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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12.19~14 철수야 철수야

by 이성근 201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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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18 경향 장도리

 

 

 

 

떠난 남자, 남은 남자야권을 찢다 1213 한국

안철수, 새정치 공식 탈당 선언

 

 

안철수 탈당, 그 두 개의 역설 1214 프레시안

안철수 의원의 탈당 선언 이후 최대 관심사는 '누구'입니다. 정치권과 언론 모두 누구누구가 탈당 대열에 합류할 것인지를 재고 있습니다. 동조 탈당 의원 숫자를 세기도 하고, 손학규·김한길·박지원 등의 합류 여부를 점치기도 하는데요. 이 관심사에 반영된 안철수의 현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동조 탈당의 규모와 질을 셈하는 이유는 '안철수 신당'의 파괴력을 가늠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명이나 합류하는지에 따라, '보스급'이 합류하는지에 따라 파괴력이 달라진다는 전제가 깔린 건데요. 이런 전제 자체가 역설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안철수 개인의 파괴력 갖고는 야권, 또는 정치권 전체의 지각변동을 재고 논하는 게 힘들다는 메시지입니다. 안철수 의원은 더 이상 '원톱(one-top)'이 아니라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역설은 제2차 역설을 파생시킵니다. 두 개의 2차 역설인데요. 하나하나 살펴보죠.

첫째, '원 오브 뎀'이 된 안철수의 처지가 거꾸로 향후 동조 탈당의 규모와 질을 규정할 것이라는 역설인데요. 물론 그 규모와 질은 별로 크지도, 별로 높지도 않을 것입니다. '원톱'의 수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철새'의 리스크를 안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탈당한 안철수와 손을 잡을 사람들은 '동조(同調)' 차원이 아니라, '자구(自救)' 차원일 겁니다. 어차피 새정치민주연합에 남아도 살 길이 보이지 않을 사람들이 '동조'의 모양새를 연출해 자기 구제를 모색하는 수준일 겁니다.

둘째, '원 오브 뎀'이 된 안철수라면 신당을 꾸려도 동거와 연합은 불가피하다는 역설인데요. 동거와 연합이 신당의 불안정성을 키울 것입니다. 여러 명이 여러 달에 걸쳐 머리 맞대어 만든 혁신안보다 자기 혼자 만든 혁신안이 더 본질적이고 더 근본적이라고 단정하는 사고, 그리고 당내 다수가 혁신전대는 물리적으로 어렵다고 보는데도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행태는 전형적인 '원톱'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민주적 원톱'이 아니라, '제왕적 원톱'의 모습입니다. 이런 '원톱'의 면모가 '원 오브 뎀'의 환경을 부정하고, '원 오브 뎀'의 환경이 '원톱'의 면모를 옥죄면 파열음이 발생합니다. 안철수 의원 스스로 불안정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보고 또 봐도 전망이 서지 않습니다. 탈당 이후 안철수 의원은 정말로 '허허벌판에 혈혈단신' 신세가 될지 모릅니다. 본인 입으로 말한 그 상황이 '엄살'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안철수 의원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다시 '원톱'이 돼야 합니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안철수의 유니크한 정치적 가치를 드높여야 합니다. 헌데 이 지점에서 오히려 또 하나의 역설적 상황이 확인됩니다. 본인이 뽑은 비장의 카드가 기존의 킬러 컨텐츠마저 완전방전시키는 마지막 수순이었다는 역설적 상황입니다.

 

누가 뭐래도 안철수 의원의 킬러 콘텐츠는 '새정치'였습니다. 하지만 탈당에 이르기까지 안철수 의원은 독선적 사고와 분열적 행태를 보였습니다. '새정치'의 극복대상이 되는 면모를 자기 스스로 내보임으로써 '새정치'의 진정성을 방전시켜버렸습니다. 오히려 합당-탈당으로 이어지는, 구태정치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인위적 정계개편을 반복함으로써 '공학적 정치인'의 면모만 부각시켰습니다. 그 인위적 정계개편을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자기 본위의 선택'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탈당 기자회견문에서 '새누리당 세력의 확장을 막고 더 나은 정치, 국민의 삶을 돌보는 새로운 정치로 국민들께 보답할 것'을 다짐했지만 지금까지의 족적은 정반대입니다. 전혀 새롭지 않은 정치로 국민들에게는 실망만 안겼고 자신의 정치적 확장성은 갉아먹어버렸습니다. 탈당 선언은 그 '자폐정치'의 끝을 보여준 것입니다

 

조직과 화합 못한 '포퓰리스트' 안철수 탈당은 예견돼 있었다 1214오마이뉴스

[주장] '안철수현상' 이끈 진보언론, 독일로부터 교훈얻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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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년간 포퓰리즘 연구에 빠져 있었습니다. 포퓰리스트란 대의민주주의의 주요 제도인 정당이나 의회에 대한 불신을 리더 개인에 대한 신뢰로 대체하면서 정치적 불만을 동원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사람을 말합니다. 전 세계 포퓰리스트는 좌파, 우파, 중도 모두 존재하므로 이념적 공통점도 없고 국가적으로는 남미와 같은 개발도상국은 물론, 과거엔 캐나다, 최근엔 유럽, 미국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스트를 감별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전 세계의 포퓰리스트는 수사학과 리더십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1) 포퓰리스트는 입만 열면 국민을 내세우는데,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갖는 국민이 자연스러운데 비해 포퓰리스트들은 하나의 생각이나 뜻을 갖는 국민을 상정합니다.

2) 의회,정당, 관료 등 기존제도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노출하면서 이에 대한 불신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로 대체합니다.

3) 대체로 포퓰리스트들은 성공적인 업적을 이룬 비정치인이 갑자기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등장하는데 국민의 소명을 받고 정치를 시작하기 때문에 권력의지가 모호한 게 특징입니다. 자신은 원치 않는데 국민이 불러내서 할 수 없이 정치를 한다고 했다가는 강한 권력욕을 보이기도 합니다.

4) 입으로는 국민을 외치지만 리더십은 권위적이며 공조직이 아닌 측근으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사조직에서 의사결정을 하며 민주적 절차를 따르기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합니다.

5) 포퓰리스트는 자기는 단일한 국민의 의지를 대변할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때문에 남과 융합되지 않고 분란을 일으키며 그가 속한 정당은 분열로 끝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생명도 실패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포퓰리스트들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은 대통령제를 택한 남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원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제 하에서는 정치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비정치영역에서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갑자기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일부는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당선된 포퓰리스트들이 전혀 준비 없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오히려 무능하고 실패로 막을 내렸다며 포퓰리스트의 등장에 매우 비판적입니다.

캐나다의 포퓰리스트는 오래 전 일이라 건너 뛰겠습니다. 미국의 포퓰리스트는 1992년 대선에 등장한 억만장자 로스 페로를 들 수 있습니다. 페로의 도전도 결국은 실패로 끝났는데 페로야말로 위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최근 유럽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유는 극우 정치인들이 EU의 등장과 이민, 국제화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불만을 동원하여 EU반대운동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극우세력이 의미 있는 의석을 얻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이 되는 건 불가능할만큼 선진국에서는 포퓰리스트가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포퓰리스트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단 하나의 국가가 있다면 바로 독일입니다. 독일은 오래 전 유명한 포퓰리스트를 경험했지요. 바로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도 위의 특징에 그대로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독일은 방송이나 시민교육을 통해 히틀러와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기에 포퓰리스트가 발 붙일 틈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페로 뿐만 아니라 내년 대선 트럼프의 등장을 보아도 포퓰리즘의 발흥이 좀 심각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언론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상업주의가 심각하고 금권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미국 학자들은 제3후보였던 페로가 언론을 돈으로 산 덕분에 최근 미국 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하게 19%의 유효투표를 획득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 연구결과에 따르면 페로는 돈으로 언론을 산 것 외에도 언론이 자발적으로 엄청난 보도를 했기 때문에 인기를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페로는 정치불신자를 동원한 게 아니라 보통 사람을 정치불신자로 만들었고 또한 정치를 외면하던 정치냉소주의자를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계명된 시민의 존재를 가정합니다. 따라서 정치냉소주의자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냉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이라면 모두 싫어하는데 페로와 같이 성공한 갑부가 정치인이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포퓰리스트의 등장으로 언론은 새로운 정치시장을 개척하게 된 것이니 새로운 독자층을 위해 페로 기사를 쏟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언론의 상업주의가 페로와 같은 포퓰리스트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안철수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이 글을 읽으면서 왜 자꾸 안철수 의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고요? 안철수 의원은 페로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안철수 탈당 선언 "지금 야당엔 답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13일 탈당을 선언했다. 안 전 대표는 "오늘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난다""비상한 각오와 담대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거듭거듭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답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 선언을 한 안 전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을 뒤로 하고 차량에 오르고 있다. 남소연

 

1) 안 의원은 늘 하는 이야기가 "국민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출마선언문에는 "이번 선거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원하는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좋겠습니다"와 유사한 표현이 세 번이나 등장할만큼 국민이 단일한 의사를 갖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2) 중앙당을 없애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줄이자, 국회의원 수를 줄이자는 그의 제안은 학자로부터 이미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반면 자신의 '진심'을 강조함으로써 정치를 제도보다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켰습니다.

3) "저는 제 역량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국가의 리더라는 자리는 절대 한 개인이 영광으로 탐할 자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려고 합니다"라는 출마선언문은 다른 포퓰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소명의식으로 정치에 투신했음을 보여줍니다.

4) 새정치민주당이 탄생하는 과정이나 대표로서의 그의 리더십, 지난 대선 캠프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이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사조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미 많은 분들이 목격했습니다.

5) 새정연 분열과 안철수의 탈당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입니다. 전세계 포퓰리스트 누구도 조직 내에서 화합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안철수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결국은 포퓰리즘 연구로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안철수캠프의 박선숙은 안철수가 지지를 받는 건 양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 때문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경험적 연구결과 정당불신자들은 안철수를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주당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안철수를 지지했었습니다. 박근혜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겠지요.

 

오히려 무당파층 중에서 안철수 지지자들은 페로 지지자와 유사하게 정치냉소주의자들이 유의미하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철수의 가장 큰 공이 정치에 관심이 없던 국민을 정치에 관심 갖게 만든 것이라고요? 그게 바로 포퓰리즘입니다. 포퓰리즘은 대의정치를 부정하고 정당을 망치기에 민주주의 정치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모든 정치학자들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안철수현상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후진국현상이며 금권정치, 언론의 상업주의가 판치는 곳에서나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반정치 현상입니다. 정치는 기업경영보다 더 복잡하고 전문성을 요합니다. 아무나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 안철수현상을 만들어냈고 내분에 휩싸여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야당을 만들었습니다.

 

정치발전이란 사람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제도화와 동의어입니다. 안철수현상을 만드는데 기여한 언론인들은 이제부터라도 차분히 과거를 복기하고 성찰함으로써 독일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 가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적인 독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의 안정되고 견고한 지지도는 박정희신화, 정당의 제도화, 씽크탱크로서의 여의도연구소와 유능한 스텝, 규칙에 승복하는 문화 등이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김대중,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두 분 대통령의 신화를 깨고, 포퓰리스트를 띄움으로써 야당을 분열하고 무능하게 만드는데 기여한 진보언론의 책임도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 야당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할 언론이 자신들의 초기 오판을 감추기 위해 끝까지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진보언론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민의식이 안철수현상 이겼다

 

안철수의원이 지난 대선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고 지지도 추락으로 사퇴했고 자신이 만든 정당을 탈당함으로써 포퓰리스트 특징의 정점을 찍게 된 것은 그나마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이 남미보다는 높기 때문 아닐까요. 안철수의원이 다른 나라의 포퓰리스트와 다른 게 딱 하나 있습니다.

 

포퓰리스트는 원래 기득권층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안철수 의원은 대기업 말고는 일체의 기득권에 대해 적대감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문재인만을 상대로 싸웠던 게 시민들의 냉대를 받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보언론이 그토록 안철수현상을 주도했고 지금도 여전히 응원하는 이가 상당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시민의식의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보언론이 아직까지 안철수현상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반기문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근로자 10명중 7, 월급 300만원 안 된다 129 한국

전경련 2014 임금 분석...상위 10%가 전체 연봉 총액의 28.7% 가져가

근로자의 70%가 월 300만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월급이 200만원 이하인 근로자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2014년 소득분위별 근로자 임금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평균 연봉이 3,240만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자료에서 고용주, 자영업자를 제외한 임금 근로자 1,404만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다.

 

분석에 따르면 월급쟁이 중 상위 10%에 들려면 최소한 6,408만원 이상을 받아야 하며 이들의 평균 연봉은 9,287만원이다. 상위 10%가 받는 연봉 총액이 전체 근로자 연봉의 28.7%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1억원 이상 고액 연봉자는 351,381(상위 2.5%)으로 조사됐다. 연봉 ‘1억원 미만8,000만원415,107(3.0%), ‘8,000만원 미만6,000만원886,140(6.3%), ‘6,000만원 미만4,000만원1911,739(13.6%)으로 나타났다.

 

상위 30%에 들려면 연봉이 최소한 3,600만원 이상이어야 하며 상위 20~30%를 차지하는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은 4,030만원이다. 나머지 70%는 연봉이 3,600만원을 넘지 않았으며 절반이 연봉 2,465만원 이하여서 소득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4,000만원 미만 연봉자가 1,048만명(74.6%)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연봉 2,000만원 미만이 가장 많은 5243,576(37.3%)으로 조사됐다. 이철행 전경련 고용복지팀장은 동일한 원시 데이터를 활용한 분석결과에 따르면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6,278만원, 중소기업 정규직은 3,323만원이었다이는 각각 임금근로자 중 소득 상위 10.5%, 35.7%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격차가 컸다고 말했다.

