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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함민복 -늦은 봄나들이(자본주의약속)

by 이성근 2018. 6. 2.




자본주의의 약속 저자 함민복|세계사 |2006.04

함민복-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며 전업 시인. 개인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써내려간 시로 호평받은 그는, 인간미와 진솔함이 살아 있는 에세이로도 널리 사랑 받고 있다.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하다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88세계의 문학성선설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0년 첫 시집 우울一日을 펴냈다. 그의 시집 우울一日에서는 의사소통 부재의 현실에서 잡념의 밀폐된 공간 속에 은거하고 있는 현대인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993년 발표한 자본주의의 약속에서는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소외되어 가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96, 우연히 놀러 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보증금 없이 월세 10 만원 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그는 없는 게 많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편안함이 있다. 한 기자가"가난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스스한 머리칼에 구부정한 어깨를 가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다는 게 결국은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다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어요. 혼자 사니까 별 필요한 것도 없고. 이 집도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르지만 빈집이 수두룩한데 뭐.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동아일보 허문명 기자 기사 인용)

 

200510년 만에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출간하여 제24'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집은 그의 강화도 생활의 온전한 시적 보고서인 셈이다. 함민복 시인은 이제 강화도 동막리 사람들과 한통속이다. 강화도 사람이 되어 지내는 동안 함민복의 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강화도 개펄의 힘을 전해준다. 하지만 정작 시인은 지금도 조용히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

 

자본주의의 약속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나무,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욕망의 막대그래프

 

허옇게 눈 쳐내리는 대관령에서 나무를 보면

이내 죽어버리고 싶은 맘 간절히 드네

눈 비 바람에 제가지 쫙쫙 찢으며

저렇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저렇게 찌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번개처럼 갈라진 뿌리 언 땅에 묻고

 

광합성에 지친 날들, 일조권 싸움을 위해

쭉쭉 곧게 뻗어 올라간 더러운 욕망의 막대그래프

딱딱한 흙을 따듯한 흙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늙은 침엽수들이 왜 산을 닮아 가는지 알 것 같고

나무가 단지 태양이 배설한 빛의 똥임을 알겄네

 

늦은 봄나들이

 

산의 능선은 더 높은 산 혹은 하늘을 베고

가벼운 유행주의자 나무들은 멍청 다 푸르고

낮은 곳 찾아 무릎꿇는 겁쟁이 물소리

무당벌레처럼 알록달록 기어오르는 인파 고작

이것을 보자고 길의 포로 가로수를 권태롭게

지나고 이 시대의 부레 비닐하우스를 지나고

줏대없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숨막히며 와, ,

배운 만큼 슬픈 여자와 마주앉아 참았던

숨 팩 토하고 입 굳은 캔맥주를 마신다

(노모께 글을 가르쳐 준다니까 한참 망설이다

여탕 어떻게 쓰노 하시는 거예요) 사슴,

당신 별명처럼 내 상상력이 깜짝 놀라고

어떻게 물고기를 공중에 매달 생각을 했을까

물고기와 새의 가지를 헐어버리는

윤회의 소리, 저 풍경소리.

(언제 삶의 무게 다 버리고 공중에 매달려

비린내 나지 않는 청아한 울음 한번 울어 볼런지)

이곳을 담박 깊은 수중으로 만들고

당신은 李箱 말처럼 과자처럼

가벼워 보이는 여인 그런데 꽃이라는 게

식물들의 성기 아닙니까 저렇게

지천으로, 별들의 활주로, 바람의 혓바닥, 꽃잎 벌리고,

식물들의 섹스는 참 조용하지요

식물들의 포르노가 끝나기 전에 나온 늦은 봄

나들이 자, 꽃은 배경으로, 찰칵 나는 당신을

가슴에 물고기처럼 매달고 싶어 당신 가슴에

물고기처럼 매달리고 싶어 당신 눈동자 깊어

내 눈동자를 찌르고 또 찌르고

 

샐러리맨 예찬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 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6090-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 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질병과 시작詩作의 병리학>병이여 교만하지 마라

허 만 하

 

1. 몸과 삶의 틈새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이 도시를 찾아오지만,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죽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든다.”

 

말테의 수기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은 말테의 수기라는 교향악의 주제곡이라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말테가 파리의 거리에서 보는 것은 병으로 길에서 쓰러지는 사람과 이를 둘러싸는 구경꾼, 담을 어루만지며 힘들게 걷고 있는 임산부, 유모차 속의 아이(이마에 종기가 나 있다), 병원들, 그리고 요드포름 냄새와 감자튀김 냄새 풍기는 거리다.

살기 위해서 찾아든 고장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비단 파리라는 도시뿐이겠는가. 지구의 표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이 첫 구절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릴케는 꿈을 가지고 찾아든 파리에서 너무나 흔한 죽음을 목도하고(큰 종합병원 병상에서 죽어 가는 환자들이 수적으로만 다루어진다), ‘누구의 것도 아닌 고유한 죽음을 잃어버린 근대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죽음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 근대 니힐리즘을 초극하는 길이라 깨닫기에 이르는 것이다.

 

건강이란 개념은 사실 모호하다. 자명한 그만치 정의하기 힘들다. 많은 철학자와 의학자들이 질병과 건강에 대한 온전한 정의를 위하여 다양한 의견을 발표한 바 있으나 그것은 새로운 논쟁의 씨앗이 될 따름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라 정의했었다(1946). 그 후에 이 정의는 수정되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란 구절이 추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완전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초기의 이상주의적 표현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삶이란 말을 더하여 건강의 정치·경제적인 성격을 강조한 면에서 후자의 정의가 분명히 진보적이다. 가난도 병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건강 문제를 닫힌 의학적인 공간을 벗어난 열린 공간에서 짚어보려는 의도는 인간의 가치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가는 현대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테의 수기를 쓸 무렵 릴케가 거리에서 보았던 사람으로 연필 파는 노파가 있다. (루 살로메에게 쓴 편지). 이 때의 연필 파는 할머니를 사회·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가지고 건강을 즐기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세계보건기구는 그렇게 묻는 것이다.

질병과 건강의 현장을 몸에 두느냐 또는 삶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사색가들의 흥미 있는 주제가 될 수 있다. WHO의 정의도 이런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는 독일어의 몸이란 뜻의 단어 두 가지를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인 몸에 Koerper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살고 있는 몸 또는 느끼는 몸-현상적인 몸을 Leib라 부르며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구별했다.“몸의 경계가 그 안에 내가 사는 존재의 지평이다.”라 말할 때의 몸은 Leib이다. 질병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속해 있는 구조라 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의를 그의 존재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은 섭섭한 일이다.

