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 / 류민영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오동나무 / 최창균
시 쓰는 전등 / 김미선
오래 된 우물 / 안도현
벚나무는 시위 중 / 마경덕
외곽의 힘 / 문성해
무구장/ 김영산
자작나무의 사랑 / 권영부
포석정, 호랑가시나무 / 이해리
못을 박으며 / 박남희
폐차장 근처/ 박남희
게를 먹으며 / 김나영
레모나, 레모나 / 강 수
직선과 원 / 김기택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 유홍준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숫돌 / 복효근
건빵 먹는 밤 / 서안나
빈집 / 정철훈
명태 / 임영석
잠든 기억, 별을 찾다 / 김상훈
부전자전 / 이면우
요즘, 나이 먹은 것들 / 정성필
꽃들은 상처 자국에서 핀다 / 배용제
퉁퉁 불은 젖 /고진하
절 골 / 송진권
가시방죽 / 박규리
무수 / 송진권
신발을 잃다 / 이재무
항아리 속 된장처럼 / 이재무
봄 / 조풍호
봄은 소주를 마신다 / 이은채
오월 / 이은채
양철 낙엽 / 김기택
명태국은 시원하다 / 유창성
날아가는 방 / 유성찬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 정연홍
쇠죽을 끓이며 / 정연홍
양철굴뚝과 나팔꽃/ 유창성
겨울의 유서遺書 / 한우진
겨울강 / 정철웅
古墳群 마을 / 김일용
눈 내리니 덕석*을 생각함 / 박흥식
뇌물 수수조사 축소 / 주경림
돼지 / 안도현
화살 / 이윤학
눈 위에 쓴 가족 / 한우진
유성우流星雨에 젖은 날 / 최정진
북 / 한우진
닭 이야기 / 김정희
목련꽃 브라자 / 복효근
조찬朝餐 / 나희덕
머리 깎는 시간 / 김기택
잔치국수 하나 해주세요 / 이성복
벚나무는 건달같이 / 안도현
자귀꽃 / 박성우
약력 없는 시인 / 안주철
사거리 정육점 / 이은림
들어간 사람들 / 이진명
비 듣는 밤 / 최창균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바다의 슬픔을 본다 / 정영선
북 / 정영선
석유난로 / 최형일
아이야 아프지 마라 / 정성필
사기리 탱자나무 / 김종제
봄밤 / 이면우
숭어 / 류민영
여봐, 숭어 일 킬로에 만원이면 싼가 어쩐가
대게 삼사만원 하던데 어서 그럽디요
아, 거기 어디여, 자네 장모 누운 산 있잖은가
거 너머에 포구 하나 있는디 말여
지난 주, 노인회서 댕겨오는디 값이 그렇잖은가
이 없는 할미들이 숭어 작은 놈을 찾는디
고것 연할 살이 씹을 것도 없다는 거여
한 십 킬로는 먹었는갑네
맛이 기가 막힌 게 자네 생각 나더라고
어쩐가, 낼 자네 차 타고 한번 가볼라는가
아따, 솔직허니 엄니 땜시라 말을 하시제
아녀, 이 사람, 숭어 먹으러 가보자니께
내가 살틴게, 자넨 그냥 길이나 안내하더라고
복숭아꽃 필 때, 이때가 제일 맛있다는 겨, 시방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몇 개
오동나무 / 최창균
더 큰 나무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면 허공이 움찔했다
나무가 떠받치고 있던 허공이 사납게 찢어졌다
잘 지냈던 허공과 떨어지지 않으려
몇번이고 나뒹굴다 결국은 아주 누워버렸다
밑동에서부터 둥글게 허공이 도려지는 순간이었다
허공이 떠난 빈자리에 새순이 불끈 솟아올랐다
돌아온 허공이 봉긋 부풀어오르고
나무는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이제
저 땅에서 걸어나온 시간만큼
나무는 자랄 것이지만, 방금
한 여자애가 태어나면서 쏟는 울음소리로
한껏 푸르러질 것이지만, 그럴 것을 믿는
그 집, 오동나무 집
시 쓰는 전등 / 김미선
그 술집에 전등은 모두 여섯
알코올에 온몽 흠뻑 젖을 때까지
사람들은 잔을 기울인다
바람한 점 없는 술집에서 전등들은 보이지않게 흔들린
사람들이 잔을 기울일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조그맣게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다
밤마다 사람들은 술에 젖은 입술로 시를 쓴다
그들의 하루를 시로 쓰자면 몇천만 가지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든다
창작의 고통은 혀가 꼬이고 눈동자가 풀렸다
어떤 사람은 단어를 쏟아내느라 입에서
붉은 토사물이 넘쳐 나오기도 한다
대머리 시인, 팔불출 시인, 사업가 시인, 깡패 시인, 미성년자
시인, 바람둥이 시인, 바람난 시인, 발기부전 시인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시들을 들어달라 아우성친다
그 아 우 성 속 에 서
늙은 노새처럼 또 하루의 밤이 깊어간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전등들은 시를 쓴다
다음날이면 기억해내지 못할
그들의 시어를 가지고 글을 쓴다
인간들을 그려내는 것이 전등이 하는 일,
그곳에 매달려 있는 이유다
시처럼 콩나물을 씹어대고
오징어를 찢어대도
전등은 말이 없다
침묵하라! 침묵하라!
쓰기 위해선 침묵하라!
