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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아베 삼대 外

by 이성근 2019. 7. 22.




아베 삼대 도련님은 어떻게 우파의 아이콘이 되었나 저자 아오키 오사무|역자 길윤형|서해문집 |2017.11

원제 安倍三代

 

저자 아오키 오사무?木理1966년 나가노현 출생. 저널리스트, 논픽션 작가. 1990년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한 뒤 교도통신에서 사회부 기자, 서울 특파원 등을 지냈고, 2006년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일본의 공안경찰日本公安警察, 교수형絞首刑, 유아등 연속해 일어난 두 개의 원인불명의 죽음誘蛾? つの?不審死事件, 저항의 거점으로부터 : 아사히신문 위안부보도의 핵심抵抗?から 朝日新聞 慰安婦報道核心, 르포 납치와 사람들 : 구원회공안경찰조선총련ルポ 拉致――公安警察朝鮮總連, 도쿠다 도라오 불수의 병원왕トラオ 田虎雄 不病院王, 國策搜査, 아오키 오사무의 저항의 시선 木理抵抗視線, 르포 국가권력ルポ 國家權力, 일본회의의 정체日本會議正體등이 있다.

 

역자 : 길윤형

역자 길윤형은 1977년 서울 출생. 대일외고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200111한겨레에 입사해 경제부, 사회부, 한겨레21부 등을 거쳤고, 20139월부터 20174월까지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현재는 한겨레21편집장이다.

 

아베 정권 이후 본격화된 반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 미일동맹 강화 등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 등과 관련한 여러 기사를 썼다. 삼성언론상(2003), 임종국상(2007), 관훈언론상(2015) 등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2012), 아베는 누구인가(2017)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2016)가 있다. 안창남에 대한 책을 쓰려고 5년째 고민 중인데,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는 반드시 집필을 시작하려 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일러두기

·재계에 뻗어 있는 아베가의 친인척들

 

서장

1

알려지지 않은 할아버지

부의 편재에 대한 분노

반전을 외치며, 익찬선거로

 

2 신타로

천애고아 골목대장

이단과 자이니치

내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다

리버럴과 균형

 

3 신조

평범한 좋은 아이

하늘의 섭리운명

세습의 결말

 

맺음말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출판사 서평

반골 평화주의자, 아베 간

일본 혼슈 최서단에 위치한 시모노세키시 부근의 시골 마을(옛 헤키촌)에서 아베가는 대대로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을 해 왔다. 또 논밭이나 산림 등을 많이 소유한 대주지기도 했다. 현재 아베가의 생가와 묘지도 모두 그곳에 있다.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이곳에서 1894년 출생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 모두 여의고, 이모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유명했던 간은 이 마을 출신으로는 드물게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도쿄에서 잠시 자전거 가게(산페이상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어린 아들 신타로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줄곧 그곳에서 활동했다.

 

간은 결핵과 그에 따른 척추뼈 괴사 등으로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헤키촌 촌장과 야마구치현 의원, 중의원 의원 등을 겸임하며 활발히 정치활동을 했다. 특히, 19374월 치러진 중의원 의원선거에서는 반전과 기성정당 비판, 그리고 친서민 정책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해 당선했다. 이때부터 간에게는 반골’,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같은 수식어가 붙게 됐다. 이후 익찬선거(관제선거)’로 불리는 1942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비추천이라는 불리함과 경찰·헌병의 삼엄한 감시를 이겨 내고 당선했다. 그러나 재발한 결핵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1946년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간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고향인 옛 헤키촌 사람들은 지금도 간에 대해 한없는 동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손자 신조에게는 불안과 불만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본문 105

 

균형 감각을 겸비한 보수주의자, 아베 신타로

신타로는 1924년 도쿄에서 간과 시즈코 사이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간의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헤키촌으로 오게 된다. 이후 신타로는 헤키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쿄제대 법학부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해군 시가항공대로 징병됐고, 특공(가미카제)에 지원한다. 다행히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신타로는 194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마이니치신문 정치부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신타로는 1951년 기시 노부스케의 딸 요코와 결혼한다. 1956년 기시가 외무상이 되면서 신타로도 신문사를 그만두고 기시의 비서관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기시가 총리가 되자 자연스레 총리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때부터 신타로에겐 기시 노부스케가 정치적 후광이 된다. 하지만 신타로는 주변에 나는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아베 간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등, 기시와 거리를 두고 아버지인 간의 후계자임을 밝히고 정치활동을 이어 간다.

 

본격적인 신타로의 정치활동은 1958년 야마구치현에서 중의원 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1991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 낙선을 빼고 총 11번 의원에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였다. 또한 소속 정당인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고, 내각에서는 관방장관과 외상을 지내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의원으로서는 지역의 자이니치코리안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그 덕분에 비록 선대와 처가가 가진 위광을 등에 업은 세습의원, 수줍음 많고 특성 없는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절묘한 균형 감각을 갖춘 보수주의자라는 평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신타로는 아베 총리와는 달리 매파이면서도 [평화헌법] 옹호론자였다.

 

아베 신타로는 반골과 반정의 정치가 간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하며, 아버지의 유산 위에 서 있었다. 그와 함께 눈부신 처가 쪽 족벌의 대열을 잇는 세습 프린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주어졌던 고독과 전쟁 경험이 균형 감각과 상냥함과 같은 신타로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 224

 

우파의 아이콘이 된 도련님, 아베 신조

아베 신조는 1954년 도쿄에서 신타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와 지냈다. 기시는 신조를 아꼈고, 신조 또한 외할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신조는 소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도쿄에서 저명한 사학인 세이케이학원에서 보냈다. 이후 신조는 2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79년 고베제강소에 연줄로 입사했지만 회사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82년 아버지 신타로가 외상으로 취임하면서 신조가 비서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조의 정치계 진출이었다.

 

한편, 어린 시절 신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는 공부도 운동도 그저 그런 정도의 극히 평범한 좋은 녀석’”,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어떤 특별한 부분도 없는 도련님이다. 그런 그가 아베가의 3대라는 이름을 물려받아, 눈 깜짝할 사이 정계의 계단을 뛰어올랐다. 파란만장한 정치활동을 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조차 이루지 못한 총리직을 간단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처음 집권 때는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하며, 최장기 정권을 현실로 만들어 [평화헌법] 개정 등을 노리고 있다. 실로 우파의 아이콘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셈이다.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를 경애하며 모범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 실제 신조는 상당히 질이 떨어지는 기시의 복제물이다. 친할아버지 간이나 신타로와 비교해 봐도 이 사실엔 변함이 없다. 땅에 발을 붙인 정치 경력의 면면에서도, 이를 지탱하는 지성의 면면에서도,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정치적 에너지와 정열이라는 점에서도 이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취재를 해 본 입장에서 보자면, 대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박력도 매력도 자력도 점점 퇴행하고 있다.- 본문 305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베 총리가 싫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점이 있다. 아베 총리는 1차 정권 때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에선 집권 5년째를 맞기까지 지지율도 그럭저럭 50~60퍼센트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아베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 정권이 일본의 개헌까지 노리는 역사적인 정권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인으로서 아베 총리는 대체 무엇인가’, ‘우린 왜 전후 70년에 이런 정권을 갖게 됐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베 총리는 흔히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할아버지인 아베 간과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의 루트를 따랐다. 그래서 -신타로-신조’, 이들 3대를 제대로 그려 보고 싶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전후 70여 년 동안 이어진 일본 정치의 큰 흐름을 잡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본문 속에서 아오키는 아베 총리의 청년기를 아는 수십 명의 지인을 인터뷰한 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를 존경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색 없이 평범하고 성실하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상냥한 좋은 집안의 도련님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텅 빈 깡통같던 아베 신조라는 인물은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 처음 국회에 입성한 뒤 주변에 있던 우익 성향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과 같은 우익의 괴물로 변했다. 그리고 이 괴물은 일본 사회가 전후 70년 동안 소중히 지키고 가꿔 온 국가의 모습을 근본부터 뒤집으려 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이 같은 시도는 그 자신이 여러 차례 필생의 과업이라 공공연히 밝혀 온 개헌을 통해 최종 완성되려고 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도쿄 30, 일본 정치를 꿰뚫다 아베의 아름다운 일본은 있는가 저자 이헌모|효형출판 |2018.10

