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시대 대한민국 도시빈민은 어떻게 살았는가? 저자 최인기|동녘 |2012.03
저자 최인기는 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온 빈민활동가.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주변과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87년부터 보석 세공 공장에서 일하며 부조리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고, 노동자와 활동가를 병행하며 살아왔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20년 넘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노점 단속과 철거문제에 관심이 많다. 1995년부터 빈곤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고 ‘전국노점상연합’에서 활동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빈민연합’의 사무처장을 맡으며 노점 단속 현장뿐 아니라 주택과 상권의 철거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지금은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한다.
최인기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것만큼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첫 책 《가난의 시대》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각 정권별 도시빈민의 현황 과 투쟁의 역사를 담았다. 각 정권들이 시행한 정책들이 시민들의 주거, 생활 문제와 어떻게 맞물려 갈등을 양산했는지 살펴봤다. 이번 책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용산, 청계천, 포이동, 상도동, 동자동 등 철거와 개발 문제로 뜻 하지 않게 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나 극빈층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찾아가 공간이 역사와 문제점,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최인기의 블로그 '사노라면(HTTP://BLOG.NAVER.COM/TAKEBEST)’에 가면 빈민 문제의 심각성과 빈민운동의 현장을 더 볼 수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_ 가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1부 대한민국 도시빈민운동사
1 극심한 사회변동 속 빈민의 등장 :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빈민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노점상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 해방과 한국전쟁이 낳은 도시빈민
2 판자촌의 형성과 광주대단지사건 : 1960년대
이농민들이 도시빈민으로 / 무허가 판자촌의 철거와 주택정책 시행의 이중성 / 빈민운동의 등장,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 / 광주대단지사건은 무엇을 남겼나
3 시민 아파트의 등장과 빈민운동의 조직화 : 1970년대
서울시의 인구 증가와 시민 아파트의 등장 /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시행/ 전라도 광주의 무등산타잔, 박흥숙/‘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활동/ 1970년대 빈민운동이 남긴 것
4.재개발 사업의 본격화와 철거투쟁 : 전두환 정부
공영재개발과 합동재개발 사업/ 목동투쟁과 세입자 철거문제/ 사당동 판자촌과 철거지역의 청소년문제/ 도시재개발 반대의 산실, 상계동투쟁/ 인권 유린의 상징, 신당동/ 1980년대 철거민운동의 흐름
5 민주화 물결 속의 도시빈민운동 : 1980년대
국제행사와 줄이은 노점상 단속 / 노점상의 조직된 투쟁, 6·13대회/ 1980년대의 도시빈민연대운동/ 낙골교회와 혀 잘린 하나님/ 도시빈민연대 투쟁과 '전국빈민연합'의 결성
6 주택정책의 부흥과 빈민운동의 침체 : 노태우 정부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과 주택정책/ 돈암동의 영구임대주택 쟁책/ 폭력과 저항의 현장, 신정동/ 철거민들의 연이은 죽음/ 범죄와의 전쟁과 노점상 단속/ 명동성당에서의 36일간 투쟁 / “이 한 몸 바쳐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 도시빈민 후보의 총선 출마 / 노태우 정권의 도시빈민운동 약평/ 지역에서의 도시빈민운동/ 빈민 단체들의 결성과 해체
7 산업구조의 확대와 노점상 단속의 강화 : 김영삼 정부
허울 좋은 ‘신경제 5개년 계획’과 철거투쟁/ 문민정부의 노점상 회유정책/ 1급 중증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단속반과 철거반은 처벌 대상에서 예외인가?/ 김영삼 정권 시기 도시빈민운동 약평
8 생산적 복지정책과 반빈곤운동의 등장 : 김대중 정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과 반빈곤운동의 도약/ 장애인 노점상 최옥란 열사의 죽음과 장애인 이동권 투쟁/ 서민들을 위한 주택정책은 얼마나 실현됐는가?/ ‘국민의 정부’에도 철거는 자행됐다?
수원시 권선4지구의 철거투쟁/ 유통센터의 확산과 노점상/ 대전역 노숙인의 벗, 윤창영 열사의 분신/ 2002년 월드컵과 박봉규 열사 투쟁
9 청계천 복원공사 노점상 관리정책의 등장 : 노무현 정부
내 집 마련은 제2의 로또인가?/ 노무현 정부가 실시한 주택정책들은 무엇을 남겼나?/ 상도동 철거투쟁/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의 철거투쟁/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풍동투쟁/ 인천 향촌마을의 투쟁
/ 노점상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청계천 복원공사와 노점상 투쟁/ ‘국제노점상연합’의 출범/ 서울시의 ‘노점상관리동제대책’과 이근재 열사 투쟁
10 개발 중심의 정책과 ‘신빈곤층’의 확산 : 이명박 정부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 용산4가 다섯 철거민의 죽음/ 아버지는 빈민열사, 가족은 명동 철거민으로/ 포이동 266번지의 화재와 철거 현장/ 롯데월드 123층에 맞서 싸운 포장마차 10대/ 송파 가락시장의 현대화사업과 투쟁/ 재래시장의 현대화사업은 옳은 것인가?/ 노점 단속 시스템의 변화
2부 도시빈민운동, 어디로 가야하는가?
