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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제주의소리-BOOK世通, 제주 읽기-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外

by 이성근 2019. 7. 14.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분수령으로 박정희 정권이 성립하기까지 15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보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집단은 한국 기독교회이며, 그 역사적 계보의 중심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냉전 체제에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미국을 활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핵심을 장악하고, 오늘날까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월남 기독교인들은 세계 교회와 미국 교회의 지지와 연대로 강력한 반공 세력이자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과 세계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미국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승만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전쟁 구호물자를 거의 독점하면서 세력을 강화했다. 또한 군종제도를 만들어 교회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다져나갔다. 군종제도는 19509월에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소련 군정 아래의 북한을 가장 먼저 탈출한 기독교 지도자는 한경직과 윤하영이었다. 월남 후 윤하영은 미 군정청 공보부 여론 조사과장으로 일을 했으므로, 기독교 지도자인 한경직이 베다니 전도교회(이후 영락교회)를 설립하자, 월남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한경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했다.

 

한국전쟁 직후 장로교는 고신파,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 등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총회의 주도권은 예수교장로회, 즉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인들이 장악했다. 이는 한국전쟁기 구호물자, 선교자금, 선교사 등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 외원 단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CWS(기독교세계봉사회) 이었다. 1946년 미국에서 창설된 이 단체가 한국사회에 관심을 둔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어려움에 처한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

 

미국 교회가 주도하던 WCC(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전쟁 참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WCC는 휴전회담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당황했고, WCC를 용공세력으로 공격했다. 그 공격은 KNCC(한국기독교협의회)를 주도하던 세력에 의해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던 고신파에게 맡겼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동요하던 KNCC는 이승만을 선택했다. KNCC를 주도하던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휴전회담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반공의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 말부터 근대 사회를 지향했던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반공이라는 선명성으로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변동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했으며, 한국의 변화를 가속화 하고 주도했다. 또한 반공이라는 선명성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집단이 되었다. 반면 WCC를 공격해 미국정부를 압박하려 했던 이승만은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어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전쟁고아 사업을 기반으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 되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월드비전, 기독교아동복리회(CCF), 홀트 입양 프로그램 등의 전쟁고아 사업을 통해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를 가족적인 관계로 만듦으로써 반공 정책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그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이후 한경직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경계했으나, 그들은 도리어 미국 복음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통해 남한에서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고히 했다. 한경직은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친선 사절단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 친선 사절단에는 한경직,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등이 있었다. 한경직은 미국에서 가장 큰 기독교 세력이면서 미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WCC, WEF의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고아로 구성된 선명회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기획했고, 한미관계가 가족적 혈맹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한경직과 박정희는 더욱 밀착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973년 박정희는 한경직에게 신년 인사 편지를 보냈다. 한경직은 그레이엄을 초청해 여의도에서 대규모의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는 반공을 통해 한미관계의 강고함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으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차원에서 이 부흥집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1974년 박정희는 남강 이승훈 동상 재건위원회 회장이던 한경직에게 동상 건립을 위한 금일봉을 전달함으로써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 한국전쟁과 기독교, 214

 

한국전쟁을 통해 성장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서북 출신 군 장성들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지지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한 또 하나의 배경은 군사정권의 주역에 많은 서북청년회 출신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회는 194611월에 결성되어 184812월 대한청년단의 결성으로 해체된 대표적인 우익 청년 단체였다.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의 학생회와 청년회는 서북청년회의 중심 세력이었다. 4.3 전후 제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서북청년회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승만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여순사건 이후 점차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 출신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과 서북청년회, 그리고 박정희가 사상적으로 결합하게 된 배경에는 승공주의가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공을 재정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외의 변화와 국내 현실에 따른 것이었다. 소련은 제3세계로의 팽창, 북한은 전후 재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반면에 국내 현실은 암담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이 주장하는 맹목적이고 전투적인 반공주의를 비판했다. 대신에 반공을 민주주의 질서 확립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제기했던 승공 담론은 5.16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재구성되었다. 승공 담론은 군사정권에 의해 국시로 승격되었다. 군사정권과 승공을 제기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들과의 결합,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대다수 한국인의 승공론에 대한 지지는 한국 사회를 경제적으로 성장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시대에 정치와 경제 발전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제국주의가 밀려오는 19세기 말 조선에서 근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와 조우했다. 기독교인이 된 조선인들은 근대식 교육을 받고 근대화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서북 지역은 그 대표적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련은 분단과 함께 찾아왔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월남 이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미국 기독교계의 지원 아래 독재 정권과 반공의 이름 아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추적하고 있다. 다만 제주에서의 학살 전위대였던 서북청년회와 기독교계의 연관성은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들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하더라도 그래도 제주에게 그들은 너무나 잔혹했다.

 

 

주철희,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북랩, 2013.

