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순이 저자 정찬일|책과함께 |2019.09
정찬일-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및 광고 홍보 분야에 몸담으면서 꾸준히 글을 썼다. 주로 역사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보물찾기 놀이 혹은 퍼즐게임을 하는 마음이랄까. 한 자 한 자 적을 때마다 실타래 풀어내는 쾌감을 얻는다.
지은 책으로 『비이성의 세계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녀사냥들』, 『입안에 녹는 과학, 초콜릿』, 『우당 이회영』 등이 있고, 한국의 금융권 노동조합사를 정리한 『조흥은행노동조합 40년』, 『KB국민은행노동조합사』 등(비매품)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한국 현대사의 그늘 ‘삼순이’
1부 식모
머리말: 생명의 어미에서 ‘하녀’로
1. 조선어멈을 아시나요?
일본 가정을 선호한 식모들 | 저주받은 식모살이 | 염상섭과 김동인의 불만 | 아이를 돌본 아이, 아이보개
2. 식모 전성시대
전쟁과 식모 | 고향을 떠난 순이 | 서울역 광장의 함정 | 식모를 둔 판자촌
* 남성 식모
3. 하녀의 다른 이름, 식모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한다면 | 시집갈 때 돈 줄게 | 감히 택시를 탄 식모 | 어린이 식모 | 집주인의 폭행 | 살인식모·유괴식모·악당식모 | ‘왈순아지매’에서 ‘봉순이 언니’까지
4. 그 많던 식모는 어디 갔나
주부들의 항변 | 식모, 주부들 타락의 주범으로 몰리다 | 시간제 식모의 출현
* 식모 자리를 옮기지 않고도 월급을 올리는 법
2부 버스안내양
머리말: 영화 〈도시로 간 처녀〉의 주인공들
1. 로맨스를 흩뿌리던 ‘뻐스걸’
집채만 한 차, 경성을 달리다 | 담 밖으로 나온 규중처녀 | 애간장 녹는 총각들 | 차마 말하지 못한 속사정
2. 남성 차장
교통지옥의 시대 | 차장은 ‘갑’, 승객은 ‘을’
* 열일곱에 시작한 남차장
3. 대중교통의 선두 주자로 나선 버스
쿠데타 정권의 혁명적 조치 | 청량리-동대문, 303호 마지막 전차 | 안내양을 퇴장시킨 ‘원맨버스’
* 이런 손님 저런 손님
4. “오라잇, 스톱!”
명랑과 친절을 위해 여성으로 | 하루 18시간 근무 | 시골 출신을 선호한 이유 | 버스안내양과 박정희 대통령 | 공포의 개문발차 사고 | ‘싸가지 없는’ 안내양들 | 억순이와 돌계집의 경계 | 야박한 여감독과 소극적인 노동조합
5.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알몸 수색과 알몸 농성 | 기상천외한 삥땅 수법 | 삥땅 방지 대책
* 나의 버스안내양 시절(인터뷰)
3부 여공
머리말: 공장은 처녀 신세 망치는 곳
1. 그대 이름은 ‘산업역군’
국가에 소속된 여공 | 나비가 된 YH무역 여공들 | 대통령의 딸과 여공 | 주경야독 시스템
* 최초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
2. 나는야, 뺑이 치는 공순이
눈물 젖은 보름달 빵 | 또 하나의 해방구, 여공 기숙사 | 구로공단 벌집 | 성냥공장 아가씨와 공장의 불빛
* 여공과 남자 대학생
3. 공순이들의 반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주역 | 여공들의 친구 도시산업선교회 |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 노동운동의 신화, 원풍모방
4. “망할 놈의 비정규직 세상”
달라진 노동운동의 주축 | “노동운동 그러는 거 아입니더” | 12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기륭전자 사태
에필로그
참고문헌
오늘도 분투 중인 한국의 여성들, 그 선배들의 이야기
‘순이’는 한국에서 (한국)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1950~1960년대 여성 신생아의 이름에 가장 많이 붙여진 글자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순이’와 같이 농담처럼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순’은 어떤 의미와 의도로 이름에 쓰이기 시작한 걸까? 사실 20세기 이전에는 한국여성에게 제대로 된 이름이 붙거나 그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들어 호구조사와 민적법에 의해 여자아이에게도 이름을 지어줘야 했는데, 집안에서는 대충 짓곤 했다. 그때부터 많이 쓰인 한자가 ‘순할 순(順)’이었다. 그저 지아비와 집안을 ‘잘 따르는 순한’ 여자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은 식민지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렸고, 전국 각지의 궁핍한 가구에서는 온 가족이 밥 한 끼 제대로 먹기도 어려웠다. 식량을 더 늘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 입을 더는 것뿐이었다. 그 희생양은 당연하게도 어린 딸이었다. 순하고 조신하게 집 안에만 있기를 강요받던 이들이 이제는 반대로 집 밖으로 내쫓겼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같은 맥락이었다.