건강이란 개념은 정말 삶이란 개념처럼 모호하다. 생물학적인 존재는 탄생 그 순간부터 아주 서서히 노화의 길 쪽으로 다가선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흔히 건강은 질병 없이 일상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심신의 능력을 가진 상태라 생각되고 있다. 죽음을 질병의 종국적 표현으로 본다면 질병은 잠재적으로 목숨과 함께 있는 것이 된다. 건강과 질병은 국경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경계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 자들은 모두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두이노의 비가 -1비가

 

릴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두 개의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을 펼치는 자리에서이다(두이노의 비가-1비가, 83-85). 건강과 질병이란 두 가지 개념은 깍지낀 손가락처럼 또는 동전의 앞뒤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논리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수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완전한 건강은 플라토의 이데아 같은 것이라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건강과 질병의 틈새에서 이 두 가지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만치 병은 목숨(현존재)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질병은 잠재적으로 도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사문출유四門出遊로 표현되고 있는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의 엄연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2. 마르크스의 꿈

병리학이란 학문이 있다. 이 말은 유럽에서 Pathology라 일컬어지는 학문의 번역어다.

Pathology란 파토스(Pathos)와 로고스(Logos)의 결합이 낳은 합성어라는 사실은 모든 의과학 분야 학생 또는 종사자들이 병리학 강의 첫 시간에 듣는 상식이다.

병리학이 다루는 파토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질병(수난)이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sentiment), 정열(passion), 감성(emotion)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정신의 고양된 상태이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5). 병리학이란 어떤 질병의 원인, 그 특정 질병이 일어나는 기전(메커니즘), 그 질병에 따라 인체에 일어나는 형태학적 및 기능적 변화, 임상의학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한 마디로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엄정한 자연과학이다.

병리학이란 학문의 개성적 성격은 이해할 만하지만 웅장한 체계를 자랑하는 이 학문에 끊임없이 질병 또는 질병을 매개로 하는 죽음의 불안에 노출되어 있는 주체적 실존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은 섭섭한 일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Koerper()만 있지, Leib()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과학적 인식의 한계이다. 나는 그 한계의 자각에서 시를 만날 수 있었다. 시는 세계에 대한 갈릴레오적 인식이란 절벽 앞에서 유일자의 표현으로 맞서는 작업이다. 사람의 몸은 유전자에 의하여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는 생물학적인 단위가 아니라 더운 피가 살아 있는 현존재의 현장이다. 병리학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이런 우회는 나에게 정신의 새로운 풍경만이 아니라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를 선사해주었다.

의학은 아픔(=괴로움)을 경험하는 삶 자체를 소외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한 방울 눈물은 신체적인 것이냐 혹은 정신적인 것이냐를 묻고 눈물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질병에 대한 인식과 죽음에 저항하는 실천을 다루는 의학은 자연과학과 휴머니즘을 통일하는 새로운 바탕에서 다시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광활한 들녘(의학 철학)은 죽음으로서의 현존재를 설정하는 하이데거의 미래와 함께, 타자와의 만남으로서의 미래를 말하는 레비나스의 현상학마저 싸안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문득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의 꿈을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자연과학(natural science of man)’자연의 인간과학(human science of nature)’이 하나가 되어 있는 총체적인 과학(integral science)을 말했었다. 마르크스의 꿈은 아직 외로운 채 남아 있다.

 

3. 질병이 긍정적 기호로서의 가치가 되었던 때

서구 사상의 역사를 안에서 지탱해온 로고스와 대립되는 <파토스>는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의 평화를 흐트러지게 하고 인간을 진리로부터 멀게 하는 부정적인 성격으로 이해되었다.

플라톤이 시인을 그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려 했던 것도 시인들의 파토스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백과전서의 편자로 알려져 있는 디드로는 적절한 말을 하고 있다. 파토스는 괴로움의 뿌리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기쁨의 원천이다. 위대한 파토스에 의하여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위대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며, 그는 뒷걸음치는 감정은 창조적 정신에서 먼 것이라 하며 겸손한 감정을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큰 시인은 지적 정열(파토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사람이 된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서, 합리주의적 사조에 대항해서 유럽문화에 일어난 문화적 운동의 새 물결을 사람들은 모호한 대로 낭만주의라 이름짓는다. 이 시대에 이르러 상상력, 감각, 멋의 가치가 다시 평가되고, 정신적 육체적 질병과 죽음이 시의 주제가 되기 시작한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이성을 신봉하며 시를 도덕 또는 교훈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는 사태에 대한 이러한 반동은 시기적으로 프랑스대혁명과 무관하지 않다. 시어의 순화와 정련에 헌신했던 보들레르가 , 모든 것은 심연-행위도, 욕망도, 꿈도 언어도!”라 하며 어느 창에서도, 나에게 보이는 것은 무한뿐이라고 노래한 무한의 자유에는 시적 소재의 자유와 형식의 자유(산문시)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전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이성적 규범에 따른 작품이 생산되고 아울러 독자들도 일정한 틀 속에 갇혀 있는 감성으로 작품을 읽었다. 그러나 파토스는 양동이 속의 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거침없이 솟구쳐 흐르는 샘물이었던 것이다(). 그 샘물은 그때까지 금기였던 질병, 죽음을 자유스럽게 노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 시학을 합리주의적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 말했던 시인이 옥타비오 파스다. 처음에는 러스킨, 페이터에 심취했던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는 프랑스의 시인 고티에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원리의 세례를 받고 대표적인 예술지상주의자가 된 것을 낭만주의가 개인에 있어서 개화한 사례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질병은 하나의 긍정적 기호로서의 가치를 가지기에 이른 것이다.

 

4. 이형기의 파토스

이형기는 술자리에서 이따금 스스로를 다지듯 오스카 와일드 좋지!”라 말했었다. 그리고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아름다운 역설을 함께 펼치기도 했었다. 한번은 느닷없이 내가 이곳에 있고 저곳에 있지 않는 이유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파스칼 좋지!”라 응답했었다. 그와 나는 거두절미한 그런 대화를 즐기는 사이였다.