자신을 뜨겁게 달구는 것
술집에 전등은 모두 여섯
영업이 끝나고 불이 꺼지면
전등들은 제각기 자신이 쓴 작품을 발표한다
어떤 전등은 큰 소리로 낭독하기도 한다
오래 된 우물 / 안도현
뒤안에 우물이 딸린 빈집을 하나 얻었다
아, 하고 소리치면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는
우물 바닥까지 언젠가 한 번은 내려가 보리라고
혼자서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행복하였다
빈집을 수리하는데
어린것들이 빗방울처럼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우물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래 된 우물은
땅 속의 쓸모 없는 허공인 것
나는 그 입구를 아예 막아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물을 막고 나서는
나, 방안에서 안심하고 시를 읽으리라
인부를 불러 메우지 않을 바에야 미룰 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쓸어 내리듯 함석으로 덮고
쓰다 만 베니어 합판을 덧씌우고
그 위에다 끙끙대며 돌덩이를 몇 개 얹어 눌렀다
그리하여
우물은 죽었다
우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때 찰박찰박 두레박이 내려올 때마다
넘치도록 젖을 짜 주던 저 우물은
이 집의 어머니,
별똥별이 지는 밤하늘을 밤새도록 올려다보다가
더러는 눈물 글썽이기도 하였을
저 우물은
이 집의 눈동자였는지 모른다
나는 우물의 눈알을 파먹은 몹쓸 인간이 되어
소리친다
아, 하고 소리쳐도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지 않는
우물에다 대고
벚나무는 시위 중 / 마경덕
신림동 오복연립
벽에 ×가 크게 그려져 있다
×표 밑 붉은 페인트로 써놓은
이사 갓씀 이사 갓씀
두어 집을 남기고 벽은 붉은 글씨로 덮여 있다
연립주택 앞 늙은 벚나무
찢어진 현수막을 붙들고 시위 중이다
-재건축 결사반대-
오래 앓았던 글씨가 바람에 날리고
삼층 꼭대기 빨랫줄의 수건 한 장
백기처럼 펄럭인다
가스통이 뒹구는 앞마당
문짝 없는 장롱과 부러진 의자들
봄비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
벚나무 아래, 낯선 사내들 앉았다 가고
벽을 타고 퍼져간 붉은 글씨
깨진 유리창으로 하나 둘 기억이 빠져나간 집
머리띠 두르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혼자 남아 시위 중인 오복연립 벚나무
종일 허공에 꽃잎을 뿌리고 있다
외곽의 힘 / 문성해
이 도시의 외곽에는 짐승들이 산다
동쪽에는 개들이
서쪽에는 오리와 타조들이
사료더미를 지고 오는
구레나룻 사내들보다 건강하게 자란다
신도시라 이름하는 이 도시에는
걸리적거린다 하여
전봇대들도 다 땅 속에 숨겨져 있다
공원과 분수가 넘쳐나는 거리
애완견을 모시고 나온
앵무새 같은 여자들이 산책을 한다
늘 중심에 있는 이곳 사람들은
외곽을 까맣게 잊고 산 지 오래,
보신은 늘 중심엔 없는 걸까
가끔씩 보신을 위해
까만 승용차를 타고 사람들이 외곽을 찾는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비명소리 들리는 외곽에서
서둘러 보신을 마치고 다시 중심으로 돌아간다
썩은 개울가에 몰래 털이 버려지고
커다란 도마가 서둘러 씻겨지는 외곽에서
짐승들은 쉬지 않고 새끼를 낳아 기른다
무법지와도 같은 그곳
아직 비포장인 도로를 한참 들어가면
음식 찌꺼기 냄새와 분뇨내가 코를 찌르는 곳
구레나룻 사내 손목에서
끝끝내 내젓던 모가지의 불거진 힘줄,
중심에서 밀려나고 밀려나도
끝내는 더 넓은 외곽으로 세를 넓히는
외곽의 힘은 바로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
외곽은 언제나 중심을 먹여살린다
무구장/ 김영산
1964년 야반, 아버지는 골병든 아들 위해 무구장 파헤
쳐 한 소쿠리의 인골(人骨) 가져다가 왕겨 태워 갱엿 환을
만들어 먹였다고
감곡과원 외딴 농가 마당에서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새빨갛게 타는 잉그럭불 들추었다
자작나무의 사랑 / 권영부
얼룩말이 몸을 비비고 지나간 다음,
자작나무 줄기에는 희고 까만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무는 휘날리며 내달리던 얼룩말의 습생을 닮아
바람이 군락(群落) 사이로 우루루 떼지어 몰려가면 잎들이 갈기처럼 날린다
내 어릴 적, 아버지가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까칠까칠한 수염을 내 뺨에 비빌 때마다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움트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수염이 나에게 옮아온다고 믿었다
사나흘만 지나도 무성해지는 수염을 보면서
싱싱하게 흔들리는 자작나무 잎들을 생각하다가
하얗게 빛이 바랜 자작나무의 등줄기 속에서
팔십 묵은 기다랗고 허연 수염을 본다
취기가 오르는 날이면,
잠자는 내 새끼의 발그레한 볼에 뺨을 비빈다
그때마다 뺨에는 새록새록 얼룩이 돋아나고
미간을 찡그리며 잠자는 내 새끼의 가슴 위로
수백 마리의 얼룩말이 허연 먼지를 날리며 내달리다가
등짝을 열심히 자작나무에 문지르는 장면을 보면서
자꾸만 내 수염을 만져본다
아버지 냄새가 난다
포석정, 호랑가시나무 / 이해리
호랑가시나무, 꽃의 향기는 비단보다 부드럽고 재스민보다 향긋한데 잎의 가시는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 한 몸 안에 감미로운 향기와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을 함께 키우는 나무, 그 애틋한 이중성 안엔 무슨 쓸쓸한 비밀을 숨겼는가, 초록 발톱 이파리들이 우우 옹립하고 있는 가지의 우듬지에 샛별보다 작고 하얀 꽃이 적막을 깨물고 피어 있다. 망국의 황녀가 자결을 결심할 때 독하게 알몸에 바르는 독약 같은 향기, 발톱은 그 향기를 사수하기 위해 외부로 뽑아 든 칼날인가, 그렇지만 향기란 것이 칼날로 지킬 수 있는 슬픔이던가 대항할 힘을 잃은 군졸들처럼 가을 잎 떨어지고 서늘히 쓰러져 뒹구는 것에 마음 끌려 찾아온 가을 포석정, 마지막 잔을 마시고 불콰한 왕이 슬픈 이사금 슬픈 이사금 탕진되지 않는 슬픔을 들고 내 가슴에 쓰러져 운다.
못을 박으며 / 박남희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쎈타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벨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벨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명 속으로 퍼져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폐차장 근처/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게를 먹으며 / 김나영
손아귀의 힘을 몇 번 거부하고서야 바다가 쩍 열린다.
잘 뜯어지지 않는 집게발은 아직 파도의 한 자락을
놓지 못하고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가위, 젓가락, 포크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감칠 맛나는 바다가 혓바닥으로 밀물처럼 착착 감겨 들어오는 게
바다의 깊은 맛을 한 몸에 요약하고 있는 게다.
게걸스런 내 식탐이 쩝쩝댈수록
더 완강하게 숨어드는 살점들
속속들이 다 발라먹지 못한다.
깊은 바다를 뼈 속 깊이 감추고 있다가
내 짧은 혓바닥에서 뒤척거려지다가
목구멍으로 간단하게 삼켜지기엔
아무래도 억울했던 게다.