약 한 세기 뒤, 한국 사회는 미투운동으로 촉발된 페미니즘의 거대한 물결을 맞고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순이가 아니다”라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100여 년 동안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을까? 이 사이에 한국 여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이 책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은 이 땅의 수많은 ‘순이’,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세 ‘순이’의 전성시대를 복원, 조명한다. 그들의 삶은 감춰지고 잊힌 또 다른 한국 현대사이며, 바로 지금도 매일 분투하고 있는 한국 여성의 선배들 이야기다.
‘잘 따르는 순한 여자’이길 강요받으면서도 억척스러워져야 했던 이들
처절하고 숭고했던 그들의 전성시대를 복원, 조명하다
이 책은 1950~1980년대 한국 여성의 주된 직업군이었던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의 전성시대와 그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린다. 그들은 각각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라는 비하적 표현으로 불리곤 했는데, 그들 모두를 일컫는 ‘삼순이’를 제목으로 삼는 데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과연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이 합당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 가장 고단했던 그들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비하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충실하기로 결단 내렸음을 양해 바란다.” (〈프롤로그〉, 15쪽)
그들을 부르던 이름에서 드러나듯, 가부장적 관념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여성노동자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화려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그들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 인권 유린과 매연,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을 겪으며 청춘기를 보냈다. 이름과 반대로 억척스러워져야 했다. ‘억순이’는 가장 모순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헤게모니 쟁탈을 좇는 욕망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처절함이었고, 타인을 위해 조각조각 부서지는 희생을 기꺼이 무릅쓴 숭고함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팔자’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의 민초가 되었다.
▲ 1965년 5월 경찰의 외설서적 단속에 걸려 압수된 소설 ‘식모’ 표지. 당시 식모를 보던 인식의 단면이 잘 드러나 있다. 책과함께 제공
1부 식모
식모는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가장 많은 여성이 선택한 일이었다. 아니, 선택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봉건적 주종관계와 ‘여자는 집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이 아직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시절, 바뀐 사회 상황 탓으로 입 하나 덜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야 했던 어린 여성들이 할 수 있던 일은 ‘남의 집 안’으로 들어가 ‘하녀’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월급은커녕 그저 받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는데, 그래서 ‘셋방살이하면서도 식모는 둔다’고 할 만큼 식모를 둔 가구의 비율은 매우 높았다. 식모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적 영역’에 머물던 탓에 온갖 부조리와 인권 유린을 감내해야 했다.