한번은 이형기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에덴 다방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하자는 이야기였다. 에덴은 부산의 광복동 들머리 일본 책방골목 안쪽에 있던 다방이다. 점심을 마치고 그는 내가 근무하던 한 종합병원(메리놀병원) 병리과까지 동행해서 췌장 조직과 암 조직을 현미경으로 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것이 그가 말했던 부탁이었다.

나는 현미경 초점을 맞추어주고 그림을 그리며 홍색과 파란색으로 염색되어 있는 췌장 조직 구조를 설명해 주었었다. 소화액을 분비하는 일반 췌장 세포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희멀건 세포 무리가 랑겔한스(Paul Langerhans, 1847-1888)라는 독일 병리학자가 처음 발견한 내분비세포들이다.

이 가운데의 어떤 특정 타입의 세포가 혈당 대사에 관계하는 인슐린을 분비하는 세포라는 사실을 그 설명에 곁들였다. 그는 안경 너머 열심히 현미경 시야를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끄떡이기는 했었지만 그가 어느 수준까지 이해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웠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의학적 원리보다 시의 모티브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신장 질환으로 40의 나이에 요절한 랑겔한스는 그 때 이 세포무리 기능을 모르고, 림프 조직이라 잘못 해석했던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멀리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판독실에서 이형기가 난생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던 일과 관계되는 그의 작품으로 랑겔한스섬의 가문 날의 꿈암세포2편이 있다.

간반肝斑이란 시도 이 무렵의 작품이긴 하지만, 현미경 관찰과는 무관한 작품이다. 나는 그 날 암세포가 상대적으로 더 괴기하게 보이는 포도상귀태 표본을 보여 주었었다. 그리고 직선적인 표현으로 정신과 물질의 갈등을 즐겨 다루는 미국의 저명한 현대시인 이버하트(Richard Eberhart, 1904-2005)에게 암세포(Cancer cells)라는 작품이 있다는 말을 했었다.

세계는 시를 위한 사료라 말했던 것은 보들레르다. 참된 시인에게는 우주 삼라만상이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이형기는 그것을 증명했다. 더욱 자기도 몰래 자기 몸에 들어선 질병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시를 썼다. 그것이 병에 대한 언어로 수행한 그의 복수(그가 즐겨 쓰는 말이다)란 사실을 나는 안다.

 

이형기가 두툼한 원고 뭉치를 나에게 건네주며 새 시집을 내려 하니 시집에 넣을 해설을 하나 써달라는, 거역할 수 없는 부탁을 했던 것은 이 현미경 관찰이 있고 나서 얼마가 지난 뒤의 일이 된다. 나는 그 원고 뭉치에서 그의 아름다운 시적 변신을 보았었다. 반가웠다. 그 반가움은 이형기 개인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의 변신을 맞이하게 될 한국시단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극점에서 그는 새로운 차원을 향하여 힘든 메타모르포시스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시적 변신의 성과로 태어난 그의 세 번째 시집 꿈꾸는 한발旱魃(창조사, 1975)을 위하여 내가 칼의 구조라는 짧은 글을 쓰게 된 경위를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한다.

이런 여담이 올바른 시의 이해와는 무관한 일이란 사실을 내 자신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피력하는 것은 시에 대한 그의 철저한, 그야말로 지독한 사랑을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시인 이형기가 렌즈 너머 노려보고 있었던 것은 생면부지의 세포들 형태가 아니라, 가뭄에 타오르는 자기 내분비 세포의 섬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호쾌한 소나기 소리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소나기 소리는 시에 뜻을 세우던 무렵의 소년 이형기가 유심히 바라보았던 진주 남강 그득한 물빛 위에 떨어지던 은빛 빗줄기에 겹치는 것이었다.

랑겔한스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지는 마른버짐이니라

오 박토薄土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밑의 반달의 고사枯死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昇天의 꿈

랑겔한스섬의 가문날의 꿈이니라

 

허만하 1932년 대구 출생. 1957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허만하 시선집』 『야생의 꽃, 시론집 시의 근원을 찾아서등이 있음. 박용래문학상, 한국시협상, 이산문학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신체가 보내는 문학적 신호

오 채 운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이는 정신이나 이성과의 대립관계에서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과 이성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존재로서의 신체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인간에게 인식되고 육화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에 세계의 현상이 생리학적 현상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혹은 변형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세계 현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피터 부룩스는 인간의 신체를 고통과 쾌락의 양극단 사이에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쾌락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되며, 제어할 수 없는 고통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또 이성에 항거하는 힘이기도 하며 죽음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신체는 항상 호기심의 대상이며 영원히 그치지 않는 탐구 대상이다.’ 그가 말하는 쾌락의 극점에 에로티시즘이 자리한다면 고통의 극점에는 신체의 훼손이 자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훼손된 신체는 정상적인 신체일 때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현상들을 인식하게 되며 같은 현상도 다른 시각에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훼손된 신체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내게 된다. 문학에서는 주변부에 있던 문제가 훼손된 신체를 통해 바라보았을 때 중심부의 문제로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주변부의 인물이 중심인물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훼손된 신체는 다양한 인간의 심리를 내포하고 있는 주요 텍스트로 존재하게 된다.

 

신체에 나타나는 세계 현상의 징표들은 문학작품 내에서 신체 이미지를 통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체의 이미지가 문학에서 차지한 바는 실로 크다 할 수 있겠다. 현대문학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신체는 신화시대나 고대 서사문학에 나타나는 신체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신화시대나 고대 서사문학의 인물들은 영웅이 곧 주인공으로서, 이들은 비정상적인 신체를 통해 초능력적 자질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대의 주인공들은 왜소할 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다. 더불어 신체의 결손이나 손상, 질병 등을 통해 불구적이고 기괴한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와 사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견해에서 살펴보았을 때 신체 훼손 이미지는 프라이가 말하는 서사인물의 변모 양상의 다섯 단계 중 아이러니 양식의 인물형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신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문학현상 중에서도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훼손되어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신체는 크게 결손, 질병, 손상, 소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신체의 결손은 시각이나 청각 혹은 지체가 불구의 모습을 띠는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웅녀는 곰이 변하여 된 여자이며, 주몽, 탈해 등은 알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탈해와 해모수는 자신의 몸을 새나 동물로 바꿀 수도 있었고, 알영의 입술은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고대문학에서 이러한 신체의 결손은 영웅적 비범함을 의미하지만 현대사회에서의 결손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 되어 문학적 공간에서 사회를 인식하는 잣대가 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인식세계를 넓혀가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둘째,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는 유형으로 질병의 형식이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신체에 깃든 질병의 원인을 신체에서만 찾으려 했으며 질병이 깃든 부위만을 질병의 공간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질병의 원인을 질병이 깃든 부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병은 신체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위 환경이나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경우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질병은 인간의 삶이 신체에 병리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질병 원인을 스트레스나 환경 오염, 잘못된 식습관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문학에서의 질병 이미지는 물리적인 차원에서보다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문학에서의 질병 이미지는 사회의 질병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럴 경우에는 사회의 현상들이 신체에 적용되는 예라 할 수 있다.

