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고한에서 / 나호열
아름다운 시 -김홍춘
애비-박흥순
내 트렁크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갓섬 풍경
오늘같은 날은
고독사
다랑쉬오름의 낮달 / 정군칠
수평선에 묻다
모슬포
木碑
보성리 수선화
이덕구 산전
철쭉
강정을 지난다
풀 물
가문동 편지
孤內
달의 난간
붉은 꽃으로 가다
바다의 물집
연꽃 한꺼번에
좋을 때와 나쁠 때도 있는 컴퓨터-연당초등학교 5학년 오유진
컴퓨터(연당초등학교 5학년 윤수봉)
내 컴퓨터(연당초등학교 5학년 이하림)
시발 장벼리 (남강중 3학년)
빈집을 지키는 홍시/ 박경자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
병/ 공광규
그날 - 정민경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시집『겨울-나무로 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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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에서 / 나호열
길은 옛길이 좋아
강 따라 굽이치며 가다가
그리움이 북받치면 여울목으로 텀벙 뛰어들고
먼 이름 부르고 싶으면
산허리를 칭칭 동여매어 돌다가 목이 메고 말지
그렇게 낮게 낮게
풀꽃마냥 주저앉은 사람들
고난으로 땀 흘리는 마을이라고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몰라
옛길 사라지고
산은 가슴이 뚫리고
강은 거대한 다리에 가위눌리고
막장에서는 더 이상 백악기의 더운 피가
솟구치지 않는다
빠르게 지나가는 일장춘몽의 투전 앞에
노고의 땀방울은 진주처럼 빛나는데
길도 가다가 잠시 멈추는 노쇠한 역 앞에
낙원회관 있다
허리끈 마음껏 풀고 죄짓지 않고 자랑스럽게 번 돈으로
소 등심 몇 점 붉은 마음을
불판 위에 올려놓는
나그네 몇 있다
―시집『촉도蜀道』(시와시학사, 2015)
아름다운 시 -김홍춘
투쟁 시를 참 아름답게 쓰네요
누군가 말한다
요즘 시는 노동 시 같지 않고 부드러워
어느 노동자의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문학계 인사가 말한다
모르는 게야
노동시는 언제나 아름다웠다는 걸
기계를 지키며 파업하는 노동자의 팔뚝이
거칠기만 할까
동료의 영정을 끌어안은 사내의
웅크린 등에 떨어지는
연대의 눈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정 모르는 게야
시를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내 마음에 걸어놓은 달이라는 걸
일하지 않는 메마른 노래에
눈이 먼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달인 것을
바람이 거세 어지러운 날
가라앉는 나를 일으켜 주는 건
걸려 있는 달의 무게라는 걸
별들이 하나씩 터져 나와
자꾸 빛내는 바람에
달빛이 아름답다는 것을
애비-박흥순
첫서리 내리면
감잎 떨어져 뒹구는 허허로운 그 자리
아들 두 놈 붙잡아 늙은 감나무 아래 세워 두고
노을 등에 업은 애비, 휘어진 감나무에 올라
손 안에 가득 찬 감꼭지 뒤틀때면
감나무 아래 아들들도 몸이 뒤틀렸지요
연초록 이파리,
뙤약볕, 비바람, 찬 서리 맞이하고
휘어진 가지에 매달린
주렁주렁 열린 보람 자랑하지 않은
늙은 감나무의 한 해를
소쿠리에 하나, 둘 담아 가는 것이
애비의 추억 만들기인 것을
아들놈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할머니와 엄마가 담아준 감 접시 들고 옆집 문 두드릴 때
아들들의 짜증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지요
그럴 때면 해마다 변하지 않은 애비의 한결같은 한마디
이놈들아!
아빠하고 감 따며 까치밥 남겨주는 일은 오래 할 수 없단다
내 트렁크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트렁크를 열었다.