1 대한민국 도시빈민 현황
도시빈민을 보는 다양한 시각/상대적 과잉인구론과 비공식 부문 운동론/ 대한민국의 빈곤, 어느 정도인가?/ 국민은 모두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고 있는가?/ 비정규직의 차별과 최저임금 문제/ 빈곤의 확대는 가족의 해체로
2 복지정책 속 주거정책
복지정책은 어떻게 흘러왔는가/ 대한민국 주거정책, 무엇이 필요한가?/ 지역운동의 현주소
3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철거민은 누구인가?/ 철거민운동의 과제/ 노점상인은 누구인가? / 노점상인의 계급적 지위는 무엇인가?/ 노점상은 기회주의적인 집단인가?/ 노점상운동에 필요한 네 가지
4 빈민운동 조직의 변화
철거민운동 조직의 발전과 분화/ 노점상운동 조직의 발전과 분화/ 2000년대의 새로운 반빈곤 연대운동, ‘빈곤사회연대’
5 도시빈민 활동가들은 누구인가?
왜 빈민활동가가 되었나?/빈민활동가 30명의 목소리를 듣는다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중산층의 몰락, 워킹푸어, 하우스푸어, 실버푸어, 렌트푸어 등 신빈곤층의 증가, 가난의 대물림 현상, 고시원족, 생계형 절도의 증가, 전세대란, 임대주택 공급 감소…….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한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정부는 2012년 10대 경제과제 중 하나로 신빈곤층 문제 해결을 꼽았다. 복지정책을 둘러싸고 여야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용산에서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보겠다며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걸까? 국민의 60%는 여전히 가난의 이유를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답했고,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안정망 없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노점상과 철거민은 늘어나고 있으며, 생존권을 위해 난생 처음 망루에 오르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지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각 정부가 시행했던 정책들은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가? 그리고 대한민국은 언제쯤 가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이 책《가난의 시대》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빈민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빈민의 범주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부터 빈민이 언제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정부에서는 어떠한 정책들을 시행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20년 넘게 빈민운동을 해온 저자 최인기는 이제까지 마주하고 투쟁했던 상황들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서는 각 정부가 바뀔 때마다 빈민들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으며, 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도 상도동과 용산에는 대책 없이 생계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을 반복해야 하는가? 집과 일터가 불안한 사람들이여, 이 책을 펼치시라! 지금 대한민국은 가난공화국이다!
국민 6명당 1명이 빈민, 임금 노동자 중 49.4%가 비정규직
대한민국 빈곤문제, 얼마나 심각한가?
20년간 빈민운동을 해온 활동가의 생생한 현장보고서!
2012년 여수 엑스포를 앞두고 어김없이 노점상 단속이 시작됐다. 최근 발표된 박원순표 뉴타운 정책에서도 확인됐듯이, 연일 발표되는 개발정책에 맞서 사람들의 투쟁도 팽팽하다. 어디 이뿐인가. 비정규직은 600만 명, 청년실업자는 41만 명을 넘었고 철거지역의 청소년문제, 장애인 생계문제까지 어마어마한 가난이 대한민국을 잠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빈민은 대체 누구인가? 빈민의 범주를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도시빈민은 노동할 능력과 노동할 의사가 있는 '경제활동인구'임에도 사회구조적으로 임금노동체계 외곽에 머물고 있는"(281쪽)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에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빈곤'과 중위임금의 절반밖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 '상대빈곤'으로 나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2000년대 들어 국민 6명당 1명이 빈민이며, 국민 중 15%는 상대빈곤층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도시빈민 문제가 농민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저자 최인기는 20년간 이러한 현실과 직접 마주했다. 자신 역시 노동자였기에 그들이 겪을 몸과 마음의 상처를 모른 체하며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현실은 통계자료에서 발표되는 것보다 심각했고, 대책은 더욱 미미했다. 거리에서 투쟁하는 것만큼 기록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성과 비판 없이 일시적인 대책과 보상을 얻는 것만으로는 가난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했다. 노점문제, 철거문제, 장애인 인권, 비정규직 문제, 주택정책 빈민문제와 빈민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꾸준히 찾아 모았고, 틈틈이 빈민의 심각성을 알리는 글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주변의 권유로 거리에 나가는 대신 이 책의 바탕이 된 도시빈민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 책의 시작이 일제강점기인 것도 지금의 도시빈민들이 그때의 형태에서 변형됐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노점상은 조선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철거문제 역시 1960년대의 무허가 판자촌 철거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2011년의 화재가 나서 74가구가 전소한 포이동은 1981년 사람들이 강제 이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청계천 복원공사는 뉴타운 사업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 사업으로 계속 이어졌다.
