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꽃 / 박라연
감사하다 /정호승
날개/조희선
마찬가지/손희락
가지치기/조인선
옷/남호섭
나는 평안하고 자유롭다/임보
인생/이기철
누가 저 목어를 허공에 달아 놓았는가/권득용
열쇠 /도종환
인연 통장 /조미하
기분을 만지다/김은주
잘 지내고 있어요/목필균
고해성사 / 김봉식
사랑 그대로의 사랑/유영석
지리산 고로쇠나무 / 박라연
그 노인이 지은 집
공단 세탁소 / 하재청
정동진 驛 / 김영남
아내의 생일 / 김두일
희망약국 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아침 시장 / 이상국
그곳 / 이상국
좌판 /송정화
청춘은 간다 / 윤성택
폭설 / 장인수
무섭다 / 허홍구
봄이 오면 산에 들에 / 홍성란
꽃꽂이 꽃 / 이성목
등 이낙봉
은행나무 사리알 / 손택수
폭포 / 손택수
떠도는 전봇대 / 이성목
겨울판화 / 정주연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 이나명
한 사람만 사랑하고 싶다 / 손한옥
똥은 화두(話頭)이다 -강순
느티나무 할아범 / 박동진
내외 / 윤성학
슬픈 바퀴 / 박윤규
하고댁 / 이대흠
동그라미 / 이대흠
성난 돼지감자 / 원구식
상계1동 수락산 입구 / 김기택
돛배 제작소 / 이영옥
밥 / 윤준경
팔월 연못에서 / 주용일
저녁 문상(問喪) / 강인한
씨옥수수전 / 이현승
애인의 연애는 정당한가 / 이상도
비와 목탁 / 이동호
늙은 여자 / 최정례
진지한 진찰실 / 서안나
즐거운 마네킹들 / 서안나
봉분 만들기 / 최광임
꿈꾸는 낙타 / 전서은
명중 / 박해람
다리 / 박해람
긴 나무 의자 / 이하석
사막의 지도 2 / 김연숙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치명적인 사랑 / 정병근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 마종기
낡은 침대 / 박해람
山寺2 / 송문헌
山寺 3/ 송문헌
무화과나무의 꽃 / 박라연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만큼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감사하다 /정호승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왕벗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둥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귀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뜨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풀잎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을
그제서야 알고
감사하며 길을 걸었다
날개/조희선
날기 위해선 양 날개가 있어야 하지
제아무리 크고 힘차도 한쪽으론 안되지
왜 그럴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우린 때로 이런 상식 잊어버리잖아
가끔 우리는 한쪽 날개만 키우려 애쓰잖아
성공, 부, 명예, 행복만을 추구하며
하늘을 사는 사람들
그 인생의 날개에 슬픔, 아픔, 고통, 불행이 함께 있는 건
아름다운 균형을 위해서
그분이 우리의 날개를 손질하시기 때문이지.
마찬가지/손희락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가죽 구두 신고 걷는 길
고무신 끌고는 못 갈 것인가
어차피 걷고 있는 목적지
동일한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진수성찬 식탁이나
초라한 식탁이나
밥 한 그릇 비워 포만감 느끼는 건
마찬가지인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넓은 공간에 누우나
좁은 공간에 누우나
내일 위해 꿈꾸긴
마찬가지인 것을
아직 살아있다는 건/장시하
아직 살아있다는 건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건
아직 사랑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
아직 사랑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건
아직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것
아직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건
아직 아파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
아직 아파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건
아직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아직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건
아직 이별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
아직 이별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건
아직 만들어야 할 추억이 있다는 것
아직 만들어야 할 추억이 있다는 건
아직 삶이 아름답다는 것
가지치기/조인선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생각이 길면 일이 안 된다
가위와 톱을 들고 한 바퀴 돌아보고
큰 가지를 잘라낸다 지난해
바람에 찢어진 가지가 말라 있다
너무 가까워도 볼 수가 없어
꽃눈이 온 자리의 간격을 확인하고
웃자란 곁가지와 잔가지를 쳐낸다
빛은 어느 곳이든 드나들 수 있지만
바람이 통하는 공간 확보도 중요하다
돌아보니 마음을 비운다고
밑동까지 자를 순 없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꽃눈마다 열매 달 수도 없다
달콤한 열매 하나 제대로 먹으려면
거름부터 주어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 마음에 나무 한 그루 환하다
옷/남호섭
목욕탕에
스님이 목욕하러 오셨네.
옷을 다 벗으시니
빼빼 말라서
온몸에 주름살이
쭈글쭈글.
스님 진짜 모습이
그거예요?
아니다.
이것도 벗어야
진짜지.
나는 평안하고 자유롭다/임보
나는 누구를 해치거나 크게 미워한 적이 없으니
나를 원망할 자가 있을 리 없어 마음이 무겁지 않고
내 주머니 속은 늘 몇 푼의 용돈밖에 없으니
어느 도둑에게 털릴까 염려치 않아도 되고
나는 당이나 파들의 세력과는 담을 쌓고 지내니
모함과 저격의 대상이 아니어 편안하고
나는 별로 이름이 없어 세상이 나를 잘 알지 못하니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아 자유롭다
나는 무능한 家長, 게으른 市民
그러나 자유의 詩人이다.
인생/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누가 저 목어를 허공에 달아 놓았는가/권득용
내 몸 속에 단말마처럼 지진이 지나간
진앙의 좌표 선명한 날
묻으로 나온 나는달빛조차 그림자 숨기면
아주 가끔 풍경 소리에 몸을 흔들곤 했지만
참회의 말 건네지도 못하고
해탈의 몸짓 일그러지면
그럴 줄 알았다고 미소짓는 부처
천년을 두고
한 번도 아가미를 벌린 적 없는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 번째 하루였다
열쇠 /도종환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닫혀 있는 문이 참 많다
방문과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자주 만나면서도 외면하며 지나가는 얼굴들
소리 없이 내 이름을 밀어내는 이데올로기들
편견으로 가득한 완고한 집들이 그러하다
등뒤에다 야유와 멸시의 언어를
소금처럼 뿌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문을 열 만능 열쇠가 내게는 없다
이 세상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저 평범한 몇 개의 열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내 열리지 않던 문이
나를 향해 열리는 날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작은 삐걱임과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소리
희망의 소리도 그와 같으리니
인연 통장 /조미하
어느 날 문득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번호 중에
몇 번이나 통화를 하고
몇 번이나 만났을까
정작 필요할 때 거침없이 전화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소중한 인연들을 너무 쉽게 보내거나
방치해서 멀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지금 인연 통장에
저축되어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요
따뜻한 마음을
속 깊은 배려를
아름다운 사랑을
많이 저축해 놓은 사람은 마음 부자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인연은 그렇게 쌓여 갑니다
이 특별한 통장 하나 잘 간직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연 통장에
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연 통장에
오래오래 당신이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기분을 만지다/김은주
인간은 종종
땀보다 돈을 먼저 가지려 하고
설렘보다 희열을 먼저 맛보려 하고
베이스캠프보다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 하고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에
무모해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조바심내고 너무 빨리 좌절한다
자연은
봄 다음 바로 겨울을 맞이하지 않고
뿌리에서 바로 꽃을 피우지 않기에
가을엔 어김없이 열매를 거두고
땅 위에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만물은 물 흐르듯 태어나고 자라고
또 사라진다
자연은 말없이 말해준다
모든 것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은 헛됨이 아닌 과정이라고
잘 지내고 있어요/목필균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묻게 한다.