 

이헌모-1963년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철원의 접경지인 관인(官仁)에서 태어나 자랐다.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대도시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도쿄의 와세다대학(?田大?)에서 1991년부터 석·박사과정을 밟고 2000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4월부터 지바현(千葉?) 소재 중앙학원대학(中央?院大?) 법학부 전임강사로 시작하여 조교수, 준교수를 거쳐 2010년 교수로 승진했다. 20124월부터 20143월까지 미시간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재외 연구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생활한 2년을 제외하고는 30여 년을 도쿄에서 살고 있다. 20184월부터는 학부장으로 선출되어 학교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정치와 행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교양 과목으로 한일 관계를 강의하고 있다. 학부에서는 유일한 외국인 교수이지만 대학 개혁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의 교육과 연구 활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중앙학원대학 홈페이지를 참조해주길 바란다.

http://www.cgu.ac.jp/faculty/law/tabid/1165/Default.aspx

 

목차

글을 시작하며

 

1장 정치는 선거가 전부일까

아베의 해산 총선거는 신의 한 수인가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란 정치가의 민낯

과연 아베는 선거의 제왕인가

내가 본 일본 (1) 고이케 도쿄 도지사의 탄생

 

2장 나약한 일본 수상

미국 대통령과 일본 수상 중 누구의 권한이 강할까

미국 대통령과 일본 수상의 권한

법안 제출 권한과 의회와의 우호적 관계

수상의 정당 장악

국회의원은 당선과 동시에 다음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3장 파벌 정치와 수상의 관계

자민당 파벌 정치의 형해화(形骸化)

파벌 정치 쇠퇴의 최대 수혜자는 아베

아소 다로와 자민당의 조락(凋落)

구관이 명관인가, 민주당 정권의 실패

내가 본 일본 (2)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지지했던 이유

내가 본 일본 (3) 일본은 차별 국가인가

수상의 전가의 보도국회 해산권

국회 해산권을 이용한 당권 장악 프로세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4장 거대 정당 자민당을 이끄는 메커니즘

간사장

당내 주요 간부

자민당의 구습과 관행의 붕괴

 

5장 아베 삼대

조부는 반전과 평화주의를 주장한 반골 정치가

아버지 신타로는 친한파인가

아베 신조는 평범하고 얌전한 학생

 

6장 삼류 정치와 포스트 아베

일본 정치는 삼류인가

포스트 아베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 |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 고이케 유리코와 여성 정치가들

 

7장 아베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

아베의 사람들

수상 관저 기능의 강화

관료 주도에서 정치 주도로

민주당의 관료 운용 실패

인사는 만사, 인사권의 장악

내가 본 일본 (4) 차검(?) 제도의 정치학

내가 본 일본 (5) (?)의 트라이앵글

아베 정권과 언론

 

8장 아베 정권과 일본국 헌법

일본국 헌법과 자위대

점령군에 강요된 헌법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으로 무력행사 가능

집단적 자위권이란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을 위한 파격 인사

 

9장 아베의 최종 목표

아베 정치 과정의 의문점

아베 장기 집권의 성과

헌법 개정은 가능한가

강요된 헌법

개헌을 위한 구체적 움직임

 

10장 아베 정권과 일본회의

일본회의(日本?)의 정체

일본회의의 구체적 활동

21세기에 웬 애국 교육인가

일본회의와 정치가들의 밀접한 관계

 

11장 포스트 아베와 향후 일본 정치

 

향후 아베 정권의 향방

우경화는 계속 진행 중

 

글을 마치며

에필로그

 

주요 참고 문헌(일본어 서적)

 

부록: 전후(?) 역대 수상 연표(1945815일 이후~)

 

2018920, ()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3회 연속 자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일본 역사상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다. 부인 아키에(?)까지 연루된 사학 스캔들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시대를 거스르는 군국주의로 회귀해 아름다운 일본을 되찾는다(しい日本?)”는 야망을 키우는 아베 총리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인 자민당을 일본이 다시 선택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일본의 보수화와 우경화의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아베와 자민당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일본 내에서도 60여 년간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한 자민당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역대 최장수 총리로 이름을 올리기에는 총리로서 아베의 자질이 그리 후한 점수를 받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되어 있는 일본 정치의 원인을 아베 총리 개인이나 일본의 국민 정서뿐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본만의 정치 구조와 정치 문화에서 찾는다. 대대로 수상을 역임한 아베의 가족사나 일본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 연원을 찾는 기존의 서적과 달리, 아베 정권을 위시한 일본 정치 전반을 시대를 넘나들며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는 저자의 시야는 매우 넓으면서도 그 분석은 압축적이면서도 입체적이고, 종합적이다. 우리의 정치 제도는 대통령제지만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정치 시스템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제대로 살펴본 적 없는 일본의 정치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우리의 정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우리는 일본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우리는 일본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에 대해 마냥 호의적일 수만은 없는 역사적 과거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사실이다. 저자의 말대로 최근 우리는 일본을 알고(知日) 일본을 넘으려(克日) 하기보다는, 일본에 맞서는(反日) 입장이 두드러진다. 간간이 들려오는 국제 뉴스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본 정치는 60여 년에 걸쳐 역대 일본 수상을 줄줄이 배출한 자민당의 일당 독재 체제, 파벌과 세습 정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정치는 과연 알려진 것처럼 삼류 정치에 불과할까?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일본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일본 현지에서 직접 접하는 일본 정치와의 간극을 면밀히 해명하고자 한다. 가령 저자는 일본 정치에서 파벌 정치는 어느새 옛말이 되었고, 그렇게 만든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의 선거 구역 재편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한다. 정치가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면 겹겹의 입장과 맥락이 얽혀 있는 그 양상이 절대 단순치 않음을, 따라서 한 나라의 정치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아베의 측근 및 라이벌을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에 대한 여담도 흥미롭다.