194810, 바다 건너 제주에서 불어오는 동족의 피울음 소리에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다. 순천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에서

 

국방경비대 14연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도 파병이었다.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이었다. 14연대의 제주도 출병이 상부로부터 하달된 것은 19481019일 오전 7시경이다. 그 날 저녁 14연대는 비상나팔소리에 휩싸였다.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19481019일 저녁 8시경, 14연대의 군인 일부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봉기군에 동참하게 했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10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까지 부상당할 정도로 초기 진압작전에서 밀린 이승만 정부는 20일 열린 미국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21, 여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사흘간의 교전 끝에 이들 정부군은 25일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 등을 동원해 여수를 포위해나갔고, 27일 진압에 성공했다. 여수를 빠져나간 봉기 세력은 지리산 인근으로 흩어져 그 유명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여순사건은 진압되었고, 봉기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이제 지리산 인근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정부군은 이제 남아있는 지역민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한 가을 날 여수, 순천,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운동장으로 내몰렸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조차 운동장에 모두 끌려 나왔다.

 

그 가운데 소위 손가락질 재판이 벌어지고, 즉결 처분 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인민대회 참가했다는 이유로, 완장을 찼다는 이유로, 머리를 짧게 깎았다는 이유로, 고무신을 신었다는 이유로, 군용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수감되거나 총살당했다. 심지어 정부는 환상의 여학생부대라는 기사를 창작하고 활용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시켰다. 소위 불량국민을 양산했다.

 

이 결과 진압 과정에서 봉기군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3400여 명이며, 행방불명자는 800여 명, 사망자는 1만 여 명에 달할 것으로 알려져 졌다. 그러나 그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희생자의 가해주체를 보면 군경과 우익에 의한 희생이 75~90% 정도이다. 좌익에 의해서도 분명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그 숫자는 군경과 우익에 의한 희생비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익에 의한 학살의 잔악성만 알려져 있다.

 

누가 얼마나 죽였는지를 따지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렇지만 정부와 국군 특히 보수우익에서 주장하는 근거가 매우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마주하기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군가 경찰의 잔인성이 좌익의 잔악성으로 포장되었다. 역사의 왜곡으로 불량 국민을 양산했고, 국민들을 현혹했다.

 

좌익에 희생된 사람들도, 우익에 희생된 사람들도 세상을 잘못 타고 난 것이 죄였다.

-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에서, 286-287.

 

미군의 협조로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신생 이승만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정치 불안이 깊어지는 가운데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 그리고 민중을 탄압하는 체제를 강화했다. 이승만 정권을 가장 크게 위협했던 것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유격투쟁이었다. 여순사건에서 빠져나온 봉기군인들은 장기적·조직적으로 저항할 목적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이 밖에도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1949년 군과 경찰이 겨울을 이용하여 대토벌을 벌임으로써 빨치산 활동은 이듬해 초 거의 사라졌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빌미로 194912월 식민지 시대 때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살린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다. 군사조직 형태인 학도호국단을 학교마다 만들었다. 해방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 좌파청년단체, 전평, 전농 등 대중조직에 관계했던 인물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켜 감시·탄압했다.

 

또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해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이 사건 이후 대한군사지원을 훨씬 강화했고 주한미군철수를 19496월로 연기했다.

 

여순사건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핵심은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군인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제주4.3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4.3은 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규명과 대통령 사과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명예회복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논의 자체가 제한적이다. 이는 정부뿐 아니라 지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는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여순사건 보다 14연대 반란사건을 개칭하고자 하는 주장도 있었다. 그 이유인즉 여순반란사건은 14연대 내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일으킨 것이지 여수·순천 지역 주민들이 주동된 것이 아니므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봉기 세력과 구별하고 싶은 것이다. 학살과 학살 이후 오랜 고통 속에 살았던 지역 주민들의 아픔이 느껴지지만, 안타까운 주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걸음은 제주4.3에 비교하면 더디고 힘겨워 보인다. 진상규명세력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고, 특별법 제정이라는 공적 무대로 가는 길목 길목마다 어려움이 산재해 있다. 물론 4.3 진상규명운동세력이 특별법 제정을 위한 하나의 노력과 비교하면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순사건에 빚을 지고 있다.

 

여수 시내와 주요기관을 장악한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는 여수일보를 여수인민보로 제호를 바꿔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의 성명서를 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그 젊은 병사들은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일념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그 날 군대가 여수항을 떠나 제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잔혹한 영상이 떠오른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 봉기가 갔던 길목에서 또 다른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을 낳기도 했다. 봉기에 참여한 젊은이들도 죽어갔다. 해방과 분단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념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념을 위한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희생자이라 해서 진실을 찾는 여정이 생략될 수는 없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과거청산의 기본 수순이다. 기본이 생략되고 역사의 희생자로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의 걸음은 힘겨워 보인다. 우리가 이제 손을 내밀 때이다.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쏠 수 없다는 그 마음을 제주가 기억하기를 같이 다짐해 본다.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맥아더는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고 이끌고자 한 전형적인 군인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맥아더와 한국전쟁중에서

 

이 책은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인물사적 평가, 그리고 한국전쟁과 연관된 맥아더에 대한 평가를 실사구시의 태도로 담담하게 탐색한다. 맥아더는 1880년 육군 중장 출신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형 2명이 모두 군인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군인 엘리트 출신 집안으로 맥아더 또한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프랑스 전투작전과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했고, 1919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2년 필리핀 마닐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5년 동안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 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19379월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을 했지만,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5개월 전이 1941726일 미 극동육군 사령관으로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에 맞서 필리핀을 방위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194112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남부 지역으로 퇴각했다.

