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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07.1.26~08.12.19

by 이성근 2019. 2. 16.

전광석화같이, 질풍노도처럼

생태·사회적 영향에 대한 세심한 고려도 없이 4대강 개발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극단적 사고 불능과 생태적 교양 결핍을 어찌할 것인가.

20세기의 걸출한 학자이자 현인이었던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생전에 사람들에게 종종 들려주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1600년대 초에 세워진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35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 건물 천장의 들보들이 썩어갔다. 참나무로 된 들보가 수명이 다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학 관계자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새로운 참나무를 찾아서 들보를 갈아야 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의논 도중에 그들은 원래 이 건물을 지었던 건축 책임자가 350년 뒤에는 들보가 썩을 것임을 예견하고, 그때를 대비해서 대학의 특정 장소에 참나무들을 심고 잘 유지하도록 부탁하는 말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탁은 대학의 역대 삼림 감독관을 통해 충실히 지켜졌고, 그 결과 대학 한 곳에 잘 자란 튼튼한 참나무 숲이 보존되어 있었다. 베이트슨은 바로 이런 것이 문화를 운영하는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말했다.

 

베이트슨이 찬양한 이 제대로 된 방식은 사실 옥스퍼드만의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북미의 인디언 부족들은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7세대 뒤 자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미리 숙고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져보면, 인디언 부족들이 서구 문명에서처럼 근대적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먼 후손들의 세대까지도 늘 함께 생각하는 이러한 숙려의 문화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디언처럼 철저한 것은 아니라 해도, 이것은 근대화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공통하게 볼 수 있는 정신적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 정신적 습관은 산업주의 문명이 온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이래 급격히 위축되어버렸다. 산업문명이란 본질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확대 소비함으로써 지금 당장의 욕망 충족에 골몰하는 매우 근시안적인 문명이다. 지구가 근본적으로 유한체계인 이상, 지상에서 인간이 영속적인 삶을 누리려면 순환적인 물질대사가 가능한 방식이라야 한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다음 세대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당장의 안락과 권력 추구를 위한 나머지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의 무분별한 낭비를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지해왔다. 그 결과는 지금 인류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생태적·사회적 대재앙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기상 과학자 제임스 한센에 의하면 향후 5년 내에 북극의 빙하는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빙하가 이렇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문명사회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기후변화를 막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생태적 교양이다. 인류학자로서 출발했다가 최종적으로 생태철학에 도달한 베이트슨에 의하면, 세계는 지극히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상호관계들의 집합체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과학이라 할지라도 과학의 언어로는 이 세계의 전체성에 접근할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최선의 경우에도 미미한 단편에 불과하다. 그런 단편적인 지식과 기술에 의한 성과는 늘 부분적이고 단기적일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문명의 자기 파멸을 이끌 뿐이다. 따라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가장 절실한 것은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공격적인 자세가 아니라, 세계의 신비를 겸손하게 수용하는 심미적·관조적 자세이다.

 

경제위기는 생태 살릴 절호의 기회

생각해보면, 지금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심각한 불황은 인류사회를 위한 구원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강요하는 성장 메커니즘이 일시나마 정체함으로써 인류사회는 기후변화 등 임박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 기회를 낡은 경제성장 논리를 척결하는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인류사회가 처한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4대 강에 대한 난폭한 토목공사를 서두르고 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공사에 관련된 지극히 복잡한 생태적·사회적 영향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도, 세심한 고려도 없이 단행되는 이 거창한 프로젝트의 장기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심히 두렵고 두려울 뿐이다. 게다가 이 무지막지한 짓을 전광석화같이, 질풍노도처럼밀어붙여야 한다는 게 아닌가. 이 극단적인 사고(思考) 불능과 생태적 교양의 결핍을 어떻게 해야 할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6808.12.29


땅이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땅의 성질을 잘 알고, 땅을 보살피는 데 온 생애를 바치는 소농은 생태계와 인간다운 문명의 수호자이다. 소농 보호는 궁극적으로 땅을 살리는 일이다.

지금 인류 사회가 닥친 위협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변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심각하면서도,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게 바로 세계 전역에 걸쳐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토지의 사막화 현상이다. 생각해보면, 한때 고대문명이 번영했던 땅은 모두 사막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명이 망했기 때문에 땅이 사막화한 것이 아니라, 땅이 사막화했기 때문에 문명이 망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문명의 멸망을 초래한 사막화가 국소적이었던 것에 비해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은 전지구적인 범위에 걸친 사막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농업 근대화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19세기 중엽에 예민한 과학자들이 주목을 했던 현상이다. 가령 독일의 농화학자 유스투스 리비히는 당시 서구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던 산업화된 농업이 물질대사의 순환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토양의 지력 상실을 초래하는 약탈적 시스템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선구적인 관찰은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주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이 필연적으로 인간 노동력을 피폐시킬 뿐만 아니라 토지의 생명력을 고갈시킴으로써 농업의 지속성을 불가능하게 할 것임을 여러 차례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땅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은 생산성 제고 일변도의 근대 농법에는 생명과 의 원천인 토양을 고갈시킬 수밖에 없는 논리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의 침탈을 받기 이전의 농업사회, 특히 대규모 인구를 가진 아시아의 농업은 전통적으로 순환적인 물질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순환의 핵심은 축분과 인분이 늘 적절하게 투입될 수 있는 농법이었다. 20세기 초에 중국·조선·일본을 여행한 후 <4천년의 농부>라는 책을 쓴 미국의 토양학자 프랭클린 킹은 동아시아의 벼농사가 오랜 세월 토양을 보존해올 수 있었던 핵심 기술이 인분의 퇴비화였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고 감탄했다. 킹 박사뿐만 아니라, 토양보존 문제를 심각히 고민한 선각자는 드물지 않았다. 인지학회의 설립자이자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도 그랬다. 그가 생애 마지막에 힘을 기울여 농업강좌를 실시하면서 생명역동농업을 제창한 것은 서구식 근대 농업의 예견되는 필연적 결과가 사막화라는 것에 대한 심각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각자들의 우려와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세계의 농업은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따라 갈수록 기계와 화학물질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왔고, 그 결과 세계 전체의 식량은 과잉생산의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토질은 급속히 악화되어버렸다. 지난 반세기 동안 농업대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의 농경지 중 4분의 1이 이미 사막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농법의 파국적 결말을 극명히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글로벌 자본과 그들과 결탁된 국가권력은 자유무역논리를 내세워 농산물의 전면적 시장개방을 획책하고, 그럼으로써 세계 전역에서 소농들을 가차 없이 핍박하고, 그들을 토지로부터 내쫓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소농 죽이는 한·FTA는 폐기돼야 한다

소농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이유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도시화·산업화가 아무리 문명화의 척도라고 하더라도, 땅이 죽거나 땅과의 유대가 끊어지면 인간은 조만간 사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빚어진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땅의 성질을 잘 알고, 땅을 사랑하며, 땅을 보살피는 데 온 생애를 바치는 소농들이야말로 생태계와 인간다운 문명의 궁극적인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선입관과는 달리, 농작물의 생산성이라는 차원에서도 기계와 화학물질의 대량투입에 의한 대규모 영농보다도 소농에 의한 유기농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근년에 여러 연구기관에 의해 명확히 입증되었다.

 

지금 이 나라의 정책 입안자들과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은 거의 모두가 소농을 없애는 것이 사회 발전이며, 역사적 진보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갇혀 있다. 그러나 소농을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농민들의 생계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땅을 살리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땅이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FTA는 기필코 폐기돼야 한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6408.12.1

 

마의 계절이 끝날 것인가

오바마의 등장으로 신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절망적인 어둠에 갇혀온, 지난 40년에 걸친 마의 계절이 청산될 수 있는 출구가 열릴 것인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온통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였다. 근대식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황인종이 막강한 서양백인종 세력을 꺾었다는 데서 오는 열광적인 환희였다. 그 후 일본은 자만에 빠져 조선의 강점과 식민지 지배, 만주 침략을 거쳐서 군국주의 노선을 강화해갔다. 그 과정에서 결국 태평양전쟁이라는 결정적인 자기 파멸의 국면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19458월에 참혹한 패전을 맞이하였다. 전쟁의 승리로 이성을 잃고 끊임없이 자기 묘혈을 파는 어리석음을 확대해온 이 40년 동안의 역사는, 작고한 일본의 국민작가시바 료타로에 의하면, 한마디로 ()의 계절이었다.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동안 온 세계를 뒤덮어왔던 먹구름이 조금은 걷히지 않을까, 기대에 부푼 분위기이다. 선거공약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줄곧 해왔고, 주류 엘리트와는 여러 모로 다른 출생과 성장 배경,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빈민지역 활동가로서 일했던 경력을 볼 때, 그가 쉽사리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과연 오바마의 등장으로 신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절망적인 어둠에 갇혀온, 지난 40년에 걸친 마의 계절이 청산될 수 있는 출구가 열릴 것인가.

