는, 도무지 영문 모를 일이 많았다. 그 조작된 간첩 사건에 연루돼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망쳐버린 이들이 박정희의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수 없이엮인 이른바 컬래터럴’(collateral)이었다. 그리고 이런 컬래터럴만들기를 전두환이 이어받았다.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이런 짓을 실무 차원에서 주도했던 중앙정보부(중정)는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전신이다. 그러나 중정이라는 말에서 당대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감은 오늘날 우리가 국정원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감정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정은 심지어 전두환이 그것을 대체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보다도 더 끔찍한 곳이었다. 안기부만 해도 그 마지막 나날들이 김영삼 정부와 겹쳐 있어서, 군부정권 시절의 어두운 이미지를 조금은 씻어냈다. 그러고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장 큰 은인이다. 인간 도살자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입혔으니 말이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 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 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시사인 11709.12.10

 

농민을 죽이고는 희망이 없다

농업을 무시하고 수출산업에만 의존하는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최악이다. 그런데도 토목공사를 한다며 농경지를 없애고 있다. 이는 망국의 길이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데도 농민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 해마다 늘어나는 재고량에 설상가상으로 북한으로 보내는 쌀 지원이 중단됨으로써 쌀값이 폭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 울화통이 터진 농민들 중에는 누렇게 익은 논을 갈아엎고, 나락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농민들의 행동을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해방 뒤 농지개혁 이후, 오랜 세월 지주 밑에서 땅을 빌려 목숨을 이어가던 수많은 소작농이 자신의 땅을 갖게 되어 행복한 경작을 하던 때가 잠깐 있었다. 그 무렵 우리의 농촌 공동체는 물론 가난했지만 전쟁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로 접어들어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무엇보다 저곡가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공업화를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농촌은 다시 피폐해지면서 엄청난 농촌 인구가 수십 년에 걸쳐 도시의 슬럼으로, 공장으로 유입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도권은 과밀현상을 초래하고, 지방은 황폐해지고 말았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무엇보다 농촌 죽이기를 기축으로 한 경제정책 노선은 그 후 한번도 근본적인 교정 없이 계속되었고, 이 나라의 정책과 여론을 좌우하는 엘리트들은 오로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조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 결과 비록 경제지표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성취했으나, 장기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불안하고 허약한 생존구조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 산업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식량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북한이 1990년대에 들어서 러시아와 동유럽으로부터 들여오던 석유와 원자재 공급이 끊어지면서 일시에 농업 붕괴 현상을 겪고 대량 기아 상황으로 빠져들었을 때에도 식량자급률은 지금 남한에 비하면 월등 높았다. 지금 남한의 식량자급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 석유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석유 공급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 닥치고 수출산업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때 남한 사람들은 북한 동포들이 겪었던 것 이상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 틀림없고, 이 나라는 아마도 아비규환의 상황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온갖 징후로 보아서 그런 날이 조만간 닥칠 가능성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힘 있는 자들은 아직도 비현실적인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수출만이 살길이라면서 그나마 간신히 남아 있는 소중한 농경지를 4대강 사업이니 보금자리 주택단지 건설이니 혁신도시 조성이니 하는 시대착오적인 토목공사를 통해서 깡그리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참으로 경악할 만한 것은 합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러한 사업들을 엄청난 국가예산을 들여 주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엄격한 사전 환경조사도 거치지 않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사회에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러한 권력의 폭주로 지금 당장 희생당하는 것은 땅과 생계수단과 집을 뺏긴 민초들과 자연환경이지만, 궁극적으로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권력 있는 자, 권력 없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존재가 이로 인한 재앙의 피해자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식량 자립 못하면 노예화는 필연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오늘날 생존해 있는 가장 존경할 만한 현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국 경제가 IMF 통치 아래 들어가던 19981월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출범을 앞둔 김대중 정부를 향해 던진 간곡한 충고가 있다. 그는 한국이 IMF의 돈을 받되, 그 돈을 수출만이 살길이라면서 장기적인 고려 없는 고식적인 정책을 확대하는 데 쓸 게 아니라, 농업과 에너지 분야에 투자함으로써 자립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한 모두 시각이 좁고 편벽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하다고 말했다. 북한은 주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재앙에 직면했고, 남한은 무역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결국 망국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981월호).

 

벌써 10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갈퉁의 이 충고는 여전히, 아니 갈수록 적실성을 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립성을 첫째로 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렇지 않을 때, 설혹 운이 좋아 대파국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노예화는 필연적이다. 농민과 농촌을 살리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시사인 11109.10.30

 

마르크스라는 유혹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마르크스, ‘진정한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시사인 10509.9.15

 

주권재민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권력의 폭주는 인간 생존의 자연적 기반 자체를 손상시킨다. 대통령도 임기 중에 그 권한을 종식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 도입을 고려할 때다.