 

파리, 혁명은 실패하고 재앙만 남았다 1214 프레시안

1212, 파리 협정(Paris Agreement)이 탄생했다. 분명 역사적인 사건이다. 교토 의정서(2008~2012) 이후의 공백 상태를 해결할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로써 2020년 이후의 신()기후 체제의 윤곽이 잡혔다.파리 협정은 2030년까지 적어도 15년 동안은 기후 변화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말이 될 것이다. 교토 의정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기적''재앙'이라는 수사가 양 극단의 입장을 대변한다. 중간이 있다면 유엔 관료와 각국 대표일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의 역사적인 합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파리 협정은 4년 전 코펜하겐에서 시도했던 것을 이제야 공식적으로 타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적이라면 때늦은 기적이고, 재앙이라면 이미 시작된 재앙인 셈이다. 정작 문제는 파리 협정이 신기후 체제가 아니라 앙시앵레짐(구체제)이라는 점이다.

파리 협정의 전문에는 교토 의정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멋진 말이 많다. 식량 안보, 정의로운 전환, 괜찮은 일자리, 인권, 취약한 상황에 놓인 원주민·공동체·이주민·아동의 권리, 발전권, 젠더 평등, 세대 간 형평성, 어머니 지구, 기후 정의 등. 이 모든 표현에는 오랫동안 기후 취약국과 기후 정의 진영이 요구해왔던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파리 협정이 우리의 미래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와 같은 가혹한 운명일 테니까.

협정문 세부 조항에서 이런 상징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모두 지워버렸다. 예컨대 2조에서 '인권', 3조에서 '기후 정의'가 사라졌다. 철저하게 비구속적인 부분으로 몰아넣어 버린 것이다.

 

엄청난 변화라고 기대가 높은 1.5도 목표도 과거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기후 과학계와 기후 운동권은 지구 평균 기온 상승 목표를 (산업화 이전과 비교했을 때) 2도에서 1.5도로 나아가 1도로 재설정해야한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다. 협정 목적(2)"2도보다 훨씬 낮게 유지하고, 1.5도 아래로 억제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니 대단한 성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이미 자발적 기여(INDC) 방식으로 바뀐 상태에서 1.5도가 갖는 의미가 과거와 같을 수 없다. 1.5도 달성을 위한 탄소 예산을 국가별로 할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비록 2023년부터 5년마다 공동으로 INDC를 검증(global stocktake)하고 상향된 목표 제출을 유도하더라도, 각국의 여건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마저도 4조에서 탄소 감축의 목표와 연도에 관한 내용(예컨대, 2050년까지 2010년 대비 70~95% 감축)이 삭제됐기 때문에, 또 하나의 상징으로 전락할 수 있다. '가능한 빨리' 배출 정점을 찍는다는 희망 속에서 21세기 후반에 '탄소 순배출량 0'을 추구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100% 재생 가능 에너지 경로를 선택해 화석 연료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이해돼서는 곤란하다. 협정문에 '탈탄소'가 빠진 이유에 주목하자. 또한 탄소 포집 저장과 국제 탄소 시장 등 탄소 배출 후의 사후 처리 기술에 의존하겠다는 의도도 놓쳐서는 안 된다.

 

 

1211, Coalition Climate 21Climate Action Zone.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다른 쟁점에서도 해결된 것은 없다. 손실과 피해(8)에 대해 선진국들이 법적 책임과 보상 개념을 철저히 거부하면서 나중에 계속해서 논의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재정(9) 역시 선진국이 부담하고 개발도상국은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애매하게 정리했다.

구체적인 금액과 관련된 문구는 모조리 지우고, 협정문이 아닌 별도의 파리 총회 결정문(CO21 Decision)2025년까지 지금과 같은 방식을 유지한다고 못 박았다.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 조성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는 데도 말이다. 파리 협정 자체는 각국의 절차에 따라 55개국 이상의 비준이 필요하며 비준 국가의 배출량이 전 세계 배출량의 55% 이상이 되어야 발효되는 국제법적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파리 협정은 다른 무역 협정처럼 구체적이지도 않고 강력하지도 않다.

법적 강제력이 미치는 범위는 5년마다 INDC를 제출하고 이를 검토하여 2(혹은 1.5) 목표를 달성하도록 노력한다는 '합의'에 국한된다. 이 때문에 국제재판소 설립, 기술 이전에 대한 지적 재산권 해결, 항공과 해운 분야의 접근 등은 전부 삭제됐고, 협정문에는 각국의 주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기구에서 결정한 감축이나 재정 목표가 없는(더 정확히 말해서 숫자를 특정하지 않은) 협정인 것이다. 사실상 유엔 기후변화협약을 비준한 나라에게 파리 협정 비준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미국 공화당 입장을 제외한다면).

 

기후 변화에 책임이 없는 국가들은 파리 협정을 반대할 힘이 없을뿐더러 미국이 주도하는 실용주의에 편승했다. 올해 은밀하게 결성된 느슨한 동맹(high ambition coalition)에는 유럽연합(EU)은 물론 기후 취약 국가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유럽연합은 탈탄소 강경 노선을 고수했고, 미국과 아프리카와 섬나라들은 새로운 협정 체결과 1.5도 목표 설정 그리고 기후 재정 증액이라는 현실적 노선에 합의했다. 덕분에 오바마 행정부의 미국은 유럽연합을 제치고 파리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행복하지는 않지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파리 협정이 통과된 것이다.

 

이렇게 '자체적 차별화' 논리는 숱한 쟁점들을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후속 협상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2라운드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은 결코 아니다. 앙시앵레짐의 지속 가능한 발전일 뿐이다. 그것도 2도 상승 제한에 가장 중요한 2016~2020년을 포기하고 3도 이상 상승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파리 협정은 기후 정의의 미래가 아니다. 새로운 기후 체제는 오지 않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총회장 밖의 기후 정의 진영은 파리 개선문과 에펠탑에 모여 파리 협정을 반대하는 행진과 집회를 했지만, 테러 비상사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후 정의를 위한 파리는 없었고 기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1212, 에펠탑 광장의 대중 집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대안은 다른 곳에 싹튼다. 공동체 에너지·에너지 협동조합과 지방 정부의 재지역화·재공영화 등 에너지 시스템의 다양한 모델을 모색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와 전망은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이제 기후 정의와 정의로운 전환도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고위급 회담에서 나경원 위원장의 연설처럼, "이제는 행동할 시간이다.“

 

현충원 무명용사 1535구 재검증, 멈춰라! 1211 프레시안

형제의 묘역을 위하여

용산 전쟁기념관에 '형제의 상'이 있습니다. 인민군인 동생과 국군 장교인 형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상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에 박규철, 용철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었고, 형 규철은 남한에 내려왔다가 분단이 되자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형은 국군 8사단에, 동생은 인민군 8사단에서 배속되었습니다. 이 두 부대는 죽령에서 만나 격렬한 전투를 치릅니다. 형제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치열한 전투 중에 형 규철이 몇 발짝 뒤에서 추격하던 인민군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전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이 불효자식아!' 하는 호통을 들어서였을까요, 규철은 죽이지 않을 테니 고개를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땅에 엎드린 채로 힐끗 고개를 돌린 얼굴은 동생이었습니다.

"용철아, 형이야!"

동생은 형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고, 형은 동생을 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형제의 상.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무명용사의 유해 1535

국방부가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에 화장되어 안치된 무명용사의 유해 1535구에 일부 적군 유해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현충원 밖으로 내 보내기로 했습니다.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적군을 아군으로 판정했다는 의혹을 국회와 언론이 제기했고, 전직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확인한 결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적군의 유품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거나 아군의 유품을 놓아두어서 아군 유해로 속이는 일은 잘못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방부의 말처럼 적군과 아군의 유해가 섞일 수 있고, 적군의 유해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유해를 다루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전쟁의 고통 속에 숨져간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산골에서 숨진 분들의 유골을 60여 년이 지나서 모시는 과정에서, 이것을 성과로 보고 신원을 조작해서 실적으로 올리려고 한 일은,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나쁜 종류의 일입니다. 군의 요체는 명예에 있다고 여기는 나라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보도자료나 발표하고 끝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장관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해도 용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기는 포위된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도주해버린 일본 헌병 출신의 군단장이 후일 쿠데타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이 되고, 그 일로 빼앗긴 한국의 전시작전권에 대해 죽을 때까지도 환수 반대를 외쳤으니 한국군은 명예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국방부가 1535구의 유해를 쉽사리 들어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화장된 유골함을 옮기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안장된 분들입니다. 이것은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꺼내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과지상주의라는 괴물과 파시즘적 반공주의의 결합

이 사건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일입니다. 60년 만에 햇빛을 본 전사자의 소속을 실적을 위해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발상에는, 성과지상주의라는 괴물이 야기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적군 유해가 몇 구 섞여 있을 수 있으니 1500여구가 넘는 안장된 유해를 일단 모두 현충원 밖으로 들어내자는 발상에는, 돌아가신 분의 인격을 존중하기보다 사자(死者)에게도 사상과 소속을 먼저 따져 묻는 파시즘적 반공주의의 망령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명예 따위 눈앞의 실적과 바꿔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땅에 묻기 전에 소속을 먼저 따져 묻는 비정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현충원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한 국립묘지이기 때문에 아군과 적군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아군만 모셔야 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번에 현충원에서 반출한 유골을 재조사 한다고 해서 이들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입니다. 국방부는 "반출될 유골 1535구에 대해 유전자 감식으로 아군과 적군을 가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시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전하는 이유에 대해서 국방부는 만에 하나라도 적군 유골이 현충원에 안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아군이 적군으로 오인되어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다면, 그 분들의 유해를 60년 만에 발굴하여 더 큰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일은 국방부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관련자를 징계하면 될 일입니다. 일부 적군의 유해가 있을 수 있지만, 증거가 상실된 데다가 이미 화장까지 된 지금 유해를 재조사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의 유해를 현충원 밖으로 재안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것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성과지상주의와 파시즘적 반공주의의 광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산 자들에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죽은 자들까지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형제의 묘역

6월이 되면 간혹 읽게 되는 중학생의 편지가 있습니다. 전쟁 당시 동성중 3학년이었던 학도병 이우근의 옷 속에 있던 편지입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우근 학생은 이 날 전투에서 전사했고, 편지는 부쳐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인민군에서도 어머니의 상추쌈과 고향의 옹달샘을 그리던 어린 군인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유해 발굴의 과정을 보면, 실제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한데 엉켜 싸우다가 포탄에 맞아 한 구덩이에 그대로 나란히 잠들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깊은 골에서 우연히 아군과 적군이 한데 묻혔다면, 그 분들은 살아서의 시간보다 죽어서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셨을 것입니다. 살아서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지만, 이제는 전쟁도 이데올로기도 없는 곳에서 오래 함께 산 늙은 형제처럼 지내고 계셨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소속이 불분명한 유해가 함께 발견되었을 경우, 아군 유해로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현충원에 안장하고, 불분명한 경우에는 '합동전사자 묘역'을 조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형제의 묘역'이라고 이름 붙이면 좋겠습니다.

 

 

 

 

 

 

 

 

TV조선·채널A, 기자들 이탈 심각 129 미디어오늘

 

과로에 인력부족, "시청률과 급여수준 등 최악은 TV조선"“JTBC는 희망이라도 있어 버티는데

“JTBC는 잘될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어서 기자들이 그걸로 버티는데 우리는 희망이 없다.”

 

종합편성채널 출범 4, 안에서 일하는 기자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TV조선과 채널A 기자들의 불만이 가장 높다. MBNTV조선이나 채널A처럼 이탈자가 없지 않다. 반면 JTBC의 경우 올해 지상파로의 이직자가 한 명도 없을만큼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종편사 기자들은 방송에 필요한 인력과 인프라가 모두 부족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업무량이 적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인력이 부족해 기자들이 뉴스나 시사토크를 진행하거나 앵커가 리포트를 제작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종편 출범 당시에는 10시에 메인뉴스가 방송됐기 때문에 11시 퇴근이 일상이었다고 기자들은 전했다.

 

현재 종편4사 가운데 메인뉴스 시간이 가장 늦은 곳은 채널A. 채널A 한 기자는 우리는 메인뉴스 시간이 가장 늦다보니 퇴근도 늦다. 뉴스출연을 시키면 10시 넘어서 퇴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또 채널A는 종편4사 중 보도편성비율이 가장 높고 메인뉴스 리포트가 가장 많다.

TV조선 기자들은 종편4사 가운데 TV조선 노동환경이 열악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달에는 시청률만 꼴지가 아니라 급여 수준, 근무 환경 등 모든 면에서 꼴찌라는 지적. 채널A 기자들마저 그래도 최악은 TV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찌라시가 돌았다. TV조선 기자는 이에 대해 찌라시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취재 중인 TV조선. 사진=이치열 기자

 

기자들은 그렇다고 임금이 높은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종편 중에서 노조가 있는 JTBCMBN는 사측과 임금협상을 한다. 중앙일보-JTBC노조는 2014 2015년 임급협상에서 각각 4% 3%의 성과를 냈다. MBN 또한 올해 총액의 5% 인상이라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노조가 없는 TV조선과 채널A는 노조가 없어 사실상 기자들이 임금협상에 관여하기 어렵다.

 

취재비나 주말 수당, 야근 수당 등의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거세다. TV조선 기자는 특히 TV조선은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자들 야근, 특근, 주말근무가 잦은 반면 수당은 타종편사는 물론이고 조선일보 수당과도 비교가 안된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나온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불만을 가지는 또 다른 노동환경은 공정보도. TV조선과 채널A 내부에는 편향적이고 선정적인 보도에 불만을 가진 기자가 적지 않다. TV조선의 또 다른 기자는 종편 출범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젊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잦아 힘들어한다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실제 법원은 공정보도가 기자들의 노동환경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2012MBC 공정보도 파업과 관련해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방송의 공정성 요구가 정당한 쟁의행위에 해당한다며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근로환경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친 경우 이에 대한 시정요구와 쟁의행위는 정당하다고 밝혔다.