키 큰 검정우산이 둘
체트무늬 베이지색 접이 우산이 하나
때 절은 차량청소용 먼지떨이가 하나
진창에 빠진 차를 끌어내는데 사용했던 밧줄이 하나
우산을 꺼내 땡볕에 펼쳐 놓고 잡동사니 하나 둘 잔디밭에 풀어 놓았다
전기 드릴용 정이 두 개
새파랗게 질려 있는 이슬이 한 병
검정 시트에는 누드 못이 질퍽하게 누워 있다
내가 트렁크를 언제 정리했던가
남한강줄기 바라보던 산길에서 슬쩍해 온 솔방울 셋
황토 빛 낡은 목장갑이 두 짝
붉은 색 비닐 끈 한 뭉치
전기용 검정테이프가 하나
등산용 지팡이 하나
검은색 주머니 속에 몇 년째 사용하지 않는 아이젠 한 벌
유리 닦이용 세제 하나
광택제가 둘
갈색 미라가 되어 있는 각시붕어 세 마리
마지막으로 트렁크 바닥의 깔판을 들어냈다
거기, 쪼그린 사내 하나가 나를 째려본다.
갓섬 풍경
갓섬 처녀바위에
빨간 모자 쓴 남자가 낚싯대 드리우고 있다
뱃고동 소리 달려오는 쪽 향해 고대를 돌린다
여객선이 깃발을 나부끼며 다가오고 있다
파도가 달려와 갓섬 바위에 부딪힌다
포말이 무지개를 그려 놓는다
두 마리 물총새가 숲으로 날아간다
출렁이는 바닷물에 빨간 찌가 출렁인다
여객선 뱃전의 한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다
낚시꾼이 투박한 손짓으로 등대를 가리키고 있다
부서져도 부서져도 지치지 않는 파도가 또 달려온다
여객선 뱃전의 여자와 아이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여객선 향해 남자가 빨간 모자를 흔들고 있다
뱃고동 소리가 멀어져가는 갓섬 바닷가
고려선박 뻘 속에 묻혀 있던
갓섬 하늘 푸르기만 하다
오늘같은 날은
-안개낀 날
웨매! 안개가 끼어 부렀어야! 이런 날은 글씨, 그 무시냐
거그가 남한강이디냐 북한강이디냐, 그래 두 물머리라고,
운해가 자욱한 강가세서, 황포돛단배를 봐야 한당께.
긍께, 이런 날은 말이여!
흐건 가루가 대야부러가꼬 물고기 목구멍으로 뽀꿈뽀꿈 넘어가분
그 가시나, 그래 그 잡년이 너무너무 보고 잡아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맹키로 빨리 뛰어가야 한당께
그랑께, 그것이 꼭 소설같은 이야기여!
그 잡년이 말이여 안개꽃을 무지무지 좋아했는디
수물 하나에 모쓸 빙이 들어갓고
자꾸만 두물머리 세물머리 햇싼께
날잡아가꼬 링게를 꼽고 안 갔것어
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긍께, 천지분간을 못하게 안개가 심통을 부리고 자빠졌드라고
워매, 그때 참말이지 환장 하것드라고 내가
눈깔 빠지게 사방을 둘러 봤는디
안갯속에서 황포돗단배가 구신처럼 서있는 거야
나는 으째 으스스 해부렀당께
그란디 그 잡년은
안개꽃이 황포돛단배 감싸고 잇어서
너무너무 시적이라나
눈빛이 꼭 아편 먹은 사람 같드랑께 글씨
그 가시나 따뜻한 손잡아 준 것이 그날이 마지막이 디야부렀어!
난말여! 안개가 꼬라지 부리는 날이믄
두 물머리에 가서 황포돛단배를 보고 와야 한당께
아니, 너무너무 시적이라던 그 가시나를 만나고 와야 한당께.
고독사
저녁 9시 뉴스앵커의 소식이 전해진다
2011년 12월 28일 오후 4시 서울 망곡동 444번지 다가구건물 반지하방에서
사망한지 10여일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여저 주검이 발견되었다.
이집에 세들어 살던 47세의 여자로 화려한 싱글이라는 꽃을 안고 다니며
살았다 한다. 최근에는 외출이 뜸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집 주인이
전한다.
