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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쉬운 詩 좋은 詩

반전 반핵문학의 선구, 잊혀진 시인 신동문 -내 노동으로

by 이성근 2015. 2. 12.

 

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 월간 <현대문학> 196712월호

 

 

이런 시인이 있는 줄 몰랐다. 살펴보니 주관대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웹상에 전해지는 그의 이야기와 시들을 모아 보았다.  신동문 시인을 소개 해 준 그 분께 감사드린다.  잊혀진 시인으로 소개되었지만 다행 근래 청주에서 신동문문학제가  2013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신동문 (1928.7.20 ~ 1993.9.29.) 충북 청주시 출생. 서울대학 문리대 중퇴하고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1956)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수정화병에 꽂힌 현대시(1957) 조건사초(條件史抄)(1958) 무제(無題)(1959) 등의 현실의식과 저항적인 경향의 역작을 발표하고 제1시집 풍선과 제3포복(1956)을 간행했으며, 1회 충북문화상을 받았다. 1965년 군사정권의 민정이양이 실현되지 않자 잘못된 시대에 맞서 홍경래는 혁명을 일으켰는데, 잘못된 혁명정권 아래서 시나 쓰고 바둑이나 두고 있는 자신이 밉다며 시 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했다. 충북 단양으로 내려가 야산을 개간, 사과와 포도농장을 경영하면서 독학으로 익힌 침술로 하루 30여 명씩 인술을 펴왔다. 췌장암으로 타계한 그의 다른 장기(臟器)들은 유언에 따라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 기증되었다.

 

시인의 일생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30대 초반까지 청주에서의 젊은 시절, 문학과 출판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서울 시절, 그리고 단양으로 귀농한 이후의 시절이다. 중심이 되는 건 역시 단양에서 농민들과 함께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일찍부터 귀농을 꿈을 갖고 30대 중반께 단양 수양개에 야산을 사 두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개간해서 2만 평의 과수원을 만들고 사과와 포도나무 5천 그루를 심었다. 이런 준비 끝에 1975, 시인의 나이 48세 때 완전 귀농을 한 것이다. 지금은 귀농이나 귀촌이 일반화가 되었지만, 당시에 귀농은 세상과 역행하는 길이었다.

 

                                                      귀농 후 시인이 살았던   충북 단양  애곡리 수양개 농장

 

시인은 생각보다 시를 많이 쓰지 않았다. 1967년에 쓴 '내 노동으로'가 마지막 시였는데 마흔에 이미 시 쓰기를 그만둔 셈이었다.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한 삶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한 은둔, 절필에 대해 시인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평전을 읽어 보면 그런 말이 상당한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시인은 독학으로 배운 침술로 단양의 주민들에게 봉사했다. 나중에는 침술가로 더 유명해졌다. 노동과 몸을 중시하는 삶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구조적인 부조리에 맞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복되게 살아가는 꿈을 꾸고 실천한 사람이 신동문 시인이다. 시인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의 삶으로 그 꿈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농민들과 함께하는 자립 공동체는 충주댐이 건설되고 마을이 수몰되면서 포기했고, 나중에 예술창작마을에 대한 꿈도 담도암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꿈이 성취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거짓이고 그 세계의 가치가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될 때 지식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 답 중 하나를 시인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은이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시인은 존재가 말에 의해 구속 당하게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하루하루 정직하게 살아갈 때, 말이 그 정직함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가능성은 날로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게 한 근본 이유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한 말이나 글보다는 실제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중시한 것이다. 시인의 말을 들어본다.

 

"말의 힘이 삶의 힘보다 커졌어. 이제 말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거대한 권력이 되었어. 오래전에는 말의 힘이란 것이 육성이 도달하는 거리까지로 제한되어 있었을 테지. 이젠 말이 육성이나 입소문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어. 활자나 전파나 통신이 얼마나 빠르게 진화했는가. 그래서 말은 더 이상 개인의 진정성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게 됐어. 요즘의 말에는 개성이나 인간성이 좀처럼 엿보이지 않아. 여론이라는 게 뭔가. 말이 활자와 전파와 통신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갖게 된 것이야. 거기에는 균일화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문만 무성할 뿐이야. 또 그 소문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퍼뜨려지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성을 배려하지 않아. 삶은 말의 권력화에 의해 무기력해지고 있어. 말이 진화할수록 존재는 퇴화해."