 

도쿄에서 30여 년간 살고 있는

재일(在日) 정치학자의 눈으로 본

생생한 일본 정치와 일본 사회의 현주소

 

저자 이헌모 교수는 도쿄에 30여 년 거주하면서 도쿄 인근의 지바현(千葉?) 중앙학원대학(中央?院大?)에서 정치와 행정을 가르치는 정치학자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생생한 일본 정치와 일본 사회,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속내를 이야기한다. 일본의 국내 정치와 관련된 내용인 만큼 기존 서적은 일본어 번역서가 다수인 반면, 일본과 한국 모두의 관점에서 일본 정치를 바라본 이 책은 객관성에 더욱 다가서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우리가 일본을 무조건 적대적인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제대로 들여다보고 내실 있는 비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 정치의 분석 차원을 넘어, 마치 기자의 리포트처럼 생생한 저자의 목소리는 본문 곳곳과 내가 본 일본이라는 별도의 지면에서 드러난다. 일본에만 있는 정경유착의 산물인 차검(?) 제도와 같은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오랜 세월 살며 일본 정치를 직접 보고, 듣고, 연구한 저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날로 수위가 높아지는 일본 우경화에 대한 우려,

앞으로 펼쳐질 한일 관계의 미래는

 

일본 자위대 군함의 욱일기(旭日旗) 게양이 연일 이슈가 되고 있다. 가뜩이나 각종 현안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냉각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필 이 시점에, 일본의 우경화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상징적인 사건이다. 특히 일본 외교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우리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일본에서 우경화가 얼마나,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저자는 평화헌법 개정, 무력행사가 가능한 군대를 목표로 강화되고 있는 자위대, 평화 교육에서 애국 교육으로의 전환, 우경화의 강력한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는 일본회의(日本?)의 정체와 활동 등에 대해 낱낱이 소개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의 우경화가 어떤 장기 계획을 가지고 일본 국민의 의식에 알게 모르게 스미도록 점진적이고 치밀한 기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전모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일본의 우경화 정책은 일본인이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추구하는 나시쿠즈시(?,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기정사실을 조금씩 쌓아감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새 일본의 교육에서 애국심은 평가의 대상이 되고 법에서 규정한 대로 달성해야 하는 덕목이 된 것이 그 예다.

 

한국 정치와 다른 듯 비슷한 일본 정치

정치란 결국 인간의 일

 

저자는 일본 정치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정치학자로서 정치(政治)라는 것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치인의 외적 이미지가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세력을 키우려면 자본을 축적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속성 등정치자금 규정법과 같이 촘촘하지 못한 규정을 악용해 의원들이 규제를 빠져나가는 법을 소쿠리(자루(?)) 틈새로 물이 술술 빠져나감에 비유해 자루법(ザル)’이라고 한다든지, 그 이름마저도 한국에서와 똑같은 모치다이(モチ, 떡값)’라는 용어가 일본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정치라는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정치는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정치란 결국 누군가에게 권력을 행사해 특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하는,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줄다리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속으로

아베 수상에 대한 여론은 지지한다보다 지지하지 않는다가 높게 나타난다. 즉 아베 정권에 대해서는 평가보다는 불만이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러면 이게 바로 아베 퇴진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정치의 복잡한 셈법이다. 아베는 싫지만 국정과 경제 안정을 바라는 유권자 심리가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자민당뿐이라는 투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소극적 지지에 아베 정권이 기대면서 연명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유권자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자민·공명 보수 여당의 점진적 개혁이 평가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가령 아베 자민당을 지지하는 대학생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지지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아베노믹스(Abenomics)’에 의한 경제 안정으로 취업률이 높아진 성과와 함께 아베 이외의 특별한 대안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또한 야당은 정부의 비난만을 일삼고 발목 잡기만 할뿐이며, 수권 정당으로서의 신뢰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고 국정을 담당했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여전히 뿌리 깊게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아베는 선거의 제왕인가, 27~28)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북한의 존재와 김정은의 도발이 아베와 자민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지원군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아베 자민당은 정권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과 함께 불리한 상황에서 선거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선거 기간 중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긴 자민당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안보 문제를 반복적으로 호소, 유권자의 불안 심리를 움켜쥐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선거가 끝난 후 아소 다로 부수상이 북한의 도발이 선거에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발언을 했다가 철회하는 해프닝 속에 자민당과 아베의 속내가 묻어난다. 북한의 도발이 아베 자민당에 도움이 된 것이다. 아베와 자민당에게 북한은 표면적으로 이지만 실질적으로 아베와 자민당을 키워주는 자양분같은 존재이며, 이른바 일본판 북풍의 최대 수혜자 또한 아베와 자민당이다. (과연 아베는 선거의 제왕인가, 30)

 

이러한 일본 수상의 빈번한 교체는 국제사회에서도 비웃음의 대상이 될 정도였으며, 거의 1년을 주기로 자동 회전문처럼 수상이 교체되는 정국을 보면서 일본 수상의 정치력과 위상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상 자신의 정치력과 리더십의 부재, 그리고 국정을 잘 풀어나가지 못한 결과로 등장한 단명 정권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제도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 수상이 갖고 있는 권한은 결코 미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상에게 주어진 권한을 어찌 활용하고 정권을 운용하느냐에 따라 수상의 재임 기간이 좌우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미국 대통령과 일본 수상 중 누구의 권한이 강할까, 39~40)

 

덧붙여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에도 존재하는 떡값이 일본에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민당에서는 파벌의 우두머리가 회원들에게 여름에는 고오리다이(氷代, 얼음값)’, 겨울에는 모치다이(モチ, 떡값)’을 정기적으로 건네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떡값이라는 것은 사정 기관이나 법조계, 언론계 등에 사회 특권층의 유력자나 기업이 관계 관리 차원에서, 필요에 의해 챙겨주는 검은 돈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집권당인 자민당에서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자민당 파벌 정치의 형해화(形骸化), 59)

 

앞서 살펴본 대로 의원내각제의 수상은 국회에서 임명되며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입장이므로,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국회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필수 불가결하다. 물론 국회 다수당의 당수(총재)가 총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통상적으로는 의원내각제의 수상이 대통령제 하의 대통령과 국회와의 관계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당과의 불화로 파열음이 일거나 수상이 당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수상에게 주어진 국회 해산권이란 전가의 보도를 빼들어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지휘하면서 공천권, 선거 자금과 선거 유세 지원 등을 통하여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 자신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수상의 전가의 보도국회 해산권, 78)

 

자민당의 파벌 정치에 대해서는 정책은 없고 권력투쟁만이 난무하며, ‘금권정치 만연의 원흉인 것처럼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 독재 체제 국가도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한 정당이 반세기 이상 정권의 자리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이나 정당의 좋고 싫음을 떠나 그 자체로 대단한 역사이며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자민당이 55년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집권 정당으로서 자리를 지키며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에는 위와 같은 파벌 간의 균형과 조화를 신조로 한 파벌 균형의 원리에 따른 관행이 기능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사장, 95)

 

일본 사회의 조직은 지나칠 정도로 전원 일치를 의식한다. 어떤 현안이나 과제에 대하여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 때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소속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따돌림을 당해도 된다는 각오와 신념 없이는 좀처럼 반대 의견을 내기가 힘든 암묵적인 카르텔이 조직을 지배한다. 만장일치야말로 조직의 화합과 융성의 원천이라는 도그마가 지배하는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아베 일강 독주 체재가 자리 잡은 최근의 자민당 내에서 대놓고 반대 의견을 내놓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당내 주요 간부, 98)

 

일본의 보수 우익들이 헌법 개정에 그토록 열을 올리면서 토해내는 주장이 있다. 지금의 헌법은 점령군에 의해 강요된(けられた)’ 헌법이므로, 일본에 의한 자주 헌법으로 개정해야 비로소 자주 독립국가의 면모와 위상을 갖춘다는 논리다. 반면 일본의 진보 세력은 현행 평화 헌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호헌을 주장한다. 어느 나라건 통상 보수 세력이 헌법을 비롯하여 현 국가체제의 수호를, 진보 세력이 개혁을 주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퍽 이례적이다. 일본의 보수는 개헌, 진보는 호헌이라는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으니 말이다. (점령군에 강요된 헌법, 183~184)

 

교육 기본법 개정 당시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문부과학대신이 한 텔레비전 대담에서 한 말을 되새겨보자. 전후의 교육 기본법 하에서는 이세진구(伊勢神宮)에 학생들을 참배시키는 학교가 줄었다고 언급하며, 닛쿄소(?)가 잘못된 교육을 한 탓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황실의 신사인 이세진구로 대표되는 신토(神道)를 타 종교와는 차별된 우리의 전통과 문화로 간주하고, 당연히 학생들을 참배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정교 분리(?分離)’와도 배치되는, 다분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이다.