게 몸 안에서 찰지게 육화되던
손 발까지 다 달린 바다는,
레모나, 레모나 / 강 수
레모나를 먹는다. 피로회복, 기미, 주근깨에 좋다는 비타민 C를 먹는다. 1회에 1포씩 먹으라고 하지만, 시고 떫떠름한 그 맛이 그리워 나는 계속 먹어댄다. 오줌이 노랗게 되더군. 레모나, 그 속에는 아스코르빈산96%(520.83mg), 리보플라빈(2mg), 염산피리독신(5mg)이 흐르는 고독이 살고. 얼굴없는 내가 살고, 하얀 달빛 떨어지는 지중해 너머 과수원(果樹園)엔 열매가 열리지 않는 레몬 나무들이 자란다. 얼굴없는 사람들이 레몬을 따고, 공장에서는 쉴 새 없이 레모나가 나오고, 나는 계속 레모나를 먹어대고, 편집증 환자처럼 계속 먹어대고. 노오란 오줌만 나오더군. 그런 것이더군. 고독이란.
직선과 원 /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 유홍준
어머니 커다란 독에 갇혀 우시네
엉덩이가 펑퍼짐한 어머니
텅 빈 독 속에 갇혀 우시네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 우시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어머니
아랫배가 훌쭉한 어머니
배암으로 우시네
두꺼비로 우시네
마른 바람의 혓바닥으로 우시네
텅 텅 독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텅 텅 텅 텅 빈 독 두드리며 우시네
속절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우시네
일흔 살 어머니 두드리면
댕그랑 댕그랑 맑은 울음 울리는 빈 독
나, 손마디로 두드리며 묻네
간장 같은 된장 같은 어머니, 거기 계셔요?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륵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숫돌 /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건빵 먹는 밤 / 서안나
아주 어두운 밤이었어. 내가 나인지도 확신 할 수 없는 밤에 건빵봉지를 뜯었어. 내 몸에 실밥들이 툭툭 뜯어져. 갑자기 어떤 사내의 손이 건빵봉지 안으로 쑥 들어왔지. 내 살을 한 움큼 집어들었어. 단단하게 사각으로 뭉쳐있던 내 살들이 구석으로 어지럽게 흩어졌어. 사내의 손길이 내 몸을 휘저을 때마다 나는 아파야 했지. 내 살들이 사내의 손아귀에서 눈물처럼 뱉어지곤 했어. 사내의 손이 한 움큼 내 살을 집어 입안에 넣었어. 눈을 감았지. 달콤하게 녹아있던 별들이 다시 내 몸을 환하게 비춰주었지. 가끔 사내가 콧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때 파도가 몰려들고 칸나꽃이 피고 지고 붉은 해가 내 나이만큼 뜨고 지고 내 몸이 붉어 지기도하고
내가 나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어두운 밤
건빵을 먹는 밤
내가 내 살을 처연하게 뜯어먹는 도시의 밤
빈집 / 정철훈
영하 이십도
산장에 주인장은 없고
씩씩 하얀 김을 뿜어대며
기름보일러만 요란하게 돌아간다
주인은 일주일에 한번 내려온다니
나머지 엿새는 집이 집의 주인이요
집 속에 집이 산다
지붕이 들썩였던가
고드름이 퍼석 떨어지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쩍 달라붙는다
문고리는 길손의 손을 바싹 잡아당기며
말한다
네 안에 사람을 들여라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는 가지를 흔들어
마른눈을 뿌린다
외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정오에서 슬며시 비낀
시간인데도 앞이 캄캄했다
캄캄하면 됐다
그 먹먹함을 길동무 삼아
산을 내려왔다
명태 / 임영석
입을 짝 벌린 명태 한마리 묶어 자동차 트렁크에
몇 년을 달아 놓고 다녔다 트렁크를 열 때마다 놈은
눈을 더 부릅뜨고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몇 년을 굶은
놈의 몸을 만지니 이미 몸은 새가 되어 날아가고
두 눈만 살아서 바다로 돌아가겠다는 자세다
몇 년을 굶은 마른 명태의 입에서는 본능의 힘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요동을 치는지
실타래가 삭아 더는 묶어 놓을 수가 없다
잠든 기억, 별을 찾다 / 김상훈
유리조각이 박힌 담 장 너머 유년이 잠든 음습한 그늘, 담쟁이 넝쿨에 덮인 기억의 방에는 창이 없다 길 잃은 별 하나가 어두운 콘크리트 숲 너머로 추락했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아마도 치밀한 궤도의 이단이거나 탄성계수가 아주 낮아 버려진 낙오자였을지 모른다 슬피 우는 날마다 어느 별에선가 보내는, 모르스 부호보다 더 단조로운 그 파장은 싸리 꽃그늘에 남겨진 뱀의 허물을 닮았다 빛이 들지 않는 네모난 비밀의 방에는 또 다른 비행을 준비하는 꿈들이 산다 긴 잠에서 깨어나는 언젠가, 꽃대를 흔드는 바람을 타고 오르는 날 나는 바오밥 나무가 산다는 그 별을 찾아 나설 것이다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해 사막으로 추락 할지라도 결코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겠다 잠든 기억은 나날이 깨어나 귀소의 본능처럼 별을 찾을 것이다 돌아가야지, 전갈자리나 카시오페이아 또는 그 너머의 어느 별에 나는 나의 생존을 알리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것이다 기어코 언젠가는 모두 내가 살아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슬피 우는 누군가의 술잔 속에 별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부전자전 / 이면우
일찍이 성욕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시도 때도 없
이 쳐들고 올라와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꼬집어 죽여줘
야 했다
나이 쉰 되며 비로소 피가 맑아졌다 속으로 휴우, 한
숨 쉬며 안도한다 이젠 여자를 무심히 볼 수 있게된 거
다 그런데
열두살 된 아이, 제 고추가 너무 자주 빳빳해져 고민
이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밤, 나는 꼼짝없이 한 방 꽝
맞아버렸다
아내는 십년농사 헛농사라며 방바닥을 친다 신부님
되라고, 눈 비 뚫고 업고 걸려 읍내 성당에 다녔는데 그
래서야 어떻게 그 먼 길 가겠느냐며
그러더니 어느새 깔깔대며 부전자전, 하고 외치는 것
이다
요즘, 나이 먹은 것들 / 정성필
요즘 젊은이들 만나
말을 걸어 보라.
또박또박 잘도 대답한다.
차마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치부까지
자박자박 다 말한다.
누군, 버릇없다 말하고
누군, 할 말 다하고 사는 게
누구 덕인지 아느냐고 으스대지만
요즘, 젊은것들 상관없다.
일주일을 벌어, 친구 모아 한턱 쏘고
한 달을 일해, 최신 휴대폰으로 바꾸어 버리고
일년을 모아, 배낭 메고 여행 간다.
누가 무어라 해도 요즘, 젊은이들
일 시켜 보면
하고 싶은 일이면 시키지 않아도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이면 미련도 없다.
혹시 요즘 젊은이들과 살아가는
요즘, 나이 드신 분이라면
젊은것들 앞에서 나이든 체하지 마라.