 

셋째, 신체에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손상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신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천적으로 결손의 모습으로 탄생하지 않았더라도 신체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또는 내부로부터 손상당한다. 본인과는 무관한 외부의 사건이나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도 인간의 신체는 손상당한다. 그래서 태어날 당시에 가지고 있던 본래의 외형으로 살아가는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체의 손상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신체의 손상을 통해 인간의 자아는 자각과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신체의 손상이 외부의 어떤 요인으로부터 발생했을 때는 대부분 가해자가 선명히 드러난다. 가해자는 인간일 수도 사물일 수도 관념일 수도 있다. 신체에 손상을 가하는 억압은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고 개인적 욕망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이 손상에는 고통이 따르고 피해자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한다. 그 고통의 크기는 외부 요인에 대한 저항의지를 잴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신체의 손상 후에는 상처가 남는다. 상처는 손상이 지나간 후에도 고통을 재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 번 손상당한 신체는 비록 그 상처가 아물었다 해도 정신적인 측면에서 영원히 손상당한 자로 남게 된다.

 

넷째, 신체의 소멸은 죽음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문학 속의 신체는 질병에 걸리거나 손상되어 점점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화해 간다. 신체는 썩어가거나 녹아내리고, 부서지고, 불타서 없어진다. 썩거나 녹는 것은 신체의 액화液化를 의미하는 것으로 액성 이미지 즉, 물은 불과 함께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원형적 이미지이다. 물이 되어 혹은 불에 타서 소멸되어가는 신체는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며 죽음은 물이나 불과 같은 원형적 이미지로의 귀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사물의 변형, 진화 과정, 비물질화 등의 긍정적인 의미와 우울한 해체, 일정한 시기와 시간적 단위의 종말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체 훼손을 통해 나타나는 소멸과 죽음의 문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신체 훼손 이미지는 태어날 때부터의 결손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벌어지는 모든 병리 현상을 총괄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된 선천적 결손의 문제나 살면서 얻게 된 질병, 손상, 소멸의 문제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공존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병리학적으로 보면 질병의 역사, 신체 훼손의 역사이기도 하다.

 

20세기 한국 문학에 불어닥친 억압의 문제는 크게 일제 강점, 6·25 전쟁, 산업사회의 도래, 군부독재에 의한 정치적 억압의 지속 등을 들 수 있다. 신체는 이러한 억압의 문제들을 훼손 이미지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신체 훼손이 안고 있는 문제는 억압에 대한 현실 응전의 한 양식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제 강점이나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독재 정치나 산업사회의 문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맞물리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신체 훼손 이미지는 그러한 상처를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긍정적으로 사회문제를 감싸안는 형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신체 훼손의 문제는 폐결핵, 전쟁으로 인한 신체의 손상, 기계화되는 신체, 거세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신체로 변형되어 나간다. 이러한 신체 훼손 이미지의 변모 양상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사회적 인식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李箱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폐결핵 환자의 객혈은 일제의 억압에 대한 구토로 읽을 수 있다. 그의 시 아츰에서는 밤새 몸살을 앓은 화자의 에도아츰이켜진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신체의 훼손을 통한 시대적 구토(객혈)를 통해 일제의 억압을 딛고 자유의 아침을 볼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김광림, 전봉건, 구상 등의 시에 나타나는 신체 훼손 이미지는 대부분 그 원인을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의 무차별한 인간 살상에 대해 인간성 회복의 명제로서 신체 훼손 이미지는 사용되고 있다. 김광림은 전쟁을 애꾸눈이 아니면 절름발이를 만드는 일, “을 씹는고통, “손목을 꺾는고통으로 정의내린다. 전쟁 앞에서는 모두가 장님이 되어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됨을 드러내고 있다.

 

김수영의 시 전향기轉向記에서 화자는 치질을 앓고 피를 쏟는가 하면 소화불량증까지 앓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실을 전향을 하는 자가 치러야 하는 당연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거대巨大한 뿌리에서는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와 같은 결손인물들을 반동反動으로 정의하며 이 반동에게 강한 인간애를 느끼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소외되었던 주변부의 인물을 문제적 자아로 설정하여 문화의 대혁명을 이끌어갈 주체세력으로 지목한다.

 

최승호의 시 공장지대에서 무뇌아를 낳은 산모는 자신의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이 시에서 산모의 젖{}은 허연 폐수로, 탯줄은 비닐끈으로, 태아는 고무 인형으로, 남근은 공장의 굴뚝으로 비유된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에서는 정치적인 억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죽음을 모면한 자들은 억압자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으며, 자신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혀는 언어를 잃은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검게 죽은 나뭇잎으로 변한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억압의 지속상태와 이에 대해 함묵하고 있는 자들의 태도를 일별해볼 수 있다.

 

함민복의 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축되어 사는 소시민이 거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해 버리는 상황을 자주 표현하고 있다. 붉은 겨울, 1986에서 그는 부엌칼로 손가락을 내리친다. 이 때 손가락은 가난한 자신에 대한 자해이다. 그의 손에 손가락을 내리친 가난이 들려있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암울한 자화상이며 극빈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으로 읽을 수 있다.

 

시대와 세계 그리고 역사를 병들고 상처 입은 것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은 신체 훼손 이미지를 통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현실반응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신체 훼손 이미지는 대부분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신체 훼손 이미지가 이러한 부정적 세계관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신체 훼손 이미지는 그 안에 병든 세계로 표현되는 부정적 세계관을 극복해내는 힘도 같이 지니고 있다.