물음표를 붙이며
안부를 묻는 말
메아리 없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전하게 한다.
온점을 찍으며
안부를 전하는 말
주소 없는 사랑이다.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묻고 싶다가
잘 지내고 있어요.
전하고 싶다.
사랑하는 것은 /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 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고해성사 / 김봉식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듯 싶은데
그때마다 심한 홍역을 치룹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잘못 아닌데
머언 나라의
종소리처럼 아득히 느껴집니다
매번 떨림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겼습니다.
두 글자 한 이름 천만번 곱 외우도록 형벌 내리시길
마음자락 어둡게 만든 죄
둠벙처럼 가둔 죄
눈자락 후미진 눈방울에 머무는 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너무 열심한 나머지
열심히 사랑으로 아픔 나눠 준 죄
아무리 주어도 모자른 사랑의 깊이를 모르는 아득히 큰죄
세상의 말이 시끄럽습니다
사람이 죄인을 만들고
그 사람이 죄인을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듯 싶은데
내 마음이 죄인이 됩니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유영석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른아침 감은눈을 억지스레 떠야하는 피곤한 마음속에도
나른함속에 파묻힌 채 허덕이는 오후의 애뜻한 심정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런 모습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층층계단을 오르내리며 느껴지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속에도
10년이 훨씬넘은 그래서 이제는 삐꺽대기까지 하는 낡은 피아노
그 앞에서 지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내 노래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런 마음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느낄수 있겠죠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도 느낄수 있겠죠
비록 그날이 우리가 이마를 맞댄채 입맞춤하는 아름다운 날이 아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잊혀져 가게 될 각자의 모습으로 안타까워 하는
그런 슬픈날이라 할지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당신의 사랑을 받기 위함이 아닌
사랑을 느끼는 그대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 / 박라연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꽂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리던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그 노인이 지은 집 [2001년 한국일보]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공단 세탁소 / 하재청
가로로 누운 바지 위
소매 뜯긴 수선용 셔츠에
사루비아들 뚝 뚝, 떨어진다
덕지덕지 배설된 파리똥 꿈들이
몰래 꿈틀대는 내리막길 끝나는 곳
세탁소 금 간 유리 너머
염색물 짙은 바지들이 하얀 번호표 달고
빈 호주머니의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숱한 모서리에 부딪쳤을 바지와 셔츠들
보도블럭 위 눈 먼 꿈 하나 슬쩍 던져 놓고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고 있다
하늘 가린 상평공단 사거리 한 모퉁이
반쯤 드러누운 임대아파트의 욕망들
허덕이던 가을 끈에 매달려
뿌연 하늘 건널 채비를 한다
가랑이 짧은 바지의 꿈은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빛이 없는 곳에도 꿈이 자란다는 걸
세상을 거꾸로 서서 본 바지만이 안다
전기 난로 속 빨갛게 곪아야 뜨거워지는 노동이
하얀 수증기로 내려앉는 小寒
먼지 앉은 11인치 티브이 화면 속
마티즈 승용차에 실린 일가족
더러는 추락하고 남은 것들
세탁소 유리 너머 바깥을 기웃거리며
흔들리고 있다
정동진 驛 /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능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내의 생일 / 김두일
생일이라고 들뜬 아내에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어, 아내가 며칠 전에 벗어 장롱 속에 감춰둔 속옷을 꺼내 빨았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후크가 너덜대는 브레이지어와 잔 구멍이 숭숭 뚫려 거미줄처럼 얇아진 팬티. 그토록 오래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아내가 저런 속옷을 입고 사는지 모르고 산 무딘 손이 비누를 벅벅 문질러댔다. 수돗물을 틀지 않았는데도 속옷이 젖고. 시장에서 악착같이 값을 깎던 아내의 힘이 저기 숭숭 뚫린 구멍을 지나 나온 것 같아 늑골이 묵직했다
자꾸 고관절이 아프다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보던 의사는 골다공증이라며 구멍이 숭숭뚫린 아내의 뼈사진을 보여주었다. 뼈에 뚫린 구멍들을 자세히 보니 사나운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아들녀석이 한 입씩 베어문 흔적 옆에 승냥이보다 더 예리하게 뜯어낸 내 이빨자국이 무수하게 널려있었다. 깊은 밤에 마시고 버린 술병이 아내의 뼈속에서 파편처럼 박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는 수렵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 뼈에 좋다는 사골을 넉넉히 사고, 티비에서 광고해대던 속옷을 세트로 사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는 바늘을 쥐고 앉아 너덜너덜한 속옷 구멍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속옷의 구멍이야 바늘로 깁지만 뼈에 난 구멍을 무엇으로 메우려는지. 한무더기 시간이 내 뼈속에서 휘파람을 불며 빠져나가는 오후. 뽀얗게 우러난 사골.
희망약국 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 누런 옥니를 보이며 하회탈처럼 웃는 한 노인이 무씨 반 줌과 한 묶음의 잎담배를 사갔을 뿐이다.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사리고 있다.
씨앗의 환(還)을 꿈꾸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약국 안 시계가 한시를 가리킨다. 담배 한 개비로 허기를 막으며 서 있다. 자전거의 삼천리표 글자도 흔들린다. 시계가 세 시를 가리킨다. 그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 꿈을 매만지며 고개를 떨군다. 균형 잃은 약사의 걸음이 봉투 앞에 멈춘다. 그는 여전히 씨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약사가 건네준, 알싸한 박카스 노란 액속에 애간장 타는 그의 뒷모습이 섞여 넘어간다.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킨다.
환(還)의 길을 찾아주지 못한 씨들을 다시 품고 삼천리표 자전거에 앉는다. 그가 종묘처럼 떨궈놓은 새끼들은 떨이한 간고등어 대가리를 뼈까지 야무지게 발라먹을 것이다. 방죽 지나 흥얼대는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자전거머리도 흥얼흥얼 박달재를 넘는다. 검은 대지에 뿌려진 씨처럼 푸른 별들이 하늘에 흩어져 있다.
