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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우리들의 대통령 外

by 이성근 2017. 8. 4.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밭 한 뙈기/ 권정생

아무것도 아니었지/ 신현림

송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장기려

만일/ 루디야드 키플링

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아메리카여/ 이은봉

, , 하는 사이에/ 이규리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어떤 관료/ 김남주

망종(芒種)/ 고영민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최서림

에프킬라를 뿌리며/ 이상국

五月 단오/ 서지월

용병 이야기/ 김종철

이정표(公里碑)/ 호찌민

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신동호

풀잎의 기도/ 도종환

우리들의 대통령/ 임보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 그녀로서는 첫 임신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가 안 생겼단다. 자기더러 아기도 못 낳는 병신이라며 동갑내기에 역시 꼽추인 남편이,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폭행하고 구박해 양쪽 고막이 다 터졌단다. 병원을 나간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돌아와서는 이 아주머니 아기를 없애야겠단다. 그러면서 아기아빠가 누군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며 언제 아기가 들어섰는지 가르쳐 달란다. 리어카에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이 아주머니 옆 리어카의 시계 파는 남자와 눈이 맞았단다. 모든 희망의 말을 섞어 달래 보낸 이 아주머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 15OO여중 3학년 임XX. 이 학생은 나의 단골환자다. 불결하고 잦은 성접촉으로 인한 생식기의 염증으로 두 차례나 입원도 했었다. 어느 날 아침 형사들이 찾아와 임XX 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업소 사장에게서 성폭행당했다며 진단서를 요구했다. 심야 피자집 아르바이트 일주일만에 그 사장에게 성폭행당했다니 나는 속으로 그 사장님 아직 여중생 꽃뱀이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라며 기분이 참 씁쓰레했다. 이 멋쟁이 바람둥이 여학생 요즘도 가끔씩 들른다. 때로는 교복을 입은 채로 진찰대를 올라간다.

 

. 아주 희귀성을 가진 30대 중반의 미인이었다. 무심코 진찰하다 깜짝 놀랐다. Double Vagina(이중질) 기형畸型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 이중질 얘기를 꺼내면 남자들 대부분이 그 남편이 참 부럽단다. ·2부제 운행이 굳이 필요 없으니 기형畸型이라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각자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 같다.

 

다섯. 예전에는 자궁이 없는 여자를 빈궁마마라 불렀다. 어감이 좋지 않아 어느 때부턴가 무궁화無宮花라고 불렀다. 26세 미혼의 아가씨 근종筋腫 크기가 20cm×17cm×12cm. 수술 후 일주일째 퇴원하는 날 혹이 없어진 다행함. 자궁이 없어진 상실감. 무궁화 아가씨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갔다. 일류 패션디자이너가 꿈인 아직 남자친구 하나 없는 이 아가씨 한 달 뒤 다시 들렀을 때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덩달아 한시름 놓은 그 가족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여섯. 그녀는 너무 하혈이 심했었다. 혈색소 수치가 7.0까지 떨어졌다. 정상인의 절반이다. 간곡하게 수혈을 권했다. 그녀는 돌아누워 귀를 막았다. 죽었으면 죽었지 수혈은 안 받겠단다. ‘여호와의 증인이란다. 달래기도 하고 겁도 주고 온갖 작전을 폈지만 실패였다. 생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신을 믿으며 목숨을 거는 이 여자에게 의사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일곱. 레지던트 말년차 때의 이야기. 담당환자 중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40대 후반의 수더분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이 아주머니 어느 날 묻지마 관광을 다녀왔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포상기태 임신에 걸렸었다. 물방울 모양의 비정상 임신이었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악성 융모상피세포암으로 변하는 고약한 병이었다. 화학요법이 시작되면서 아내가 구토에 탈모에 갖은 고생을 겪게 되자 그 여자의 남편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밤잠을 걸러 가며 아내 병수발에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얄밉기도 하고 한편 딱하기도 해서 그 묻지마 관광 사건을 남편에게 꼬아바칠까 말까 하다가 결국 덮어 두었다. 사람 잡는 묻지마 관광이었다.

 

- 시집 나는 꽃핀다(고려원,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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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한 뙈기/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것은 없다.

 

하나님도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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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었지/ 신현림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고

옷에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의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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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장기려

   

수도꼭지엔 언제나 시원한 물이 나온다.