이는 일본 국민 전체를 황국의 신민으로 규정하며, 국민 전체를 침략 전쟁으로 몰고 간 국가 신도 체제(?家神道?)’의 재현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또한 일본회의가 추구하고 요구하는 국가관의 정립을 위해 개정된 사례라 볼 수 있다. (21세기에 웬 애국교육인가, 227~228) --- 본문 중에서

 

아베는 평화주의자 할아버지를 말하지 않는다

아베 신조가 선택한 길

 

가운데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왼쪽이 그의 할아버지 아베 간, 오른쪽이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연임에 성공해, 20219월까지 총리직을 맡을 수 있게 됐다. 아베는 전쟁 금지와 군대 보유 금지를 명확히 한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일본을 바꾸려 하고 있다. 개헌은 아베가 존경하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이루지 못한 숙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일본 군국주의에 맞선 평화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평화헌법을 옹호했다. 아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바람에 어긋나는 길을 선택했다. 아베는 왜, 어떻게 우익의 길을 걸었을까.

64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지난 20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큰 선물을 받았다. “필생의 과업”(lifework)을 수행할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61) 전 자민당 간사장을 꺾고 3연임에 성공했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은 다수당 총재가 총리를 맡는다. 아베는 20219월까지 총리직을 맡을 수 있다. 1차 내각(2006920079), 2·3차 내각(201212현재)에 이어 앞으로의 임기(3)까지 더하면 10년 동안 집권하는 일본 역대 최장기 총리가 된다.

 

아베는 당선 뒤 인사말에서 드디어 여러분과 함께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민당의 개헌안을 가을 임시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해왔다. 아베는 2013<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은 내 라이프워크다. 국민투표법은 만들었지만 개헌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정치가가 됐는지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베는 2020년까지 개헌을 끝내고 싶어 한다.

 

헌법 개정을 놓고 일본 정치세력들의 투쟁이 조만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과 중국 등은 불안한 눈으로 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아베는 지난해 5월 헌법 시행 70주년 연설에서 헌법 91, 2항을 그대로 둔 채 자위대를 명문으로 써넣는 것에 대해선 국민적 토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91항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해당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그 행사를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 영원히 포기한다”, 2항은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를 수정할 경우 거센 비판과 반발이 불어닥칠 것이 뻔하다. 아베는 우회로를 택했다.

 

자민당이 지난 3월 낸 시안은 ‘9조의 2’를 신설해, 9조의 2-1항을 전조의 규정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지켜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자위의 조치를 갖는 것을 막지 않으며, 이를 위해 실력조직으로서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내각의 수장에 해당하는 내각총리대신을 최고 지휘감독자로 한 자위대를 보유한다”, 9조의 2-2자위대의 행동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회의 승인, 그밖의 통제에 따른다고 규정하자고 했다. ‘군대전력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니 실력조직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자위대를 헌법에 명시해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얘기다.

 

아베가 가지 않은 길

아베는 20139월 미국의 한 보수적인 싱크탱크에서 연설하며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우익 군국주의자의 길이 아베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뿌리를 살펴보면 다른 길도 있었다.

아베는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선거구(시모노세키가 포함된 야마구치 4)를 물려받은 3대 세습의원이다. 부모, 장인·장모(시아버지·시어머니), 조부모 또는 3촌 이내의 친척 가운데 국회의원이 있고, 이들의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이를 세습의원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앞줄 가운데) 전 일본 총리가 손자인 아베 신조를 무릎에 앉히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뒷줄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이 어머니 요코, 그리고 앞줄 맨 왼쪽이 형 히로노부다. 일본 총리관저 제공

 

아베는 할아버지 때부터 닦아놓은 지역구를 물려받고 있지만, 할아버지 아베 간(1894~1946)을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간은 신조가 태어나기 전에 숨졌다. 그러나 신조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베 간이라는 분이다. 익찬선거라는 것에 반대해 익찬회가 아닌 비익찬회로서 당선된 매우 드문 의원이었고, 반 도조 (히데키) 정권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온 의원이기도 했다.”

 

익찬선거19424월 치러진 중의원 선거를 말한다. 일본은 1941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며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도조 히데키(1884~1948, A급 전범으로 기소돼 교수형) 내각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익찬정치체제협의회를 만들어 군부의 정책에 협력하는 이들만 중의원 후보에 추천했다. 앞서 1940년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관제 국민통제조직인 대정익찬회가 만들어졌다. 협의회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이라는 이념에 불타는 인물 등을 후보로 추천했다. 비추천 후보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아베 간은 도조 내각과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협의회 추천 후보 466명 가운데 381명이 당선했고, 비추천 후보는 613명이나 됐으나 당선자는 85명에 그쳤다. 간은 중의원에 재선됐다.

 

야마구치현 오쓰군 헤키초(현재 나가토시)에서 태어난 간의 집안은 대대로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을 하고, 논밭과 산림을 많이 소유한 지주였다. 간은 도쿄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정치자금을 만들기 위해도쿄에서 자전거를 만들어 파는 상회를 설립했다. 이웃마을 유력가문의 시즈코와 1921년 결혼했지만 1924년 이혼하고 갓 태어난 아들 아베 신타로(1924~1991)를 안고 귀향했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주민들이 찾아와 촌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19374월 무소속으로 중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할아버지의 반전·평화·친노동

이때 간의 선거 공보물에는 이번 총선거는 시대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각오를 묻는 중대한 총선거” “국제 정세가 극도로 긴박해 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는 상태” “해가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져아무리 일을 해도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등의 문구가 담겨 있다. 국민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재벌 특권계급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고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흥정당을 만들고 싶다며 군부와 선을 그었다.

 

1961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가운데)가 총리관저 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왼쪽) 등을 만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간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전 건강이 악화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상에 누웠다. 뜻을 채 펴보지도 못하고 19461월 숨졌다. 아들 신타로는 당시 나이가 되지 않아 피선거권이 없었다. 19464월 선거를 앞두고 원 포인트후계자가 필요했다. 친척인 의사 기무라 요시오가 낙점됐다. 기무라는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중의원에 만들어진 제국헌법개정안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해 평화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간의 후계자로서 그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간이 병상에 있던 1945년 봄, 아들 신타로가 찾아왔다. 신타로는 도쿄대 법학부 진학이 결정됐으나,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194410월 해군 시가항공대에 징병됐다. 그리고 자살공격을 뜻하는 특공에 지원했다. 군대에서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간은 아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쓸데없이 죽거나 하진 말거라라고 당부했다. 신타로는 7월 특공훈련을 받고 출격을 기다리다 종전을 맞았다. 그는 나중에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특공대로 출격해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평화는 소중한 것이기에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신타로가 정치인이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는 아버지는 대정당(익찬회)을 적으로 돌리고 금권부패를 규탄했으며, 평생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하는 자세를 이어갔다. 아버지에게 정치가로서의 신념과 청렴결백함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신타로는 대학 졸업 뒤 살아있는 정치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기자가 되기로 하고 1949<마이니치신문>에 입사했다. 2년 뒤 선배의 소개로 기시 노부스케(1896~1987)의 큰딸 요코(99)와 결혼한다. 신타로는 내가 (전범 용의자의 딸과) 결혼을 해준 것이라고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1956년 기시가 외무상이 되자 신타로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기시의 비서관이 됐다. 19585월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기시 가문의 후광을 입고 신타로는 출세의 길을 달렸다. 관방장관, 외무상,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고 총리 물망에 올랐다. 그래도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아베 간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991년 췌장암으로 숨지면서 총리의 꿈도 스러졌다.

