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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타자들의 생태학

by 이성근 2022. 12. 11.

 

타자들의 생태학 필리프 데스콜라 지음 차은정 옮김포도밭출판사 2022.10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인류학

 

필리프 데스콜라 (Philippe Descola) (지은이) 인류학자. 194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히스패닉 역사학자인 장 데스콜라가 그의 부친이다. 데스콜라는 생클루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파리대학 고등연구원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지도하에 에콰도르와 페루 국경의 아추아르 족을 현지 조사하여 민족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69월부터 만 3년간의 일정이었고 아내이기도 한 인류학자 앤크리스틴 테일러와 함께한 현지 조사였다. 아추아르 족은 1970년대 당시 아마존 열대우림의 동부지역에 기반한 지바로 족 중 거의 유일하게 바깥 세계와 접촉하지 않은 부족이었다. 데스콜라는 아추아르 족이 인간과 비인간 동식물을 사람이라는 동일한 차원에서 사고하며 인공적인 구조물과 자연물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양의 우주론과는 별개의 아마존의 애니미즘적 우주론을 정립했다. 이 연구는 길들인 자연: 아추아르 족의 상징주의와 실천 La Nature domestique: symbolisme et praxis dans l'ecologie des Achuar(1986)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1987년에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교수로 임명되었고, 20006월부터 20193월까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자연의 인류학의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2001년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설립한 사회인류학연구소(LAS) 소장으로 임명되어 2013년까지 운영했다. 2012년에 국립과학연구원(CNRS)으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고 2014년에 국제 코스모스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연의 사회에서: 아마존 원주민의 생태학 In the Society of Nature: A Native Ecology in Amazonia(1994)에서부터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Par-dela nature et culture(2005)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다양한 우주론의 실천적 전개를 가로막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 간 관계의 생태학을 주창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식과 실천이론을 제시해왔다. 그는 지금까지도 지구 생태계를 위한 인문학을 모색하며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이끌고 있다

 

목차

영어판 서문

서문

 

1장 조개 논쟁

사이펀의 적절한 사용에 관하여

이론상의 생태학

레비스트로스의 두 자연

 

2장 인류학적 이원론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대상의 역설

논란과 수렴

- 환원의 궤도

- 번역의 궤도

 

3장 각자의 자연 속으로

진실과 신념

근대인의 미스터리

일원론과 대칭성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결론

 

대담_ 횡단하는 우주론과 혼의 윤리학

옮긴이 후기_ 자연의 인류학과 관계의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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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딩 시리즈를 시작하며 내놓는 첫 책은 필리프 데스콜라의 타자들의 생태학이다. 필리프 데스콜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계승자로 손꼽히는, 현대 인류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대표작인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2005)가 출간되었을 때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극찬했다. “이 책은 인류학적 성찰에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며, 앞으로 수 년 동안 우리의 모든 논쟁에 필수적인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타자들의 생태학은 데스콜라가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를 출간한 후 2년이 지난 2007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 초청 강연을 위해 작성한 원고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데스콜라는 서두에서 밝히기를 자신이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간 관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일반 모델을 개발하여 관계의 생태학을 주창했다면, 타자들의 생태학에서는 자신이 자연의 인류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논하겠다고 밝힌다.

 

데스콜라는 현 세기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과제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데스콜라는 자연과 문화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비롯한 자연 대 문화의 논쟁들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20세기 인류학에서 말없이있던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는 문제의식의 전환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인류학을 전개한다. 데스콜라는 이 학문적 기획을 자연의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데스콜라가 자연의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것, 이 두 가지는 실로 그가 학자로서 초지일관 천착해온 주요 이론이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데스콜라는 이 책에서 특히 사회와 환경의 관계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법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이 지닌 관점의 인식론적 기반을 명확히 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전개하는 자연의 인류학관계의 생태학의 핵심과 맥락을 이해하고자 할 때 타자들의 생태학은 더없이 탁월한 안내서 역할을 할 것이다.

