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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극한 식물의 세계

by 이성근 2022. 12. 18.

극한 식물의 세계 김진옥·소지현 지음 다른 펴냄 2022.09

 

김진옥 -이화여자대학교 생물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학예원구원, 성신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으며, 현재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식물분야 전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준박물관, 약령시 한의학박물관, 한독의약박물관, 한국숲해설가협회 등에서 식물수업을 진행하였다. 지은 책으로 식물이 좋아지는 식물책풀꽃이 좋아지는 풀꽃책(공저), 백두산 식물 길잡이(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열매종자(공역) 등이 있다.

소지현-이화여자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학사와 에코과학부 식물계통분류학 통합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재직중

 

목차

들어가며: 극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놀랍고도 신기한 식물의 세계

 

극한 식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까지

: 지구 달력

: 식물의 진화 여정

 

Chapter 1 크기 : 크거나 작거나

 

1 가장 큰 꽃 : 타이탄 아룸

전 세계가 기다리는 개화 이벤트

꽃가루받이를 위한 촘촘한 설계자

feat. 우리나라의 시체꽃 : 앉은부채

 

2 가장 큰 꽃 : 자이언트 라플레시아

오로지 꽃으로만 승부한다

비밀에 싸인 진화 과정

비운의 탐험가 데샹

 

3 가장 큰 키 : 레드우드

거신족의 숲

햇빛 경쟁에서의 승자

feat. 가장 덩치가 큰 나무 : 거삼나무

feat.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 은행나무

 

4 가장 작은 키 : 난쟁이버들

자신을 낮추어 이기는

돌연변이 자손을 위해

feat.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나무 : 암매

 

5 가장 큰 열매 : 잭프루트

뭉쳐야 크다

융합의 성과

feat. 가장 큰 열매 기네스 : 서양호박

feat. 가장 긴 솔방울 : 슈가 파인

 

6 가장 작은 크기 : 남개구리밥

진화된 미니멀리즘

극강의 미래 식물

세상에서 가장 큰 6퍼센트의 노력

 

7 가장 거대한 잎 : 라피아 레갈리스

환상 속 새의 깃털 같은

마지막 영광을 위하여

feat. 가장 큰 홑잎 : 아마존빅토리아수련

feat.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잎 : 가시연꽃

 

8 가장 긴 뿌리 : 호밀

대지의 여신 케레스의 선물

극한의 뿌리 시스템

뿌리는 식물의 뇌?

 

9 가장 작은 씨앗 : 난초

시작은 공생을 통해

먼지 같은 크기로 이룬 거대한 성공

feat. 바람을 타지 않는 난초 씨앗 : 바닐라

feat. 가장 큰 씨앗 : 코코 드 메르

 

 

Chapter 2 속도 : 빠르거나 느리거나

 

10 가장 빠르게 자라는 식물 : 죽순대

13층짜리 풀

일생일대의 꽃

feat. 가장 빠르게 자라는 나무 : 팔카타리아 몰루카나

 

11 가장 느리게 자라는 식물 : 변경주선인장

1센티미터가 되기까지 2

사막의 분주한 파수꾼

feat. 가장 느리게 자라는 나무 : 소철, 서양측백, 주목, 회양목

 

12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식물 : 뽕나무

마하의 속도로 날아가는 꽃가루

자연이 만든 초고속 투석기

feat. 두 번째로 빠르게 움직이는 식물 : 풀산딸나무

feat. 가장 빠르게 씨앗을 퍼트리는 식물 : 샌드박스

 

13 가장 느리게 피는 꽃 : 푸야 라이몬디

안데스산맥의 여왕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유전자

멸종과 재배

 

 

Chapter 3 : 강하거나 독하거나 교묘하거나

 

14 치명적인 독 : 피마자

암살과 테러의 씨

가장 치명적인 진드기

feat. 피마자의 아름다운 라이벌 : 홍두

 

15 위험한 나무 : 맨치닐

죽음의 나무

이구아나만 허용한 실수

생태학적 가치

 

16 날카로운 열매 : 악마의 발톱

악랄한 무임승차꾼

함께했던 매머드는 사라지고

통증을 억제하는 약

feat. 우리나라의 무임승차꾼 : 남가새

 

17 독한 털 : 짐피짐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자살식물

고드름 주사기

선택적 방어

feat. 우리나라의 짐피짐피 : 쐐기풀

 

18 놀라운 위장술 : 리토프스

살아 있는 돌

특별한 광합성

버첼의 남아프리카 탐험

feat. 인간 때문에 돌이 된 식물 : 사사패모

 

19 원대한 비행술 : 자바오이

자연이 만든 최고의 글라이더

정교한 설계자

feat. 속임수로 씨앗을 퍼뜨리는 사기꾼 : 케라토카리윰 아르겐테움

 

