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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쉬운 詩 좋은 詩

추석 무렵

by 이성근 2018. 9. 21.

추석 전야, 어머니 김영재

추석 - 유자효

우리집 / 이해인

그날 봉양(奉恙) 박봉진

추석 무렵 -안정환

秋夕 - 한 하 운

추석날 -홍신선

추석 아침에 전 병 철

추석 유 한 나

추석달빛 - 서지월

추석에 고향 가는 길 - 용혜원

추석 무렵/ 맹문재



추석 전야, 어머니 김영재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밤기차가 지나간다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다

 

내 설움,

여기쯤에서 그만둘 걸 그랬다

―『유심(2004. 5)


 

추석 -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 추석이구나


 

우리집 / 이해인


우리집 이라는 말에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집에 놀러 오세요!" 라는 말은

음악처럼 즐겁다

멀리 밖에 나와

우리집을 바라보면

잠시 낯설다가

오래 그리운 마음

가족들과 함께한 웃음과 눈물

서로 못마땅해서 언성을 높이던

부끄러운 순간까지 그리워

눈물 글썽이는 마음

그래서 집은 고향이 되나 보다

헤어지고 싶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금방 보고 싶은 사람들

주고받은 상처를

서로 다시 위로하며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다

따뜻한 눈길로 하나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문을 열어 반기는

우리집 우리집

우리집이라는 말에선

늘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고마움 가득한

송진 향기가 난다

 

그날 봉양(奉恙) 박봉진

 

추석상에 차렸던 해물찜 모아 전자레인지 돌리려는데 당신은 작동법을 잊었다 하신다 타이밍 맞춰 작동시키고 보니 병치며 상어며 부피 큰 것들 위에 얹혀있는 때깔없는 굴비, 유난히 좋아했던 나에게 알밴 통통한 굴비 구워 머리 꼬리 떼고 발라주시던 당신, 이제 중국산 굴비처럼 푹 꺼져 있네요 배통구리 빵빵한 노오란 굴비 머리떼고 꼬리 떼고 알집 따로 발라내어 밥술위에 얹어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중국산이라지만 젓갈감밖에 안 되는 황사리만 한 조기, 몇 십년 동안 실한 굴비 한 두름 엮지 못한 작은 손 어줍다

 

종료 알리는 레인지 신호음에 바라보니 검푸른 수족관 속, 칠산 앞바다 푸른 물에서 파닥거리던 살찐 조기 누워 있다

인자 고만 되야써, 조구 참말로 맛있네 아범도 먹어

반백 자식이 처음으로 당신께 해드리는 음식, 머리 떼고 꼬리 떼고 살 발라서 어머니 수저에 올려드린 눈믈,

너무 짜지요?”

 

 

추석 무렵 -안정환

 

고향 선산 계신

조부님 이발은

시골 당숙이 해드리고,

 

대전 국립묘지 계신

아버님 이발은

나라에서 해드린다.

 

내 머리는 늘

동네 목욕탕에서

이발사 조씨가 깍아 주고,

 

막내 녀석 이발료는

고지서로 날아 왔다.

망월동 묘지 관리소에서


 

秋夕 - 한 하 운

 

추석 달은 밝은데

 

갈대꽃 위에

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

 

추석 달은 밝은데

내 조상에

문둥이 장손은 다례도 없다.

 

추석 달

추석 달

어처구니 없는 8월 한가위

밝은 달이다.

 

 

추석날 -홍신선


추석엔 다 내려왔다. 어디선가 기별도 없이 못 오는 아우

오는 길도 기다림도 다 치우고

고만고만 쭈그리고 앉아 큰방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눈이 작아 겁이 없던 아우를

깊은 어둠 속에 잘 숨던 그를

이야기하고 불편하나 한결 같은 오()와 열(), 한결 같은

무언(無言)

키 맞추고 있는 이 고장 논들도 이야기하고.

마루에는 종가의 늙은 형이 젯삿을 보고 다.

깎아서 문중처럼 괴인 사과, , , 식혜, 산적……

우리는 개기(開器)에 앞서 서로의 형편 갈라서

시저 구르고 엎드렸다.

숙이면 들리지 않는, 웬지 과거뿐인 큰절.

()을 읽고

아헌과 종헌을 끝냈다.

 

마당가의 대추나무가

까치집 하나로

가슴이 다 헐려 있다.

잘 살겠다던, 외장(外場)으로나 떠돌던 젊은 날도

허옇게 마른 벼이삭 몇으로 꺾이고

사촌형들은

바짝바짝 집쪽으로만 등 들이미는 텃논들로

뜻없음을 만들어 살고 있다.