200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침 시장 / 이상국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시고 나왔는지 장바닥 목 좋은 곳 깔고 앉으려고 일찍도 나온 할머니가 나생이와 쪽파 뿌리를 손주 머리 빗겨주듯 빗어 단을 묶는다. 각을 뜬지 얼마 안돼 아직 근육이 퍼들쩍거리는 돼지고기를 가득 싣고 가는 리어커를 피하며 출근길의 아가씨가 기겁을 하자 무슨 씹이 어떻다고 씨부렁거리는 리어커꾼의 털모자에서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아직 봄이 이른데 딸기 빛깔이 꼭 칠한 것처럼 곱다. 순대국밥집 앞의 시멘트바닥에 잘생긴 소머리 하나가 새벽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꿈꾸는 표정으로 면도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골목 안이 화안해지며 차 배달 갔다오는 미로다방 아가씨가 어묵가게 아저씨를 향하여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
그곳 / 이상국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를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 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 보고는 한다
좌판 /송정화
낯선 간이역에는 거대한 몽상과 혼돈의 장이 섭니다.
그곳에서는 가끔 죽은 바다도 싱싱하게 거래됩니다.
수전증에 걸린 노파에게 좌판의 生으로 끌려 다니는 그녀는 등 푸른 생선입니다. 미끈거리는 그녀의 몸을 좌판 위에 올려놓고, 노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손으로 진로를 더듬습니다. 제발 나를 풀어 줘. 몽롱한 그녀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지만 푸른 물살의 전율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싱그럽습니다. 가는귀 먹은 노파의 손은 좌판만 땅땅 두드립니다. 비릿한 바다 냄새에 이끌린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신명이 난 노파는 덜덜거리는 손으로 바다를 들고 한껏 부풀립니다. 그녀의 푸른 등에는 매혹의 바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매력적인 바다야. 뭇사내들의 탐욕이 번득입니다. 불빛도 슬쩍 끼어 들어 그녀의 등을 한 번 쓰윽 쓰다듬어 봅니다. 탄력 있는 몸이야. 몽상의 바다 속으로 한 사내가 출렁거리며 걸어 들어옵니다. 노파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도마 위에 모로 눕힙니다. 그녀의 몸에서 우우 깃털처럼 바다의 지느러미가 일어섭니다. 한껏 달구어진 몽상의 도마 위에서 그들이 몸을 섞습니다. 지폐를 챙긴 노파의 손은 알고 있습니다. 비릿한 그녀의 몸 속 깊이 깊이 들어가 보면 바다는 이미 딴 세상으로 훌훌 떠나버린 지 오래란 것을.
[200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청춘은 간다 / 윤성택
내 청춘은 가스통처럼 옮겨다녔다
비바람이 헬멧을 거세게 흘러갈 때
달리지 않는 것들은 미끄러운 시선 밖으로
줄기차게 밀려난다
색색을 늘어뜨린 네온간판들
번번이 골목골목으로 사라진다
길은 인연같이 뻗어와
막다른 곳으로 쓸쓸히 흩어지는 것을
가스통을 짊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보았다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난간을 더듬자
빗줄기가 뇌관처럼 즐비하다
턱을 바싹 당긴 채
굉음으로 앞바퀴 들어 달리다보면
나를 앞서간 사랑까지 가닿을 것 같다
흘깃, 덜컹거리는 가스통을 돌아본다
매여 있는 것은 늘 괴롭다
가끔씩 물보라로 튀어 오르는 잔돌멩이들
길의 방점처럼 귀퉁이에 찍힌다
일순 번개가 치울린다 몸을,
납작 엎드린다 발기된 엔진이 뜨겁다
生 위에 길들여진 길이 끝날지라도
점화되지 못한 청춘을 싣고
나는야 폭탄처럼 달린다
폭설 / 장인수
하늘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백 리 넘어 도시에 살고 있는 애인에게
핸드폰을 쳤다
핸드폰에서 파드닥 튀어나간 음파
여기는 들판 한가운데야
하늘의 언어들이 들판으로 쏟아져 들어 와
무차별적이야
어떤 차별도 없이 쏟아져
하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말
무색(無色)하구나
저돌적으로 퍼붓는 하늘의 언어 앞에서
사랑한다는 우리의 속삭임은
무의미하다 들판을 다 덮어버리고
그칠 기미 없이
쌓이고 또 퍼붓는 하늘의 적설량 앞에서
지상의 모든 언어들은
무색(無色)하다
무섭다 / 허홍구
미친 사람이
칼 들고 있으면 무섭다
무식한 사람이
돈많은 것도 무섭고
권력을 잡으면 더 무섭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실력 있고 잘난 사람들 중에
사람이 아닌 사람은 더 무섭다
참 무섭다
언제나 웃고 있는
너그러워 보이는 탈을 벗기면
흉악한 얼굴들이 보인다
언뜻 언뜻 나의 얼굴도 보인다
몸서리치게 무섭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 홍성란
단비 한번 왔는갑다 활딱 벗고 뛰쳐나온 저년들 봐, 저년들 봐. 민가에 살림 차린 개나리 왕벚꽃은 사람 닮아 왁자한데,
노루귀 섬노루귀 어미 곁에 새끼노루귀, 얼레지 흰얼레지 깽깽이풀에 복수초, 할미꽃 노랑할미꽃 가는귀 먹은 가는잎할미꽃, 우리 그이는 솔붓꽃 내 각시는 각시붓꽃, 물렀거라 왜미나리 아재비 살짝 들린 처녀치마, 하늘에도 땅채송화 구수하니 각시둥글레, 생쥐 잡아 괭이눈, 도망쳐라 털괭이눈, 싫어도 동의나물 낯두꺼운 윤판나물, 허허실실 미치광이 달큰해도 좀씀바귀, 모두 모아 모데미풀 한계령에 한계령풀, 기운내게 물솜방망이 삼태기에 삼지구엽초, 바람둥이 변산바람꽃 은밀하니 조개나물, 봉긋한 들꽃 산꽃 두 팔 가린 저 젖망울.
간지러, 봄바람 간지러 홀아비꽃대 남실댄다.
꽃꽂이 꽃 / 이성목
비닐 끈에 묶여져 들어온 한 다발의
생화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시든다.
발목이 썩자 나는 고개를 꺾는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믿었던 자본과의 동행, 그 결말에
먼저 이르고자 했던 꽃이 시든다.
생계 앞에서 나는 생화보다 무력하다
꽃처럼 나를 팔아먹으며 사는 동안,
양재동 꽃시장 근처 몸이 다발로 묶여
나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시간이
꼬들꼬들 말라 간다. 세상에서
붉고도 샛노랗게 끝장을 보려 했던 꽃의
한 생애를 묶어 낸
비닐 끈만이 꽃의 기억으로 여기 남으리라.
바람에 꽃잎 흩날리는 무슨 꽃
무슨 꽃 찬란하게 피웠느냐 묻지 마라
한순간에 잊혀지고 없을 여기, 쓸쓸하고
뼈아픈 침봉 위에 쪼그리고 앉았으니
등 이낙봉
내 등이 보고 싶다, 비누칠을 하면서, 비누 거품 속으로 눈물 같은 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어떤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는지, 내일도 물론 안녕할지, 한번쯤 정면에서 바라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 몸이 가볍고 부드럽다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내 오욕(五慾)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텐데, 내 등을 직접 보면서, 만지면서, 화해의 미소를 보낼 텐데,
끊임없이 뒤를 그리워하는 나를, 딱딱한 나를 불안하게 하면서, 뿌연 거울 속의 비틀린 내 등은 기름진 뱃살을 떠받들고, 수챗구멍으로 쿨럭쿨럭 살비듬을 흘려보낸다,
세상에 뒤없는 앞은 없다는데 가까이 있으면서 손닿지 않는 나의 중심.
