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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

by 이성근 2019. 9. 21.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 (마우리시오 라부페티, 박채연 옮김, 부키 2016.02

Jose Mujica. La Revolucion Tranquila

 

저자 마우리시오 라부페티(MAURICIO RABUFFETTI)는 우루과이의 기자이자 정치 칼럼니스트이다. 사회언론학을 전공했으며, AFP통신 워싱턴 주재 특파원 및 브라질지국 부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AFP 라틴아메리카지국 경제 부문 편집장으로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와 우루과이 일간지 엘 파이스에도 글을 쓰고 있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매체와 무히카의 인터뷰를 우루과이 현지에서 진행했다.

 

한국어판 서문 |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8

서문 | 가장 사랑받는, 그러나 가장 논쟁적인 대통령 14

 

1 총알과 꽃 21

평범하기에 특별한 대통령 30소비주의 시대의 늙은 현자 34록스타 무히카 39

 

2 검소한 삶의 방식 43

단출한 살림살이 47"가진 게 적으면 걱정도 적다" 49기부하는 삶 51소박한 스타일에 담긴 메시지 54독서광 무히카 58직접 만든 토마토소스 61프란치스코 교황과의 공통점 64"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65영혼을 깨우는 사람 67대통령의 콧잔등에 상처가 난 이유 69호세 무히카의 재산신고서 69

 

3 게릴라 시절 75

쿠바 혁명을 목격하다 83낭만주의와 냉전: 투마파로스의 기원 86카멜레온 같은 조직 90무장투쟁과 지하 생활 95판도 습격 사건 98투파마로스의 몰락 106살해 명령을 둘러싼 논란 109무장 활동에 대한 상반된 시각 111민주주의의 길로 115무기여 '완전히' 안녕 120무히카 후보의 탄생 122

 

4 혁명군에서 대통령으로 127

광기의 시절 136대통령 호세 무히카 140평등이라는 최고 가치 141바트예주의와 연대 의식 147카우디요의 나라 152취임 연설에 담긴 의미 153탁월한 소통 능력 156FIFA에 맞서다 162마테차 모임 166무히카와 마라도나의 대화 168

 

5 조용한 혁명 171

국가적 문제로 떠오른 마약 176새로운 관점 178합법화를 둘러싼 '내전'183실패한 마약과의 전쟁 188죽음을 낳는 대륙, 라틴아메리카 190마약통제위원회와의 설전 193미주기구의 지원 195'실험'이 시작되다 199쏟아지는 찬사 200낙태 문제를 양지로 꺼내다 203'평등한' 결혼 208무히카와 플란 훈토스 209

 

6 록스타 무히카 211

소비주의를 고발하다 215'다른 세계'를 향해 218무히카와 '월가를 점령하라' 220', , '를 벗어나 226새로운 경제 논쟁: 재분배 232국제정치에 나서다 240관타나모 수감자들을 받아들이다 241미국과의 관계 247시리아 난민을 데려오다 250콜롬비아 평화 협상 중재 254무히카, 오바마를 웃게 만들다 258

 

7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261

소비에 빠진 우루과이 264개혁을 둘러싼 힘겨루기 265교육, 교육, 교육 269환경과 일자리 사이에서 273꼬이고 꼬인 아르헨티나와의 관계 276정치적 판단 vs 법적 판단 287한계를 넘어 291역사의 평가 294

 

8 혁명은 계속된다 297

더 나은 세상을 위해 302

 

나는 이렇게 보았다 | 현실적 좌파의 실용적 혁명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노벨 문학상 수상자) 304

나는 이렇게 읽었다 | 우리 시대 가장 주목받는 인물에 대한 보고서 -미겔 앙헬 바스테니에르(언론인) 309

출처 313

 

출판사 서평

'대통령 무히카'를 통해 우리 시대의 정치와 지도자를 생각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 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신념 있는 인권의 옹호자"라고 평했다. 그는 2013년과 2014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며,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에 꼽혔다. 52퍼센트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년 뒤 퇴임할 때는 65퍼센트라는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해 아름답게 '퇴장'했다. 우리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로 널리 알려진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 얘기다.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은 인간적인 면모로 널리 사랑받은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의 삶을 기록한 전기인 동시에, 우리 시대의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보고서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리는 무히카의 소박한 모습 너머, 정치인과 대통령으로서의 무히카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그가 시도한 정책들과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현실의 벽, 대통령의 고민과 열정, 성공과 실패를 통해 진정한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원하는 리더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무장 게릴라 전사에서 민주 국가의 대통령으로

호세 무히카(Jos? Mujica)는 우루과이의 40대 대통령으로 20103월부터 20152월까지 재임했다. 1935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무히카는 대다수 사람들이 빈곤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일찍부터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에서 답을 얻지 못하자, 게릴라 조직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된다. 독재 치하에서 14년간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한 그는 1985년 자유의 몸이 된 뒤 무기를 버리고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고민의 결과였다. 1994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상원의원, 장관을 역임한 뒤 2010년 마침내 대통령에 올랐다.

 

실용적 정책, 인간적 소통, 말과 삶이 일치하는 '현자'

무히카는 대통령답지 않은 소탈한 생활, 진솔하고 인간적인 소통, 선구적인 정책으로 우루과이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교외의 농가 주택에 살면서 직접 요리를 하고, 30년 된 폭스바겐 비틀을 운전해 출퇴근하는 모습은 대통령도 평범한 한 사람의 국민임을 일깨워 주었다. 또 소비문화를 비판한 2012년 리우+20 정상회담 및 2013년 유엔 총회 연설로 전 세계에 감동을 안겨 주었다.

 

실용적인 경제 정책을 유지하는 한편 마리화나·동성 결혼·낙태 합법화와 시리아 난민과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받아들이는 선구적 정책으로 자유와 연대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 과정에는 늘 진심 어린 설득과 소통이 함께했다.