책을 쓰면서는 무엇보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은 투쟁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이야기를 듣고 당시 상황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받았다. 광주대단지사건이나 노점상의 계급적 지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을 한 자리에 모아 정리할 수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빈민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빈민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그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빈민문제를 다룬 그 어떤 책보다 생생하게 현장의 다양한 상황을 담은 것이다.
와우 아파트의 붕괴, 광주대단지사건, 상계동올림픽, 이재식 열사의 분신, 가락시장 현대화사업…… 가난하기 때문에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도시빈민운동사' 그리고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치열한 기록!
이 책 곳곳에는 ‘도시빈민운동’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1부의 제목이기도 하고 본문 중간에 자연스럽게 쓰이지만 대중들에게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도시빈민운동'은 집과 일터를 뺏긴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일정 부분 쟁취를 했더라도 활동가로 일하는 도시빈민들의 활동이 곧 도시빈민운동이다.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발현됐던 수많은 행동들도 도시빈민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빈민운동 조직을 꾸리고 해체하기를 반복하면서 정부에 맞서 투쟁하고 쟁취한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도시빈민운동은 크게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으로 나뉘면서 전개됐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크게 성장했다. 그 후에 사회 구조가 변하면서 장애인문제, 철거지역 청소년문제, 비정규직문제, 청년실업문제 등으로 층위가 점점 다양해졌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을 최대한 풍부하게 담으려고 노력했다. 많이 알려진 광주대단지사건(1971)이나 무등산타잔 박흥숙 씨 사건(1977), 목동투쟁(1984), 상계동투쟁(1987) 등을 비롯해 수원 권선4지구투쟁(1996), 오산 수청동투쟁(2003), 인천향촌마을투쟁(2006)과 같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역문제로 그친 사건들의 과정을 자세하게 썼다. 또한 빈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점상과 철거민에 대해서는 따로 한 장을 할애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따라 가다보면 빈민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한 방패막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진행 중인 가락시장 현대화사업의 문제, 복지담론 논쟁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빈민열사로, 남은 가족은 명동 철거민으로?
대한민국은 언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2011년, 결국 명동성당 맞은편과 (구)중앙극장 일대도 철거가 강행됐다. 노태우 정부 시기 분신자살을 했던 이재식 열사의 딸 이근혜 씨와 그녀의 남편 텐진 델렉 씨는 이 근처에서 네팔 음식 전문점 '포탈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권리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아버지는 빈민열사로, 남은 가족은 철거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자가 만난 대부분의 빈민들은 자식에게는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지만 이미 철거지역의 청소년문제는 교육, 생활면에서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러한 상황은 쉽게 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빈민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경제, 뉴타운, 취업, 기초생활보호, 최저임금 등이 늘 화두에 올랐고 수많은 정책들이 시행됐다. 1961년 '생활보호법', 1980년대 200만 호 주택공급, 등 IMF 이후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비롯해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양극화 해소를 주요 국정지표로 선정하는 등 계속해서 정책들이 나왔다.《가난의 시대》에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시행됐던 다양한 빈곤정책들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각 정부에서 내새웠던 것들이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도 평가했다. 특히 복지를 강조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어김없이 진행됐던 무대책 철거 현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시행된 정책들은, 혜택을 입은 적은 사람은 적고 대부분은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2002년부터 시작된 상도동투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고양시 덕이동과부천시 원3동에도 천막 농성 중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오롯이 보여주면서 기존 정책들을 재검토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신빈곤층’ 단어 사용을 금하더니 복지예산까지 삭감했다. 또한 2011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에게 급여 삭감 또는 수급 탈락을 통보하기도 했다. 기초생활보장 사각지대에 있는 340만 명 중 103만 명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정책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정권이 교체되면 무효화되거나 중단되는 경우가 다반수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정책들이 많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저자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과 저임금을 해결하지 않고는 빈곤문제가 사라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쉽게 해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가난의 늪에서 허덕여야 하는가?