요즘, 나이든 것들
요즘, 젊은것들 보기에는
거드름이나 피우고 뒤로 뒷돈이나 챙기는
요즘, 나이든 것들 영, 본받을 것 없다고 한단다
꽃들은 상처 자국에서 핀다 / 배용제
뿌리 잘린 것들의 밑바닥엔 모두 상처가 있지
조팝나무 가지가 꽂힌 그릇의 물을 갈아주며 그가 중얼거린다
봄빛을 따라간 산책길에서
주워 온 꺾인 가지 몇,
시퍼런 눈조차 뜨지 못했던 것들 어느새
새하얀 연고 같은 꽃들을 매달고 있다
무슨 보물인 양 여기는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을 보면서
고아원 양지바른 곳에서
여린 가지를 뻗고 자라온 그가
남매를 두고서도 또 다른 아이를 원하는 집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지껏 삼켰을 눈물에 대해
어쩐지 그의 웃음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물이 싱싱해질수록 더욱 더 선명한
조팝나무 저 꽃들,
바람에 날려 온 봄빛의 부스러기일지도 몰라
상처를 딛고 악착같이 반짝이는 딱지 같은 꽃들을
무슨 별인 양 바라보는
그의 양팔에 아이들이 매달린다
어떻게 이것들이 내게서 생겼는지
햇살과 공기와 구름과 모든 계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그러나 꽃들이 제 몸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것들이 단단한 씨앗을 품을 때까지
아직은 잘린 상처로 눈물을 삼키며 허공을 움켜쥔
조팝나무 가지의 아슬아슬한 터전, 그의 봄날
퉁퉁 불은 젖 /고진하
늦은 아침
내가 세들어 사는 집 대문을
쓱 밀고 들어서니
흙 냄새가 물씬 풍긴다
무려 십수 년 동안 짓누르던
시멘트 덩어리를 벗겨낸
마당
갓 태어난 흙 마당에
흰둥이는
퉁퉁 불은 젖이 달린 배를 깔고
납죽 엎디어 잇다
여덟 마리 강아지들에게 빨리던
젖
여덟 마리 강아지들
어디론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젖몸살이 날 법도 하지만
흰둥이는
끙끙대는 기미도 없이
퉁퉁 불은 젖을
올망졸망
매달리던 흰 강아지들 대신
흙 냄새 물씬한
갓 태어난 어린 지구에 덥석 물리고
오수를 즐기고 있다
절 골 / 송진권 (4회 창비당선작)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랴 한걸음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런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지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걸음씩 들어 갔다네 눈은 퍼붓는다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런 여자가 옶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런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 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커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놈아 거가 워디라고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커튼 눈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나겄냐 뒤징 줄 모르구 워딜 가는 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 본께 당산나무에 쌓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르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시상이 훤한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 강생이 거치 집으로 내달렸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당산나무 저티 가믄서는 절해가며 아이구 할아버지 헌다누만
가시방죽 / 박규리
너와 함께 이 바닥에서 썩고 싶다
푹푹 썩어 진흙탕이 되고 싶다
진저리치게 끓어오르던
그리움과 분노와 견딜 수 없는 욕정
네가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는 동안
나는 뼛속까지 깊이 썩었다
아무래도 한생쯤 더 썩어야겠다
문드러져 문드러져 척척 고여야겠다
이 흙바닥 위로 너는 맑게 흘러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빨리 흘러라
내 영혼의 썩은 물이 서서히 흘러, 닿기 전에
한줄기 내 더러운 눈물이
너의 푸른 살에 섬뜩, 닿기 전에
※가시방죽-가시연
무수 / 송진권
숱한 세월이 흘렀는디두 어제 일 겉다야
눈이 어둔 우리 고모 시래기 거튼 푸석한 손으로
막걸리 자신 입을 훔치며 무짠지 집어들고
찬찬히 그때를 짚어보시는디
하늘이 무수 대강이에 오른 파랑물 같은 봄날
해토한 움을 열고 우리 고모부 고종남씨 무수를 꺼냈겄다
삼동을 날 동안 무수 하나로 조석을 해댄
억척배기 우리 고모 박딸금씨도 그 저티서
광우리 무수를 담고 있었는디
얼렐레
내남적없이 하 배고픈 봄날에 박딸금씨
기중 못난 무수 하날 골라
쓱쓱 광목치마 말기에 닦아
한입 베물려는디
담배참으로 아지랑이나 쳐다보며 해찰하던
고모부 고종남씨가 여편네 고쟁이 새로 뵈는 무수 거튼
허연 다리통을 보고 만 거라
마음이 동한 고종남씨 싫다는 고모를 끌고
물 마른 봇도랑 새로 들어가
일을 벌이셨다는디
어따야
쉰밥 취급하던 여편넬 그리 장하게 밀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디
갓 날아온 제비년들이
전깃줄에 나리비로 앉아서들
난 다 봤는디
다 봤는디 머
하 입싸게 놀려대고
입 무거운 굴왕신마저도 움 속에서
우멍한 눈을 거멓게 뜨고는 신들신들 웃었다는디
낯 붉어진 박딸금씨
주섬주섬 광우리 무수를 이고
지아비 앞세우고 동네 입새 들어섰는디
삼동네 꽃다지 번지드끼
매초롬한 제비년들 입방아를 찧고 다녀
몇날을 얼굴을 못 들고 댕겼다는디
그 고모부 동란 때 잃고
삼남매 혼자 키워낸
아직 정정한 우리 고모 박딸금씨
아흔에서 둘이 빠지는 미수(米壽)
무수만 보믄 얼굴이 붉어진다고
갓 시물 난 시악시 겉다고
막걸리 대접 부시며
아직도 보얀 다리통 드러내며
희벌쭉 웃으시는 우리 고모 박딸금씨
시상 최고로 맛난 건
겨울 지난 무수 낫으로 썩썩 삐져 먹는 거라고
체머리 흔들며 말씀하시지요
아덜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며느리한테 퉁박을 맞으면
애고 무시라
애고 무시라 하시믄서두요
신발을 잃다 / 이재무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았다
돈 들여 장만한 새 신 아직도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가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혀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서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은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것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길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려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항아리 속 된장처럼 / 이재무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펄펄 끓는 성질에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진득허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품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
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
식탁에 오르자는 것이야
봄 / 조풍호
예전 같으면, 정오 사이렌 막 불었을, 기차역 부근 여시 할매 국박집.
미닫이를 열고 눈을 털고 들어오는 건들건들 잔나비 상호 사내 괄괄허게 말한다.