제주도지사 소환이 낮은 투표율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니 심히 착잡한 기분이다. 제주도와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그곳 도정 책임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나 편견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나는 두 달 전 그에 대한 주민소환 청구 요건이 충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큰 관심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지역 문제가 아니라,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중대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특정 광역단체장의 진퇴 여부가 아니라, 선출된 권력자를 임기 중이라 할지라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선례가 만들어지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선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장래는 밝아질 게 틀림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복잡한 이론이나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갖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 즉 노예나 신민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존중하는 정치제도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모든 시민이 공동체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의 확보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러한 공간을 제공하는 데에 적절한 제도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잘 기능한다 하더라도 대의제 민주주의는 결국 민중이 자신의 권리를 엘리트에게 위임하고 있는 제도이며, 그런 점에서 그 내재적인 한계는 명확하다. 더욱이 근대국가의 불가결한 제도로서 성립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민중의 주체적인 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는 중대한 사실이 있다. 이 점에서 미국 헌법 기초자 중의 한 사람인 제임스 메디슨은 솔직했다. 그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유산자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정치적 장치임을 공적 기록에서 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폐기는 당분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한계를 의식하면서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들로써 보강하는 노력이 지금으로서는 아마도 최선의 방책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의 법률이 유일하게 허용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적인 권리 행사, 즉 주민소환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다가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상했던 대로, 제주도지사 소환이 무산된 데 대해 지금 보수 기득권자들이 드러내는 반응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영원한 권력을 누린다면 모를까, 따져보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서도, 민주주의나 민주적 가치에 대해 그들이 늘 드러내는 생리적인 거부감은 어리석은 것임에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버리고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그들 자신도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은 이번 일이 국책사업에 반대하는 좌파 시민단체의 책동 때문이었다면서, 주민소환청구 사유를 제한하는 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이번 소환운동의 핵심이 지역주민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동의도 구하지 않는 독단적 행정의 상습화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해군기지나 영리병원 혹은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같은 지역주민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을 정책을 입안·추진하면서 해당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다는 것은 식민통치를 방불케 하는 권력의 폭주이다. 노예가 아니라면 이런 심각한 인권유린에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게 아닌가.

 

제주도 주민소환 투표율 11%가 가진 큰 의미

이번에 제주도에서 주민소환 투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실상 투표의 자유를 박탈한 권력자에게는 준엄한 문책이 따라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에 의한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11%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제주도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할 때 만만치 않은 비율이며, 권력의 전횡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시민적 에너지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이 에너지는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살리기라는 실로 교활한 이름으로 대대적인 국토 파괴에 나서면서, 국민들에 대한 설명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고 있다. 권력의 폭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자연적 기반 자체를 손상시킨다. 대통령도 임기 중에 그 권한을 종식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10309.8.31

 

나쁜 정당, 나쁜 신문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한 오찬장에서 했던 말이다. 나쁜 정당, 나쁜 신문. 정명(正名)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보수도 소중한 가치이기에 그 정당을 보수정당이라고 부를 수 없어 극우정당 또는 수구적 보수정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또 그 신문들을 보수신문이라고 부를 수 없어 몰상식한 수구신문 또는 신문의 탈을 쓴 사익추구 정치집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주 쉽고 간단한 이름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통곡으로써 반역의 시대를 증언한 김 전 대통령은 정명으로써 또 하나의 가르침을 남겼다.

 

양심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줄 아는 인간성의 조건이다. 일생 동안 식민지 조선과 중국 땅에서 불의에 맞서 싸웠던 김학철 선생은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편하게 사는 것인간답게 사는 것을 대비시킨 것은 그의 삶을 반영하듯 칼날처럼 정확하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세태를 꿰뚫는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참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들도 이 말을 비켜가지 않는다. 나쁜 정당이 집권하고 나쁜 신문이 영향력을 누리는 배경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몸과 긴장하는 행동하는 양심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7개월이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참사 관련 조사기록 3000쪽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방송법을 불법적으로 밀어붙였고, 물과 전기·의약품까지 끊는 상황에서 사쪽과 최종 합의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67명을 구속했다. 그런 정권이 화해와 통합을 말한다. 중국의 루쉰은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밖에 약이 없다고 했는데 미친 개가 몽둥이를 들고 날뛰는 듯한 상에 시달리는 것은 내가 불온한 탓이겠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양심을 멀리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모질고 뻔뻔한 정권을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은 나쁜 기업과 함께 지배의 삼각편대를 이룬다. <나쁜 기업>을 쓴 독일 출신 저자는 우리의 삶을 은밀히 지배하는 유명 브랜드 기업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착취, 아동노동, 독재정권과의 긴밀한 협력, 전쟁, 환경파괴로 엄청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고 고발한 바 있다. 외국 기업이 주로 브랜드의 가치를 강조한다면, 한국 기업은 국가경쟁력을 특히 강조한다. 한국의 자본권력이 국가권력, 언론권력과 긴밀히 유착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데, 기업의 국가경쟁력을 강조하는 것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처럼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돌아올 편안함의 몫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뉴타운 공약이나 ‘747’과 만난다.