 

1942418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참모진과 정보부대를 완비한 맥아더는 1943년 필리핀에서 붕괴된 미 극동공군을 새로이 설립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하는 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19441216일 미국 상원은 육군대장 4명과 해군대장 3명을 원수로 승진시키는 안을 승인했다. 루즈벨트는 즉시 마셜과 맥아더, 아이젠하워, 그리고 아놀드를 육군원수로, 레이히와 킹, 니미치를 해군원수로 임명했다.

 

육군 원수로 승진하고 4개월 후 맥아더에게는 태평양의 모든 지상군의 지휘권이 가진 미 태평양육군사령부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812, 트루먼은 영국의 애틀리 수상,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장제스로부터 맥아더를 일본 점령 연합국최고사령관에 지명한다는 데에 동의를 얻었고, 815일 공식적으로 이를 맥아더에게 통보했다. 태평양전쟁을 승리를 이끈 맥아더는 세계의 가장 주목받은 군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 맥아더는 일본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맥아더의 일본 점령정책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초기 점령정책은 군국주의 제거, 경제 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냉전이 시작되며 일본이 공산주의 상징적 방어지역으로 전환된 1947년 이후 이러한 개혁정책도 보수화 정책으로 반전되었다. 194711일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극동군사령부는 일본, 남한, 류큐 제도, 필리핀, 마리아나 및 보닌 제도에 있는 미군을 모두 관할했다.

 

일명 맥아더사령부로 통칭되는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SCAP), 태평양육군사령부(GHQ/AFPAC), 극동군사령부(GHQ/FECOM) 모두 맥아더가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연합국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로 인해 미군이 참전하자, 195077일 유엔군총사령관의 임무도 겸임하게 되었다.한국전쟁 초기 지연전술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격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는 38선 북진을 통해 북한 지역의 점령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황을 역전되었고, 맥아더는 중국으로의 확전을 주장하면 워싱턴 정가와 대립했다. 결국 1951412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420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합동의회 연설에서 훗날 유명해진 고별사를 낭독했다. 19644384세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저자는 맥아더의 약력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관과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이 그것이다. 맥아더의 생애 가운데 20여 년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했고, 그의 이러한 경험은 그가 아시아우선주의자로 대표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유럽은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는 대륙인 반면에 아시아는 미국의 장래에 중요한 전략적 대륙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맥아더의 견해는 유럽에서 영국 및 소련과 협조관계를 통해 전쟁을 수행하려는 국제주의자들에 맞서 태평양전쟁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공화당 고립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맥아더에게 반공주의는 견고화 된 신념이었다. 또한 맥아더에게 반공주의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기독교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주의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맥아더의 신앙은 일본과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맥아더의 아시아우선주의와 반공주의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맥아더의 호의는 일본을 향하고 있었고 한반도는 반공의 시선만이 강타한 지역이었다. 맥아더는 의회 청문회에서 일본과 대만을 미국의 안보와 이해관계에서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지역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의 안보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으로 평가했다. 1945830일 오후 2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일본의 아츠기 공항에 내린 이후, 맥아더는 푸른 눈의 대군’, ‘일본의 구원자로 상징되었다. 가해자 일본인에게 맥아더는 관대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피해자 한국인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특히 맥아더 포고령으로 대변되는 미군정정책은 피해자 한국인에게는 냉혹한 점령정책이었다. 남한의 현지 사령관 하지중장은 맥아더의 직접 지시를 받는 상하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국무무나 국방부 또는 합참의 지시는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전달되었다.

 

9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에서 개최된 항복조인식에서,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을 대신하여 나는 남조선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자 조인을 시작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은 점령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군정 실시도 명확히 하고 있다. 오히려 패전국에나 어울릴만한 성명이었고, 이렇게 위협적인 포고령은 한국인들에게 위협적이었을 거라고 맥아더의 전기 작가 제임스는 평가했다.

 

맥아더의 반공주의는 남한 점령 이후에 더욱 확고하게 한반도에 투영되었다. 맥아더는 하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는 점령성이 강한 질병으로 강제로라도 박멸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남한 내의 소요사태를 공산주의 확산의 전조로 간주했다.인천상륙작전의 빛나는 전과로 전황을 역전시키고 부하들과 인천 앞 바다를 걸어가는 그 유명한 포즈는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선글라스, 파이프, 그 예의 포즈 속에서 최고의 군인으로 인기 있었던 맥아더는 우리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인 이승만에게는 관대했지만, 한국인의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열망에는 관심이 없었던 맥아더의 정책은 하지의 24군단의 미군정에게 이어졌다. 반공주의의자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공산 중국까지 분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바람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한국전쟁이 맥아더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맥아더가 영웅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인물사적 평가가 우선되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맥아더의 일생과 사상, 그리고 한국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탐색했다. 저자의 논거와 열정을 지지하지만, 맥아더에 대한 비판적 감정이 먼저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의 지적대로 나의 시대는 아직은 맥아더에 대한 비판의 시간대에 머무르는 듯하다.