시방 저 눈발 좀 보소. 요리조리 방앗간에 나갈 구녁만 찾던 딱 바람난 년 짝이여.
무신 핑곌 연구 했간디 봄 외출을 다 했다냐.
가는 목에 두른 꽃무늬 스카프 약간 추워 보이는, 사십 줄 여자 뜨거운
곰국 호호 불어 넘기다 입천장 다 덴다.
사내도 그걸 알고, 빨간 루즈 여시 할매 빠르게 눈 돌리며, 나비야 무지
춥제이 여여여여 손바닥 쳐 입구 줄무늬 고양이 부르고
고양이, 들은 체도 안 한다
봄은 소주를 마신다 / 이은채
납죽납죽 받아 마신 낮술에,
취기가,
물오르듯
내 아랫도리를 은밀히 더듬고 있다
봄은 소주를 마신다
저기, 저, 먼 데 산골짜기 아래
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구릉이 구렁이 같이
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
기어들고 있다
오월 / 이은채
언덕은 멀리 귀를 모으고 숲은 고요했네
핀들핀들 몸을 흔들던 풀꽃방망이들 내 물컹한 종아릴 툭툭 치는 짓궂게 웃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몸을 옮기며 저 새들 힘차게 깃을 터는 숨 고르는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살 어린 잎새에 내려앉는 조심스레 스며드는
꽃다지 냉이꽃 가늘가늘 목을 젖히며 웃는 몹시도 까불대는
내가 이 언덕, 귀가 확 트이면 알 수 있을까
앞섶 들추어 몰래 젖을 물렸을 저 샛강 낭창한 허리가 내 팔에 안겼다 스르르 풀려나가는 소리와
그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저물녘 강둑에 나앉아 듣고 있을 물이끼 자라는 소리 같은 거
지금 막 그대 이마를 스을쩍 문지르고 가는 햇살의 소리
그 햇살 꼴깍꼴깍 받아 마시고 있는 잎새의 푸른 목젖 소리 같은 거
언덕은 멀리 귀를 모으고 숲은 고요했네
양철 낙엽 / 김기택
또 겨울.
나무 밑에 전봇대와 담벼락 주변에
몰려 있던 낙엽들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온다.
구두들에게 밟히고
타이어들이 밀어낸 바람에 날린다
아스팔트와 마찰할 때마다
속이 텅 빈 금속성 소리가
잎맥에서 새어 나온다.
오프너로 딴 날카로운 깡통뚜껑 자국이
잎 가장자리에 삐죽삐죽 나와 있다.
한때 양철에 그려져 있던
푸른 과실의 그림과 바람의 긴 글자들은
이미 붉은 녹이 되어 있다.
쓰레기와 뒤섞여
담을 오를 듯 홍게들처럼 우글거린다.
산성비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한다.
명태국은 시원하다 / 유창성
명태국을 먹다보면
섬뜩해질 때가 많지요,
가끔이지만 목구멍에 날카로운
낚싯바늘을 달고 있는 생태들
보곤 하는데요, 궁금하여 전화해 본
수산청 산하 명태연구소 직원은 농담처럼
그들의 죽음 일러줍니다
직접적인 사인을 알 수 없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죽는 것 아니겠냐는
너무나 간단한 이치,
그러면 며칠 만에 뭍으로 올라오냐 했더니
이삼 일 정도라고
친절히 일러줍니다
무엇이 걸린지도 모른 채
생존해 있었을 그 시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에도
너무나 짧았을 그 시간,
눈도 못 감고 여기까지 온 명태를 보다보니
문득,
명태국을 먹다 말고,
괜스레
내장 안쪽부터
서늘합니다.
날아가는 방 / 유성찬
이삿짐을 다 싸두고도 아내는,
허공에 걸어둔 종이학하나 어쩌지 못하나보다
산동네 반 지하 단칸 방, 그 밤 내 이삿짐을 싸다가
방안 가득 걸어둔 종이학들은 거두지 못한 채
잠이 든 척 누운 아내,
허공에다 뭘 저리 걸어두었나
날아오른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어디로든 떼 지어 날아갈 성 싶다
이 방마저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려만,
자꾸만 한숨소리에 침몰해 버릴 듯한
半地下의 방,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내일 아침 자고일어나면 어디든
다른 곳에 살고 있다면
좋겠다는 아내
어디로 갈까
막막한 마음에 아무리 떠올려 보지만
좀처럼 갈 곳은 떠오르지 않고
문득, 고향땅 송도다리께를 떠올려본다
아내와 처음 만나 살았던 판잣집
함께 살았던 제비부부는 아직
잘 살고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아내 곁에 누워 잠을 청해보는 밤,
멀리, 담장 너머
누구네 집 天井을 이고 가는 중인지,
한 무리의 철새들
무리 지어 떠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부부 누워 잠든 방을 달고
부지런히 이동해 왔을 저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떠나가는 철새들 틈에 끼어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학들이 끌고 가는 저 작은 방 속
어쩌면 어느 九天을 횡단해 가고 있을지 모를
아내와 나
2005년 전북도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 정연홍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쇠죽을 끓이며 / 정연홍
아버지는 오늘도 쇠죽솥 아궁이에 불 지피신다
마른 솔잎 밑불 만드시고
솔가지 꺾어꺾어 얹으신 후
장작개비 몇 개 던져 넣으신다
매운 연기에 눈물 몇 방울 훔치시고
후후 입부채로 불 일으키신다
어설프게 타오르던 장작도
활 활 온몸을 태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저와 같은 것임을
가족 위해 온몸 던지는 가장이 저와 같음을
타오른 불길은
따뜻한 한 솥의 밥이 되고 쇠죽이 되고
구들장 어둠 속 거쳐간 저 불길은
밤새 노동으로
지친 노부모의 허리를 지져 줄 것이다
금세 달아 올랐다가 식어 버리는
현대식 보일러의 그 간사함 보다
은은하고 깊게, 뼈 속으로 스며들어 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저와 같음이 아닐까
기름을 넣어 주어야만 불붙는 보일러보다
장작 몇 개비만으로도 밤새 구들장을 데워주는!
양철굴뚝과 나팔꽃/ 유창성
뜨거운 양철굴뚝으로
나팔꽃 줄기가 타고 오른다.
나팔꽃 줄기는 타고 오르면서,
뜨거움도 모른 채
양철굴뚝을 겁도 없이 부둥켜안을 뿐,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양철굴뚝은 이미 뜨거울 만큼 뜨거워져 있다.