지난겨울엔 연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쌀독에 쌀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세끼 밥을 먹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다.

언제나 그리운 이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더 키울 수 있다.

그놈이 새끼를 낳아도 걱정할 일이 못된다.

 

보고 듣고 말함에 불편함이 없다.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을 수 있다.

사진첩에 추억이 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리 밉지만은 않다.

 

기쁠 때 볼 사람이 있다.

슬플 때 볼 바다가 있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

 

- 사랑의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한국일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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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루디야드 키플링

  

만일 네가 모든 걸 잃었고 모두가 너를 비난할 때

너 자신은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있다면

만일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기다릴 수 있고

또한 기다림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거짓이 들리더라도 거짓과 타협하지 않으며

미움을 받더라도 그 미움에 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너무 선한 체 하지 않고

너무 지혜로운 말들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꿈을 갖더라도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네가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그 생각이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그 두 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왜곡되어 바보들이 너를 욕하더라도

너 자신은 그것을 참고,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너의 전 생애를 바친 일이 무너지더라도

몸을 굽히고서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한번쯤은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 잃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네가 잃은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고

다 잃은 뒤에도 변함없이

네 가슴과 어깨와 머리가 널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설령 너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해도

강한 의지로 그것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만일 군중과 이야기하면서도 너 자신의 덕을 지킬 수 있고

왕과 함께 걸으면서도 상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되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 잠언시집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열림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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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

"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 월간아동문예2007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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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여/ 이은봉

 

오고야 말 날을 더욱
빨리 오게 하는, 그리하여
세상 앞장서 끝나게 하는
아메리카여 천의 얼굴이여
오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는
촛대가리여 욕정의 찌꺼기여
방글라데시에서도 니카라과에서도
눈물, 구두굽으로 짓이기는 슬픔을
혼자서 혼자서 다 껴안고도 낙진을
자유를 평화를 뜨거운 자본주의를
벅찬 한숨을 가래를 만만한 인디언을
뺨에 입술에 젖가슴에
카키빛 딸라뿐으로 콜라뿐으로
지구 위 모든 사랑을 숫처녀를 니그로를
어루만지는 주무르는 집어삼키는
더러운 춘화 같은 시궁창 같은
꿈을 통일을 한반도를
핵폭탄을 솟아오르는 내일을
마구 걷어차는 엎어치는
아메리카여 가엾은 미합중국이여
오오, 미칠 것 같은
돌덩이여 니기미 쑥떡이여.

 

- 반외세, 민족자주화 시선집 아메리카 똥바다(인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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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는 사이에/ 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 ,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 ,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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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시집밤에 쓰는 편지(청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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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디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성실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시집 조국은 하나다(남풍신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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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芒種)/ 고영민

 

 

당신을 땅에 묻고 와 내리 사흘 밤낮을 잤네

일어나 반나절을 울고

다시 또 사흘 밤낮을 잤네

 

하릴없이 마당을 쓸고

더덕밭을 매고

뒷목을 긁고

흙 묻은 손바닥을 일없이 들여다보다

또 손톱 하나를 뽑고

 

당신을 생각하는 이 계절은 붉거나 노랗거나

혹은 그 가운데쯤의

빛깔

업듯 새끼사슴을 안고

꽃나무를 나서는 향기처럼 신발을 끌며

마을 입구까지 길게 걸어갔다 왔네

 

인중이 긴 하늘

선반엔 들기름 한 병

 

 

- 시집사슴공원에서(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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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최서림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쓸히 내려다본다

 

역사는 산 자의 전쟁터면서 죽은 자의 감옥이다

연극은 끝나도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관객들이 박수치고 고함지르며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퇴장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

 

- 계간 리토피아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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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킬라를 뿌리며/ 이상국

 

 

자다 일어나 에프킬라를 뿌린다

 

향긋한 안개가 퍼지고

나를 공격하던 모기들은 입이 무너지고 날개가 녹아내리고

죽었다.

