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에 누워/박정만
운우지정(雲雨之情)/이선이
여게가 도솔천인가/문성해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개별 경제학 /권순진
자벌레/이상인
우체국 계단/ 김충규
잃어버린 열쇠/ 장옥관
도서관은 없다/ 최금진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이승하
먼 곳 / 정일관
방석집 /유종인
아내와 맨발 / 우대식
김태정 /김사인
달마의 뒤란/ 김태정
뒷사람 / 최태랑
포란抱卵/ 신현정
옥수수를 기다리며 /황상순
대추 한 알/ 장석주
허공 모텔/강영은
동해아리랑/전윤호
젊은 사랑 ―아들에게 / 문정희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김혜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바람의 냄새/ 윤의섭
광고지 돌리는 여자 /문성해
제비꽃 꽃잎 속 / 김명리
대청에 누워/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 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 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시집『박정만 시전집』. 외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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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우지정(雲雨之情)/이선이
뒤꼍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를 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온종일 마룻바닥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병 수발에 지친 어머니 야윈 발목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희미한 새벽빛이 새겨두곤 할 때
미운 정 고운 정을 지나면 알게 된다는
더러운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날 창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나누었다는 그 밤이 기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자리도 지나고 나면
아픈 마나님 발목 속으로
불구의 사랑이 녹아드는 빗소리에 갇히기도 하는데
미웁고 더럽고 서러운 사람의 정(情)이란 게 있어
한바탕 된비 쏟아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몰려가는
구름의 한 생(生)을 머금어 보곤 한다
-『정신과표현』(2002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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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게가 도솔천인가/문성해
칠성시장 한켠
죽은 개들의 나라로 들어선다
누렁개, 흰 개 할 것 검게 그슬린 채
순대처럼 중첩되어 누워 있는 곳
다 부질없어라.
살아서 쏘다녔던 거리와
이빨을 드러내던 증오
쓰레기통 뒤지던 욕망들이
결국은 이 몇 근의 살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니.
뒹구는 눈알들은 바라본다.
뿔뿔이 흩어져 잘려 나가는 팔다리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날렵하게 춤추는 저 검은 칼을,
이제는 검은 길을 헤매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
발길에 차여 절뚝거리는 일도
마음에도 없이 꼬리 흔드는 일은 더더욱…
좌판들 위에서
꾸덕구덕해진 입술들이 웃는다.
이제는 물고 뜯는 일 없이 한통속이 된
검은 개들의 나라에서
살아서 오히려 근심 많은 내가
거추장스런 팔다리 휘적이며 걸어간다.
[제1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작, 1999]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경북일보]「아침시단」- (2012년 2월 29일
개별 경제학 /권순진
입맛 당기고 호기심도 당기는 점심특선 웰빙비빔밥
정가가 육천 원이라… 잠시 망설이다
사천 원짜리 그냥 비빔밥으로 낙찰을 본다
문자 받고 가야되나 말아도 되나 머리 굴리다가
찾은 고등학교 동창 초상집에
미리 준비해간 부의금 삼만 원
다른 녀석은 대개 오만 원이고 십만 원도 했다는데
잠시 망설이다 돌아서서
슬그머니 이만 원을 더 보탠다
이천 원의 내핍과 이만 원의 체면
스스로 쩨쩨해지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자유
아직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아
그래서 늘 부자가 부럽기는 부럽다
-시집『낙법』(문학공원, 2011)
자벌레/이상인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
가끔씩 고갤 좌우로 흔든다.