나팔꽃 줄기가 양철굴뚝을 부둥켜안는다
부둥켜안고는 겁도 모른 채,
뜨거움도 모른 채, 꽃을 피운다
뚜뚜뚜뚜… 나팔을 불어댄다
놀라워라,
서로 다르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뜨거운 그대
망설이면서도 어떻게든 닿고 싶은 날,
내 몸 태워가면서도
그대에게 오를 수밖에 없는 마음,
타 버려도 내 몸이 다 타 버려도
성난 그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
사랑이란, 저런 것 아니겠느냐
꽃 피워 물고 성난 그대를 향해
나팔 빼어 불며 다가서는 것,
성난 양철굴뚝 하나를 온몸으로 품어 버리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겨울의 유서遺書 / 한우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혹한의 중심을 딛고 나는 건너가리니
고단한 삶의 누추를 단단히 얼리어 벽을 세우고
혹한의 맑음을 재단하여 창을 달아내면
그대의 이마에 징표처럼 돋아나는 분홍빛이여
내 삶의 남루들이 제각기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밤 깊은 겨울강의 단단한 얼음장 위,
한 무리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古墳群 마을 / 김일용
아침해가 다른 곳보다 일찍 돋는 마을
지문이 박힌 어머니의 옥토와
할아버지의 씨오쟁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마을에 가면
만삭의 아낙처럼 배부른 집들
신라인의 진신사리를 모셔놓고
둥그스레한 어깨 서로의 키를 낮추며
울타리도 없이 이웃해 살고 있다
문패와 자물쇠가 없는 마을
항아리 깊숙이 타임캡술을 내장 시키고
가끔 설화들 뛰쳐나와 어둠 쌓인 마을을 돌며
둘러앉은 화롯가에 두런두런 밤새 이야기를 지폈다
밤새들 부는 피리 소리를 들여앉히고
빗살무늬 옹배기에 달빛 물든 차를 우렸다
싸락눈 내리는 골목길에도
더운 김이 저녁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할머니 반짇고리 손때 묻은 말씀들
호젓이 남아 돋을새김 하는 마을
여기서는 미움이나 원망, 절망까지도
향기로운 꽃씨가 되고 있다
할아버지 씨오쟁이 속 씨앗들
봉긋봉긋 천 년 잠을 깨어나는
어머니의 기름진 땅
눈 내리니 덕석*을 생각함 / 박흥식
섣달그믐을 앞둔 불 꺼진 구멍가게 맥주상자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소주병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 따라 들린다
눈은 유들유들 내리고
고양이 쓰레기종량제 비닐봉지를 찢어 헤치는
이 밤은 갈 곳 없는 중년의 저 사내와 눈 밑에 딴딴히 얼어붙은 땅뿐이로구나
*덕석 - 추울 때 소의 등을 덮어주는 멍석
뇌물 수수조사 축소 / 주경림
실토하라고
모시조개를 소금물에 담근다
몇몇은 입을 겨우 떼고 모래 알갱이를 뱉어낸다
소금물로 깨끗이 씻어내어 한소끔 끓여낸다
모두가 입을 벌려 조갯살을 드러내서
투명함을 증명하는데
한 놈 만 아직도 입을 꾹 다문 채 묵묵 부답인데
그럴 수 밖에
진흙 뻘이 가득 담겨 입을 여는 날에는
시원하게 끓인 국물을 모두 버리게 된다
죄는 묵묵 부답인 그놈이 모두 뒤집어 써라
네가 입을 여는 날에는......
돼지 / 안도현
저 돼지 한마리
멱살 잡힌 채 정육점 입구까지 끌려온 돼지 한 마리
구차한 기색이란 없다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꼭꼭 닫아두었던 가슴 열어제치고
먹는 데 골몰하던 거추장스런 큰 머리 떼어내고
다시는 기어다니지 안겠다고 발목도 떼어내고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처럼
뛰어오른다 경쾌하게
이 못된 세상 박차고 뛰어 오른다
꿀꿀거리지도 않는다
화살 / 이윤학
- 생선구이
가죽이 터진 채 굳게 입을 다물고
버티고 있다 저 통통한 시체의 과거,
우리의 입맛은 과거를 동경하고 있다
저 놈도 언젠가, 물 속에 버려졌을 것이다 버림받고 떠돌다
무엇인가에 놀라 뜨인 눈이 쉽게 감기지 않는다
아픈 곳에 눈길을 줄 수도 없는 물고기 한 마리가
놀라움에 약한 가죽을 열고 괴로운 비밀의
하얀 속살을 불쑥 토해냈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눈부심의 속살, 우르르 달려드는 눈길......
김이 빠져 나오는 찢어진 가죽,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인가!
몸을 감싸주던 체온이 사라진 후
동그란 물고기의 한쪽 눈이 남는다
놀라움에 조금씩 가죽을 찢었을, 잠들지 않는 눈
나는 얼마나 많은 저 눈깔을 빼먹었던가
깊은 물 속을 헤쳐온 물고기의 가시는 앙상하게
꼬리를 향하여, 무수히 활처럼 휘어져 있다
눈 위에 쓴 가족 / 한우진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유성우流星雨에 젖은 날 / 최정진
유성우가 내린다하여 강변에 간다
아직은 저녁이어서
수면을 따라 걸으며 기다리는 밤
석양 앞세워 밀물 차 오르는 바다처럼
강도 만조를 꿈꾸는 걸까
수면이 상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뜨거운 숨 뿜으며 거꾸로 걷는 아줌마들
등이 아니라, 밤으로 가는 저녁 하늘처럼
짙어가는 표정 마주 보고 걷는다
맞닥뜨린다는 것은 본래
더 가까워질 거리가 남아있지 않을 때
터벅터벅 멀어질 일만 남을 때 아니었나
눈 마주치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다니
앞서 가는 아줌마 눈이 밤처럼 깊어지고
거꾸로 보면 느낌표 같은 그림자가
찰박찰박 흔들리다 내 발을 향해 차 오른다
한참을 걷다 거꾸로 흐르던 하류가
상류와 만나는 곳에서 멈춘다
차 오르던 밀물도 어디쯤에서 썰물과 만나
흰 물거품 일으키며
서로의 안부, 파도소리로 토닥였으리라
강변에 무리 이룬 억새
유성우를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 잔잔하다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않는 수면에서
송사리들이 물 밖으로 몸을 활시위처럼 당긴다
그녀가 내 밖으로 튀었을 때도
저렇게 반짝이는 것이 흘렀었나
오늘은 페르세우스자리에서 별들이
지상으로 튀는 날
만조의 별자리가 쏟은 눈물
우린 그것을 유성우라 부른다
북 / 한우진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닭 이야기 / 김정희
'전기구이통닭한마리5천원포장해드립니다'
긴 쇠꼬챙이가 닭들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오열횡대로 늘어선 닭들이 회전하며 익어 가는 동안 바깥에선
닭 모양을 한 새빨간 네온 불이 손님들을 부른다
대문간 옆 닭장에서 아비와 수탉이 실랑이를 하고 있다
놀란 닭들이 한데 몰려다니며 소리를 질러댄다 마침내
꽁지를 붙잡혀 끌려나오는 놈, 벼슬이 유난히도 붉다
나는 4홉들이 소주를 사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갈색소주병 너머로 모가지 떨군 채 피 흘리는 놈이 보인다
부엌칼을 쥔 아비의 오른손이 부채 만하다
아비는 아무 말 없이 또랑으로 피를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아비 등뒤에 쪼그려 앉는다
좀 전까지 닭장 안에서 배추 잎을 쪼던 그 놈의 부리와
새벽을 흔들던 높은 목청이 사라진 자리
나는 새끼손가락을 붉은 또랑 속으로 가만히 밀어 넣어본다
손바닥 가득 땀이 고인다
저녁 국그릇 속에 그 놈의 넓적다리와 가슴살이 떠있다
빨간 대추 두 개가 놈의 눈알처럼 둥둥 떠다닌다
아비는 소주를 목구멍으로 연거푸 털어 넣는다
잔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철철 소주를 따른다
수탉울음으로 가득 찬 국그릇
닭의 찢겨진 생애가 은수저 위에 얹히고 얹히고
전기구이통닭을 든 손들이 하나 둘씩 사방으로 흩어져간다
어디선가 닭 우는소리 들려온다
저 네온 속 어디?