 

퇴임 당시 지지율 65퍼센트,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무히카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우루과이는 쉬지 않고 성장했다. 국민소득은 늘고, 빈곤율과 실업률은 크게 감소했다. 퇴임 당시 그의 지지율은 65퍼센트에 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히카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송했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원대한 이상을 가진 소박한 지도자"라고 평했다. 무히카는 2013년과 2014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며, 20153월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게릴라 동지이자 상원의원인 아내 루시아 토폴란스키가 항상 함께한다.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은 우리에게 한 나라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지, 우리가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해 준다.

 

27년된 차 타고 다니는 우루과이 대통령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그는 왜 사랑 받을까

 

정작 무히카는 외신들이 자신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고 한다.

 

측근에 따르면, 대통령은 한동안 언론과 인터뷰할 때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고, 현안과 철학적 주제만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개념 착오가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절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는 네덜란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50)

 

이 책은 무히카의 검소함을 강조하는 위인전이 아니다. 무히카라는 사람, 그를 낳은 정치사회적 배경, 게릴라들의 투쟁과 독재의 역사, 무히카의 성공과 실패, 그에 대한 평가를 종합적으로 다룬다. 물론 무히카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들어 있고, 몹시 재미있다.

 

무히카는 소스를 빵에 발라 기자에게 주었다. 방금 전까지 마리화나 합법화와 마약, 안전에 대한 대화를 하던 참이었다. 대통령은 마약 밀매 조직과 마약류를 관리하는 유엔 산하 국제기구의 관료들이 들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파격적인 마리화나 시장 합법화에 대해 연설을 하는데, 집에서 토마토 소스를 만드는 것도 이런 문제와 똑같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무히카는 집에 있는 시간을 대부분 부엌에서 보낸다. 대통령 부부는 요리사도, 가정부도 쓰지 않는다. 부엌은 작지만 부족함이 없다. 돌로 마감 처리된 싱크대와 개수대와 가스 오븐, 그리고 기름병, 소금, 식초, 포도주 몇 병, 허브잎들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물병들이 놓인 선반 여러 개가 전부이다. 부엌에는 추억도 담겨 있다. "이 럼주는 피델이 내게 선물한 거라오." 무히카는 가장 앞에 놓인 술병을 기자들에게 들어 보이며, 이런 종류의 선물은 보관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63)

 

그 소탈함은 무히카에겐 수십년 간 지켜온 삶의 방식이자, 정치의 방식이다. 둘은 서로 분리돼 있지 않으니 이중적인 것이라고도, ''라고도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삶이 그런 정치적 스타일로 나온 것이며, 그런 삶을 퍼뜨리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반대로, 무히카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다를 뿐이다. 즉 그는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자신이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스페인어가 다소 서툰 아이마라족으로, 원주민(pueblos originarios)이 디자인한 옷을 입는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로서 권위적일 뿐 아니라 우아하기로 유명한데, 자신의 의상에 에콰도르 토착민의 공예 소품을 포함시켰다. 무히카 역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능한 한 우루과이 사람으로 보이기로 결심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무히카는 농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56)

 

그의 개인사,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보여 주는 방법, 친근하게 다가가는 사소한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등 무히카의 모든 것이 대중매체를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특히 공적인 성격에서의 매력때문에 게릴라 전사 시절에는 언론 보도를 통해 무히카 코르다노에서 무히카'로 불리게 되었고, 의회에 들어갔을 때는 곧바로 페페가 되었다. 무히카는 자신이 실제로는 정치에 매여 있더라도 정치에 매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무히카는 '대통령 무히카'를 비판하기 위해서 '시민 무히카'로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국내외 언론 매체로부터 우루과이 대통령이 받는 관심은 대부분 상황에 거의 떠밀려서 대통령직에 오른 것처럼 자신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무히카의 독창적인 방식에 기인한다. (158)

 

세바스티안 사비니 하원의원은 역사 교수이다. 34세이고, 몬테비데오 근교인 라스피에드라스 시에 산다. 그의 정치 경력은 무히카가 이끄는 민중참여운동 내에서 가장 전형적이다. 그는 좌파 성향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199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정치를 시작했고, 다른 정치 그룹보다 민중참여운동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는 이유로 이 정당에 참여했다.

 

무히카의 영향으로 민중참여운동은 유권자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것을 권장한다. 주요 지도자들과 당원들이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이상을 설명하고, 정부정책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다. 정당 지도자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전통적인 정치 활동과는 다르다. 정치인도 일개 시민으로서 우연히 권력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전제 아래, 유권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 이런 형태는 마침내 우루과이에서 정치를 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12)

 

오바마식 정치, 어쩌면 트럼프식 정치, 그리고 한국에서 노무현식 정치,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식 정치가 보여준 새로운 스타일을 더 넘어선 무히카식 정치.

 

무히카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화들에 뒤이어 나오는 우루과이라는 나라의 이야기.

 

1980년에 독재자는 현 정권을 계속 인정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선포했다. 군인들은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무력을 이용해 들어선 정부를 합법화하려고 했다. 국민들은 대부분 투표를 했고, 불공정한 선거 광고에도 불구하고 독재 정권은 패했다. 투표한 국민의 거의 60퍼센트가 선거 용지에 반대라고 적음으로써 무력으로 시작된 정권이 지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이 독재가 막을 내리는 시초가 되었다.

 

익숙한 풍경. 뒤이은 구절은 어떤 면에서는 익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낯설다. 아마도 남미 혹은 히스패닉 여러 나라에 비슷한 시위 방식이 있는 듯하다. 냄비 두드리기.