신체의 훼손은 타인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결속을 다지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신체의 훼손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가 맺어지고, 타인과의 관계 맺어짐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로 인해 훼손된 신체는 신체의 훼손에서 관계 맺어짐으로, ‘관계 맺어짐에서 새로운 미래로 변이를 거듭한다. 신체 훼손 그 자체를 건강한 삶과 동일시하며 신체의 훼손을 통해 인간의 성숙과 거듭남을 이야기한다. 신체의 훼손은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한 통과제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체 훼손 이미지의 크나큰 미덕 중의 하나는 신체 훼손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신체의 훼손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왜곡되고 모순된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체의 훼손을 인식하게 됨으로 해서 우리는 삶에 산재해 있는 모순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함께 자유평화풍요로 상징되는 이상 세계의 모색을 위한 의식의 확장을 가져온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신체가 보내는 문학적 신호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체가 인간의 다양한 심리를 함축하고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몸의 담론談論이 활발하게 연구되면서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신체의 담론은 성담론적인 측면에 기울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체의 다양한 문학적 신호 중 한 단면인 고통의 극점에 신체 훼손이 자리하고 있음도 인식해야 한다.

또한 보다 넓은 인간사회의 이해와 문학성의 깊이 확보를 위해 다양한 시각에서 문학과 신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질병의 시학, 건강의 시학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좀더 총체적이고 심층적인 신체담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채운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2004동서문학신인작품상 수상. 저서 현대시와 신체의 은유.

 

 

따뜻한 비닐-이근화

나는 나로부터 멀리 왔다는 생각

편의점의 불빛이 따뜻하게 빛날 때

새벽이 밀려왔다 이 거리는 얼굴을 바꾸고

아주 천천히 사라질 것이지만

나는 역시 나로부터 멀리 왔다는 생각

두 다리를 쭉 뻗고 자고 있겠지만

먼저 깨어난 사물들은 위험천만하게

나를 위협할 것이다 나는 모르는 척

몽롱하게 걸어다닐 것이다

나는 나로부터 비롯되어 배가 고프고

편의점에 가서 우유를 사고 깡통을 사고

따뜻한 비닐에 먹을 것들을 담아

나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하나씩 까먹기 시작한다

지는 꽃에 대해서는 묵묵부답默默不答하고

단것부터 먹기 시작하겠지만

나는 종종 더 예뻐졌다는 생각

아주 몰라보게 예뻐졌다는 생각

이 거리는 아주 천천히 얼굴을 바꾸고

/쓰기 치료의 실제

 

변 학 수

 

문학 치료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니면 시 치료나 독서 치료란 말은요? 아무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구요? 좋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해드리죠. 문학 치료란 시, 네러티브(산문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드라마 등의 문학 장르를 읽거나 듣는 과정을 중심으로 마음의 치유에 이를 수 있고, 또 그런 장르를 쓰거나, 짓거나, 연행演行하는 적극적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받거나 치료적 중재를 할 수 있습니다.

듣기만 하는 경우를 우리는 독서 치료라 할 수 있고, 시를 쓰는 경우를 시 치료, 이야기를 쓰는 경우를 이야기(네러티브) 치료, 텍스트를 쓰고 연행을 하는 경우를 드라마(연극) 치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폭넓은 문학 치료의 영역을 일일이 다른 이름으로 표기하지 않고 문학 치료란 말로 대변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시 치료 또는 저희가 말하는 시/쓰기 치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질병의 시학, 건강의 시학이라는 큰 주제와도 조응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론적 배경은 상담이나 정신과에서 하는 방식이 아닌 문학 내재적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쓰기는 치유적 효과가 있는가?

 

쓴다는 말은 이미 고대 서구의 시학에서 적절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쓴다또는 ‘(글을) 만든다는 말은 고대에 포이에시스(poiesis) 또는 중세에 포에지란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리스 말 포이에인(poiein)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포이에시스는 미메시스(mimesis)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행위 양식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미메시스 개념이 가지고 있던 내용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사라지고 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미메시스는 미메이스타이(mimeisthai), 형상들을 춤으로 묘사하다란 뜻이었다 합니다.1) 그러므로 모방이란 (또는 묘사란) 뜻을 갖고 있는 미메시스는 연행자가 (또는 무당이) 낯선 영에 사로잡혀 그 영을 불러옴으로써 그 영이 체현(몸의 모습으로 이루어짐)되는 것을 말하였다 합니다. 동시에 카타르시스(catharsis)란 개념도 환각적인 피리 취주로 신들린 자를 치료한다는 의미로 이런 의식에 함께 속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메시스가 어떤 의식儀式의 형식이라면 카타르시스는 의식儀式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개념은 플라톤을 넘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오면서 극단적으로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에는 디오니소스에 대한 언급이 없을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에 국한하여 말하는(또는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개념은 전시대 제의의 형식만 넘겨받았지 그 전제나 내용은 물려받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포이에시스(시 쓰기)와 포이에티케(시학)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심미적 형식인 문학이나 글쓰기, 시 또는 이야기 개념에 이런 모순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을 문학의 전형식과 내용으로 파악할 것이냐, 아니면 안전하게 보장된 인식과 이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볼 것이냐 하는 데서 심미적 문학이냐 치료()적 문학이냐의 갈래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Carl Gustav Jung) 또한 문학이 상처로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유희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냐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 즉 질병의 시학, 건강의 시학 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무엇을 만든다는 포이에시스 개념은 창의적이고 유희적인 개념을 설명해주는데, 서양에서는 다빈치가 이를 제2의 창조(una seconda creazione)라고 했습니다. 신들만이 창조를 할 수 있다면 인간의 창조는 우리에게 제2의 창조일 것입니다. 우리는 신이 전지하고 전능하기 때문에, 즉 무엇이라도 스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병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거나 쓰는 사람은 그 순간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쓰기가 치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첫 번째 가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4장에서 이렇게 모방에 대해 말합니다.2)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 사람을 그린 것으로구나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3)

 

다분히 글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리는 시/쓰기 치료를 위하여 어떤 다른 부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게서 도취나 광기로 인정되어 그의 국가에서 제거시켜야 했던, 종교적이고 정화적인 부분은 바로 이런 유희적이고 자발적인(위 인용문에서 즉흥적인 것이라고 표현된) 시에서 유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추한 이미지나 이야기도 그것의 표현에 따라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시학은 후일 헤겔이 그의 미학에서 전개하는 추미醜美의 카테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방에 대한 쾌감 이론은 바로 그 모방이 시작되던 시기로의 퇴행을 가능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방하는 행위(mimeisthai)로서의 시작(poiesis)은 원래 미메시스가 가지고 있던 신적인 부분, 즉 오늘날 상처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임상보고는 수없이 많습니다.