책속으로
한국 사회에서 도시빈민운동은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으로 크게 나뉘면서 몇 가지 흐름으로 전개됐다. 먼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연세대학교 빈민문제연구소와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로 대표되는 종교를 매개로 한 빈민운동과 지역주민운동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거가 시작되기 전후 세입자들의 주거권, 또는 생존권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철거민운동이 여기에 합류했다. 얼마 전 용산참사를 둘러싼 투쟁, 상계동 철거투쟁, 더 거슬러 올라가 경기도 광주의 투쟁은 대표적인 철거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도시빈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토막민’이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로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으며 하천이나 제방, 산기슭, 다리 밑과 같은 곳에 거주했다. 굴을 파서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주위에 짚을 펴서 만든 곳에 거주했던 것이다. 토막민이 근대적 빈민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그리고 토막민이라는 용어는 그들의 두드러지는 외양을 이루는 주거 상태에서 연유했다. 공공재산 또는 사유재산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의미하는 ‘무단 점거’라는 말로 이들의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불법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무허가 정착지 주민과 유사한 개념으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합동재개발에서는 가옥주가 소유한 토지나 주택에 대한 보상으로 분양권과 함께 재개발 이익의 지분이 보장됐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가옥주에게 무조건 아파트를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즉 건축비와 가옥주의 지분을 비교해서 건축비보다 부족한 부분은 지급해야 입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건축업체는 재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건축과 사업 추진 시 필요한 지도와 자금을 담당했다. 동시에 건축업체는 재개발 사업에 투자한 건설비용과 개발이익을 수취하는 당사자로서 가옥주에 대한 보상용 아파트나 세입자용 영구임대 아파트를 제외 한 일반분양용 아파트를 매각해서 막대한 개발이익을 확보했다. 또 한 임대 아파트의 비중을 낮추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세입자들을 내 몰기도 했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아직도 ‘뉴타운’ 사업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2006년에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 장은 임기 안에 근대스포츠 문화유산인 동대문 운동장을 허물고 전체 면적 총넓이 1만 2,000평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를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동대문 운동장 내 풍물 벼룩시장의 철거를 강행했다. 또한 주변에 뉴타운재개발 지역을 확대해서 본격적으로 청계천 2차 복원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21 취임과 동시 에 ‘서울의 산업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하면서 동대문 운동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노점상들을 다시 숭인동 근처 ‘풍물벼룩시장’으로 집단이주를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풍물벼룩시장 으로 이주한 노점상들은 상권의 부재로 장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도시빈민은 노동할 능력과 노동할 의사가 있는 ‘경제활동인구’임에도 사회구조적으로 근대적 임금노동체계 외곽에 머물고 있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열심히 노동을 해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 한다. 또한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대개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다. 이들은 주로 폐지수집을 해 내다파는 사람들, 파출부, 노점상, 가내 하청 부업, 경비원이나 청소원 등 소규모 영업체에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노숙하며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대부분 가족 모두가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매달리거나, 의식주와 교육, 의료 등의 소비영역에 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불안정한 주거 상태에 놓여있다. ---본문 중에서
서울 도시 빈민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계보
빈민 속의 기록가 최인기 선생의 작품들
서울 중구 충무로의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최된 최인기 선생의 사진전 <청계천 사람들>이 지난 6월 20일에 끝났다. 이명박 서울 시장 때의 청계천 복원 사업, 오세훈 시장 때의 동대문 운동장 철거와 DDP 건설, 그리고 박원순 시장 시정 하에 지금 현재 을지로 3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개발 사업. 빈민운동가인 최인기 선생은 이 세 번의 청계천변 개발 사업에서 철거 대상이 된 도시 빈민의 생활과 그들이 철거에 저항하는 싸움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런 사진 작업을 한 사람은 여태까지 많았다. 그런데 최인기 선생의 작업은 이제껏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이 도시 빈민을 찍어온 그것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고, 현대 한국에서 가늘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어떤 작업의 계보를 잇고 있으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의 도시 빈민을 찾아가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긴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도시 빈민이 아닌 입장에서, 많은 경우에는 기자 같은 언론계 종사자로서 도시 빈민을 바깥에서 관찰했다. 이들이 만든 글과 사진이 전부 센세이션과 스펙터클을 노린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1980년대 사당동과 상계동, 2000년대 용산, 2010년대 아현동과 장위동에서처럼 주목할 만한 사건이 터진 뒤에야 비로소 도시 빈민에 주목했고, 도시 빈민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찰자로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이들의 사진은 사태의 어떤 부분을 잘 드러냈고, 한국 사회의 여론을 만들어내는데 크고 작은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사진은 어디까지나 도시 빈민에게 잠시 들러서 촬영한 외부인의 것이었다.
사회학 연구자 조은 선생과 같이 사당동의 대규모 도시 빈민촌이던 이수단지의 주민을 20여년에 걸쳐 추적한 사례도 있지만, 조은 선생과 조력자들은 어디까지나 학술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차원에서 빈민 운동의 내부로 뛰어드는 것을 자제해왔음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조은 선생은 "사당동은 또 하나의 광주"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처참한 철거가 진행되던 당시, 바로 이틀 전 철거 측과 싸웠던 사당동 주민과의 인터뷰 녹음물 말미에서 "저는 무서워서 못 왔어요. 차마 무서워서 못 오겠더라고요"라는 자기 자신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찾아냈음을 고백한다(<사당동 더하기 25> 63쪽).