 

이것은 1992년에 한 시인의 말이다. 지금은 상황이 그때보다 더 심각해졌다. 삶이 말에 억눌린 상태는 독재와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 더 무섭다. 시인이 단양의 외딴 곳으로 이주해온 것은 말 대신 존재를 찾으려는 뜻이었다. 그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노동과 침술에서 찾았다. 그러나 바깥 세계는 그의 뜻대로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병이 마지막으로 시인을 무너뜨렸다.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은둔하였다. 애곡리에서 그는 주민들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며 침술을 배워 무료로 시술해 주민들로부터 신()바이처라 불렸다

 

출처: http://blog.naver.com/kps3162/100175398673 (정향나무 정원)

 

죽어간 사람아, 六月

 

죽어간 사람아,

죽어간 친구야,

우리는 이렇게

십년을 더 살았다네.

저기 저, 강과 들

그리고 산과 나무는

봄이 되면 다시 솟곤

또 솟곤해서

예처럼 푸르지만,

"어머니!" 마지막 한마디도

다 못하고 숨지는 네 손을

가슴에다 부비던 내 머리 위로

스쳐가던 빨간 曳光彈,

아름답도록 처절하던

非情의 그 순간은

아직도 그날처럼 아릿한데,

십년을 뭐라고

우리는 살아 있다네

죽어간 친구야,

죽어간 사람아 (미공개작)

 

 

!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

4·19의 한낮에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 남 북 /거리 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쥔 채 /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 신화(神話)같이 / 나타난 다비데군()

 

혼자서만 야망(野望) 태우는 /목동(牧童)이 아니었다

열씩 백씩 천씩 만씩 / 어깨 맞잡고 팔짱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 새로운 신화 같은 / 젊은 다비데군들

 

고리아테 아닌 /거인 살인 전제(殺人專制) 바리케이트

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 /무차별 총구 앞에

빈 몸에 맨주먹 돌알로서 대결하는 / ! 신화같이 기이한 다비데군들

 

빗살 치는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앞에 /돌 돌 돌 돌 돌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 피비린 정오의 /포도(鋪道)에 포복(匍匐)하며

! 신화같이 / 육박하는 다비데군들

 

제마다의 가슴 /젊은 염통을 전체의 방패삼아 /과녁(貫革)으로 내밀며

쓰러지고 쌓이면서 /한 발씩 다가가는

! 신화같이 용맹한 다비데군들

 

충천하는 아우성 /혀를 깨문 안간힘의 /요동치는 근육 뒤틀리는 사지

약동하는 육체 /조형(造型)의 극치를 이루며

! 신화같이 싸우는 다비데군들

 

마지막 발악하는 /총구의 몸부림 /광무(狂舞)하는 칼날에도

일사불란 해일처럼 해일처럼 /밀고 가는 스크램

승리의 기()를 꽂을 /()의 심장 위소(危所)를 향하여

!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내흔드는 깃발은 /쓰러진 전우의 피묻은 옷자락

허영도 멋도 아닌 /목숨의 대가(代價)/절규로 내흔들며

! 신화같이 /승리할 다비데군들

 

멍든 가슴을 풀라 피맺힌 마음을 풀라

막혔던 숨통을 풀라 /포박된 정신을 풀라고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고 이기라 /이기라 이기라고

 

! 다비데여 다비데들이여

승리하는 다비데여 /싸우는 다비데여 / 쓰러진 다비데여

누가 우는가 너희들을 너희들을 /누가 우는가

눈물 아닌 핏방울로 /누가 우는가 /역사(歷史)가 우는가 /세계(世界)가 우는가

()이 우는가 / 우리도 아! 신화같이 /우리도 운다.(월간 사상19606월호)

 

 

 

춘곤(春困)

 

창 앞에서 기다리는 바깥 사람과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앉은뱅이의 더구나 그 처녀의 가슴에서 타는 아쉬운 그리움같이 어긋난 봄이여 사월이여 사월에 기다리던 우리들의 기대여 기다리는 살갗에 와닿는 감각은 그 옛날 어느 봄의 잔디밭에 누워서 사치하게 헤어보던 한숨도 아니고 네 창 앞에 멈춘 발로 기도처럼 섰었던 어린 날의 사랑도 꿈도 아니고 더더구나 먼 산과 마주 앉아서 개연히 끄덕이는 보람도 아니고 이렇게 시름시름 몸살을 앓듯 못 견디게 못 견디게 심심한 하루 하루 해를 종일토록 못 갖고 마는 앗뜩한 나의 부재 주인 없는 나.