 

싸움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수십만이 하루살이처럼 죽었다

 

그들은 다시 베트남에 고엽제를 살포하여

초목의 씨가 마르고

수백만의 인민들이 죽거나 천천히 썩었다

 

나는 모기에게 이긴 게 아니라

그가 공격하면 나도 맨손으로 싸워야 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박찬일 엮음 <시간 있는 아침> (토담미디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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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 단오/ 서지월

 

 

지금은 꽃가마처럼 잊혀져 가는

훈풍 혹은 빨랫줄같이 되고 있지만

춘향이 옥비녀 뿐만 아니라

춘향이 눈썹 너머 피어오르는

환한 석류꽃 그늘로 해서 옵니다.

창포에 머리 감고

우리 누이들 착한 누이들 속살 내보이며

그네 뛰었고요,

남정네들 씨름하고 풀쌈하고

대추나무 시집 보내는

그런 단옷날

우리 엄만 날 낳으시고

이 세상에 나는 버려졌지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喪中이라

을 입은 아버진 두건(頭巾)을 쓰고 계셨고

그래서 내 이름을 건식(巾湜)이라 지어 불렀답니다.

마침 그때 두루 마을을 돌아다니며

참기름 파는 참기름장수 할머니 참기름 팔러 왔다가

곧 출산할 때 된 울엄마 배를 보시고

그날따라 우리집에서 하룻밤 묵고

세상밖으로 어린 나를 받아내었답니다.

미역국 먹고 떠나신 그 할머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는 다시 오지 않더라는

지금에 와서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말씀,

중학교 1학년 국어선생 되어

교과서의 <오월단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마을을 떠돌던 그 참기름장수 할머니

내 아직도 못 가본 금강산처럼

그리워요.   

 

 

- 시집 가난한 꽃(전망,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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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이야기/ 김종철

 

 

그날 우리는 짐을 싸면서도 용병인 줄 몰랐다. 끗발이나 빽도 없는, 대가리 싹뚝 민 개망초 보병들이다. 야간 군용 트럭으로 잠입한 오음리 특수훈련장, 이른 기상나팔에 물구나무 선 참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아침 점호에 같이 고향을 본 후 힘차게 몇 개의 산을 넘었다. 이빨까지 덜덜거리는 상반신 겨울, 주는 대로 먹고, 찌르고, 던지고, 복종하는 훈련병. 정곡을 찌르는 기합에, 겨울 새떼들은 숨죽이며 날아올랐다. 하루 일당 1달러 80센트에 펄럭이는 성조기, 우리는 조국의 이름으로 낮은 포복을 하였다.*

 

오음리의 겨울은 이제 누구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생선에게 고양이를 맡기든 말든 죽은 시인도 죽은 척할 뿐이다.

 

- 시집 (문학수첩, 2013)

1965년부터 197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간 32만 명이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 당시 파월장병 누구도 자신이 용병인 줄 몰랐으며 한국이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자유를 수호하고 우리 편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짐을 쌌다. 파월장병의 90%는 강원도 화천 오음리 훈련장에서 40일 간의 실전 대비 훈련을 받고 수송선에 올랐다. 년 평균 5만 명에 가까운 장병이 주둔했으며, 이 전쟁에서 5천여 전사자와 2만여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전체 파월 장병의 절반이 고엽제 피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 장비를 지원받았고, 차관 및 일체의 경비와 해외전투수당을 받아냈다....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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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公里碑)/ 호찌민

 

 

높은 곳에 있지도

먼 곳에 있지도 않으니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닐지니

그대는 그저

큰길가에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이정표

 

지나가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어

그들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도록 해주고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만 하는지를

알려 줄 수 있을 뿐

 

- 시집 옥중일기(지식을 만드는집, 2014)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찌민의 삶과 말 한마디는 일상생활 철학의 푯대와 이정표가 되었다. ‘조국과 결혼한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 가슴 속에 영원불멸의 존재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현실적 도구로서 공산주의를 신봉하였으나 공산주의자이기에 앞서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다. 실제로 그가 추진한 강령들은 과중한 과세와 강제징집의 폐지, 하루 8시간 노동제 도입 등 온건한 것들이었으며,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고초를 이겨내고 전 생애를 바쳐 희생한 결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호찌민은 공무원 부패 척결을 위하여 다산의 목민심서를 공무원의 필독서로 장려하였다. 목민심서를 알게 된 계기는 박헌영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선의 대사상가인 정약용을 흠모하여 다산의 제삿날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호찌민의 고결한 헌신은 인간에 대한 절망을 희망으로 안내하는 푸른 이정표임에 틀림없었다. 그에 대한 찬사는 범세계적이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사이공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완전 철시하고 애도하였다. 당시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조차도 그에게 정중한 언어로 조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긴 조사에서 정치적 이유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에게는 숭배와 경애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타임지는 그를 표지인물로 채택하였고 이렇게 썼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신념으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한 가지는 박애주의 정신에 기반을 둔 자신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런 말도 있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우선 자신을 갈고 닦아야 그 다음에 조직 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가 중국 장개석 정부에 의해 첩자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 중이던 시기에 쓴 <옥중일기>에는 다행히도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인내하고 기다려왔다.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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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케빈 윌리엄 허프