 

1980년대 초반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로 점철되어 경제적으로 엉망이었다. 우루과이는 솟구치는 인플레이션, 실업률, 물자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사람들은 익명으로 저항했다. 데모 초창기,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서 이루어지던 냄비 두드리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부모와 아이들을 포힘해서 가족 전체가 집 안의 불을 끄고 독재자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냄비를 두드렸다. 모두 두려웠다. 그러나 감히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웃이 드러나지 않도록 불을 껐다. 그것은 끝이 다가오는 독재 정권에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사림들은 1973년부터 시작된 억압의 무게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학대당하고모욕당하고 폭행당하고 고문당하고 결국 죽은 사람들까지 있었다. 살해된 사람들, 사라진 사람들. 우루과이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문제였다. 우루과이는 플란 콘도르(Plan Condor)’에 가입했다. 플란 콘도르는 남미의 독재자들이 위협적이라고 여기는 정치가와 좌파 활동가들을 억압 또는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자 만든 협력 기구였다. (116)

 

참으로 애잔한, 그러나 결국은 가장 힘 있는 '..' 그 힘을 우리도 안다. 이렇게 민주화가 시작되고, 그것은 동시에 '민중해방 진영' 혹은 게릴라들에겐 존재의 고민으로 다가온다.

 

 

우루과이는 198411월에 실시된 선거로 독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민주화가 되면서 투파마로스는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무기를 버려야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인근 국가에서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 정치와 무기가 뒤섞이지 않은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투파마로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옥을 나오기 전부터 말이다.

 

결정은 감옥에서 내려졌다. 투파마로스의 최고지도자 라울 센딕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센딕은 독방으로 옮겨졌는데, 교도관이 부주의한 틈을 타서 교도소 은어로 알약'이라 하는 돌돌 만 작은 쪽지를 또다른 지도자 훌리오 마레날레스에게 전해 주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제도권 내에서 민주적인 투쟁에 동참해야만 한다." 민중해방운동의 최고 사상가는 그렇게 명령했다. 메시지는 널리 퍼져, 1985년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 대통령이 취임한 후 투파마로스 대원들이 석방되기 전에 이미 여론이 되었다. (119)

 

정치 운동으로서 민중해방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변화하는 능력, 역사적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그리고 가능한 경우 변화를 이끌어 내는 능력에 있다. 이 능력은 게릴라 투쟁 단계에 있을 때,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전술을 바꿀 때 드러났다. 그러나 조직의 주요지도자들이 감옥에서 나오면서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했을 때 더 명확해졌다.

 

이를 발표하는 역사적인 연설에서 무히카는 투파마로스가 감옥에서 전달한 결정을 단순한 언어와 명확한 사상으로 바꾸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와 영원히 결별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활동의 형태부터 환경 보호,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보낸 14년 간의 감옥 생활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무히카는 천천히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실질적으로 모든 분야에 대한 생각을 요약했고, 투파마로스는 더 이상 무장 단체가 아니라고 국민들에게 말했다.

 

그 결과 민중참여운동은 1989년 이래 선거에서 좌파 계열이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기여한다. 이 길에서 민중해방운동은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포기를 대가로 치르게 된다. (121)

 

많은 이들이 민중해방운동을 떠났다. 남아 있는 그룹은 선거를 통해 우루과이의 역사적인 정당을 물리치고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좌파의 정치적 계획에 전적인 지지를 보냈다. 무장투쟁에 어떠한 회한도 남기지 않고, 선거에 입후보한 후보들의 카리스마와 힘을 선전하면서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선거전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단연 호세 무히카가 두드러졌다. 독재가 끝나기 전에 한번도 민중해방운동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지 못했고, 감옥에서 나올 때도 조직 내에 긴장을 조성하는 두 가지 시각의 조정자 역할을 한 무히카는 당연한 대안이었다. 무히카는 계속 앞으로 나갔다. 1994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2000년에는 상원에 자리를 잡았다.

 

무히카는 2004년 선거에 입후보한 의원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이 선거로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무히카는 20053월부터 20083월까지 농축수산부 장관을 역입했으며, 바스케스 대통령과의 의견 차이로 물러나 다시 상원의원 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1년 전부터 여론조사로는 대통령을 꿈꿀 정도가 되었다. 사회정의에 대한 소명과 부의 재분배 외에는 명확한 이데올로기도 없이 행동대원으로시작한 무히카의 정치 역정 중 최전성기였다. (126)

 

이렇게만 보면 어느 게릴라의 성공적인 정치인 변신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게릴라 장기수 출신의 인생이 그리 쉬웠을까. '정치범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오랜 기간 고통받아야 했던 일이 무히카에게 남긴 상처는 매우 컸던 모양이다. 거기서 헤어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히카는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게릴라 시절,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부상의 흔적들, 감추고 싶은 그때의 정신적 상처는 무히카를 역사의 산 증인이자, 실리적이며 변화에 잘 대처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히카와 동료들은 11개월을 라바예하 주 보병대 구획에서 지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일어설 수조차 없는 작은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난잡한 목재로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벽을 바라보며 보냈다. 몸을 둘둘 말아 웅크려 자곤 했다. 화장실은 이용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시간이 아니면 감방 안에서 용변을 보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아홉 명의 게릴라들은 작은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북쪽에서 님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상 함께 옮겨졌으나 말을 니눌 수조차 없었다. ‘인질들이란 용어는 이들 혁명군을 부른 신조어인데, 일반 죄수나 정치범과 달리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 또는 규칙이나 규범조차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히카, 로센코프, 페르난데스 우아도브로로 구성된 삼인조는 특별관리대상이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죄수들이 이송되었다. 세 사람은 지프 바닥에서, 트럭 짐칸에서, 난잡한 지하 하수도의 복도에서 손이 묶이고, 복면이 씌워지고, 말이 없는 죄수들과 마주쳤다. 한 명씩 옮겨질 때마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안부를 물었다. 무히카는 미쳐 버렸다. 지금도 그는 이 사건을 사석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고문과 옥살이로 얼룩진 13년이라는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낸 무히카는 마침내 동지이자 아내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의 한결같은 지원과 노력으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무히카는 자신이 혼잣말을 할 때 그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 군인들이 지하감옥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고 믿었고, 굶주림 혹은 열병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곤 했다.