 

오바마 당선은 기성 지배 체제 내의 권력이동?  

되돌아보면,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이란 이 세상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세계에 대한 야만적 폭력의 논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세·규제완화·자유무역이라는 세 가지 핵심 정책을 기조로 하는 이 경제논리는 세계 전역에 걸쳐 동일한 구조적 결과, 즉 사회적 격차 및 대중적 빈곤의 심화, 고용의 불안정성과 비정규직화, 농촌을 비롯한 기층 공동체의 전면적 파괴, 자원과 에너지의 끝없는 낭비, 그리고 환경위기의 걷잡을 수 없는 훼손을 초래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당국자들과 주류 경제학자들은 적하효과에 의한 효율적인 성장노선을 완강히 고집해왔다. 가만 생각해보면 위에서 흘러넘치는 물로 아래를 적실 수 있다는 이른바 적하효과란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예의 없는, 모욕적인 논리인가. 이것은 결국 부자들이 쓰고 남는 게 있으면 그 부스러기나 받아먹으라는 말인 것이다. 기층 민중을 거지로 보는 이런 논리가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이름으로 40년 동안이나 통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었고, 아직도 현실이라는 게 문제이다.

 

따져보면,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매우 위선적인 논리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 내지 배려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철저히 막는 논리이지, 사회적 강자를 위해서는 언제든 예외가 되는 일방적인 논리일 뿐이다. 월스트리트의 투기꾼들을 위해서 7000억 달러라는 엄청난 구제금융을 투입하는 행태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 어디서든 계속되어온 관행이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순수한 자율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다. 자본과 국가는 언제나 어디서나 긴밀한 상호 의존적 관계로 공생해왔다. 역사가 하워드 진에 의하면, 미국에서 구제금융의 역사는 1787년 건국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초대정부가 내린 주요 결정의 하나가 독립전쟁 과정에서 거의 쓰레기가 된 채권을 소지하고 있던 투기꾼들을 살리기 위한 구제금융조처였던 것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기득권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서 과연 오바마가 혁신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이번에 그는 수많은 시민으로부터 개미헌금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고 하지만, 실제로 막대한 선거자금은 기업가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번의 정권교체 역시 사실상 미국의 기성 지배 체제 내의 권력이동 이상의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권력이동 현상은 민중의 각오와 행동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선거제 의회 민주주의란 본래 부르주아 독재체제를 지속시키는 정치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초적인 사실을 기억한다면, 진보적인 인물의 출현으로 사태의 본질이 달라지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민중사회의 각오와 행동에 달려 있다. 모든 권력은 밑으로부터의 강력한 요구 없이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오바마 정부라고 해서 그러한 권력의 논리에서 예외가 아닐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6108.11.11

 

투기꾼들을 위한 세상

국가 없이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는 엄밀히 말해 국가자비상 상황에서 사물의 본질이 좀더 명확히 드러나는 법이다. 지금 미국의 금융위기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국가권력을 매개로 한 약탈의 체제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의 전면적 파산을 막기 위해서 70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해야 한다는 정부의 제안을 미국 하원이 부결시켰을 때, 그 부결 이유는 사기업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워준다는 것은 사회주의적이거나 ()미국적발상이라는 것이었다. 하기는 국가에 의한 개입을 반대하고, 모든 것은 시장의 자율성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경제논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미국 혹은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가 국가의 지원 내지 동조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일까. 만약 월스트리트에 대한 정부의 긴급지원을 예외적조처라고 생각하는 미국 국회의원이 있다면 그는 매우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거나 위선자임에 분명하다.

 

카토 연구소라는 한 민간 연구소가 20075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 대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극히 일상적인 관행이다. <기업복지국가-연방정부는 어떻게 미국 기업들을 지원하는가>라는 이 보고서는 2006년 한 해 동안 미국 정부에 의해 지출된 기업 보조금이 920억 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보잉·IBM·제너럴일렉트릭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돈을 받았고, 이 중에서 농업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거대 농기업들이 가져간 돈이 210억 달러였다. 이 보조금으로 과잉 생산된 미국 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는 무역 상대국들의 농산물 시장 완전개방을 완강하게 요구해왔고, 그 결과 헐값으로 쏟아지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로 인해 세계 도처의 소농과 그들의 공동체는 사멸을 강요당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황폐화 혹은 사막화의 주된 책임은 미국의 농업보조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미국 정부나 의회는 해외로부터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되돌아보면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가 체제는 시초부터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단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식민지 및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세계화경제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성장·발달에는 반드시 합법적 폭력 장치로서의 국가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논설위원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솔직하게 말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못한다(미국 기업이) 번창하도록 세계의 안전성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을 우리는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병대라고 부른다.”

 

자본가, 이익은 사유화·손실은 사회화

그뿐만 아니라, 도로·항만·전력·수도 등 물리적 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공중보건·법률의 제정과 집행 등 사회적 인프라 역시 자본주의 경제의 운용에 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수익자 부담 원칙을 엄격히 적용해 이러한 인프라의 건설·유지에 드는 비용을 국가가 아니라, 기업들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존속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결국 국가 없이는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절대로 순수한 시장경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는 엄밀히 말해서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고, 그 국가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언제나 강자들의 이익이다.

 

지금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항상 자신들의 이익은 철저히 사유화(私有化)하고, 손실은 국가라는 수단을 이용해 철저히 사회화(社會化)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뿌리 깊은 생리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스템은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의 문제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세계의 약자들은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이 입은 손해를 메워주기 위해서 피땀을 흘려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본주의라고 할 수 있고, 그 국가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언제나 강자들의 이익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5608.10.7

 

지옥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사기극

서울시의 세운상가 재정비촉진계획MB가 서울시장 시절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밀어붙였던 청계천 개발계획의 또 다른 버전이다. 대형 재개발 프로젝트를 사기까치 쳐가면서 강행하는 이 정권의 사고방식


20년 넘는 기자 생활을 접고 제주도에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걷는 길을 만들겠노라미친 짓을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 그러나 서울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귀향까지는 결심하지 못했다.

 

그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은 건 내 고향 서귀포에 정착해서 그림을 그리는 한국화가 이왈종 화백을 만나고나서였다. 과묵한 편인 그는 서귀포 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갑자기 열띤 어조로 대답했다. “서울의 소소한 기득권과 사소한 인연만 접을 수 있다면 이곳은 천국, 극락, 파라다이스지요. 공기 좋고, 풍경 그림 같고, 사람들도 순박하잖아요. 사는 것처럼 살 수 있고.”

허걱, 그렇다면 돌아와야지. 130여 년 만에 다시 서귀포시 주민이 되었다. 이 화백 표현대로라면 천국으로의 귀환인 셈이었다.

 

천국살이가 몸에 익어서일까. 어쩌다 서울로 올라가면 하루도 안 돼서 다시 서귀포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공항에 내려서자마자 엄습하는 매캐하고 탁한 공기,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 찌를 듯한 고층빌딩군, 아스팔트에서 후끈후끈 올라오는 지열, 대형 간판과 네온사인,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스치면서 지나가는 숱한 인파. 이 모든 것이 합세해서 눈과 귀와 코와 허파를 공격하는 느낌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녹색을 앞세운 세운상가 재개발계획의 함정 

그런 터에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니 모처럼 반가운 뉴스가 눈에 띄었다. 서울시가 6단계로 실시하는 세운상가 재정비촉진계획수립을 마무리해 발표했는데, 그 핵심이 세운상가 터에 남산까지 잇는 녹지를 만드는 것이란다. 생지옥 서울이 아주 조금은 달라지는가, 싶었다.

이 순진한 믿음은 신망 있는 중견 건축가 김원씨가 한 사이트에 올려놓은 글을 읽으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세운상가 재정비계획의 본질은 세운상가를 헐어 용적률 850%의 주상복합단지를 만드는 대규모 개발계획인데도, 서울시와 언론은 교묘하게 비틀거나 숨긴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의 글의 일부를 옮길밖에.