 

분명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이지만 다수가 그들을 멀리하기는 쉽지 않다. 윤리적 소비가 그렇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양심의 부름에 따라 불편함을 선택할 때 그 길이 조금씩 열릴 것이다. 그런 사회 구성원은 앞으로도 소수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싸워왔는데 이 정도밖에 인간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했나라고 말하는 대신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한 것도 소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애쓴 결과다라고 말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에 빠져선 안 되기 때문에.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09.8.25

 

두바이 모델이라는 재앙

경제·생태 측면에서 자멸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온 두바이를 흉내 내며 새만금에 이어 4대강을 파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작년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두바이는 21세기형 발전과 번영의 모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정·재계, 관료, 언론계 엘리트들의 두바이 모델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유별난 것이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두바이를 찾아갔고, 그 눈부신 발전상에 감탄하면서, 한국 경제의 활로가 두바이를 벤치마킹하는 데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두바이는 처음부터 지속 불가능한 모델이었다. 사막의 유목민 사회가 자기 나름의 진로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는 나무랄 게 없다. 그러나 금융과 관광, 부동산 중심의 비생산적인 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발전모델이란 세계적인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무너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실, 두바이의 성공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생태적 측면에서도 자멸적이다. 무엇보다 두바이가 막대한 전력 공급 없이는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완전히 인공 낙원이라는 게 치명적인 문제인 것이다. 가령 두바이는 인공 눈()으로 거대한 스키장을 조성하여 관광객을 끌려고 하지만, 이 엄청난 전력 소모형 관광산업이 지구 온난화 시대에 어울리는 산업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사실상의 노예제 위에서 발전한 두바이

그러나 경제 논리나 생태적 문제를 떠나서, 두바이의 발전은 가장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기초, 즉 사실상의 노예제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2만 달러인 두바이에는 세금도 없고, 모든 국민은 무료 의료·무료 교육의 혜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원한다면 해외유학까지 정부 지원을 받는다. 그들은 옛날 사막의 유목민이었던 조상들이 꿈도 못 꾸던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대개 공무원이며, 육체노동이나 허드렛일은 거의 전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맡기고 산다. 그런데 그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건설관계 노동자들의 비참한 운명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2009. 4.7)의 르포 기사에 의하면, 오늘날 인도나 방글라데시 출신 건설 노동자들이 두바이에서 받는 대우는 말할 수 없이 비인간적이다. 이들은 고향에서 인력 송출회사 직원의 말만 믿고 빚을 내어 출입국 수속을 하고, 두바이로 들어오지만, 원래 약속됐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극히 열악한 상태에서 혹독한 고통을 견디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이미 고향에서 큰 부채를 졌고, 공항에서 여권을 빼앗긴 데다가 비행기표 살 돈도 없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은 단 5분도 견디기 어려운 섭씨 55도의 땡볕에서 14시간 일하고, 원래 약속한 임금의 4분의 1도 안 되는 초저임금(월 약 50달러)을 받는다. 그들은 위험한 작업장에서 무거운 벽돌이나 시멘트 블록을 나르면서 땀을 너무 흘려 며칠, 몇 주 동안 오줌이 나오지 않는다. 더위를 먹어 토할 것 같아도 오후 1시간 말고는 잠시도 쉬지 못한다. 질병 때문에 일을 못하면 당장 임금이 깎인다. 게다가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황량한 콘크리트 합숙소에서의 생활은 짐승보다 못한 생활이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 하나에 12명이 섞여 지내야 하고, 바로 옆 변소에서 나오는 악취를 견뎌야 한다. 숙소로 운반되는 식수는 탈염 처리가 제대로 안 되어 역한 소금맛이 나지만, 달리 마실 물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의도, 분노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체포당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넉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는데, 두바이 경찰이 물대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결국 파업이 중지되고 주동자들은 구속되었다. 건설 현장이나 노동자 합숙소에서는 자살률이 매우 높지만,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일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해 싸구려 독주를 안주도 없이 들이켠다. 그 두바이에 이제 건설 플랜트 시장이 위축되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공동화 현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세계경제의 낡은 관행이 되살아나면 두바이가 다시 흥청거리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생태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이 발전 모델이 장기 지속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두바이에 비하면 한국은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우리는 자원이 없는 나라라고 끝없이 스스로를 비하해왔다. 그리하여 천혜의 비옥한 땅과 갯벌과 바다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망가뜨렸다. 그 연장선에서 새만금에 이어서 4대강도 지금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직면해 있다. 이보다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 있을까./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9909.8.3