 

무히카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신병 환자들을 위한 방에 수용되어 있었다.의사가 처방한 약들은 변기통에 버렸다. 돌아온 뒤에도 무히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동료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방식대로 능력껏 수감 생활로 돌아갔을뿐이다. (140)

 

그랬던 사람이 20091129일 일요일 대선에서 승리했다. 저자는 무히카의 승리를 "우루과이 국민의 인내심과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고 썼다. "전통적인 정치와는 다른 특정을 가진 새로운 대통령이 운영하는 정부가 시도할 새로운 시작, 그리고 무장반군이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의 인내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혹자는 무히카가 자신의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상대를 설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것이 가장 명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전달한 것이 무히카가 대통령에 오른 요인이다. (141)

 

자유, 이것은 게릴라 시기 이후의 무하카에게는 디른 어떤 사안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 무히카는 부정적인 의미까지 감수하며 자유를 지켜낸 사람이다. 매이지 않기 위해, 괜한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더 가지려고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소비하지 않는다.

 

한번은 대통령에게 어떤 것을 자유라고 생각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시간을 갖는 것, 가능한 한 많이. 물질적인 속박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일로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불평등을 용인하면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를 폐기하면서 평등을 강요할 수 없는 사람이다. 1960년대에 무히카는 무장 혁명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최근에는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얻으려고 한다. 자유와 평등의 긴장 속에서 무히카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바로 '연대'라는 것을깨달았다. (152)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무히카의 행보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복합적이다. 무히카를 세상에 알린 가장 유명한 일화는 '27년 된 폭스바겐 자동차'였고, 그 다음이 '마리화나 합법화'였다.

 

20126월 무히카는 마리화나 시장을 합법화하겠다는 생각을 공론화했다. 그 생각은 무히카 자신의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처음 그 생각을 들은 것은 감옥에 있을 때로, 보통 그의 형제라고 불리는 동지 페르난데스 우에도브로에게서였다.

 

마약 거래에 무력으로 대응해 왔던 전 세계 여러 국가 중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런 정책을 계획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히카가 보좌관들과 함께 법률로 다듬은 이 아이디어는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이었다. 정부는 허가받은 생산자가 재배한 대마를 수거해 약국을통해 유통시킬 계획이었다. 또 한 달에 살 수 있는 일정량을 정한 소비자 명단을 만들 것이다. 이 명단은 개인 정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전산화한 비밀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될 것이다. 자작농 역시 허가할 것이다. 1인당 마리화나 여섯 포기까지 허용할 계획이다. (180)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아이디어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영어로는 'war on drugs'’이며, 스페인어로는 ‘guerra contra las drogas(마약에 반대한 전쟁)' 또는 ‘guerra antidrogas(반마약 전쟁)'라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narcoguerra(마약 전쟁)’ 라는 말이 유행했다.

 

총격전은 한쪽만 있어서는 성립이 안 된다. 미국 경찰이 마약을 막으려는 노력에 대항해, 마약밀매 조직도 무장하고 훈련하고 조직적으로 되는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의 가장 명백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잘 조직된, 어떤 경우는 거의 군대화된 불법 마약 조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약 거래는 백해무익합니다. 마약 중독보다 더 나쁜 겁니다. 마약 중독은 인간의 신체를 파괴하지만, 마약 밀거래는 국가의 통제부터 시직해서 그 사회를 윤리적, 도덕적으로 파괴합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마약 밀거래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100년을 했는데도 소용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법안이 승인되고 마리화나의 감시와 유통에 관한 새로운 시스템을 한창 만들고 있던 2014, 무히카는 이렇게 말했다. 무히카는 마리화나 시장의 합법화 법안은 이미 있는 것, 바로 우리 일상생활 여기저기에 존재하던 것을 법으로 만든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201)

 

무히카는 마약에도, 낙태에도 '반대'하는 사람이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제가 커지고 세상에 불행을 가져온다면, 그 해법으로 '합법화'라는 방식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마리화나 합법화와 낙태의 결정권을 여성에게 주는 조치는 그에게는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자녀가 없음을 아쉬워 하는 무히카는 낙태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흔하게 이루어지는 수술이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도 그가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스페인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드러났다.

 

"우리 사회에는 모두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이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성은 위험에 노출되기 쉽지요. 이런 일이 있음을 인정하고 테이블 위로 올려서 합법화하는 것이 낙태하려는 여성을 설득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들을 삶의 한가운데에서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선적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206)

 

무신론자인 무히카의 생각은 여러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과 닮았다.

 

하지만 부의 재분배나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 등 중요한 과제에서 무히카 정부의 성과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좋은 정치인이 좋은 정치에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무히카는 그걸 인정했고, 그건 그의 '비범함'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무히카 정권은 타바레 바스케스 정부의 복지 정책, 즉 자녀가 있는 가난한 가정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정책을 이어받았고, 토지 집중에 세금을 걷는 등 소득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몇 가지 시도를 했다. 첫 번째 정책은 야당의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토지 집중에 대한 과세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좌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호세 무히카는 소득 재분배 문제를 담론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실업률은 우루과이 역사장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이는 곧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기장 소득 분배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급여를 받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전 정부로부터 이어받은 조세 개혁에는 소득세도 포함되었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을 주 대상으로 한 이 악명 높은 총소득세덕분에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할 새로운 자금줄을 잡게 되었고, 이로써 재분배에 관해 무히카 대통령이 늘어놓은 장광설은 무의미해졌다. 우루과이는 무히카 정부 5년 동안 부자가 더 부유해지는나라로 변모하고 말았다. (240)

 

사회에서 평등의 조건이 되는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무히카는 실패했다. 무히카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많은 정책은 관료주의에 부딪혀 불발했고, 교육 예산이 증가했음에도 구조적 문제와 충돌했다. 그는 한마디로 "나는 실패했다"라고 말했다.