 

박태균·정창현,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역사인, 2016.

나는 조국을 위해 왜놈들에게 맞아 죽을 일을 했어도, 내 동포가 나를 죽일 일은 하지 않았소- 신변을 걱정하는 조소앙에게 김구가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이 책은 5명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암살당했다.

 

1947719일 오후 혜화동 로터리에서 2발의 총성이 울렸다. 여운형과 고경흠, 경호원 박성복이 탄 자동차를 트럭 한 대가 가로막았고, 암살범은 자동차 범퍼에 올라타서 여운형을 향해 권총 2발을 쏘았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에 투신했고, 대중한테도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자 스포츠맨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는 자주적 국가수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여운형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194783일 오전 8, 광화문 근로인민당사 앞 광장에서 여운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해방 후 최초의 인민장이었다. 상가는 철시했고, 거리는 수만 군중이 애도의 물결로 가득했다. 하지, 브라운, 랭던 등 미군정의 핵심 인사들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인 스티코프의 조사가 이어졌다.

 

1945816,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은 휘문중학 교정에서 포효와 같은 연설로 해방의 기쁨을 대중과 같이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일어난 여운형의 죽음은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비극으로 바뀌는 교차점이기도 했다.

 

현준혁은 해방 후 첫 정치암살의 희생자였다. 현준혁(1906~1945)8.15해방 전후 평안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이다.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했지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19295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19324월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하여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4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면서 체포되어 1936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책임비서를 지냈고,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주의자들간의 연합전선적 성격으로 설립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준혁은 공산당이 독점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는 민족문제의 해결을 더 중시해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저격당해 죽었다. 그를 저격한 측이 어느 쪽인가를 놓고 좌·우익이 서로 의심했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사망일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안장되어 있는 평양 애국열사릉 묘비에는 194593일로 기록되어 있다.

 

현준혁 암살사건은 해방 초기에 38선 이북에서 발생했다. 암살범들은 곧바로 피신해 체포되지 않았다. 그만큼 해방 초기 정국에 미친 영향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은 그 후 38선 이남에서 주요 정치인들에게 닥칠 연속적인 비극을 알리는 첫 총성이자 친일파들에 의해 악화(惡化)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왜곡된 현대정치사의 서막이었다.-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51

 

해방정국 우파 정치지도자였던 송진우는 38선 이남의 첫 번째 암살 희생자였다. 송진우(1887~1945)1921년 김성수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사 3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 장덕수, 서상일과 함께 916한국민주당결성을 주도했고,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121<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제8대 사장에 취임했다. 12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해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했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한 다음날 30일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자택에서 사망했다.

 

송진우와 더불어 동아일보계의 대표적 인물인 장덕수(1894~1947)1920<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이승만을 지지·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했다. 1938년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화숙(大和塾),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 등 친일에 앞장섰다.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1947122일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했다.

 

장덕수는 여운형과 송진우에 비해 그 명망성이 떨어졌지만,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미군정의 관심은 특별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이 선거를 위해 유엔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정하면서 194712월은 이들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미국의 대안에 이승만과 한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이 중심에 장덕수가 있었던 것이다.

 

1949626일 오후 1시가 막 지난 시간, 경교장 2층에서 네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한평생 숱한 사선을 넘긴 김구는 분단된 조국에서 동족의 흉탄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백범 김구(1876~1949)1948210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했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선거를 거부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했으나, 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각각 세워진 뒤에도 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가운데, 19496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들 5명 개개인의 암살 뒤에는 백의사와 양호단이라는 극우 단체, 친일 경찰, 미군정의 비호, 미군CIC 등이 거론되지만, 그 윗선이 어디까지인가는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정황과 지휘체계를 통해 그 암살의 배후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70여 년간 이들이 암살당한 경위나 배후를 밝히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사실에 대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바로 복원하고, 그 속에서 이들의 정치적 위치를 재평가하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당시의 수사와 재판에서도 그 배후를 밝히지 못했으며, 더구나 암살당한 사람이나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를 받은 인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 배후를 밝히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고려해 이 책에서는 그들이 왜 암살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암살이 당시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밝힘으로써 자연스럽게 암살의 배후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중에서

 