식모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가 부엌일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넘쳐나면서 갈 곳 없는 10대 여성들은 식모살이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만원버스에 매달린 버스안내양의 아슬아슬한 모습. 문을 닫지 못하고 출발하는 이른바 ‘개문발차’ 탓에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안내양도 있었다.책과함께 제공
2부 버스안내양
거칠고 말썽 많은 남성 차장 대신 ‘상냥하고 부드럽게’ 승객을 모시겠다는 의도로 여성을 찾은 버스회사와 국가. 그러나 그 결과는 ‘억척스럽고 불친절한 버스안내양’이었다. 하루에 18시간씩, 만원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버스 속에서 요금 수납과 안내 등 온갖 일을 도맡아야 했던 버스안내양들에게 상냥함은 사치였다. 개문발차 사고, 알몸 수색 등 온갖 위험과 비인권에 노출되면서도 ‘돌계집’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그들은 저임금으로 인해 ‘삥땅’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 장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버스안내양은 거칠고 말썽 많은 남성 차장 대신 ‘상냥하고 부드럽게’ 승객을 모시겠다는 의도로 생긴 직업이다. 그러나 장시간 열악한 노동에 시달린 안내양들은 결코 상냥하고 부드러울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도시로 간 처녀'에서 버스안내양이 몸수색을 당하는 장면. 책과함께 제공
▲ 퇴근하는 여공들을 촬영한 옛 사진. 당시 세간의 인식은 이들을 ‘공순이’라 부르며 얕잡아 부르기 일쑤였다. 책과함께 제공
3부 여공
유신 정권하에서 국가는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국가적 ‘산업역군’이 되었다. 한편 여성노동자들은 이제 ‘순하게’ 부조리를 감내하지 않게 되었다. 공단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곧 노동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유신정권 종식에 단초가 된 YH무역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주축은 중공업 노동조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어린 여성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여 여성노동자들의 연령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1990년대 후반의 IMF 사태와 그로 인한 신자유주의화, 비정규직화의 해일에 첫 희생양이 된 것은 ‘아줌마’ 노동자들이었다. 물론 당시 남성노동자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트인 물꼬가 곧 자신들에게 다가올 줄은.
어느 저널리스트가 사명감과 집념으로 써내려간
한국의 주류 역사가 잊은 이들에 대한 헌사
이 책의 저자 정찬일은 기자와 카피라이터로 오랫동안 일해온 저널리스트다. 특히 몇 해 전부터 금융권 노동조합들의 의뢰로 《조흥은행노동조합 40년》, 《KB국민은행노동조합사》 등을 정리·집필해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와 세대에 대한 사명감이 생겼다. 불과 한두 세대 전 일이지만 사라지고 기억되지 못하는 당시 민중의 사회상, 그들의 삶과 일을 발굴·복원하고 다시 조명하는 일이다. 사회학자나 역사가가 해야 할 몫이지만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그의 첫 성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기자 출신 저널리스트답게 그의 글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의 표현대로 “필자의 의도(감정 이입과 평가)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데 지면을 많이 할애했”고, “기록과 통계가 간과하기 쉬운 시대 배경과 ‘현장의 목소리’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나 칼럼, 문학작품, 사진 등을 풍부하게 인용·수록하여 흡사 바로 그 시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의 주인공들 9명을 직접 인터뷰하여, 시공간을 초월한 살아 펄떡이는 르포르타주를 완성했다.
여성이 더 이상 ‘순이’가 되지 않는 시대를 꿈꾸며
저자는 사실 4부격으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현대판 삼순이’라 할 수 있을, 한국으로 시집 온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들의 이야기다. 책의 일관성과 지면의 한계로 다루진 못했지만,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삼순이’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식모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 여공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생활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대략 20년 간격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주는데, 이는 ‘삼순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름을 달리한 ‘삼순이’가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거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있다. 앞서 언급한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은 과거의 ‘삼순이’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유사하다. 미래의 ‘삼순이’는 누구일까?
경제 개발이 국가의 사명이던 유신정권 시절, 여공들은 수출전사로 추앙 받았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 여공들은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해도 여공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책속으로
그렇지만 이 책의 독자, 특히 왕년에 ‘삼순이’였던 독자들에게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과연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이 합당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 가장 고단했던 그들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비하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충실하기로 결단 내렸음을 양해 바란다. 본인의 경험과 다르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각자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이라 ‘최대공약수’를 뽑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알량하지만 필자의 인사를 받아주시길 간청한다.“고맙습니다.” --- p.15, 「프롤로그」중에서
식모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 여공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생활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대략 20년 간격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주는데, 이는 삼순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름을 달리한 삼순이가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거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있다. (…) 미래의 삼순이는 누구일까?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누가 되었든 그들을 맞이할 우리의 자세에 이 책이 참고가 되길 바란다. --- p.519, 「에필로그」중에서
전 가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식모를 두는 현상은 선진국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웬만한 중산층도 인건비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데 당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명확하다. 식모들의 인건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식구 중 한 입이라도 덜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구직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고용주들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해 어린이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세 살에 식모살이를 한 최옥자 씨의 사례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가 어느 정도 사라진 후에도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구걸하듯 사정하니 인건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서민들도 식모를 둘 수 있었다.