 

무히카는 야당과 공교육 개선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교원 노조의 거부로 인해 중앙기구의 결정 사항을 교육 현장에 적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대통령은 결국 자기 신념을 포기했다. 아마도 그는 협상을 할 줄 몰랐거나 아니면 충분히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히카 정부의 의지가 꺾이는 과정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맞닥뜨렸고 우루과이의 모든 정치 체제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자들의 저항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273)

 

무히키는 환경적 측면에서는 거의 한 것이 없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를 찾자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을 갖는 것이다. 무히카는 생태주의자가 아니다. 이러한 입장을 보여 주는 예가 14500헥타르의 땅에 노천 철광산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말 많은 사업을 요약해 보자면 일자리와 투자가 최우선이고, 투명성이 그 다음이며, 환경 문제는 제일 마지막으로 밀리는 것 같다. 노천 철광산은 효용을 다하고 나면 화성 표면처럼 황폐하고 버려진 풍경이 될 것이다. (275)

 

비록 국내에서는 중요한 문제에서 큰 업적이 없었고 심지어 후퇴한 부분도 있지만, 무히카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부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히카가 정부를 이끄는 동안 나라는 쉬지 않고 성장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이전부터 성과를 내 오던 경제 정책 노선을 그가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좌파 급진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무히카는 경제 문제에서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는 경제가 잘 굴러가고 있으며 계속 그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임기 동안 실질임금은 증가하고 실업률은 감소했다.

 

그가 잘한 것 기운데 또 하나는 에너지원 전환 정책을 공고히 하여 점차 더 깨끗하고 혁신적인 에너지로 바꿔 나갔다는 점이다. 풍력 에너지 덕분에 구체회된 이 정책은 석유가 나지 않는 국가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292)

 

어떤 면에서는 실용주의자인데, 어떤 면에서는 이상주의자같은 사람. 무히카를 세계적인 히어로로 만든 또 한 가지, 관타나모 미군기지에서 풀려난 사람들(자기네 나라에선 '테러용의자'라며 거부한 사람들 혹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극도의 탄압을 받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과 시리아 난민 고아들을 받아들인 일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떤 논란이 벌어졌을지 안 봐도 알겠다. 사실 한국이나 우루과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라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비록 인도주의적인 결정일지 몰라도, '남의 일'에 쓸데 없이 손을 뻗느냐고 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무히카는 그런 일을 했다.

 

그 방식이 재미있다. 여러분이 싫어하는 거 알아요, 그래서 내가 묻는 거예요. 우리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물어보는 대통령, 멋지지 않은가?

 

2014429일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질문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연대 의식은 우루과이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텔레비전을 볼수 있는데, 실로 충격적인 일 중 하나는 시리아 곳곳에 있는 피난민 캠프에 버려진 아이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로서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아무 책임이 없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 중 다만 몇 명이라도 거둘 의지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우루과이의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적어도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의 영혼이 소비사회와 이윤추구에 눈이 멀었을 수도 있겠군요. 여러분은 아니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 국민 여러분께 이렇게 자문을 구하는 겁니다."

 

이러한 제안이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비난에 맞선 사람은 대통령의 아내이자 상원의원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였다. “대통령의 의견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와 같은 재앙에 책임감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촌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토폴란스키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그리고 "다섯 살 난 아이가 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은 마케팅이 아니라 현실이다"라고 덧붙였다. (253)

 

무히카가 우루과이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특정 분야의 성과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정치인의 면모'가 최대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인 헤라르도 카에타노는 "무히카 정부는 역사에 위대한 정부로 남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표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우루과이는 무히카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무히카는 다른 종류의 유산을 남겼다. 위대한 정치인들은 많은 이유로 역사에 남는데, 그중 하나는 시민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 그리고 생활방식을 통해 대통령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296)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국의 어떤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성과'로 기억되지만, 역사 속엔 '하지 못한 일들'로 기억되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러나 남은 메시지들로 기록되는 사람들. 위대한 정치인들 중 어떤 이들은 시민들이 만들어 낸다... 인상적인 말이다.

 

명백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체제에 여러 발의 총알을 발사하는 성급한 정치 활동에서 출발한 이 불온한 저항가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차분하게 싸우는 세계적인 사도로 변모했다. 그는 여러 차례 변신했지만 언제나 잘 적응했다. 특별한 카리스마에 기반을 둔 뛰어난 소통능력으로, 한때 경멸의 눈으로 바라봤던 권력을 얻기 위한 선거에 도전했고 그것을 획득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정리된 의제가 없었다. 처음에 추진한 이런저런 주제들은 투파마로스 게릴라 노병에게 힘이 부쳤고 결국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 쿠바를 방문한 뒤 우루과이로 돌아와 무기를 잡았던 그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는 그의 순수한 소명의식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삶을 먼저 살아간 한 노인의 조언을 들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면서 자기 조건 안에서 움직인 한 실용주의자의 조언을. 자기 능력껏 정치와 삶을 조화시킨 한 사람의 조언을. 그리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 한 인간의 조언을. 그는 승리보다는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을 것이다. (303) / OdleOdle Magazine ttalgi21.khan.kr/5641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저자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역자 송병선, 김용호|21세기북스 |2015.04

저자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MIGUEL ?NGEL CAMPOD?NICO)는 우루과이의 작가. 지금까지 한 권의 단편집과 아홉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여러 차례의 수상 경력이 있으며 우루과이 작가 최초로 프랑스 생나제르 외국 작가와 번역가들을 위한 집에 초청받은 바 있다. 6개월간 광범위하고도 심층적인 인터뷰를 통해 완성한 무히카 대통령의 평전 무히카MUJICA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대표작으로 새로운 우루과이 문화 사전이 있다.

 

목차

서문 :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의 글 : 가까이서 본 무히카 대통령(최연충 전 우루과이 대사)

사진으로 보는 무히카의 삶

 

1. 퇴임: 나는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2. 테러 속에서 태어나다

3. 일과 공부

4. 사회주의에 이끌리다

5. 엔리코 에로와의 만남

6. 이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

7. 투파마로스의 출현

8. 도시의 혁명가들

9. 탈옥

10. 혁명가의 삶

11.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12. 존경하는 센딕

13. 짧은 사랑, 긴 이별

14. 모든 것이 배움의 대가다

15. 늙은 투파마로스 의원의 정치

16.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

17. 삶에 대한 약속

18. 여전히 다른 쪽을 향해

19. 무히카 대통령 5년을 말하다

 

부록

 

- 무히카 어록

- 연설문(리우+20, UN 총회)

- 무히카 연보

 

출판사서평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Jose Alberto Mujica Cordano)

 

1935520일생. 우루과이 제40대 대통령. 현 우루과이 상원의원. 196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는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리더로 활동했으며, 이 조직의 로빈후드로 불렸다. 1970년대 13년간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여러 차례 탈옥하기도 했다. 1985년 석방되어 민중참여운동에 참여하였다. 1994년 하원의원, 1999년 상원의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농축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에 이어 우루과이에 두 번째 좌파 정부를 열었다.