 

 

대의제 민주주의가 문제다

대통령·의원도 임기 중에 몰아낼 수 있도록 국민소환제를 강화하고, 중대 현안은 국민투표로 결정하도록 해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권력의 횡포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온 나라에 가득한데도 국가 권력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선례로 볼 때, 이런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권력 자신의 비참한 몰락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특정 정치 세력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이 소통 불능의 폐색 상황 때문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의 소중한 삶이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의 독주를 제어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말 중요한 것은 사태 해결을 위한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성찰이다. 실제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집권 세력의 교체로 간단히 붕괴될 만큼 취약한 것이라면, 그 취약성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나 최고 권력자 개인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다려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아무것도 없는 현재의 정치체제이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듯이 이 나라에서 지금 삼권분립이란 개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집권 세력이 국회까지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검찰과 법원이 행정 권력의 부속물로 전락한 것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기득권자 위한 제도

생각해보면, 이 현실은 유독 한국 정치의 결함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노골화된 현상이라고 해야 옳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원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고, 역사적으로도 흔히 과두(寡頭) 정치의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대의제 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은 현대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본래 민주주의란 민중의 자기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민중이 자신의 권리를 남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간접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방안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강하여 가급적 많은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 수준에 국한된 주민소환제를 확대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라 하더라도 유권자가 원한다면 임기 중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국민소환제의 도입이나 국가적 중대 현안을 둘러싼 국민투표제의 도입 등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제도의 도입으로 권력의 국민에 대한 설명책임이 강화되고, 따라서 민주주의가 좀 더 튼튼해질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모범적인 국가는 스위스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순수한 직접민주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지역··연방을 가릴 것 없이 스위스의 대의기관들은 늘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국민투표와 헌법개정 발의권이다. 시민들은 10만명(전체 유권자의 약 2.5%)만 서명하면 헌법 개정을 발의할 수 있고, 5만명이 찬동하면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의 수용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 그래서 스위스에서는 1년에 평균 12개 법률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게다가 대체로 스위스에서는 각급 의회나 학교, 심지어 재판소도 많은 경우 정규 직업을 따로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운영되고 있다. 이게 시민적 덕()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밀도 높은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개인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만, 이러한 활발한 정치 참여 덕분에 그들은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소외되거나 배제된다는 의식 없이 모두가 주인으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사회학자 캐럴 슈미드의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 대다수 스위스인은 자기 나라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사는데, 그것은 주로 빼어난 자연 경관이나 부유한 경제가 아니라 정치체제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계속 무시·억압한다고 해서 우리가 절망할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가 어이없이 유린되는 이 누추한 상황에서 우리는 극도의 인간적인 모멸을 느끼고 있지만, 이것은 어쩌면 좀 더 견고한 민주주의를 위한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민을 노예나 가축 다루듯이 함부로 대하는 독선적인 권력의 계속적인 폭주를 허용하는 정치체제 그 자체의 모순에 우리는 진지하게 도전할 필요가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7509.7.6

 

민주주의의 생물학적 뿌리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한 본성과 욕망을 무시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도, 전 대통령 자살도 이 인간됨의 공통한 뿌리를 무시한 데서 비롯됐다.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대개 우리는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고, 뛰어난 지능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과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고릴라나 오랑우탄, 침팬지 등 유인원(類人猿)들이 그들 나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며, 또한 지능에서도 그들이 생래적으로 인간에 비해 크게 열등한 것은 아니다. 포유류 동물의 기억력·사고력 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전체 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인간이나 유인원이나 36 내지 39% 정도로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과 유인원 간의 지능 차이보다 인간과 인간 간의 지능 차이가 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종()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를 특징짓는 것은 언어도, 지능도 아님이 확실하다.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현상이라고 논해왔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인간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래된 토착 민족들이나 지금도 부족생활을 하는 공동체들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실은 문명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인들은 노쇠하여 때가 되면 스스로 마을을 떠나서 인적이 없는 얼음 벌판에 며칠이고 조용히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 이러한 풍습은 16세기 유럽 일부 지역에서도 관찰된 것인데, 예컨대 남부 프랑스의 어떤 농민들은 자신의 밭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웅크리고 앉은 채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결국 근대문명이 진전되면서, 인간이 고독한 개체로서 자아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됨에 따라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인간 고유의 특성에 관련해서 인간이 태어나는 방식의 독특함에 주목한 과학자가 있다. 스위스의 동물생태학자 아돌프 포르트만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조기 출산이라는 특징이 있다. , 인간은 태어나서 한 살이 돼야 비로소 다른 포유류들이 태어날 때와 비슷한 발육 상태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임신 기간이 21개월이 돼야 다른 동물의 새끼처럼 태어나서 곧 걷기 시작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인데, 사람의 자식은 지나치게 짧은 임신 기간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히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제대로 성장하려면 아기는 태어난 뒤에도 일년 정도는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환경 속에 있어야 한다. 이 기간에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대신 사회적 자궁속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기간에 인간다운 기본 특성들이 형성된다. 아기는 성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밀착된 보살핌을 받기 위해 울음을 포함한 온갖 수단으로 자기의 존재를 알려 항상 관심과 주목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 유아의 이 나르시시즘은 생물학적 요구에 의한 것이다. 개체나 집단으로서 인간에게 가장 뿌리 깊은 욕망의 하나는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이것이 결국 부와 권력과 명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조기 출산에 따르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결부된 것인 한, 이 욕망의 뿌리를 잘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권력의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이 계속되니