은행나무 사리알 / 손택수
아랫배에 끙 힘을 주고 밀어낸 열매들이 온 천지를 잘 익은 된장 냄새 황금빛으로 물들여준다 동제가 있을 때면 한 상 걸게 차려놓고 밥을 먹던 은행나무 고목
사리알이 별것이간디, 언젠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본 滿空 스님 바리때도 저 은행나무 재목이었다 포개진 그릇마다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나 들어와 있을 법한 만공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도 한 그루 은행나무로 살다 간 것이 아닐까 아픔 몸 속에 들어와 입적한 목숨들을 품고 잘 익은 똥내음, 사리알 맺는 일에 한 평생 보내고 간 것이 아닐까
은행나무 더부룩한 아랫배가 다 개운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흔든다 앗따 뭘 퍼먹었길래 이렇게 독한고, 똥 푸러 온 인부처럼 코를 쥐고 마을 사람들이 푸지게 퍼질러 놓은 알들을 줍는다
폭포 / 손택수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 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자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떠도는 전봇대 / 이성목
멀쩡하게 인도를 걸어가던 전봇대를 육중한 화물트럭이 들이박은 사고 현장을 지나간다 전봇대가 그곳에 서있을 때는 몰랐는데 밑동이 툭 꺾이며 뻗쳐나온 저 갈비뼈 같은 철근이 가슴을 쑤신다 누구라고 주저앉고 싶은 시절이 없었을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대오를 지어 세상의 질곡을 건너왔던 저 중년, 한때 전사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던 이 아니었던가 이름만 들어도 피를 감전케 하던 그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니! 한 세월 팽팽하게 어깨를 걸고 당겼던 전선들도 이젠 축 늘어졌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전봇대 혼자서는 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날마다 뜨거운 오줌으로 옆구리를 지지는 개들의 자리 그 옛날의 이름들이 모여 잠든 어깨에 나붙은 온갖 잡문의 스티커 따위도 그들에겐 얼마나 아름다운 훈장이었을까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쿵쿵 머리를 들이박는 세월에 쓸쓸하게 물러선 이들, 이 도시의 중심에서 떠밀려 나간 전봇대들
그들을 집으로 불러들여야만 방안에 등을 켤 수 있다.
겨울판화 / 정주연
겨울바람에 두꺼운 구름이 밀려가고
버드나무 여린 가지들이 휘청거렸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가지들은
바라보는 탄식과 관계없이 마음에 소용돌이쳤다
사실 정류장에 버스가 오기까진
많은 나뭇잎이 날아다녔다
시위 장소를 알리는 흑백 전단 같은
시절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다가 왔다
보기도 전에 밟힌 전단들은
닳아빠진 호주머니에서 궁금한 손이 나오기 전엔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때로 담장엔 철 아닌 겨울장미가 피었다가
그대로 얼어버리기도 했고
감쪽같은 교통사고가 로터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어김없이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가
걷어들이지 않은 빨래처럼 오래 펄럭이겠지만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꽉 찰대로 들어찬 겨울은 툭툭 실밥이 튿어져내리고
빗장 잠그는 소리 위로 눈 내리는 소리가 덧쌓였다
유리창엔 김이 기막히게 서리고
마음을 맴도는 말들은 한 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해 겨울 밤마다 모든 집의 눈이 붉었다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 이나명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한 사람만 사랑하고 싶다 / 손한옥
-종군 위안부
그 사람만 사랑하고 싶다
그 사람을 위하여
고추잠자리 낮게 날으는 옥천리 텃밭에서
주저리 열린 빨간 고추를 갈아
열무 김치를 담고 싶다
윤이 나는 백동 숟가락의 흰 쌀밥 위에
가시 발러 낸 살 깊은 갈치를 얹어 주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 사람만 사랑하고 싶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
낡은 상자 위에서
바로 펴지지 않는 허리를 굽히고
606호 주사를 맞는다
검붉은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염증으로
빛이 들지 않는 자궁에는
얼굴 모르는 수많은 아이들이
등꽃처럼 매달려 운다
똥은 화두(話頭)이다 -강순
1
새벽 세시 오분에 싸는 똥은
똥이 아니라 화두이다
어두운 화장실 속으로 퍼져 가는 구린내 나는 삶들을
오롯이 꺼내 놓고 확인하는 절차
나는 준엄한 심판대에 나를 패대기쳐 놓고
나를 해결할 구멍을 찾는다 구멍 속에서 느릿느릿
작은 물음이 기어 나온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물음은 고통이다
변비에 걸려 본 이는 잘 알리라 차라리
블랙홀로 떨어지는 환희를 꿈꾼다는 걸
나는 조금씩 시간들을 풀어서 저울대에 올려 놓고 질량을 재기 시작한다
웃음의 시간, 슬픔의 시간, 거짓말의 시간, 회의의 시간, 바보 같은 시간,
히죽히죽 나를 향해 비웃고 있는 시간, 돌팔매질하고 싶은 시간
저울은 넘쳐 나고 나는 나를 더 이상 매달 수가 없다
아, 새벽 세시 오분은 새벽 세시 삼십분으로 나를 매달고 간다
드디어 나는 변기 속으로 나를 풍덩 쳐 박는다 시원하다
오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고통의 자유를 아는 일이다
2
똥은 싸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닦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배에 힘을 줄 때마다 나는 나를 닦는다
그리움을 닦고 그리움으로 얼룩진 기억들을 닦고
게으름을 닦고 슬픔을 닦고 항문을 닦고
무질서를 닦고 그 속에 살아있는 바이러스의 침투를 닦고
닦고 또 닦아 최후의 한 방울까지 사수하는
지금 시각 새벽 세시 삼십오분
느티나무 할아범 / 박동진
동네 고샅, 늙은 느티나무 베어지던 날
이장 선거에 떨어진 영감 골이 났다
"늙어 힘없으면 발 품 파는 심부름도 못한다디야,
이런 우라질 세상"
서른 아홉에 상처한 영감
죽은 갓난아이, 기차에 뛰어 든 젊은 놈
돌림병에 죽은 벙어리, 저승길 편히 가도록
동네 궂은 일 마다 않던 영감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죽기 전에 이장 한번 하겠다는데
귀농한 젊은이가 이장이 되었다
젊은 이장, 교통에 방해된다며
고샅길 수백 년 먹은 느티나무를
단숨에 전기톱으로 베어냈다.