없는 것을 진종일 갖고 있으면 산 너머 너머 아득히 갔다간 물러서 돌아오는 행복의 노래 노래라도 있으면 미치는 극약같이 대자꾸 마시어 흥얼대면서 온 세상이 빙빙 돌게 어지러운 어지러운 그런 현실이나 갖지만 없는 걸 아무것도 봄도 나도 오늘도 슬픈 궤도도 더더구나 인공위성 운석하고 충돌하는 사건도 기적도 천재도 없는 걸 사월이여 봄이여 기다리는 위장이여 죽은 음모여.-  19615<사상계>

 

 

그는 출판계에 종사하며 여러 양서를 냈지만, 정작 생전에 낸 자신의 시집은 1956년 청주에서 한정판으로 찍어낸 '풍선과 제3포복'이 유일하다. 그는 시집을 내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괜히 쓰레기만 만들어낼 뿐"이라며 듣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시집을 많이 내지 않았다는 것, 시를 그다지 많이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 이른 나이(48)에 서울과 문단을 떠나 농촌으로 이주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결백한 성격/ 시를 쓰지 않거나 시집을 내지 않은 까닭에 대해 "완전하지 않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서울과 문단을 떠난 까닭에 대해서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와 고문을 받아, 모종의 각서를 썼기 때문'이며 이것을 부끄러워해 농촌으로 숨어버렸다는 소문이 돎.

 

-그는 삶에서 두 가지와 깊은 악연을 맺음. 중앙정보부와 다목적댐. 박정희 정권 당시 필화로 세 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 일은 그에게 깊은 수치심과 고통을 안겼다. 자신이 태어난 산덕리는 대청다목적댐이 들어서는 바람에 마을의 절반 가량이 수장됐다. 또 인생 후반부를 보낸 수양개 마을이 충주다목적댐에 고스란히 수몰되었다. 댐은 그에게 고향,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꿈마저 앗아갔다.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일할때 쌀값이 폭등하자 북한의 쌀이라도 수입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때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것이 절필 이유다. 각서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각서를 썼다는 자괴감이 글을 쓸 수 없게 한 것이다. 강요에 의한 각서라서 지키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그는 각서를 자책하며 붓을 꺾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의 완벽주의와 결벽증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시고 산문이고 번역이고 완벽하게 해낼 수 없으면 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후 창작과 비평사 대표를 맡아 일하다가 1975년, '창작과 비평' 36호에 평론가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을 게재한 필화사건으로 다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을 받고나와 곧 퇴사한다. 그는 단양 애곡리 수양개 마을에 마련해 뒀던 임야를 개간해서 자신의 농장을 만들고 사과와 포도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고 젖소를 길렀다." -김윤배 시인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로 당선되던  스물아홉  그 해, 그는 충북 청주에서 500권의 한정판으로 처음이자 미지막 시집을 펴냈다. '풍선과 제3포폭'이다. ,,," 두 편의 장편 산문체 연작시로 채워졌는데, 그 하나가 풍선기이고 다른 하나는 3포복(第三匍匐)’이다. 둘 다 그가 6·25 전쟁 때 공군 병사로 근무하면서 지은 것이다. 그는 공군 비행장에서 기상조건이 전투기 이착륙에 적합한지를 관측하기 위해 하늘로 풍선을 날리는 임무를 맡았다. 비행장, 그 허허로운 벌판에서 매일 풍선을 띄우면서 전쟁의 비정함을 느꼈고, 그 심정이 풍선기3포복이 되었다. 다음은 3포복의 제4식욕의 일부다.

 

네바다의 무변사장(無邊砂場)과 태평양상의 환초고도(環礁孤島), 그리하여 우랄 동북방의 불모 평원에 인명 피해만은 피했노라고 증인처럼 열 겹으로 그어놓은 동그라미 표적, 그 중심에서 솟아나는 버섯형 오색구름을 손뼉치며 향락하는 동과 서. 또 너와 나의 동자에 핏발 선 광기-그 발광한 이빨로 우리는 문화를 먹어버렸습니다. 역사를 삼켜버렸습니다. 철학을 먹어버렸습니다. 과학을 삼켜버렸습니다. 예수와 석가를 먹어버렸습니다. ···(중략)··· 이제는 내가 나를 잡아먹어 버려야겠습니다. 날계란 노른자를 날름 들이마시듯 그렇게 내가 나를 먹고 나서도 거기 동혈(洞穴)처럼 벌리고 남을 아가리. 그 엄청난 아가리의 끝없는 식욕을 믿어보십시오.