 

용적률 850%라면 그 땅 전체 넓이를 8.5층짜리 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건축 연면적이 300이니 우리 식으로 바닥 면적 약 100만 평의 고층건물을 앉히는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개발 마피아의 한바탕 질펀한 돈잔치가 벌어집니다. 서울시가 제공했다는 조감도를 보면 완전히 녹지공원을 조성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의) 기사 내용에도 건축물이나 개발 이야기는 축소되어 있고 녹지와 연못, 공연장 이야기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높이에 대해서는 우리 같은 전문가조차 금방 알아듣기 힘들게 비틀어놓았습니다.”

 

지방마저 지옥으로 만들려 하는가

, 이럴 수가. 서울시의 그린빛 세운상가 재정비촉진계획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밀어붙였던 청계천 개발계획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최근 이 대통령은 혁신도시를 폄하하면서 수도권에 버금가는 별도의 경제권을 몇 개 만들고 그게 제대로 잘되면 된다라고 말했다. 혁신도시야말로 돈 많은 지옥인 서울과 돈 없는 천국인 지방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시도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이명박 정부는 서울을 더한 지옥으로 만들고 다른 지역마저도 서울 비스름한 지옥으로 만들 모양이다. 고유가와 세계적인 에너지난 시대에 백번 숙고해야 마땅한 대형 재개발 프로젝트를, 은근슬쩍 사기까지 쳐가면서,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권의 사고방식이 자연 재앙보다도 더 두렵다. 제발이지 이번 휴가 동안에 이 대통령이 방향과 철학 없는 실용 노선을 한번쯤 되돌아보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휴가 일수를 줄인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시사인 4608.7.29

 

앵무새 알과 민주주의

지금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임이 분명한 듯하다. 여기서 현명한 지도자란 무엇보다도 민중과의 소통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일 것이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1854~1941)의 책 <황금가지>를 보면, 18세기 아프리카 왕국의 하나였던 다호메이의 정치에 관한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 이 나라에는 오래된 관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신하들이 볼 때 국왕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앵무새 알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이 앵무새 알은 이제 국왕께서는 많이 피로하셨으니 주무시는 게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 이 의미를 알아챈 왕은 지체 없이 뒷방으로 물러나서 그 방에 있는 아내들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의 목을 조르게 하여, 영원의 잠에 든다는 것이다(때때로 신하들이 건네준 앵무새 알의 의미를 거부하는 왕도 없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는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져들곤 했다).

 

다호메이와 유사한 관습은 인근 다른 왕국에서도 있었다. 예컨대 요루바 왕국에서는 국왕의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의 발자국을 진흙에 각인시켜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왕의 정치가 잘못되어간다고 판단할 때 신하들은 그 진흙판을 마치 다호메이의 앵무새 알처럼 사용하곤 했다는 것이다. , 신하들이 보낸 진흙판을 보고 왕은 왕좌를 자신의 아들에게 넘겨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챘다는 것이다.

 

백성에게 경멸당하는 지도자에게 리더십이 있겠는가

오래 전 아프리카 왕국에 관한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민주 정치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명료하게 전달해준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오로지 민중의 뜻에 복종함으로써만 민중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민주 정치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언제라도 민중에 의해서 배척될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배척의 신호가 오는 즉시 자리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아프리카 왕국의 이러한 정치 관습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세계 전역의 오래된 공동체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상 민중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적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도자의 종류를 넷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그 설명은 아마도 현실의 폭군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노자 나름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백성이 모르고 사는 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이다. 두 번째로 좋은 지도자는 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도자이다. 세 번째는 백성이 무서워하는 지도자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일 저급의 지도자는 백성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지도자라고 노자는 말했다. 백성이 무서워하는 지도자라면 어떻든 강압적인 방식으로 어느 정도 통치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성으로부터 경멸당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이라는 게 어떤 것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근대적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 메커니즘이 18세기 아프리카 왕국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민주주의 정신에 충실한 것인지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지금 미국이든, 한국이든,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른바 정치 지도자가 선출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땅에 떨어져 있다. 이것은 아마도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어떤 치명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상태로 지금 인류사회가 당면한 엄청난 생태적·사회적 위기를 과연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임이 분명한 듯하다. 여기서 현명한 지도자란 무엇보다도 민중과의 소통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 능력에는 앵무새 알의 의미를 대뜸 알아볼 줄 아는 분별력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사인 4208.6.30

 

자연의 보복과 멸종의 시계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은 에너지 고갈과 환경 재앙에 직면한 인류와 지구를 구해낼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재생 에너지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를 세우는 것이 그의 대안이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우리는 은하계 전체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살 수 있는 이 친절한 행성을 교통수단이라는 야단법석으로 한 세기 만에 완전히 망가뜨렸다.”

미국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의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에서 따온 구절이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지구를 망가뜨린 것은 교통수단이라는 야단법석이다. 20세기 들어 자동차와 비행기를 이용하면서부터 우리는 땅 밑의 석유를 탐욕스럽게 캐내어 쓰기 시작했다. 석유 에너지에 힘입어, 지난 100년 동안 현대 문명은 크게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양 지구의 자원을 흥청망청 써버렸고 그 탓에 정말로 내일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좀 겁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유는 총 2조 배럴인데 이미 1조 배럴을 캐서 사용했다.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고 안심할 사람도 있겠으나, 남아 있는 석유는 대부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또는 깊은 지하에 파묻혀 있어서 꺼내기가 힘들다. 그것을 다 캐낸다 해도 100년도 채 쓰지 못할 양이다. 석유는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지금껏 현대 문명을 휘황하게 밝혀왔던 전등은 곧 꺼질 운명이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멸종의 징후

미국의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은 그의 책 <플랜 B 3.0>에서 더욱 무시무시한 경고를 한다. ‘멸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우리는 지금 여섯 번째 대량 멸종의 초기 단계에 있다. 자연현상으로 야기된 이전의 멸종 사태와는 달리, 이번의 멸종 사태는 인간이 그 원인이다. 지구의 긴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 종()이 지구의 생명체 대부분을 멸종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한 것이다. 이 경우에 진화라는 용어가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지난 세기 동안에 발견된 석유의 절반을 태우는 바람에 우리는 대기오염에 시달리고, 기후변화라는 시련에 직면해 있다. 남극 대륙의 얼음장이 녹아내리고, 큰 지진이 도시를 때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있다.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은 멸종의 징후를 실감케 한다.

 

인간은 진화하고 있는가? 우리의 문명은 진보의 방향으로 발전하는가? 이 질문에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쪽이지만 지구 생태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50억 년 뒤 태양이 스스로 붕괴하여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 지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생물종의 다수가 멸종하고, 또 어떤 것들은 돌연변이를 일으켜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잠자리가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다만, 인간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지구가 삶을 주는 생물종의 목록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은 삭제될 것이다.

 

가엾은 것은 인간이다. 그러니 문명이니 생태계니 하는 거창한 말을 하기 전에 제 앞가림부터 하는 것, 그러니까 너나 잘하세요이다. 불과 100년 사이에 지독한 탄소 중독증에 빠져버린 우리에게 석유를 끊는다는 것은 마약 끊기보다 더 심한 금단 증상을 요구할 것이다. 담배조차 못 끊는 나부터가 견디기 힘들 것이다.

 

69일 한국을 방문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은 곤경에 빠진 문명과 지구를 구해낼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재생 에너지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를 세우자는 것이 그의 대안, 곧 플랜 B이다. 현대 문명이 축적한 기술과 자본은 우리에게 소생의 기회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문제는 전세계 정치·경제 지도자들이 결단을 미루고, 우리가 에너지 낭비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의 시계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며, 자연은 인간에 의해 빼앗긴 자기 몫을 기어이 되찾아간다. 지금 단계에서 그것은 환경재앙이라는 보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는 한 앞으로 자연은 더 가혹한 보복을 가할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보이지 않고, 멸종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간다. 사태가 이토록 절망적이라면 레스터 브라운의 메시지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김상익 (편집위원·환경재단 도요새 주간) 시사인 3818.6.2

 

큰 강은 조용히 흐르거늘

경제위기론으로 시끄럽다. 위기론의 진원지는 놀랍게도 대통령이다. 면피용·총선용으로 위기론을 퍼뜨린다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동안 숱한 위기론이 틀렸듯 이번 위기도 극복해낼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0년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도 성장을 누려오면서도 끊임없이 경제위기론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경제 위기가 거론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 해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나? 그럼에도 한국 경제가 파국을 맞기는커녕 눈부신 성장을 해온 것을 보면 경제위기론은 한국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남용되었음에 틀림없다. 최근 다시 경제위기론이 나온다. 그런데 과거의 위기론은 언론·야당·학계에서 제기했고, 정부·여당은 위기의 존재 자체를 극구 부인하며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이번에는 양상이 정반대다. 이번 위기론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년간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이었으나 최근 5년간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 4.9%에도 못 미치는 4.3%로 주저앉았다. 이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차관 워크숍에서는 석유 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다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참여정부는 일하기 좋은 경제 환경 물려줬다