그 여인의 반지하방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울음소리가 며칠째 들려
이상헤 여긴 집주인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어
섬뜩한 생각이 들어 경찰에 신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동한 경찰관이 문을 따고 들어가자
앙상한 푸들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이 맞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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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009 2013 유고시집
정군칠 시인
1952년 제주 중문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목한계선’이 있으며 제주작가회의와 현대시 회원으로 활동했다. 2011년 제1회 서귀포 문학상을 수상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백일장 대회에서 몇 번의 수상 경험이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문학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는 시인은 토목학을 전공하여 건설 직종의 일을 하다가 마흔 살 넘어 시를 다시 접했다. 2012년 7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 큰 눈망울의 시인을 2011년 만난 적이 있다.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보네준 시집 ‘물집’ 이 책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의 부고는 한참 뒤에 알았다. 삼가 명복을 빈다.
다랑쉬오름의 낮달 / 정군칠
허공에 걸린 저것,
다랑쉬오름을 비껴 뜬 낮달이다
어느 시대의 유물인데 녹슬지 않고
끈질긴 고집으로 저리 떠
섬뜩한 빛
내 눈 속을 파고드나
입 틀어막힌 굴 안에서
주저앉지도 못한 채
벽 긁으며 죽어갔을 사람들
그들이 긁어내린 벽화 속 손톱눈이
오늘 낮달로 뜬 것일까
오직 지구의 중심을 벗어난 죄 하나로
칼날을 세우는
달의 오랜 침묵시위
* 4·3 당시 연기에 질식사한 11구의 유골이 1992년 다랑쉬 굴에서 발견되었다
수평선에 묻다 / 정군칠
푸른 이끼 돋은 돌담 아래
水仙이 귀를 세운 날
솔동산 가파른 고갯길에 헉, 숨이 막힌다
서귀동 512번지 仲燮 없는데
절여진 온기를 어루만지며 서서히 늙어가는 집
툇마루에 소금기 짠하다
한 평 남짓 셋방살이 서른여섯 중섭이가 우두커니
앉아 있더라 찬찬히 바라보면 수평선은 바다의 죽음이어서
섬도, 바다도, 허공도, 삼백예순날 허기진 마디들도
적막하고 또 적막하더라
이 섬과 저 섬이 너무 가깝다
이 생과 저 생이 너무 가깝다
모슬포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은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木碑 / 정군칠
백치 같다, 저 햇살
4월의 바람과 어우러진 백치 같은 저 햇살은
해원상생(解寃相生) 굿이 열리는 선흘리 곶자왈
너른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맴돈다
구겨진 섬의 비명으로 피어
잡목과 두루 섞인 동백
실타래를 풀어놓는 무녀의 사설에 쿵쿵,
섬이 울린다
김원준 고달옥 안창민 윤대선 정상호
속껍질 채 마르지 않은 목비들이 차례로 세워진다
버선코에 걸린 무녀의 흐느낌을 져 나르는 햇살
울울창창 나무의 곁가지들이
수런대기 시작하는 목시물굴
습학 어둔 곳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총 맞은 등에 기름 뿌려 불태워진 주검들이
긴 그림자 매달고 걸어나온다
곶자왈의 들숨과 날숨에
살과 뼈를 빌린 사람들이 태어난 섬의 중심은
물집 투성이다
굿판을 서성거리던 허령(虛靈)들이
한데 어울려 어깨를 주무른다
더운 김 뿜어내는 소리 환한,
그 위로 해원상생의 길을 풀어놓는 4월의 햇살
백치 같다, 저 햇살
보성리 수선화 / 정군칠
보성리 연못가를 지날 때마다
머릿발 곤두서는 찬 기운을 만난다
하늘을 밟고오는 소나무의 그림자가
적막한 마을길을 자빠뜨린다
숭숭한 돌구멍,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은
저승의 그리움을 머리째 끌고와
돌담 아래 수선水仙을 피워낸다
가슴을 확확 불지른 하얀 등燈
골목을 호령하는 바람 끝으로
어디서 본 듯 하다
봉두난발이나 꼿꼿이 허리 세운
추사秋史
이덕구 산전 / 정군칠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철쭉 / 정군칠
엉덩이 불 댄 어린 노루들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가도 가도 불덩이다
숨죽여 있던 불씨들이
노루발바닥에 묻어
사방으로 튄다
수수백년 잠복해 있던 방화범
