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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by 이성근 2023. 4. 24.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 김태정

 

목탁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장에 붙은 무당벌레의 태앗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 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닫는 힌 고무신이 유난히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 앞에 해우소를 두고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구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얼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화엄사 중소(中沼)/ 박진규

 

갈겨니는 계곡 물빛이어서

계곡이 아무리 유리알처럼 투명하여도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하루 종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갈겨니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바닥에 지 몸보다 더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상수리나무는 행여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챌까봐

아침부터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었던 것이다

 

 

캥거루/ 전다형

백만 년 만에 동물원 갔네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는 동물 중

유달리 눈을 끌던 캥거루 무리

공작새 앵무새 타조 거위 지나치고

호랑이 원숭이 북극곰 얼룩말 제치고

늙은 캥거루 무리에 눈이 꽂혔네

캥거루는 척삭동물로 앞발이 짧고

육아낭, 애기주머니를 가슴팍에 매달고

37주간 새끼를 키운다네

호주서 온 왈라루와 왈라비 육아낭에서

목을 뺀 새끼와 눈이 딱 마주쳤네

다 장성한 새끼를 생각했네

엉거주춤한 내 굽은 등

모성 강한 캥거루에게 들키고 말았네

낙타 등을 닮아가는 내 어깨를

완곡한 낮달이 가만 쓸어주었네

내가 지은 원죄, 받아야 할 형벌

어미와 새끼는 전생의 빚쟁이라네

왈라루, 왈라비가 나를 지나치고

나는 왈라루와 왈라비를 지나쳤네

그가 안은 육아낭 무게가

오롯이 내게로 건너왔네

업고 걸리고 안고 물고 빨고 으르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울고 불었던

7부 능선에 섰네

떼고 싶은 혹이었던가?

태를 끊지 않은 배꼽이던가?

배꼽을 당기면 우주를 낳은 자궁

끌려나오던가?

뫼비우스의 띠를 잇는 사랑의 원죄,

내 죄 씻다 비누처럼 야위어가네

이것들아 이종이 그립다

이젠 내 왕관, 네들이 써라

 

 

깊다'- 이경교

 

그 저녁 꽃의 부음을 들었다

어스름이 몸살처럼 밀려왔다

꽃이 보이지 않는 길, 지금 저문 강을 건넌다

물 위에 조등弔燈 몇 점 깜박인다 저 어둠의 둘레가

내 잠의 안쪽을 밝히는 사이, 등불은 다만 어둠의 껍질을

슬쩍 비춘다

불빛의 이쪽과 저쪽으로 잠과 꿈이 갈라진다

모든 풍문도 이처럼 나눠지리라

문상에서 돌아오는 저녁, 강물의 눈빛이 무겁다

저 무거움으로부터 깊은 여울이 시작된다

그 끝에서 죽음의 문도 서서히 열릴 것이다

물결도 느닷없이 물굽이에 채일 때가 있다

그 지점에서 조등弔燈이 몇 번 반짝인다

생사의 경계가 이토록 깊다 저무는 봄의 눈길이

깊다, 눈꺼풀이 쳐진 물결 위로

잎새가 돋았다는 전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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