최인기 선생의 사진은 이것과 다르다. 그는 도시 빈민과 계속 함께 움직여 왔다. 사진을 찍히는 당사자가 최인기 선생을 대하는 느낌이 여타 관찰자에 대한 것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친밀함·동지의식은 도시 빈민의 일상생활을 찍은 그의 사진에서도 느껴지지만, 재개발·재건축 철거나 노점상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 현장을 찍은 사진에서 특히 분명하다. 그는 사태의 바깥에서 도시 빈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빈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태의 내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의 사진이 신문기자의 사진들처럼 센세이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의 사진 한 장 한 장이 찍힌 상황을 가만히 상상하면 나는 이 사진에 찍힌 사건이 사건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물론 여태까지 도시 빈민 운동을 한 많은 분들이 이런 사진을 찍어 오셨다. 그렇다면 최인기 선생의 사진과 글은 어떤 점에서 여타 도시 빈민 운동가의 그것과 다른가.
최인기 선생은 현대 한국에서 도시 빈민 집단이 만들어지고, 그들이 생존 투쟁을 해온 궤적을 자각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도시 빈민 외부의 이른바 '일반 시민'이 사태의 본질을 잘 깨닫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일찍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이끌었던 정동익 선생은 <도시 빈민 연구>(아침)라는 책을 써서 도시 빈민 문제를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렸다.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5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널리 읽혀서, 내가 1990년대에 구한 것은 1989년 4쇄본이었다. 이후로도 이런 유의 책은 많은 수는 아니지만 꾸준히 세상에 나타났고, 해당 계보의 가장 최근에 자리하는 것이 최인기 선생의 <가난의 시대 - 대한민국 도시빈민은 어떻게 살았는가>(동녘, 2012)이다. 2019년 현재, 도시 빈민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정확하고 평이하게 이 문제를 다뤘다.
<가난의 시대>가 도시 빈민 문제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면, 그의 두 번째 책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 무엇이 그들을 도시의 유령으로 만드는가?>(동녘, 2014)는 2010년대 초에 '서울의' 도시 빈민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글과 함께 풍부한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이때부터 사진은 최인기 선생의 중요한 기록 도구가 되는데, 그가 사용한 카메라는 일찍이 1973~76년에 청계천의 도시 빈민을 사진으로 남긴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도움으로 입수한 것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청계천 도시 빈민을 찍은 노무라 선생도, 1980년대 사당동 도시 빈민을 찍은 조은 선생 팀도 현대 한국의 어둡고 추한 모습을 찍어서 북한을 이롭게 할 거냐는 비난을 숱하게 받았다. 이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오해만 받는 작업을 묵묵히, 꾸준히 해온 분들 덕분에 나는 현대 한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성장했고, 그 성장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바깥으로 밀려나고 죽어갔는지 알 수 있다. 이 계보의 끝에 최인기 선생이 있다. 특히 노무라 선생과 최인기 선생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최인기 선생은 노무라 선생의 의발을 전수받았다고도 하겠다. 최인기 선생의 최근 책이자 사진전의 제목이기도 했던 <청계천 사람들>(리슨투더시티, 2018)은 그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최인기 선생은 책과 사진 작업을 통해, 도시 빈민의 내부에서 외부의 이른바 '일반 시민'을 향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그리고 꾸준히 전하고 있다. 실제로 최인기 선생은 빈민 운동을 하는 쪽과 외부 시민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2019년 현재 가장 자각적으로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중간 저자', 즉 학계와 일반 독서인 사이를 이어주는 연구자이자 저술가에 해당하는 사람을 도시 빈민 운동에서 찾자면 최인기 선생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나는 언제나 그의 글과 사진 작업으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마지막으로, 이 서평의 제목에는 <서울 도시 빈민>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나는 도시 빈민 문제의 문외한이지만, 서울의 도시 빈민 문제에는 여타 도시의 빈민 문제와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다. "내 마을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바람은 많은 현대 한국 시민이 품고 있는데, 도시 빈민 투쟁에서도 이런 주장을 많이 접한다. 하지만 '내 마을' 가운데에서도 서울은 조금 특수하다. 현대 한국사 내내 이어진 이촌향도 현상에서 서울은 대체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목적지로서 기능해왔다. 따라서 현재 서울시 내에서 사는 사람을 밀어내야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울시 내의 빈민촌을 밀어내고 세워진 고층아파트 단지에 서울시 외부의 중간 계급 시민이 입주하는 현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즉 서울 도시 빈민 문제는 계급 갈등임과 동시에 지역 갈등의 정점에 놓여 있기도 하다.
<청계천 사람들> 사진전을 찾아가 최인기 선생과 이야기하던 중, 앞으로는 서울시 바깥 상황작업을 더 많이 하려 한다는 그의 말을 들었다. 현대 한국 도시 빈민 문제를 해결하려 해왔고 기록해온 분들의 계보에서 가장 최근의 자리에 서 있는 최인기 선생이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해주시기를, 또 한국 사회를 향해 발신해주시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프레시안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무엇이 그들을 도시의 유령으로 만드는가? 저자 최인기|동녘 |2014.04
*추천사
고통과 절망을 보며 희망을 기록하기 | 백기완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노무라 모토유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 | 임종진
들어가는 글: 서울의 가난한 얼굴을 마주하며
개발이라는 이름의 괴물
-동작구 상도4동: 끝나지 않는 전쟁
-강남구 포이동: 강남의 유령마을
-용산: 수난과 수탈의 역사
누가 이곳을 기억해줄까?
