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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9-포항, 구룡포에서 경주 감포까지

by 이성근 2013. 6. 13.

 

구룡포는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달리다 용암산의 한 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만을 이루는 곳이다. 구릉지가 많고 평지가 적으며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다. 신라 진흥왕 때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해안 바다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구룡포라 불린다.

구룡포에서의 걸음은 용주리 사라끝(沙羅末)에서 시작한다. 구룡포 홍보대사라 할 수 있는 서울래기 시인 권선희씨가 동행했다. 장인동 일본인 가옥거리로 들어선다. 낡은 목조건물이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다. 100년 전 이곳은 향락의 거리였다고 한다. 목욕탕, 이발소, 약국, 사진관, 잡화점에 더해 여관과 식당, 선술집, 기생이 있는 고급 요정이 밀집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흥청망청 호기롭게 살다 갔다. 패망이 아니었다면 그 영화는 대를 이었을 것이다. 일본 가가와현과 오카야마현 출신들이 구룡포에 터잡기 시작한 것은 그들 본토에서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이미 일본 연안은 조업경쟁과 어족자원의 고갈로 어민들의 삶은 곤궁했다. 구룡포 진출은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구룡포 앞 바다 동해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일제의 배를 불렸다.

정어리가 몰려올 때면 고래도 떼로 몰려들었다. 가끔씩 어미 잃은 새끼고래가 방파제 너머에서 밤새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동네사람들이 “마카 잠을 설쳤다”고 했다. 그들은 동해를 종횡무진하며 닥치는 대로 잡았다. 배가 침몰할 정도로 막대한 어획고를 올리던 그들은 구룡포에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었다. 신사와 절을 짓고 학교를 세웠다. 가을마다 아끼 마쯔리라는 축제도 열었다. 축제는 그들의 패망과 함께 끝이 났다. 그로부터 70여년 지난 골목은 낡고 황량하다. 골목을 따라 열 집 정도 지나면 구룡포 공원입구가 있고 계단에는 구룡포 개척자유공탑이 있는데 구룡포 개발에 공헌한 일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 있다. 오늘의 구룡포항을 있게 한 일본인들의 흔적이다. 1921년부터 만을 매립하고 방파제공사를 벌여 1926년 완공했다.

 

허나 그것이 어찌 그들의 흔적일까. 순전히 조선인의 노동과 조선의 산물로서 이루어진 대공사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무튼 이로 인해 구룡포는 어업기지가 됐고, 원산과 부산, 그리고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중간기착지가 됐다.

 

이제 구룡포는 더 이상 고래를 불러들이는 포구가 아니다. 대신 낯선 나라의 고기배를 타러 온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인들이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늘 부산한 항포구다. 그 항구에 정박중인 오징어배들이 웬일로 한산하다. 어황이 안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밤바다로 진군하며 온 바다를 하얗게 밝힐 것이다. 지금은 쉬는 시간, 조불 듯 물결에 삐꺽이는 어선들을 뒤로 하고 구룡포를 벗어난다.

해안선을 따라 하정3리 임물에서 당사포를 지나 뇌성산이 동해로 치고 나온 모포까지 거침없이 걷는다. 뇌성산에는 7가지 보물이 나와 예부터 나라에 진상했다, 뇌록( 磊綠) 인삼 (人蔘) 자지(紫芝) 오합(蜈蛤) 봉청(蜂淸) 치달(雉獺 ) 동철(銅鐵)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칠보산치 라 했고 칠전(七田) 마을이 있다. 좀더 내려서면 장기천 하류 현내평야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신양과 독산이 해풍을 막아주는 해안에 무늬가 고아 담배대 재료로 쓰이던 소상반죽이라는 대나무가 있었다는 죽하 (竹下)마을이 있다. 남으로 대양마을과 창암마을이 있다.