이 대통령은 놀랍게도 취임사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전임 정부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쓰더니 이번에는 5년간의 저성장을 탓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고속으로 질주하는 중국·인도가 포함된 세계 성장률과 비교하기보다는 OECD 국가와 비교하는 게 온당하다. 한국의 5년간 성장은 OECD 30개국 중 9위에 해당하며, 평균 이상이다. 더구나 참여정부의 출범 때 상황을 보면 벤처·카드·부동산이라는 엄청난 3대 거품이 꺼지는 시기여서 애당초 고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참여정부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인위적 경기 부양을 삼가고 경제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서 뒤에 오는 정부에 일하기 좋은 경제 환경을 물려주었다. 그래서 현 정부는 대외적 환경은 많이 어렵지만 국내 상황은 부담 없이 마음껏 경제 운용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출발한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임 정부를 비난하면서 현재의 경제 상황을 비관하는 것은 예의와 품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한 이른바 경제 대통령이 경제 실적을 올리는 데 자신이 없어지자 변명할 핑계부터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특히 위기일수록 정치 안정이 중요하다고 대통령이 강조하는 대목에 가서는 코앞에 닥친 총선용 선거운동이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든다. 둘 다 의심으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때가 때인지라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는 신발끈을 매지 말라는 경구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한 달인데, 사방을 둘러봐도 좀처럼 참신한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 도덕성이 결여된 장관·참모의 임명 강행, 자존심 없는 영어 남용, 새벽 구보와 새벽 회의, 50개 생필품 물가 관리라는 1970년대 관치 경제의 부활 조짐, 세계 유가가 오르는데 유류세 인하로 가격의 신호 기능에 역행하는 인기영합주의, 상식 밖의 경부운하를 고집하면서 총선 공약에서는 감추기, 기업인 102명에게 대통령 직통전화 개통 등등 문제를 지적하자면 끝이 없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자영업자·농민도 대통령에게 하소연할 게 많을 텐데 왜 기업인만인가? 나라를 이끌 큰 철학은 보이지 않고 시장원리 역행과 시대 흐름에 거슬러 가기가 왜 이리 많은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보여주기에 치중하면 이거야말로 위기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숱한 위기론이 틀렸듯 이번의 위기도 극복해낼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 제대로 대처하면 된다. 단기 실적 위주의 보여주기식 국정 운영은 안 된다. 진광불휘(眞光不輝). 진짜 빛은 번쩍거리지 않고, 큰 강은 조용히 흐른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시사인 2808.3.25

 

환경운동가 유인촌의 진면목

이제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은 제법 빛이 나는 일이다. 운동가는 정부 대표단이 되기도 하고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출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체제화한 환경운동은 무늬만 운동가를 양산하는 부작용이 있다.

놀랍게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아직도 환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적지 않은 수의 환경운동가가 희생되었다. 더러는 오지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무참하게 살해됐다.

 

20012월에는 남미의 콜롬비아 플리그 국립공원에서 젊은 활동가 일곱 명이 공원 내 도로변에서 사살된 채로 발견됐다. 전원이 머리에 총을 맞은, 누가 봐도 처형된 모습이었다. 이들은 댐 건설에 반대하던 대학생 활동가 그룹에 속했는데 개발 측에서 저격수를 보내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아마존 강 유역의 오지에서, 알래스카 동토에서, 아프리카 델타에서 활동가가 죽어 나간다.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려던 선주민 활동가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서 이들을 도우려고 날아간 젊은 남녀 대학생마저 석유 채굴업자나 농장주가 보낸 킬러에게 살해당한다. 세계 경제가 단일화·거대화로 치달으면서 환경운동가의 안전은 더욱 위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환경운동가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환경운동가를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었다. 환경운동가는 끊임없이 기관원의 사찰을 받았으며 빨갱이로 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환경운동은 제법 빛이 나는 일이다. 당당히 정부 산하 기관의 심의위원이나 정부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국제회의에도 빈번히 참석하고, 대기업 고문이나 사외이사로 출세하기도 한다. 당연히 저명 인사가 환경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일도 늘어났다. 배우·가수 같은 연예인 가운데도 환경운동에 열성인 이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을 요즘은 에코 스타라고 부른다. 환경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시민단체는 에코 스타를 만들어내고 활용하는 데 열심이기도 하다.

 

이는 좋게 말하면 환경운동의 성숙화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순치화·체제화이다. 환경운동이 패션화하면서 운동가의 문제의식이 무뎌지고, 아예 문제의식조차 없는 무늬만 운동가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환경운동가라면 누구에게나 대운하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첫 내각 장관 후보자 명단을 보니 환경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도 눈에 띈다. 환경부 장관에 내정됐다 낙마한 환경정의시민연대 공동대표 박은경씨는 집이 네 채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경정의시민연대는 1가구 1주택 운동을 벌였던 단체이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을 지냈다. 필자가 몸담은 환경재단의 행사에도 종종 참여했다. 그는 10년도 넘게 환경운동에 투신해온 원조 에코 스타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에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을 지지하는 동영상을 찍었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문화재와 환경만 파괴되지 않는다면 대운하 건설에 찬성한다라고 말했다. 과연 운하를 파면서 문화재와 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지난 대선 때 환경단체는 어떻게 해서든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막으려고 했다. 환경운동가 중에는 이례적으로 대선운동에 직접 뛰어든 이도 적지 않았다. 이명박 후보가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대운하 건설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환경운동가에게 운하 건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전세계 곳곳의 댐 건설 현장에서 서로 인간띠를 엮어 개발을 막는 환경운동가들에게 세상에는 대운하 건설에 찬성하는 환경운동가도 있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 환경운동도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일본의 저명한 환경운동가 이시 히로유키 씨는 환경운동가가 체제화하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시민운동은 항상 정부나 기업과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환경운동 경력을 코에 걸고 살다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대운하 건설에 찬성하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세계의 오지에서 지구 환경을 지키려고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내던지는 이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 아닌가. / 김상익 (편집위원·환경재단 도요새 주간) 시사인 2508.3.4

 

게으른 MB, 그대에게 복 있을진저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선거전에 돌입하기에 전 대통령이든, 총선 출마자건, 장삼이사건 간에 가쁜 숨을 한 번쯤 고르자. 제주 올레에까지 올 수 없다면 자기 동네 올레라도 어슬렁거려보자.

왕년의 <시사저널>에서 편집장을 하던 시절, 나는 지나치리만큼 열심히 일했다.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아니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도 어떤 기사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후배들을 심하게 닦달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 부지런함과 극성으로 일정한 성취를 일궈냈지만, 실은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 심신의 건강에 적신호가 울렸고, 남편과 자식을 외롭게 만들었고,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리더로서 저지른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의 창의성과 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점이었다. 편집장을 그만둘 즈음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방향성 없이 부지런을 떠는 건 게으른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언론사 생활을 접은 뒤에 자동차는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아닌, 가장 느린 자신의 두 발로 걷기를 작심한 데에는 지나치게 빨랐던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 작용했다. 스페인 서북쪽 끝에서 동북쪽 끝까지 800km에 이르는 도보여행 코스 산티아고 가는 길36일 동안 걸으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고 깊은 성취감을 느꼈다.

 

속도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

나는 그제서야 프랑스 지식인들이 플라뇌르(천천히 걷는 사람, 게으름뱅이)’를 찬미하는 이유를, 우리의 옛 선비들이 뒷짐을 지고 소요하기를 즐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세기의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그 스스로가 플라뇌르를 즐겼던 창조적 인물인데, 그가 손꼽는 대표 플라뇌르가 다름아닌 악성 베토벤이었다. 그는 집 밖을 어슬렁거리면서 배회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악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고향 제주도에 걷는 길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평화, 그리고 부질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과거와 미래를 돌아볼 여유를 길 위에서 누릴 수 있도록. 너무도 부지런히 사는 나머지 스스로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한순간이나마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어)’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200798일 첫 코스를 개장한 이래 3개 코스를 선보였고, 그 사이에 제법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그와 더불어 간세다리 정신도 조금씩 전파되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 행사에 참가했던 한 초등학교 어린이는 서울로 돌아온 뒤 북한산을 습관대로 속도전으로 등정하는 자기 아빠에게 어허,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었어요?’라고 점잖게 충고했다던가.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근면을 치켜세우고 속도를 숭배하는 풍조가 팽배하다. 근면은 어떤 경우에도 미덕이요, 속도는 곧 힘이다.

