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의 구조/ 이하석
꽃의 체온 / 전비담
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 황지우
성묘(省墓)/ 고은
재촉하다 / 이규리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김수열
치마와 팬티/ 이수종
性 / 김수영
착한 시/ 정일근
서울의 둥근 달/ 권순진
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 권경업
조치원(鳥致院)을 지나며/ 송유미
벌초/ 이홍섭
반복/ 신평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의자의 구조/ 이하석
의자 위엔 대개 구름이 내려와 앉아 있다
누구든 그 위에 앉으면 그 무게만큼 구름이 떠올라
그의 머리가 구름 속에 꽂힌다
어디선가 우레치고 큰비 내리는데
그는 복잡한 생각에 싸여 앉아 있다
제 의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힘준 발가락 느끼며
그 아래는 대개 구조가 단순하다
의자 다리는 네 개
그 사람 다리는 두 개
여섯 개의 다리 중 두 개에는 발가락이 달려
모든 균형이 잡힌다
- 시집『것들』(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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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체온 / 전비담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웅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 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 2013년 제8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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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죽꽃이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꽃이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 시집『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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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省墓)/ 고은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창작과 비평,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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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촉하다 /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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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김수열
일찍이 어느 시인이 말했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일본 군부가 오끼나와를 조선의 성노예를 반성하지 않고
우리 군부가 제주4·3을 강정마을을 반성하지 않고
반성을 모르는 일본은 그래서 절망이다
반성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절망이다
절망은 더 큰 절망을 낳고
절망이 낳은 더 큰 절망은 거짓을 낳고
거짓은 큰 거짓을 낳고
거짓이 낳은 더 큰 거짓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폭력이 낳은 더 큰 폭력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마침내 아무렇지도 않은 학살을 낳고
그런 학살이 낳은 더 큰 학살은 마침내 집단학살을 낳고
오끼나와가 그랬고 제주4·3이 그랬지
중국 난징이 그랬고
베트남 중부 선미가 그랬고 빈호아가 그랬지
하지만 우리는 알지
제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은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는 것을
그리하여 학살에 대한 성찰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대한 성찰은 아름다운 평화를 낳고
평화가 낳은 더 큰 평화는 화해를 낳고
화해가 낳은 더 큰 화해는 참된 진실을 낳고
진실이 낳은 더 큰 진실만이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먼 훗날 어느 시인은 말하겠지
희망은 사랑은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는 거라고
- 계간 《제주작가》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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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와 팬티/ 이수종
- 문정희 시인의 「치마」와 임보 시인의「팬티」를 읽다가
치마 속 신전에는 달을 가리고
숨겨주는 창이 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들창 주위를 서성거리며
은밀히 숨겨진 비밀을 열고 싶어
사내들은 신전가는 길목에서
치마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영역싸움을 벌인다
거기서 이기면 다 되는가
그건 일차 관문에 지나지 않는
창들끼리의 다툼일 뿐
방패를 뚫고 침입하는
선택받은 승자의 개선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더 큰 한판 승부가 남아 있다
사내의 완력만으로는 성문을 열 수 없다
문 열려라 참깨하고
주문을 외우며
사내들은 치마 앞에서
치마성의 주인과 내통하는
카드 비밀번호를 맞춰 보아야 한다
성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구도자의 인내도 필요하고
계관시인의 음유도 필요하고
말 탄 백기사의 용맹도 있어야 되지만
힘 하나 안들이고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더러는 있어
치마 앞에서는 여간 근신하며 공을 드려야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치마는 딱 한번 열렸다 닫히고
더 이상 끄떡도 하지 않은 채
폐쇄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창은 방패를 이길 수 없고
방패는 창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시집 『시간여행』 (비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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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 / 김수영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恍惚(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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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시/ 정일근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숭어 새끼는 동어, 방어 새끼는 마래미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 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 시집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시학,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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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둥근 달/ 권순진
독에 쌀 떨어지면 라면 끓이면 되고, 속이 더부룩하면 동네 한 바퀴 돌면 되고, 발길에 차이는 깡통은 그냥 걷어차면 되고, 허리 삐끗하지 않으려면 살살 차면되고, 병원비 비싸면 안 아프면 되고, 가끔 전기 나가면 부둥켜안으면 되고, 첫날밤처럼 하든대로 하면 되고, 코피 터지면 틀어막으면 되고, 사랑이 지치면 배게 던지며 싸움 한판 하면 되고, 위로가 필요하면 함께 기도하면 되고,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서울 사는 온달 같은 큰 아이가 평강공주 같은 영희를 만났는데, 그래서 장가가고 싶어 죽겠다는데, '아나 여깄다' 서울의 비탈길 작은 연립 전세자금이라도 한 1억 턱 내놓지 못하는 아비는 은박지 씹는 기분이다. 하나님 공부한다는 녀석에게 무슨 폼 나는 일이 있겠냐만, 그래도 시비할 생각은 없다만, 대신 한때 유행했던 '되고 송'을 좀 빈정대는 투로 변주하여, 그 송을 너 마빡에다 탁 붙여주고 싶다.
하지만 세상 뜻대로 되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음을 아비는 잘 안다. 알다 뿐이랴. 뒤죽박죽 살다가 언제 이렇게 며느리 볼 나이로 늙었는지 생각하면 쭉정이 삶에 한숨만 나온다. 너도 나쁜 피를 물려받았다. 억지로 좋은 피로 바꾸려고 용쓰진 마라. 그리고 너의 사랑을 롤러코스트에 태우지는 마라. 안전빵으로 가라. 아비 불쌍하다는 핑계로 낙향 하진마라. 서울에서 뼈를 묻어라. 넓고 깊은 세계로 그윽하게 너를 인도하는 저 서울의 달, 야무지게 봐 두어라.
- 시집 『낙타는 뛰지 않는다』 (학이사, 2017)
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 권경업
아침 산책길 숲 속 거미줄에
이슬이 걸려 있다
다들 눈부셔라, 눈부셔라 하지만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잇감도 걸리지 않을
다 드러나 버린 거미줄
안개 낀 삶의 막막함에, 때로는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으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
- 계간「전망」2005년 봄호
조치원(鳥致院)을 지나며/ 송유미
밤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처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벌초/ 이홍섭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 시집 『터미널』(문학동네, 2011)
반복/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 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 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 시집 『산방에서』 (책만드는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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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1998)
When I Fall - Lizz W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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