 

2. /쓰기 치료의 실제는 어떠한가

 

그러면 이제 문학 치료의 실제를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문학 치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리디(Jack J. Leedy)60년대에 실시한 초기의 문학 치료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문학치료의 실제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1. 참여자/환자는 자기에게 감동을 준 글을 쓰거나 시를 읽는다.

2. 즉흥적인 시구를그것이 환자든 치료사든치료적 대화로 옮겨간다.

3. 치료사는 참여자/환자에게 자신의 시를 쓰거나 인용하도록 돕는다.4)

 

만약 1에만 그친다면 독서 치료가 되겠지요. 시는 우리의 기억(상처)을 지울 수 있는 힘이 있고 결핍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습니다. 2번에서 시적인 글쓰기는 자발성을 얻게 하여야 합니다. 가령 참여자가 외롭다면 그 외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들을 말해봅니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내 마음에 안개가 끼어 한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기쁨을 표현하는 경우, ‘당신의 미소는 나비의 날갯짓이라고 표현하든가 당신의 웃음을 훔쳤습니다라고 표현하든가 치료실에서의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웜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참여자는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특별한 시 형식을 이용한다면 더욱 좋지요. 시조 형식, 체베나 형식, 하이쿠 형식 등 어느 나라의 시 형식이라도 다 이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참여자 중심이어야 하겠죠.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심리적 상처나 트라우마, 욕구불만, 소원, 갈등, 장애 등이 상징적인 형식을 통해 차츰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자꾸 물어보아서는 안 됩니다. 방어라고 하는 특별한 심리기제가 작동하니까요. 그저 어린아이의 놀이를 보듯이 지지하고 감동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주면 되는데 이것을 피드백이라고 합니다. 이때 잘 쓴다, 못 쓴다, 이것은 이런 의미다, 너는 이렇게 사는 것 같구나 등과 같은 판단이나 평가 해석은 지양해야 합니다. 심지어 참여자가 전이를 하더라도 평가하거나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여자 스스로 해석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부정적인 해석을 할 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중요하겠죠.

 

다음으로 러너(Arthur Lerner)라는 사람이 정신병 환자들에게 문학 치료를 시행하면서 이 분야를 적극적으로 개척했는데, 우선 그는 집단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리디보다 한 걸음 진전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문학을 사용한다 해도 그것은 참여자의 반응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문학 공방工房에서는 문학적 글쓰기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2. 문학은 a) 감정의 묵은 찌꺼기를 걸러낼 수 있다.

b) 나만의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c) 감정이입(투사)을 할 수 있다.

d) 꿈에서처럼 소원을 충족할 수 있다.

3. 문학의 근본적인 영향력은 메타포와 비유에서 나온다.

4. 문학이 유용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재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의미를 가진 문학이 다른 순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문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은 특정한 문학이 특정한 상처나 고통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없다. 그저 문학은 치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는 있다.

6. 치료에 제공되는, 또는 치료과정에서 생산된 텍스트는 참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이나 미결감정, 자신의 인성,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5)

 

이런 관찰 또는 임상보고는 오늘날까지 유효합니다. 제가 시행하고 있는 통합적 문학 치료에서도 우선 시 쓰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해석하든가, 글을 잘 썼는가를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 시가 쓰는 참여자에게 (집단 치료 시: 그리고 다른 참여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계시하는지가 중요합니다. , 그 글을 듣고 난 뒤 또는 쓰고 난 뒤 어떤 느낌, 정서, 통찰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 나만의 해석, 투사 소원 충족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런 과정은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실제로 체험할 일이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치료사로 훈련받는 과정에서 문학 치료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치유받고 체득하는 것이 달랐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언어보다 비유와 은유에서 훨씬 많은 자기 기억을 불러오고 체험할 수 있고 자기의 존재의미를 찾아 치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유비추리(analogia entis)에서 더 많은 위로와 지지를 받는데 이를 동류요법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치료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결감정, 상처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처음으로 발설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것에 비해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통찰할 때 정서적으로 자신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래에 내가 감동적으로 읽은 시작품을 하나 예로 들면서 치유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혼자 지키는 집,

늪으로 변해버린다

땀이 거머리처럼 머리 밑을 기어다니고

눅눅한 공기가 배밀이를 하며 들어온다

수초가 슬금슬금 살을 뚫고 자라난다

피아노 뚜껑을 연다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악어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여든여덟 개의 면도날 이빨이 덥석 양팔을 문다

숨이 멎는다6)

서영처 피아노악어앞 부분

 

참여자가 이런 텍스트를 생산했다고 합시다. 피아노 뚜껑이 악어 아가리, 피아노 건반이 이빨이다는 상징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판단하지 말고 이 참여자의 삶과 느낌에 동참할 수 있고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충분히 치유적 조건을 만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첫 연 5행을 들었을 때 그/그녀의 감정이 어땠는지를 느낌으로 되돌려준다면(feedback) 우리는 그/그녀의 느낌과 기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것을 상대방에게 말해 줍니다. 또한 이런 상징형식을 자신의 비슷한 경험 공간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가령 피아노를 못 친다고 자로 손가락을 때리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지요. ‘이 시를 들으니 나는 어떠어떠한 일이 기억나하고 말입니다.

그것들은 다시 다른 정서적 글쓰기, 즉 시적 글쓰기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자발성이 만들어지는 한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등단한 시인들이 이 말을 듣고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잘 쓴다, 못 쓴다 하고 평가받고, 울지 마, 그런 슬픈 눈을 하지 마 라고 규제받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시에서처럼 피아노에서 악어가 나오고 면도날 이빨이 우리의 양팔을 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미결감정, 우울함, 적개심 등은 바로 비슷한 상황에서 위로받고, 지지받고 나누면서 치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치료에서는 당연히 시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쓰여집니다. 다행히 문학이라는 상징적 형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 치료와 문학의 예술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치유가 목적이기 때문에 후자에서처럼 문학적 부정성과 예술성이 모두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유를 받는다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갖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치유를 받은 후에는 초기기억, 즉 상처를 정서적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어릴 때 하던 방식의 이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찰을 하기 때문에 그 부담이 적어집니다. 의미 있는 일은 직접 또는 집단 치료에서 시를 쓰면서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아닐까요?

 

1) 하인츠 슐라퍼, 시와 인식(변학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2), 86쪽을 보세요.

2) 물론 여기서 모방이란 묘사 또는 서술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2), 37-38쪽에서 인용했습니다.

4) Leedy, J.J., Poetry Therapy. Philadelphia: Lippincott 1969를 참조하세요.