 

JTBC '뉴스룸' 홍보화면. 사진=JTBC 제공

열악한 노동환경은 결국 기자들의 이탈로 이어진다. 올해 TV조선을 떠나 다른 회사로 가거나 기자를 그만둔 사람은 15명 이상이다. 채널A 역시 올해 기자 4명이 JTBC, PD와 기자 각각 1명씩 MBC로 회사를 옮기는 등 상황이 심각하다. 한 채널A 기자는 6일이 대세였다가 최근 이탈자가 늘어나면서 노동 강도 이야기가 나오고 부분적으로 주5일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MBN의 경우 올해 기자 2명과 PD 1명이 MBC로 직장을 옮겼고 YTN으로 직장을 옮긴 기자도 있다. 이에 대해 MBN 노조 지부장은 좋은 조건으로 갔고 종편 출범 당시 워낙 많이 나갔기 때문에 지금의 이탈이 나쁜 분위기라거나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편 출범 당시 기자 이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MBN은 기존 30만대였던 취재비를 105만원까지 올렸다.

 

반면 JTBC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올해 JTBC에서 타종편사는 물론이고 지상파3사로 이직한 기자는 한 명도 없다. 게다가 이탈한 타종편사 기자들은 JTBC로 흡수되고 있다. J꾸준한 인력 보강과 더불어 손석희 사장 체제 이후 보도 측면에서도 회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부 기자들의 평가다.

 

JTBC 김상우 부국장은 이에 대해 노동환경이라고 하면 돈을 많이 주거나 업무시간이 짧다는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기자들은 그런 이유만으로 회사에 남아있거나 옮기지 않는다. JTBC가 타언론사에 비해 돈을 많이 주거나 일이 쉬운 건 절대 아니라며 최근 JTBC에 대한 평가 등이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심하고 딱한 노릇이다. 이탈의 이유가 노동강동와 급여 때문이라니 ... 월급만 많이 주면 개가 되거나 쓰레기 노릇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박근혜, 노인회 초청 "나라 병든 부분 고쳐야" 1215 프레시안

노인회장 "위대한 지도자" 찬양눈물 흘리는 노인도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대한노인회 임원, 노인 관련 사회 단체 임원, 100세 어르신 등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함께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정 교과서 추진의 당위성을 설파하며 "어르신 여러분, 저는 우리나라가 더 크게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어르신들이 이루신 위대한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는 세계가 하나로 글로벌화 했고, 문화와 경제의 벽이 허물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각국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역사관이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후손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국가관을 가질 수 있도록 어르신께서 지혜와 힘을 보태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비정상의 정상화를 기치로 많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고, 아직 우리나라의 병들고 아픈 부분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는데, 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치는 것 역시 역사 교육의 정상화라고 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기존 검인정제 역사 교과서를 통해 가르친 역사관을 '병들고 아픈 부분'에 비유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저는 어르신 여러분은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자랑스럽고 위대한 기록을 남기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역사가 이 시대를 만드신 어르신들에 대해서 꼭 그렇게 기록할 것이라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나 다름없던 조국을 피와 땀으로 재건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고, 그 헌신을 토대로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에 당당히 성장했다. 국가와 후손들을 위해 온몸을 받쳐 헌신해온 어르신들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노인회 등 전국 어르신들과의 오찬을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

 

대한노인회장 "위대한 지도자 되실 것" 찬양눈물 흘리는 노인도

이심 대한노인회장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바쁜 일정에도 우리를 청와대로 초청, 격려의 뜻으로 전국 어르신과의 오찬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린다. 특히 노인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노인 복지 전반에 대해서 세세하게 신경 써 주시는 대통령께 거듭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참석자들을 향해 "동영상 보셨죠?"라고 물은 후 "기후변화협약 기조연설에서 2030년까지 100조 원의 신시장과 50만개 일자리 창출 계획을 밝히셔서 우리나라 경제도약에 강한 의지를 피력하신 데 대해 온 국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드린다"고 했다. 이날 오찬 행사에서는 '든든한 대한민국, 건강한 100세 시대' 동영상이 약 5분간 상영됐다. 동영상 시청 중 일부 노인들은 간간히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시며, 역사 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대통령님을 직접 나서서 도와드리지 못해 안타깝지만, 우리처럼 많은 국민이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을 위한 대통령님의 행보에 마음 속으로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참석자들은 대통령께서 선진국과 도약을 이루어 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실 것으로 굳게 믿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시는 대통령님 곁에 언제나 머무르고, 국가시책에 적극 동참, 굳은 의지가 있다는 것을 재삼 말씀드린다. 대통령님 힘내세요"라며 말을 맺었다.

 

농민이 사라진 중국, 그 미래가 무섭다 1215 프레시안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탈농업 사회와 중국 정치

중국은 근대화가 시작될 무렵까지 농경 사회였다. 그것도 상업농이 아닌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가 주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농사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 활동 그 자체였다. 농사에 실패하면 다음해에는 농노가 되거나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는 절실한 문제였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봄에 모내기를 조금 이르게 하거나 늦게 하면 쌀의 상태가 나빠지고 수확량도 확연히 줄어든다. 비단 쌀뿐만이 아니라 모든 농작물이 파종이나 수확 시기를 못 맞추면 생산량이 줄거나 열매의 상태도 나빠지게 된다. 살기 위해서는 천지자연의 질서를 반드시 이해하고, 그 변화에 맞추어 생활해야만 한다. 그러니 때를 아는 것 다시 말해 하늘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바로 생존의 지혜였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천륜이며 인륜이었다.

 

농경 문화에서 비롯된 오래된 정치 문화

한 집안에서 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농사 경험이 가장 많은 아버지 아니겠는가. 아침 일찍, 자는 아들을 깨워 논으로 밭으로 가서 이것저것 시키며 한해 농사를 이끌어 가는 아버지는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만 아니라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별 문제없이 내년을 보낼 수 있는 식량을 수확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나이 때 했던 일과 나의 아들이 내 나이가 되면 할 일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지식은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형제 중에서 한번이라도 농사를 더 지어본 맏형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권위를 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선조들의 효성이 지극한 이유는 그들의 본성이 우리보다 특별히 착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버지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의 농경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와 자식이라는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이를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되고, 나아가 이미 가족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망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그 관계망의 총체인 인간 세계가 질서 있게 운행되도록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천지의 조화로운 운행과 합치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향한 효()는 아무런 의심 없이 군왕에 대한 충()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는데 지장이 없듯이 하늘의 덕을 깨우친 군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 세상은 질서정연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는 이러한 농경 사회의 삶이 체계화된 것이다.

농민은 항상 피동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도 없었으며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농민이 관심을 받게 되는 때는 농민 봉기가 발생했을 때인데, 그때에도 대부분은 주도 세력이 관료이거나 이민족이었다. 서한(西漢)의 유방(劉邦)이나 명()의 주원장(朱元璋) 등이 하층민의 농민 봉기가 성공한 예이긴 하지만 그들은 다시 황제가 되었을 뿐 농민의 보호자가 되지는 않았다. 농민들은 다시 효심 가득한 충성스런 백성이 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오쩌둥과 신중국 세운 혁명의 주체, 농민

그러다 새로운 농민의 대변자가 등장했다.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그의 첫 번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호남 농민 운동 조사 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1927)에서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농민 봉기를 훌륭하기 그지없는 혁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농민 혁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마오쩌둥은 끝까지 농민 주도의 혁명을 밀고나가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농민은 인민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노동자, 농민, 민족 자본가, 도시 소자산가 등 네 계급을 인민이라 칭했다. 중국의 국기에 그려져 있는 5개의 별은 왼쪽 위에 그려진 큰 별은 공산당이고 나머지 네 개는 인민을 뜻하는 것이다. 농민은 네 개의 별 중에 두 번째 별로서 사회주의 국가의 어엿한 인민이 되었다.

 

건국 직후인 1950, 중국의 농촌인구는 거의 5억 명에 달했고 도시 인구는 6000만 명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이 절대다수의 농민에게 인민이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마오쩌둥은 충성스런 백성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은 절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주도적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헌법 제1조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고, 노동자·농민 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 민주 국가이다"라고 되어 있듯이 농민은 다시 하위 계급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불편할 것은 없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효도하듯이 나라님에게 충성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농업 국가에 변화가 찾아왔다. 개혁 개방이 실시된 것이다. 개혁 개방 후 30여 년 만인 2011년에 드디어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보다 많아졌다. 이제 아버지가 했던 일과 내가 하는 일이 달라졌고, 또 내가 하는 일과 아들이 하는 일도 달라지게 됐다. 효의 의미가 달라졌다. 그저 나이가 많다고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렵 또는 유목 사회처럼 경험과 연륜보다는 사냥하거나 가축을 모는 실질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게 됐다. 그래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경험과 지혜를 조금이라도 더 전수받기 위해 그들을 받들어 모시던 농경 시대로부터 나날이 변해가는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농민 사라진 중국 정치의 미래

게다가 2014년 한 해에만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른바 농민공(農民工)의 수가 27000만 명이 넘는다.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이 늘어난 것이다. 그들은 낯선 대도시의 외곽에 동향촌(同鄕村)을 이루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다. 농민공들은 일정액의 관리비를 내고, 동향 조직은 고향 사람들의 안전과 이익을 음성적으로 책임진다. 이러한 거점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정기적으로 대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중국의 농민이 마치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유목사회(neo-nomadism)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가치관이 무너지면 효의 의미가 변하고, 효를 근본으로 해서 파생된 사회 관계가 변하면 종국적으로 충의 의미도 변할 것이다. 단순히 군왕이기 때문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잘 살게 해주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따르고자 할 것이다.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원할 것이고,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막 변화의 진입로에 들어선 중국에서 당장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지도층과 기성세대들은 과거의 문화에서 살았고 교육받았으므로 스스로 변화의 선두에 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농경 문화가 중국의 주류 문화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농사가 중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활동이 아니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므로 역사적 경험에서 앞으로 벌이질 일의 단초를 찾기도 어렵다. 유목 문화가 중국의 농경 문화에 동화된 적은 있어도 중국이 농경 문화를 버린 적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의 농경 문화에 동화되어 '마오쩌둥주의'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중국은 진정한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 것이다. 90여 년 전 5.4 운동, 50년 전 문화 대혁명, 20여 년 전 문화열(文化熱) 등의 바람이 불었을 때도 농경 사회라는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제 구조가 변하고 있다. 중국의 백성들이 진정한 인민이 될지 아니면 시민이 될지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권력이 그들을 여전히 백성으로 묶어두고자 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8800만의 특권층, 중국은 신분제 사회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중국 공산당 정치 문화는 유교 정치 3.0

예로부터 가장 훌륭한 정치는 덕치(德治)라고 전해져 왔다. 일반적으로 도덕성을 갖춘 지도자가 국민을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전통적인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유가에서 말하는 덕()의 본래 의미는 "우주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며 운행하게 하는 근본"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근본 에너지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존재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튼 덕치를 한다는 것은 그저 도덕성을 갖춘 자가 통치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천지자연이 운행하는 근본 원리를 깨달은 지도자가 그 섭리에 따라 통치하라는 뜻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편에서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는 말을 한 것처럼, 덕은 천지자연의 모든 사물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사물들에 주어져 있는 덕을 유가에서는 성()이라 부른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우주가 운행하는 이치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성찰을 절실하게 하면 하늘의 덕을 터득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성리학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웠던 도덕(道德)이라는 것도 그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를 행하는 길을 배운다는 원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유교 문화의 인간관 : 인간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차등

그런데 문제는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누가 확인해 주느냐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지도자가 되어 덕치를 행한다는데 그 지도자가 깨달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누군가 깨달았다면 나는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혹은 제대로 깨달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려면 나도 깨닫는 수밖에 없다. 그럼 둘 다 똑같이 깨달았는데 무슨 근거로 나를 통치하는가?

 

이 문제를 기가 막히게 해결한 사람이 한나라 때의 동중서(童仲舒, BC 179~104)였다. 그는 성삼품(性三品) 설을 주장했는데, 말 그대로 인간의 성품을 상--하 세 종류로 나눠서 차등을 둔 것이다. 날 때부터 하늘의 덕을 깨달은 사람이 상품이고, 깨달을 자질을 갖춘 사람이 중품, 그리고 깨달을 기미가 안 보이는 사람을 하품이라 했다.

그래서 천자는 상품이고, 사대부들이 노력해서 깨달음에 가까워지면 군자라는 칭호와 함께 중품이 된다. 그리고 백성들은 하품인 것이다. 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도 완전히 어진() 사람, 인함이 약간 부족한 사람 그리고 인하지 못한 사람 등으로 나누었고,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朱子)도 사람의 기질에 국한하여 설명하기는 하지만 성삼품설을 차용했다.

 

성삼품설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참 편리한 이론이기는 하다. 누군가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는 순간 그는 하늘의 덕을 온전히 깨닫고 있다고 인정된다. 중품들은 그가 어떤 천명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천명을 받은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품 자신도 하늘의 덕을 깨달았다면 대업을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무조건 그들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따르면 된다.

 

이렇듯 유교 문화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삼품이라는 차등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상품은 최고 권력자 1인의 절대적 권위에만 해당되고, 세상은 중품과 하품의 두 부류 인간으로 나뉠 뿐이다. 이 두 부류의 인간을 맹자는 정신적인 일을 하는 노심자(勞心者)와 육체적인 일을 하는 노력자(勞力者)로 구분하여 사대부와 백성의 역할을 명확히 했었다. 사대부가 바로 천자가 덕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보좌하는 노심자인 것이다.