 

타자들의 생태학은 어느 평자의 말처럼 작지만 큰 타격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는 근본적 전환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연과 문화를 구분 짓는 서구적 이원론 개념에서 벗어나 종국에는 그러한 구분마저 무너뜨리고자 하는, 데스콜라가 자연의 인류학을 내세워 전개하는 강력한 기획을 응축해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데스콜라는 이 책을 통해 근대사회와 과학기술의 존재 양식을 재고함으로써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인류학을 주창한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존재(‘타자’) 간의 관계의 생태학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주지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앎과 실천을 통한 존재론적 구성의 변화를 통해 지구 환경과 인류가 처한 위기를 해결할 방향을 모색한다.

 

책속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입장의 대립은 다음과 같다. 한쪽에서는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소위 천연자원의 사용과 통제와 변형이 초래하는 제약의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보다도 자연이 그 한계와 기능 방식에서 동질적이라고 해도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이질적이므로 자연의 상징적 조작의 특수성을 통해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접근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두 입장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은 모두 자연과 사회의 이원성에 관해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고 게다가 이 전제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전제가 인류학적 접근의 여러 단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이 전제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P. 12~13

 

우리는 이 난관들을 어떻게 헤쳐갈지를 자문할 것이다.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개인과 집단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아상블라주(assemblage)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 관계의 생태학은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조성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그 조짐의 근거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인류학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데에 동의해야만 그러한 재구성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P. 14

 

나는 왜 인류학계에 불었던 유물론유심론의 대립적인 논쟁을 이토록 파고드는 것일까? 내가 채택한 이 단순한 용어는 미국을 한때 훑고 지나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학문 분야는 곤경에 처하자 지적 수단을 찾아 난관을 극복했고, 나는 그저 지난 국면을 트집 잡을 뿐이지 않은가? 전혀 아니다.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와 기호론적 관념론은 여전히 건재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이 놓일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연속체의 양 축을 형성하고 있다. P. 45

 

연속체의 한쪽 끝에서는 자연이란 인지적 보편성, 유전적 인자, 생리적 욕구, 지리적 제약 등을 마구잡이로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포괄용어이며 문화는 그러한 자연의 산물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반대쪽 끝에서는 자연이란 내버려두면 언제까지나 말이 없고 그 자체로는 불가사의하며 문화가 자연에 부착하는 기호와 상징으로 번역될 때에만 유의미한 현실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역설할 것이다. P. 46

 

자연적인 문화에서 문화적인 자연으로 이어지는 직선 축에서는 평형점을 결코 찾을 수 없고 단지 어느 한쪽 극에 가까운 타협점을 찍을 뿐이다. 근대사상의 여식인 인류학은 요람에서부터 이 문제를 알았고 그 후 지금까지 풀려고 애써왔다. 마셜 살린스가 문화와 실천이성(1976)에서 이야기한 비유를 빌어 말하면, 이 과학[인류학]은 지성의 제약과 관습적 실천의 결정성이라는 사방의 벽에 갇혀 한 세기 이상 감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일 뿐인 죄수와 같다. P. 48~49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공로가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문제시함으로써 민족학 분야를 창설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1966)에서 모든 민족학의 일반 문제는 바로 자연과 문화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라고 썼을 때,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관점과 공명한다. (...) 나 또한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글을 써왔기 때문에 저들의 운명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나는 자연의 사회들과 사회의 자연(2002)이라는 논문에서 사회적 실재의 구축 원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와 그의 자연환경 간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썼다. P. 55~56

 

우리가 알던 자연은 인간이 이해하고 통제하려 하고 그 인간에게 변덕을 부려 고통을 주면서도 가치, 관습, 이데올로기가 설 자리가 없는 자율적인 규칙성의 장을 구성하는 영역이었다. 이 환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특화된 줄기세포 배양 등을 둘러싸고 자연은 어디서 멈출 것이며 문화는 어디서 시작될 것인가? 확실히 이런 질문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P. 115~116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통한 사회생활의 일반적 지식으로서 이해되는 인류학은 이렇듯 다양한 접근법을 한데 엮는 데에서 특히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첫째 인류학이 어떤 면에서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계승해왔기 때문이다.P. 118