금곡리 장기천(용암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용과 같이 길에 뻗어있어 용암마을이라는 곳에 할배바위와 할매바위가 서로 등지고 있다. 등을 지고 있지만 두 노인네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묘한 매력이 있어 한동안 발길을 머물게 한다. 조선 명종 때 선비 허진수가 이곳에 기거하면서 동해 일출을 보며 거문고를 탓다고 하며 금곡리에는 그를 제향하는 금산서원과 삼효각이 있다.

해안은 크게 휘어들면서 양포로 빠지는 고개를 넘는다. 뒤돌아보니 해안선이 유려하다. 양포는 감포와 구룡포를 연결하고 포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경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감재산에서 발원한 수성천이 양포만에 이르는 곳으로 수질이 좋아 일찍부터 냉동공장이 들어 섰었다. 항구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 이 바다에서는 아귀가 많이 잡혀 아구찜 요리가 유명하다.

오류해수욕장을 지나 감포항의 입구인 송대말 등대까지 10km 정도, 31번 국도와 마을길이며 해안을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감포는 경주의 바다다. 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甘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예전의 감포가 아니다. 왠지 들뜬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대 120만평 부지에 감포관광단지가 조성되기 때문인데 최근 조성예정지구 곳곳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 신석기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돼 개발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조심스럽게 돈다. 마음 같아서는 “ 에나 그리되라” 주문해보지만 이놈의 개발 바람은 멀쩡한 사람조차 이상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어 조심스럽다. 어쨌든 개발바람은 31번 국도 감포주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고 있다. 서둘러 벗어난다.

감포항으로부터 7.5km 지점, 대본초등학교 앞 국도가 대본삼거리를 향해 꺽어지는 곳에 사적 159호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문무왕릉 가기 전 도로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치기 싶다. 대본리의 푸른 바다와 문무왕릉인 대왕암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누각은 대지에 남아있던 초석들을 근거로 1979년 신라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亭)으로 다시 세웠다.

감포 일원은 호국불교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이견대, 감은사(感恩寺), 대왕암이 그 현장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장소다. 또한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는 곳이다.

이견대에서 경주쪽으로 10분정도 가면 유헝준교수가 “아!,감은사, 감은사탑이여”라고 외친 곳이 있다.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염원으로 짓게 된 절이 감은사다. 절은 문무왕의 이들인 신문왕 때 완공(682년)됐다. 호국과 효심의 상징인 감은사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폐사가 됐지만 쌍탑은 남아있다. 동해의 용이 된 선왕의 출입을 자유로이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하는 금당 밑 공간으로 문무왕이 ‘죽어서 용이 되어 왜의 침략을 막겠다’는 화룡(化龍) 설화를 건축에서 발현한 현장이다. 금당 아래 석조유규가 그것인데 삼국유사에 전하는 '배금당체하 동향개일혈(排金堂체下 東向開一穴:금당 섬돌 아래 동쪽을 향하여 한 개 구멍을 뚫었다)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기할 따름이다. 대종천(大鐘川)을 따라 대왕암으로 향한다.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의 침입 당시 몽고군이 약탈해가던 황룡사 대종이 선박과 함께 때 아닌 폭풍으로 침몰했고, 이후 이 하천을 ‘큰 종이 지나간 하천’이라 하여 대종천으로 부르고 있는데 동해천(東海川)이라고도 한다. 동해천이 몸을 푸는 곳 또한 동해구라 한다. 그 동해구 용당포에 죽어서도 나라를 생각한 문무왕의 무덤 수중릉인 대왕암(大王岩)이 있다.

 

  해묵은 논란이 있지만 사적158호인 대왕암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그 기분이 막판에 깨어진다. 월성핵발전소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방사성폐기물처리장도 들어선다. 경주의 선택치고는 어처구니없다. 봉림해수욕장 방풍림을 따라 가다 울산방향으로 고개를 넘어야 한다. 나아해수욕장까지 6km 구간 보행자를 위한 배려라곤 없다. 이레저레 불만이 많은 길이다. 읍천항으로 향하는 마을 담벼락에 핵발전소측의 지원을 받아 벽화가 한 가득이다. 후쿠시마의 절규가 이곳에선 들리지 않는다. 다만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