(…) 상황이 이러니 식모를 둘 수 있는 형편인데도 두지 않으면 ‘알뜰 주부’보다는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부에게 식모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정필수품 같았고, 식모가 없는 주부는 그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옛 친구 숙이가 왔다. 손꼽아보면 6년 만에 만남이었다. 그리 좋았던 때가 전설처럼 흘러간 지금 우린 서로 너무 많이 변했다. 결혼을 했고 또 귀여운 아기엄마가 됐으니까. 무엇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기쁨과 당황의 순간이었다. 난 따끈한 차라도 마시며 서로 헤어졌던 동안의 얘기를 나누어보려고 찻상을 숙이 앞에 놓았을 때 “이거 국산 홍차로구나. 국산은 맛이 없어.” 찻잔을 거들떠보지 않는 숙이.
“난 네가 왜 동창들의 모임에 늘 빠지나 했더니 식모가 없어 그랬구나.” 싸늘하게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놓고 어떤 조소가 담긴 듯한 단어들이 거침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대접해준 한 잔의 차가 그리도 못 마실 정도로 향기가 없었고 식모 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무심히 표현한 말이라면 그 표현방법이 내 마음에 너무나 큰 저항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왜 몰랐을까.
- [경향신문] 1972년 12월 8일자--- pp.80~81, 1부 2장「식모 전성시대」중에서
식모 배제는 주택 구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중산층 집은 식모들 방을 따로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 개량주택 평면도를 보면 식모방은 크기가 제일 작으며 1~2평 사이로 오늘날 고시원보다 약간 크다. 이 경우 위치가 현관문 바로 앞에 있지만 어떤 집은 제일 안쪽에 있고, 어느 곳이든 부엌과 맞닿았다. 가급적 주인 가족과 마주치지 않거나, 부르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1970년대 9월 우리나라 중산층 아파트의 효시가 된 한강맨션아파트가 준공되었다. 시공사인 대한주택공사는 “좌식생활을 벗어나 서양식 생활양식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32평형 도면을 보면 식모방의 크기와 위치는 과거와 같다. 식당과 베란다(혹은 창고)로 통하는 문은 있지만 거실로 통하는 문은 없다. 당시 아파트 ‘입식 구조’ 는 집안일하는 주부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다시 말해 식모가 굳이 필요 없는 서양식 아파트를 지향했는데, 그런 곳마저 식모방을 둘 만큼 식모는 ‘대중적’이었다. 식모방에 거실로 통하는 문이 없는 것은 주인집 식구와 마주치는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건설사의 ‘배려’였다. 식모는 가정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설계는 이후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를 알리는 여의도시범아파트와 반포아파트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p.108, 1부 3장「하녀의 다른 이름, 식모」중에서
1951년 3월 서울 재탈환 후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 급증했다. 그나마 전쟁 통에 사람과 군수물자를 옮기던 트럭을 버스로 개조하여 버스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정비업소와 운수회사들은 미군 트럭을 싼값에 불하받아 부품을 골라내 버스로 개조했다. 엔진이랑 차대를 떼다가 ‘도라무깡(드럼통)’을 달구면서 망치로 살살 펴 지붕과 문짝을 만들었다. 트럭이 버스로 변신하는 데 3개월이면 충분했다. 미군들은 “코리안은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했다. 2.5톤짜리 군용 GMC 트럭은 40~50인승 버스로 탈바꿈했고, 중형인 쓰리쿼터(4분의 3톤) 트럭은 12~25인승 ‘합승택시’로 변신했다. 이때가 버스업자들에게는 황금기였다. 차의 가격은 싸고 손님은 넘쳐났다.