-종로구 창신동: 청계천의 역사를 되짚는 방법
-중구 신당동: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라진 근대 스포츠의 현장
-종로구 관철동: 거리에서 사라진 노점상은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용산구 동자동: 한 평 반, 쪽방촌
-용산구 동자동: 서울역 24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나는 성노동자다
새로운 공간이 들어선 자리
송파구 문정동: 텅 빈 신화, 가든파이브
노원구 중계동: 서울의 달, 백사마을
서대문구 홍제동: 개발과 보존의 경계, 개미마을
출판사서평
상도동과 포이동의 철거민, 동자동의 쪽방촌 사람들, 종로의 노점상…
우리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슬픈 기록!
용산, 포이동, 상도동, 서울역, 동자동……. 한때 신문의 1면을 차지하며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모습을 드러내준 공간들이다. 재개발과 철거 문제에서 비롯된 투쟁과 저항, 생활고에 시달리다 생을 끊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처한 극단적 빈곤, 정부의 공권력 남용과 주민들의 사망까지. 이 시대가 처한 가난함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눈물 흘리며 다함께 분노하고 함께 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용산참사가 벌어진 지는 6년이 흘렀고, 포이동 철거 투쟁은 10년이 다 돼가지만 합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역의 노숙인들은 날로 늘어나고, 동자동 쪽방촌에서는 연일 무연사가 생기는데도 대책은커녕 무시와 방관만 보일 뿐이다. 좀처럼 나아진 부분이 없는데도 이 공간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심해도 괜찮은 걸까? 게다가 그곳에는 여전히 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억울해서 혹은 갈 곳이 없어서 떠나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20년 넘게 빈민운동의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왔던 빈민운동가 최인기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악화되는 공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야 늘 이리저리 치이기 마련이지만,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새로운 문제가 벌어진 곳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를 안고 있는 곳에 대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다녔던 공간들과 그곳에서 떠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알리고 싶었다. 그의 전작 《가난의 시대》가 도시빈민들이 살아온 긴 역사를 사료 중심으로 정리한 책이라면, 이 책에서는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는 데 더 집중했다. 각 공간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곳의 역사를 삶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실은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찍어온 사진들을 함께 담아 각 공간들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가 현장에서 발로 뛰며 보고 느낀 이야기와 각 공간의 주민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게 된 것이다.
누가 이 사람들을 기억해줄 것인가?
왜 그들은 도시에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 책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복원 전의 청계천,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같이 지금은 사라진 곳부터 상도4동, 포이동, 용산과 같이 개발 문제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곳, 동자동, 서울역, 청량리 같이 극빈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까지 서울의 열두 공간이 담겨 있다. 화려한 서울 아래 가려진 가난한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의 모습과 거기서 벌어진 긴 투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현장에서 늘 함께 했던 저자는 이 공간이 지닌 사회적인 문제들도 놓치지 않고 서술한다.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정부에 맞서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삶에 주목하며 왜 이 공간들에 대한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난은 꼭 물질적인 열악함을 넘어선 사회의 소외를 의미한다. 가령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노점상을 무조건 없애버린 일이나 성노동자들에게 대안을 마련해주지도 않은 채 성매매특별법을 제정해 성노동을 금한 일 등은 결국 해당 종사자들에게 자신을 부정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늘 법을 어기고 있다고 인식하며 죄인처럼 살라는 형벌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최인기가 이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이유는 이들 역시 잠재적 극빈층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소외가 곧 가난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이 책은 저자의 소소한 추억과 사람들과 얽힌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백사마을의 현대이발소 주인과의 맺어온 오랜 시간이나 1960년대 청계천의 모습을 찍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와 닿은 인연에 대한 사연도 볼 수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사회문제로 이슈화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각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대개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제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쪽방촌의 한 달 월세는 17~30만 원 사이다. 서울의 원룸 월세와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병이 생겨서 직장을 잃거나 부모님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순식간에 삶의 방식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젊은이들의 미래가 얼마나 암흑일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이 책이 단순히 가난의 비극성만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사회가 움직이는 전체적인 논리를 읽어내길 바란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된 가난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삶을 잠식시킬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떠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하는 이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자.