 

벌써부터 성질 급한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천이 어쩌고저쩌고 주판알을 튀기느라 여념이 없다. 국민은 새 대통령이 선출되자마자 경제 호전을 기대하는 목소리를 봇물처럼 쏟아낸다. 부동산 시장은 기대심리에 벌써부터 출렁인다.

 

이명박 당선자도 예외는 아니다. 선거전 당시에도 아침에 맨 먼저 일정을 시작하고, 10시 이전에 일정을 끝내본 적이 없는 부지런한 명박씨였다. 그런 당선자답게 ‘5년이라는 세월도 금방이다. 하루도 허투루 허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견주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편집장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이 당선자의 부지런함이 외려 걱정스럽다. 5년이라는 세월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엄청 긴 시간.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쯤은 어슬렁거릴 필요도 있는 게 아닐까.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닐까.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선거전에 돌입하기에 전 대통령이든, 총선 출마자건, 장삼이사건 간에 가쁜 숨을 한 번쯤 고르자. 제주 올레에까지 올 수 없다면 자기 동네 올레라도 어슬렁거려보자. 그런 연후에 다시 시작하거나 말거나.

서명숙 (편집위원·<제주 올레> 이사장) 시사인 1607.12.31

 

 

그 여자의 거짓말, 그 남자의 거짓말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을 욕심냈던 신정아씨를 그리도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던 언론이 대한민국 총감독을 꿈꾸는 이명박 후보의 수많은 의혹은 왜 파헤치지 않는가. 그의 구정물표는 왜 줄어들지 않는가.

처음에는 그 여자가 한심했다. 학벌 없이는 행세하기 힘든 한국 사회라지만, 해도 너무했다. 허위 학력으로 대학교수를 딴 것도 모자라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까지 탐냈으니 동티가 날 만도 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여자, 신정아가 슬슬 불쌍해졌다. 그녀를 향한 사회적 관심과 매질이 그 여자의 공적 지위나 저지른 범죄 행위에 비해 지나치게 뜨겁고 독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저 여자라면 참 황당하고 억울하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 언론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조차 신정아’ ‘변양균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정도로, 두 남녀의 과거사를 샅샅이 중계 방송했다. 두 남녀의 공적인 행위건, 지극히 사적인 남녀상열지사건, 언론의 집요한 추적과 촘촘한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성채 위에서 그 여자는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또 다른 거짓말을 쏟아냈다.

 

언론은 전문가들을 총동원해서 거짓말하는 자의 심리와 사회적·환경적 요인을 집중 분석했고, 일부 언론은 그 여자에게 인지부조화’ ‘다중인격’ ‘공황장애따위의 레테르를 붙이기도 했다. 신문 사설들은 한결같이 신정아 사건 수사에 쏠리는 세간의 의혹은 정당하다. 국민이 원하는 건 진실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 점 의혹 없이 수사하라고 주문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학력 허위 기재는 사회 전체의 학력 검증 시스템을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대대적으로 재확인 작업이 벌어졌다. 이렇듯 요란한 의제 설정 과정을 거치면서 공인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사회 합의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다시, 문제는 거짓말이다. 이번 주인공은 일개 대학교수였던 그 여자, 신정아와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그 여자는 국제 행사 총감독을 욕심냈지만, 그 남자 이명박은 한 나라의 총감독을 꿈꾼다.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니라, 바야흐로 이루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인물의 비중 못지않게 연루된 사건의 성격도 다르다. 이번 사건은 그림 중개나 전시회를 매개로 구전이나 챙긴 그 여자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잘나가던 벤처 금융회사가 주가 조작을 통해 300억원이 넘는 시세 차액을 올려 그 돈을 빼돌렸고, 그 결과 수백 명의 개미투자자가 피눈물을 흘린 사건이다. 가정이 파탄나고 심신이 황폐해진 가장들이 거리로 나앉았다.

 

그 남자, 그런 기업과의 연관성을 철저히 부인했다. 문제 인물 김경준과 사업을 함께했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정리했고, 주가 조작에 관련된 BBK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도 어디까지나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면계약서? 아예 없다고 했다. 이면계약서가 제출되자 막도장이라 했다. 도장이 진본임이 알려지자 서류 자체가 위조됐단다. 가히 거짓말의 퍼레이드.

 

거짓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

이쯤 되면, 국민은 등 돌리고, 언론은 취재력을 총동원해 그 남자의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질 줄 알았다. 그 여자와는 견줄 수 없이 어마어마한 공인, 나라의 앞날을 책임질 지도자이므로. 또 거짓말에 유난히 민감한 한국인, 대한민국 언론이기에.

 

근데, 참말이지 희한한 일이다. 이제까지 드러난 거짓말만으로도 지도자로서 품성에 의문을 품기에 충분한데도 구정물표라는 그 남자의 지지율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 언론은 그 여자 사건에 발휘했던 왕성한 호기심과 감투정신을 어딘가에 처박아둔 채, ·야당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중계 방송할 뿐이다. 어디 개인만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 노조를 인정하지 않지만 세련된 기업 문화를 자랑해온 삼성이 거짓말에서도 초일류 수준임이 최근 들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문득, 감옥에 있는 그 여자 신정아의 심경이 궁금해진다./  서명숙 (편집위원) 시사인 1207.12.3

  참 괜찮은 사람’ 또는 ‘여자 허경영’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다. 상식을 회복하는 10년이었다. 수구·기득권층은 10년째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옛날의 특권을.

이번 대선에서 좌파 정권을 종식시키자고 합창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 실정’ ‘국정 파탄’ ‘잃어버린 10이란다. 이 말은 원래 한나라당과 수구 언론이 심심할 때 한 번씩 외치던 구호인데, 이제는 꽤 많은 동조자를 모으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명박·이회창 두 후보 지지율의 합이 60%나 되는 것을 보니 이런 생각을 가진 국민이 많기는 많은가 보다.

 

좌파 정권? 혹시 외국인이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구상의 어떤 기준을 가져와도 좌파 정권이라 할 수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구태여 분류하자면 중도 우파 정도다. 그럼 광복 후 50년간의 정부는 무엇이었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는 자유와 인권을 말살한 명백한 극우파 정부였고, 그때의 삶이란 겨우 숨만 쉬는 삶이었다. 그 뒤의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극우파는 아니었지만 역시 오른쪽으로 치우친 정부였다.

 

한나라당과 수구 언론은 극우파임을 자백해야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의 성장 지상주의를 반성하고, 분배·복지에도 약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심한 우편향, 심한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노력한 정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오른쪽 끝에 있다가 조금이라도 중간으로 움직이려 한 것이므로 중도라는 수식어를 처음으로 붙일 만하지만 좌파는 아니고 역시 우파다. 선진국은 경제 예산보다 복지 예산이 몇 배나 많다. 심지어 선진국 중 복지를 가장 등한히 하는 미국조차 복지 예산이 경제 예산의 다섯 배나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역대 정부에서 경제 예산이 복지 예산을 압도하다가 참여정부에 와서 처음으로 역전이 일어났다. 우리의 기형적 예산구조가 이제 겨우 바로잡히기 시작했을 뿐, 장차 갈 길은 멀고도 멀다. 복지가 부족하니 서민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요, 오늘 밤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밤 다시 잠자리에 든다는 기약이 없다.

 

그런데도 한나라당과 수구 언론은 지난 10년을 비난하며 늘 이렇게 합창한다. 복지에 치중해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고. 이런 말을 들으면 외국인은 역시 이해를 못할 것이다. 이 정도의 초보적 복지를 가지고 왜 시비를 거는지를. 양극화가 이렇게 심각한데, 복지를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을 오히려 반성해야 한다.

 

이런 중도 우파 정권을 가리켜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 오른쪽 끝에 있다고 실토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내가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은 나는 극우파요하는 게 솔직하지 않을까. 광복 후 집권 극우파 세력이 집요하게 좌파 사냥에 나서서 좌파를 전멸시키다시피 했기 때문에 우리 국민은 좌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좌파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타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고, 스스로 이타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좌파다. 우파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믿고, 따라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우파다. 우파는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이익과 안락에 주로 관심이 있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지만, 좌파는 이웃과 이 세상의 약자에 대한 연민과 정의감이 있다. 이 기준으로 대통령 후보들을 한번 평가해보라.