 

20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 : 교살자 무화과나무

어두운 숲의 제왕

천년의 사원을 움켜쥐다

feat.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식물 : 겨우살이

feat. 우리나라에서 가장 악랄한 기생식물 : 새삼

 

21 홀로 사는 힘 : 틸란드시아

착생식물 끝판왕

은회색의 마법사

 

 

Chapter 4 환경 : 지나치거나 열악하거나

 

22 극한의 메마름 : 야레타

사막의 생존 챔피언

돔의 비밀

아타카마 사막의 꽃밭

 

23 극한의 추위 : 이끼

2개의 극, 2퍼센트의 땅

남극대륙의 진정한 주인

초대륙의 증거

feat. 죽지 않는 부활초 : 바위손

 

24 극한의 땅 : 오히아 레후아

화산섬에 적응한 나무

진화의 다양성을 몸소 보여주다

feat. 하와이 제도의 수호신 : 은검초

 

25 극한의 양분 : 식충식물

질소가 부족할 때

습지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존 방식

 

26 극한의 물 : 거머리말

바다로 돌아간 식물

기공도 보호막도 버리고

feat. 물속에 잠긴 식물 : 수생식물

 

27 극한의 열기 : 유칼립투스

산불을 지르는 나무

불은 해방자였다

 

 

Chapter 5 시간 : 오래되거나 최신이거나

 

28 가장 오래 사는 나무 : 브리슬콘소나무

신과 함께

5,000년의 기록 보관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 : 향나무

 

29 가장 오래된 겉씨식물 : 소철

살아 있는 화석

부활의 왕

쇠로 깨어난다

feat. 선택받은 행운아 : 은행나무

 

30 가장 오래 사는 잎 : 웰위치아

2,000년간 시들지 않는 잎사귀

6미터짜리 자라나는 손톱

경이로운 잎

 

31 가장 오래된 꽃 : 암보렐라

지독한 미스터리

화석에 담긴 발자취

고유종의 천국, 뉴칼레도니아

속씨식물의 조상과 가장 가까운 친척

 

나가며: 앞으로의 여정

 

출판사 서평

46억 년 지구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극한 식물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미친 적응력

 

식물은 지구에서 나타난 이후로 끊임없이 진화했습니다. 축축한 이끼식물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 후 화려한 꽃을 피워내는 속씨식물까지, 차례로 새로운 형태를 출현시키며 길고 긴 진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책은 그 진화의 여정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선한, 가장 충격적인,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컷 한 컷 보여주고 들려주는 자연사 도슨트입니다.

이 책에는 크기, 속도, , 환경, 시간을 주제로 하여 총 31종의 극한 식물들이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외국의 낯설고 신기한 식물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사는 친숙한 식물들도 주조연으로 등장해 반가움을 줍니다.

 

우리나라에도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앉은부채입니다. 앉은부채의 영어 이름은 재미있게도 스컹크 양배추skunk cabage입니다. 과연 무얼 닮았고, 그 냄새가 어떨지 짐작이 되죠. 앉은부채도 자신의 냄새를 멀리 퍼뜨리기 위해 열을 내뿜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끝나는 이른 봄에 피워내는 앉은부채의 꽃은 때아닌 눈이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로 눈을 녹여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_39

 

“‘돌에 피는 매화라는 뜻의 암매는 난쟁이버들과 막상막하를 이루며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나무에 속합니다. (……)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피할 곳이 없는 백록담의 바위 위에 살기 위해서 암매는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기를 빽빽하게 얽히게 해 전체 모습을 방석처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꽉 껴안고 있어야 추위와 바람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_62~63

 

 

극한 식물들이 들려주는

- 99퍼센트를 잃어도 극적으로 부활하는 경이로운 투지

- 육식을 하고, 산불을 부추기며, 원자폭탄도 견디는 상식 밖 한계

-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정확히 알고 끊임없이 적용하는 끈기

 

극한 식물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식물의 삶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역동적이며 치열합니다. 다만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식물 역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진화를 이루어낸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물종은 세대를 거치며 다양한 돌연변이를 내놓았고, 주어진 환경에 잘 살아남은 돌연변이가 자손을 퍼트리며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을 뿐입니다. 결국 환경은 종의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곳에서까지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싶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버티며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극한 식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리토프스속 식물들은 지구에서 1년 내내 비가 가장 적게 오는 곳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의 돌밭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건조의 땅에서 포식자의 눈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몸 전체를 돌처럼 보이게 진화한 식물인 것이죠.” _204

 

영국의 과학자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최소 1,530년 동안 빙하 아래에 잠들어 있던 이끼가 휴면을 깨고 살아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무려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남극 이끼는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식물입니다.” _265

 

오늘날 우리의 환경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환경은 모든 생물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게 될까요? 그 길이 진화의 길이 될지, 멸종의 길이 될지 모르나 쉽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자명합니다. 우리가 식물의 진화 여정과 그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보고 배울 수 있는 점은 분명 많을 것입니다.