김구의 암살이 있었던 19496월에는 소위 ‘6월 공세라 불릴 정도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6·6반민특위 습격테러, 국회프락치사건, 6·26김구 암살등의 6월공세와 이후 가속화된 국가보안법체제의 형성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과 반민특위 결성에 앞장섰던 소장파 국회의원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국회프락치사건, 친일청산의 교두보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와해시킨 다음 김구의 암살이 있었다. 19495~6월부터 극우반공세력의 강력한 공세 속에서 이들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극우반공세력의 전면적 공세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역정의 최고의 수혜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이승만이었다. 신생 정부의 허약함을 반공체제로 대체하면서 분단의 골은 깊어져 갔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분단은 안 된다는 김구의 절규가 사라져가는 순간이었다.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8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직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몇은 학생이거나 교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경작지, 신문사의 일에 전념하지 않았다. 다른 일에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가운데이 책의 주인공들은 잊힌 사람들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지만, 좌파 운동가였기에 분단의 세월 속에서 잊혀 갔다. 윤자영, 박헌영, 김단야, 강달영, 김철수, 고광수, 남도부, 안병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명에 저세상으로 갔다. 더러는 고문 탓에 죽고, 더러는 형장의 이슬이 됐다. 어떤 이는 제정신을 온전히 유지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고, 어떤 이는 평생 맞서 싸웠던 적의 첩자라는 누명을 쓴 채 동지에 손에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그들의 영혼이 있다면 필시 저 세상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지금도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대학에서 인문학명저산책이라는 과목의 강의를 몇 년간 했었다. 인문학 서적 중 몇 권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강의였다. 그 강의에서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의 책 두 권을 고르자니 고민이었다. 나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이라 식민지시기를 전공하는 선배에게 추천을 요청했고, 그 책은 김산의 아리랑과 이 책이었다.

 

아리랑은 내 청춘의 책이었고, 이 책은 나이 들어 눈물범벅이 되어서 읽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어느 순간, 혹은 관련 자료를 볼 때 마다 눈물은 나의 몫이었다. 역사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눈가가 붉어짐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 책 또한 그렇게 읽었고 ‘BOOK世通, 제주 읽기를 쓴다고 했을 때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물론 이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처지로서 나의 소회일 뿐이다.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불꽃은 192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좌파 항일투쟁으로 타올랐다. 1920년대 우익 민족지도자들의 변절과 민족개량주의라는 회의론 속에서 민족주의 계열이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사상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명 모던보이는 마르크스 보이였다. 1980년대 대학생이라면 평범한 젊은이들도 읽었을 ‘Marx’는 식민지 시기 공부깨나 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현상이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자 박은식도 1920독립운동지혈사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선두에 적기를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다. 과거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개조의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를 나타냈다.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국내에 수용되었다. 3.1운동 뒤에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사회주의사상은 일본.시베리아.상하이를 거쳐 흘러들어와 책과 신문, 잡지에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강연회를 통하여 민중 속에 전파되었다. 일제조차도 그동안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고 지적할 만큼 사회주의 영향은 컸다.

 

1920년대 초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자 지식인, 청년, 학생, 선진 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러 서클을 만들었다. 결국 1925417일 서울 황금정(을지로)에 있는 아서원에서 김재봉, 김찬, 김약수, 조동호, 박헌영 등 19명이 참석해서 조선공산당 창립 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창당 무렵 당원 수는 120여 명이었다. 당대회에서 조선혁명은 민족해방, 반제국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모든 애국 세력과 적극 동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대회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위 조직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의 지도부임을 자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박헌영과 김단야! 식민지 시기 항일운동가였고, 조선인 사회주의자로써 엘리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미제의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김단야는 구소련에서 일제의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그들의 동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1900, 1901년에 태어난 두 사람은 모두 3.1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 반일 시위운동과 유인물살포에 참여했고 그 이후 직업 혁명가 인생을 시작했다. 김단야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하는 도중 반일 학생 서클에 가담했다. 3.1운동 때는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 유인물을 정기적 발간하는 데에 참여했으며, 324일 개령면 동부동 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김단야는 이 죄목으로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김단야는 1922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4월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징역 16월을 선고받았다.

 

19241월 출옥하여 잠시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활동의 출중함으로 인해 이들 세 사람은 트로이카, 또는 삼인당으로 불렸다. 그러나 김단야는 19259월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고,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192912월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1930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했다.

 

1937년에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김단야는 위기에 처한다. 김단야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과장으로 근무했다. 김단야는 1937115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테러활동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서 제 1급 범죄자라는 판결 받고 사형 당한다.

 

박헌영은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4월 국내침투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16개월간 복역했고, 1925417일 조선공산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해 1129일 서울 훈정동에서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일본 재판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271122일 병보석 출감이 허용됐다.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었던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산송장이 되어 풀려난 친구를 보며 <박군의 얼굴>이란 시를 썼다.

 

박아, 박군아, ××!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 심훈 <박군의 얼굴>

 

출옥한 박헌영 부부는 일경의 눈을 피해 19288월 국경을 넘었다. 탈출 소식을 일간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고 경찰에 대한 징계가 이어졌다. 박헌영은 19296월에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노력자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으며, 19321월 상해로 가서 활동하다 또 다시 19337월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해방정국에서 박헌영은 좌익세력 최고의 지도자였다. “박헌영 선생 나오시라는 벽보가 해방정국 곳곳에 나붙었다.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또한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19469월 남한을 탈출, 월북했고 1948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 기다린 것은 남로당의 몰락과 피의 숙청이었다.