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
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
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
나는 아직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시집『UFO 소나무』(황금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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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집『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잃어버린 열쇠/ 장옥관
누가 잃어버린 것일까
풀밭에 버려진 녹슨 열쇠
누가 이 초록을 열어보려 했던 것일까
누가 이 봉쇄수도원을 두드렸을까
차가운 촛농으로 잠근 오래된 사원
수런수런 연둣빛 입술들이 피워 올리는 기도문
개미들이 땅과 하늘을 꿰매고 있다
아, 저기 호두껍질을 뒤집어쓴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風病든 그의 암호, 누구도 열 수 없다
-『하늘 우물』(세계사, 2003)
도서관은 없다/ 최금진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일어나 반란군처럼 밖으로 뛰쳐나가고
취업을 위해 앉아 있던 의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서관 의자들과 한바탕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실업의 인간들이여 투항하라
실업은 도서관장님이 해결할 몫이 아니다
세상은 봄이어서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수능필살기, 만점9급공무원, 부동산중개 등등의 책들이
공중에 날아올라서는
화르르 책 속의 글씨들을 네이팜탄처럼 터트리고
집에 가라, 집에 가서 차라리
아직 웃음의 흔적 기관을 자극할 만화책이나 봐라
벚꽃잎이 낙하산을 타고 도서관 마당을 점령하는데
오늘날 인류가 실용서적을 내기 위해 나무를 밴 것 말고 뭐가 있나
기원전 천칠백 년에 사라진 모헨조다로, 하라파 같은 도시들이
도서관 벽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긴 글렀어요, 다음에 만나면 나의 돈 많은 신랑이 되어주어요
젊은 도서관 사서는 의자에 깊이 몸을 눕힌 채
아득히 먼 문명이 되어버린 첫사랑 애인을 생각한다
침묵의 언어를 젊은 나이에 터득한 사서가
이 전쟁의 주모자는 아니다
사람들 귓구멍을 꽉 틀어막은 이어폰에선 음악이 줄줄이 샌다
벚나무 꽃들이 피워놓은 화형장으로
폭삭 늙어버린 젊은이들이 끌려나간다
실업, 실업의 시대
연애편지 따위의 글을 가지고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도서관 관장님은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모두 포위되었다, 투항하라, 오늘은 벚꽃이 피는 날이다
벚꽃이 보시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장 아지랑이 속에서 증발하는 햇빛 한 장씩 읽고 오라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달아나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꽃들이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현대문학, 2011. 12월호)
도서관은 없다/ 최금진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일어나 반란군처럼 밖으로 뛰쳐나가고
취업을 위해 앉아 있던 의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서관 의자들과 한바탕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실업의 인간들이여 투항하라
실업은 도서관장님이 해결할 몫이 아니다
세상은 봄이어서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수능필살기, 만점9급공무원, 부동산중개 등등의 책들이
공중에 날아올라서는
화르르 책 속의 글씨들을 네이팜탄처럼 터트리고
집에 가라, 집에 가서 차라리
아직 웃음의 흔적 기관을 자극할 만화책이나 봐라
벚꽃잎이 낙하산을 타고 도서관 마당을 점령하는데
오늘날 인류가 실용서적을 내기 위해 나무를 밴 것 말고 뭐가 있나
기원전 천칠백 년에 사라진 모헨조다로, 하라파 같은 도시들이
도서관 벽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긴 글렀어요, 다음에 만나면 나의 돈 많은 신랑이 되어주어요
젊은 도서관 사서는 의자에 깊이 몸을 눕힌 채
아득히 먼 문명이 되어버린 첫사랑 애인을 생각한다
침묵의 언어를 젊은 나이에 터득한 사서가
이 전쟁의 주모자는 아니다
사람들 귓구멍을 꽉 틀어막은 이어폰에선 음악이 줄줄이 샌다
벚나무 꽃들이 피워놓은 화형장으로
폭삭 늙어버린 젊은이들이 끌려나간다
실업, 실업의 시대
연애편지 따위의 글을 가지고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도서관 관장님은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모두 포위되었다, 투항하라, 오늘은 벚꽃이 피는 날이다
벚꽃이 보시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장 아지랑이 속에서 증발하는 햇빛 한 장씩 읽고 오라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달아나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꽃들이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현대문학, 12월호)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던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 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시집『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
먼 곳 / 정일관
핸드폰이나 티브이를 볼 때
자주 먼 곳을 바라보라고 한다.
눈이 나빠지지 않으려면
가까운, 작은, 세밀한, 손바닥만 한
이 지독한 근접을 벗어나
멀리 먼 곳을 보라고 권유한다.
이 의학적 권유는 삶의 지침.
먼 곳 너머 그 너머에는
산등성이가 굽이지고
하늘 구름이 흐르고
나무와 숲의 언저리가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의 끝으로 가자.
까마득히 새들은 날아가는데
가닿을 수 없는 곳으로 눈을 두어야
조리개가 균형을 잡는다는 것.