그러나 유아적인 자기중심주의가 전부라면 세상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사회 혹은 견딜 만한 사회는 이 유아적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대폭 완화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 축적된 사회이다. 그런데 이 문화적 힘 역시 그 원천은 유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통해서 인간은 누구든 타자의 도움 없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란 타자에 대한 신뢰와 의존, 보살핌과 협력 없이는 지탱되지 않는다는 좀 더 성숙한 인식이 광범하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이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생을 확충하고자 하는 욕망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공유하는 욕망이다. 이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에 적합한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한 본성과 욕망을 무시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전직 대통령의 자살도 이 인간됨의 공통한 뿌리를 무시한 데서 비롯된 비극임에 틀림없다. 권력의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이 계속되는 한,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9109.6.9

 

노무현은 이제 보통명사




노무현: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기득권 해체를 위해 싸웠던, 그리하여 마침내 그 대의에 순절한 투사.

토요일(523), 아마 오전 950분쯤이었다. 강연 일정도 마쳤고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난징(南京)을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그날 첫 방문지로 잡은 징하이스(靜海寺)로 가기 위해 호텔 방을 막 나서려는 데 중국 관영 CCTV 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이라는 자막이 뜨는 게 아닌가? 얼른 내려와 안내자 윤해연 교수(난징 대학·한국어문학과)를 만나 소식을 물으니 깜짝 놀라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기념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비보를 확인했다. 그날따라 난징의 하늘은 흐렸고 간간이 비까지 뿌렸다. 난징 대학에 방문 교수로 와 있는 소설가 임철우씨가 상하이로 가는 기차에서 전화했다. 이심전심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의 위대한 항해자 정화(鄭和)를 모신 징하이스가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1842)이 협의된 곳이기도 하다는 비꼬인 운명을 묵상하노라니 난징학살(1937)의 그림자가 새삼 어둡다. 점심 후 존 라베 기념관으로 향했다. ‘중국의 쉰들러라 애칭되는 라베는 당시 지멘스 사 난징 지사장으로서 자신의 사택에 나치 깃발을 짐짓 내걸고 학살의 광기로부터 중국인을 구한 난징안전지대 국제위원회 주석이었다.

 

기념관을 참관하며 이 의로운 독일인의 행적과 일기를 발굴한 아이리스 창이라는 중국계 미국인을 만났다. 1997년 난징학살 60주년에 맞춰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출간해 그 참상을 새로이 알린 그녀는, 그러나 2004119일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 자살로 이승을 하직한다. 36세 꽃다운 나이였다. 난징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잔인성을 해명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한 그녀를 죽음으로 몬 게 어찌 협박을 일삼은 일본 우익 탓이기만 할까?

 

기념관 바깥 담 안쪽에 전시된 패널에서 나는 또 한 사람을 발견했다. 미국 선교사 미니 보트린(1886~1941), 사건 당시 진링(金陵)여자문리학원(Ginling Girls’ College) 교장으로서 난징 여성 1만여 명을 구원한 활보살(活菩薩)’이었다. 일본 대사관에 만행 중지를 무수히 요청했지만 묵살당한 그녀는 오히려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난징 철수를 권고받는다. 그녀는 단호히 응답한다. “이런 순간에 중국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지친 몸으로 1940년 귀국해 이듬해 514, 태평양전쟁 발발 약 6개월 전에 인디애나폴리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목격한 참상의 환영에 시달리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으니, 세상은 참으로 공평치 않다. 염치를 모르고 반성을 모르는 자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진정한 화해를 모색하는 의인들은 오히려 죄책감에 죽어가다니, 새삼 사마천의 탄식이 절실하다. “진정 천도(天道)는 있는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형국이 되지 않기를