 

김단야 죽음 14년 뒤에 박헌영도 북한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19528312명의 남로당 출신 당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 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의 명목으로 체포되었고 박헌영은 연금되었다. 1956719일에 박헌영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956‘8월 종파사건때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하던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여 그날 저녁 박헌영의 처형을 지시했다고 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제국주의를 적대시했던 터라 그들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방 후에도 그랬다. 냉전과 분단체제의 음울한 분위기에서 그들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민주화가 진전된 뒤에는 금제의 벽이 얇아진 듯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걷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인지라 자료는 인멸되었고, 기억은 점차 색이 바라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망각 속의 존재다.

 

일본제국주의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식민지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비록 사상이 다르더라도 항일투쟁이라는 그 뿌리는 같았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로 조선에서, 중국에서, 러시아에서 좌파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 순수한 열정이 스탈린주의로 귀속되고, 우상독재의 희생양으로 죽어갔어도 그 시작은 식민지라는 민족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분단 70년이 되는 지금,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지금, 그 세월을 감쌀 수 있는 우리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그들의 한스러운 세월을 이념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으로 애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럴 여유는 충분히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된다.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주디스 슈클라, 일상의 악덕, 사공일역, 나남, 2011.

인간혐오의 시대

도처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마치 인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인 양 폄하하는 표현들이 난무한다. 자신과 종교적인 신념이나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정치적인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성적인 특성이나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사는 지역이나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점점 모두가 인간이란 원래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도덕적 진보란 아마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을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노예를 자유롭게 하고,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며, 경제적인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감으로써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적인 교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정치는 인간적인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종교와 정치는 거대담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구원, 정의, 진리, 자유, 평등 등등의 거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에서 벌어진 다양한 전쟁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 대의를 위해서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목도했다. 이 과정에서는 잔인한 행위를 자행하는 가해자와 그런 잔인성에 의해 고통 받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 땅에서 도덕적인 진보가 완성되지 않는 한 그런 가해자와 피해자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인간적인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행위가 오히려 인간적인 고통을 낳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셈이다.

 

종교적인 믿음을 위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인가?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희생자의 용기는 분명히 도덕적인 진보를 가져오지만 고통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도 있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의 용기를 요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잔인하다. 가해자의 비겁과 잔인성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 앞에서 인간이 여전히 도덕적으로 저열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혐오의 감정은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대한 구원이나 선을 실현하고자하는 인간의 행동이 잔인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 체계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큰 것만 염두에 둔 나머지 작은 것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간과한 그 작은 것이 사실은 우리가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잔인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태도

오정희의 <>라는 소설은 우리가 간과한 그 작은 것을 매우 섬세한 정서로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언젠가 자신이 경험했던 상담 어머니의 역할이 잔인성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괴로움 때문에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소위 결손 가정의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선한 역할 속에 그 어린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악의 요소가 없는지 성찰한 것이다.

 

주디스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은 오정희씨가 성찰한 그 사소한 악에 대해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가 약속한 자유평등과 같은 거대한 개념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사소한 성격적 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슈클라는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는 일상적인 악에 대해 주목함으로써 도덕적인 진보를 위한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슈클라가 거론하는 일상적인 악의 목록은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 등이다.

 

이 가운데 슈클라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잔혹성이다. 슈클라가 말하는 잔혹성이란 고뇌와 두려움을 주기 위해 몹시 약한 존재에 신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의도적인 괴롭힘”(27)이다. 그가 이 개념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감소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진보를 이루고자 할 때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가리킬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잔혹성이 행해지는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슈클라는 이런 입장을 두려움에서의 자유주의’(liberalism of fear)라고 불렀다.(22) 이 개념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 개념을 낳았다.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토대위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왔지만, 그것이 이론적토대 위에서 주장되는 한, 즉 자유주의 이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 그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고통의 문제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잔혹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슈클라와 로티의 자유주의는 이론적 토대를 포기하는 대신 잔혹성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의 일차적인 실천적 과제라고 상정함으로써 그런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타자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일이 어떤 이론적 근거에서 합당하며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인지를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잔인성이 행해지는 장소에서 희생자의 고통을 느낌으로써 그런 잔인성이 중단되도록 할 방안을 모색하게끔 한다. 슈클라는 거대한 신념을 토대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의도했던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런 고통을 중단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잔혹성이 우선시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잔혹성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이 변경됐다. 그 시대의 찬미자인 다이시가 우리에게 일깨우듯이, 남부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도록 했던 것은 독립 선언문에 명시된 박탈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라 노예들의 고생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었다.”(69, 번역은 가독성을 위해 수정했음)

 