몸통에 구멍 뚫린 느티나무 할아범
수백 년 묵은 뿌리가 잘려나갔다
낮술에 벌게진 영감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서너 병 안주 없이 마시고
"나무 그늘에 땀 식히지 않은 놈 있었느냐" 호령이시다
오일장 보고 돌아올 때 다리쉼 할
느티나무 그늘이 걱정이다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 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는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슬픈 바퀴 / 박윤규
-브레히트를 생각함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은 가속도를 조절하느라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
단풍 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산동네 식당 앞에 두 바퀴를 세웠을 땐
향로봉에 찔린 하늘 피가 번지고
몇 채 안 보이는 인가엔
저녁 짓는 연기가 환각제 같다
산골식당 문을 젖히고 들어서니
어깨 큰 반백 노인네가 돌아앉아 있다
등은 적당히 굽었고
목엔 역마살 깊이 주름진 강
쥐색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느긋하게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는
노인의 코트는 지독하게 바랜 검은 색이다
그의 왼쪽엔 보다 만 듯 접혀진 책 한 권
슬 살
픔 아
남
은
자
의
노란 표지에 회색 제목 외
더 작은 글씨가 줄을 서 있지만
그건 이미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식탁 모서리를 잡고 허물어지는 나
두 줄기 뜨거운 강이 뺨을 타고 내려와
책표지에서 합류하여 제목 위로 범람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고 느꼈을 때
노인은 숟가락을 놓고 내 어깨를 다독이다
연기처럼 식당을 빠져나간다
황급히 따라가니, 잠겨 가는 노을 속으로
씁쓸한 웃음과 손짓을 남기고
마른 은행잎 부서지듯 점점이 사라진다
허위적거리며 부르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와 책을 집으니
「브레톨트 브레히트 시선」
아직 젊은 베베가 베레모를 비껴쓰고
흑백 명함판 사진으로
나를 깊숙하게 바라본다
접혀진 부분을 펼치니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베처럼 입술 굳게 다물고 창밖을 보면
비룡폭포에 씻은 설악산 별이 뜬다
댓잎같이 푸른 시절 불꽃으로 살아
스스로 먹장하늘길 걸어가 깨끗한 별로 박힌
먼저 태어났으나 나보다 어린 벗들의 영혼이
하나. 둘. 셋. 넷......
낮달 같은 내 부끄럼을 헨다
미안해요 밥이 늦어서
깊은 산골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내가
장작난로 옆에 고개 떨군 모습이 안스러운 듯
산채비빔밥을 내려놓는 강원도 아줌마 눈길이 따스하다
오늘은 여기에 바퀴를 세우고
어느 집 헛간에라도 등을 대야겠다
199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고댁 / 이대흠
비는 왜 피리봉 쪽에서 오는지
마흔에 혼자된 하고댁은 먹구름이 피리봉에 엎드릴 때면
나락 베던 낫 놓고 욕을 하곤 했는데
피리봉 아래 절터골에 저승 살림 차린 영감
그렇게 일찌거니 딴실림 차렸냐고
죽어서도 보기 싫다며 욕을 해댔는데
염벵 염천얼 허네
염벵 첨벵을 허네 하면서 욕을 해댔는데
영감은 영감대로 부화가 났는지
침 튀겨가며 맞고함치듯 우렛소리에 마을이 찌렁거리고
벼락같이 쏟아진 비에 하고댁 몸빼가 젖고
어떨 땐 속곳까지 후줄근히 물 범벅이 되었는데
그럴 때면 꼭 하고댁은
염벵 씹벵
고두마리 씹벵
잠자리 꾸녁
염벵 씹벵 고두마리 씹벵 잠자리 눈꾸녁
욕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비 끝에 단풍은 피리봉부터
확확 달아오르고는 했는데
동그라미 /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성난 돼지감자 / 원구식
나는 걸신들린 여우처럼 산비탈에서 야생의 돼지감자를 캐먹는다. 먹으면 혀가 아리고, 열이 나고, 몸이 가려운 돼지감자. 독을 품은 돼지감자. 살아 남기 위해선 누구든 야생의 돼지감자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삶의 줄기에 독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세상을 향해 외친다. 나 돼지감자야. 어디 한번 씹어 봐. 먹어, 먹으라니까. 그러나 나는 가짜 돼지감자. 독도 없으면서 있는 체 하는 가짜 돼지감자. 우리는 모두 가짜 돼지감자. 길들은, 교육받은, 그리하여 녹말이다 빠진, 착한, 힘이 없는, 꽉꽉 씹히는, 그러나 성난,
상계1동 수락산 입구 / 김기택
해마다 조금씩 기우는 집들
판자와 천막과 비닐로 지붕을 기운 집들
나무 기둥과 벽돌에서 푸른 이끼 자라는 집들
하루 종일 빨래만 널려 있고 사람은 안 보이는 집들
숨 쉴 때마다 변소와 하수도 냄새 들썩거리는 집들
비가 오려고 하면 마디마디 관절이 쑤시는 집들
해마다 봄이 되면 아픈 곳이 갈라지고 터지는 집들
페인트 냄새 마르지 않은 고층 아파트 바로 밑에서
큰 열대 초목 화분에 신장개업 띠를 두른 영양결핍 옆에서
땅값이 오르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며
있는 힘을 다해 낡아가는 집들
돛배 제작소 / 이영옥
그의 좁고 어두운 창고는
바다를 낀 비탈길에 매달려 있다
작업대 위에는 선풍기 한 대가
성능 떨어진 스큐르처럼 꺽꺽 거리고
가끔 죽은 생선을 입에 문 갈매기들이 힐끔거렸다
저녁이면 그는 절벅거리는 석양에 전신을 담그고
초판 인쇄본인 낡은 해부학 책을 탐독한다
그가 읽은 해부학 책의 대부분은
휘어진 척추와 절망에 눌린 늑골을
잘라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노련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그는
통나무를 파낼 때마다 깊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
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번번히 출항이 연기되었던 이유는
자로 잴 수 없었던 용기의 오차 때문이었고
환기통을 찾지못한 공기들은 녹슨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드라이버로 세상의 귀퉁이에
임시로 꽂혀있던 자신을 풀어낸다
완전한 조립은 언제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톱밥같은 날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그의 돛배는 오늘밤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통마무에서 밀려나온 나무껍질은
시멘트 바닥에서 알몸을 검개 말았다
밥 / 윤준경
어머니는 밥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갖은 나물에 더운 국
뜨거운 밥 한 그릇 듬뿍
먹이시는 일 뿐
남자나 사랑 따위는
당초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치매 걸려
세상일 다 잊으신 뒤에도
잊지 않으시던 말, 밥
밥 먹고 가라
언제부턴가 나도
밥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들 딸 며느리 불러놓고
밥 먹어라할 때에
양양한 목소리
열사날에 한번쯤
목을대 빳빳이 일어서는
밥심
팔월 연못에서 / 주용일
시절 만난 연꽃 피었다
그 연꽃 아름답다 하지 마라
더러움 딛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오욕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음부에서 피어난 꽃송이다
애초 생명의 자리는
늪이거나 뻘이거나 자궁이거나
얼마큼 질척이고 얼마쯤 더럽고
얼마쯤 냄새나고 얼마쯤 성스러운 곳이다
진흙 속의 연꽃 성스럽다 하지 마라
진흙 구멍에 처박히지 않고
진흙 구멍에 뿌리박지 않은 생 어디 있으랴
저녁 문상(問喪) / 강인한
친구의 어머니가 홀로 사시던 집
뒤켠에는 대숲이 우거져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손을 잡으며
베옷 입은 상주는 눈이 붉었다.