 

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냉전시대까지 미국과 당시의 소련, 그리고 중국은 앞 다투어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폭발 실험을 했다. 미국은 본토인 네바다 사막과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소련은 카자흐스탄의 오지 협곡에서, 중국은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제각기 핵실험을 했다. 신동문은 그 때의 광분을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동혈’ ‘아가리’ ‘식욕은 핵실험을 벌이는 과학기술 문명의 부도덕과 탐욕을 은유한다. 인간은 과학기술 문명의 진수라 좋아하며 핵무기를 만들고 있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곧 광기이다.

 

신동문은 먼 외국의 핵실험을 반핵의 모티프로 삼았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핵무기나 핵발전소가 없었다. 3포복은 첫 장부터 마지막 제4장까지 일관되고 또 선명히 전쟁의 공포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반전시이면서 반핵시이다. 이 시의 제1한계는 있어도도 반전반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

 

간단없는 섬광, 전광, 폭광의 오로라 같은 조명 아래 작열하는 초토 위에서 모던 발레처럼 전개되는 제1포복, 이어 제2포복, 그리하여 다급히 제3포복으로 자세는 절박되어갔다. ···(중략)··· 단위 전원은 성대가 퇴화된 채 순수한 개체로서 절규하고 있었다. ···(중략)··· 3포복의 행동권은 끝내 마비된 나의 생리의 주변이었고, 해역으로는 비키니 나무도() 방사능운()의 후유증으로만 제한되었고, 육로로는 나의 폐세포가 산소대사반응을 잃은 육질상태로서 토탈리즘 과목근의 비료원으로만 추산되어갔다.

 

화자인 는 전시의 병사로서, 쉼 없는 폭격의 빛에 훤히 노출되어 있다. 생사를 가르는 그 다급한 전투상황에서 땅에 엎드린 채 기어간다. 포복은 갈수록 힘겨워진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단계의 포복에서는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 순간 의 행동권은 고작 몸이 생리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한정될 뿐이다. 그 처지는 방사능 구름에 병들어 죽어가는 비키니 섬의 나무이거나, 생명의 기능을 상실한 채 과일나무의 비료로 쓰이는 거름과 다를 바 없다.

이 대목은 인간이 전쟁터에서 겪는 공포를 말하고 있다. 미국의 핵실험으로 초토화되고, 방사능 오염에 병들거나 죽어가는 비키니 섬의 나무가 전쟁의 공포를 전달하는 소도구로 쓰였다.

 

사실 유럽이나 미국에 비하면 국내의 반전반핵 운동은 그 역사가 길지 않다. 돌이켜보면, 국내의 반전반핵 운동은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반전반핵 양키 고홈구호와, ‘반전반핵가노래로 상징되는 대학가 시위에서 반핵운동은 태동했다. 당시 주한미군이 남한에서 핵무기(전술핵)를 보유하고 있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주한미군 핵무기가 선언적으로 철거된 것은 한반도 비핵화선언 및 남북한 비핵화합의가 있었던 1991년의 일이다. 울진원자력발전소 건설 및 핵폐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시민·환경단체들의 조직적 저항운동이 일어난 것도 대학가 중심의 반전반핵 기운이 무르익어가던 1989년의 일이다. 국내에 핵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한 때는 1978(양산 고리원전 1호기)이지만, 그 무렵에는 대규모의 조직적 반대운동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문학은 사회적 운동의 반영이며, 그 운동은 문학에 의해 고양된다. 우리 문학이 반핵을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한 것도 얼추 그 무렵이었다. 이를테면 고형렬의 장시 리틀 보이1990년에 발표되어 히로시마 원폭의 공포와 죄악을 얘기했다. 또 박혜강의 장편소설 검은 노을1991년에 나와, 생명이 핵발전소 방사능에 의해 죽어가는 참상을 얘기했다. 그 이후 반핵은 비록 주류문학에서 비켜나있었을지라도 반전문학이나 생태문학에서 지속적으로 얘기되어 왔으며, 오늘날 그 장르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유럽의 반전반핵 문학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태동했다. 버틀란트 러셀은 그 방면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에리히 프리트(시인), 크리스타 볼프(소설가) 등은 반전반핵 문학의 기수들이다.