목련꽃 브라자 / 복효근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꽃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조찬朝餐 / 나희덕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어제부터 내리고 있는가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木튤립나무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먹고 있다
박새들이 한 사흘 쪼아먹고 가겠다
머리 깎는 시간 / 김기택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
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
스프레이로 촉촉하게 물을 뿌린다.
이 무성한 가지를 어떻게 剪枝하는 게 좋을까
빗과 가위를 들고 잠시 궁리하는 눈치다.
이발소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 조용하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간다. 가위 소리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도록 귀 기울여 듣는다.
싹둑, 머리카락이 가윗날에 잘릴 때
온몸으로 퍼지는 차가운 진동.
후드득, 흰 천 위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덩어리들.
싹둑싹둑 재깍재깍 후드득후드득······
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
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에, 풀잎에, 도랑에, 돌에, 유리창에, 양철통에
저마다 다른 빗소리들이 서로 겹쳐지는 소리.
처마에서 새끼줄처럼 굵게 꼬이며 떨어지는 소리.
물뿌리개로 찬물을 흠뻑 부으며
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
머리가 더 동굴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
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잔치국수 하나 해주세요 / 이성복
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죽은 이도」
내가 담장 너머로 ‘복분식 아줌마, 잔치 국수 하나 해 주세요’ 그러면 ‘삼십 분 있다가 와요’ 하기도 하고 ‘오늘 바빠서 안 돼요’ 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횡단보도 두 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 식당에 아구탕 먹으로 간다.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보다,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알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
벚나무는 건달같이 / 안도현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만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
자귀꽃 / 박성우
게으름뱅이 자귀나무는
봄을 건넌 뒤에야 기지개 켠다
저거 잘라버리지, 쓱쓱 날 세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연초록 눈을 치켜뜬다
허리춤에서 부챗살 꺼내 펼치듯
순식간에 푸르러져서는 애써 태연한 척,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 말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 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배달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
약력 없는 시인 / 안주철
약력 없는 시인은 백살까지 살아도
삶이 너무 짧다
백살까지 늙지 않고 글을 써도
좋은 시를 한편도 쓸 수 없다
새로 나온 시집을 펼쳐들고
중년 시인의 괴로움을 생각한다
그는 근 이십년 동안 자신의 시집
안쪽 표지에 한줄의 약력도 늘리지 못했다
출생과 한권의 시집
몇권의 시집이 더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집들은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출판사다
약력 없는 시인은 시집을 내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쓰지 못한 것이 무언지
왜 자신의 시가 서정적인지
사거리 정육점 / 이은림
후두둑, 난데없는 밤소낙비다 빗물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옷자락이 젖고 머리카락이 무거워진다 빗방울을 핑계 삼아 안경은 마음껏 세상을 왜곡시킨다 일그러지는 붉은 빛, 몇 개의 십자가가 공중에 삐딱하게 떠 있다 오호, 붉은 빛은 바닥에도 있다 축축하고 끈끈한 저것 희희락락 하는 것 어둠의 거친 살을 핥는다 어둠은 기우뚱한다 신음한다 골목 끝으로 달아나며 뒹군다 낼름대는 혓바닥 공기는 다시 눅눅해진다 사거리에는 정육점이 있다 유곽의 한 켠처럼 음침하게 환한 곳 살집 좋은 암소 뒷다리 붉은 불빛 뒤집어쓰고 매달려 있다 바둥거린다 뚝뚝 떨어지는 피 아직도 붉고 선명하다 사라진 몸 찾아 돌고도는 따스한 피 정육점 여자의 손등에 투둑,
들어간 사람들 / 이진명
외할머니 일흔일곱에 들어갔다
한해 뒤 어머니 마흔일곱에 들어갔다
두 사람 다 깊은 밤을 타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1년 반씩
병고에 시달렸지만 들어갈 때는
병고도 씻은 듯이 놓았다
두 사람 들어간 문은 좁은 문은 아닌 것 같다
일흔일곱도 받고 마흔일곱도 받은 걸 보면
좁은 문은 아니나
옷보따리 하나 끼지 못하게 한 걸 보면
엄격한 문인 것 같다
두 사람 거기로 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기 법이 그런가 보았다
하긴 외할머니 어머니
여기서도 법도 잘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들어왔으면
문 꼬옥 닫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비 듣는 밤 / 최창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소리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우는구나
제 생을 밀어내다 축 늘어져서는
그만 소리하지 않는
저 마른 목의 풀이며 꽃들이 나를
숲이고 들이고 추적추적 세워놓고 있구나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세울 것처럼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밤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문 앞까지 머물러서는
빗소리를 세워두는 구나
비야, 나도 네 빗소리에 들어
내 마른 삶을 고백하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몰라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로나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몰라