 

시인 안도현의 짤막한 시는 폐부를 찌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조금 바꾸면 이렇게 된다. ‘좌파 함부로 욕하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좌파가 아니다. 좌파 운운은 무지의 소치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나 북유럽 복지국가 정도가 돼야 좌파라 불린다.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다. 상식을 회복하는 10년이었다. 수구·기득권층은 10년째 잃어버린 걸 찾아 헤매고 있다. 옛날의 특권을.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시사인 1007.11.19

 

전경련을 해체하라

개발 독재 시대의 종언과 함께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도 끝냈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대선 후보들은 재벌을 해체하라고까지는 못할망정 전경련을 해체하라는 소리쯤이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대선 국면이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뒤 벌써 다섯 번째 대통령 뽑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정 사람들은 총선 때보다도 시큰둥하고 술자리에서도 정치권 이야기는 5분을 가지 못한다. 어정쩡하게 사이비 군사정부가 던져준 직선제와 타협할 때에도 87 체제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인 바에야 우리 사회가 점진적으로 나아진다는 데 절망할 사람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신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빌려 식민주의를 합리화했던 것처럼, 고전적 자유주의의 변형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올림픽을 치르면서 본격 소비 시대에 들어섰고 1990년대 전반에 풍요를 구가했다. 그 시기는 미국이 해체된 소련과 동유럽권에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리 재편성에 여념이 없던 기간이었고, 곧 뒤이어서 아시아의 차례가 다가왔다.

 

신자유주의가 수십 년 민주화 투쟁 열매 삼켜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는 드디어 신자유주의를 경제 원리로 하는 IMF의 관리 아래 들어갔고 세계화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는 시장에 대한 숭배와 시장의 요구에 정부와 개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경제 행위자들이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사유화, 사회비용의 축소, 노조 해체, 토지 분할, 저임금 고이윤, 자유무역, 무제한적 자본의 이동과 자연의 가속적인 상품화 등이다.

 

국가 간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초국적 금융자본과 기업은 우리가 피땀으로 일구어놓은 부를 멋대로 요리했고 이는 마치 개미굴을 드러낸 것처럼 남한 민중의 생활을 파괴했다. 가계 부도, 가족 해체와 중산층 몰락, 대량 실업과 노숙자, 빈부의 양극화, 기업의 도산과 합병, 외국 자본의 국내 기업 사냥, 종속성 심화,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 주권의 위축이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는 동안 모처럼 민주화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민간정부로 들어서자마자 신자유주의가 수십 년의 민주화 투쟁의 열매를 삼켜버린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북한 인질 잡기를 통한 대남북한 프로젝트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으며,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신자유주의 질서에 오히려 적극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저잣거리의 속언대로 먹고사니즘이 모든 가치를 삼켜버린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시끄럽기로는 대선보다도 삼성 스캔들이 더하다. 그런데도 대선 입후보자들은 예전처럼 하나같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만 되풀이하고 있다. ‘재벌이라 하지 않고 요새는 점잖게 대기업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내놓은 일자리는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시 90%의 일자리가 중소기업에 의하여 마련된다고 한다. 경제가 어렵다고 실감되는 것은 바로 중소기업이 어렵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구조가 첫째 원인이라는데.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대대로 재벌을 위한 나라였으며 그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살기 어렵다는 서민 대중은 언제나 구경꾼일 뿐이다. 북유럽 식으로 서로 간에 조금씩 욕망을 참는 근검절약형, 어딘가 쓸쓸하지만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은 신자유주의에 전력투구하지 않고도 우리 삶의 방식대로 현재의 우리네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

 

개발 독재 시대의 너 죽고 나 잘살기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그 무렵에 이미 끝장났다. 그러니까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도 함께 끝냈어야 한다. 이제 와서 재벌을 해체하라고 하면 좀 과격하니까, ‘전경련을 해체하라는 소리쯤이야 대선 후보자들이 먼저 입을 좀 떼어보면 말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공약들 때문에 아직도 시큰둥한 것이다./ 황석영 (소설가) 시사인 907,11,12

 

대선 후보들, ‘11 맞장 토론하라

유권자가 가장 쉽게 후보의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각 당의 최종 후보가 맞붙는 ‘11’ 토론을 볼 수 없는 걸까? 150년 전, 그 옛날에 링컨과 더글러스도 했는데.

대통령 후보 토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1960년의 케네디-닉슨 토론이고 이 토론은 미국 정치와 미디어 발전사에 이정표가 된 것으로 흔히들 얘기한다.

 

하지만 미국의 선거 토론은 그보다 100년이나 앞선 1858년의 링컨-더글러스 토론이 원조다. 이것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2년 전에 벌어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 토론으로 당시 링컨의 상대는 일리노이 주지사였던 스테픈 더글러스였다. 대통령 선거 토론은 아니었지만 이 두 사람의 토론은 제대로 된 선거 토론 형식이 자리 잡게 되는, 미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당시 핵심 쟁점은 노예제도 폐지 여부였고, 유권자들은 링컨-더글러스 토론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진일보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링컨은 당시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불과 2년 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했다. 비록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였어도 폭발적으로 확장세에 있던 신문들에 의해 링컨은 이미 전국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그가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던 토론 덕이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1960년에 케네디 대 닉슨 토론이 벌어진 것은 미국의 토론 문화와 미디어의 발달 속도로 볼 때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미국 대학에서는 1820년대에 매사추세츠 주를 시작으로 토론 클럽이 생겨나기 시작해 전국적 현상으로 번진 뒤, 1920년대에는 각 대학 간 토론 대회가 정착됐다. 지금 미국 대학 중에 학교에서 재정 지원까지 받는 공식 토론팀이 없는 곳은 거의 없다. 마치 각 대학에 농구팀과 미식축구팀이 있는 것처럼 토론팀도 있는 것이다. 클린턴을 비롯한 역대 미국 대통령은 대부분 토론팀 출신이다. 이들은 바로 이 토론팀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과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그리고 라디오는 이미 1920년대에 상용화됐고, 텔레비전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이 1940년대 중반 2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다시 말해 토론 문화와 매스미디어의 발전이 한참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의 효시라는 케네디-닉슨 토론이 실시된 것이었다. 물론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측면도 있다. 군소 후보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법 조항이 걸림돌이었던 것인데, 결국 텔레비전 토론은 이러한 규정에서 제외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 이후 미국뿐 아니라 각 나라의 선거에서 텔레비전 토론이 수행하는 역할은 더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책 토론이 네거티브 선거 추방지름길

남의 나라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오래도 했다. 핵심은 대략 세 가지이다. 토론에 적극적인 자세는 민주 사회에서는 누가 뭐래도 미덕이며, 유권자가 가장 쉽게 직접 후보의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것 역시 토론이라는 점, 그리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든 방송사든 후보 토론에 걸림돌이 되는 환경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을 잘한다는 것은 단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닐 게다. 논리력, 설득력, 호감도 등 후보가 갖춰야 할 덕목은 많다. 링컨의 예처럼 적극성은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또한 정책 토론은 네거티브 선거를 비켜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쏟아놓은 그 많은 정책들을 방송 토론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한 번에 다 다루기 어렵다면, 횟수를 조금만 늘려서 해결하면 된다. 이 경우 한 후보가 한 방송에 여러 차례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면 각 방송사가 주제를 나눠서 돌아가며 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그리고 선관위는 지금도 후보자 토론을 선거일 전 120일 이내부터 가능하도록 묶어놓고 있는데, 각 당의 경선 등 정상적 정치 일정에 비하면 너무나 짧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후보들의 적극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왜 각 당의 최종 후보가 맞장을 뜨는 ‘11’ 토론을 볼 수 없는 걸까? 150년 전, 그 옛날에 링컨과 더글러스도 했는데./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언론인) 시사인 707.10.29

 

진보정치에 대한 예의

20:80으로 양극화된 사회는 다수인 ‘80’이 소수인 ‘20’에게 지배당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제도에선 당연히 ‘80’이 지배해야 맞다. 더욱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달리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는 누구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더욱 ‘80’이 지배해야 맞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20:80의 불평등, 대중의 궁핍화는 완화되기는커녕 시장만능주의, 승자독식으로 15:85, 10:90으로 치달으면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모순은 ‘80’의 대부분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말을 빌리면, 강남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급의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 강북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가령 조중동‘20’의 이익을 대변하여 세금폭탄론을 제기할 때 세금 낼 것도 없는 ‘80’에 속한 사람들도 이에 부화뇌동한다.