사람도 사람의 먼 곳을 봐야겠지.
가까운 것만 보면 보이지 않아
눈앞에 가려져서 그저 놓치고 사는
그 먼 곳을 보아야 제대로 보이지.
먼, 그대의 먼 곳
멀어서 가물거리는 희미한 빛이지만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저, 사람의 빛.
―시집『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 2017)
방석집 /유종인
아득하지만 그때 방석집은
젓가락 장단과 가짜 과부와 싸구려 한복과 슬쩍 드러낸 허리살과
하룻밤 신파가 노닐었네
하룻밤 둥지 같던 붉은 자수(刺繡)방석들
그 깨방정의 징검돌을 밟고
내 신파(新派)는 저 우주 변두리로 더 나아간 줄 알았네
그런데 말이네
가을 들어 파주 계곡의 한낮 절간에 갔더니
대웅전에 말이네
그때 그 방석들이 곱절은 품을 키워서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이름만 바꿔서 그걸 좌복이라 하더군
좌정한 부처와 보살들은
그때 그 마담과 과부들이 개과천선한 듯
저 수미단(須彌壇)에 앉아 그때 그 육덕 좋던 미소를 던지는 게 아닌가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셨기에
어느 슬픔이 몸에 박힌 여인은
연신 방석 위에서 절을 퍼올리고 있었네
니나노 가락과 염불 소리가 갈마드는
그때 그 음담패설과 담배연기 자욱한 술집은
풍경소리 맑게 번지는 이 대웅전으로
뭔가 훌쩍 건너뛴 게 많은 방석집이네
허리가 끊어지도록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거리도록
절해고도의 손짓 같은 절을 하는 사람들
저마다 불립문자가 되어가는
좌복이 쌓여 있는 절간을 말이네
나는 다시 풍경 소리 은은한 방석집이라 부르네
―계간『시인수첩』(2011년 봄호)
아내와 맨발 / 우대식
神께서 말씀하셨다
끼니 거르지 말라고
술 적당히 마시라고
지갑에 돈 없으면 추레하니 얼마라도 지니고 다니라고
그러던 神께서 아파 누었다
이마에 돋은 정맥이 파르르 떤다
神께 잘못했다고 수천 번을 빌었지만
神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당신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저 탕아는 또 다시 고모라 城을 헤맬 것이라는 사실을
神이 누워계신 한 계절
나는 발꿈치를 들고
주막에서 주막으로 돌아다녔으나
神께서는 끝내 모른 채
누워계셨다
어찌 모르셨겠는가
다만
냉담(冷淡)으로 떠도는 한 인간을 가엾게 여겨
그렇게 다독인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섬광처럼 당신이 사라질 때
긴 회랑에서
집도 잃고 神도 잃은
한 사내의 맨발이 남긴
더럽고 황망한 발자국을 당신은 만날 것이다
중요한 것을 잃은 자들은
모두 맨발이다
―계간『시와 사람』(2013년 겨울)
김태정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데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5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김태정(1963~2011)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한권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5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 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은 일이 있다.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
달마의 뒤란/ 김태정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 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리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 밤이 오늘 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 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
뒷사람 / 최태랑
흰 모시적삼 아버지
중절모에 팔자걸음이 앞서가고
누런 베적삼 어머니는 열무 단을 이고 따라간다
힐끗 돌아보며 왜 이리 더디냐고
타박하던 아버지
한껏 치장한 젊은 며느리
깃털 같은 손가방 들고
아들은 아이 안고 기저귀가방도 들었다
뒤를 보며 늦었다고
짜증내는 며느리
힘든 것은 언제나 뒤쪽에 있다
시집『물은 소리로 길을 낸다』(천년의시작, 2015. 12)
포란抱卵/ 신현정
어미닭은 잘 아는 것이다
알을 얼마만큼이나 품어야 하는 것인지
또 알을 살그머니 굴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숨이 붙고 눈이 생기고 별 같은 입이 나오고
나뭇잎 같은 날개가 돋도록
알을 굴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껍데기를 쪼아대는 소릴 들을 때도 되었는데
어미닭은 잘 아는 것이다
울타리 한켠에서 개나리가 언제쯤이면 핀다는 것을
이 알들 깨어나면 이 애들 데리고
개나리 환히 꽃 핀 속으로 소풍갈 날짜도 굴리어보는 것이다
ㅡ유고시집『화창한 날』(도서출판세계사, 2010)