 

친근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무히카는 재임 기간 내내 국민들의 높은 사랑을 받았고, 지난 3월 지지율 65%로 임기를 마쳤다. 우루과이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고,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참된 행복의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하며, 스스로 검소한 삶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게릴라 전사에서부터 국민의 신망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걸어온 그는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로 불리며,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차례 올랐다.

 

전 재산 1987년식 낡은 자동차 한 대, 대통령 월급의 90%를 기부하고, 노숙자에게 대통령궁을 내주는 등 전 세계 어느 지도자들보다 검소한 대통령이자 국민과 가까운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페페Pepe’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상원의원으로 돌아온 그는 지금도 몬테비데오 외곽의 허름한 농가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루시아 여사, 한쪽 다리를 잃은 강아지 마누엘라와 함께 살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국민과 함께 울고 웃어주는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들려주는 인생의 길, 정치의 미래, 참된 삶의 가치

 

"28년 된 낡은 자동차를 끌며 월급의 90%를 기부하는 대통령"

"많은 말을 하지만 결코 국민을 속이지 않는 대통령"

"노숙자에게 대통령궁을 내주는 대통령"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지만 '철학자'로 불리는 대통령"

"강대국 정상들 앞에서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하는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현자'라고 칭송받은 대통령"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잘 알려진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에 관한 수식어들이다. 전 세계 언론이 가장 주목하고, 정치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대통령 무히카. 그는 세계 어느 지도자들보다 검소하며 국민과 가깝고 정직한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검소하고, 친근한 카리스마로 전 세계에 새로운 대통령상을 보여준 무히카는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인기를 받으며 20153, 취임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65%)로 임기를 마쳤다. 그는 우루과이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고,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참된 행복의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하며, 스스로 검소한 삶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히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경제 급성장을 이루었고, 빈곤율과 실업률이 감소했으며, 남미에서 가장 부패지수가 낮은 나라로 손꼽히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도시 게릴라 전사, 13년간 독방 수감생활을 한 혁명가에서부터 온 국민의 신망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걸어온 무히카는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로 불리며,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두 차례 올랐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21세기북스)는 호세 무히카 대통령에 대한 모든 것을 무히카의 육성으로 듣는 최초의 평전으로, 게릴라 전사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검소한 삶과 자선을 몸소 실천하며, 차분하고 조용한 혁명을 실현해온 인간 무히카의 삶과 철학을 톺아보는 책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과 용기를 주는 무히카 어록 80여 편, 연설문 수록

6개월간의 인터뷰, 무히카의 생생한 육성으로 기록한 단 한 권의 책 !

 

6개월간에 걸친 무히카와의 인터뷰, 방대한 자료 조사, 지속적인 개정을 통해 집필된 이 책에서 무히카는 정치인이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철학을 거침없이 밝히고 있다. 인간과 생에 대한 애정, 정치에 대한 희망,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분명한 제언 등 무히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와 국민들이 귀담아 들으면 좋을 잠언들로 가득하다.

 

무히카는 일평생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아왔고,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국민과 소통하며 함께 울고 웃어왔다. 이웃들에게는 "페페 할아버지"로 불렸으며 어디서건 국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대통령궁 대신 사저인 농가에서 출퇴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화초를 가꾸고 농사를 짓는 농부로도 살았다.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돕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태풍이 닥친 이웃집 지붕을 손보다 강풍에 날아온 판자를 맞고 얼굴에 상처가 난 적도 있었다. 상원의원으로 돌아온 지금도 몬테비데오 외곽의 허름한 농가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루시아 여사, 한쪽 다리를 잃은 강아지 마누엘라와 함께 살고 있다.

 

단언컨대 무히카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자 가장 정직하고 가장 행복한 대통령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그가 들려주는 말은 흔한 정치인의 수사라 할 수 없다. 언어는 쉽되 그 안에 담긴 통찰과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그를 두고 일찍이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자"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인생과 정치, 참된 삶의 가치에 대한 진솔하지만 묵직한 무히카의 메시지는 정치에 대한 회의와 불신, 깊은 절망감으로 가득한 지금 우리 사회에 새로운 힘과 희망, 지혜의 길을 보여준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는 거리가 없어야 한다.”  

정치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또는 대표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정치에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지적인 정직성이다.”  

나는 가난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삶에는 가격표가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사회는 이 점을 인식해야 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배제는 결코 경제적이지 못하다.”  

천 번을 넘어질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리스타트! 세상엔 딱 한 종류의 실패자들이 있는데, 이는 싸우기와 꿈꾸기와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삶이 특별한 것은 그 내용을 우리가 채워나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책속으로

종종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 그러니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카드는 뒤섞여 있습니다. 이쪽 사람이라고 모두 좋은 사람은 아니며, 저쪽 사람이라고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겠지요. 나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믿을 수 없는 행위를 한 영웅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영웅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기꾼일 수도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욕심으로 뒤섞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93)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혁명가로 살다 보면 사랑에는 지장이 많다고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긴장으로 가득 찬 삶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안식처로서, 감성에 충만한 생활만 한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혁명가들은 그토록 쉽게 사랑에 빠져들까요? 그것은 아마 우리가 죽음과 매우 가까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8~209)

 

