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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커밍 업 쇼트

by 이성근 2022. 12. 25.

커밍 업 쇼트: 저자 제니퍼 M. 실바 번역 문현아,박준규 출판 리시올 2020.10.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제니퍼 M. 실바 (Jennifer M. Silva) 인디애나대학교 폴 오닐 공공 및 환경 대학조교수. 정치 문화, 사회 계급, 불평등, 성인기 이행, 가족과 친밀한 삶 등이 주요 연구 관심사다. 웰즐리칼리지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크넬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고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다. 2013년에 출간된 커밍 업 쇼트에서 노동계급 청년이 성인으로 자라며 마주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고립을 다뤘다. 이 책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에서는 100명이 넘는 탄광촌 노동자를 인터뷰하여 미국 노동계급이 놓인 현실과 그들이 벼려내는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현재는 가난한 농촌 마을의 여성 건강과 웰빙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미국 노동계급의 삶과 문화, 정치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1장 리스크 사회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

2장 현재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 성인기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3장 불안한 친밀함들: 리스크 사회의 사랑, 결혼, 가족

4장 경직된 자아들: 미국 노동 계급의 재형성

5장 무드 경제에서 살아가기

결론 리스크의 감춰진 상처들

 

부록 연구 방법

후주

옮긴이 후기

참고 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밀레니엘 노동 계급 청년들은 왜 성인이 되지 못한 채 구조적인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하고자 애쓰고 있는가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청년들의 성인기를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연대를 거부하고 경쟁과 개인주의, 자립을 신봉한다

 

성장을 가로막는 신자유주의 권력에 대한 분석과 살아남고자 악전고투하는 청년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상상되고 있는 성인기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오늘날 청년들은 보수화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현실을 앞에 두고 물어야 할 질문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지난 몇십 년간 청년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끊임없이 생겨났고, 미디어에서는 이들을 표상하는 각종 묘사를 만들어 냈다. 새 시대의 청년들은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라며 칭송받는가 하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또 만성적인 경제 위기 시기에 성장해 안정된 성인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 위 세대에 억눌린 채로 자원을 둘러싼 투쟁에서 패배한 세대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런 묘사들이 진실을 담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세계관에 기반해 이들의 성인기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시도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는 현재의 미국 노동 계급 청년들이 성인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위를 밝히는 사회학 저작이다. 2013년에 출간된 책은 성인기로의 이행을 다룬 이전 연구들과는 몇 가지 차별점을 갖는다. 우선 노동 계급 청년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대다수 청년이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중간 계급 성원이 얼마간의 자원과 자유를 토대로 선택의 기회를 누리는 데 비해 노동 계급 청년은 선택의 부재로 고통받고 있다. 또 이 책은 매사추세츠주의 로웰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를 중심으로 노동 계급 청년 100명을 인터뷰해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아울러 백인, 남성, 산업 노동자를 전면에 배치했던 과거의 연구와 달리 불안정한 서비스 경제에서 살아남고자 고투하는 여성과 비백인 청년의 현실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젠더와 인종의 선을 따라 어떻게 상이한 영향을 미치는지도 분석한다.

 

불안한 노동 시장, 믿을 수 없는 제도, 추가적인 짐이 되어 버린 친밀 관계 등 신자유주의의 파장들은 노동 계급 청년들의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이 청년들은 오히려 자립, 개인주의, 공정 등의 담론을 신봉하면서 연대의 가능성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밀레니얼 노동 계급 청년들이 성인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제적·사회적 변동을 살필 뿐 아니라, 이들이 이 변동에 적응하고 굴복하면서 유순한 신자유주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주체적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 자본주의론의 통찰을 빌려 자아의 성장과 감정적 성숙이 이들이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음을, 그리고 그 탓에 의존을 거부하고 타인과 자신 사이에 가혹한 경계선을 긋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커밍 업 쇼트’(coming up short)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숙어다. 이 책에서는 특히 성인이 되다라는 뜻을 가진 coming of age와 대비를 이루며 청년들이 성인이라는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 노동 계급 청년들은 영원히 수준 미달인 채로 남을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각 개인의 자아나 감정이 아니라 이들이 안정적으로 성인기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제와 사회, 제도의 수준 미달이다.