책속으로
“저의 인생에서 청계천은 가장 소중한 공간입니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청계천은 계속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하지만 일방적으로 바뀌고 파헤쳐 지는 관행은 이제부터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왔습니다.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하 늘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도시와 환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과거를 보존하고 없는 사람 함께 더불어 공존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청계천의 역사를 되짚는 방법, 35쪽)
“눈부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앞 만보고 달려오면서 부수고 세우는 일에 익숙해졌는지 모르겠 습니다. 한국의 개발과 성장은 기형적인 도시를 만들면서 과거의 흔적들을 깡그리 파헤치거나 지워나갔습니다. ‘동대문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대로의 모습을 살려 운동장을 수리하고 보전하여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쉼터로 만드는 건 정말 불가능했던 걸까요?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로 건설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가 저의 눈에는 장소 역사성과 무관한 하늘에서 내려앉은 희한한 UFO나 거북의 등딱지처럼 보입니다. 저는 국적불명의 그 건물이 그저 불편하기만 합니다.”(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라진 근대 스포츠의 현장, 48~49쪽)
한때 서울에는 2,000년 초까지 만해도 약 2만 명 가까이 치 솟던 노점상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서울시의 공식 자료도 8,000개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요. 서울시 노점상관리대책의 본질은 신 발생 노점의 억제와 기존 노점상의 축소를 위한 대책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노점상에게 당근을 던져주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용역반을 동원해 단속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일이 노상 벌어집니다. 결국 노점상은 오래전 뒷길의 피맛골처럼 밀려나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 네요. 거리에 노점상이 사라지는 게 정말 좋은 걸까요? 걷는 불편함이나 복잡함은 사라지겠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 간의 교감이나 즐거움, 추억도 한꺼번에 사라지는 겁니다. 노상이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 안정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는 노점상의 바람이 그렇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거리에서 사라진 노점상은 어디로 갔을까?, 68~69쪽)
포이동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하늘은 ‘타워팰리스’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타워팰리스가 그들만의 철옹성처럼 하늘 높이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이 서울의 가장 비싼 노른자 땅 강남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양재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으니 조망권이 좋다는 말도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전 황무지였던 이곳을 개척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은 주변의 변화와 무색하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주변의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천문학적으로 뛰기 시작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처지는 그대로입니다. 마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밀려 나듯이 포이동의 원주민들은 현재까지도 배제되거나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강남의 유령마을, 97쪽 중에서
청계천 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저자 최인기|리슨투더시티 |2018.06
빈민활동가이자, 연구자이자, 사진가인 최인기의 사진집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강제 이주된 노점상들, 청계천변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도시를 자본축적의 도구로만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도시 주류 역사에 저항해온 사람들의 역사책이자, 시간의 이미지를 부여잡은 책이다.
삶터에서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한 운동가이자 사진가인 최인기는 서울의 가난한 자들의 역사를 다룬 중요한 책 <가난의 시대>를 펴내기도 했다. 최인기는 현장을 지키며 카메라를 드는 이유를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2003년부터 청계천 주변을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본인이 함께 연대하고 있는 도시 노점상들의 모습과 도시에서 일어나는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 도시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다.
목차
- 『청계천 사람들』 발행에 임하여 / 노무라 모토유키
- 사람이 우선인 사진 / 임종진
- 작업 노트 / 최인기
- 도시권 쟁취 공간으로서 청계천
- 삶의 공간으로서 청계천
- 사람들
- 삶의 가치를 전하는 청계천 개발이란 불가능했던 것인가? ? 가난한 이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 최인기
- 추천사 / 동지들
청계천 위의 사람들
복원 뒤 부평초처럼 떠다니며 생계 유지하는 노점상과 철거민들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 복개와 복원이 거듭되면서 이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영세상인들은 개발과 철거의 삽날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하지만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오늘도 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중구 황학동은 ‘누런 학’이 날아와 그 지명이 붙은, 그저 논밭이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뒤 판잣집들이 들어섰고, 1967년부터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으로 고물이 늘어나자, 골동품점과 헌책방들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벼룩시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등장과 함께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됐다. 문화재와 환경 복원의 구호가 요란했지만, 정작 이곳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사람들, 누구보다 노점상과 철거민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됐다. 청계천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고 천문학적 세금을 들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서자, 고래 심줄처럼 끈질기게 살아오던 사람들도 부평초처럼 떠다니다 사라지거나 뒷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과거를 지워버린 그 자리에 긴 한숨만 남았다.