 

음복술에 취해 우리는 산을

가까운 선산을 돌았다.

성미 빠른 밤나무들이 아랫도리를 벗어던진 채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 밤가시에 찔린 공기들이

딱딱 입 벌랜 채 소리없이 소리 지르고 있다

(기침해. 발소리 좀 울려, 너무 무기력뿐이야.)

 

산소 몇 군데

남양홍공지묘(南陽洪公之墓)

편안하게 끝이 나 있는 이들.

얼마를 더 걸어가야 끝이 나는가.

떠돌던 가이없음, 떠돌던 비겁함이

끝나서 이렇게 임야 몇 평으로 돌아오는가.

 

돌아오며

우리는 떠날 일을 생각했다.

낮 세 시 차에 수원의 형이

출가한 누이가 떠났다.

동네 하늘을 제 몫으로 나누어 가지고

떠도는 밀잠자리들.

추석이었다.

 

 

추석 아침에 전 병 철

 

정성 드려 차려진 차례상 앞에 나란히 모여 선다

향연(香煙)은 살아 오르듯 몸을 빌빌 꼬며

방안 가득 그의 존재로 메우는데

 

오늘 아침에는

예전에 없던 까치 떼들 몰려와

뭔가 전해 주고픈 소식이 있는지 주위를 울리며

열심히 울어대고 있다

 

조상님네들도

오늘은 까치의 안내 받아 오시려고

미리 까치 보내어 아침 일찍 통보해 주기 위해

그렇게 울게 했나 보다

 

깍 깍 깍깍 깍.

 

 

추석 유 한 나

 

하늘엔 보름달 떠도

가슴엔 쪽박 뜨는

사람 왜 없겠습니까

 

밤송이 툭툭 터지고 가을에 쫓긴 감

처녀 가슴처럼 부풀어 올라도

푹푹 꺼져가는 사람 왜 없겠습니다

 

그래도 송편 빚듯

꼭꼭 눌러 여민 곱게 빚은 마음으로

보름달 맞아야지요

한가위 잘 지내야지요


 

 

추석달빛 - 서지월

 

옥수숫대 알품는 서늘한

바람끼의 하늘 보면

저 달도 저리 밝아

玉童子라도 하나 품은 것일까

 

묘지 위의 혼들은 구천에 떠돌고

산 자의 옷자락은 이리도

부드럽고 가벼운데

옛기러기는 날아오지 않는다.

 

강은 흐르건만 산이 막혀 못오는가

들꽃처럼 돋아나는 별을 따고

긴 능선의 역사 앞에서

주름진 이마 잘룩한 허리의 강토.....

 

달이여 비추이거든

우리 가장 깊은 골짜기를 비추어

南北江山 할것 없이 저 목메인 만주땅

압록강 너머 길림 두만강 너머 연변

그리고 있잖은가, 해란강 띠를 두른

일송정에도 비추어다오!

 

옥수숫대 알품는 서늘한 바람끼의

하늘 위에

혼령은 살아 있어

색동 치마저고리 흰 바지적삼의

펄펄펄 날리는 달빛이 숨쉬고 있네.


 

추석 무렵 -류제희

 

읍내 장터에 간다.

햇곡식 서너 말() 싣고

 

여름내

푸념처럼 자라난 머리칼도 자르고

알록달록 네살바기 추석비슴 손에 들려

돌아오는 길

 

물봉선 꽃더미 속에서

식구들의 그림자가 가벼워졌다.

노을도 가깝게 내려오는 시간

 

경운기 짐칸에 매달려 앉은

임씨네 세 모녀

알밤같이 야물어 보이는, 오늘



추석에 고향 가는 길 - 용혜원

 

늘 그립고 늘 보고픈 고향

둥근 달덩이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추석이 다가오면

발길이 가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어린 날 꿈이 가득한 곳

언제나 사랑을 주려고만 하시는 부모님

한 둥지 사랑으로 함께하는 형제자매

학교 마당, 마을 어귀, 골목길, 냇물가, 동산 어디든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모두 다 보고 싶습니다

 

점점 나이 들어가시며 주름살이

많아지신 어머님, 아버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추석 명절 고향길엔

부모님께 드리고픈 마음의 선물 있습니다

추석 명절 고향 가는 길엔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 민족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추석 명절 고향가는 길엔

추석에 뜨는 달만큼이나 환한

가족들의 행복이 가득해져 옵니다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박했다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 인사 같았고

떡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았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편안한 나의 사투리에도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 이자에 쫓기지 않았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태운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고

우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았다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For The Last Time - Rory Gallag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