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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아득한 한 뼘

by 이성근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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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길 이 준 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속도 이원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일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왜 백미터를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침내 비닐하우스 속에

온 지구를 구겨 넣고 계시는,

스스로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시는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빚 김일석

 

네 여유와 웃음이

누군가의 눈물임을

아픈 이들이 아픔 속에서

잃어버린 것임을

당신, 혹여 행복을 말할 때

평화를 말할 때

누군가에게 진 빚은 없더냐

, 부디

순결한 사랑의 빚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빚지지 말기를

 

 

새해에는 양현근

 

새해에는 꽃이 벙그는 이유와

꽃이 아름다운 사연을 오래 얘기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땅 위에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과

모국어의 향기를 같이 누릴 수 있게 하시고

바퀴벌레와 모기, 개미와 같은

하찮은 생명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소서

눈들어 보이는 것마다

우리들의 첫사랑임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되

길 위에서 서성이는 생각들로 하여

오래 마음 아프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들의 그리움은 올해도 끝이 없을 것이므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배우게 하시고

정녕 사랑으로 하여 고통받지 않게 하소서

밤을 새워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므로

미움, 시기, 욕심, 절망, 분노와 같은

좋지 않은 생각들은 잠시 잊게 하시고

희망, 따뜻함, 파아란 하늘과 같은

마음에 와 닿는 단어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오래 전에 잊혀진 슬픔을 위해서도

가끔씩은 목젖이 아프도록 울게 하시고

질감 좋은 색조로 새벽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마른 들판을 건너 온 겨울바람에도

향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쓸쓸한 등을 보이며 흐르는 저녁강이

깊은 바다와도 만나게 하소서

따뜻한 한 그릇의 시와 포옹하며 뒹굴게 하시고

사랑하는 여인이 단단한 꽃으로 그 자리에 오래 피어있게 하소서

이름 모를 늙은 가수의 느끼한 랩송마저도 사랑하게 하시고

함께 청청한 목소리로 노래하게 하소서

얇은 월급봉투라도 좋으니 그로 하여 기죽지 않게 하시고

작은 베풂으로 인하여 오히려 빛이 나지 않도록 하소서

무엇보다 마음살에 돋아나는 욕심의 잔을 비우게 하소서

주님 !

 

 

가장 받고 싶은 상 이슬 (우덕 초등학교 6학년 1)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요.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 ()

 

명중 /이용헌

 

빗방울이 툭,

정수리에 떨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하늘 쳐다본다

 

누구인가

저 까마득한 공중에서

단 한 방울로 나를 명중시킨 이는

 

하기야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나의 심장을 관통해버린

그대도 있다

 

 

사랑의 길/ 윤후명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가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바람에 실어/ 박남준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는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을 피워올리니 따뜻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고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뜻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 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우물/ 안도현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좋다 이영신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불가능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 호탕하게 웃길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자기 일에 만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책을 가까이 하여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좋고

손수 커피 한 잔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하루 일을 시작하기 앞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줄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때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외모보다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친구의 잘못을 충고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고

새벽 공기를 좋아해 일찍 눈을 뜨는 사람이 좋고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고

항상 겸손하여 인사성 바른 사람이 좋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다

 

 

원시/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에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담뱃불 사랑-김창호

 

새벽달 실눈썹을

밤새워 기다리는

그믐밤 긴 줄담배

고요히 불타는

검붉은 담뱃불

피워서 재가 되고

태워서 재가 되고

이 밤도 기어이

애태우다 내던지는

담뱃불 가슴 사랑

 

 

연탄재 /강경아

 

남산동 연등천 다리를 오르내리며 놀았던

철없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질척질척한 펄 바닥으로 기어 나오는 어둠들

구멍 칸칸마다 넉넉한 셋방살이 인심으로

우리에게도 잠깐 환해질 때가 있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에게 젖어드는 밤이면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밀물처럼 차올랐다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밤은

얼마나 고요한가

 

진창 같은 바닥에서

술잔 부딪히는 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투명한가

 

생의 난간 끝에 서 있는 소리는

얼마나 또 간절한가

 

다 타고 쏟아내 버린 적막 한 채

이 눅눅하고 습한 단칸방에

깜박깜박거리는 불빛 하나

 

 

'다랑쉬굴 /강경아

발길 닿는 모든 곳이 통점(痛點)이다

매캐한 연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뒤틀리는 비명 소리 돌담을 넘고

부릅뜬 눈과 입들은 둘레는 이룬다

커다란 돌덩이는 비석이 되고

더 깊은 어둠으로 막아버렸다

달이 환하게 비추는 다랑쉬마을

잊혀진 사람들, 묻어버린 진실

속숨허라, 속숨허라

손톱자국이 핏빛으로 스며드는 길

제주의 사월이다

 

 

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접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박혀 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를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몸으로 불길을 연다

 

구겨진 몸이 불을 살릴 줄 안다

 

 

11월의 다짐 /유화

 

느지막이 그대의 이름

불러보고 싶은 건

네 사랑의 단단함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대 안녕한가' 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시절은 다 가서

거리에 단풍잎 지고

나무는 바람에도 침묵하지만

오늘도 그 옛적에

당신의 우아한 발자취를 따라

걷고자 하였습니다.