 

‘80’의 이와 같은 자기 배반은 물론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그들이 장악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지배이념을 끊임없이 유포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통제하고 조작한다. 그 결과 피지배계급의 자기 배반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남다른 것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또 다른 명제가 오로지 ‘20’에게만 적용될 뿐이고 ‘80’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 대부분이 반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있을 만큼 ‘80’의 자기 배반의 정도가 아주 심하다는 점이다. 이는 분단 상황이 부른 굴레인 게 분명하다.

 

새삼스레 정치학 원론에서 나올 만한 얘기를 길게 한 것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처지의식사이의 괴리가 낳은 정치세력 지형의 왜곡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우편향, 취약한 진보정치세력, 이른바 보수정치세력이 주로 보수를 참칭한 수구세력인 점, 그러한 보수의 대칭 세력을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게 된 점, 이 모든 게 대중의 처지와 의식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권한 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미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대중의 처지를 배반하는 정책을 펼친 세력까지 진보개혁세력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대중의 처지가 아닌 대중의 자기 배반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당연히 대중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어려움은 대중이 자기 배반 의식으로 진보정치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점이다.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비판적 지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본디 올바른 지지 형태는 비판적 지지이지만 한국에서 사용되는 비판적 지지는 왜곡된 의미를 갖는다. 솔직히 말해,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는 것은 한나라당 후보를 미는 결과를 가져오니 문국현씨가 포함된 범여권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삼진아웃시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대중이 자기 배반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스스로 물어야 하며, 대중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어도 비정규직법안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같은 진보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없이 비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중의 자기 배반 의식 위에 군림하겠다는 권력의지 표명과 다를 바 없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07.10.9

 

독립 언론은 독자가 지킨다

전통적으로 언론에 영향을 끼쳐온, 혹은 끼치려 노력해온 국가와 자본에 더하여 수도 없이 많은 이해집단에 둘러싸여 있는 언론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가치는 독립성일 수밖에 없고, 그 기본은 사실과 진실 그 이상

미국 공영방송 PBS의 저녁 뉴스 진행자인 짐 레러(Jim Lehrer)는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가끔씩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의 사회자로 나온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 정도라고 할까. 우리 언론들은 대개 미국의 상업방송 네트워크 뉴스 진행자들에 대한 소식은 재밋거리로라도 자주 다루지만, 이 시청률 낮은 공영방송의 뉴스 진행자는 거의 소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 있는 시청자들에게 짐 레러는 무척 신뢰받는 뉴스 진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상업방송의 뉴스 진행자들처럼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현란한 말의 기교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가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된 것은 자신이 진행하는 PBS 저녁 뉴스의 진중함 때문이다.

1998년 어느 날, 짐 레러는 뉴스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아무개 기자가 저녁 뉴스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했다. 그가 리포터가 아닌 코멘테이터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뉴스의 전달에는 그 어떤 섣부른 가치 판단보다도 사실과 진실이 중요하다는 뜻일 게다. 논평을 하려면 그건 따로 마련된 논평 시간에 하면 되는 것이니까.

 

<시사IN> 창간호의 광고 수를 세어본 까닭

전통적으로 언론에 영향을 끼쳐온, 혹은 끼치려 노력해온 국가와 자본에 더하여 수도 없이 많은 이해집단에 둘러싸여 있는 언론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가치는 독립성일 수밖에 없고, 그 기본은 사실과 진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시사IN> 창간호를 사들고 보니 표지의 대문 기사 제목이 위기의 독립 언론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 1년 동안 편집권 독립 문제로 죽도록 싸워온 기자들이 만들었으니 창간호 대표 기사가 그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좀 야박하지만 전체 면 수 가운데 광고면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세어보았다. 표지를 포함해 148면에 광고는 15면이다. 몇 번이고 세어보았다. 너무 적지 않은가? 당분간은 독자의 힘으로 갈 수밖에 없게 생겼다. 정기 독자든 거리 독자든 견고하게 늘어나야 하고 그러면 결국 광고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독립 언론을 표방하며 창간된 시사 잡지의 첫 호를 받아보고 광고 면수를 세어보는 일부터가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적은 광고로 많은 지면을 만들며 버텨낼 잡지사는 없다. 문제는 결국 광고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사IN> 기자들이 그토록 지켜내려 한 편집권에 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지난한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사IN>도 창간호 대표 기사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한 호주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이 언론에는 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이와 비슷한 성을 가진 영국의 네오 마르크시스트 정치경제학자 그래험 머독(Graham Murdock)도 이미 오래 전에 <시사IN>과 같은 우려를 한 바 있다. , 광고가 콘텐츠에 끼치는 영향은 이슈에 대한 명확한 당파적 견해를 유보시키고, 소비자 지향적인 이슈에 매몰시키며, 결국 구매력 있는 소비자(독자)에게만 접근하려는 광고주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시사IN>을 탄생시킨 기자들과 깨어 있는 독자들의 동력은 또다시 훼손될 것이다. 결국 <시사IN>이 여전히 갖게 될 고민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바라는 독자 대중과, 이를 통해 이윤을 더 창출하기를 원하는 광고주들 사이에서 당초의 방향성을 지켜내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진 마시라. PBS도 짐 레러의 신뢰도와는 상관없이 매년 재정난에 시달리지만 뜻있는 시청자들이 이를 쓰러지게 놓아두지는 않는다.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언론인) 시사인 307.10.4

 

대학 간판과 명함

그 음악가의 집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곤 했다. 당대 유명한 음악가는 물론, 문인, 화가, 동네 푸줏간 주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자신의 연주를 듣기 원한다면 누구든 기꺼이 초대했기 때문이다. 단지 음악을 즐긴다는 점이 중요할 뿐, 서로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음악가의 이름은 폴란드 출생의 고도프스키다. 한국에서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사회적 계층과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적 소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 서열 체제는 현대판 신분제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18살 때 입학하거나 하지 못한 대학 간판이 죽는 날까지 따라다닌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 대학 간판과 그 연장선상에서 결정되는 명함, 이 두 가지는 한국 사회 구성원의 모든 것이다. 사람 됨됨이나 교양, 개성과 사회문화적 소양도 이 두 가지에 종속되며, 따라서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같은 대학과 학과, 비슷한 명함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방식에서 정치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슷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선 이 두 가지에 의한 스테레오타입들이 형성된다.

 

사회 구성원은 오로지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를 위해서만 경쟁하고 공부할 뿐, 이 두 가지가 결정된 다음에는 거의 자기 성숙의 모색을 하지 않는다. 자신과 싸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숙시키기엔 이 두 가지의 억압이 엄중한 것이다. 드물게 그 결과를 사회가 인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 가치관에 부합될 때뿐으로, 암기와 문제풀이로 일관된 시험을 통한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처럼 인문학적 소양과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작용하지 않는 점은 마찬가지다.

 

한때 외환위기가 부른 명퇴현실이 대학 간판과 명함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전화위복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대학과 직장이지만 실상 그것이 그리 많은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경험은 그간 외면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배반당했고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어린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에게 보내는 위선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대학 간판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회, 대학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혼이 화제가 되고 그 결혼의 파국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학력차로 설명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대학 간판과 무관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과정을 무시하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미래 세대가 이미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되고 세뇌되면서 광란의 학습노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학력 위조 파문은 남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자율성의 명제를 찾기 어려운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괴물적 현상인데, 그것은 또한 대학 간판이 개인의 재능과 자질을 얼마나 억압하는지 말해준다. 대학 서열 체제의 혁파가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이며 허접한 경제동물의 사회를 벗어나는 길임을 인식하기엔 대학 간판과 명함의 기득권은 워낙 강한데 교양과 상상력의 수준은 너무 낮은 게 아닐까. 바로 우리 사회의 대학 간판과 명함의 한계다. /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07.8.26

 

설악산의 아픔과 케이블카의 오만

해결 국면으로 들어갔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가 다시 환경보전 논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1) 내 케이블카 건설과 관련해 문화향유권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며 문화재위원회의 거부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결정문에는 설악산의 문화향유정도가 제시되지 않아 과연 현재 설악산의 문화향유정도가 어느 수준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다음은 속초문화원의 설악산 소개글이다.

설악산의 웅장한 절경은 어느 모로 보나 남한 제1의 명산으로 일찍이 1965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극진한 보호를 받아오고 있는 보호지역이며, 1982년도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전 세계가 주시하는 보호구역이 되고 있다.”