<예기(禮記)>"()는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고, ()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대부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군자이므로 예의범절을 통해서 위계질서를 유지하지만, 백성은 깨달음의 가능성이 없는 하품이므로 형벌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사대부는 유가 사상의 담지자이자 전파자이며, 백성을 사랑하고 이끄는 지도자이며, 국가 정책의 집행자임을 자처했다. 그와 더불어 심각한 죄를 짓지 않는 한 형벌을 피해갈 수 있는 특권적 계층이기도 했다.

 

8800만의 공산당, 정당이라기보다 계층

송대 이후에 사대부의 명칭은 신사(紳士)로 변하지만 그들의 역할과 특권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역할과 특권을 공산당이 계승했다. 중국의 공산당원은 현재 8800만 명에 이른다. 이 정도 숫자면 정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계층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의 전파자이며, 인민의 선봉대이며, 국가 정책의 집행자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역할은 유교 사회의 사대부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작년 말부터 시진핑 당 총서기는 '4개 전면(四個全面)' 전략을 제창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안정된 사회, 개혁의 심화, 법에 의한 치국(治國), 엄격한 치당(治黨) 등을 전면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다. 당초에는 엄격한 당 관리가 빠진 '3개 전면'이었으나 부패 척결이 본격화되면서 당 기율강화 부분이 첨가되어 4개 전면이 되었다.

아마도 '4개 전면'은 앞으로 정교화(elaboration) 과정을 거쳐서 그의 집권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에 이어 시진핑이 받은 새로운 천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4개 전면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법에 의한 치국''엄격한 치당'이다. 나라는 법으로 다스린다는데 당은 그저 엄격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마치 "예는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옛말의 사회주의 버전 같다. 중국사회는 여전히 절대권위의 최고 권력자, 공산당원 그리고 인민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성삼품의 사회처럼 보인다

 

중국 '꽌시'의 비밀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닫힌 광장과 '꽌시' 문화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꽌시'라는 말을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관계(關係)의 중국 발음인 꽌시의 원래 의미는 지극히 사적인 인간관계를 뜻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정치에 있어서도 강력한 응집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이 서양인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인맥'이나 ''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간인(間人)주의' 또는 '아이다가라(間柄)'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시아 3국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인 듯하다. 그런데 유독 중국의 꽌시 문화가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그건 실제로도 꽌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어서 생기는 과장된 상상력 때문이기도 하다.

 

농경 사회를 지탱하던 유교 문화를 모태로 하는 꽌시 문화

꽌시 문화의 모태는 농경 사회를 지탱하던 유교 문화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직업에 맞춰 거주지를 옮겨 다니지만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다. 농사짓는 사람이 삶의 터전인 땅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일생을 관계있는 사람들과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관계있는 사람들 간에 서열을 정하고, 그에 맞는 예절과 의무를 행하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었다.

유가의 가르침에는 관계없는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실 농경 사회에서는 관계없는 사람과 대면할 일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대면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면 되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지금 세대도 여전히 관계없는 사람과 대면하는 것은 불편하며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 문화가 추구하는 질서는 사실 단순하다. 부자자효(父慈子孝)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도한다"는 정신에서 출발하여 "아랫사람은 충성하고, 윗사람은 은혜를 베푼다"는 상하관계로 확장하면 된다. 엄격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에서 결정은 윗사람이 내리고, 아랫사람은 복종하면 되는 것이다. 공자가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말라"고 했으니 백성들은 나랏일에 대한 의견을 가져본 적도 없고 또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충성을 다하며 윗사람의 은혜를 기다릴 뿐이었다.

근대화는 이러한 문화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의 아고라와 로마의 포럼 같은 광장 문화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단언했었다. 이 문장에서 인간은 총체적인 인간이 아니고 각각의 개인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세계를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의견을 발표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법률과 규칙을 만들고, 법규에 순응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창출하며 도덕적, 윤리적 행위 규범을 세운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개인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천부의 권리를 갖고 광장에 모여 저마다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니. 당시 동양의 지식인과 선각자들은 어서 빨리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 일본은 의원 내각제,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했다.

 

그러나 가끔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에서 조선시대의 붕당 정치를 떠올리고, 일본의 의원 내각제에서 막부 시대의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를 연상하고,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은 중국의 최고 권력자에게서 황제의 절대 권위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아마도 제도는 받아들였지만 제도 안에서는 여전히 유교 문화가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와 일본은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어서 '광장'은 열려 있는 셈이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체득하기만 하면 '광장'은 활력을 얻을 것이다.

 

닫힌 '광장'에서 더 활력을 얻는 '꽌시'

중국은 문제가 좀 다르다. 국가의 탄생을 이끌었던 공산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광장'을 닫아 버렸다. 중국의 인민은 국가주석을 선출할 권리가 없으며, 국가주석을 선출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를 선출할 권리도 없다. 또 국가주석보다 더 권력자로서 의미를 갖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선출은 공산당 내부의 일이므로 인민들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조차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을 창출하고, 법과 규범을 세우는 과정에서 인민이 할 수 있는 것 없어져 버렸다. 중국의 인민들은 밀폐된 당원들만의 광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으며 알고 싶어 하지도 안았다. 인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으므로 그 정사를 논하지 않는 농경 사회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 백성들에게 당의 결정을 충실히 따르는 복종의 미덕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꽌시 문화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건국 초기에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간부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에게 개인적 충성을 바치고 사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백성의 전략이었다. 계층의 이익 혹은 계급적 이익 같은 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고, 어떻게 하면 권력자와 사적인 인간관계를 맺어서 특권적 은혜를 입느냐가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꽌시 문화는 그렇게 유교 문화와 공산당 일당 체제가 결합하여 탄생했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이후에 꽌시는 더욱 중요해 졌다. 꽌시를 통해 얻는 특권적 은혜가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막대한 부를 갖다 주기 때문이다. 또 은혜에 대한 보답도 그만큼 커졌다. 이런 이유에서 부패는 현재 중국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시진핑 주석이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보일 뿐 진정한 성과를 얻는 것 같지는 않다.중국의 인민들에게 광장이 개방되지 않는 한 꽌시 문화는 계속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권력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중국의 백성들에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아는가?"보다 "누구를 아는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여섯 번째 실패 1215경향

문재인·안철수 간, 주류·비주류 간 일련의 갈등 과정에서 어느 한쪽만 잘못하거나 잘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균형을 맞추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계기든 제각각 자기 몫의 실책과 실수를 했다. 그래서 지금 누구를 비판해도 맞는 말을 한다고 박수받을 수 있다. 이게 야당 분열의 비극이다. 만일 누구 한 명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다면 야당 문제는 해결 가능한 문제다. 오늘은 안철수 이야기를 해보자.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하는 야당 조직의 한계와 같은 문제는 관두고 안철수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잘못은 문재인의 잘못과 책임에 가려져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안철수는 지난 대선 때 그가 말한 것처럼 후보를 양보한 게 아니었다. 후보 자리를 문재인에게 내던지고 돌아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진정어린 양보일 필요는 없다. 문재인을 돕는 게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 필요하다는 약간의 정치이성을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양보했는데 왜 정권교체를 못했느냐고 묻고 싶다면 자신에게도 해봐야 한다. 그는 이렇게 첫 실패를 경험했다.

     

늘 야당의 통합과 정권교체를 위한 선택을 해왔습니다라는 주장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대선 패배 후 신당을 추진하던 그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깨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신당을 포기하고 거대 정당과 통합해 당대표가 되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스스로 기득권의 핵심이 된 것이다. 두 번째 실패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 위치와 판단이 바뀌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새 정치의 모호성이다. 간혹 그 모호성을 벗고 얼굴을 내민 경우가 있지만, 기초단체장 무공천처럼 새 정치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걸 합당 정신으로까지 격상, 불가침 선언을 했지만 당내 여론에 밀려 또 포기해야 했다. 세 번째 실패다. 당을 혁신한다고 비전위원회를 구성하고도 아무것도 못한 점은 네 번째 실패로 꼽을 만하다. 결국 정권교체의 전망도, 혁신도 없이 당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섯 번째 실패다.

 

이 정도면 다음 당대표가 자신만큼 못한다 해서 당대표를 비난하는 건 비양심적이다. 그런데 안철수는 후임 당대표가 혁신에 실패하고 정권교체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집중 공격했다. 말인즉 다 옳지만 그는 그 실망스러운 현실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였다. 문재인의 혁신위원장, 인재영입위원장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혁신의 기회를 차버린 건 그 자신이었다. 자기는 실천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일로 남을 공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문재인과 리더십 경쟁을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면 그건 문재인의 문제가 아니라 안철수의 문제다.

 

정말 혁신이 그의 최우선 관심사였다면 문재인과 한편이 되어야 했다. 물론 혁신을 위해 두 사람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건 정치 경륜이 부족한 둘 모두에게 어려운 게임이다. 안철수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문재인과 선명하게 대립하는 단순 구도 쪽이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혁신의 차이가 대결을 초래했다기보다 불편한 대립 관계가 차이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안철수가 새 지도부 구성 방법의 차이로 문재인과 불화했다기보다 그들의 불화가 그 차이를 필요로 했다고 봐야 한다.

원내대표 경선 때 합의추대를 주장한 안철수의 논리대로라면 문·안 둘 중 하나를 탈락시키는 당대표 경선 대신 문·안 공동 지도체제를 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안철수는 자기 일관성을 잃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딱 한 사람, 문재인 때문일 것이다. 전당대회는 새 지도부를 구성하는 여러 방법 중 더 나은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전대가 정권교체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탈당과 분당같이 야당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기초 무공천에 부여했던 것만큼이나 전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탈당했다. 여섯 번째 실패다.

 

정계 입문 3년의 짧은 기간, 중요한 국면에 야당의 정점, 한국 정치의 한가운데서 그는 너무나 중요한 결정을 해왔다. 대선출마와 사퇴, 신당, 합당, 당대표 선출과 사퇴, 탈당과 신당 재추진은 웬만한 정치 경륜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행착오를 되새기는 조용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만 그는 벌써 전국을 돌고 있다. 좋다. 박근혜 정권이 증명하듯 권력은 스스로 정당화하는 힘이 있다. 그가 총선에서 문재인 야당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면 여섯 번의 실패는 성공의 길로 재포장되고,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은 찬사로 바뀔 것이다. 대신 그때까지는 실패와 분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요즘 해방감을 맛보는 표정을 하고 있다. 문재인 없는 정치의 행복일까? 이 땅에는 문재인만 살고 있지 않다. -이대근 경향논설실장

 

한국·중국 대기오염 최악1215한겨레

 

미국 항공우주국(NASA)15일 공개한 2014년 이산화질소 집중도를 표시한 위성지도에서 한국이 중국 동부와 함께 빨갛게 물들었다. 자극성의 냄새가 나는 갈색의 유해한 기체인 이산화질소는 자동차 배기, 발전소, 공장 굴뚝 등에서 배출되는 오염 물질로, 나사는 2005~2014195개 도시의 이산화질소 농도를 추적해왔다. 서울의 2014년 평균 이산화질소 농도는 상하이와 함께 세계 5위에 올랐다. 공기 질이 서울보다 나쁜 도시는 베이징과 광저우, 도쿄, 로스앤젤레스로 나타났다. 나사

 

미국 항공우주국(NASA)15일 공개한 2014년 이산화질소 집중도를 표시한 위성지도에서 한국이 중국 동부와 함께 빨갛게 물들었다. 자극성의 냄새가 나는 갈색의 유해한 기체인 이산화질소는 자동차 배기, 발전소, 공장 굴뚝 등에서 배출되는 오염 물질로, 나사는 2005~2014195개 도시의 이산화질소 농도를 추적해왔다. 서울의 2014년 평균 이산화질소 농도는 상하이와 함께 세계 5위에 올랐다. 공기 질이 서울보다 나쁜 도시는 베이징과 광저우, 도쿄, 로스앤젤레스로 나타났다

 

"사진 속 90%와 관계" 여배우, AV 송년 단체샷 공개 1211 파인낸셜 뉴스

 

일본 AV배우 하스미 쿠레아가 남배우들 송년회 사진을 공개했다. © News1star/하스미 쿠레아

 

 

정의화는 제2의 유승민일까 김무성일까 1217미디어오늘

청와대·새누리당 전방위 압박에 존재감 부각새누리당에서도 찍힐라 고립무원, 대권 거론도

정의화 국회의장과 청와대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정 의장이 박근혜 대통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모양새가 되면서 정 의장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현상도 나오고 있다.

 

최악의 경우 입법부 수장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처럼 청와대 찍어누르기의 희생양이 되거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처럼 박 대통령에 납짝 엎드리면서 식물 국회의장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만큼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정의화 국회의장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현기환 정무수석을 보내 정부 추진 핵심 법안인 노동개악법과 테러방지법 등을 직권상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정의화 국회의장은 직권상정 불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정부 추진 법안을 처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밥그릇 싸움이라고 한 현기환 수석의 발언을 놓고 정 의장이 아주 저속하고 합당하지 않다고 비난한 것은 청와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정 의장은 또한 "초법적 발상으로 하면 오히려 나라에 혼란을 가져오고 경제를 나쁘게 할 수 있는 반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비상상태' 속 법안을 직권상정해야 한다는 청와대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사실상 입법부 수장과 대통령이 으르렁거리면 싸우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정의화 의장은 자기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뜻과 반하는 사람을 진실되지 못한 사람’, ‘배신의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다. 대표적으로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두고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 지목하면서 원내대표 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새누리당도 정 의장을 비난하면서 화력을 집중해 퍼붓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을 찍어누르면 노동개악법 등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하는 모습이다. 친박 대표주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은 17일 회의에서 "정 의장이 어제 기자간담회를 통해 우리나라는 경제 위기가 아니다고 한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는 노동개악 등 쟁점 법안의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정의화 의장에게 전달했다. 입법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집권 여당이 입법부의 수장을 압박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정 의장의 생각은 정 의장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법안 처리)의지는 충분히 알겠지만 이 문제는 이렇게 풀 문제가 아니다. 이게 바로 정치 실종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정병국 의원)이라며 정 의장을 두둔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청와대가 국회의장까지 찍어누를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정 의장 편에 설 경우 자칫 타깃이 옮겨붙을 수 있고 내년 총선의 공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누리당 안에서 정 의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정 의장이 고립무원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만 존재감 만큼은 어느 대선주자들보다도 부각되는 모습이다.