 

책 속으로

첫 문장: 식물은 참으로 경이로운 생물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이언트 라플레시아의 최대 크기는 지름 1.1m이며, 무게는 11kg이라고 합니다. 이 꽃은 양배추처럼 생긴 꽃봉오리에서 피어나는데, 이 꽃봉오리만 해도 지름이 최대 43cm나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꽃을 피우는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독특하게도 잎도, 줄기도, 심지어 뿌리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땅바닥에서 거대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게 전부입니다. 이런 상태로 꽃을 피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을 말이죠.--- p.43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땅에 바짝 엎드려 살아간다고 해도 북극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추위와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나 두꺼운 옷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환경이기에 그곳의 생물들에게는 경쟁할 상대가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거기서 사는 것에 적응만 한다면 드넓은 평야가 다 내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곳도 없습니다. 물론 난쟁이버들이 그 이름을 갖기까지 수많은 형제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처한 환경에 맞서서 살아남은 개체들만이 난쟁이버들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경쟁 상대와의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을 해오고 있는 것이죠.--- pp.60~61

 

호밀 4개체가 만들어내는 뿌리털은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습니다. 물론 뿌리털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지만, 적어도 그 길이만큼은 가히 극한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p.95

 

난초는 씨앗을 최대한 작고 가볍게 그리고 많이 만들기 위해 배젖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배젖을 대신할 균류와 손을 잡았죠. 자원이 무한하다면 배젖이 풍부한 씨앗을, 그것도 많이 만들면 좋겠지만 환경이 그렇지 못하니 든든한 균류와의 공조를 통해 배젖이 없는 씨앗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전략은 난초과가 거느린 종의 숫자가 말해주듯 대성공이었습니다.--- p.104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주는 식물이기에 짐피짐피와 얽힌 일화는 꽤 많습니다. (……) 2차 세계대전 때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인이었던 브롬리라는 사람이 군사 훈련 도중 짐피짐피 나무 위로 넘어져 3주 동안이나 병원 침대에 묶여 있었던 사건도 있습니다. 브롬리가 묶여 있던 이유는 그가 고통 속에 몸통이 잘린 뱀처럼 몸부림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브롬리는 자신이 알던 한 장교가 볼일을 본 후 짐피짐피의 넓은 잎으로 엉덩이를 닦았다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p.194

 

우리가 바닷가에서 만났던 원시적인 모습의 거머리말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정확히 알고 그에 맞게 적응해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지에 살던 포유류가 바다로 돌아가 고래가 되었던 것처럼, 바다로 돌아간 속씨식물은 해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끼식물에서 시작된 육상으로의 진출을 과감히 접고 식물의 시조가 살았던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이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해초는 식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바다라는 새로운 서식지를 개척했습니다.--- p.296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의 식물들은 산불을 번식의 기회로 만들어 살아가는 방법을 진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처럼 산불을 이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마치 산불이 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 중에서 가장 산불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식물은 바로 코알라가 즐겨 먹는 잎을 가진 유칼립투스입니다.--- p.304

 

세상에 무력한식물은 없다

한성원 그림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잠은 벌써 깼지만 눈은 뜨고 싶지 않은,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하기가 싫어지는 계절, 겨울이다. 어릴 적 첫새벽에 일어나 연탄불을 가는 어머니를 보며 어른이 되면 날씨나 계절 따위엔 끄덕 않는 줄 알았다. 아니더라. 나이를 먹을수록 날씨와 계절에 민감해진다. 비가 오면 몸이 처지고 해가 짧아지면 마음이 먼저 어두워진다. 애면글면 살면 뭐 하나 한숨짓는데, 경고음이 들린다. 조심해, 경험이 말한다. 우울에게 한번 곁을 주면 그다음엔 손쓰기 어렵다. 가라앉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일부러 산길을 돌아 도서관에 간다. 아직 남은 단풍들에 눈길을 주며 천천히 걷는다. 지금은 검은 활자를 읽을 때가 아니다. 노랑과 주홍, 자주와 붉음을 마음에 담을 때다. 타오르는 이 색들을 마음의 갈피에 갈무리한다. 오는 겨울의 침울에 맞설 내 고운 방패들.