대숲을 끼고
고추밭을 오르는 비탈길
호박잎에 얼굴을 묻고
호박 한 덩이 혼자서 늙어가고 있었다.
두엄자리 곁에
빈 상여가 하얗게 놓여지고
사립 위로 알전등이 내어걸릴 무렵,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는지
껄껄껄 아슬한 세월에 흔들리며
고등학교 동창들은 고샅을 나섰다
불빛 속에 댓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대숲은 키가 커서 우수수, 우수수
서둘러 돌아가야 할 길 위에
먹물을 뿌리고
씨옥수수전 / 이현승
가슴에도 너테가 끼는 한겨울 농가 창고에는 시렁마다 고드름 같은 씨옥수수 주렁주렁 매달려 있단다. 단정하게 갈래머리 땋은 채 한여름 열기 다 식고 눈물기 다 말라 지조 높은 청죽에나 앉는 시설도 슬그머니 얹힌단다. 시렁 위를 지나가는 새앙쥐들 허기도 놀리면서 사흘 굶은 흥부 이빨마냥 고즈넉하단다. 소슬바람 엄동한설 다 보내는 동안 밤궁금증에 티밥 마실 가면 여문 이력에 할머니 틀니에만 자꾸 끼지만, 가지마다 엉긴 바람 같은 걱정에 보름 기울고 명년 여름에 새끼 볼 딸년에게도 섭섭잖게 보내야지 느지막이 오느라 시집살이 시킨 막둥이 외아들 헛물켜는 객지살림에는 알 굵고 다디단 옥수수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딸부잣집 큰며느리 어머님 시한도 바쁘게 지난다나. 이듬해 명지바람 끄트머리 초여름 신록 에 슬그머니 밭섶에다 두 알 세 알 뿌릴 좋은 씨앗이란다. 땅 한 움큼 억세게 후여잡고 기지개 켜듯 쑥쑥 금방 자라나 어느 틈에 샌님처럼 수염도 난단다. 세월이 선생이지 첫애기 낳고 퉁퉁 불은 에미젖모양 바람 많은 살림에도 살오르는 기차게 실거운 종자란다. 고시랑 고시랑 할머님 옛이야기 엿듣는 씨옥수수들이 뉘얏뉘얏 저희들끼리 여물어간단다.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애인의 연애는 정당한가 / 이상도
애인은 다른 남자와 연애 중이다. 나는 양지바른 쪽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였다. 애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생각하는 사이,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었다. 봄이 머무는 걸 느낄 수 있었으나 봄나들이 가는 병아리는 보이지 않았다. 껌을 씹으며 배달 가는 다방 레지의 슬리퍼 소리만 질질 끌렸다. 그 소리는 지하로 흘러가다 지상으로 역류하곤 했다. 애인의 연애는 정당한가? 생각하는 사이, 긴 가뭄과 한 번의 홍수가 지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좀처럼 기울지 않는 해를 보았다. 넓은 그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늘을 찾아 헤매는 사이, 쉽게 단풍들고 낙엽이 졌다. 애인은 나를 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뒤늦게 단풍놀이 가는 관광버스가 줄을 이었다. 줄지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푸르름으로 눈이 내렸다. 애인은 나를 떠나 행복할까? 생각하는 사이, 구름의 방향이 바뀌고 누런 해가 꼴딱 저물었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골짜기로 영하의 바람이 몰려왔다. 담배연기는 매캐했고 다방의 커피는 쓰고도 달았다.
비와 목탁 / 이동호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진지한 진찰실 / 서안나
시험관1
사내를 집어넣는다
사내가 시험관 속에서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돌아다닌다
사내는 조급해 하지 않는다
사내가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를 언제 꺼내줄지 시간마다 나를 체크한다
내가 실험관을 두드릴 때마다
사내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본다
사내를 다시 시험관에 집어넣는다
시험관2
시험관 속의 사내를 원심분리기로 돌린다
사내의 하루가 분리된다
우울함에 소모되는 시간들과
몽상으로 지나쳐 버리는 지하철역의 배차간격 시간들과
두통약과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시간과
작은 물 컵의 그림자의 방향과
커피물의 온도와
커피 하나 설탕 프림 두개 반의 조화된 맛과
담배꽁초의 마지막 붉은 지점을
열쇠를 놓아두는 작은 서랍의 위치와
나를 관찰할 때마다 달라지는 사내의
눈동자의 색깔을 기록한다
사내를 다시 시험관에 집어넣는다
시험관3
그가 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녀의 소망은 침대를 통과해 격렬하게 꽃이 되는 것”
“좀 더 세밀한 관찰과 보호 격리가 필요함”) 이라고 적어 넣는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사내가 진료카드에 사인을 하고
처방전을 기입하고 나를 덮는다
내가 결재되고 분류되고 얇게 꽂힌다
사내를 다시 시험관에 집어넣는다
시험관4
그는 여전히 내 시선 안에 멈추어 있다
내가 시간마다 그를 관찰한다
그가 나를 보며 묻는다
약은 시간 맞춰 잘 복용하고 있나요?
꽃들이 너무 붉게 피어나요 가슴이 아파요 뿌리가 너무 깊어요
요즘도 방에서 화산이 폭발하나요? 사내가 다시 묻는다
뜨거운 마그마가 자꾸 내 몸에 핀 꽃들을 죽여요
그래서 침대에 얼른 올라서곤 하죠
오늘 당신은 무얼 했나요? 사내가 묻는다
“당신에게서 꽃이 필까 기다려요”
그가 또 무엇인가를 적어 넣는다
당신은 오늘 두개의 실뿌리가 손가락에 돋았어요 라고 말하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본다
그가 시계를 보는 건
지하철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내를 향해 출발했다는 것이며
그가 가운을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
시험관을 나선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관찰하는 건 그가 갑작스레
꽃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내를 다시 시험관에 집어넣는다
서울역 0시 10분전, 달콤한 잠
남자의 정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역 0시 10분전. 부산에서 달려올 동안 사내는 그렇게 엎드려 있었을 것이다. 시속 300키로의 속도로 맹렬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을 것이다.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위해 사내는 머리와 온 몸을 수만 번 굽실거렸을 것이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前生의 기억까지 구부렸을 것이다. 경주남산 목 없는 부처가 머리를 떼어내어 옆으로 내려놓듯. 술이 사내를 삼키고 사내의 몸을 사내에게서 내려놓았으리라. 바지춤 사이로 천년 전의 도시가 흘러나와 풍경들을 가만 가만 적신다. 택시는 오지 않고. 가끔씩 사내가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뒤척인다. 남자의 정면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의 꿈은 언제나 도시의 한 쪽 면으로 고정되어 있으리라. 사내의 흐릿한 눈동자가 꿈뻑거리더니 도시의 어둠을 베고 다시 감아버린다. 소주 한 병의 힘으로 사내의 잠은 달콤하다. 보도블록 격자무늬 위에서 누워있는 와불의 잠. 몸으로 수행하는 달콤한 천년의 잠.