 

신타로가 숨진 뒤 <마이니치신문>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라는 자민당의 매파 계보를 이어 보수의 본령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평화헌법 옹호론자로서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한 노선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198512월 외무상이었던 신타로는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세계대전은 일본을 망국의 위기에 빠뜨린 매우 잘못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으로도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엄혹한 비판이 있다. 정부도 그런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며 대응해가야 한다며 전향적인 역사인식을 내보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신조야,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나는 아베 간의 아들이다. 난 반전평화니까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조가 택한 길은 아베 간의 길이 아닌 기시 노부스케의 길이었다. 신조는 1996년 공저로 낸 <보수혁명선언>에서 아버지는 전쟁이라고 하는 지극히 비극적인 경험을 했던 당사자로서 그 체험이 사상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할아버지(기시)의 경우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어떤 의미로 일본이 대단히 비약적인 전진을 달성했던 영광의 시절이 청춘이었으며 젊은 날의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라고 썼다. 아버지의 전쟁 체험을 사상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것으로 평가한 반면, 외할아버지의 청춘 시절 일본이 러일전쟁, 한반도 식민지배, 만주 침략 등으로 나아간 때를 영광의 길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길  

쇼와의 요괴로 불린 기시는 189611월 야마구치현 구마게군 다부세초에서 태어났다. 기시의 동생은 비핵 3원칙’(핵무기는 만들지도 않고, 갖지도 않으며,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을 선언해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1901~1975) 전 총리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관료가 된 기시는 193610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총무사장이 됐고, 국가 주도형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이는 이후 한국에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델이 되었다. 1941년 만주군 출신의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자 상공대신에 임명됐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 전시물자를 통제하는 군수차관을 맡았다. 그러나 1944년 사이판이 함락되자 조기 종전을 주장하며 도조와 대립했고, 이 대립이 도조 내각의 붕괴를 불렀다. 일본의 각의(한국의 국무회의)는 만장일치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일이 그가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을 면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이 무렵 기시는 아베 간을 문병했다. 사상적으로 정반대였던 간을 찾아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기시의 직계 중의원 의원으로 자치상 등을 지낸 후키다 아키라(1927~2017)기시 선생은 아베 간 선생이 훌륭한 분이었다며 평생 존경했다. 정치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는 “(기시는) 아베 간의 아들이라면 괜찮다, 똑바른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며 신타로와 요코의 결혼 배경을 설명한다.

 

기시는 19459월 에이(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3년여 동안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기소를 면하고 19481224일 석방된다. 도조 등은 하루 전 처형됐다. 기시는 19533월 야마구치현에서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총리는 요시다 시게루(1878~1967),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한다는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을 내놓았다. 요시다는 새 헌법(평화헌법)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스러워해야 할 참으로 훌륭한 헌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시는 평화헌법을 점령국이 강요한 헌법으로 봤다. 그는 현재의 헌법은 (미국이)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기시는 보수대연합을 주도하며 1955년 자민당을 탄생시키고,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1957년 총리가 된 기시는 19605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의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거센 반발을 불렀다.(아베 신조도 20159월 안보법제를 날치기 통과시켰다.) 시민들은 일본 내 미군기지가 아시아에서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것에 반대했다. 기시는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살해당한다면 바라는 바다라고 말하며 버텼다. 결국 두달 뒤인 7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헌법 개정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다정했던 외할아버지, 차가웠던 아버지

기시는 요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신조한테는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신조는 1954년 도쿄에서 신타로와 요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시는 손자들을 자주 불러서 함께 놀았다. 요코는 아버지는 손자들을 귀여워해 시간이 되면 언제든 함께했다고 말했다. 기시는 손자들을 등에 올려 말을 태워주곤 했다. 신조는 외할아버지는 에이급 전범 용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고, 그러한 분위기에 반발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교도통신> 정치부 기자 출신의 노가미 다다오키는 신조의 기시에 대한 사상적 편향을 이해하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기시한테 쏠린 게 아니냐는 얘기다. 신조는 소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 세이케이학원에서 다녔다. 자동적으로 상급학교로 진학해, 입시를 치른 적이 없다. 신조는 이른바 명문대로 불리는 도쿄대나 게이오대, 와세다대를 갈 성적이 못 됐다. 할아버지·외할아버지·아버지는 모두 도쿄대를 나왔다. 신타로가 도쿄대에 가라고 신조를 닦달하고, “대학은 도쿄대밖에 없다고 생각하라면서 두꺼운 사전으로 신조의 머리를 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지난 20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수를 치는 동료 의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자민당 총재 3연임에 성공한 아베

드디어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싶다

실력조직이란 말 만들어 자위대를

명시하는 개헌안 임시국회 제출 뜻

 

아베 나를 군국주의자라 불러도 돼

할아버지는 평화주의길 걸으며

전범도조 히데키 내각·전쟁에 반대

참전한 아들에게도 쓸데없이 죽지 마라

 

기시 노부스케 딸과 결혼한 아버지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평화헌법 옹호하며 반전·평화 노선

아베는 정반대 기시의 길선택

 

일본의 영광의 시절이 외조부 청춘

도쿄대에 가라는 아버지와의 갈등도

기시에게 편향되게 했다는 분석도

평범했던 아베, 정계에서 우익 노선

 

일본인 납치문제 계기 총리직 올라

집단적 자위권행사가 가능하다고

헌법 해석 바꾸고, 안보법제 날치기

반대여론 커 개헌 이뤄질지 불투명

 

신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세이케이대 법학부를 다닌 동창생들은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인상이나 기억에 남는 게 없다고 할 정도다. 신조는 대학 졸업 뒤 미국으로 어학연수 겸 유학을 갔다 2년 만에 귀국해 고베제강소에 정략 취직했다. 1982년 외무상이 된 신타로는 신조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비서관이 되라고 했다. 아베는 잠시 저항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회사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회사가 퇴직 설득에 나섰고, 신조는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추락했다.

 

신조의 형 히로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가가 되기 싫었다고 하면서, 큰아들인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신조가 정계에 입문한 뒤)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이에 기시의 사고방식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고베제강소에서 신조의 상사였던 야노 신지는 (신조)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우파라는 것은 전혀 느낀 적이 없다. 정치권에 들어간 다음에 몸에 익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마치 강아지가 늑대 새끼 무리에 들어간 것처럼, 이후 그렇게 돼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5919일 안보법제 제정·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위헌” “폐안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도련님에서 매파의 기수로

19938월 비자민당 연합세력으로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80)는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지난 전쟁은) 침략전쟁,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발한 자민당의 우파 의원들은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어 1995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일본이 수행한 대동아전쟁은 자존·자위의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침략전쟁이 아니고,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는 날조로 사실이 아니며, 가해·전쟁범죄는 없다고 했다. 이 위원회에 초선이던 아베도 참여했다. 아베는 이후 우익활동에 적극 나서면서 부잣집 도련님에서 매파의 귀공자로 변해갔다.

 

아베가 스타가 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 20029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76)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일 국교정상화를 위해서였다. 이날 오전 북한은 일본이 납치 피해자라며 조사를 요청한 이들에 대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고 통보했다. 8명 사망 소식에 고이즈미 등은 망연자실했다. 관방부장관으로 회담에 참가했던 아베는 “(사망자에 대한) 설명과 사죄가 없다면 공동선언에 서명하지 않는 게 좋다. 그때는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자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솔직히 사죄하고 싶다고 했고, 고이즈미는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두 나라는 국교정상화 회담도 재개하기로 했다.