 

어디 나만 그러겠는가. 책이 안 팔려 걱정인 제주의 책방지기는 야생의 위로를 읽으면서 우울감을 떨치고 있단다. 그의 처방이 내게도 통하길 바라며 책을 펼친다. 25년이나 우울증을 앓아온 박물학자 에마 미첼이 자연에서 얻은 위안을 소박한 그림과 함께 담담히 적었다. 머리말을 읽는데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인생이 한없이 힘들게 느껴지고 찐득거리는 고통의 덩어리에 두들겨 맞아 슬퍼지는 날이면, 초목이 무성한 장소와 그 안의 새 한 마리가 기분을 바꿔주고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다.”

 

정말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긴다. 책은 낙엽이 땅을 덮는” 10월에서 시작해 햇빛이 희미해지고 모든 색채가 흐려지는” 11월로 이어진다. 나는 완전한 겨울이 오기 전 색채를 탐색하는 미첼의 심정에 공감한다. 어둠이 길어지는 겨울 앞에서 그가 개암나무 꽃차례 같은 사소하고 미세한 지표들에 설레며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고, “밤은 짧아질 것이며 내 생각들도 다시금 밝아지고 가벼워지리라고 쓸 때, 나는 그 안간힘에 고개를 끄덕인다. 희망 없이 어찌 살겠는가? 그것이 아무리 작고 무력한 식물의 흔적일지라도.

 

그러나 무력한식물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비록 사나운 불길이나 무자비한 전기톱을 피해 달아나진 못하지만, 그래서 생명력을 잃은 무기력한 존재를 두고 식물인간이니 식물국회니 말들 하지만, 그건 식물의 강인함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식물이 얼마나 강한지는 잡초를 뽑아보면 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울화가 턱밑까지 치밀면 회사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다. 아무리 뽑아도 풀은 늘 넘치게 많아서 분노는 이내 힘을 잃었고 나는 수굿해져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때 알았다. 식물에게는 분노를 다스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음을. 한데 식물학자 김진옥과 소지현이 쓴 극한 식물의 세계를 보니 식물에겐 이것 말고도 아주 많은 극한의 힘이 있다.

 

일단 식물은 46600만 년 전부터 생존해온 엄청나게 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다.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끽해야 600만 살에 불과한 인류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 식물 전체만이 아니라 개별 식물의 생명력도 놀라운데, 수령 5000년이 넘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2000년간 시들지 않는 잎새도 있다. 한자리에 붙박인 식물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쩜 이리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비밀은 다양성이다.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크기만 봐도,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차이가 극과 극이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레드우드 나무는 높이 116m나 되고, 현존하는 가장 큰 생물로 알려진 거삼나무는 무게가 1121t에 달한다. 반면 가장 작은 나무인 난쟁이버들은 1~6밖에 안 된다. 북극에 사는 난쟁이버들은 매서운 바람을 피해 땅에 납작 엎드려 살면서 번식에 공을 들인다.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돌연변이가 많이 일어나야 하므로 줄기 번식만이 아니라 씨앗 번식까지 해서 더 멀리 다양한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다.

 

 

씨앗 번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정답은 난초다. 최소 0.1, 커봐야 6. 꽃이 아름다워 비싸게 팔리고 때론 산에서 파 가는 이들 탓에 수난을 겪는데, 가져온 난초가 잘사는 일은 드물다. 이유는 난초의 공생관계 때문으로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시압.

 

놀라운 건 이 모든 극한의 존재 방식에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식물 중에는 자신을 지키려 독을 품은 것들이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열대우림에 사는 짐피짐피가 대표적이다. 이 나무는 닿기만 해도 고통에 못 이겨 자살한다고 해서 자살식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방어기제는 뭇 동물의 접근을 막아 번식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함께 살던 동물들은 면역이 돼 있기 때문이다.

 

독하다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중앙아메리카 연안에 사는 맨치닐 나무는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비 오는 날 그 아래 서 있으면 온몸에 수포가 생기고 자동차의 도색이 벗겨지며, 나무 타는 연기만 마셔도 후두염이 생기고 눈이 안 보일 정도다. 그래서 한때 플로리다에선 대대적인 맨치닐 제거 작업을 벌였으나 지금은 멸종위기종으로 보호하고 있다. 맨치닐이 해안 침식을 막고 여러 풍토병에 효험이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쐐기풀 역시 찔리면 통증이 며칠씩 이어지는 독풀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천연섬유로, 영양 좋은 식재료이자 항염증제로 널리 쓰였으니,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쐐기풀의 쓸모를 역설하며 세상에 나쁜 식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과연 자세히 보면 예쁘고 잘 알면 사랑스럽다.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제가 모르고 제 맘에 안 들면 무조건 나쁘다 하는 못된 심보만 빼고.

시사인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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