산불감시요원도 어쩔 수 없었겠다
산불이 났다
철쭉은 붉고 나는 새까맣다
강정을 지난다 /정군칠
밤에 인적 없는 강정을 지난다
파도는 노란 깃발이 꽂혀 있는
처마까지 따라와
외삼촌 없는 외가 같은 적요 속
범섬과 문섬의 속울음을 풀어놓는다
낮에는 황건 같은 노란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는데
어두워지며 찢기는 소리만 남아 펄럭인다
어쩌지 못해
순한 바람이 되어버린 이곳
서로를 캄캄히 가두려
올레 담이 높아지고
마을의 집들은 서로 다른 깃발을 내걸었다
다른 바람이 어디 있었던가
남들은 화산섬이라 하지만
물 좋아 기름진 땅
바닷바람마저 범섬과 문섬을 지나며
가장 부드러운 숨결로 길들여지던 곳
나팔고동과 진홍나팔돌산호가
목숨 다해 파도를 순하게 다스리던
그곳,
- 江汀이라는 말 그저 나온 말 아니지
내게도 오래 묵혀 둔 말이 있었으니
그대를 마주하고 싶다는 것
그대의 가난한 무릎을 빌려
무거운 내 머리 잠시나마 얹히고 싶다는 것
하지만 나의 비애는
뒹구는 빈 소라껍질처럼, 무너진 방파제처럼
속절없다
거대한 이지스함에 떠밀릴 낡은 어선 몇 척이
던져진 듯 놓여 있는,
쉬 바닥까지 드러낸 옴팡진 포구와
벼랑으로 내몰린 노란 깃발과
낯이 맑던 바다까지 검게 변해 버린 강정
도둑게가 훔칠 그 껍질처럼
속이 텅텅 비어가는 집들
그림자만 남은
강정, 그 마을을 지난다
풀 물 /정군칠
포근히, 눈처럼 비가 내리더라구요
보지 못했지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는 걸
차라리 쫘악쫙 갈기는 비였다면
감히 거리로 나설 엄두나 냈겠어요
겨드랑이에서 나는 간지러운 바람소리에
슬쩍 집을 나섰지요
촉촉하게 젖은 겨울나무의 속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라구요
나긋나긋하고 뭐냐,
첫날밤 아내의 콧소리 같은
그런 소리더라 말입니다
아, 글쎄 몸이 근질근질해 오더라구요
비오는 까만 밤에 뵈는 게 뭐 있겠어요
코를 벌름거리며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서는데
눈앞이 번쩍! 갑자기 환해지더라구요
겨울나무 속에서 '서행'이라는 간판도 무시한
봄이란 놈이
쌍라이트를 켜고 달겨들지 뭐예요
피할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지요
보세요. 정신없이 이마에 풀물이 들었잖아요
가문동 편지 / 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孤內 /정군칠
얼마나 외로웠으면 고내리 가는 길은
등뼈 다 드러나도록 타들어간 채
안으로만 길을 내었을까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의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일
외로운 자들은 제 안의 화를 안에 태운다
달의 난간 - 정군칠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생애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붉은 꽃으로 가다 /정군칠
저것들,
헤픈 듯한 웃음을 흘리며 길모퉁이에 서 있
꽃잎 안을 살며시 들여다 본다
반점 같은 씨방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벌거벗은 내가 잠들어 있는 자궁 속이
저리 푸르다
저렇게 푸르다
칸나에게로 가면
붉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생명을
볼 수 있다
까맣게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다의 물집 /정군칠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연꽃 한꺼번에 / 정군칠
갈대 푸르고 못물 또한 푸르다
바람 불어 수면 일렁이자 한꺼번에 연꽃 핀다
고여 있는 물이 목숨을 얻는 것,
진창에 발 디딘 뿌리의 힘이라 생각다가
저 꽃 속맘에 담으려 걸어온 길 돌아본다
꽃상여 지나간 황톳밭
끝물의 수박덩이 몇, 엄숙하다
염천에 잎 다 녹은 마른 줄기에 매달려
곯기를 기다리는 머리통들
검은 줄 내리긋는 뇌선을 따라
얽히던 기억들을 끊고 또 끊어
여름, 갔다
두꺼운 껍질에 갇혀 네가 앓을 때
구멍 숭숭 돌담을 빠져나간 홍진들
꽃상여가 데려다 준 못에 이르러
오래된 앙금으로 가라 앉는다
바람 불어 수면 일렁이자 연꽃 한꺼번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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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와 나쁠 때도 있는 컴퓨터
어떨 때는 정보를 찾기가 쉬워서
편리하고 기분좋은 컴퓨터
나는 그런 컴퓨터가 맘에 든다
하지만 어떨 때는 게임 중독이 되어서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빠져 든다
그리고 내 몸은 점차 지쳐간다
좋은 정보를 주기도 하고
찾을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에 걸리면 한 방에 끝나는