즐거운 마네킹들 / 서안나
쇼윈도의 불빛이 꺼지면 그녀는
옆으로 삐딱하게 틀었던 허리를 펴고
도시를 지탱하던 손가락 끝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푸른빛 콘택트렌즈 빼내고
오렌지 빛 가발을 벗고
도시의 위험한 각도들을 잠그고
맨얼굴로 집으로 돌아간다
스톱모션으로 정지되었던 하루가
그녀의 내부에 세제 거품처럼 부풀어오른다
집에서도 그녀는 온전한 각도를 유지해야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그릇을 씻고 아이들을 씻기고
브래지어를 벗고 팬티를 벗고
남편의 욕망을 씻긴다
열 만에 인간이 된 아이들을 몸에서 분리해내고
제 방문을 걸어 잠그는 아이를 서운해 해서도 안 된다
마른 빨래와 고지서와 싱크대와 침대에서
그녀의 밤은 물 묻은 그릇들처럼 차곡차곡 포개진다
내일도 아침의 해는 떠오르리라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중얼거리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긴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꿈속으로 슬며시 집어넣는다
위험한 그녀의 하루가 정지된다
안정장치가 풀리는 그녀의 깊고 적막한 꿈
수류탄처럼 단 한 번의 손길로도 온 몸이 날아가버릴
즐거운 마네킹들
봉분 만들기 / 최광임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늘을 샀다
여름내 바구니에 담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람을 친다
김장철 지나고 풍장의 시간을 건너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가 눈 뜨던 마늘,
지나간 시간에 봉분 하나를 만들고 있다
제 몸 섞었던 땅 바람 비
밤마다 채마밭 근처에서 울어주던
풀벌레와 별들까지 生 하나를 지운다
목 잘린 몸뚱이에 간간이 낯선 바람이 기웃거리고
장난감 찾는 아이들이 무심코 건드리고 지나가는 베란다
제 몸에 자해를 하며 자진하는 몇몇의 마늘 옆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해안으로 앉아있다
예전보다 일찍 마늘을 깐다
아직 흔적을 벗어내지 못한 마음에 칼을 댄다
추위 속에서 싹들을 뿌리째 뽑아 텃밭을 나오던 날
무딘 바람에도 베어져 나가던 마음을 기억한다
밤낮으로 정을 쳐도 날카로워지기만 하던 봉분,
오 이토록 처절한 즙 같은 눈물이라니
매운 삶을 안으로 삭이고 있지 않은가
왼쪽 검지 손가락이 싼득싼득 아린다
생채기도 없이 아물지 않는 쓰라린 生
지워지지 않는 緣을 지우라 한 죄,
베란다에서 또 누가 울고 있다
꿈꾸는 낙타 / 전서은
어릴 적 우리 집 문간방 살던
쌍가마 아줌마
그 남편은 소문난 주정뱅이였네
철규, 동규 두 아들 남부럽지 않게 키운다고
유난히 억척을 떨었었네
미군부대 담벼락 개구멍으로 보였던
미국,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그 황무지를
밤낮없이 헤매었네
쑤근대던 눈초리가 낙타풀처럼 따가워도
양색시들 등에 업고 앞만 보고 걸었네
무시로 불어대던 모래바람 앞을 막아도
눈물로 뱉지못한 세월이었네
전기세 대신 가져다 준 깡통 버터가
꽁보리밥 속에서 매끄럽게 녹을 때면
철규엄마는 우리 육남매의 오아시스였네
미제는 정말 부드러웠네
법대 간 아들 따라 상경한 후론
휘어진 등 위로 고무다라이 이고 오던
고단한 그림자를 끝내 보지 못했네
이따금 쥐어주던 츄잉껌처럼
질기고 끈끈한 추억이었네
테헤란로를 유유히 걸어가는
저 단봉낙타 한 마리
명중 / 박해람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한 시절의 순정이 명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에다 명중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것
저 하트 모양에 박혀 있는 화살처럼
깊이 박힌 다음에는 명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뒤쪽에서 덜 풀린 힘이 부르르 떨고 있는
여진의 날들이라는 것이지
또한 허공으로 날아간 것들
그 떠난 자리는 흔적이 없다는 것이지
다만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는
누구나 명중되어 있다는 것이지
기마족(騎馬族)들에게는 적에게 허점을 보일 때가 화살을 날릴 때란다
그 무엇을 과녁으로 삼을 때가
가장 방해받기 쉬운 때라는 것이지
숨 한 번 고르는 시간이
영원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때라는 것이지
내 몸이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아직 제대로 된 들숨 한 번 들이마시지 못한 시절인데
명중의 시절이 내게로 와 박히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부르르 떨리는 때가 있다
아직 깨끗한 과녁이 가끔 두렵다
그러나 이 부르르 떨리는 것들, 고통은 늘 뒤쪽에 있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더 이상 떨림도 없을 때가
내가 제대로 된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박힌 그 화살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푸릇하게 사라져간다는 것이지.
다리 / 박해람
길의 사이에 다리가 있다
원래 이것들은 끊어진 곳에서 새살처럼 돋아난다
새살은 상처에서 생겨난다지만
다리에게는 양쪽의 세상이 다 입구다
그 입구가 상처의 문이다
다리 위로 흐르는 것들보다
밑으로 흐르는 것들이 더 빠르다 여기에 세월은 없다
막히는 법이 없는 길의 입구
시작과 끝이 한 몸에 있다
간혹 저승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늘 다리가 등장한다
왕복할 수 있는 곳에 다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언제고 돌아올 수 있다는 증거이고, 다시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밑으로 흐르는 시간에는 왕복이 없다
내가 관여하지 않는 시간들이다
건너가지 않으면 돌아 올 수 없는 다리
연골에 가득 들어 있는
뻣뻣한 칼슘 덩어리 같은 다리
더 이상 구부러지지도 않으면서
몸에서 떼어버릴 수도 없는 길의 뼈마디.