잔혹성은 때로는 도덕의 외양을 입고 행해지기도 한다. 슈클라는 호손의 <주홍글씨>의 주인공들이 도덕적 잔혹성의 희생자들이라고 해석한다. 딤즈데일 목사는 자기증오와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자살한다. 슈클라는 이와 같은 자기학대와 같은 잔혹성은 오로지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그런 완전함을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였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잔혹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자유주의자는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의 죄의식, 양심 등이 가하는 잔혹성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슈클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역시 잔혹한 것이며,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극형을 내리는 재판관”(78)이라고 평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잔인한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악순환을 중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대한 이념에서 눈을 돌려 눈앞에서 행해지는 잔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클라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상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악덕들에 대한 고민이 없이 현실적인 고통을 우회할 길은 없다. 이 책은 삶의 고통과 대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운다.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호걸, 눈물과 정치: <아리랑>에서 <하얀 거탑>까지, 대중문화로 탐구하는 감정의 한국학, 따비, 2018.

과장 좀 보태서 말하면, 1030대들의 채팅을 보면 글자 절반이 ㅠㅠ. 기뻐서 ㅠㅠ, 슬퍼서 ㅠㅠ, 노여워서 ㅠㅠ, 미워서 ㅠㅠ, 억울해서 ㅠㅠ, 하는 일마다 안돼서 ㅠㅠ, 시험 그르쳐서 ㅠㅠ……. 이들의 채팅창엔 그야말로 탄식과 눈물이 마를 날 없다.

이쯤하면 ㅠㅠ표현 정도는 현대 한국인들끼리 눈물 흘리는 정황임을 알아챌 것이다. 하지만 롬곡’ ‘롬곡옾눞은 어떤가? 이를 바로 알아차린 40대 이상 분들이 있다면, 나름 쿨하고 젊게 사는 사람 축에 끼겠다. 흥미롭게도 롬곡롬곡옾눞눈물폭풍눈물을 거꾸로 뒤집은 한국어 신조어라 한다. 신조어라기보다는 거의 암호에 가깝다. 젊은 세대들끼리 어른들 몰래 나름 울고 싶은 감정을 토로하는 암호 말이다.

 

어쩌면 젊은이들에게 채팅창이야말로 좋은 울음 터로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하구나!”하고 외칠 수 있는 현대판 호곡장(好哭場, 연암 박지원열하일기)이 아닐까 한다.

 

사실 연암의 호곡장론(好哭場論)에서 말하는 곡() 즉 울음은 갓난아기의 울음에 비유된다. 오랫동안 태속에 갇혀 지내다가 드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 해방의 기쁨이 극에 달하여 참을 수 없는 통곡으로 터져 나온 그 울음 말이다. 또 연암은 상례(喪禮)를 치를 적에도 억지로 짜내는 울음이 아니라, 갓난아기의 가식 없는 울음을 본받아 한바탕 통곡할 것을 권한다. 그의 통곡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좁은 땅에서 벗어나 광대한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나아가려는 기쁨과 해방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한바탕 눈물에 인색하다. 바야흐로 눈물의 고갈시대라고도 한다. 대신 채팅창을 통해서 ㅠㅠ’, ‘롬곡’ ‘롬곡옾눞같은 알쏭달쏭 기호들로 자신들의 한바탕 눈물과 비애를 폭풍 표출하고 있다. 혹자는 이 현상을 헬조선을 저류하는 감정의 주된 표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이전 세대들이 당시 대중문화와 정치에 세뇌되어 과도하게 신파적으로 울고 울었다면, ‘ㅠㅠ세대들은 그 신파적 눈물을 넘어서 SNS와 같은 쌍방향 매체를 통하여 한바탕 눈물을 제대로 흘리는 기술을 모색하느라 여념 없다. 나아가 ㅠㅠ세대들은 눈물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삶의 여러 국면에 고르게 분배할 줄 아는 감성을 쿨하게(이성적으로) 체득하고 있다고도 본다. 우리에겐 낯설어 보이지만 이러한 새로운 감성이 공적 실천의 장에 발현되어 안착하고 있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소개하는 책, 이호걸의 눈물과 정치도 이와 맥을 함께 한다. 책 전반에 걸쳐 전환기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새로운 정치와 감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랑>에서 <하얀 거탑>까지, 대중문화로 탐구하는 감정의 한국학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한국대중문화(소설, 영화, 드라마 등)를 들여다보며, 1부에서는 눈물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2부에서는 민족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자유주의가 눈물과 관계 맺는 양상들을 다루고 있다. 책 제목 부터가 함축적이면서 책의 초점 또한 신선하다. 이를테면 인간 정신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기존 연구서들은 대체로 지성(이성)에만 관심이 쏠려서 감정을 무시했다면, 이 책은 이성에 비해 폄하되던 감정을 복권시키려는 기획 속에 20세기 한국의 문화와 정치,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탐구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 책은 눈물이 정치와 결합하는 양상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비평이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ㅠㅠ세대 이전까지 기술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눈물비평이다. 나아가 눈물을 통한 한국인의 감성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는 미학적 시대비평이기도 하다.