옥수수를 기다리며 /황상순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고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꺽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를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 진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든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시집『농담』(한국문연. 2010)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시집『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허공 모텔/강영은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자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에 들 수 있다면,
ㅡ시집『녹색비단구렁이』(종려나무, 2008)
동해아리랑/전윤호
사람들은 사랑을 잃고 동해로 온다지만
난 동해에서 사랑을 놓쳤지
소금 사러 시장 간 사이
그녀는 사라져 버렸네
흥정을 위해 막걸리 몇 잔 낭비한 사이
파도에 취해 몇 번 쉬는 사이
봇짐을 간수하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백봉령 넘어 백 리 길
구비마다 잰걸음으로 재촉하더니
어느 날쌘 파도를 타고 떠났을까
서러운 소금 한 섬 지게에 얹고
혼자 돌아가네 천 리 길
검은 산 물 밑에 꽃이 지네
아라리요 아라리요
인생은 잃어버려야 철이 든다네
ㅡ시집『천사들의 나라』(파란, 2016)
젊은 사랑 ―아들에게 /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김혜순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
스위치를 누르면 눈이 휘날리지요
다시 누르면 벚꽃 축제, 아니에요?
윤전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공장 가득 쌓여 있어요
어느쯤에서 태양이 타오르고
어느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 난 다 외웠어요
음악이란 모조리 되풀이되는 푸가, 아니에요?
물이 흐르다,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고
지하로 눈 녹은 물이 스며들고, 그 다음엔 물 아지랑이 피어올라요
어느 부분에선가 경건하게 완전 군장하시고
낚시질 떠나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진 이제 정년 지나서 시장 바구니 들고 엄마 따라다녀요
기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그리고
날마다 새 아침이라고 소근대는 남루한 계단이
쏟아지려는 듯 걸려 있어요
나는 매일 이 계단을 올라갔었어요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만드셨다는데
자고 나면 언제나 월요일이었어요 날마다 출근을 서둘러야 했어요
그래도 강을 건너기도 했어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도 했어요
달력 속 여자는 맥주를 들고 가랑이를 벌렸어요
그는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쓰윽 집어넣었어요
소복 입은 할머니들이 오늘도 일본 대사관 앞에 서 있었어요
그 여자는 해변으로 가고 나는 달력 속으로 들어갔어요
내 딸이 엄마는 비키는 수영복이 안 어울려 그랬던가요?
공장장님은 색 분해의 도사인 건 틀림없어요
지치지도 않고 달력 속 여자들의 비키니 색이 살아 있으니까
왜, 윤전기 앞에선 한 번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요?
왜,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형량을 시작해야 하나요?
나는 벌써 이 음악을 다 외워버렸어요 귀에 못이 박일 정도에요
그러나저러나 나한테서 뭘 더 찍을 게 있다고 윤전기는 쉬지 않고
자꾸만 까만 숫자만 찍어대는 거예요?
―시집『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1962∼)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2002)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을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시집『마계』 (민음사, 2010)
광고지 돌리는 여자 /문성해
신종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돌리는
늙은 여자의 뒤에서
플라타너스 한 그루
나무 밑동에
삐죽이 새파란 잎사귀 몇 개를 달고 서 있다
어서 어서 삐라를 뿌리듯 광고지를 돌리는
일일 노동자 여자의 뒤에서
아무도 받지 않는 나뭇잎 몇 장을
간절히 내밀고 서 있다
점심도 굶은 채
수 천 장의 광고지를 돌린 여자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광고지 속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대문간 속으로
한번도 제대로 읽히지 못한 광고지들이
서부영화 속인 양 휘날리는 보도 위로
아직도 나뭇잎 몇 장을 흔들고 서 있는
나무 앞에서
누구인가
푸른 죽순 물이 뚝뚝 듣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읽어줄 사람은,
―계간『정인문학』(2006년 여름호)
제비꽃 꽃잎 속 / 김명리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시집『제비꽃 꽃잎 속』(서정시학, 2016. 6)
T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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