그날 저녁 호텔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한국 뉴스에 인색한 CCTV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다투어 보도한다.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다. 그만큼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엄정하다는 것이고, 또 그만큼 노 전 대통령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는 시민이 많다는 의미일 테다. 노무현은 이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에 올랐다는 신분 상승 서사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기득권의 해체를 위해 싸웠던, 그리하여 마침내 그 대의에 순절한 투사로서. 그날 하루 한꺼번에 만난 세 죽음에 울울했던 내 마음은 이 거대한 파동으로 한결 진정되었다. 나이와 젠더와 지방을 넘어서, 무엇보다 지지 여부를 떠나서 이루어진 이 담대한 통합의 물결로 이제 한국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새삼 뚜렷해진다. 양극화의 고착에 대한 저항이 핵심이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의 재능과 노력이 그()의 삶, 그 미래의 질을 결정한다는 믿음이 현실이 되는 선순환의 사회를 향해 착실히 전진할 것!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에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다가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형국이 재현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한국총통 선종율(善終率) 최저 직업’(한국 대통령은 잘 끝마치는 비율이 가장 낮은 직업이라는 중국의 보도)이라는 야유를 듣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고 간절하다. 삼가 그의 명복을 빈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한국어문학과) 시사인 9009.6.1

 

권력의 거짓말

지금 우리는 독재자에게 빌붙어 권력을 향유하려는 자들이 창궐하고, 나치식의 기만적 이중 언어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세계에 산다.

1945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나치의 전쟁 범죄와 유태인 대학살의 책임을 묻고, 단죄하기 위한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전쟁이 끝나면 으레 패자가 무차별 응징을 당하던 오랜 관습을 벗어나서, 이 재판은 전범들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고, 범죄의 경중을 가려 처벌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게다가 이 재판에서 제시된 주요 원칙들은 이후 인권을 보호하고 국제법의 틀을 견고히 하는 데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실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이나 2002년의 국제형사재판소 설치도 뉘른베르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법원 판사 로버트 잭슨이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말했듯이, 뉘른베르크가 인류사에서 중요한 도덕적 진보를 일구어낸 재판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재판의 백미는 당시 미국 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잭슨이 재판 개시와 종결 시에 법정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이 기념할 만한 연설에서 잭슨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국제시민으로서의 책임이었다. 이것은 당시 핵심 쟁점이었던 문제, 즉 국가의 법률 혹은 상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와 관련해서 개인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잭슨의 명확한 답변이었다. 잭슨은 인간의 양심에 근거한 국제법이 있고, 이 법은 세계 어디서든 누구나 지켜야 하는 보다 높은 법임을 역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잭슨의 논리는 비단 나치 정권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독재 체제에 봉사하는 하수인들 모두에 대한 경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볼 때 잭슨의 연설에서 정말 흥미로운 대목은,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를 나열하는 가운데 그가 특히 나치의 상습적인 거짓말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나치는 유태인 대량학살을 최종적 해결’, 전쟁포로 살해를 특별처리’, 강제수용소를 보호감호’, 약자에 대한 잔혹한 가학행위를 확고한 태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잭슨에 의하면, 나치의 이러한 기만적인 언어는 진실을 은폐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평화와 인권을 유린하는 치명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비극은 나치의 종말과 더불어 이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는 뉘른베르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에게 빌붙어 권력을 향유하려는 자들이 창궐하고, 나치식의 기만적 이중 언어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가장 고약한 이중 언어는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가 쏟아내는 말들일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목을 대량으로 자르는 것을 구조조정’, 알짜배기 국유재산을 특권층의 사유물로 만드는 것을 민영화’, 사회적 약자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적 수단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규제 완화’, 서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도심 재개발이라고 부르는 데 어느새 익숙해져버렸다. 서글픈 것은 이 상황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일수록 이런 기만적인 언어를 몸에 붙이고, 주저 없이 입에 담는 현실이다.

 

갖가지 완곡어법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신자유주의가 기만적인 언어를 남용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 체제는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대다수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것을 끝없이 정당화하는 강탈에 의한 축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민초들에게 신자유주의 정책은 나치 체제 못지않은 폭력일 수밖에 없고, 그런 한에서 용산 참사는 결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권력은 공안 통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력만으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고, 대중에 대한 설득 작업도 필요하다. 그 결과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는 갖가지 완곡어법을 통한 기만적인 용어들인 것이다.