 

국회를 무시하고 대중에 호소하는 식의 국정운영을 해왔던 박근혜 대통령과 입법부 수장으로 의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정의화 국회의장은 갈등은 어느 정도 예고됐다.

 

지난 6월에도 정의화 의장은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여야가 합의했던 국회법 개정안의 문구를 일일히 설명해 반박하면서 "어느 정도 법안의 강제성을 입법부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 취지에 벗어난 행정 입법은 당연히 국회에서 논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눈에는 국회의장이 원칙을 고수하며 야당보다도 강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 의장이 어느 누구보다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국회의장을 유승민 전 원내대표처럼 찍어누르는 것은 부담이 크다. 우선 국회의장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 표로 선출된 자리이다. 지난 2014년 정의화 의장은 국회의장 후보자 선출 투표에서 새누리당 의원 147표 중 101표를 얻어 현재 황우여 사회부총리를 누른 뒤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를 통해 과반 찬성을 얻어 의장으로 선출됐다.

 

국회의장은 헌법기관장이며 대한민국 공식 국가 의전서열 2위의 자리다. 아무리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 수장에 불만이 많다고 하더라도 실제 국회의장을 해임시키기 위한 절차에 돌입하면 강력한 역풍이 불 수 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 국회의장 해임결의안 얘기가 나오지만 압박을 위한 정치 공세 성격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공천권이다. 정의화 의장은 국회법에 따라 현재 새누리당이 아닌 무소속 신분이다. 정 의장은 지난 9월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 출마 뜻을 밝힌 바 있다. 무소속 정 의장이 돌아갈 곳은 새누리당이라는 애기다.

 

정 의장의 지역구는 부산 중·동이다. 지난 199615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내리 5선을 지냈다. 일각에선 부산 지역구에서 친박 주자를 내세우면서 현직 의원들과의 공천 대결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회의장 퇴임 뒤 '정치인'으로 돌아오면 정 의장도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정 의장이 소신 행보를 걷고 있지만 향후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고려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처럼 결국 박근혜 대통령 코드에 맞추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정의화 국회의장. 노컷뉴스

 

다만, 정 의장이 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선 모습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대선주자로 떠오르면서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탓을 하는 분열의 정치를 했다면 정 의장은 국회 안에서 합리적 조정자라는 이미지를 보여줬다. 대통령과 차별성으로 보면 표 확장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개혁 진보 진영 내에서도 정 의장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말이 통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

 

정 의장이 평소 북한 인도적 사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도 대권 행보를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 의장은 지난달 15CNB 저널과 인터뷰에서 "제 소원은 반신불수의 한반도를 온전하게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통일’”이라며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정권과 동포들을 구분해야 하며,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남북 간 정세와 상관없이 어떠한 경우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해왔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에는 독일을 방문해 현지 법인 재단 인사를 만나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을 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지난 7월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서도 남북 국회의장 회담을 열자고 공식 제안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정 의장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기조를 유지할 것이다. 청와대가 국회의장을 압박하는 것도 박정희 정권 이래 처음이지만 이렇게 맞받아치는 모습도 이례적이다. 앞으로 정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선을 거쳐 당선되면 그 이상의 행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 평론가는 "문제는 과연 여당 내에서 이런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다. 친박이 당을 장악하고 주도하는 가운데 공천 자체부터도 그렇고 대선 가도에서 내부 갈등을 어떻게 풀지가 관건"이라며 "어떻게 보면 청와대가 유승민을 찍어누르면서 정치력을 키워줬던 것처럼 현재 정 의장도 청와대가 키워주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미군, 한국서 16차례 탄저균 실험올해 처음 주장 거짓1217국민

 

주한미군이 그동안 서울 용산기지에서 탄저균 실험을 15차례나 실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이에 따라 탄저균 실험이 올해 오산기지에서 처음 진행됐다는 주한미군의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됐다.또 지난 4월 사균화된 탄저균 샘플(표본)이 한국에 반입됐을 때 페스트균 검사용 표본이 함께 들어온 사실도 처음 공개됐다.

 

주한미군 오산기지 탄저균 배달 사고와 관련해 한미 공동으로 구성된 '한미 합동실무단'17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오산기지 탄저균 실험실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합동실무단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지난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용산기지에서 모두 15차례의 사균화된 탄저균 검사용 표본을 반입해 분석하고 식별장비의 성능을 시험했으며 교육훈련도 진행했다.

 

이들 실험은 용산기지 내의 한 병원에서 이뤄졌으나 현재 이 병원은 없어졌다. 합동실무단은 15차례 실험에 사용된 탄저균의 양은 군사기밀로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과거 주한미군에서 실험이 이뤄진 사실은 미측이 제출한 실험 관련 자료에서 확인됐다.미국 메릴랜드주 에지우드화생연구소에서 발송된 탄저균 표본(1)이 지난 429일 오산기지에 반입돼 실험된 것까지 합하면 한국에서 이뤄진 탄저균 실험은 모두 16차례다. 앞서 주한미군사령부는 529일 보도자료를 통해 탄저균 표본 실험 훈련은 올해 오산기지에서 처음 진행됐으며 독극물과 병원균 식별 능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에지우드화생연구소가 424일 사균화된 탄저균을 오산기지로 발송하면서 페스트균 표본(1)을 함께 보낸 사실도 드러났다. 페스트균이 반입된 것은 이번 합동실무단의 조사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주한미군은 그간 페스트균 표본 반입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합동실무단의 장경수 한국측 단장은 "반입할 때 포장 용기내에 사균화된 탄저균 및 페스트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첨부 서류가 동봉됐다"면서 "주한미군에 들어오는 것은 검사를 생략하고 통과됐다"고 밝혔다.그는 "주한미군의 생물학 탐지·식별·분석체계인 쥬피터(JUPITR) 프로그램의 목적과 반입 때 첨부한 서류, 관련 인원 진술 등을 종합한 결과 주한미군은 활성화된 탄저균 및 페스트균을 반입할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합동실무단 조사활동에 참관한 고려대 미생물학교실 송기준 교수는 "인체 위해성이 될만한 사항은 하나도 없었다. 탄저균 포자는 실험실에서 감염되기 어렵다"면서 "일반 탄저균 포자는 엉키기 때문에 공기 중에 떠서 감염을 일으키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장 단장도 "지난 86일 오산기지 현장 기술평가 때 해당 검사실에서 표면검체 2, 공기검체 3개 등 5개 검체를 채취해 유전자 및 배양 정밀검사를 실시했으나 탄저균 및 페스트균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520일과 26일 오산기지 실험에 노출된 미 육군 10, 공군 5, 군무원 7명 등 미국인 22명은 60일간 증상 모니터링을 한 결과 어떤 감염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장 단장은 전했다.그는 "주한미군은 샘플의 반입, 취급 및 처리 과정에서 관련 규정과 절차를 준수했고 안전하게 제독 및 폐기한 것으로 평가한다"면서 "유사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해 주한미군이 반입하는 검사용 샘플에 대한 양국간 통보 및 관리 절차 정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미는 이날 열린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합동위원회에 주한미군 생물학 검사용 샘플의 반입 절차를 문서화한 합의권고안을 제출했다. 이 합의권고안은 주한미군이 검사용 샘플을 반입할 때 우리 정부에 발송·수신기관, 샘플 종류, 용도, , 운송방법 등을 통보하고, 어느 쪽이 요청하면 빠른 시일내 공동평가에 착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세청이 물품 검사를 희망하면 주한미군 관세조사국과 협조해 합동검사를 할 수 있는 내용도 반영했다.국방부 관계자는 "합의권고안은 외교부 북미국장과 주한미군 부사령관이 서명하면 효력을 발생하게 되고 SOFA 부속문서로서 효력도 갖는다"고 설명했다.

 

 

416일에 가라앉은 진실 1214 시사인

지난 11월 세월호 사고 책임자들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급변침에 따른 전복 사고라는 정부와 검찰의 일관된 논리를 깨뜨렸다. 유병언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세월호의 무수한 의혹은 여전히 침몰해 있다.

잔인한 날들이었다. 126, 세월호 참사가 600일을 맞았다. 304명이 목숨을 잃었건만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것이 없다. 왜 사고가 났는지, 왜 구조를 안 했는지, 왜 인양을 안 했는지, 왜 유병언만 잡으려 했는지,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7시간만 이야기하면 가두려 하는지, 왜 정부는 진실 규명을 막는지, 사고 원인을 묻는 것이 왜 경제를 죽이는 일인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왜 정권을 비판하는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재판이 거듭될수록 진실은 계속 침몰하고만 있다. 지난 11월 세월호 사고 책임자들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선장이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승객을 익사시킨 행위와 다름없다는 판단이었다. 퇴선 방송 지시를 하지 않은 것이 살인 행위와 동등하게 평가된 것이다. 이번 판결은 구조 조치또는 구조의무 위반이 쟁점이 된 사안에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이준석의 살인죄에 가려졌지만 이날 매우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사고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2014417. 사고 다음 날 해경은 무리한 변침을 사고의 원인으로 잠정 결론내렸다라고 밝혔다. 416일 오후부터 이준석 선장을 목포 해경 직원의 아파트에서 조사한 결과였다. 그날 아파트 현관 CCTV 영상 기록은 2시간가량 삭제됐다. 검경은 삭제 원인을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합동수사본부를 꾸려 수사에 나섰다. 이번에도 무리한 변침이 사고 원인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준석 선장은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타기를 너무 많이 써서 급선회하다 보니 배가 원심력에 의해 급격히 경사진 상태에서 차량이나 화물의 고박장치가 터지면서(풀리면서) 좌현으로 급격히 이동해 침몰사고가 난 것으로 생각한다.” 201410월 대검찰청도 사고 원인을 도출했다. ‘세월호가 불법 개조로 기준보다 무거웠고, 화물이 1000t 이상 과적된 상태였다. 선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미숙한 조타수가 무리하게 변침을 하다가 배가 기울면서 제대로 묶여 있지 않았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려 배가 침몰했다.’ 201412월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이 세월호 특별조사 보고서에서 내놓은 결과도 비슷했다. “세월호가 증축된 이후 복원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과적했고, 화물을 적절하게 고정하지 않아 조타수의 부적절한 조타에 따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복원력이 상실된 뒤 계속된 침수로 전복됐다.”

 

 

시사IN 조남진 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2014416일 오전 9시경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600일이 지났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이에 따라 검찰은 3등 항해사와 조타수를 업무상 과실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조타수가 큰 각도로 변침한 것이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이라고 볼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급변침에 따른 전복 사고라는 정부와 검찰의 일관된논리가 깨진 것이다.

 

세월호 증축이 사고 원인이라는 논리도 빈약해졌다. 검찰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세월호 증축을 지시해 복원력을 떨어뜨린 게 사고 원인을 제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세월호 증·개축 자체는 위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더구나 세월호 증·개축 허가의 주체는 정부였다. 또 검찰은 유병언 전 회장이 선령 25년을 초과하는 오하마나호를 매각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세월호가 복원성 문제가 있는 상태로 운항하다 사고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 견해가 지나친 비약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적에 대한 책임을 유병언 전 회장에게 지울 수 없다는 얘기다. ‘---유병언으로 정리해 나가던 정부의 세월호 공식은 이제 법적으로 시효를 다한 셈이다.

 

검찰 조사와 재판을 통해, 사고 직전 급변침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급변침 직전 위성통신시스템(AIS) 항적 기록이 누락되거나 지워진 것에 대한 의문도 해소되지 않았다. 더구나 충돌 등 제3의 요인이 없다면 정상적인 선박에서 조타기 사용만으로는 전복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학계에서는 정설처럼 여겨진다. 여기에 사고 시각인 오전 848분보다 이른 시각에 배가 기울거나 사고 징후를 보였다는 의견도 무수히 존재한다.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김지영 감독은 세월호가 사고 나기 전까지 계속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꿨고, 막판에는 배를 왼쪽으로 크게 틀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급변침했다. 의도적이지 않고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라고 말했다.