5) Lerner, A., Poetry in the therapeutic experience. New York: Pergamon Press 1980을 참조하세요.

6) 서영처, 피아노악어, 열림원 2006, 14쪽에서 인용했습니다.

 

변학수 1958년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독일 아데나워재단 장학생, 슈투트가르트대학교 대학원 문학/철학석사(M.A.), 문학박사(Dr.phil.), 문학평론가, 현재 경북대학교 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독일 공인 문학치료사. 저서 문학치료』 『프로이트 프리즘』 『잘못보기(문학평론집) 호쿠스포쿠스』 『문화로 읽는 영화의 즐거움등 다수 있음.

<문학사에 비친 질병>우리 시대 시인들의 질병의 양상

유 성 호

1

인간 존재의 운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과정적 표현 안에 압축되어 있다. 태어나서 나이 들어 병들고 결국은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불가피한 인간의 보편적 존재론이다. 그 가운데 우리를 한없이 소모시키고 죽음에 접근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확연하게 확인시키는 물리적 사실은 아마도 질병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몸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여기저기 아픈 곳을 드러내게 된다.

그만큼 질병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서 발원하는 가장 보편적인 생리 현상이자, 자기 소진의 운명을 정직하게 견뎌가는 과정을 총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사적인 차원에서 발원하는 질병일지라도 라는 언어 예술적 지평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삶에 대한 여러 비유 체계로 변형되면서 일정하게 사회적 함의를 획득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많은 근대시인들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자신의 생애의 절정에서 숨을 멈추었다. 이러한 요절을 대표하는 두 시인은 아마도 이상과 윤동주일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시를 통해 웃음소리가요란하게나더니자조自嘲하는표정表情위에독한잉크가끼얹힌다. 기침은사념思念위에그냥주저앉아서떠든다.”(행로行路)라고 중얼거렸고, 한 산문에서는 그다지 명예名譽롭지 못한 그러나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까지 불명예라고까지 할 것도 없는 질환疾患”(추등잡필秋燈雜筆)을 가졌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난치에 가까웠던 결핵성병의 견고한 결속을 그는 육체의 한가운데 내장한 채 수명壽命을헐어”(가정家庭)가면서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윤동주는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병원病院)라면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내적 질환에 대해 고백하였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시집 제목을 병원病院으로 붙이고 싶어했을 정도로, 인간의 비극적 존재 조건을 깊이 통찰한 바 있다. 이처럼 이상과 윤동주는, 식민지 근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유통되고 관리되는 질병의 사회적 차원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비유 체계로서의 질병의 사회적 차원을 보여준 시인들로 기록되어 마땅할 것이다.

 

해방 후에 질병의 사회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인은, 나병의 병고病苦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悲痛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다간 한하운일 것이다. 그는 소록도로 향하는 길에서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전라도 길)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고통과 절망의 극한을 사실적으로 그려 보여준 바 있다.

지금은 한센병이라고 보편화된 나병은 그에게는 애초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선험적 운명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인간의 근원적 소외와 고독과 유랑의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으로 하여금 우연히 찾아든 저주가 아니라 인간의 비극적 존재론을 상징하는 조건으로 승화하게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질병2인칭 화자로 설정하여 에 대한 존재론적 탐색을 본격화한 작품으로 우리는 조지훈의 에게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 「에게중에서(1968)

이 시는 을 청자로 하여 생에 대한 궁극적·긍정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 비록 육체를 소진시키고 때로는 죽음을 예비케 하는 것이지만, 으로부터 휴식생의 외경畏敬허무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라는 표현에서 에 대한 애증愛憎의 심리학을 엿보게 된다.

 

우리가 보았듯이, 우리 근대시사에게 질병은 매우 중요한 시적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조건과 근대 사회의 구체성을 동시에 비유하는 존재론적 거울이었던 것이다.

 

2

해방 이후의 시사에서 우리는 질병이 시인들의 생과 언어를 완성해간 풍경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질병을 고비로 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발견한 김광섭을 비롯하여, 그 후로 최하림, 김지하, 김형영, 강은교, 최문자, 김영무, 도종환, 양선희, 엄원태, 조용미, 박진성 등이 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신들의 절편들을 쏟아냈다.(더 많은 시인들이 해당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허만하, 마종기, 나해철, 서홍관, 김경수, 박강우 등은 질병을 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었던 의사시인들이다. 조금 더 따져보면 우리는 이처럼 질병을 안에서 경험한 이들과 바깥에서 바라본 이들의 차이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가운데 김지하의 최근 시편은 이라는 조건 속에서 줄기차게 생성되고 있다. 그는 다음 시편에서 병원을 질병이 존재하는 부정적 공간이 아니라, 존재론적 갱신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공간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병원이 좋다/조금은,//그래/조금은 어긋난 사람들,/밀려난 인생이.//아금바르게/또박거리지 않고/조금은 겁에 질린,//그래서 서글픈,/좀 모자란 인생들이 좋다.//()//나는 병원이 좋다./찌그러진 인생들이 오가는,//그래서/마음 편한,/남보다는 더 죽음에 가까운,//머지않아 끝날 그러한,/그래서/마음이 편한//()//끝이 분명 가까우니,/오로지/생명만을 생각하느니.

― 「병원(유목과 은둔, 2004) 중에서

질병의 처소인 병원에서 수행하는 역설적 생명의 발견, 그 소진의 극한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생을 온전히 되돌아보게 된다. 아프지 않으면 뒤돌아볼 수 없다. 통증만한 스승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 사례로 우리는 김영무의 가상현실(2001)을 기억할 수 있겠는데, 해설에서 김승희는 이 시집을 질병의 텍스트꿈의 텍스트가 대칭적 구조로 얽혀 있다고 썼다. 이는 아마도 질병이라는 불가항력의 운명과 맞선 채 자신의 생의 형식을 완성하려 했던 시인의 치열한 욕망을 읽어낸 결과일 것이다. 거기에는 허파 한쪽 잘라낸”(수술 이후) 고통 속에서 죽음과 가파르게 맞선 언어들이 흘러나오는데, 시인은 난치의 병과 싸우면서도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워지는 생명의 세계를 경이로움으로 토로하고 있다.