 

성인기에 이르는 길에서 무력감을 배우기

: 밀레니얼 노동 계급 청년들은 왜 성인이 되지 못하는가

몇십 년 전만 해도 성인이 되는 것은 혼란이나 불안, 불확실함에 휩싸이는 경험이 아니었다. 대부분 나라에서 성인 지위는 나이에 근간을 두며 일정 나이가 되면 그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나아가 온전한 성인이 되려면 성인기의 사회적 기준들을 달성해야 한다. 부모 품을 떠나고,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노동 계급 청년들은 성장을 멈춘 듯이 보인다. 이 책 1장과 2장에서는 이들이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성인의 삶을 창출하기가 불가능함을 밝힌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유연성을 강조하면서 안정적이던 블루 칼라 일자리를 대폭 감소시켰다. 그 결과 생활 임금을 지급하고 정년을 보장하며 노동조합이 결성된 일자리가 사라지고 불안정한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산업 세대는 혼자 힘으로 유동성과 우발성을 부단히 해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나아가 청년들이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해야 마땅한 교육, , 의료 같은 국가 제도들은 오히려 성인기로 가는 길을 가로막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들은 가망 없는 존재로 낙인찍히며, 복잡한 관료제는 그 논리를 해석할 지식이나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좌절감만을 안긴다.

 

신자유주의를 보조하는 사회 제도들의 변화가 초래한 가장 큰 폐해 중 하나는 리스크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risk). 실업이나 질병, 가족의 불행, 장애, 부상 등 예기치 못한 충격을 겪으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 안전망이 파괴된 탓에 노동 계급 청년들은 살아남으려면 이런 충격을 개별적으로, 주로 신용카드를 이용해 해결해야 한다. 사유화가 강화된 환경에서 노동 계급의 성장 경험을 정의하는 것은 명확하고 인식 가능한 목적지를 향한 진보가 아니라 현재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관리가 된다.

 

또한 연애와 결혼, 가족 같은 친밀 관계 역시 노동 시장에 대한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오히려 추가적인 짐이 되었다. 과거에는 남성이 생계를, 여성이 가사를 책임지는 식으로 가족 관계가 깊이 젠더화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남성 부양자 모델을 따르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더불어 20세기 중후반에 2세대 페미니즘과 민권 운동을 거치면서 성적·인종적 평등의 이상이 얼마간 달성되었지만, 노동 계급 가족들은 이런 평등을 현실에서 실현할 자원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관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문화적 이상에 맞추어 관계를 꾸릴 수도 없는 처지인 오늘날 노동 계급 성원, 특히 여성은 가족과 커리어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맞닥뜨린 채로 친밀함이라는 덫에 빠져 있다.

 

유순한 신자유주의 주체 되기

: 어째서 노동 계급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고 있나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이렇게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사회에서 노동 계급 청년이 어떤성인이 되는지를, 즉 이들이 신자유주의 주체가 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4). 주지하듯 현재 많은 노동 계급 청년이 자진해 규제 완화와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봉하며 이에 반하는 생각과 실천에 적대감을 표출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청년들이 보수화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성인의 삶이 근원적으로 파괴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청년들이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게 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노동 계급 청년들은 노동 시장에서 좌절을 맛보며, 성인기로 가는 길을 형성하는 제도들, 특히 교육 영역은 이 좌절을 배가한다. 그 외에도 일상적인 상호작용과 관행에도 배신이 만연해 있다. 경험을 통해 청년들은 국가가 자신을 위해 공정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며, 자신이 철저히 혼자고 외부의 도움에 기대려면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하여 타인을 불신하고 의존을 거부하는 태도를 미덕으로 여기고 이를 성인기 삶의 주된 특징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런 자립의 영웅담에는 어두운 이면이 있다.

 