빗소리에 가만 귀를 세워두고
잠에 들지 못하는 생들이 안부 묻는 밤
비야. 혼자인 비야
너와 나 이렇게 마주하여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고 노래하면 되지 않겠나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마냥 들어주면 되지 않겠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다의 슬픔을 본다 / 정영선
마른 미역이 물에 잠기면 뻣뻣하게 굳은 몸을 푸는 것을
볼 수 있다 단단하게 잠근 마음을 헤쳐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바다 비린내를 풍기며 철썩이는 파도 자락이 허리춤에서 빠
져나온다 갈피 속에 밴 갈매기 울음도 끼룩 소리를 낸다 모
래알들로 지녀온 바다꿈을 털어낸다 부엌은 바다로 넘실댄다
육지의 햇살이 풀어놓은 햇빛바다에 잠겨 졸음의 물살에 깊
이 떠밀렸던 기억을 살려낸다 하얗게 소금을 내뱉으며 실어
증에 빠진, 입혀주는 대로 바람을 껴입고 건어물전에 누웠던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그 몸을 넘나들던 바다에의 기억
이 수돗물 아래서 출렁인다 응어리들을 해변으로 왕왕 몰고
와 패대기치던 기억 속의 바다를 만나는 걸까 무표정한 바람
옷을 입고 세상을 견딘 미역처럼 나는 어떤 눈빛 속으로 침
몰하지 않기 위해 때때로 스스로를 건조시킬 때가 있다 그때
마다 나는 연민으로 출렁이는 바다, 푸르게 살아나는 바다이
고 싶었다
북 / 정영선
소가죽을 불에 대면 무늬가 나타난다 살아 있을 때의 삶의 무늬, 첫 코뚜레 뚫던 글썽인 눈에서 하늘이 핑글 돌던, 그렁그렁 아픔을 담아내던, 흠씬 매 맞던 굴욕의 울음이 밴 무늬가 그려진다 그 울음을 무두질해서 소리의 색깔을 만든다 목소리 같은 사람 없듯이 같은 북소리도 없다 툭 건드리면 신명의 울음판, 제 울음을 버리고 다만 북 치는 자를 실을 뿐이라는 북은 팽팽하다 저를 비워낸 증거일까 허공을 쳐서 의미의 집을 만든다 북채로 소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친다 둥둥둥...... 밭둑에서 쟁기질하던 소 한 마리가 나를 담기에도 벅찬 내 생을 싣고 멀리멀리 떠난다
한 마리 소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오래 되새김질한다
석유난로 / 최형일
삶이 뜨거울 수 있는 것은 제 속 깊은 곳 젖은 심지 하나
품고 살기 때문이다. 사납도록 휘발되는 겉불이 제 몫의 파
아란 심지불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누구나 저를 태운
잉걸불 하나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이 기껏 그을음만
켜켜이 되짚어 쓰고마는 일이라는 것쯤은 가람식당 석유난
로도 아는 사실이다. 매쾌한 석유내음에 불살라 온 눈물 난
사연이야 한 두줌이겠는가. 살아가는 것이 저를 태우며 세
상에 빛 하나 가만히 지피는 것이라는 것을, 제 속 태워 댕
기는 붉은 꽃등이라는 것을 저를 태워 본 사람은 안다. 그
것이 누군가의 시린 손등에 부비어져 시드는 일이 되고 말
지라도 제 가슴에 화인(火印)을 지져대는 부질없는 짓이라
도 진실로 젖은 삶을 사는 속심지는 안다.
아이야 아프지 마라 / 정성필
아이야 아프지 마라
집에는 남은 돈 십만 원이 전부란다
전기세수도세가스값전화세의료보험자동차세주민세관리비
신문 값, 아 ! 신문은 끊었지
그래도 우유 값에 너희 둘 교육비 합쳐 십오만 원
사글세 십만 원 융자금에 카드 비용까지 메우고 나면
남는 돈 십만 원이 전부
우리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면
아빠가 살아야 할 이유는 오직 너희뿐
아이야 아프지 마라
네가 아프면
돈 때문에 너를 외면 할 수도 없고
너 아픈 것을 치료하기 위해
아빠의 정직을 팔아 넘길 수도 없는 현실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아이야 아프지 마라
살면 살수록
왜 사냐고 묻는 것이 허무한 것처럼
우리의 삶이 허무하지 않으려면
아이야 아프지 마라
아이도 아프지 말고
엄마도 아프지 말고
아빠도 아프지 않아야
겨우 버텨 나갈 수 있는 오늘은
감원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하는
웃기는 비극
속울음마저 딱딱해
꿈마저 끊겨져 나가
부딪히는 곳마다 상처들 뿐
가진 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 이곳에서는
가지지 못한 만큼 자유로울 수도 없어
아픈 것도 때론 죄가 될 수 있는 현실에
아이야 아프지 마라
그래도 아이야
이만큼만 버티고 살면
다음엔 무언가 오겠지 하는 희망은 있어
있는 것 표 안나게 쪼개고 없는 것 포기하면서 살다 보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오직 한가지 소망은
아이야 아프지 마라
사기리 탱자나무 / 김종제
목울대에 걸린
가시 같은 시절이 한 때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억센 가시가 되어
제 몸을 제가 스스로 찌르며
서슬 퍼렇게 밀려오는 저 폭풍 같은 세월을
눈 부릅뜨고 막아 보려고 했던
시절이 가까이 있었다
아, 강화도 함허동천 가는
한적한 길 화도면 사기리 길목
수백 년 지키고 선 탱자나무 한 그루
때때로 새들과 나비 날아와
제 몸 지키기 가장 좋아서
야단스럽게 나무 속으로 모여들면
외적에 맞서 성벽 아래 울타리 되어
죽음에 맞서 안간힘을 쓰는 듯한 표정으로
길고 험상궂게 생긴 손가락 내밀고
피 흘리며 소리치다 쓰러지던
슬픈 역할을 맡은
그런 가시 많은 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게
목숨의 끝까지 깊숙하게 박혀 있어
숨쉴 때마다 아프게 하늘을 찔러대는
사기리 탱자나무가 운다 혼백이 운다
세상에 얼마나 속이 탔으면
먹을 수도 없는 시디신 열매를 매달았을까
제 몸이 스스로 가시가 되어
고운 향기 다 드러냈으니
겨드랑이 돋아나는
여린 꽃잎마저 이제 울음이 되는구나
흰눈을 뒤집어 쓴 탱자나무가
백의(白衣)처럼 눈부시다
사기리 탱자나무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범하가 소유, 강화군이 관리하고 있다. 수령 400년 정도의 노거수로 높이는 3.8m이다. 땅 위 28cm 되는 곳에서 3갈래로 갈라지며, 다시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사기리의 길가에 서 있는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줄기목 부분이 많이 상하였고 군데군데 가지가 말라 죽었다. 줄기가 옆으로 처지기 때문에 철제 지주로 지탱하고 있다. 갑곶리의 성 밖에 탱자나무를 심던 무렵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을 500년으로 보기도 한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피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도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네이버 지식
봄밤 / 이면우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 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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