 

가관인 것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권력이 스스로 녹색으로 분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민적 동의는 물론, 아무런 치밀한 사전 조사도 없이 유사 이래 최대의 국토 파괴를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면서, 이것을 세계가 알아주는 녹색 뉴딜사업이라고 떠벌리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릴 게 분명한 법안 통과를 밀어붙이면서 미디어육성법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모든 게 말장난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길들여지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감각도 둔해질지 모른다. 권력의 거짓말은 가소롭다기보다 무서운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8709.5.11

 

사이비 학자들의 퇴출을 위하여

대학을 양심적인 학자로 채우려면 교수 봉급을 대폭 낮추면 된다. 그러면 돈·권력·명예 때문에 몰려든 사이비 학자들이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대학에 대해 품고 있는 근본적인 불신은 대학 그 자체의 중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래 대학은 객관적인 지식의 축적을 근거로 보편적인 진리에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공기(公器)인 이상, 건전한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큰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 사심 없이 헌신하는 연구자들이 대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과 권력과 세속적 명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적인 경제논리가 활개를 치는 상황에서 세계 전역에서 대학은 끊임없이 왜곡되어 왔지만, 한국의 대학은 특히 이런 경향에 극도로 취약한 체질을 드러내었다. 한국 사회 자체가 극단적인 성장과 경쟁논리에 지배되어온 이상, 이것은 불가피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대학은 용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들의 집합소

 

그 결과, 최근 상지대 총장에서 물러난 김성훈 교수의 말을 빌리면, 지금 한국의 대학은 용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사이비 학자들의 집합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농업경제학자인 김성훈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농촌과 농민들에게 진정한 우군이 돼야 할 농업 관계 학자들이 곡학아세를 일삼으며 한국 농업을 절망의 수렁으로 빠트리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학자,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적인 학자들이 갈수록 소외되고, 나아가서는 아예 대학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지만, 이 현실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자 재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가 알고 있는 40대 초반의 한 학자의 이야기는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 아닐지 모른다. 김 아무개는 본래 학부 시절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문학을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석사 과정에서는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그 후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도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도쿄 대학에 와 있던 한 이태리인 교수의 영향을 받아 이태리어를 배우고,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유럽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끊임없는 지식욕과 학구열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고대 그리스 및 로마 문학에 대한 학습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본에서 10년 넘게 체류하면서 10개 이상의 외국어를 익혔다. 그리고는 재작년에 ‘18세기 러시아 시에 대한 호라티우스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런 그가 막상 돌아와 보니 일할 자리가 없었다. 그는 귀국 후 1년 동안 시간강사 자리라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실망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그는 자신의 평생 공부를 위한 생계수단으로 숙련 육체노동을 생각했고, 그래서 몇 달 동안 석공 일을 배웠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는 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 나와 만났을 때, 그는 최근에 어떤 출판사의 의뢰로 고전 그리스 작품 한 편을 번역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어린애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네덜란드 여왕이 영국의 가장 우수한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했을 때이다. 안내를 맡은 천문대장이 매우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여왕은 자신의 친구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천문대 과학자들의 봉급 인상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천문대장은 천문대 과학자들에게 높은 급료가 지불된다면, 사이비 과학자들이 곧 천문대를 점령하게 될 거라고 하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이 에피소드에는 오늘의 대학을 정상화하기 위한 명쾌한 방안이 암시되어 있다. , 우리 대학들을 정말 양심적인 학자들의 서식처로 만들려면 교수들의 봉급을 대폭 낮추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과 권력과 헛된 명예에 대한 관심 때문에 대학에 몰려들어 있는 수많은 사이비 학자들은 절로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 대신 정말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에 열중하는 학자들은 가족과 함께 최소한 생활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봉급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하면서 대학에 남아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안심하고 대학의 주인 노릇을 할 때라야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될 것임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7909.3.16

 

경제 살리기의 야만성

사람이 불에 타죽었는데도 권력자들은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들이 살리겠다는 경제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경제인가?

학교에서 문학을 읽고 가르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1991년 가을에 <녹색평론>을 창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 나라는 군사독재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민주화의 일차적 과제는 성취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구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직면하여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큰 충격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녹색평론> 창간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단순히 환경보호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 무렵 이미 한국 사회에는 고도 경제성장에 의해 숱한 환경 문제가 노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다운 삶의 지속을 위해서 마냥 방치해둘 수 없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욱 심각한 것은 경제 발전을 통해서 이 사회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과연 무엇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고민 속에 지내고 있던 내게 1991년 봄에 일어난 한 사건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다 자란 보리밭을 태워버린 사건이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받았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사회에서 그동안 환경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인간성이 왜곡되는 희생을 치르면서도 경제성장의 논리가 정당화되어온 것은 가난을 벗어나려는 뿌리 깊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수많은 한국인에게 가난이란 무엇보다도 보릿고개로 표상되어왔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기 직전 4~5월 동안은 실제로 굶주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 시련 속에서 사람들은 보릿고개만 넘으면 된다는 이야기로써 굶주림의 고통을 서로 달랬던 것이다. 그렇게 보리는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사회에서 그 보리를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기막힌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사태의 배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경제 논리가 있었다. 농민들에게는 수확해봐야 돈이 되지 않는보리를 아예 태워버리는 게 오히려 더 이상 경제적 손실을 막는 상책이었다. 이 세상에 어떤 농민이 자신의 작물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싶겠는가. 그만큼 농민의 처지는 벼랑 끝으로 몰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찬미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농심이 천심(天心)임을 당연지사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른바 경제 발전 과정에서 농사는 어느새 이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일이 되고, 농심은 망가져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휴지를 사듯 쌀을 사고, 휴지를 소비하듯이 쌀을 소비한다. 우리는 오로지 돈만 있으면 되지, 땅이 훼손되든 공동체가 무너지든 인간성이 황폐화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크나큰 불경(不敬)의 삶인 것이다.