차츰 버스와 전차 사정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차량은 여전히 모자랐다. 1953년 7월 서울에서 버스 108대, 택시 50대, 전차 105대가 운행 중이었다. 전차는 물론 버스도 최대 수용 범위를 넘어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을 하도 많이 쑤셔 넣어 ‘고무로 만든 차’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더는 태울 수 없어 정류장을 서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민중의 공기인 버스를 타는 날이면 그날 아침 먹은 것이 송두리째” 올라오기 일쑤였다. 정류장 장기 정차도 승객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승객이 안 차면 버스는 정류장에서 보통 20~30분이나 머물렀고 뒤차가 와야 출발하는 등 부산에서의 ‘버스 횡포’가 일상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버스 교통사고도 잦았다. 전차와의 충돌, 전복 등 대형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정비 불량, 만원버스 등 구조적인 문제점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1959년 12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교통사고 방지를 위한 8개 특별지시를 내릴 만큼 버스 교통사고는 사회적 문제였다.--- p.224, 2부 2장「남성 차장」중에서
저임금과 더불어 악명을 떨친 것은 근무시간이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 형태로서 승무하는 날 근무시간은 18시간이었다. 휴일 하루를 감안하면 일일 평균 근로시간은 12시간이 된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보다 주 12시간을 더 근무했지만 정부의 ‘간섭’은 전혀 없었다. 임금, 후생복지 등이 해마다 개선되기는 했지만, 1인당 하루 18시간 근무는 버스안내양이 사라질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병태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국 안내양들의 승무일 평균 근로시간은 18시간 27분이었다. 승무시간이 17시간 5분, 준비시간 10분, 대기시간(6회) 총 27분, 차내 청소시간(3회) 총 15분, 수입금 계산시간(6회) 총 20분, 잔업시간 10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24시간에서 이를 빼면 5시간 30분 남짓으로, 여기서 식사시간(3회) 총 30분, 기상하여 준비하는 시간 1시간을 빼면 수면시간은 많이 잡아도 4시간이다. 1981년에 이루어진 다른 조사에 따르면 안내양들의 40퍼센트는 쏟아지는 졸음과 피로를 이겨내기 위해 카페인 성분의 각성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pp.288~289, 2부 4장「“오라잇, 스톱!”」중에서
안내양은 버스에 오르려는 승객들을 뒤에서 힘껏 밀지만 역부족이었다. 안내양을 도와 함께 밀고 자리가 나면 타는 남자들도 있었다. 안내양이 탈 공간은 없었다. 더욱이 문을 닫아야 하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확보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올라 까치발로 서고 양손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오라잇”을 외친다. 달리는 차에 아슬아슬 매달려 가는 안내양들은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안내양은 미어터지려는 버스의 최후 보루였다. 그가 못 버티면 승객들이 쏟아져 나와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다.「영자의 전성시대」 주인공이 개문발차 사고로 한 팔만 잃은 것은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안내양은 버스에 마지막 오르는 사람이므로 개문발차 사고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버스에 깔려 죽고, 전봇대 등 도로 가설물에 부딪혀 죽고, 운전사끼리 앞지르기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뒤차에 깔려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발생했다.