컴퓨터가 어떨 때는 정말 바보 같다
(연당초등학교 5학년 오유진)
컴퓨터(연당초등학교 5학년 윤수봉)
선생님이 나에게
컴퓨터 숙제를 내 주면
부수고 싶어진다
그러나 게임을 할 때는
더 없이 좋은 컴퓨터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습다
내 컴퓨터(연당초등학교 5학년 이하림)
내가 심심할 때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
모르는 것을 찾을 때
검색하면 나타는 컴퓨터
이 좋은 컴퓨터도
가끔 나를 기분 나쁘게 합니다
공부도 못하게 하고
숙제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반드시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게 좋습니다
시발 장벼리 (남강중 3학년)
시발 시발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친근감을 가져다주는 욕
친구의 따스한 한 마디
시발
정답게 길을 걷다
시발
우리는 우리는
시발이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
시발시발거린다
어름들의 고지식한
잔소리를 들어도
시발
모든 사람이 한번이라도
해본 말
시발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루라도 안 들으면 허전한 말
그말은
시발
시발
나쁜 욕이지만
나에게는
시의 한 소재가 된다.
고맙다
시발아.
2017 서울모터쇼 차 역사 코너’에 전시 중인 최초의 국산차 시발
‘자동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가 만든 시발은 1955년 산업박람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시발은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던 차다. 한 대 제작에 4개월 정도가 걸렸다. 1950년대 말 본격적으로 생산시설을 갖추고 정부의 승인을 기다렸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시발의 부풀었던 꿈은 사그라졌다.
바통은 새나라자동차에게 넘겨졌고 1963년 시발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되고 1970년대 중반 포니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말렵한 끝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최명희 문학관
빈집을 지키는 홍시/ 박경자
바람도 문고리 흔들다 돌아간
빈집엔 하늘만 파랗게 내려와 출렁이고
한 뼘도 안 되는 햇살에 보리 싹 월동준비 하는데
퇴직한 잎들 정년에 취해 흩어지네.
긴 막대기로 머리 얻어맞고 굴러 떨어지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는 하려나
뜨끈한 가마솥에 구수한 보리쌀 눌어붙으면
등겨 풀어 두어 마리 워리 밥 훌쩍이던 그 시절 그리워
올해도 푸르고 떫은 여름 서리에 녹여
높은 가지에 걸어 놓고 기다린다네.
그리울수록 영글게 달아오르는 속내
어인일인지 뛰쳐 내려
붉게 타는 속 펼쳐보이리.
- 너른고을문학 21집(한국작가회의경기광주지부, 2016)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
이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 시집『고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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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동물
내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서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에 자살을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시를 써서 시집도 내고 문학상도 받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 시집 『파주에게』(실천문학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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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것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노래출처: 다음 블로그 홍이 아뜨리에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John Len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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