청년들은 타인과의 유대 관계를 끊고 내면으로 파고들며 감정적으로 무뎌진다. 그리고 자기가 혼자 힘으로 살아남았으니 남들도 그래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고수한다. 이들은 경쟁, 개인주의, 자립이라는 문화적 각본을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주체가 되어 자립하지 못한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가혹한 경계선을 긋는다. 남성은 여성 및 성 소수자를 배척하며 얼마 남지 않은 공공 부문 일자리를 계속 차지한다. 백인은 흑인이 복지 수혜자가 되어 자신의 세금을 낭비한다며 도덕적 비난을 가한다. 흑인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다른 흑인과 자신 사이에 한층 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이처럼 노동 계급 청년들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의 선전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다. 이들은 도움을 주리라 믿었던 제도들이 오히려 자신을 배신했음을 절절히 깨닫고 있다. 문제는 이 깨달음이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논리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보다는 긍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불신의 문화를 초래한 원인이 신자유주의임에도 배신의 경험은 청년들이 사회와 연대를 멀리하고 광범위하게 퍼진 신자유주의적 발상과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긴다. 견고한 개인주의와 절대적 자립이 삶을 헤쳐나가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의 리스크에 대응하면서 오히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능동적으로 따르고 궁극에는 재생산하고 있다.

 

무드 경제에서 살아가기

: 어떻게 청년들은 자아의 성장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착취하게 되었나

오늘날 노동 계급 청년들의 성인기 여정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 하나는 이들이 가치 있는 성인의 삶과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모두를 자아의 층위에서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이다(5). 지은이와 인터뷰한 대다수 남녀는 안전한 성인의 삶을 꾸리지 못하는 원인이 정치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아주 개인적인 층위에서 성인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에 겪은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아 해방되고 변형된 성인 자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과거에 성인의 삶은 고된 노동, 결혼, 자녀 양육, 공동체 참여, 노후 등을 중심으로 이해되었고, 남녀 모두 깊이 젠더화된 경로를 따라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이 되는 정해진 경로가 있었고 성취해야 할 가시적이고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과정들이 파괴되면서 청년들은 각자의 성인기를 부단히 새롭게 창출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지은이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을 무드 경제’(mood economy)치료적 자아’(therapeutic self)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무드 경제란 오늘날 사람들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자아의 성장감정 관리로 축소된 상황을 가리킨다. 노동은 불안정하고 관계는 불확실하며 미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 청년들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선택지는 자아의 성장뿐이다. 자아를 성장시키려면 과거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어린 시절의 고통’, 특히 가족이 안긴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한편 노동 계급 청년들이 성인기의 기준들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교육, 출판, 사회 복지, 방송, 의료 등 우리 삶을 틀 짓는 제도·미디어에서 심리 치료의 언어와 제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치료 언어는 부정적인 생각, 감정, 행동을 혼자 힘으로 통제할 정도가 되어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노동 시장과 제도, 미디어가 이렇게 상호작용한 결과 우리는 심리적 발전을 통해 성인 자격을 갖추고자 고군분투하는 치료적 자아가 된다.

 

이 같은 치료적 자아는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인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문화 자원이 되었다. 하지만 자원도 시간도 없는 노동 계급 청년들에게는 자아의 성장이라는 명령이 오히려 추가적인 압력으로 작용한다. 더 큰 문제는 청년들이 감정에 기반한 자아 관리가 행복의 열쇠라고 이해하다 보니 가족의 과거사만을 부각시켜 시장과 국가처럼 강력한 제도들이 행사하는 힘을 시야에서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무드 경제와 치료 담론의 명령을 부지불식간에 체화한 이들은 성인의 삶과 행복이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끝없이 자아 관리에 힘써야 하는 악순환에 붙들리며, 자아를 성장시키지 못한 타인들을 비난한다. 신자유주의가 청년들에게 혼자 힘으로 경제적 성공을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치듯, 무드 경제는 이들이 심리적 성장을 스스로 책임지게 만듦으로써 경제 영역의 신자유주의가 조성한 자립 문화를 강화한다. 이를 통해 성인기에 이르는 노동 계급 청년들의 여정이 다시 한번 개인화되며, 리스크에 대한 집단적 대응과 연대 같은 개념들이 들어설 자리는 더욱 줄어든다.

 

친밀함이라는 덫

: 왜 우리는 점점 더 친밀한 관계에 집착하는가, 그리고 왜 이 관계는 참을 수 없는 부담이 되는가

이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하듯 연애와 결혼, 가족 같은 친밀 관계(intimate relationship)는 단순한 사적 영역이 아니다. 친밀함은 시장이 초래하는 외적 리스크를 막아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노동 계급 청년을 짓누르는 또 다른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이 친밀 관계에서 어떤 좌절을 경험하고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지가 오늘날 노동 계급 청년의 성장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3).