 

우선, ‘눈물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긍정적이다. 눈물은 다양한 이유로 흘리지만, 그 중 저자가 포착하는 눈물은 고통스러운 불균형 상태를 고통 없는 균형 상태로 돌리는 과정의 일부다. 이를 위해서는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균형 상태는 좀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즉 고통의 원인을 해소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34) 그런 의미에서 눈물에는 그런 실천을 추동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실천 과정에서 흐르는 눈물에는 실천 자체가 초래한 고통에 따른 눈물과,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최초의 고통에 따른 눈물이 뒤섞여 있다. 두 고통 모두 실천이 완수될 때에야 완전히 해소될 수 있으므로, 눈물은 계속해서 실천을 추동한다. 이 고통, 눈물, 실천의 알고리즘은 위기를 완전히 해소하는 순간까지 반복될 것이다.”(34)

 

한국사회는 20세기에 들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경제성장기인 1990년대 중반까지 그야말로 눈물이 철철 흘렀던 이른바 눈물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저자에 따르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생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한국인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눈물도 더 이상 그렇게 흘려지지 않는다. 고통의 절대량이 줄었기 때문이다.”(298) 이 논리로 본다면 한국사회는 국민적 눈물이 완전히 해소되기까지 100년이란 시간을 필요했다.

 

한편, 무수한 눈물 속 실천의 긴 세월 동안,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군중도 탄생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른바 눈물의 정치적 신파(新派)’가 그것이다. ‘신파(新派)’는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눈물의 흐름과 한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다. 항간에 신파통속적인 예술에 대한 통속적인 비평 용어이자, 가장 통념적인 의미로는 억지 눈물 짜내기(57)로 통용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신파눈물의 새로운 흐름”(56)이라 보고, 그 대표적인 예로 가족적 눈물을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신파적 눈물은 대체로 본인 가족의 고통으로 인해 흘린 것이었다. 이 틀에서 세계는 가족을 위협하는 세력과 가족을 지키는 세력 사이의 투쟁의 시공간이다. 그 세계에서는 가족을 지키는 행위, 즉 가족주의적 실천만이 윤리적이며, 이는 비합리적 윤리 특유의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다.”(59) 그 예로 저자는 수많은 눈물들 중에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인공 홍도의 눈물(여성윤리)과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의 눈물(남성윤리), 두 눈물을 들고 있다. 저자는 이 두 눈물을 한국 근대 특유의 가족적 눈물이라는 점에서 신파로 규정한다.

 

이후, 이와 같은 가족을 위한 눈물겨운 실천은 민족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져 민족주의에 활용되었고, 그것은 박정희의 파시즘 및 조국 근대화의 역군으로 동참하게끔 감정적으로 자극했다. 파시즘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운동의 동력 또한 가족적 눈물이었다. 이처럼 가족적 눈물은 근현대 한국에서 고통의 출구이자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던 셈이다.

 

반면, 1990년대 들면서 고생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눈물도 마르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설파한다. 그 예로 2007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주인공 장준혁(김명민 분)과 최근 방영한 tvN의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 황시목 검사(조승우 분)를 들고 있다. 전자는 유명 대학병원 외과의사로, 그는 가난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후자는 어린 시절 뇌수술로 감정을 잃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눈물보다는 공평무사한 법의 집행이 더 중요함을 역설한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필사적 투쟁보다는 냉철한 책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눈물이 줄어든 이유였다. 1990년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자유주의가 재편, 강화되었던 시기다. 그와 함께 신파적 눈물로 대표되었던 자유주의적 흐름도 변화했다. 눈물보다 냉정함을, 가족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다른 유형의 감정이 대두하고 있었다.”(298)

 

저자는 이러한 태도와 감정의 발로를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으로 본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인들은 신자유주의자가 됐다. 21세기 한국인은 합리적으로 자신을 기획, 추진, 관리, 평가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적어도 강자는 쉽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약자는 적어도 눈물을 삼킬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물의 감소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전면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302)

 

그렇다고 모든 고통, 눈물, 실천의 역사적 바퀴가 멈췄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무한경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감정의 사회적 배치를 어떻게 교차시킬 것인지를 이 책은 주문하고 있다. 이왕이면 모든 접속에 열려 있는 눈물의 배치, 그 배치로 새로운 눈물이 생성되고, 그 결과 다양한 눈물들이 공감과 연민으로 연대되길 희망한다. 이것은 앞으로 ㅠㅠ세대들이 가진 커다란 감성적 무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눈물 ㅠㅠ’, ‘롬곡’ ‘롬곡옾눞이 더 이상 옹색한 사이버상의 단순한 농담의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낼 힘”(38), 나아가 현대판 호곡장(好哭場)을 진두지휘할 힘이길 내심 바래본다.

 

고영자(미학자·번역가)()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대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현대 문화매체론, 제주기록·제주미학론. 제주도 형태기록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 미얀마 산책(2008),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 데이비드 네메스 저 제주순력담(2016), 韓東亀 편저 제주도: 삼다의 통곡사(2017)가 있다.

 

출처 : 제주의소리-BOOK世通, 제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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