경찰은 시내버스 단속 때마다 ‘개문발차’를 집중 단속했으나 그때뿐이었다. 1966년 5월 서울시는 처음으로 개문발차 사고 차량에 면허정지 조치를 내렸고, 범칙금도 무겁게 부과했다. 이 경우 안내양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해고되었다. 그렇지만 직접적 원인인 인원 초과는 단속하지 않았고 ‘불법 운행’을 채근한 회사와 차주를 처벌하는 일도 드물었다. 개문발차 사고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경향신문] 1967년 1월 25일자는 문이 완전히 닫혀야만 차가 출발하고, 완전히 정차한 다음에야 문이 열리는 장치가 개발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 장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용화되지 못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자화상, 시대의 산물 ‘삼순이들’
<삼순이>는 단편적 기사나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있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의 삶을 역사로 만든다. 운행 중인 버스에서 피곤에 지쳐 졸고 있는 버스안내양의 모습. 책과함께 제공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거쳐
1980년대 산업화 시대까지
분명 존재했으나 흔적은 사라진
식모·버스안내양·여공들
신문기사 등 당대 기록 모아
그들의 ‘역사’를 꼼꼼히 담아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시대적 담론의 단초가 됐던,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할 그들
모든 사람이 글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잊혀지고,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작가 정찬일은 10여년 전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버스안내양은 다 어디 갔지.’ 추억을 되살리려고 버스안내양 기록을 검색해봤지만 만족할 만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예전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단편적 기사 또는 주위 사람들 기억 속에 버스안내양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종합적인 정보는 없었다. 정찬일은 내친김에 식모에 대한 기록도 찾아봤다. 정찬일은 “식모 누나는 버스안내양처럼 깊이 각인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 부자였던 친구네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식모 기록은 버스안내양보다 더 찾기 힘들었다”고 했다. 여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과 노동’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 여공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 모습이 제대로 기록된 정보는 드물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삼순이-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이다. 정찬일은 책 에필로그에서 “ ‘왜 없을까?’ 그들은 분명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제대로 캐기도 전에 ‘내가 직접 쓰자!’라는 만용을 부렸다. 고백하자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 또는 지배계급의 전유물’이라는 데 반발하는 심리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먼저 이 책 제목부터 설명해야겠다. ‘순이’는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여성을 지칭할 때 쓰는 이름이다. 책에 따르면 ‘순할 순(順)’자는 ‘맑을 숙(淑)’자와 함께 1950~1960년대 여아 이름에 가장 많이 붙여진 글자였다. 지아비와 집안을 잘 따르는 순한 여자가 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쓰이다 보니 특정한 여성들을 묶어 ‘○순이’라고 부르곤 했다. 남성으로 치면 ‘○돌이’쯤 된다.
1970년대 수출증대에 기여했던 가발공장의 여공들(왼쪽). 1938년 5월3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직업소개소의 조선어멈들(오른쪽). 책과함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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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주인공은 식모와 버스안내양, 여공이다. 이들 역시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라고도 불렸다. 이들 셋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면 책 제목인 ‘삼순이’가 된다. 사실 ‘○순이’는 멸칭에 가깝다. 정찬일은 프롤로그에서 “ ‘과연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이 합당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 가장 고단했던 그들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비하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충실하기로 결단 내렸음을 양해 바란다”고 말했다.
식모와 버스안내양, 여공은 시대별로 여성들이 가장 많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직업이다. 식모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 여공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가 ‘전성기’였다. 저자는 신문기사 등 기록을 뒤지고 모아, 이들의 역사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식모가 여성의 주된 ‘직업’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는 ‘하녀’와 ‘노비’가 있었지만 직업은 아니었다. 농촌 경제가 파탄나면서 가난한 집들은 ‘숟가락 하나 줄이는 것’이 과제였다. 입을 덜기 위해 집에서 나가야 했던 여성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남의 집’으로 들어가 ‘하녀’가 되는 것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식모를 원하는 ‘수요’가 늘어났다. 조선으로 새로 이주한 일본인 주부들은 순조로운 적응을 위해 조선인 식모를 찾았다. 경륜 있는 나이든 식모 ‘조선 어멈’과 잔심부름,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식모를 함께 두는 것이 한국에 사는 일본인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책에 따르면 1924년 2월부터 4월까지 경성직업소개소를 찾은 조선인은 모두 1580명이고, 제일 많이 취직된 직종은 가사사용인(식모)이었다. 1933년 9월 인천의 직업소개소에서는 식모 구직자 100%가 취직했고, 1938년에는 전체 여성 구직자 2만7014명 중 식모 취직자가 2만3527명(87%)이었다.