 

최종 책임자자임한 대통령은 어디에 있나

법원의 판결로 인해, 세월호의 사고 원인과 무수한 의혹들이 여전히 침몰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직도 사고가 난 건지, 사고를 낸 건지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사고 원인은 조속하고 완전한 선체 인양 후에야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월호 인양 후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20145,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 그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600일 동안 박근혜 정부는 박 대통령의 말과는 반대 방향으로만 항해하고 있다. 201411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조위가 꾸려졌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의 노골적인 반대에 가로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26~28쪽 관련 기사 참조).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자매, 아이들이 도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 몰라서 더 비참하다고 한다. 진실을 몰라서 더 고통스럽다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도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다. 슬퍼하는 것조차 막는 600일이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1222 주간경향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각오는 했지만, 정부와 여당의 방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난 1년은 그에게 고난의 1년이었지만 단련의 1년이기도 하다. 청문회를 나흘 앞둔 1210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서 이 위원장을 만났다.시간과 망각은 대개 정비례한다. 2014416일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를 보여준다. 슬픔과 분노만으로 차고 넘치던 시간이 지나자 망각이 만들어낸 빈틈으로 다른 말들이 들러붙었다. 세금도둑, 피로도, 특조위 해체.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이 불편한 사람들은 망각의 힘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시간과 망각의 비례성보다 시간과 진실의 함수관계를 믿는 편이다. 이건 그의 경험칙이다. 그가 맡았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시간이 흐르며 그 진실이 드러났다. 그가 앞장섰던 호주제 폐지 운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이 자리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나 무거운 자리다.” 진실을 밝혀내는 일의 시작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안 보이던 힘들이 보태졌다. “시간이 지나면 초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예상치도 못했던 분들의 도움을 받고 사회 여론의 지지도 받게 된다. 결국 진실은 드러나더라.”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건 진실의 숙명이다. “진실이 쉽게 드러난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안도를 하지만 그렇게 갈 때까지 너무나 많은 변수들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이런 괴로움과 고뇌는 숙명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치 않는다.”

 

 

/이상훈 선임기자

 

우리가 지쳐 쓰러지면 안 된다

특별조사위원장으로 일했던 지난 1년 동안 그는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서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 위원장 자리를 맡으면서 각오는 했지만 시행령, 예산, 특조위원 사퇴 등 정부와 여당의 방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경험에 비추어 조심스럽게 낙관한다. 지난 1년은 고난의 1년이었지만 단련의 1년이기도 하다. “1년 동안 단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이 도움이 된 면들이 있다. 어려움을 달게 받아서 해나가야지 우리가 지쳐서 쓰러지면 안 된다.” 청문회를 나흘 앞둔 1210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서 이석태 위원장을 만났다.

 

이석태 위원장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청문회의 취지를 밝혔다. “청문회를 통해 작년 416일 발생한 참사에 대한 정부 대응의 적정성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세월호 사고가 참사로까지 번진 건 구조과정에서 정부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런 비극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정부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문회에서 조사하고자 하는 정부 대응의 적정성은 특별법에 보장돼 있다. 세월호 특별법 53항은 ‘4·16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구조구난 작업과 정부 대응의 적정성에 대한 조사에 관한 사항이 특조위의 업무 요건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해수부 문건대로 진행돼 당혹스러워

특별법이 명시했음에도 조사 대상이 정부 수반인 청와대를 향할 때마다 특조위의 활동은 번번이 막힌다. 지난 1123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서 청와대 조사건에 반발해 여당 측 추천위원들은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특조위 위원은 야당 추천 5, 여당 추천 5, 유가족 추천 3, 대법원 추천 2, 대한변협 추천 2인 등 모두 17명으로 구성됐다. 특별법이 보장한 정부 대응의 적정성 조사에 정부 수반인 청와대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정치적 부담이 있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청와대 얘기만 나오면 한 쪽에서는 특조위 해체를 주장한다. 이 위원장은 독립기구인 특조위에 정치적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시도들이 곤혹스럽다. “진상규명을 해야 하는 특조위로서는 가장 덜 정치적인 것을 해서 성과를 거두고 다소 정치적 부담이 있는 과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특조위 해체를 주장하는데, 특조위를 어떻게 보는 건지.”

 

1123일 전원위원회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갔을까. 문제가 됐던 안건은 <15-108호 의결의안>이다. 청와대 등의 참사 대응 관련 업무 적정성 등에 관한 건으로, 이날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청와대의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았는지, 컨트롤타워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조사 신청이었다. 그러나 여당 측 추천위원들은 이 안건을 대통령의 사생활 조사라는 프레임으로 전환시켜 논의는 금방 대통령의 7시간 행적조사 여부로 변질돼 버렸다. 여당 측 추천위원들의 발언이다. 황전원 위원은 신청인의 본연의 취지에는 대통령의 7시간이라든지,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다 포함이 돼 있다고 말했다. 차기환 위원이 덧붙인다. “세월호참사 당시의 대통령 행적, 이른바 7시간 행적이니, 이런 사고 진상규명과는 관계없는 부분도 당연히 빠질 걸로 생각을 해서.” 고영주 위원은 세월호 침몰 인명구조와 대통령이 인과관계가 없다며 대통령은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회의장을 퇴장했다.

 

이석태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 수반인 청와대와 대통령을 조사해야 하는 건 특별법상 피할 수 없는 직무다. 조사해달라고 피해자 측에서 신청했다. 일곱 시간을 빼야 한다, 넣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반발했던 여당 측 추천위원들이 말한 7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여당 측 추천위원들은 이 시간을 조사에서 빼자는 건데 그렇다면 416일 당일에 직무와 관련된 건 조사하지 말자는 말이 된다.”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상황을 보고받고, 어떻게 상황을 인식했고, 어떻게 지시를 했는지는 사건 규명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여당 추천위원들의 주장은 애초에 대통령을 조사할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이 위원장은 대통령의 직무상 관련된 것을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걸 그렇게 파행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이석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두 번째)과 특조위원들이 4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시행령 철회를 위한 농성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독립된 정부기구를 이렇게 대우하다니

지난 11월 언론에 보도된 해수부 추정 문건은 여당 추천위원들의 행동이 의도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문건은 특조위가 청와대를 조사할 경우 여당 추천위원들이 이를 막으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해당 문건 1쪽에는 특조위가 BH(청와대)에 대한 조사 개시를 결정하면 여당이 추천한 특조위 위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라는 지시가 나와 있다. 나아가 필요하면 사퇴의사까지 표명하라는 지시도 있다. 이 문건의 내용과 여당 추천위원들의 행동은 맞아 떨어졌다. 여기에 대한 해수부의 해명은 없다. 이 위원장의 말이다. “해수부의 해명은 아직 없다. 문건에 일련의 행위들이 나열돼 있다. 가령 이헌 부위원장을 포함한 여당 추천위원들에 대한 움직임 등이 나와 있어서 그런 게 정말 이루어지나 관심을 가지고 봤다. 공교롭게도 그렇더라. 이 문건에는 우리 부(해수부)’라는 표현이 나와 있다. 고위 관료들의 이름도 있고. 그래서 해수부 문건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그 문건대로 일이 진행되는 걸 보고 당혹스러웠다.”

 

해수부 추정 문건에 대해 이 위원장은 예상 외로 담담했다. 특조위 활동에 대한 정부의 방해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수부 추정 문건으로 실체의 단면이 좀 더 드러났을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정부의 행동은 특조위 힘빼기와 발목잡기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준비기구를 꾸리고 일을 했다. 올해 2월 하순쯤에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아무리 늦어도. 그러나 전혀 되지 않았다. 정말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특조위 핵심 자리에 조사대상자가 되는 부처의 공무원을 파견하겠다는 시행령이 내려왔다. 공무원 파견은 위원장의 권한임을 명시한 특별법 211항에 반하는 시행령이었다. 이 위원장은 특조위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광화문에서 나흘간 농성을 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를 막아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시행령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예산을 주지 않았다. 예산이 없어 직원들의 월급을 주지 못했다. 지난 8월에야 받은 예산은 요청안보다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핵심부서인 진상규명소위원회 진상규명국장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다. 특조위에서 인원을 선발한 후 발령 요청을 냈는데 아직까지 정부에서 발령을 내주지 않고 있다. 이 위원장은 정부가 독립된 정부기구를 어떻게 이렇게 대우하는지 참 불가사의하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특조위는 출범 초기부터 새누리당으로부터 예산으로 공격을 받았다. 김재원 의원은 세금 도둑이라고 비판했고, 예산이 늦게 내려와 월급을 소급 지급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했다. 내년 예산도 3분의 1로 깎였다. 60억원이다. 예산 삭감의 빌미가 된 것도 청와대 조사건이었다. “한창 내년 예산을 교섭하는 중에 청와대 조사로 여당 위원들이 반발하는 문제가 생겼다. 교섭 중에 이 문제가 불거지면서 교섭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농림축산해양수산위원회 여야 위원들은 소위에서 122억원을 인정했다. 그리고 활동기한이 늘어나게 되면 그에 맞춰 예산을 늘리기로 했다. 여야 간 합의한 것이다. 그러다가 청와대 조사가 논란이 되면서 여권이 합의에 전혀 응하지 않더라. 농해수위 결정이 후퇴해서 원래 기재부 안대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이 또한 예산을 깎기 위한 여당의 빌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부터 기재부 안대로 줄 생각이지 않았냐는 의혹 제기다. “표면적으로 보면 대통령을 조사한다는 게 예산 삭감에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한데, 그러나 그게 없어더라도 뭔가 다른 이유를 들어 최종적으로 기재부 안으로 가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사업비가 대폭 삭감되다 보니 당장 내년 조사활동이 걱정이다. “특조위의 조사는 사무적으로 앉아서 하는 조사가 아니라 왔다갔다 하면서 전문가 도움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사업비를 다 깎아서 이 규모로는 힘들다. 다른 어떤 조직보다 사업비가 크게 필요한 조직인데 그걸 다 깎았다.” 조사에 필요한 중요한 사업도 경우에 따라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사업비 다 깎아서 이 규모로는 힘들다

특조위의 손발을 묶는 정부와 여당의 노골적인 활동 방해 속에서 특조위는 독립기관이 아니라 고립기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를 잊어가는 여론지형도 특조위의 활동을 고립시키는 것 같다. 이석태 위원장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힘든 조건임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차피 상당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동반하고 있다. 국지적으로 보면 외롭거나 고립돼 있지만 적어도 진실을 추구하면 반드시 편이 생긴다. 그 편은 국민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5월에 시행령에 반대하면서 농성을 했는데, 고립되고 외로웠다면 못했을 것이다. 어떤 단계에서는 고립된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제대로 일을 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 일관되게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진전한 것처럼,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여론의 향배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부 언론은 평소에는 특조위 활동을 보도하지 않다가 틈이 생기면 왜곡해서 보도를 한다. 그런 걸 보고 좌절하지 않는다. 보통 여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는 없다. 왜곡보도가 나오면 반론을 내면 되고, 우리대로 일관되게 정도를 가면 된다. 우리에게는 국민들이 부여해준 힘이 있다. 한국 사회가 정직한 사람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속성이 있는데, 특조위도 한국 사회의 일부이지 않나. 한국 사회의 문제점도 우리가 그대로 안고서 싸워나가야 한다.”

 

내년 4월이면 세월호 참사 2년이 된다. 지난 1년간 정부·여당의 방해와 싸워 온 이 위원장은 1214일 청문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다시 하려고 한다. “청문회를 시작으로 진상규명을 하고자 하는데 낙관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진전해 온 것처럼 세월호라는 한국 사회의 무거운 문제를 해결해가는 단초는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거기서 이 사회가 진전할 수 있는 신뢰의 받침이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송구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세월호 참사라는 한국 사회의 비극의 진상을 규명하는 자리는 무거웠다. 그 무거움에 적합한 사람인가를 가끔 생각한다. “특조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안타깝게도 아직 제대로 시작을 못했다. 정부와 대응해나가면서도 성과를 내고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송구하다.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뛰어난 역량을 갖춘 분이 혹시 위원장이었더라면 그래도 뭔가 보여주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특조위의 한 관계자는 이 위원장이 아니었다면 외압 속에서 특조위는 벌써 꺾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조직에 외압이 정말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외유내강인 위원장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외압에 꺾였을 수 있다.”

 

 

임상시험 아직도 피 뽑고 돈 버는 마루타 알바

누명시험 참가자의 안전성 더 높여야1210 시사저널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 마루타 알바(아르바이트)’가 주요 관심사다. 제약사가 의약품 판매 허가를 받기 전에 시행하는 임상시험(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포함)에 참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23일 동안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고 10여 차례 피를 뽑는 일이 생체실험의 마루타와 같다. 한편으로는 비싼 등록금과 극심한 취업난에 허덕이는 학생들에게 꿀 알바로도 통한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며칠 만에 수십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런 마루타 알바에서 최근 들어 약 부작용과 윤리 문제가 배어나왔다. 이에 대해 국민·정부·제약사·병원이 함께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민수 세브란스병원 임상시험센터 소장은 과거 매혈이 현재 헌혈로 바뀐 것처럼 임상시험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제도 보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문했다.

 

임상시험이란 신약이 안전하고 효과적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생동성 시험)은 신약을 복사한 복제약이 본래 약과 효능이 같은지 검증하는 작업이다. 이런 절차들을 거쳐야 비로소 약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동물이 아니라 사람의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생동성 시험은 약을 복용하고 피를 뽐아 성분 농도를 측정한다. 사진은 채혈 장면. 시사저널 박은숙

 

23일에 55만원 버는 알바의 유혹

이를 마루타 알바로 부르는 배경에는 임상시험의 급격한 증가가 있다. 서울은 세계에서 임상시험이 가장 많은 도시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의 임상시험 정보 등록 자료를 보면, 서울은 2011년부터 뉴욕·런던·베를린 등 전통적으로 임상시험을 많이 하는 미국과 유럽 도시들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따르면, 200033건이던 한 해 임상시험 건수는 지난해 650건을 넘었다. 이 가운데 361건은 다국적 제약사가 한국에 의뢰한 임상시험이다.

 

세상에 없던 약을 처음으로 사람에게 사용하는 임상시험에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의 위험이 도사린다. 특정 의약품이 동물실험에서는 뛰어난 효과를 보였더라도 사람에게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사는 수년 동안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도 임상시험 과정에서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약 개발 100건 중 90건 이상은 중도에 폐기된다.