 

일본 사회는 8명 사망 소식에 충격에 빠졌다. 아베는 최대 수혜자였다. 평양에서 강경론을 주도한 게 알려지면서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에 일시 귀국한 뒤 이들을 북한에 돌려보내는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정부는 피해자들한테 맡기자는 태도였다. 아베는 국가가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정부는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때 아베한테는 납치의 아베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타가 된 아베는 2003년 자민당 간사장에 발탁됐고, 2005년에 관방장관에 임명돼 사실상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20069월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총리였다. 아베는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내세웠다. 전후체제에서 벗어나겠다는 건 연합군총사령부(GHQ)강요한평화헌법 등을 해체하겠다는 뜻이다.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고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키고, 국민투표법을 제정하며 한걸음씩 나아갔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도 무력화하려 했으나, 미국 하원이 20077월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면서 좌절됐다. 각료들의 정치자금 스캔들 등으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고 궤양성 대장염으로 건강이 악화된 아베는 9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아베는 어떤 칼럼니스트가 학교에서 아베한다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에 대한 글을 썼다. ‘아베한다는 도중에 일을 내던지는 뜻이라고 했다,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말한다.

 

참담한 실패와 재기

아베는 산에 오르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신약으로 궤양성 대장염도 치료됐다. 재기에 나선 아베는 20098월 중의원 선거에 당선했다. 2011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해 후쿠시마 제1원전을 덮쳤다. 주위에선 경제를 파고들어야 재집권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때부터 아베는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라 할 양적완화(대규모 유동성 공급)를 주장했다. 20129월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아베가 도전할 것이라는 예상은 적었다.

 

아베의 마음을 돌린 것은 기시 노부스케의 선거구를 물려받은 후키다 아키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베에게 기시 선생은 정치가는 일단 정치가가 됐으면 완전 연소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네. 기시 선생은 다시 한번 총리가 돼 헌법을 개정하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셨다네. 당신에게도 미련이 있을 것이네. 승패는 신경쓰지 말고 나서게라고 했다. 아베는 올해도 맞붙은 이시바한테 1차 투표에서는 뒤졌으나 국회의원만 투표권을 갖는 2차 투표에서 이겨 당선됐다.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는 20134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도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따라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침략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95815일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94) 총리는 종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었다. 아베는 201312월 야스쿠니신사도 방문했다.

 

최종 목표, 개헌

역대 일본 정부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집단적 자위권행사가 헌법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아베는 2014년 각의 결정으로 이를 뒤집으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허용된다고 헌법 해석을 바꿨다. 이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2015년 자위대법, 중요영향사태법 등 이른바 안보법제를 개정·제정했다. 918일 한밤중에 참의원 본회의에서 날치기 통과시켰다. 자위대는 미군이 가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따라가 미군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2015923일 일본 도쿄에서 25000여명의 시민이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제 제정·개정 강행처리와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이제 아베는 헌법 자체를 바꿔 외할아버지의 염원을 실현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 개헌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개헌 찬성 세력이 중의원과 참의원의 3분의 2 이상이지만, 국민투표를 통과할지는 알 수 없다. <교도통신>이 지난 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가 가을 임시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응답자의 51%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한다35.7%였다. 상당수 일본인들이 개헌에 동의하지 않는 셈이다.

 

스즈키 게이스케(41) 자민당 청년국장(중의원 의원)은 미국 경제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이 개헌 찬성이 어느 정도 될 것으로 예상하느냐고 묻자 높게 나오면 60%가 나올 수 있지만, 투표 당일 북한이 미사일을 쏴주면 80%는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과 핵실험,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 등을 빌미로 힘을 키워온 일본 우익의 셈법이다.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개헌을 추진하는 그들에겐 탐탁지 않다. 섣불리 국민투표를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투표에서 부결되기라도 하면 다시 개헌을 추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베가 국민들의 반대와 주변국들의 반발 등을 무릅쓰며 사활을 걸고 개헌을 강행할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2018.9.29.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저자 김세진|호밀밭 |2018.08.

 

저자 : 김세진-청년 김세진은 육군 항공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전국 곳곳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하고, 2007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201167기로 졸업하며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에는 28사단 최전방 GOP소초장, 22사단과 1야전군사령부의 재정장교로 복무한 뒤 정든 군문을 떠나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전역 직후인 20163, 건명원(建明苑)에 입학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동양철학포럼의 젊은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부터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를 연구하고자 일본어와 일본사 공부에 뛰어들어 일본 각지를 탐방하고 후지산 정상에도 발자국을 남기고 왔다.

 

건명원을 2기로 졸업한 뒤, 평소 스타트업에 대해 가졌던 관심을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던 중 핀테크 1세대 레이니스트에 합류했다. 지금은 뱅크샐러드 고객감동팀과 컬처팀을 함께 담당하며, 건명원의 일본사, 요시다 쇼인강의와 역사탐방활동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육사 생도 생활 4년의 풀스토리가 담긴 나를 외치다!(2016)가 있고, 독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따로 또 같이길을 걷는 동료들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 꿈꾸고 도전하며 나아가는 중이다

 

목차

여는 말

요시다 쇼인을 만나러 가는 길

 

1. 에도시대와 조슈번(야마구치 현)

에도시대와 조슈 번(야마구치 현)

일본의 근현대

 

2. 요시다 쇼인의 생애 뜨겁게 불타오른 29

뜨겁게 불타오른 29

요시다 쇼인의 사상

 

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쇼카손주쿠

쇼카손주쿠

개인학교의 유행과 역할

쇼카손주쿠의 역사

학생 구성

수업 방식

교육 특색

평가

요시다 쇼인의 어록

 

4.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일본의 새싹

일본의 새싹

 

5. 요시다 쇼인의 짙은 그림자

요시다 쇼인의 짙은 그림자

진정한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위해

 

닫는 말

감사의 말

부록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

일본 혼의 심장인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

 

요시다 쇼인은 지금도 수많은 일본의 리더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존경하고 있는 일본 근대 사상의 뿌리와 같은 인물이다. 일본의 극우 정치를 상징하는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2013, 요시다 쇼인의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2016년 말 국회에서도 요시다 쇼인의 이십일회맹사이야기를 인용했다. 요시다 쇼인이 활동했던 야마구치 현은 현재 아베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며 아베 총리의 좌우명 역시 요시다 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이다. 그의 제자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는 근대 일본의 초대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중요한 인물인 요시다 쇼인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나마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며,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집대성한 인물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일 양국의 외교 마찰을 상징하는 야스쿠니 신사가 원래 요시다 쇼인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실을 비롯해 그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스탈로치와 동등하게 여겨지고 일본 우익사상의 아버지로도 여겨지며 독도영유권 주장과도 관련 있다는 사실 등에 대해 어둡긴 마찬가지다.

 

우리는 왜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요시다 쇼인에 대해 모르는 걸까? 한반도 역사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는 그의 이름과 사상을, 그동안의 역사 수업에서 왜 한 번도 접할 수 없었던 걸까?