 

이런 자부심 높은 설악산에도 아픔은 있다. 1995년 우리나라는 국격을 생각하여 이 대한민국 최고의 명산을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려 하였다. 그런데, 참 민망하게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규제가 강화되고, 관광객이 감소할 것을 우려한 지역민의 반대로 등록에 실패하였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자연환경보전 정책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컸으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화는 없는 듯하며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이후 각종 개발로 설악산의 문화향유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으며, 2016년에는 총 365만명이 설악산을 직접향유하였다. 과연 매일 1만명씩 관광객이 찾아오는 설악산의 문화향유권은 어느 수준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호지역 중 하나로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인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과 비교해보자. 옐로스톤국립공원의 직접 향유를 위한 입장객은 최근 10년 간 연평균 약 350만명이며, 2016년에는 426만명을 기록했다. 연간 300만명 초반을 유지하던 관광객이 국립공원청 역사 100년을 기념(미국 공원청은 1916년 설립되었다)한 대대적 홍보로 2014년과 2015년 각각 전년도에 비해 50만명이 증가하여 400만명을 넘어서게 된다. 일시적 현상으로 보임에도 급격한 이용객 증가로 인한 자연환경 훼손을 우려하여 2015년에 20%의 입장료 인상(현재 입장료는 차량 1대당 한화 약 34000)을 단행하여 관광객 제한을 유도하였다. 언뜻 보면, 현 설악산 입장객은 문화향유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옐로스톤국립공원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밀도를 계산하지 않은 결과로 이를 고려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설악산국립공원의 면적은 398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큰 보호지역 중 하나인데, 1당 연간 관광객 수는 약 9200명에 달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설악산의 22배가 넘는 9000에 육박하는데, 유난히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 2016년에도 1당 연간 관광객 수는 고작 474명에 불과하다.

 

미국은 설악산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관광객 밀도를 우려하여 입장료를 과감하게 올리는 반면, “대한민국 최고의 명산으로 극진하게 보호하는설악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호지역에 비해 단위면적당 20배나 많은 관광객이 찾음에도 문화향유 권리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혹자는 우리나라와 미국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여기에도 들이댈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자. 미국의 동물이나 한국의 동물이나 국토의 면적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동일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특수성을 배제한 채 외국에는 케이블카가 많다는 논리를 펴는 주장은 하지말길 바란다. 케이블카의 건설 당위성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국가인 스위스에도 최소한 국립공원만큼은 케이블카를 건설하지 않는다.

 

문화재위원회의 결정논리와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결정논리 중 어느 쪽이 보다 합리적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뻔한 것이다. 행심위의 결정은 자신들을 제외한 국가의 모든 전문위원회가 필요없다고 얘기하는 오만으로 비춰진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17.7.27

 

 

완장부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건넨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말라는 주문은 오늘날 한국사회에 더 적중한다. 누가 배부른 돼지가 되겠노라고 답하겠는가? 그러나 실제 세상은 배부른 돼지가 되려고 애쓰다 성공한 소수와 실패한 다수가 벌이는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이다. 이 아수라장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 참여정부 인사들도 포함된다.

 

오늘 우리는 남과 가진 것으로 비교하고 경쟁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일생 동안 대학입시와 취직 또는 임용을 위해, 딱 두 번 긴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로지 상위권 대학에 들고자, 그리고 괜찮은 수입을 보장받거나 얄팍한 권력을 잡으려고만 긴장한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집단 또는 범주에 들거나 자리에 오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바란 훌륭하고 아름답고 올바른삶은 어제의 나보다 성숙된 오늘의 나를 위해 자신과 치열하게 싸울 때,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풍요로우면서 정교하게 바꿔나갈 때 그 지평이 열린다. 물론 이는 어렵다. 특히 이미 형성된 의식을 합리화하면서 고집하는 보편성 때문에도 무척 어렵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이다라는 격언은 격언에 머물고, 우리는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 내가 속한 집단, 범주나 자리의 비교우위를 거듭 확인하고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과 범주에 더욱 집착한다. 한국인, 혈연, 내 학교, 내 지역, 내 종교를 확인하고 강조하는 한편, 내가 속한 범주나 집단에 속하지 않거나 못한 사람들을 차별·억압·배제하고, 그들의 개인적 노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잘것없는 구성원들의 보잘것없는 사회가 구성되고 관철된다. 이 시대의 개혁은 이런 사회 구성 논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아야 했다.

 

이 점에서 참여정부 평가포럼은 참여 인사들의 면면을 볼 때 시사적이다. 오늘날 개혁세력은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명분도 챙기고 자기 실리도 챙기는일에 성공한 집단 또는 범주에 가깝다. 그들 스스로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은 그들의 개혁이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참여정부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올바른 이해를 주장하며 모였다. 그들한테서 참여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통상독재에 대한 개인적 견해는 아직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들은 이미 정태인씨를 왕따시키는 데 성공했다. 초토화될 농촌과 어촌, 농어민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쯤은 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거의 유일한 개혁입법인 사학법을 재개정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가 전경련과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든 해괴한 일에 대해서도, 한국고속철도(KTX)와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을 쫓아낸 일에 대해서도, 행정자치부의 전국공무원노조 탄압에 대해서도, 구속 노동자 속출에 대해서도 그들의 개인적 견해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참여정부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주문할 수 있는 개혁의 사람들이다. 그들만의.

 

4년 전 권력의 핵심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감격적으로 합창했던 그들, 그들에게서 민중은 애당초 없었고 오로지 임만 있었다. 이 허접한 사회에서 명분도 챙기고 실리도 챙기게 해준, 그들을 하나의 범주 또는 집단으로 만나게 한 만 있을 뿐이다. 완장부대가 따로 없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07.5.1

 

언론 자유와 시민사회

 

언론 자유의 일차적 요건은 산업이 아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충실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랑스에서 민중주체의 자유언론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을 했다. 아직 68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절, 그래서 신문 이름도 <리베라시옹>(해방)이었다. 한마디로, 민중해방의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신문은 로스차일드가의 소유가 되었다. 재벌 가문에게 포획된 해방의 처지는 상업주의의 도구가 된 체 게바라보다 더 참담한데, 신자유주의로 통합된 21세기에 언론이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이런 <리베라시옹>에 비하면, 레지스탕스 정신을 바탕으로 창립된 <르몽드>(세계)의 변모는 약과인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생존수단이 르몽드의 존재이유를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창립자 위베르 뵈브메리는 군수산업에도 촉수를 뻗친 라가르데르 재벌에 지분을 내준 오늘의 르몽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이 미디어산업의 하나로 머물 때, 소유가 신문의 지향을 규정한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그래도 로스차일드나 라가르데르는 기자들에게서 편집권을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지 않는다. 독자와 시민사회가 용납하지 않기에, 그와 같은 행위는 자본의 속성인 이윤 추구에도 부정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족벌자본 자체인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이 신문시장을 왜곡하면서 장악한 우리 현실은 그렇게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최대의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반영물이다.

 

최근 <시사저널> 사태는 자본권력에 대한 언론의 자발적 복종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알게 해준다. 과거의 마름들이 지주에겐 개와 같은 충복이면서 소작농들에게는 늑대와 같은 존재였다면, 오늘의 마름들은 자본권력의 비위를 맞추려고 을 농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주가 지배하던 과거엔 수치라는 말이 아직 그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말까지 농단하는 오늘날엔 그마저 사라졌다.

 

시사저널 사장에게 독자와 시민사회의 분노와 항의는 삼성재벌을 향한 마름의 정체성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치를 모르는 마름의 행각에는 거칠 것이 없어서 기자들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빼내는 행위를 마다지 않는다. 실질적인 대체근로로 짝퉁 시사저널을 내놓아 독자들을 우롱함과 동시에 기자들의 파업권을 무력화시키더니 지난 22일엔 직장폐쇄를 단행하여 기자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게다가 짝퉁이라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서명숙 전 편집장, 고재열 기자와 이를 게재한 <오마이뉴스>를 고발했다.

 

그런데 여느 짝퉁은 진품에 비해 간혹 허접할 뿐 추하지는 않은데 짝퉁 시사저널은 허접할 뿐만 아니라 추하다. 아무리 사물과 현상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들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부당한 횡포에 맞서 싸우는 기자들과 연대하지는 못할망정 자본에 동원되어 그들의 뒤통수를 치다니 . 그렇게 채워진 시사저널은 추한 짝퉁인 게 분명하다. 진품 시사저널의 진품 독자들이 펴는 나도 고소하라대열에 이렇게 동참하는 것은, 그것이 시민사회의 일원이며 부끄럽게도 이 땅의 언론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19876월항쟁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시사저널에 보내는 최소한의 연대 표시라고 보기 때문이며, 시민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자본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언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본의 오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성숙된 시민사회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성숙도는 그 사회가 누리는 언론자유의 정확한 척도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07.1.26



Yes We Can Can (Pointer Sister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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