 

선생님은

학생들 마음에 색깔을 칠하고 생각의 길잡이가 되고

학생들과 함께 성취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길을 밝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지식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당신이 가르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시인, 철학자, 왕의 탄생은 선생님과

그가 가르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니까요.

 

-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생일(비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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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시집 담장을 허물다(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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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며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김주대 시인의 글을 읽으며 킥킥

그 고운 눈매를 떠올리다 보면 진보, 보수 잘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그 일도양단이 참 대단하고 신기하다.

주대가 좋아하는 큰 엉덩이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싶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존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술 먹자는 전화가 온다.

열 중 아홉은 진보적인 친구들이고 하나는 그냥 친구다.

보수적인 친구가 나에겐 없구나, 생각한다.

 

오후 여덟 시 나는 대부분 나쁜 남자다.

가끔은 세상을 다 바꿔놓을 듯 떠든다.

후배들은 들은 얘길 또 들으면서도 마냥 웃어준다.

집에 갈 시간을 자주 잊는다.

 

오후 열한 시 무렵이 되면 나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느새 민주주의와 역사적 책무를 잊는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돈을 벌고 싶고, 일탈을 꿈꾼다.

 

자정이 다가오자 세상은 고요하다.

개구리는 진보적으로 울어대고 뻐꾸기는 보수적으로 우짖는다.

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사상보다 삶이 먼저라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적일지 몰라, 하면서

대충 잔다.

 

-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실천문학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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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의 기도/ 도종환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 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일찍 깬 새들이 나 대신 새벽 미사에 다녀오고

저녁기도 시간에 풀벌레들이 대신

복음서를 읽는 동안

나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논쟁을 하거나

썩은 물위에 몇 방울의 석간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풀들을 보았다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풀잎들이 나 대신 기도를 하였다

 

- 계간 문학의오늘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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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대통령/ 임보

 

 

수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비상등을 번쩍이며 리무진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대신 혼자서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골목길을 즐겨 오르내리는

맑은 명주 두루마기를 받쳐입고 낭랑히 연두교서를 읽기도 하고, 고운 마고자 차림으로 외국의 국빈들을 환하게 맞기도 하는

더러는 호텔이나 별장에 들었다가도 아무도 몰래 어느 소년 가장의 작은 골방을 찾아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는

말많은 의회의 건물보다는 시민들의 문화관을 먼저 짓고, 우람한 경기장보다도 도서관을 더 크게 세우는

가난한 시인들의 시집도 즐겨 읽고, 가끔은 화랑에 나가 팔리지 않은 그림도 더러 사주는

발명으로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좋은 상품으로 나라를 기름지게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는 육자배기 한 가락쯤 신명나게 뽑아내기도 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양처럼 부드럽고 불의의 정상배들에겐 범처럼 무서운

야당의 무리들마저 당수보다 당신을 더 흠모하고, 모든 종파의 신앙인들도 그들의 교주보다 당신을 더 받드는

정상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장에서는 어려운 관계의 수뇌들까지도 서로 손을 맞잡게 하여 세계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어느 날 청와대의 콘크리트 담장들이 헐리고 개나리가 심어지자 세상의 담장이란 담장들은 다 따라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당신이 수제비를 좋아하자, 농부들이 다투어 밀을 재배하는 바람에 글쎄,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밀 생산국이 되기도 하는

어떠한 중대 담화나 긴급 유시가 없어도 지혜로워진 백성들이 정직과 근면으로 당신을 따르는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아, 동강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 임보 외 우리들의 대통령(작가정신,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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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John Lennon (영화 Killing Fields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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