방향도 없으면서
그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다리를 건너 다녔으나
또 한, 세상의 가장 빠른 지름길인 다리를
여태 건너고 있다
저 쪽에서 나를 닮은 딸아이가 건너오는 것을 보면서
잠시 오래 서서 같이 쉬기도 하면서
긴 나무 의자 / 이하석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남녀가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쓸어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 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놓으면 의자는
제 깡기를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의
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른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사막의 지도 2 / 김연숙
가장 힘든 곳은 언제나 중심이었다
우물물을 마시고 길 떠나온 엿새 째
낙타는 다시 목이 마르다
바람이 그리는 능선을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는 무릎관절들
목마름의 힘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행보
바람은 다시 발자국을 지우고
날이 저문 후에도 걸어야 한다
별빛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으리--
별이 없는 밤에도 걸어야 한다
캄캄한 밤에도 눈을 뜨고 기다리는 흑요석
그 깊은 그리움을 어디서 만나
흠뻑 적셔 씻어볼 수 있을까
밤을 새워 걸어가는 낙타 위에서
부드럽게 부드럽게 흔들리는 잠의
달팽이관 깊은 곳까지
빌마*의 절벽들이 부른다는 멀고 먼
저 노래가 스며들 때쯤
사막의 중심 이미 지나가고 있으리
별빛 없는 밤에만 들려오는 저 아득한
꿈길 속으로, 노래의 품 속으로
나직나직 흘러드는
느린 이 걸음, 목마름의 행보로
*Bilma-소금호수가 있는 테레네 사막의 모래절벽으로 대상들에게 노래를 불러 이끈다는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무식하고 억척스런 어머니가 내 모국이다. 그 무식한 말들, 억척스런 말들이 내 시의 모국어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써 온 수백편 시들을 전부 모아 밤새 체를 쳤다. 바람같은 말들, 모래같은 말들, 다 빠져나가고 오롯이 어, 머, 니,만 남았다. 당연하다.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가지를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치명적인 사랑 / 정병근
용산 우체국 맞은편 3F
- 연예인 호프-
치킨, 골뱅이 호프
전화(02)747-7X94
성냥갑을 밀면, 그 안에
분홍 유황 모자를 쓴 성냥알들
단 한 번의 황홀한 분신(焚身)을 위해 가출한 놈들
점화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까까머리 중들이 불(火)경을 외우고 있다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 마종기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 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낡은 침대 / 박해람
모든 힘이 빠진 한 사내가 후줄근하게 돌아와
꽤 오래되고 낡은 충전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에 딱 맞는 배터리
푹신하고 깊은 잠이 넘쳐나는 낡은 침대 안으로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의 관절들이 혁대를 풀고 잠든다
얇은 모기장과, 빛의 속도로 몇억 광년쯤 날라 온 듯한 스탠드불빛.
그러고 보니 저 낡은 침대와 연결된 코드는
대기권 밖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 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 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 마디의 잠꼬대가 몸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배어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 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는 저 사내.
山寺2 / 송문헌
선선한 바람이 怪怪한 달 그림자를 건들거리고 흔들더니 가파르게 솟아오른 *청화산 그 산마루에 꽂혀있는 초승달을 한순간에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山中은 금새 둘러선 나무들이며 마당까지 남김없이 그것 속으로 으깨어지고 나도 함께 스미듯 한동안 빈집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빠져드는 늪인냥 그것은 날 잡고 허공 천으로 허공 천으로 잡아끄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벗어 나야한다는 다급함 같은 것으로 소멸된 나를 더듬어 밀치며 방안으로 찾아들었습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덧문을 닫고 미닫이문도 닫고 옷도 벗지 못 한 채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평온함이 그것을 벗어난 안도감으로 전신을 늘어뜨리게 하였습니다 눈을 감고 그렇게 한참을 죽은 듯이 있다가 무심히 눈을 뜨니 그것은 천연덕스럽게 아직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따라와 있었습니다 머리털이 서는 두려움으로 실 빛 한올 보이지 않는 그것 그 완벽한 하나의 색, 절망이 이런 것일까 죽음이 이런 것일까 오 철저히 차단된 이 공간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어느 禪師의 法文이 이런 것은 아닐 텐데 趙州 "無"자 화두가 이런 것은 아닐 터인데 모두를 체념한 후에 오는 허탈이 이런 것일까 혼절 인 듯 다시 깊은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살그락 거리는 소리에 피가 솟구치는 반가움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그녀가 온 것일까, 그녀가 온 것일까 아아 그러나 그것은 산을 내려가는 솔바람 소리였나 봅니다 사방은 원래대로 산처럼 무거운 그것이 천장과 벽 체와 창문과 미닫이문까지 가로막은 채 고립된 그것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청화산: 문경 상주 괴산 3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1100m이며 중턱에 圓寂寺가 있다.
山寺 3/ 송문헌
탁,탁,탁,탁.똑,또르르르...
목탁 치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나니 아침 공양 시간이었어요 새벽 예불이 끝나고 깜박 잠이 들었나 봅니다 미닫이문을 활짝 열고 덧문도 벌컥 여니 철늦은 눈이 절 마당 가득 눈부시어 반가움에 서둘러 나오니 댓돌 위에 흰 고무신까지 하얗게 품고 있었습니다 눈에 갇힌 요사체 뜨락을 앞뒤로 돌며 서성이다 산골창을 올려다보니 울창한 가지마다 솜사탕을 매달은 듯 눈꽃이 현란하게 숲을 이루어 꿈결 어느 다른 산사에 와 있는 듯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요사체에서 법당 봉당으로 水閣으로 그리고 공양간으로 한 줄로 자리한 사잇 계단을 껑충 껑충 건너뛰어선 넉가래를 들고 변소 가는 길을 밀고 갔습니다 절간 변소는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이곳은 유난히 더 멀어서 똥 뒷간 가는 중간쯤 산비탈 오솔길 옆에 벽돌을 쌓아 칸막이를 하고 붉은 플라스틱 들통을 놓아둔 오줌통에 닿자마자 급한 김에 바지가랑이 속 그놈을 얼른 내놓고 쏴 내 깔기니 시원키도 하여 저절로 눈을 감았지요 진저리를 치며 눈을 뜨니 오, 오줌통 너머 산비탈에 가지를 늘어트리고 나의 그것을 지켜보는 생강나무 아름다운 꽃이여 산수유 같은 샛노란 꽃 둥지로 소복소복 피어있는 그 노란 꽃이 하얀 눈꽃송이에 살포시 안긴체 황홀하게 피어 수줍어 고개 숙이고 나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영하의 긴긴 밤을 짝을 지어 얼싸안고 밤새 사랑을 나눴단 말인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질긴 살아 있음은 또 어떤 수행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방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이리뒹굴 저리뒹글 하다가 절 지붕 銅器瓦를 타고 추녀 아래로 비오듯 눈이 녹아 내리는 소리에 밖으로 귀를 기우리니 山中 어디선가 툭 하고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파열음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고요 후두둑후두둑 눈꽃 떨어지는 소리에 조바심 나 눈 속에 핀 생강나무 꽃을 찾아갔지요 밤새 사랑을 나눈 기진 함에서일까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않고 꺼칠한 모습으로 히죽히죽 이른 아침 방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정분난 과부가 그랬던 것처럼 꺼칠꺼칠 늘어트린 노란 꽃 봉만이 헤식 거리고 있었지요 그날, 그날은 괜 시리 나도 질척거리는 산길을 한 나절이나 싸 다녔지요.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늦은 밤에 읽는 시 (0) | 2020.09.13 |
---|---|
시 읽는 밤 (0) | 2020.09.13 |
화엄에 오르다 外 (0) | 2020.09.01 |
가을 저녁의 시 -사랑 혹은 그리움 (0) | 2020.09.01 |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0) | 2020.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