 

지난 수십 년 사이 전통적인 젠더 역할이 일정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면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새로운 문화적 이상이 발전해 전통적인 결혼관을 대체했는데, 이 이상은 성적이고 감정적인 동등함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관계를 중시한다. 그 덕분에 여성들은 불평등하고 모욕적이며 감정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권한을 확보했다. 하지만 끝없는 협상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순수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특수한 감정적·언어적·물질적 자원을 보유해야 한다. 노동 계급은 이 자원을 획득할 여력이나 시간이 없다.

 

일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리스크로 가득하기 때문에 청년들은 오히려 가장 친밀한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순수한 관계를 유지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은 깨지기 쉬운 것, 또 하나의 리스크가 된다. 그리고 이 부담은 젠더와 인종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분배된다. 평등한 관계라는 이상이 부상했지만 남성들,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한 소수 인종 남성은 전통적인 부양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굴복해 관계 맺기를 피한다. 여성들은 이런 남성의 태도가 이기적이라 느끼며, 다른 한편으론 자신이 어렵게 획득한 치료적 자아가 불만족스러운 관계 때문에 훼손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또한 결혼한 커플들은 치료적 관계를 추구하지만 각자의 자아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는 한편, 양쪽 부모로 구성되고 엄격하게 젠더 역할을 나누는 전통적인 가정을 꾸리려 해도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수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치료적 논리와 전통적인 논리라는 두 사랑 논리 사이에 갇힌 커플들은 견고한 가족 관계와 헌신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자아를 희생해야 할지를 매일매일 판단해야만 하며, 친밀 관계는 끝없는 노력과 갈등을 유발하는 또 다른 전장이 되어 버렸다.

 

개인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 찾아 나서기

: 어떻게 원자화된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복수의 목소리를 허용하는 계급 연대를 이룰 것인가

노동 시장의 유연화, 금융 제도의 규제 완화, 사회 안전망의 파괴와 리스크의 사유화, 강고한 개인주의와 자립의 문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과 담론은 노동 계급 청년의 성인기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연대의 싹도 잘라 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들의 불만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고, 세계 각지에서 이에 대한 항의들이 발발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 중 하나는 우리 자신과 타인, 공동체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불평등에 저항하는 연대를 수립하고 유지하기란 요원한 일이라는 것이다.

 

자아의 성숙, 자기 서사 구축, 심리적 치료 같은 문화적 수단은 여성이나 비백인 등 사회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타자들이 급진적인 자기 인식에 도달하도록 돕는 유용한 자원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수단들은 신자유주의 문화에 포섭되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의 우위를 긍정하고 단언하는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문구는 경험이 심원하게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본성을 지님을 드러내려는 것이지 끝없는 개인 서사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니다”(262). 이 책은 노동 계급 청년 남녀의 존엄과 진보를 새로이 정의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라고 호소한다. 그래야만 청년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를 감정 관리로 환원하지 않고, ‘우리라는 감각을 유지한 상태로 불안전 및 상실과 맞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미래의 청년들은 생활 임금, 기초적인 사회적 보호, 기술과 지식을 보장받은 상태로 성인기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젠더와 인종을 가로질러 유연한 정체성과 복수의 목소리를 허용하는 계급 연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평등주의적인 젠더 이상을 희생하도록 강제하지 않는 친밀함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노동 계급 청년들은 막중한 리스크 부담으로 인해 무력한 상태다. 질병, 가족 해체, 장애, 부상 등 예기치 못한 경제적ㆍ사회적 충격을 겪으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살아남으려면 이런 충격을 개별적으로, 주로 신용카드를 이용해 해결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대다수 청년이 정당한리스크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대출을 받거나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는 등의만 감수하면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의 부재에 서브 프라임 대출처럼 유해한 금융 관행까지 겹쳐져 이들의 노력은 제약받고 종종 저지된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성인기의 전통적인 기준에서 오히려 멀어진다. 사유화가 강화된 환경에서 포스트산업 노동 계급이 성인이 되는 경험을 정의하는 것은 명확하고 인식 가능한 목적지를 향한 진보가 아니라 현재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관리다. P. 88

 