 

이 길 전부 공허하지만

먼 사랑의 시절에도

아리운 슬픔의 눈물은 스미어

꽃잎은 피었나니

그 어떤 미련도 후회도 없이

겨울에 있겠습니다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행복한 결핍/ 홍수희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 내게 있으니

때로는 가슴 아린

그리움이 따습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주고 싶은 마음 다 못 주었으니

아직도 내게는

촛불 켜는 밤들이 남아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올해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난초가 곁에 있으니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내 안에 찾지 못한 길이 있으니

인생은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

모자라면 모자란 만큼

내 안에 무엇이 또 자라난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서성인다 /박노해

 

가을이 오면

창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들어와 나 홀로 서성인다.

 

산뜻한 가을바람이 서성이고

맑아진 가을볕이 서성이고

흔들리는 들국화가 서성이고

 

가을편지와

떠나간 사랑과

상처난 꿈들이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 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같다.

 

 

감기/박영애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감기 바이러스가 녹아들다

한순간에 훅 들어오듯

사랑도 그랬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아플 만큼 아픈 시간이 지나고

기다려야 낫는 감기처럼

이별의 아픔도 그랬다

 

사랑과 이별은

그렇게 찾아왔다

 

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감기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만발하는 목련처럼

사랑보다 먼저 아픔을 알게 했던

현실이 갈라놓은 선 이쪽 저쪽에서

들킬세라 서둘러 자리를 비켜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지만

애당초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에

잡을 수도 없었던, 외려 한 걸음

더 떨어져서 지켜 보아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

눈을 감을수록 더욱 선명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어이 접어두고

가슴 저리게 환히 웃던, 잊을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던,

너무도 긴 그림자에 쓸쓸히 무너지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추억하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마지막이란 말을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 이 열쇠들/ 문창갑

 

사람을 정리하다 보니

짝 안 맞는 열쇠와 자물쇠들 수두룩하다

감출 것도, 지킬 것도 없으면서

이 많은 열쇠와 자물쇠들

언제 이렇게 긁어모았는지

 

, 이 열쇠들

. 이 자물쇠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내 앞에 오래 서성이던 그 사람

이유 없이 등돌린 건

굳게 문 걸어 잠그고 있던 내 몸의

이 자물쇠들 때문이었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열려있던 그 집

그냥 들어가도 되는 그 집

발만 동동 구르다 영영 들어가지 못한 건

비틀며, 꽂아보며

열린 문 의심하던 내 마음의

이 열쇠들 때문이었다

안부 / 김해정

 

가깝고도 먼 마음의 거리

어느 정도의 깊이로 지내는지

우린 늘 물음표가 왔다 갔다 한다

 

별일은 없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날씨는 더운지 추운지를

 

열다섯 사춘기 소녀처럼

출렁거리는 궁금증이

뭉게구름처럼 하얗게 피어오르고

 

까닭 없이 생각나는 순간의 그리움

뽀얀 눈물방울 가슴에 묻을 때

엄마 그 이름이 또르르 굴러간다.

 

어른이 되어 나이를 먹어도

허구한 날 작은 잎새처럼 흔들리는

가슴에 부는 바람의 노래가 되나보다.

 

 

9월에는 /김정원

 

9월에는

붉은 과꽃이 피어 있는

넓은 정원에 앉아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가슴에

가득 담고 싶습니다

 

이글거리던 태양과

새벽부터 단잠을 깨우던

매미의 울음소리까지도

짧은 여름날의 추억을

하얀 도화지 위에

스케치하고 싶습니다

 

9월에는

갈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서서

일년을 하루같이

그리워하는 당신의 안부를

 

바람에 묻고 싶습니다

 

 

/문정희

 

당신 떠난 후

당신과 더 많이 산다

 

슬픔을 핥던 혀

내 안으로 떠도는

짐승의 축축한 눈

간절한 체온

 

내 몸 가득 당신이다

 

하늘의 별 반쯤 꺼지고

나머지 별도 이내 사라졌지만

 

당신 떠난 후

당신 온전히 내 몸이다

 

 

아득한 한 뼘/ 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복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로

이곳 속 저 꽃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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