나는 오랜 전쟁터에서 적의 존경을 얻지 못한 사람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투쟁이란 것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해요. 그런데 그 가치는 적이 우리를 존중했을 때만 느낄 수 있지요. 그 전에는 못 느낍니다. 존중한다는 것은 최소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명백한 지표가 됩니다. (226)

 

집권을 하게 되면 그는 권력을 갖게 됩니다.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위험해져요.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팀을 꾸리는 것과, 아첨꾼들과 가신들로 둘러싸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큰 권력을 쥔 사람과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위험하고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점점 그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270)

 

의사소통은 진지한 작업이어야 해요. 말의 형식과 운용이 아니라 서로 가 인간 창조물을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TV 방송에 출 연할 기회를 얻는다면, 그게 단 1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라도 채찍질처럼 선명하게 남는 어떤 생각을 내놓아야 합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나 단순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동일한 것들입니다. 오래된 로맨스에서 피어나는 새롭고 영원한 꽃, 그것이 삶입니다. 피어나 고, 피어나고, 피어납니다. (300)

 

하나의 일관된 전략이 없으면, 그 집단은 살 수도 없고, 숨 쉴 수도 없습니다. 전략은 적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전략은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상실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눈도 없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고 우리를 변화시켜줄 집단적 지성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사물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신호들이 이곳저곳에 있긴 하지만, 전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들을 결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적인 탐욕들이 인류 모두를 위한 상위 욕망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따져봅시다. 우리에게 전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속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아슬아슬한 균형의 시스템, 즉 인간을 포함한 지구 체계 전체의 삶을 말합니다. (2013년 유엔 총회 전원회의 연설 중에서)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은 이제 유행이 아닙니다. 철학 없이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철학에는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을 때, 나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롭고 싶다면 소비에 냉정해져야 한다. 그 반대의 길은 과시적 소비를 위해 일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시간을 빼앗고 말 것이다.

 

나는 나만의 생활방식이 있다. 대통령이란 이유만으로 이를 바꾸진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의무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살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인생을 살면서 고통의 짐을 짊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짐만 바라보며 살 필요는 없다. 그냥 앞을 향해 걸어가라. 우리가 기필코 지키고 사랑해야 할 만큼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므로. --- 본문 중에서

 

우리가 지구에 온 이유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Jose Mujica)는 매우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아간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으로 소개되는걸 원치 않았다. 그에게서 빈곤한 사람이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가 탐욕자를 빗대어 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가 탐욕을 경계한 것은 하나뿐인 생을 재물에 목숨 거는‘(12,15) 어리석음도 있겠지만, 아마도 탐욕이 끼치는 해악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유아독존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싫든 좋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또 내놓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는 주고받는 거대한 순환 속에서 생명을 이어 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환의 사이클을 독식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다. 지구 전체를 위기에 빠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탐욕자의 곳간은 단지 화폐로 환산되는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래가 신의 영역이라는 것도 단순히 인간의 운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셈할 수 없는 수많은 대지와 생태계의 사슬이 함께 포함된 영역이다. 누가 이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누가 이 연결고리에 빚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연결을 끊은 부자가 듣게 될 소리는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요,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곳간의 재물은 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루카 12,20)이 될 것이다. 예수가 경계한 탐욕의 메시지는 이렇게 단순하다. 그는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인간론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인간이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과 그 행복을 지키는 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언론 매체들이 쏟아내는 대한민국 경제불황과 저출산, 에너지 문제를 접하다 보면 내일 이 나라가 당장 고꾸라진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온갖 전문가 집단을 동원해 인용한 진단과 통계를 듣다 보면 우리 경제는 이미 십수 년 전에 끝장났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자극적 언어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끼치는 결과적 해악이다. 이들은 경제가 우리 각자의 행복을 담보해 주는 이라도 되는 양 국민을 선동하고,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며, 살 의욕을 꺾는다. 물론 실제로 빈부격차나 실업률, 질병, 고령화가 삶의 질적인 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현상의 진짜 원인은 알려주지 않은 채 거짓 정보만을 늘어놓는다는 데 있다. 애초부터 그들은 인간이 누릴 지속 가능한 미래, 평등한 나눔과 보살핌 같은 데에는 관심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진짜 위기는 환경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다. (이미지 출처 = Flickr)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살기 위해선 지구 세 개가 더 필요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만일 70-80억 인구가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산다면 우리 지구는 얼마를 더 버텨 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글로벌이라 하는 시장경제이고, 온 인류가 이 파괴적 망령에 취해 생겨난 일이니 한탄한들 지구를 구할 뾰족한 방도는 없어 보인다. 여전히 사람들은 대량생산과 소비에 취해 있다. 이 뻔한 선전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수세식 변기를 재래식으로 돌릴 엄두를 못 내듯 말도 안 되는 문명(?)에서 돌아갈 길을 잃은 것이다. 광풍으로 몰고 간 개발의 추동도 탐욕에서 빚어졌고, 그 탐욕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국제법이니 국제기구니, 정책이니 하는 따위들을 만들어 내고, 그 위로 시장경제가 올라탔으니 우리는 한동안 그들이 던지는 세계화에 취해 지낼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필시 오늘을 내다본 것이 틀림없다. ‘먹고 마시며 즐긴자에게 돌아올 말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루카 12,19-20) 외에는 없는 것이다.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국제정상회담에서 호세 무히카가 한 발언은 이런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그가 한 연설은 회담장에 모인 세계 정상들의 폐부를 훑고도 남았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연설에서 그가 꺼내 든 제안은 문명의 전환이었다. 우리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자는 것이다. 진짜 위기는 환경(경제, 수자원)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떠받들자고 지구에 온 것이 아니다. 코헬렛의 말대로 인생은 짧고 허무하며, 눈앞에서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앞으로 달려가느라 놓치고 있었던 행복을 되찾아 와야 한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미세한 생명력들에 눈을 돌리는 일, 그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 공기와 숲, 강과 바다, 대지를 숨쉬게 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마사 베크의 말처럼, “쓰레기들을 소중히 지키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 진짜 보물들을 내다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문명의 전환이란 새로운 동력을 추동할 새 인간의 출현을 말한다. “거짓말을 멈추고, 옛 행실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골로 3,5; 루카 12,15)이다. 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유일한 희망도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9.08.01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1935~)