하지만 거친 노동과 영세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청계천은, 삶의 역동적인 힘과 고단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주변에 펼쳐진 노점상들은 ‘아스팔트 위 풀’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보인다.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서울의 중심에서 위태롭지만 아직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2013년 11월 서울 중구 황학동 거리에서 구둣방을 하는 조병호씨가 손님들이 맡긴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2014년 3월 철거 용역들이 물리력을 동원해 철거에 나서자, 상인들이 자신의 노점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조병호씨가 철거 과정에서 충격을 받고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조씨가 심신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구두를 손보던 자리에 화단이 들어섰고, 생전에 구두를 걷으러 다닐 때 함께했던 자전거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글 최인기 / 한겨레21 2018.06.04
옛 청계천의 모습-블로그 맛있는 곳 멋있는 사람들
1972-1976 청계천…그리고 도시빈민의 친구 제정구
1972-1976 청계천…그리고 도시빈민의 친구 제정구
“청계천 둑방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난날 대학에서 핏대를 올려가며 ‘조국의 이방인이 되기 전에 주인으로 나서자’던 외침도, 시위대를 진두지휘하며 최루가스를 뚫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던 용감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제정구)
“1970년대 서울은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청계천 복개가 완료된 1977년은 한국이 수출 100억 불을 달성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빈민들이 있었다. 청계천은 그들의 터전 중 하나였다. 가족과 성공을 위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마다하지 않았던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은 개발시대 속 화려한 서울의 그늘에 자리 잡고 있었다.”(청계천박물관)
도시빈민들의 친구이자 대변인 제정구(1944~1999). 그가 빈민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1972년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청계천박물관에서는 지난 4일부터 <제정구의 청계천 1972-1976>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제정구가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을 처음 만난 1972년부터 판자촌이 철거되는 1976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근대화의 화려함 속에 잊힌 도시빈민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청계천박물관은 “제정구의 청계천 판자촌 생활 속에는 판자촌 주민들의 고단한 ‘정착’·‘생활’·‘철거’·‘이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며 “고향보다 못한 생활환경 속에서 질병과 빈곤에 그대로 노출돼 있던 판자촌 사람들의 실상은 처참했다. 하지만 지난한 가난함 속에서도 주민들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갔다”고 평했다.
■청계천 판자촌
당시 제정구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청계천 하류, 특히 중랑천과 합류되는 답십리, 송정동 일대였다. 이 지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었다. 청계천 복개공사(1958~1977)가 본격화된 이후 상류부터 판자촌 철거 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하류 일대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국공유지였던 청계천 천변에는 둑길의 경사진 면을 따라 철거민과 상경민들이 세운 판잣집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1972년 봄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개발시대에 도시빈민들은 모든 면에서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청계천에는 판자, 비닐, 거적으로 지은 1~2평 남짓한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을 면할 수 없었다. 제정구가 청계천에서 본 것은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과 개미굴, 질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이었다. 일생일대의 충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청계천변 제방을 파서 지은 개미굴(1973). 청계천박물관 제공
■1973년 1월 판자촌 주민이 된 제정구
“활빈교회로 이사한 뒤에는 단무지 행상을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밀짚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리어카만 끌었다. 굶어 죽는 판에 ‘단무지 사이소’를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이거다. 내 맘속의 교만함, 머릿속의 지식, 서울대 출신이 이거 아니라도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허위의식. 나는 아직도 판자촌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단무지 사이소!”” (제정구)
제정구는 청계천 활빈교회의 배달학당 야학교사로 일하며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1월 청계천으로 이사한 그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대로 넝마주이,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주변인의 눈에 비친 청계천은 가난과 불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제정구에게 그곳은 범죄자와 낙오자들의 집합소가 아니었다. 판자촌 사람들은 열악한 현실을 이겨나갔고 이웃 간의 정도 남아있었다. 그들은 단지 보통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가난했을 뿐이었다.
판자촌 앞 공동화장실(1973). 청계천박물관 제공
■1975년 5월 청계천 판자촌 철거
“1975년 내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청계천 활빈교회 일대의 판자촌에는 철거 바람이 불어닥쳤다. 활빈교회에서 일하던 야학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자들, 교회 집사님들이 모여 대책을 의논했다. 정부에서 100여 명의 입주권을 얻어 일부는 남양만 간척지로 이주하기로 했다. 남양만으로 이주하는 것이 당시로는 막대한 돈이 들고 또 3년간은 소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그쪽으로 갈 수 없는 나머지 사람은 서울 변두리로 집단 이주를 하기로 했다.”(제정구)
1970년대 정부의 철거·재개발 정책으로 도심 주변의 판자촌은 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1975년 5월 청계천 판자촌도 철거되기 시작했다. 제정구는 56세대의 주민들과 함께 방이동으로의 집단이주를 추진하였지만, 건축허가의 불허로 실패하고 말았다. 1976년 9월 청계천 판자촌은 완전히 철거되었다. 제정구는 양평동 안양천 둑방동네로 들어가 판자촌 생활을 이어나갔다. 집을 찾기 위한 판자촌 사람들의 고단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정구(1944~1999)
제정구는 도시빈민들의 친구이자 대변자였다.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가 빈민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1972년의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 제정구는 판자촌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기억하며 ‘메마른 땅의 한 줌의 소금과 같은 인생’이라고 말했다.
판자촌 철거현장에서의 천막생활(1975). 청계천박물관 제공
둑방 위에서 바라본 청계천 판자촌(1974). 청계천박물관 제공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2016.05.05
구와바라 시세이가 찍은 청계천 사람들 (1965년)
물레방아 (순이생각/너하나 나하나)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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