 

이런 이유로 국내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보다 복제약 생산에 매달린다.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효능과 부작용이 검증된 약을 복사한 것이어서 위험 부담도 적기 때문이다. 물론 복제약을 시중에 판매하려면 본래 약과 효능이 같은지를 확인하는 생동성 시험을 거쳐야 한다.

 

제약사는 이들 시험을 식약처가 지정한 병원(전국 173)에 의뢰한다. 병원은 시험에 참여할 사람(환자 또는 건강한 사람)을 모집하는데, 환자는 몰라도 건강한 사람을 모집하기란 쉽지 않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참가를 독려하고자 불편함·시간 등의 보상 차원에서 생동성 시험 참가자에게 대가()를 지급하는데, 이것이 마치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고 말했다.

 

임상시험 건수가 급증하면서 지하철과 버스에 임상시험 참가자 모집 광고도 늘어났다. 생동성 시험 참가자를 구하는 온라인 아르바이트 사이트도 많다. 여기에 대학생들이 몰린다. 참가 방법은 간단하다. 시험 1~2주 전, 병원에서 혈액·소변·심전도 등 각종 신체검사를 받는다.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판정된 40~50명은 시험 전날 병원에 들어간다. 대부분 20~30대다. 의료진으로부터 시험의 성격·부작용·보상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동의서에 사인한 후 병상을 배정받고 피검사를 받는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하고 8시에 약을 먹는 것으로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다. 이후 종일 30~60분 간격으로 채혈한다. 혈액에 약 성분이 얼마나 흡수되는지를 측정하기 위함이다. 병상에 눕거나 자거나 다리를 꼬거나 병원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정확한 검사 결과에 영향을 미치므로 금지돼 있다. 참가자들은 대개 병상에 앉아 TV··스마트폰 등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다음 날 오전 8시에 한 차례 더 채혈한 후 의사의 문진을 받고 이상이 없으면 병원에서 나온다. 이런 과정을 2회 반복한다. 대학 4년 동안 10차례 생동성 시험에 참가한 김기태씨(가명·27)“23일 동안 병상에 앉아 약 먹고 피만 뽑은 대가로 55만원을 벌었다. 다른 알바로 한 달에 벌 수 있는 돈을 단 며칠 만에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큰 유혹이라며 부작용이 거의 없는 복제약이지만 혹시 어떻게 될까 봐 약간 겁이 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해서 받는 돈은 약 종류와 시험 기간에 따라 20~100만원으로 다양하다. 생동성 시험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은 구토, 어지러움, 메스꺼움 등이다. 이런 점이 다소 우려되지만 등록금이나 생활비가 필요한 학생들은 목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대학생 1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 중 16.3%가 고위험 알바를 경험했다. 고위험 알바 가운데 생동성 시험은 건설공사장과 물류창고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대학 2년생인 이고준씨는 이 세상의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으며, 특히 복제약의 사소한 부작용은 큰 문제가 아니다라며 등록금·방세 등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면서 의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보람도 있다고 말했다.

 

한 대학병원에서 생동성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함. 뉴시스

 

3년간 임상시험 약물 피해자 476

약은 독이라는 말이 있다. 잘 쓰면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꿀 알바의 안전성이 최근 논란 거리로 부상했다.임상시험과 생동성 시험은 보건 당국이 정한 과학적·윤리적 안전장치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임상시험 전,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는 제약사로부터 계획서를 제출받아 인권·윤리·안전성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핀다. 만일에 대비해 제약사는 보험에도 가입해야 한다. 보상 규모가 보험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제약사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서울 지하철 내부에 임상시험 참가자를 모집하는 광고가 붙어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그럼에도 허점은 있다. 우선 신약보다 복제약 시험은 안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문제다. 임상시험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하고 시판한 신약의 4%는 안전성 문제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예를 들어 다국적 제약사 GSK의 당뇨병 약(아반디아)5년 전까지만 해도 의사가 처방한 치료제였다. 이후 심장질환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발견돼 시장에서 사라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약사는 마약성 의약품의 생동성 시험 참가비가 다른 약보다 비싼 이유는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2년생인 강만구씨는 세 차례 생동성 시험에 참가했는데, 고혈압 약, 고지혈증 약보다 전립선비대증 약 시험에서 돈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김성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식약처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3년간 임상시험 약물 피해자들은 476명에 달한다. 이들 중 376명은 입원했고, 7명은 생명에 위협을 느꼈고, 49명은 사망했으며, 나머지 45명은 다양한 부작용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 졸업 후 2008~09년 생동성 시험에 4~5차례 참가한 경험이 있는 한성주씨는 채혈 후 쓰러져 간호사의 응급처치를 받은 사람을 봤고, 어지럽고 메스꺼워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밝혔다. 대학원생 김승한씨는 그나마 부작용이 덜할 것 같은 고혈압 약의 생동성 시험에 참가한 적이 있다부작용은 없어서 다행인데, 약을 먹은 후 실제로 먹었는지 입안을 검사받을 때는 나 자신이 마루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군에 자원하는 한국 청년들 1216 한겨레21

시민권 취득 초고속 패스, 이민 1.5세대와 유학생들이 외국인 모병 프로그램 매브니통해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참전하는 이유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포기하기를 주문한다. 더 이상 포기하는 것이 싫어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이들이 있다. 2009년 처음 실시된 미국의 외국인 모병 프로그램 매브니’(MAVNI·Military Accessions Vital to the National Interest)탈조선의 통로가 되고 있다2014년 말 기준 미국 내 한인 수는 2238989(20159월 집계 재외공관별 한인 인구 현황’)이다. 이 중 시민권자는 1414875(63%)이며, 영주권자는 426838(19.1%), 일반 체류자는 297714(13.3%)이다. 미국 내 한인 유학생 수는 99562명에 이른다.

 

일반 체류자 29만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이민을 희망하면서도 영주권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들의 자녀인 이민 1.5세대에게 매브니는 시민권을 얻는 초고속 패스. 자신의 시민권 취득은 물론 부모까지 영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 매브니를 이미 마쳤거나, 현재 수행 중이거나, 합격해 입대를 기다리는 이들이 미국의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미국 시민이 되려는 이유를 말했다. _편집자

 

미군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미군으로 복무한다는 것의 가치를 설명하는 미 육군의 홍보 사진. 미 육군 누리집 갈무리

 

 

미합중국을 위해 복무하겠습니다.”

양승훈(19·가명)씨는 오른손을 들고 선서했다. 볼에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승훈씨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나이에 미군 자격을 얻었다. 승훈씨는 만 18살이 되면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귀국해 한국군에 입대하거나, 미군이 되어 미국에 남을 방법을 찾거나.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은밀한 폭력이 자행되는 한국 군대에 갈 필요가 없다.” 주한미군에서 복무했던 미국인 모병관은 승훈씨에게 넉살 좋게 말했다. “매브니(MAVNI)를 통해 미군에 입대하면 건강보험, 생명보험, 치과보험, 주거비, 학비가 지원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3~6개월 만에 시민권 취득

승훈씨 아버지는 화이트칼라였다. 유능한 삼성맨으로 팬택에 스카우트됐다. 평탄해 보였던 아버지의 인생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고꾸라졌다. 팬택이 고전하면서 승훈씨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다. 먹고살기 위해 아귀찜 식당과 부동산 중개업도 해봤지만 모두 망했다. 승훈씨 아버지는 실패의 땅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승훈씨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9, 그의 가족은 하와이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한때 펜만 쥐었을 아버지의 손은 짚처럼 푸석해졌다. 떡집에서 바닥을 쓸었고, 마트에서 물건을 날랐으며, 레스토랑에서 발레파킹을 했다. 어머니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45살에 식당 막내가 되어 갖은 구박을 견뎌가며 일했다. 두 사람이 열 사람처럼 일했지만 살림은 빠듯했다. 승훈씨에게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주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승훈씨는 미군 모병소의 문을 두드렸다.

 

매브니는 승훈씨처럼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에게도 입대를 허용하는 미국의 모병제도다. 매브니를 거쳐 미군이 되면 최소 7~8년이 걸리는 시민권 취득 절차를 3~6개월로 크게 단축할 수 있다. 18살 이상 35살 미만의 고졸 학력 이상 외국인이면 지원할 수 있다. 미국 비자를 소지하고 2년 이상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거주 기간 동안 외국에 90일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매브니는 언어 분야나 의료 분야로 지원할 수 있다. 언어 특기자는 최소 4년의 현역과 6년의 예비군으로, 의료 요원은 최소 3년을 의무복무해야 한다.

 

승훈씨는 서류를 작성하고, 입대시험을 치르고, 체력시험을 봤다. 한국어 특기자로 지원해 한국어 구술 면접도 봤다. 전세계로 병사를 보내는 미국은 전세계 언어 사용자들을 흡수해 파병 군인을 채우고 있다. 입대를 허가받은 승훈씨는 20167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식 입대한다.

 

그가 이른 나이에 군 입대를 결정한 것은 대학교 학비를 미리 마련하기 위해서다. 승훈씨의 목표는 군대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휼렛패커드(HP)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다. 요즘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 입대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미래 군인 양성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

 

미군 입대로 얻게 되는 그린카드

김미연(26·가명)씨는 26살에 잿빛 군복을 입었다. 현재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상태다. 의무행정병으로 2016425일에 정식 입대한다. 미연씨는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님을 따라 전세계의 바닷가를 떠돌았다. 물살을 타고 중국, 통가,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 하와이에 닻을 내렸다. 하와이주립대 마노아캠퍼스에 입학했지만 그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이방인이었다. 유학생 신분이어서 합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미국 학생들의 한 학기 학비가 5천달러 정도일 때, 유학생들은 14천달러를 내야 했다. 취업시장에서도 유학생은 기피 대상이다. 워킹비자를 받으려면 채용하는 회사에서 보증을 서줘야 한다. 회사 쪽에선 비자 발급비와 교육비, 도중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잠재적 인력 손실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인문계 출신 유학생들이 간혹 채용되기도 하지만 “1천 명 중 한 명꼴이라고 미연씨는 말했다. 그에게 매브니는 미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는 기회다. 미연씨는 제대하고 사회에 다시 나와도 바로 취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미연씨 같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 군대로 향하는 이유다.

 

사업비자(E2)를 보유한 이민 1세대의 자녀들이 매브니에 많이 지원한다고 미연씨는 말했다. 자녀가 미국 시민이 되면 부모의 영주권을 신청해 1년 이내에 그린카드’(영주권)를 받을 수 있다. 부모가 완성하지 못한 안정적인 정착을 그 자녀의 미군 입대로 매듭짓는 셈이다.

 

승훈씨와 미연씨는 매브니를 소박한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안정적 중산층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의 삶은 불확실하다. 한국에서 승훈씨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유급을 면하기 위해 텅 빈 교실에 앉아 잡히지 않는 활자들을 머릿속에 구겨넣곤 했다. 미국에 온 뒤에는 성적이 400명 중 50등 안에 들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거나 비정규직 월급쟁이가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5580원의 시급에 만족하며 힘겹게 학업을 병행하는 또래들을 보면 헬조선의 현실이 살갗에 와닿는다고도 했다.

 

한국인 몰려 하루 만에 마감되기도

 

20115월 아프가니스탄 남부 산간 지역에서 미 해병대가 폭발물에 부상당한 동료를 헬리콥터가 일으킨 먼지를 뚫고 옮기고 있다. AP 연합뉴스

 

매브니 모집은 충원 계획에 따라 수시로 닫히거나 열린다. 2009년 의료 분야 333명과 언어 분야 557명을 모병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육군 1천 명을 뽑았고, 2015년에는 육군 3천 명으로 확대됐다. 그때마다 한국인 지원자가 몰렸다. 한국인 지원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따르면 20099월 당시 매브니에 지원한 언어 특기자(의료 전문성이 없는 경우 모두 언어 특기자로 지원) 385명 가운데 한국어 구사자가 112(29.1%)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박준성(29·가명)씨는 2009년 매브니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처음 실시됐을 때 지원했다. 준성씨는 유독 한국인이 많이 몰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원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신분 문제가 가장 큰 것 같다. 신분이 확실해지면 미국에서 살기가 편해지고 복지 혜택도 주어진다.”

 

준성씨는 부모님과 함께 200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2009년 대학을 휴학하고 매브니에 지원해 포병(언어 특기자로 합격한 뒤 보직은 별도 선택·부여)으로 입대했다. 그는 학비 외에 월 6천달러의 생활비도 받았다. 아르바이트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었다. 매브니로 입대할 경우 의료보험은 물론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된다. 학비는 연간 최소 4천달러에서 최대 172천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생활비(900~6천달러)는 각 주의 물가 수준과 집세에 따라 별도 책정된다. 입대하자마자 1~2만달러의 보너스도 지급된다.

 

윤호진(25·가명)씨는 이민 청년들에게 매브니는 정말 끌리는 기회라고 했다. “한국인이 너무 많이 몰리자 미 국방부에서는 한국인 모병 수에 제한을 뒀을 정도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나 뉴욕에서는 매브니가 열리자마자 하루 만에 할당된 자리가 꽉 차버린다.” 호진씨는 중학교 2학년 때인 2005년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발을 들였다. 그는 명문이라 일컫는 조지아공과대학을 올해 8월 졸업했다. 그러나 취업박람회 때 작성한 이력서 20장 중 18장이 유학생이란 이유만으로 접수를 거부당했다. 시민권이 문제였다. 그는 영주권조차 발급받을 수 없었다. “친구들 중 시민권자는 98% 취업했다고 호진씨는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올까 고심하던 차에 매브니를 알게 됐다. “시민권·영주권 신청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브니가 얼마나 빠르게 시민권을 제공하는지 알 수 있다. 짧게는 6~7, 길게는 10년까지 걸리는 절차를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매브니로 입대하려고 5~6년씩 기다리는 한국인도 많다.”