 

요컨대 내가 집념하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에 대한 비판은 자연적 대상과 사회적 존재의 관계성을 다루기 위해 사용된 개념적 도구의 광범위한 재작업을 시사한다. 이 대립이 수다한 비근대적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서구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뒤늦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근대 세계의 자연주의(naturalism)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동떨어진 문화를 판단하는 기준을 구성하기는커녕 세계와 타자의 객관화를 지배하는 더욱 일반적인 스키마의 가능한 표현 중 하나일 뿐이다. 자연주의는 그러한 새로운 분석적 장에 통합할 필요가 있다. P. 121

 

세계의 구성요소와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스키마는 정신 구조의 형태로 존재하며 그중 일부는 선천적이고 일부는 사회생활의 속성에서 유래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가 모두 서로와 양립할 수는 없으므로, 모든 문화 시스템 그리고 사회적 조직화의 각 유형은 비록 우발적이지만 역사 속에서 종종 비슷한 결과와 함께 반복되는 여과 및 분류와 조합의 산물이다. 이 요소들의 성질을 명시하고 그 구성의 규칙을 해명하고 그 배열의 유형학을 작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류학이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과제이다. P. 122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다

이지영 그림

 

마이클 왈저의 성도들이 일으킨 혁명(대장간, 2022)의 원제는 ‘The Revolution of the Saints’. 성도로 번역된 ‘Saints’청교도(Puritan)’를 가리킨다. 청교도는 종교개혁에 찬동한 영국인 가운데 칼뱅주의를 선택한 이들로, 칼뱅주의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을 구상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베버는 칼뱅의 예정설이 가진 구원의 불확실성이 금욕주의와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이끌어냈으며, 거기서 기업가형 인간이 양산됐다고 말한다.

 

청교도혁명(1642~1651)은 광범위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인클로저(울타리 치기)로 인한 시골 인구의 유민화,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범죄 증가, 종교적 공백, 전통적인 사회 제도의 해체. 이런 대격변에 대응하기 위해 청교도가 추구한 규율이 금욕과 노동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베버는 자본주의를 발흥시킨 심리 원인 정도로 칼뱅주의를 축소했다. 그러나 청교도가 자본주의에 기여한 몫은 부차적인 결실일 뿐이다. 청교도는 기성 교권과 정치체제 모두와 대립했다.

 

새로운 성도는 새로운 시민이었다. 왕정과 봉건체제 아래서 신민은 왕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딸린 유기체였고, 이 시절의 정치는 일부 모험가들의 일탈에 지나지 않았다. 청교도는 최초의 시민이자 근대적 정치 주체였다. 왈저의 주장을 이어받은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민음사,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당은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연결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노동과 생산뿐 아니라 교육과 정치를 위한 거대한 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영향을 받은 조직인 정당 또한 금욕적인 이상과 다음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었다. 규율, 권위, 충동의 지연이다.” 왈저는 자코뱅(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러시아 혁명)와 같은 정치적 급진주의의 기원이 청교도였다고 말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허다한 천년왕국운동, 조선시대의 동학, 청나라 말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교가 새로운 정치 주체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개신교 교단도 프로테스탄트=자본주의라는 베버의 공식을 반박하지 않았고, 도리어 많은 교회가 이 공식을 새로운 복음으로 떠받들었다.