암선고를 받은 순간부터/(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다)/너의 세상은 환해진다/컴퓨터 화면 위를 떠도는 창문처럼/기억들이 날아다닌다/원시의 잠재의식도 살아나서/뚜벅뚜벅 걸어오고, 저 우주에 있는 너의 미래의/별똥들이 쏟아진다/어둠은 추방되고, 명암도 무늬도 사라진,/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노숙과 밥굶기와 편안한 잠과 따뜻한 한끼의/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환하디 환한 나라/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암세포들의 세상/지독한 오염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미국자리공, 황소개구리, 실지렁이, 거머리가 못 되어/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경쟁력 없는 자 솎아버리는 구조조정의/덫에 걸린 너의 삶은/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가상현실전문

반드시 선고라는 형식으로 찾아오는 암이라는 마니피카트”, 그 어감만큼 암담한 손님이 시인의 정결한 육신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세상이 환해진다”. 이를 단순히 암담함에 대한 반어反語로 읽으면 헛다리짚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정수리를 때렸을 게 틀림없는 그 충격적 선고, 시인의 몸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마저 동시에 불러 깨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환해짐은 어둠에 대한 수사적 차원의 반어가 아니라, 시인이 그동안 무심하게 지내왔던 시간과 화해하면서 얻은 어떤 정신적 지경地境을 암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불안케 하던 미래의 어둠을 걷으면서 명암도 무늬도 사라진,/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순백의 상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환하디 환한 나라는 시인에게 안과 밖 따로 없이/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암세포들의 세상이기도 하다. 이때 암세포는 시인의 몸을 숙주로 자라나는 생명체가 아니라 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경쟁력 없는 자 솎아버리는 구조조정의/덫에 걸린우리네 식민지적 사회 현실로 유추적으로 확장된다. 이 끔찍한 두 겹의 가상현실곧 개인적 질병과 사회적 모순이 부르는 죽음의 징후들과 힘겹게 맞서는 것이 그의 시가 감당하고 있는 몫이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양선희 시집 그 인연에 울다(2001) 역시 기록해둘 만하다. 자신의 삶 속에 깊숙이 찾아온 질병과 싸우면서 재생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신생新生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는 과 그에 달라붙어 있는 일상의 불모성을 치유해가는 도정에서 씌어진다. “내게 와 닿는 생의 감촉, 섬광, 내 안에 파도치는 생기生氣 느낄 수 없”(각질은 무섭다)게 만들었던 이 생의 두터운 각질은 일차적으로 그에게 엄습한 육신의 이지만, 그것은 불모의 생에서 유일하게 신생을 가능케 해준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어느새 삶과 병은 도반道伴이 된다.

 

우리의 기억 속에 누구보다도 질병혹은 죽음을 육체 가까이 두고 시를 썼던 이는 아마도 기형도일 것이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전문

그의 유고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실린 이 작품은 그가 등단하기도 전인 스무 살 때 쓴 그야말로 초기작(1979)이다. 여기서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병든 육신은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토막 영혼을 뒤틀다가도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병의 숙주로 존재한다. 윤동주가 보여준 질병의 형상을 더욱 심화된 체계로 받아들여 기형도는 인간의 비극적 존재 조건으로서의 질병의 형상을 풍요롭고도 쓸쓸하게 생산해내었다.

 

최근 간행되어 일정한 충격 속에 서정의 확장을 경험케 해준 박진성 시집 목숨(2005) 역시 기억할 만하다. 이 시집은 이라는 상징 체계가 얼마나 전일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을 관통할 수 있는가를 아름답게 보여준 실례이다. 그의 시에서 은 어떤 상징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고 호환 불가능한 유일의 실재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질병을 통한 실존의 탐색 과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병원에서 도망 나와 스스로 유배된 물의 몸맛을 본다 여명을 난반사하면서 물길은 새벽의 몸을 그리는데 그이는 왜 자꾸만 내 어깨를 밀까 수면에서 나를 일렁이게 할까 언제 한번 풍경으로 서 본 적 있었던가 병이 스스로의 몸으로 출렁이겠지 불꽃이었어, 불꽃이었어, 봄을 지나며 수백만 송이 꽃이 필 거야, 병을 다 받아내며 간신히 고요해진 호수 밖에서 나는 숨 헐떡이는 봄나무였어, 봄 전체가 병원이었어

― 「불꽃이었어, 병원이었어중에서

병원이라는 시스템이 의 속까지 닿을 수는”(나쁜 피응급실) 없다. 그 속까지 닿을 수 있는 것은 발작 후의 울분, 울분 지나간 자리의 고요”(산문 병시病詩)를 욕망하는 시인 자신뿐이다. 그에게 질병은 치유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는 병이 스스로의 몸으로 출렁이면서 불꽃으로 존재하는 풍경을, “병을 다 받아내며 간신히 고요해진 호수처럼 숨 헐떡이며 증언할 뿐이다. 이처럼 박진성 시에 나타나는 실존적 원형으로서의 의 세계는, 그것을 응시하는 나가 그것을 앓고 있는 나를 대상화하는 절묘한 시학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점에서 그의 질병은 비유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으로부터 직접 피워낸 시적 언어 그 자체인 셈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다양한 질병의 언어를 통해 질병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사이의 유추적 연관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만큼 질병은 시적 존재의 어둑한 거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3

잘 알다시피 문학 작품에서 은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우리의 근대를 비유한 최초의 근대 희곡이 병자3病者三人(조중환, 1912)이었던가.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근대인의 이 같은 편재적遍在的 병후病後를 가장 뚜렷한 잠언으로 증언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1979)라는 이성복의 언어 역시 기억하고 있다.

 

결국은 그 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태도가 시인으로서의 성향과 음색을 가를 뿐이다. 이쯤 되면 , 시를 쓰게 하는 동인인 시마詩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낭만주의자들은 이란 정념(passion)’으로 가득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서, 미와 창조성을 가져온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지 않은가.

 

이 같은 편재적 현상으로서의 질병을 은유의 속박에서 해방하려고 했던 이는 수잔 손탁이었다. 그녀는 질병의 은유들이 결국 질병을 온전하게 겪어내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야말로 그 질병의 은유로부터 질병의 육체성과 심미성을 건져 올림으로써 은유의 감옥을 부수고 있는 언어의 첨병들인 셈이다.

 

앞으로도 고통스럽게 펼쳐질 질병과의 대결 과정 그리고 끊임없이 질병을 실존적 조건으로 치환해갈 과정 속에, 어쩌면 우리 현대시의 선명한 가능성과 불가피한 운명이 동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한국 시의 과잉과 결핍등이 있음.

 

Let It Be- Beatles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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