평생 오두막서 가난한 농부생활

월급 90% 빈민주택기금 기부

소유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아

진정한 자유는 적게 소비하는 것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얼마 전 우루과이로 이민을 떠난 친구 가족이 그곳에서 대통령을 지낸 호세 무히카를 만나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84살의 순박한 시골 농부 할아버지와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유엔 연설 때나 오바마와 푸틴을 만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이나 퇴임식에서도 보았던 노타이의 허름한 작업복, 낡고 줄도 세우지 않은 통바지, 싸구려 운동화, 평생 세수를 하지 않은 듯한 푸석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칼 그대로였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물론 대통령이었을 때도 농사일을 계속하던 스무 평의 낡고 누추한 오두막, 후줄근한 옷들이 빨랫줄에 걸린 잡초투성이 앞마당의 풍경이 떠올랐다. 비서나 경호원은커녕 부인이나 자녀도 없이(무자녀), 다리 저는 개와 함께 다니며, 손수 장비를 들고 이웃집을 수리하기도 한 그는 간디 이후 자발적 가난으로 산 유일한 지도자다. 월급의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하고 남은 액수도 국민 평균소득 80만원보다 많다고 하며, 유일한 재산인 낡은 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고, 단 한번의 비리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정치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고 대표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다수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았다. 최고의 정치는 정직이라고 하면서 대통령도 누구도 숭배하지 말라고 한 그는 누구보다도 빈민의 벗이었다. 우루과이 인명사전에 그는 그냥 농부로 기록되어 있다.

 

도시 게릴라 출신의 민주주의자

우루과이는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처럼 1516년 이래 300여년간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독립했지만, 20세기 초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 개혁과 같은 오늘날 우루과이가 자랑하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이룩해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렸다. 무히카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30,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선진국이었고, 당시 10대의 무히카도 사이클 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집권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않고 독재정권에 맞서 도시게릴라 활동에 뛰어들어 로빈후드로 불린 무히카는 37살이었던 1972년에 투옥되어 50살이 된 1985년 민정 이양 후 석방되기까지 무려 1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거듭났다. 뒤에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유는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게릴라에서 민주주의자로 부활했다는 점이었다. 진보세력을 단결시킨 민중참여운동을 거쳐 1994년 하원의원, 1999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2005년에 출발한 바스케스 민주정권에서 농축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201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자신 가장 존경한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로 불리면서도 극단적 사고로는 변화가 불가능하고 참된 혁명은 사고의 전환이라고 주장하며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로 보수적 경제정책과 진보적 사회정책을 동시에 추진해 경제성장률과 교육수준 및 사회적 포용을 높였다. 간접세를 대폭 줄이는 반면 부유세와 기업세 같은 직접세를 대폭 늘리는 등의 조세개혁과 분배개선을 비롯한 전면 개혁도 성숙한 정치시스템과 정책적 안정성으로 이룩한 그는 국영화보다 민중의 자치경영을 선호했다.

 

특히 가톨릭의 치열한 반대를 무릅쓰고 재임 중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면서도 위험한 마약중독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했고, 세계에서 열두번째로 동성결혼법을 제정하고 낙태허용법도 제정하는 등 인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통합 정책도 활발히 펼쳤다. 무엇보다 핵발전소 없이 대부분의 전력을 수력, 풍력, 태양력으로 생산하여 청정에너지 국가, 핵 청정 국가로 만들었다.

 

최악의 협상도 최선의 전쟁보다는 낫고 평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며 미국과 쿠바의 중재에 나서서 성공했다. 부패, 문맹, 극빈층을 줄여 레임덕은커녕 취임 때보다 퇴임 후의 지지율(65%)이 더 높았지만 재출마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고 농부로 돌아갔다. “나는 농부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그렇다. 땅에서 일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리고 난 인생을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이 주는 여유가 좋다고 했다.

 

2013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는 우리가 검소와 절제, 모든 자연의 주기에 어긋난 문명을 살고 있지만 더 나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문명, 즉 인간관계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는 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사랑, 우정, 모험, 연대, 그리고 가족이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오로지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선택해 살면서 경제성장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세상을 망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부정하며, 정말 가난한 사람이란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사람들처럼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나 우리 모두의 삶이 기적이고 삶의 모든 기회가 기적이라며 가장 심플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부와 성장을 향한 욕망에 근거하여 오로지 무한 소비를 위해 노동 착취를 강요하는 시장경제가 삶을 착취한다고 비판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인들처럼 소비하려고 하면 지구가 몇 개나 더 필요하다면서 유엔 등에서, 특히 강대국 지도자들 앞에서 소비주의가 세상을 망친다고 하면서 그들이 소비하는 분당 200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세계군사비라면 아프리카 기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도 했다. 우루과이에서는 전차를 없애서 포병이 없을 정도로 군사비를 줄이고 모병제를 실시했다.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생명도 고려해야

무히카 이전에 내가 사랑한 우루과이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무히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우루과이의 국가적 정체성인 간소함의 뿌리 깊은 바탕을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레아노는 여러 책에서 콜럼버스의 침탈(발견이 아니라) 이후 서구가 남미를 500년 이상 착취한 역사를 계속 묘사하며 특히 자연을 파괴한 자본주의의 오만을 비판했다. 그는 그것이 남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이고,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라고 하면서 정치적 통제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히카도 이제 문명 프로젝트의 화두는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의 생명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단지 조금 더 떳떳한, 조금 덜 부끄러운 나라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먼저입니다라고 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진정한 자유는 적게 소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용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나는 공감한다.

 

내 친구는 마지막으로 최근 우루과이 경제가 나빠지면서 무히카에 대한 관심도 낮아진다는 이야기를 망설이듯 전했지만, 내게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보였다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한겨레12019 ,9.19



Let's Get It on (Marvin Gaye)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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