결혼은 안정된 결말보다는 끝없는 협상에 더 가까워졌다. 커플들은 자신이 경쟁하는 두 사랑 논리 사이에 갇혀 있음을 깨닫지만 둘 중 어느 하나만을 따를 수는 없다. 한편으로 이들은 양쪽 부모로 구성되고 엄격하게 젠더 역할을 나누는 전통적인 가정을 꾸리려 하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수단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적 관계를 구축하려 하지만 자아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없음을 금세 깨닫는다. 결혼이 자발적이며 궁극에는 파경에 이를 수도 있는 현재의 문화적 배경하에서 커플들은 (자기 자신과 자녀에 대한) 헌신과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욕망과 필요를 희생할지를 매일매일 판단해야 한다. P. 138

 

청년들이 자립의 이상 및 실천과 제약받지 않는 개인주의를 그토록 강하게 고수하는 것?이들은 단순히 현실이 그렇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이 처음에는 직관에 어긋나는 듯이 보인다. 내 생각에 이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확신들은 단순히 위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다. 이 확신들은 일상에서 경험한 모욕과 배신에, 자신이 의지하는 사회 계약이 깨져 버렸다는?혹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깨달음에 근거하고 있다. 노동 계급 청년들은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만 타인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배운다. 그런 다음에는 자립,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이라는 문화적 각본을 받아들임으로써 배신의 아픔과 연결의 갈망을 완화한다. 제도와의 상호작용에서 더 유연해질수록, 즉 단기적인 헌신과 환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수록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는 한층 더 경직된 태도를 보이게 된다. P. 204~205

 

이런 과정을 통해 청년들은 유순한 신자유주의 주체가 되어 온갖 종류의 정부 개입, 특히 차별 시정 조치에 반대한다. 그런 개입이 자기 삶의 경험에 대립하고 그 경험을 침해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잠재적인 연대 공동체들은 불안정과 리스크의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 버린다. 남성은 여성 및 게이와의 경계선을 조심스레 관리함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공공 부문 일자리를 계속 차지한다. 백인은 흑인이 정부의 돈을 가로채며 자신의 세금을 낭비한다며 도덕적 경계선을 친다. 흑인 응답자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다른 흑인들과 자신 사이에 한층 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궁극적으로 노동 계급 청년 남녀는 자신이 혼자 힘으로 삶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P. 206~207

 

치료 서사가 성인기로의 통로로 활용될 때 생기는 주된 문제는 이 서사가 자아를 성공, 행복, 웰빙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변형한다는 것이다. 치료 서사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자기 삶의 영웅, 피해자, 악당으로 여기게 만든다. 청년들에게 자기 자신만이 감정을 관리할 수 있고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치료 에토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꼭 어울린다. 힘 없는 노동 계급 청년들이 스스로의 행복에 책임이 있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장, 취약한 가족, 공허한 제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 안전망으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자아?혼자고 확신 없는?스스로를 만들거나 망칠 힘을 타고난다. P. 255

 

내 연구 속 노동 계급 청년 대다수에게 신자유주의 논리와 무드 경제 논리는 깊이 얽혀 있으며, 이는 자립만이 성공과 행복, 성장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는 하나의 상호 구성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현실을 창출한다. 한편으로 (4장에서 설명했듯) 이들은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경제적 의존이나 외부의 도움은 생각조차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치료 서사?그리고 이 서사의 신조인 개인주의, 자아 변형, 개인적 성장?는 이들이 성인이 되는 공간들 내부에 깊이 제도화되어 있으며, 자신의 감정적 운명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담론을 제시한다. P. 259

 

청년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이들의 개인적인 잘못 때문도, 가족의 문제 때문도 아니다. 이들의 경험하는 좌절과 절망의 근원에는 제도가 있다. 사회 제도가 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세계에 갇혀 서로 연대할 희망을 품지 못하도록 내몰고 있다. 그렇기게 이들의 무력감이 청년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지은이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때 노동 계급 청년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를 위한 연대의 계기는 이해에 있으며, 추상적인 표상 뒤에 감춰진 현실을 직시할 때 연대를 시작할 수 있다. P. 325

 

자본주의와 그것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 질서의 최하층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최하층부의 남녀는 실업, 친밀함, 자기 존중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씨름하고 있다. 커밍 업 쇼트는 새로운 관점으로, 즉 리스크 관리라는 관점으로 노동 계급의 삶을 연구한다. 이 책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갖가지 불안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창출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저자)

 

불확실한 시대, 연애 리얼리티에 빠지는 이유

'커밍 업 쇼트

매주 수요일 밤, 리모컨을 든 아내의 손이 바빠진다. 사냥감을 향해 곧바로 달려가듯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르던 손이 멈추면, 우리는 입에다 둥글게 깎은 감을 물고 연신 우물거리며 화면을 본다. <나는 솔로>의 시간은 그렇게 온다. 이미 연애를 졸업(!)한 아내에게 물었다. 왜 보는 거야? 남의 연애는 언제나 재밌지.