 

공생의 삶에 완벽하게 무지한 권력자들

불경의 삶이란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삶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절연된 채, 어떠한 확고히 뿌리내릴 지반도 없이 떠도는 난민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지금 이 나라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해괴한 일들은 이곳에 뿌리박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권력자들이 드러내는 공생의 삶의 논리에 대한 거의 완벽한 무지와 무관심이다. 그들에게 이 나라의 모든 땅은 투기의 대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풀뿌리 민중은 선거 때나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 되는 단순한 소모품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개발 논리를 내세워 서민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만행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리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사람들이 불에 타죽는 끔찍한 사태까지 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태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할 국가권력은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나도록 사과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보리도 아니고, 사람이 불에 타죽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들은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살리겠다는 경제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제인가?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7309.2.2

 

사육교육이라 우기지 말라

이명박 정부는 지옥 같은 교육 현실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새 교육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리고 이 시험을 치는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는 편지를 학부모에게 우송한 교사 7명이 파면 또는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지금까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성희롱, 과도한 체벌, 금품수수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교사에 대한 중징계도 감경하는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리와는 질이 다른 사유로 중징계를 받은 교사에 대해서 이 위원회가 어떠한 태도를 보일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학생들을 전국적 등수 경쟁으로 몰아넣고, 교사와 학교를 학생의 성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 초·중등 교육정책의 요체라는 점이 이번 사태로 인해 확인되었다. 얼마 전 정부는 국제중설립을 허가해 입시 열풍을 초등학교에까지 확산시켰다. 2012년까지 자율형 사립고수를 100개로 늘리겠다는 정책은 일반고를 ‘2류 고교로 만드는 사실상의 고교입시 부활 정책인바, 이는 중학교에서의 입시경쟁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다.

 

공교육 내실화외치면서 사교육 창궐돕는 정부

정부가 겉으로 공교육 내실화를 말하지만 실제 시행하는 정책은 하나같이 사교육을 창궐시키는 정책뿐이다. 연간 사교육비 20400억원도 부족하단 말인가. 사설 학원업체가 왜 공정택 교육감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지 알 만하다. 정부는 교육에서의 경쟁자율을 강조하지만, 이는 교육의 양극화를 일으켜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마저 초반에 봉쇄하고 결국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말 것이다. 대학은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 학생에게 이미 직·간접 혜택을 주고 있지 않은가.

 

19861, 최우수 성적을 유지하던 15세 여중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 교육에 경종을 울렸는데, 그 뒤로도 성적 부담으로 인한 중·고교생의 자살은 끊이지 않았고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19895참교육 실천을 내걸고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수많은 교사가 해직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에서 우리 교육의 현실을 통렬하게 조롱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됐어, 됐어, 이젠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됐어라고. 그런데 2008년이 되어도 ‘0교시야자에 시달리던 촛불소녀들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와야 했다.

민주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교육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사육(飼育) 같은 교육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아예 대놓고 사육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교육제도를 가졌으면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 고등학교는 99%가 공립이고, 고등학교는 100% 평준화되어 있다. 학력이 뛰어난 학생과 뒤떨어진 학생이 우열반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대신 우수한 학생의 월반이 권장되며 부족한 학생에게는 일대일 교사지도가 이루어진다. 사교육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과 후 학생들은 음악이나 체육활동으로 바쁘다. ‘일제고사가 없음은 물론이고 성적표에는 등수를 기재하는 난이 없다. 학교 간 편차가 매우 적기에 강남 8학군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핀란드다. 이런 하향평준화교육을 했으니 학력이 엉망일 것이라고? 아니다. 핀란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을 자랑한다.

 

핀란드의 상황은 우리와 너무 차이가 나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과 학부모는 현재의 악몽 같은 교육 현실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언제까지 학생은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갇혀 아무 생각 없이 문제풀이를 해야 하고, 방과 후와 주말에도 각종 학원과 과외를 전전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학부모는 이러한 교육체제의 모순을 알면서도 자식들을 그 체제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갈등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제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새로운 교육체제의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전교조 활동도 정치투쟁이나 통일교육일변도가 아니라 학교와 교실 현장의 변화에 중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 시사인 7009.1.12



Superstition (Stevie Wonder)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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