식모를 부리는 ‘전통’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서울에서는 ‘셋방살이하면서도 식모를 둔다’고 할 만큼 숫자가 많았다. 상류층 가정에 대부분 식모가 있었고, 중류층의 식모 고용률도 85%를 넘었다. 1970년대 초에는 서울 전체 가구의 31.4%가 식모를 두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서울이라고 하지만 당시 세계 최빈국인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식모들의 인건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식구 중 한 입이라도 덜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구직자들이 너무 많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구걸하듯 사정하니 거의 무료로 부릴 수 있었다. 당연히 인간적인 대우도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집 안에서 일하는 탓에 온갖 부조리와 인권 유린도 견뎌야 했다.
식모는 한집에서 먹고 잤지만 ‘식구’는 아니었다. 예전 한국의 아파트 구조에서는 ‘식모 배제’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 개량주택 평면도를 보면 식모방은 크기가 제일 작으며 1~2평 정도로 오늘날 고시원보다 약간 크다. 위치가 현관문 앞이든, 제일 안쪽이든 부엌과 맞닿았다. 가급적 주인 가족과 마주치지 않고, 부르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1970년 9월 준공된 한강맨션아파트 도면에 나온 식모방은 주방과 베란다(혹은 창고)로 통하는 문은 있지만 거실로 가는 문은 없다. 이러한 설계는 이후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를 알리는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반포아파트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버스안내양의 역사는 1920년 한국에 버스가 도입되면서 시작됐다. 먼저 대중교통의 문을 연 전차의 차장이 모두 남자인 반면 후발주자였던 버스는 여성 차장을 고용했다. “전차보다 승차 인원이 적고 요금도 비싼 버스 승객들이 상대적으로 ‘교양’이 있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또 “부드럽고 상냥한 여성이 차장을 맡으면 서비스 질이 높아져 영업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여성 차장은 고학력, 고임금 직업이었다. 채용조건에는 ‘꾀꼬리 같은 목청’과 ‘아름다운 얼굴’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해방 이후 점차 줄어들었던 여성 차장은 1961년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은 ‘교통명량화’를 위해 버스 차장을 전원 여성으로 교체하고, 명칭도 ‘안내원’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처음 버스가 도입될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버스안내양(공식 명칭은 안내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안내원을 안내양이라고 불렀다)들은 ‘억척스럽고 불친절’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하루 18시간씩 근무하는 이들에게 친절은 사치였다. 여기에 저임금으로 ‘삥땅’을 칠 수밖에 없었고, 또 이 때문에 ‘알몸수색’ 등 온갖 수모를 겪었다. 만원버스에 매달려 가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1975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자의 전성시대> 주인공 영자는 식모를 거쳐 버스안내양을 하다가 한쪽 팔을 잃는다.
여공들은 식모나 버스안내양에 비하면 그나마 주목을 받은 편이다. 유신정권하에서는 ‘산업역군’으로 찬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공돌이’들이 경력을 쌓아 숙련노동자로 변신하는 사이에도 ‘공순이’들은 단순업무를 반복하는 데 그쳤다.
여공들의 존재감은 산업발전사보다는 노동운동사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순이’들은 이름처럼 순하게 부조리를 감내하지 않았다. 공단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노동조합의 단초가 됐다. 책은 “급격히 늘어난 노동자, 더군다나 성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차별받는 여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운동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생존의 몸부림이었다”고 설명했다. 유신정권 종말의 신호탄이 된 YH무역 신민당사 농성의 주역도 여공이었다. 여공들이 주도하던 노동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중공업 노동조합으로 넘어갔다. 더불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여성 비율이 점차 증가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연령도 높아졌다. 이 와중에 1990년대 후반의 IMF 사태와 그로 인한 신자유주의, 비정규직화의 해일에 첫 희생양이 된 것은 ‘아줌마’ 노동자였다.
정찬일은 “삼순이는 시대적 산물”이라고 본다. 식모에서 버스안내양, 버스안내양에서 여공으로 이어졌듯이 또 다른 삼순이가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실제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삼순이가 있다.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동남아시아 이주여성이다. 정찬일은 “이들은 과거의 삼순이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유사하다”며 “기회가 닿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삼순이’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미래의 삼순이가 누가 될지 가늠할 수 없지만 누가 되었든 그들을 맞이할 우리의 자세에 이 책이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정(방주연)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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