 

3포복은 우리 문단에서 반전반핵 문학의 효시를 1950년대 중반으로, 30년 넘게 끌어올릴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시인 신동문은 그 방면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문학사의 자랑이다. 만약 우리가 자랑스러운 문학적 성과를 애써 숨기거나 모르는 척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동문은 이 시를 쓴 시기에 대해 “6·25 때 공군병사로 있으면서 틈틈이 써둔 것이라고 임종 한 해 전인 1992년 필자에게 말한 적 있다. 6·25가 이 시의 모티프였다고도 했다. 그는 195110월 입대해 만3년 뒤인 195410월 제대했다.

 

흥미롭게도 신동문은 전쟁 중에, 그것도 병사의 신분으로 용감하게도반전반핵시를 썼던 것이다. 발각될 경우 큰 화를 당할만한 일이었다. 또 그 시기는 미국·소련·중국이 핵실험에 한창 열중할 무렵이었다. 그는 그들이 벌이는 핵실험의 광기를 시작(詩作)으로써 거의 실시간으로 얘기했던 것이다.

 

사실 신동문은 전쟁 중의 병사였지만, 시를 통해 승리의 염원이나 반공 이념이나 군인의 기백 등을 얘기한 적은 없다. 풍선기역시 시종일관 전쟁에 대한 환멸과 공포를 얘기하고 있다. 다음은 그 시의 제10호 전문.

 

핑크빛 풍선을 띄우면서 흡사히 능금과 같이 싱싱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는 떨어질 듯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익어들고 단물 들면 한 사람의 상냥한 손이 하강을 받들어주는 릴케의 능금은 괴이한 꿈을 꾸었다.······ <난무하는 일광 속의 원자능 복사와 비키니도() 근해의 수포증이 JAZZ처럼 광무하는 월광 속에서 하늘만이 남고 모두가 낙태하는 내일들을 응시하며 공전하는 기도의 합장을 하는 그런 자세의 군중들이 매달린 가지 끝에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는 스스로가 배설하는 독소의 질역(疾疫) 때문에 퍽 퍽 무너져가는 육체를 우는 별들의 낙엽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능금은 변색하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뒤치락거리지만- 흡사히 그런 몸짓을 하며 풍선은 떠올라가고 있었다.

 

화자가 핑크빛 풍선을 하늘로 띄우면서 빨갛게 익은 능금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 가을에 햇빛을 받아 빨갛게 익어가는 능금을 바라보며 자연이 주는 풍성함과 고마움을 노래한 시인 릴케의 능금을 연상하는 것도 억지스럽지는 않다. 그런데 릴케의 그 잘 익은 능금이 돌연 핵실험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불모의 땅, 비키니 섬의 수포증낙태질역이라는 고약한 꿈을 꾼다는 것은 왠지 엉뚱하다. 하지만 그 발상의 역전은 생명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음산한 공포를 자아낸다.

 

신동문이 병사로서 전쟁 와중에 우방인 미국의 핵실험과 그 공포와 부도덕성을 얘기했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는 1992년 필자 앞에서 군복무 중 행여 상관에게 들킬까봐 풍선기3포복의 원고뭉치를 숨기고 다녔으며, 근무지를 옮길 때나 휴가 때에는 그것을 간수하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라고 회고한 적 있다. 그는 하늘높이 떠가는 풍선을 바라보며 설렘 대신 악몽을 얘기했고, 그 악몽은 비키니 섬에서 방사능에 의해 병들어 죽어가는 생명들의 신음이었다. 요즘의 반전반핵 문학은 으레 생명의 존귀함을 얘기한다. 1950년대의 신동문도 반전과 반핵을 얘기하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빠뜨리지 않았다.

 

사실 1950년대만 해도 핵무기는 이 땅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다지 강하게 갖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은 세계대전을 종식시켜 한반도를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시킨 고마운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동문은 핵전쟁이 인류와 문명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시 창작으로써 1956년 일찌감치 경고했다.

 

그러고 보면, 신동문이 4·19 혁명 이후 시나 산문으로써, 또 행동으로써 일관되게 독재의 광기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그 자신에게는 그다지 별난 일이 아니었다. 전쟁과 핵의 광기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창작 열정이 4·19 혁명을 계기로 권력독재의 광기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사진설명: 시집 풍선과 제3포복의 표지. 표지 그림은 한국 추상미술의 거목으로서 닥종이 화가로 널리 알려진 정창섭(1927~2011)이 그렸다. 정창섭은 청주가 고향이며 시인 신동문의 절친한 친구였다    [출처] 시인 신동문은 반전반핵문학의 선구자| 작성자 나그네  네이브 블로그 정향나무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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