 

하지만 시민권에도 대가가 따른다. 준성씨가 매브니로 입대한 2009년엔 입대 이후 전투 보직 지원만 가능했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의 분쟁에 개입하며 각지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2009년 미 국방부는 3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 간호사, 언어 특기자, 정보 분석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군의 모병 팸플릿은 명시하고 있다. “미 육군의 일원으로서 이라크나 기타 작전 수행 지역에 임무를 위하여 배치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준성씨는 포병으로 훈련받던 중 특수부대로 차출됐다. 그는 필리핀에서 특수부대를 보조하는 심리작전병으로 투입됐다. 귓바퀴를 가격하는 대포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전이 벌어지면 특전사 병사들과 똑같이 총을 들고 싸워야 했다.

 

특수부대 보내기 위해 선발?

이런 일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미군에서 (공식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매브니들을 특수부대에 보내기 위해 선발하는 것이라고 준성씨는 말했다. 2012<뉴욕타임스>매브니들 중 3분의 1은 특수부대에 합류한다고 보도했다.

 

모병제 국가 미국에선 주로 가난한 젊은이들이 군인의 길을 택한다. 매브니는 미국인이 되길 원하는 외국인에게 초고속 시민권을 부여해 부족한 해외 파병 미군을 충원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전쟁터로 보낼 군인을 확보해야 하는 미국의 필요와 참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는 한국 청년들의 필요가 만난 셈이다.매브니로 향하는 한국 청년들의 열망은 인터넷에서도 확인된다. 다음 카페 강한 미군 & 더욱 강한 한국계 미군에는 매브니 게시판이 따로 있다. 20093월 이후 최근까지 3천여 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주로 입대 시험 후기와 선발 관련 정보로 가득하다.

 

분쟁 지역에 발령 나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승훈씨는 잠시 망설였다. “아프간에 발령 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내가 아프간에 있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 확률이 나를 비켜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파산한 그의 가족은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 비시민권자이므로 미국에 정착할 수도 없었다. 그의 가족은 덫에 걸린 쥐 같았다. 어딜 가도 차별받았다. 미국의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없어 차나 집을 사기도 어려웠다. 두렵다 해도 매브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질문에 미연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후회는 없다. 분쟁 지역에 갈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은 돼 있다. 아프간에 가도 괜찮다.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다.” 마른침이 미연씨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부의 딸로 태어나지 않은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미군 입대다. 미군이 제공하는 혜택을 한국에서 받을 수 있을까? 그 혜택이 나의 (입대) 이유다.” 그래도 수월한 일은 없다. 호진씨는 지난 8월 입대해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시민권을 취득했다. 현재는 버지니아주에서 무기 수리병으로 보직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런데 훈련소 생활이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나는 신분 문제를 해결하려 미군이 됐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가 많다. 미국 시민권자로 아무리 10~20년을 살아도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란 쉽지 않다. 취직이야 되겠지만 어차피 외국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국적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권 얻어도 달라지지 않는 삶

매브니로 입대해 의무복무를 마친 준성씨는 현재 한국에 있다. 기대와 달리 미군 제대 뒤에도 미국 사회에서 할 일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미국 시민의 증명서를 얻는 일과 미국 사회에서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세탁소, 네일숍, 편의점 등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한국계 이민자로서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준성씨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대학원도 다니고, 프렌차이즈 창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연어가 태어난 하천으로 회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수도 있다. 연어가 내려간 바다는 냉혹했다. 그래도 한국의 살인적 경쟁이 두려운 이들에게 미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다. 준성씨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37살 한인 가장은 한국 군대를 제대하고도 매브니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하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갈급함으로 미국을 위한 전쟁에 참전한다.-박로명 교육연수생

 

 

저는 안녕합니다 그대도 안녕합니까? 129 한겨레21

지난 시대를 돌아보는 형식으로 자리잡은 <응답하라> 시리즈정답던 옛 동산 추억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기억들, 사람들

 

tvN 제공

 

어차피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이다.

tvN <응답하라 1988>에서 44살 덕선(이미연)은 소파에 앉아서 18살 덕선(혜리)을 회상한다. 그녀는 아파트 소파에 앉아서 말하고,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본다. tvN<응답하라> 시리즈는 그런 드라마다. 작심하고 보지 않아도 보기 시작하면 벗어나기 힘들다. 흐물흐물 웃음을 머금고 보다가 끝내는 한 방울 눈물도 떨구는, 황금비율의 오락이 킬링타임을 아깝지 않게 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만 적당히 알면 어디서 끼어들어 보아도 즐기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덕선의 한 살 아래 동생 노을(최성원)이와 동갑인 아저씨에게 <응답하라 1988>은 한번 펼쳐보기 시작하면 덮기 어려운 앨범 같았다. 어느 주말, 소파에 안겨’ <응답하라 1988>을 보다 청춘의 시가 떠올랐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는 구절이 무슨 뜻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던 황지우 시인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완벽한 공동체, 쌍문동 골목

 

<응답하라 1988>은 서울 쌍문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동갑내기 남자 넷과 여자 하나의 이야기를 축으로 진행된다. 이들을 둘러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tvN 제공

 

거의 매회 드라마의 끝에는 특공대’(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쌍문여고에서 999등을 하던 덕선이가 말끔한 중산층이 되어 소파에 앉아서 말한다. 아직은 등장인물 누구의 23년 뒤인지 모르는 남편 김주혁도 옆에서 티격태격한다. 덕선을 지켜보는 우리는 편안하다. <응답하라 1997><응답하라 1994>에서 여주인공들이 변호사, 의사와 결혼한 것처럼 덕선이 남편도 번듯한 직업을 가졌을 것이란 기시감이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과연 남자친구들 가운데 누가 남편이 됐을까를 맞추는 과정인데, 매번 시리즈는 그 시절의 친구들이 모이는 모임으로 끝났다. 친구들 가운데 늦게 오는 누군가는 있을지언정, 오지 않는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도 우리는 오늘의 테이블에 초대받지 못한 친구는 없을 것이라고 안도한다. 예뻐지고 넉넉하게 사는 것 같은 덕선이의 일상에도 안심한다.

 

이렇게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탈락한 자들이 없다. 변두리에서 시작한 우리가 어떻게 손에 손잡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을 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응답하라 1988>이다. 성실한 사람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절에 관한 보랏빛회고이기도 하다. 착한 이들의 생존기(혹은 성공담)에 탈락한 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한없이 편안하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 드라마 속 그리운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결국 시원에 관한 얘긴데, 이번엔 무대가 서울 변두리다. 이곳은 끝없이 반찬을 나누듯 넉넉한 집이 어려운 이웃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동네다. 아픈 곳을 아프게 찌르는 야박한 이웃은 없다.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로 가득한 동네는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국전쟁 당시 고립된 산골 같다. 진공의 공간이다. 드라마는 영웅 아니라 영웅 할배라도 돌아갈 곳은 결국 가족이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이웃은 가족의 확장에 다름이 아니다. 흔히 이웃 간 시기로 드러나는 사회적 경쟁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은 가족이 이웃으로 확장된 진정한 가족 드라마다.

 

동네가 세상의 풍파를 막는 울타리가 된다. 아프게 사라지는 이는 없다. 조금 없거나 풍족한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아랫집 윗집정도의 차이다. ‘이 다른 차이는 아니다. 반지하 아랫집에 세들어 사는 덕선이는 윗집에 사는 주인집 아들 정환(류준열)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는다. 소꼽친구니까, 오랜 이웃이니까 그렇다. 1억원 올림픽 복권에 당첨돼 졸부가 된 정환이 가족의 풍요는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운으로 그려진다. 탈락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의 거울처럼 성공한 사람의 능력도 찬양되지 않는다.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개천에서 용 나던 때의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응답하라 1997>의 벤처기업가가 그랬고, <응답하라 1988>에서는 천재 바둑기사 최택(박보검)이 그렇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공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처럼 살아간다. 부자인 정환이네는 이웃에게 끝없는 무상 분배를 실천한다. 3만원, 당시에 요긴한 돈으로 나오는 생활비를 반지하에 사는 덕선이 엄마와 남편을 잃은 선우(고경표) 엄마가 자주 빌려가지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는 아니어서, 이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음식을 나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의 자서전 제목이다. 이것을 빌리면, <응답하라 1988>은 고생은 했지만 실패는 하지 않았던 이들의 얘기다. 변두리 동네지만 극한의 빈곤은 없다. 은행에 다니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반지하를 벗어나지 못하는 덕선의 집안은 어렵지만 빈곤하진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선우의 집에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믿음직한 미래인 아들이 있다. 호시탐탐 지켜주는 이웃도 있다. 극복될 여지가 있는 가난은 낭만화될 여지도 있다. 박정희식 개발 신화를 내면화하지 않아도, 지난 세기 한국인은 가난이 극복될 것이란 건강한희망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가난을 극복한 경험도 있다. <응답하라 1988>은 그런 믿음에 충실하다.

 

위협은 동네 밖에서 온다. 국가권력은 마을의 평화를 위협한다. “과외도 한번 안 하고 서울대에 들어간덕선의 언니 보라(류혜영)는 운동권이 된다. 당시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했던 보라를 체포하러 경찰들이 동네에 들이닥친다. 보라는 저항하지만, 자신을 찾으러 동네를 헤매다 핏물이 든 엄마의 양말을 보고서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보라의 말은 투항이 아니라 엄마를 향한 자백으로 들린다. 외부 세력에게 미안하다는 것이 아니다.

 

고생했지만 실패하진 않았다

마을 바깥의 야박한 심성도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선우의 친할머니는 혼자 사는 며느리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오히려 확장된 가족인 이웃이 이들을 감싼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속에서 오직 가족만이 유일한 안전판이 된 사회를 <응답하라 1988>이 응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한바탕 시련이 닥치지만, 삶이 고꾸라지는 불행은 닥치지 않는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없다고, <응답하라 1988>은 말한다. 언제나 시련이 끝나면 깔리는 노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와 함께.

 

자주 다음회 예고편은 심각한 사건이 터질 것처럼 보인다. ‘악마의 편집이라고 비난할 정도는 아니지만, 막상 다음편을 보면 슬쩍 김이 빠진다. 항상 사건은 극한의 위험을 암시하다 다행스럽게 끝난다. 보라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지만 훈방된다. 엄혹한 시절에 어떻게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 않았는지 설명이 충분치 않다. 그냥 드라마의 정서로 이해된다. 이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의 룰이다. 심장병이 있는 정봉(안재홍)이가 생명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복선을 깔고 수술을 받지만, 결국 허무한 복선이 된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없다

 

나도 몰랐던 나의 첫사랑<응답하라 1997(오른쪽)>, <응답하라 1994>로 이어진 시리즈의 테마다. tvN 제공

 

국가의 배신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덕선이는 서울올림픽 개막식 피켓걸로 뽑히지만, 피켓을 들기로 했던 나라 마다가스카르의 불참으로 한여름 땡볕의 수고를 날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덕선이 벌점을 많이 받은 사람의 대타로 우간다 피켓을 드는 것으로 훈훈하게끝난다. <응답하라 1988>에서 성실은 보답받는다.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연습에 임했던 덕선의 태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국가권력 앞에서 분열한다. 권력 탓에 위기를 겪었지만, 수혜를 입은 경험도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중산층적 회고 방식인 <응답하라> 시리즈의 저변에는 이런 갈등이 깔려 있다. 요컨대 <응답하라 1988>은 열심히 노력해 시련을 통과한 이들의 기억이다. 드라마를 보면 다들 무사해서 편안하다.

 

그러나 드라마 바깥에는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이 겪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로 끝난다. 회고담 <응답하라 1988>에는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성찰은 희박하다.

 

헬조선이 청년의 현실이라면, ‘성공한 기억은 한국인의 정서다. 지난 반세기, 지구촌에서 예외적으로 성공한 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사회를 바꾸기도 어렵다. 성공한 기억의 극보수 버전은 하나가 아니다. 선한 중산층의 방식도 있다. <응답하라 1988>의 회고 방식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미화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박원순식 마을 만들기와 통한다. 이웃의 호혜로, 마을의 부조로 만드는 마을을 대안으로 여기는 것이다.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서울시 정책의 일부다. 또한 <응답하라 1988>에서 동네는 마음에 품었던 사람과 마니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나도 몰랐던 나의 첫사랑을 테마로 한다. ‘남자친구 중 누가 남편일까는 시리즈를 연결하는 구조다. <응답하라 1997>에서 여주인공은 내가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남몰래 사랑해온 사람과 결혼했다. <응답하라 1994>에서도 새로운 친구인 칠봉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계인 쓰레기가 선택됐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첫사랑’, 그것이 <응답하라> 시리즈가 생각하는 관계의 핵심이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인 가족처럼, 여기까지 무사히 오기까지 누가 나를 지켜주었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지금까지, 덕선에게 우산을 씌워준 사람은 정환이었고 보라에게 우산을 건넨 사람은 선우였다. 그렇게 남자가 결정하고 여자는 선택한다. 오래된 미래의 발견이 성장의 과정이라고 <응답하라> 시리즈는 말한다.

 

결국은 세월에 대한 얘기로

이렇게 연애담의 외피를 쓰지만, 결국 <응답하라> 시리즈는 점점 세월에 대한 얘기로 바뀌고 있다. <응답하라 1988>처럼 점점 먼 시대로 갈수록 세월이 사랑을 이긴다. <응답하라 1988>에서 드라마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는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와 더불어 김필과 김창완이 다시 부른 <청춘>이다.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 이제는 없는 혹은 원래도 없었던 옛 동산을 찾는 <응답하라 1988>에 한국인은 10%의 시청률로 응답한다. 시절이 각박할수록 추억은 달콤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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