현세의 비루함과 지루함이 거세된 공간에서, 오로지 사랑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짧은 시간 동안 사랑하며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즐겁다고 했다. 다만 완전히 현실을 잊을 만큼 예쁘고 멋진 사람들의 연애보다는, 직장에서나 친구들 모임에서 볼만한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연애가 더 좋다는 개인 취향을 덧붙이면서.

 

결혼과 연애가 지금처럼 리스크로 여겨지는 때도 없지 싶은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연애 버라이어티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가해지는 연애와 결혼 압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판타지에 가까운 연애 버라이어티를 타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연애 전쟁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바라보는 프로그램을 즐긴다. 실제로는 안 하지만, 눈으로는 모두 연애를 한다.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는 현실 연애 대신 가상 연애에 빠진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불안한 친밀감들이라는 장에서 실바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파괴한 탓에 장기적으로 삶을 전망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오늘날,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것만큼 무모한 게 또 있냐고.

 

청년들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 없이 서로에게 헌신했지만 결국 파국을 면치 못한 사람들을 목격했고, 불완전 고용, 장애, 질병, 약물,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이 산산이 부서졌던 경험도 있다. 편히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쉴 만한 사람을 찾지만, 그 욕망만큼이나 큰 두려움에 그들은 섣불리 타인과 깊은 관계 맺기를 꺼린다. 가족도 무너지고, 가족 바깥의 제도들도 수준 미달인 상태에서 헌신은 꺼림칙한 리스크다. 고립이, 그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처럼 보인다.

 

연애 버라이어티의 범람은, 이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가랑이가 점차 벌어지는 젊은 세대의 불안함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닐까? 친밀감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지만, 대리 만족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TV 앞으로 향한다. 앞 세대의 어른들처럼 연애, 결혼, 취직을 하고 어른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청년들은 방황한다. 그들이 자기의 성장을 증명하고 자신감을 획득하고자 어떤 방법들을 택하는지 추적하는 책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대리 만족의 의혹은 더욱 짙어 진다.

 

개인을 사회의 수많은 위협에서 보호해주던 다양한 제도들이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해체되고, 그 미비한 제도들에게 배신당한 경험은,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믿을 것은 자신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것도 자신이다. 질곡을 벗어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러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감정을 다스리고 능력을 계발하는 것만이 믿을 구석이니, 서로 의지하는 연대는 마치 부도덕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시위는, 그러니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칭얼거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말마따나 미국 산업의 소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정책의 부상이 초래한 불안전 및 불확실의 정치경제가 사람들의 인생 경로를 불확실한 상태로 내몰았다. 사회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자유를 얻었지만, 다시 과거의 연결과 제약을 갈구하는 허무함도 얻었다.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시대에 성장한 노동 계급 남녀에게 불확실성은 자연적 조건이다. 그러니 우리를 괴롭히는 세계를 바꾸는 대신,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를 택한 이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성공시키는 거대한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오늘날 대중의 보편적인 마음가짐인데, 이 무한한 긍정은 손쉽게 자기 혐오로 전락하기 일쑤다. 뭐든 가능한데 무엇도 못한다면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최근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조이와 에블린을 괴롭히는 무력감을 떠올려보자. 모든 평행 우주에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면,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든지 파괴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답이 없어 보인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다. 에블린은 어쨌든 무력한 우울감을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장 최악의 상태인 지금의 에블린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실바도 책 말미에 비슷한 말을 한다. 자기 계발하라는 명령에 압도당한 상태에서도, 누군가는 그게 정말 맞는 말인지 고민하며 균열을 낸다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연대의 희미한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게 책의 결론이었다.

 

판타지를 낳는 세계의 변화가 없다면, 판타지를 못마땅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연애 버라이어티가 문제가 아니라, 연애 버라이어티가 비혼의 시대에 인기를 끄는 현실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가 있겠지. 신자유주의가 현실의 연애를 죽인 자리에, 연애 버라이어티가 피어난다면 우리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리에 얼마나 많은 핏자국들이 남아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다 사라지고 나면, 이제 누가 방송을 봐 줄까?

