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을 어떻게 통과할까? 막연한 선입감은 괜한 걱정이었다. 영덕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 포항 송라면 화진해수욕장에서 20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마치 말을 갈아탄 느낌이다. 청하면 방석과 방어리로 연결된 이 길은 보차분리가 안된 1차선 도로지만 펼쳐진 풍경이 여느 동해안 국도와는 다르다. 해안을 끼고 들 가운데를 걷는다. 가능한 도로를 버리고 해안선이나 마을을 찾아 가지만 이곳에서의 느낌은 다르다. 드믄드믄 만나는 횟집과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마을들 사이로 동해는 푸른빛으로 배경이 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길은 잊고 있던 풍경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켜 주었다. 길은 고려말 성현 원각조사가 태어난 조사리로 해서 월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더 이상 해수욕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컨대 서정천이 동해로 들어서는 강의 끝자락, 민물과 바닷물이 몸을 섞는 거기에 유독 더 눈길이 간다. 서로 다른 성질의 에너지와 물이 만나는 곳인지라 지형이며 경관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포스코 월포수련관을 지나 솔숲을 관통한다. 고개를 돌리면 동해의 바람들이 숨박꼭질을 하듯 해송숲 사이를 빠져나온다. 양지고개를 앞두고 조경대가 있다. 이어지는 곳은 이가리. 바닷가를 담장으로 한 이가초등학교로 내려서 이가포구 길을 따라 축암을 지나 흥해 오도교까지 3.4km 해안길을 따라 간다. 오도리는 한가심이, 검댕이, 섬목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오도(烏島)라 하는데 원래 오도항에서 100m 거리에 있는 3개의 커다랗고 질펀한 검은 바위섬에서 유래한다.
눈길을 끄는 유람선 모양의 레스토랑과 화이트하우스 까페가 있다. 그나마 봐줄만하다. 허나 대부분의 카페며 레스토랑, 펜션, 모텔의 입지는 제 멋 대로다. 기존의 마을이나 지형등과의 관계나 경관을 고려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국적불명의 그 건물들은 동해안에서 꼴불견이다. 칠포항에 가까워지면서 도로는 소방도로처럼 좁아진다. 칠포교를 건너면서 좌회전하는 모퉁이 약국과 낚시용품을 한꺼번에 파는 만능슈퍼에서 목을 축인다.
흘러 온 곡강천 하류 해안사주를 가로질러 잇닿은 용한1리 해수욕장까지 간다. 흥해읍은 선사시대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나 흥해전체가 물에 잠겨 무려 반만년 동안 호수지대가 되었다. 그랬던 까막한 세월, 곡강(曲江)어귀의 산줄기가 터이면서 호수의 물이 바다로 들게 되었다. 이로서 흥해평야가 생겨났는데 가뭄에 물 걱정 없고 습기가 많은 지역으로 항상 바다와 함께 흥(興)한다 하여 흥해(興海)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용한리에서 죽천까지의 해안은 영일만 신항 조성지다. 문득 가수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양덕지구의 아파트들이 멀리서도 보인다. 포항해양과학교가 있는 팔복수련원 샛길로 빠져 북부해안로를 따라 환호해맞이공원으로 향한다. 멀리 포스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포항시내로 들어선 것이다. 부산 광안리같은 북부해수욕장을 지나 죽도시장으로 간다.
북부해수욕장 뒤편 시가지 동빈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네 블록으로 들어서면 포항 최대의 재래시장 죽도시장을 만난다. 점포수 약 1200개에 달하는 포항 최대 규모 재래시장으로 1950년대 갈대 무성한 내항 습지대에 노점상들이 모여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경북 동해안 일대의 농수산물 집산지인 동시에 유통의 요충지다.
되돌아 나와 큰다리를 건너 송도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80년대 초 철강공단 2.3단지가 건설되고 포스코의 확장으로 형산강하구와 영일만이 매립되면서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 파란대문을 여기서 찍었다. 그 무대였던 송도해수욕장은 예전에 해수욕장이었다는 흔적만 남기고 호안도로가 만들어 지고 있다. 그래서 한때 이 바다를 찾았다 다시 방문한 사람들은 망연자실이다. 그 변화가 너무 놀랍기 때문이다. 해안을 따라 즐비했던 횟집이며 여인숙은 간 곳 없다. 송도해수욕장은 2007년 결국 문을 닫았다.