 

어쩌다 연쇄살인범과 이상 범죄에 관한 책을 연이어 읽었다. 이 분야의 필독서인 로버츠 K. 레슬러의 FBI 심리분석관(미래사, 1994)과 한때 그의 동료였던 로이 해이즐우드의 프로파일러 노트(마티, 2015)는 다시 읽었고, 마르크 베네케·리디아 베네케의 신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알마, 2016)와 토마스 뮐러의 인간이라는 야수(황소자리, 2009)를 새로 보탰다. 연쇄살인범과 이상 범죄에는 불변의 원형이 있지만, 이런 범죄자나 범죄에 사회과학적 분석틀은 소용되지 않는다. 빈곤, 학업 중단, 실업에 처한 흑인 청년들이 범죄자로 전락하지만 연쇄살인과 이상 범죄의 99%20~30대 백인 남성이 저지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백인 남성보다 흑인 남성을 더 경계한다. 사회과학적 분석틀이 심어놓은 선입견 탓이다.

 

폭력 계보학(카리스아카데미, 2022)을 쓴 찰스 벨린저는 사회적이나 정치경제적 분석은 폭력의 영적인 면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고 말한다. 폭력은 수평적(사회관계)으로도 이해해야 하지만 수직적(영적)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불려온 철학자는 키르케고르인데, 지은이는 키르케고르의 중요 관심사가 폭력이었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가 폭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많은 독자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에, 이런 나의 시도가 엉뚱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단독자·불안·군중 같은 키르케고르의 중요 개념이 모두 폭력의 심리적·신학적 기원과 연관되어 있다.

 

지구의 진정한 정치 행위자는 비인간

개개의 인간은 단독자로서 영적인 성숙을 계속해나가야 하지만, 현재의 모습과 달라져야 한다는(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불편함을 넘어 불안을 선사한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애(나르시시즘)라는 고치 속에 숨거나 군중의 일원이 되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죽였던 옛 유대 사회가 그랬고, 민족이라는 허상을 내세워 다원화 사회를 거부하는 오늘의 유럽 극우정당이 그렇다.

 

필리프 데스콜라는 타자들의 생태학(포도밭출판사, 2022)에서 1986년부터 꾸준히 주창해온 자연의 인류학(anthropology of nature)’을 설명한다. 인류학은 흔히 모든 형태의 인간 문화에 대한 연구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류학의 이미지는 백인 학자에게 관찰되고 있는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또는 태평양에 위치한 섬 주민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인류학은 서양 백인이 그 밖의 인종을 연구하는 것이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학자 스스로도 인류학을 학문적 유럽중심주의라거나 자민족중심주의로 비판해왔다.

 

27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인류학의 한계는 인류학이 서양에서 발생하여 식민주의와 함께 성장해왔다는 이유가 크지만, 인류학이 고수해온 이원론이라는 고유의 방법론에도 무시 못할 원인이 있다. 인류학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을 기본값으로 놓고, ‘자연=원시=여성=비유럽’ ‘문화=문명=남성=유럽등의 이항 구조를 온존하고 증식한다. 이런 이원론은 순수한 자연도 없고 자연에 기초하지 않은 문화도 없다는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로 얼마간 허물어졌다. 그러나 인류학이 이원론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연주의(naturalism)’가 유지되는 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인간주의 판본인 인간 종 중심주의는 변하지 않는다. 데스콜라가 말하는 자연주의는 예술상의 자연주의가 아닌 근대인이 정립한 보편적인 우주론으로, 자연을 인간 바깥에 있는 대상으로 본다. 자연이 인간 바깥의 대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용하고 조작할 수 있다. 환경보호 사상은 자연주의와 사뭇 다른 것 같지만 자연을 보호한다는 생각도 자연이 인간 바깥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고다.

 

지금까지 인류학은 인간이 주인이었으나, 자연의 인류학은 인간과 비인간을 일원화한다. 여기서 비인간은 동식물·정령(精靈광물 등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비인간의 인류학이라고 불러야 할 데스콜라의 아이디어는 인류학을 넘어 철학자와 생태주의 운동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데스콜라의 친구였던 브뤼노 라투르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이음, 2021)에서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아니고 유일한 정치 행위자도 아니라면서, 지구의 진정한 정치 행위자는 지구이며 여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비인간)라고 말한다./장정일 (소설가)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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