오학준 SBS PD PD저널 2022.12.16.

 

 

수준미달'의 청년들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은 반푼이 어른이다. 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용돈이나 받아내는 백수, 이혼한 뒤 떨어져 사는 딸에게 아버지 노릇도 못하고 궁상맞게 산다. 딸의 생일선물을 주겠답시고 오락실에서 인형뽑기에 열중하는 그의 철없는 모습은 딱 수준 미달의 애어른이다.

 

그럼 어른이란, 제대로 된 성인이란 대체 뭔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가정에 충실히 사는 것이야 말로 전통적 가치관에 입각한 성인 정규 코스’. 하지만 구직난에 시달리는 요즘 청년들은 직업 찾기부터 난관에 가로막혀 결혼은 한없이 미뤄지고, 내 집 마련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성인임을 증명하는 지표 획득은 한없이 지연된다.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의 책 <커밍업쇼트>는 취직도 결혼도 요원해진 미국의 노동 계급 청년들이 스스로가 성인이 됐다는 감각을 과연 어떻게 획득하는지에 관해 다룬다. 저자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인터뷰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자기 인생을 비슷한 방식으로 술회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성장했지만 끝내 극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과 불안한 심리를 다스릴 줄 아는 한층 성숙된 자아로 스스로를 변형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일종의 치유 서사의 관점으로 자아관을 확립한 점에 저자는 주목한다.

 

성인이 되는 관문 앞에서 좌절만을 맛본 노동 계급 청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의 불합리나 불평등, 차별 등을 탓하기 보다는 실패와 성공 모두 그저 개인의 책임일 뿐이라고 여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 한 끝에 철저히 개인주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혼자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은근한 자부심이며 자존감의 원천이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그들은 계급이라는 칸막이를 인지하지 못하기에 계급 안에서의 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뿐이다. 오징어게임에서 처절하게 보여준 각자도생의 세계, 약육강식의 논리야 말로 이들이 추종하는 세상의 룰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는 노동 현장에서 연대를 통해 권익을 지켜본 경험이 전무하다. 활발한 노조 활동으로 노동자 권익이 보호받던 50-60년대가 지나고 신자유주의, 글로벌 무역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 노동자 계급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만 갔다. <커밍업쇼트>에 등장하는 노동계급 청년들은 구직난 속에 저임금 단순 서비스직만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갈 뿐이다. 식당 서빙을 해서 근근히 먹고 살거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소득을 얻기 위해 파병 군인으로 입대를 한다. 취직에 도움도 안되는 대학 졸업장은 학자금 대출 청구서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들이 생애의 주요 관문의 문턱에서 이들이 경험한 좌절감, 사회 제도로부터 외면 받은 기억들이 오히려 나 자신의 능력만이 믿을 구석이라는 인식을 굳어지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으니까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발동되는 일종의 방어기제 본능이랄까.

 

문제는 이들이 자기 발전을 위한 고군분투에만 매달린 나머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불합리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오징어게임에서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누가 이 게임을 기획했는지, 공정하다는 게임이 왜 실은 미묘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의문을 갖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드라마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게임의 주최자가 성기훈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제서야 기훈은 자신들을 말로 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한다. 밟고 밟히는 게임의 아수라판으로부터 눈을 돌려 비로소 자신들을 지배해온 저 윗쪽의 조종자들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는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서 게임판을 만든 윗대가리를 찾으러 발걸음을 뗀다. 영웅적인 선택이다.

 

<커밍업쇼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도 일견 비슷한 면이 있다. 청년들의 경험과 변화를 쭉 술회하다가 결말부에서는 개인의 책임으로만 옭아매는 인식을 벗어나 사회구조와 제도의 문제로 치환하기를 넌지시 제안한다. 시선을 로부터 전체로 옮겨가라는 주문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게임이 되려면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제공되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금의 청년 세대가 능력주의와 개인주의를 맹신한다 하더라도 살아남은 한명에게만 모든 이익이 몰빵되는 오징어게임의 세계관이 현실에서까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일 아닌가. 우리에게는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으니까. https://blog.naver.com/tazimarinon/222559218729 21.11.5 마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