포철이 들어오기 전 송도에서 둑으로 연결된 강의 모래가 퇴적된 넓적한 땅, 딴봉마을이 있었다. 갈대를 베어다 울타리를 두르고 밭을 일구어 온갖 시금치며 부추, 얼갈이배추를 심고 바닷물을 받아 소금을 고며 온 몸으로 삶을 일구던 순한 사람들이 100호 정도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지만 준설이 이루어지고 딴봉마을은 개발에 자취감춘 포항의 여느 마을처럼 지도에서 지워졌다. 형상강 하구 둑길을 따라 걷는 동안 포스코는 한번도 눈앞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강의 하구에는 사라진 다섯 개의 섬 이야기가 있다. 대도(大島)·상도(上島)·해도(海島)·송도(松島)·죽도(竹島)가 그 섬들이었는데 1969년 포철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그 형산강은 경주의 서형산(선도산)과 북형산 사이를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끔하게 단장된 둔치부는 도시화 된 강하구의 전형이다.
신형산교 건너 포스코를 관통한다. 이름도 제철동, 지독한 쇳냄새다. 포스코 거리는 냉천교를 건너면서 일단락 된다. 일월로 옹벽길을 따라 3.6km 가면 도구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뒤편 교차로는 포항시내와 구룡포를 연결하는 14번 국도와 호미곶을 한바퀴 도는 928번 지방도가 교차한다. 갑갑증이 일던 포항시내를 벗어나 본격적인 호랑이 꼬리 더듬기가 시작된다.
임곡에서 해안선을 따라 길은 굽이치다 고개를 넘어서며 발산에 이른다. 발산은 포항을 마주보고 있다. 거기 호미곶을 앞두고 여섯 개의 시비가 있다. 듣자하니 문학비를 세우고자 일부러 터를 딱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멸치떼가 우르르 뒹굴고간’ 다무포의 이야기며 ‘샛바람 속에서 관절을 푸는 여남바다’, ‘청보리 넘실대던 구만리’를 시로서 풀어 놓고 있다. 학달비문재를 넘자 대동배리의 천연기념물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등장한다. 노란꽃이 일제히 필 때면 그 만한 장관도 없다고 한다. 먼 바다에서 보면 날아가는 학의 모습이라 하여 학달비(鶴達飛)라 불리는 대동배리를 지나 6km 해안을 돌면 영일만의 끝자락 한반도 최동단 호미곶에 이른다.
첫 방문지는 호미숲 해맞이터, 북동풍이 불고 바다는 너울을 일으키며 춤을 춘다. 파도가 제풀에 신이나 머리 풀고 신들린 듯 뭍으로 오를 때면 그 어떤 것도 배겨나지 못한다. 늘어선 바위들은 그 바람과 파도가 할 킨 흔적이다. 바다는 1907년 일본 동경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호를 삼키기도 했다. 그들이 좌초된 해안을 교석초라 부르고 일제는 조난비를 세웠다. 풍파가 심하면 청어가 밀려나오는 경우가 허다하여 까꾸리(갈고리)로 끌었다는 뜻에서 까꾸리계라는 지명이 붙었다. 그리고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능지처참된 왼팔이 버려진 현장이기도 하다. 누구인들 그 세월이 편했을까.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혁명을 일으켰던 김옥균의 삶을 통해 역사의 문장을 읽는다. 독수리 바위를 지나 1908년 건립한 호미곶 등대로 향한다.
건립당시에는 동외(冬外)였던 이름이1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1934년 장기갑, 장기곶, 호미곶으로 개명을 했다. 천정에 대한제국 황실문양인 오얏꽃(李花文)이 새겨진 장기곶등대는 철근이 사용되지 않은 벽돌건물로서 건축사적인 의미도 있다. 등대광장에는 해와 달의 설화의 주인공 연오랑 세오녀의 상을 비롯 등대박물관이 있고 해상에는 육지와 마주보게 한 ‘상생의 손’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찍이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분지로는 택리지 등의 일부 내용을 빌미로 조선의 형세를 토끼에 비유했다. 허나 광장에 나부끼는 깃발이며 가로등의 호랑이 꼬리장식은 “우끼지 말라”며 호랑이 꼬리로 바람을 일어키고 있었다. 그 바람은 구만리 허리등에 청보리필 때가 압권이다. 더는 가지 못하고 구룡포를 찾아 여독을 재운다. 포항 보기보단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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