 

반일 감정에 가려져 있던 요시다 쇼인,

그의 생애와 행적을 낱낱이 알리는 한국 최초의 책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에 관해 다룬 책이 직간접적으로 약 1,200여 종 가까이 발간됐다. 한국에는 그를 다룬 책이 단 한 권도 없다. 우리가 그동안 지피지기를 외치면서도 감정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은 그를 사상가이자 혁명가, 근대 이후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걸출한 인물들을 기른 교육가, 일본 전국도 부족해 목숨을 걸고 해외로 나가려 했던 호기심 많은 탐험가, 결기 넘치는 글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문장가, 오직 일본을 위하는 마음을 지녔던 애국자, 행동으로 인간을 감화시킨 인간 등으로 기억하며 숭배한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아, 우리가 그 사상적 기틀을 닦은 요시다 쇼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시다 쇼인과 그의 학교 쇼카손주쿠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을 살피며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더 넓고 큰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제껏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자신과 상대방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 이해와 배려의 여지가 생겨나고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으며 사과, 용서, 화해 등으로 건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역사의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갈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의 손님이 되어 바라보고 끌려갈 것인지는 우리의 진지한 성찰과 지피지기(知彼知己)에 달려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조슈번이 이백 년 넘게 에도막부에 대해 가져온 반감은 19세기 서양세력의 등장과 함께 촉발된 존왕양이 사상(천황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물리치자)과 융합되어 젊은 사무라이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크게 영향을 준 강력한 지도자가 바로 요시다 쇼인이었다. 18

 

요시다 쇼인은 20대 초반의 3년 반 동안, 13천 리에 걸쳐 일본 각지를 돌아다녔다. 각 지역의 풍습과 지형 등을 살피고, 다양한 학자들을 만나 함께 책 읽고 토론하며 시야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엄하게 처벌받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일본을 구해야 한다는 목표만 바라보고 움직인 쇼인의 도전정신과 용기 그리고 행동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일본 곳곳으로 쇼인의 행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50

 

2018년 현재 일본의 정치지도자인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은 야마구지 현(조슈번) 출신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쇼인의 글을 바탕으로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총리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3813일에는 쇼인의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2016년 말 국회에서 쇼인의 이십일회맹사이야기를 언급하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하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도쿄의 헌정기념관에 걸린 역대 총리들의 좌우명이 걸려있는데 아베 신조의 좌우명은 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이다.(쇼인의 학생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좌우명도 이와 같았다.) 요시다 쇼인의 목소리는 그의 사후 160여 년이 된 지금까지도 일본 곳곳에서 메아리쳐 울리고 있다. 93

 

쇼인은 특히 조선을 침략하고 합병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의 제자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훗날 이 논리를 메이지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총리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제국의회의 첫 회의 자리에서 일본의 이익선은 한반도라고 주장하며 침략정책을 주도했다. 99

 

한편으론 일본을 군국주의로 이끈 인물들 중에 여럿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에서 교육의 신요시다 쇼인의 침략 사상과 폭력성 등은 잘 논의되지 않는 현실이다. 위대한 교육가, 사상가로 미화되며 그의 모든 주장이 일본을 위하는 것으로 합리화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침략주의에 의해 비극을 겪은 국가들은 이렇게 쇼인이 미화되는 현실에 대해 거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에 대한 이해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자칫하면 감정적인 판단으로 빠지기 쉬운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의 성패와 명암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선 예찬과 미화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것,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 126

 

물론 쇼카손주쿠에서의 교육으로 모든 학생이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국가지도자인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메이지 정부의 장관이 된 마에하라 잇세이, 야마다 아키요시, 노무라 야스시, 시나가와 야지로 등을 포함해 30.6%의 학생이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법률, 사회 등 각계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된 것은 일본의 어떤 교육기관도 넘보기 힘든 성과였다. 132

 

일본의 우익사상과 역사 인식을 상징하기도 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이름은 섬뜩하게도조슈신사(長州神社)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쇼카손주쿠 학생들과 조슈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주도하여 18698월 도쿄의 지요타 구에 조슈신사를 세우고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 등의 위패를 가져다 놓았다. 186

 

어제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고 내일은 오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본과 건강한 관계를 맺든, 그들의 되바라진 행태에 대비하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선 모든 선입견과 감정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제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오늘을 비춰야 한다. 몰라서 당하는 것은 알고 당한 것보다 더 큰 죄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때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이제라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 한다. 213

 

출처: http://blog.naver.com/bosom86/221413603767



후쿠자와유키치의 아시아침략사상을 묻는다 저자 야스카와주노스케|역자 이향철|역사비평사 |2011.04

저자 야스카와주노스케는 1935년 효고현에서 출생하여 1964년 나고야대학 대학원 교육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후 미야기교육대학, 사이타마대학을 거쳐 1998년에 나고야대학을 정년퇴임할 때까지 사회사상사적 관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육사상 등을 연구했다. 일본 근대교육의 사상구조(1970), 15년전쟁과 교육(1986), 여성차별은 왜 존속하는가(1986), 일본 근대화와 전쟁책임(1997), 일본 근대 교육과 차별(1998), 대학교육의 혁신과 실천(1998) 등의 저작을 발표했다. 정년퇴임 이후 일본전몰학생기념회, 부전병사?시민의 모임 등에서 활동하며 시민운동을 펼쳤고, 기존의 후쿠자와 연구를 일본의 전쟁책임을 고발하는 아시아 민중의 관점에서 재검토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인식,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루야마 마사오(2003),후쿠자와 유키치의 전쟁론과 천황제론(2006) 등을 써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지금 일본에서 엄밀한 현실인식과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발언하고 행동하는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서장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의 7대 불가사의

1. 정치 바깥의 천황 vs 친정親征하는 천황2. “일신독립=일국독립의 본뜻3. 후쿠자와의 상황적 사고와 발언4. 대상에 대한 내재화의 태만학문적 과정으로부터의 일탈5. 후쿠자와는 원칙이 있는 철학가인가6. 빌려온 수식어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7. 일본 근대화의 스승, 혹은 가증스런 민족의 적

 

1장 초기 계몽기 후쿠자와 유키치의 국제관계인식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 유키치론을 검토하다

1. 방약무인, 약자에 대한 횡포, 무정잔혹, 힘이 곧 정의이다2. 초기 계몽기의 국제논쟁대만 출병과 강화도사건3. 아편전쟁의 인식과 평가중국의 민족적 영웅 임칙서에 대한 비난4. 메이지 정부와 후쿠자와의 관계초기 계몽기 후쿠자와 사상의 정리와 평가

 

2장 중기의 후쿠자와 유키치, 보수사상의 확립임오군란, 갑신정변, 탈아론

1. 보수사상으로의 과도기<통속국권론><민정일신>2. 보수사상의 확립<시사소언><제실론>3. 임오군란.갑신정변과 후쿠자와 유키치4. 아시아 멸시사상과 문명사관에 의한 침략의 합리화, 탈아론5. 청일전쟁으로 가는 길은 불가피했나

 

3장 청일전쟁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조선 왕궁 점령.여순 학살사건.민비살해.대만정복전쟁

1.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쟁 캠페인거류민 보호라는 구실2. 다시 문명사관에 의한 침략의 합리화3. 조선의 자립?독립을 위해서라는 구실4. 아시아에 대한 멸시.편견.마이너스 평가의 무차별 방류5. 전쟁 승리에 대한 열중.열광전쟁보도의 나쁜 전통6. 일관된 군비확대 요구7. 메이지 천황의 적극적 전쟁지도와 그 찬미야스쿠니사상8. 대만정복전쟁, 무단적 식민지배와 후쿠자와 유키치9. 저널리스트 후쿠자와의 은폐보도조선왕궁점령, 여순.운림학살사건, 민비살해

 

4장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후쿠자와 유키치가 깔아놓은 어두운 쇼와의 궤도

1. 말년의 후쿠자와 유키치2.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밝지 않은 메이지에서 어두운 쇼와3. 전쟁책임의 관점에서 학문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마무리글

역자후기

추천사후쿠자와 유키치의 동아시아 침략사상을 바로 알기 위하여

부록주석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인식의 궤적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근대의스승인가침략전쟁의선동가인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일신(一身)독립해야 일국(一國)독립한다.”

―「학문의 권유중에서

 

지금도 일본의 최고액권 지폐 초상인물로서 존경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의 스승”, 더 나아가 일본 근대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메이지유신 당시 후쿠자와가 일본을 국민국가로 만들고, 그리하여 주권국가로 만드는 두 가지 과제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일신독립해야 일국독립한다는 구절에서 개인적 자유와 국민적 독립, 국민적 독립과 국제적 평등이 완전히 같은 원리로 관철되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 내셔널리즘에서 아름답지만 짧았던 고전적 균형의 시대였다라고 결론지었다. 침략전쟁과 패전으로 얼룩진 어두운 쇼와의 터널로 빠져들기 전, 활기차고 지적이며 영광스러운 메이지시대의 이미지를 후쿠자와에게 투영한 것이다. 이는 마루야마가 만들어낸 후쿠자와지만, 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침묵했던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세대 모두의 후쿠자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후쿠자와의 본모습일까?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으로 고통 받은 아시아 민족들에게 후쿠자와는 근대화과정을 짓밟고 파탄으로 내몬 우리 민족 전체의 적”(한국)이나 가장 가증스러운 민족의 적”(대만)이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죽은 한 인물에 대한 이 아찔한 평가의 온도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진실은 무엇일까?

후쿠자와스스로말하게하라

─『후쿠자와유키치전집에서발췌한400여개의주요발언수록

 

일본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후쿠자와 유키치)과 그 신의 사제장(마루야마 마사오)의 우상숭배를 파괴하는 격렬한 내용이지만 전집에서 후쿠자와 자신의 말을 인용해 하나하나 필주(筆誅)를 가하는, 실로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써 쉽게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메하라 다케시, 中日新聞2001. 1. 15

 

책 말미의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인식의 궤적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400여 개의 발언은 모두 후쿠자와 유키치가 평생에 걸쳐 남긴 것들이다. 국제관계인식, 전쟁지도, 아시아 멸시 등 각 발언의 요지에 따라 분류하여 시기마다 어떤 발언이 주를 이루었는지, 평생에 걸쳐 어떤 발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그동안 전후세대의 사상가들이 전쟁과 패전으로 얼룩진 시대를 넘어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자유주의자라는 환상을 덮어씌우고, 그 이미지를 뒤흔들 만한 발언은 외면한 채 오로지 입맛에 맞는 문구들만 주목해왔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진정한 후쿠자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다름 아닌 후쿠자와의 텍스트들에 정면 도전한다. 후쿠자와의 입으로 후쿠자와를 설명하는 그의 치밀하고 집요한 작업은 엄밀한 연구자의 성실성이 무엇인지 소리 없이 웅변해준다.

 

제국의영광을꿈꾼국가주의자,후쿠자와유키치

어리석은백성을농락하는사술천황제와병신을위로하는종교

 

그는 고학파 방식의 충용의열은 () 칼날이 잘 드는 보도이지만, “날이 잘 선 보도를 칼집에 깊숙이 넣어두고 빼지 않는 것이 태평성대를 사는 무사의 몸가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맞이하여 인간의 씨가 마를 때까지 싸운다일본 신민의 각오를 강조할 필요성을 인식하고서야 내가 평생 침묵한 것은 오늘을 기다려 크게 한마디 내뱉기 위해서였다라고 표명하고 천황 친정을 재론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천황제의 본질이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술(詐術)”(제실론)임을 일찍이 간파하고서도 적극적으로 선택했을뿐더러, 일생 동안 천황을 위해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충성의 맹세를 수없이 반복했다. 천황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평소에는 정치 바깥에 신격화된 존재로 두다가, 결정적인 전쟁의 순간 천황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도록 한다는 발상 역시, 어리석은 백성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국가에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선동하고자 했던 정치적 속셈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는, 천황을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시켜 아시아를 집어삼킨 뒤 서구열강과 겨루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무엇보다 앞섰다. 그러기 위해 가장 긴요한 일은 전국 인민의 머릿속에 국가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었고, “일국의 인심을 흥기하여 전체를 감동시키는 방편으로는 외전(外戰)에 필적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다”,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고 외치며 백성들의 충성심을 일깨워 천황을 위해 한목숨 바치게 하는 한편, 차티스트운동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서구의 흐름이 일본의 서민들에게 전해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바보와 병신들에게는 종교가 꼭 맞는 구색이라며 수백 편의 글로 종교진흥책을 펼쳤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 자신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지만 말이다.

 

아시아멸시와침략의선두주자

멸망이야말로오히려조선인민들의행복을크게하는방편이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도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나니.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바라는 바이니라.”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침략을 선도해온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자의 위선과 편견, 오만함, 다른 문화에 대한 멸시와 비하가 글마다 넘쳐흐른다.

후쿠자와는 막부 말기 젊은 시절에 세 차례에 걸쳐 구미를 여행했다. 그 도정에서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의 관리가 중국, 인도, 기타 아시아 지역에서 무력을 배경으로 현지인을 거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방약무인한 식민지배의 현실을 목격했다. 정말로 후쿠자와가 혜안을 지닌 젊은이였다면, 동아시아 3국이 연대하여 서구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낼 궁리를 했을 법도 하다. 그랬다면 아시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유쾌하다고 곱씹으며, 영국인이 현지인을 다루는 것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까지 눌러 동양의 권세를 일본의 손에 움켜쥐자고 하는 제국주의적 권력정치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때를 같이 하여 중국, 조선, 대만 등 아시아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멸시, 편견의 발언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홍콩의 현지인은 풍속이 극히 비루하고 오로지 영국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 “현금의 우두머리는 홍수전으로, 스스로 천황으로 칭하고 있다. 그 도당들이 인원은 많다고 하지만 원래 오합지졸로 용병의 법을 아는 자가 없다.”(西航記) “대만 야만인()은 금수와 같은 자로 사람 두서넛 잡아먹는 것은 보통이고 () 조선인은 그저 완고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외국선만 발견하면 다짜고짜 발포하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난날과 같다.”(要知論) 유치할 정도의 폭언과, 문명의 이름으로 미화된 침략의 욕망을 감추지 않은 노골적인 글들은, 과연 후쿠자와가 당대의 사상가로 불리는 이가 맞는지 의문마저 품게 만든다.

 

밝은메이지의스승후쿠자와,“어두운쇼와의길을연유키치

아시아민족들의역사인식의소통을 위하여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가로놓인 역사인식의 간격은, 들여다보면 벌렁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심각하다.”

운노 후쿠주

 

지금까지도 일본사회는 전쟁과 패전으로 얼룩진 어두운 쇼와시대의 기억을 밝은 메이지시대의 영광과 단절시킨 채 이해하는 풍조에 젖어 있다. 저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밝은 메이지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야말로 어두운 쇼와로의 길을 열어젖힌 장본인임을 폭로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자기최면을 깨고자 시도한다. 그것이야말로 메이지시대부터 싹을 틔웠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직시하면서 전 사회, 무엇보다 평범한 일본인 개개인의 전쟁책임을 절감하는 작업의 시작이자 단초가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제국주의시대에 잘못된 탈아입구 노선을 선택하여 아시아와 일본의 근대사에 불행한 균열과 분열을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극복하는 공동연구가 진전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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