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으로 간 해녀 저자 홍경찬|단디프로모션 |2017.04.
목차
들어가는 글
생존 여권 테왁을 쥔 출향해녀17
1장 출향해녀 역사
전쟁은 해녀를 뭍으로 보냈다31
연대도에 다녀가셨군요43
고된 삶,눈물 씻겨주는 해녀배 불턱53
평화의 섬과 포로수용소65
지속 가능한 물질을 위한 방안73
2장 살아있는 도서관, 해녀
쌀 농사의 보급과 해녀의 원정 물질89
전복 수명은 해녀가 잡을 때까지101
추자도 테왁에 핀 동백꽃113
통영의 출향해녀123
해녀의 노동시간, 물때129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과 소외받는 출향해녀137
3장 다도해 물빛 해녀
성게 떡국과 해삼 냉채147
포항 전복이 위미리 귤밭이 되다153
비진도 짜장면163
사랑의 야반도주173
잃어버린 해녀의 이름179
나오는 글
숨비소리 내며216
제주도 해녀들이 뭍으로 간 이유는 감태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쓸모없던 감태와 소라 값어치가 올랐고 해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뭍으로 오게 됐다. 감태는 화약의 원료로, 소라는 군용식량으로 대체되면서다. 출향해녀 이동은 일본의 해산물 수요가 군수품 원료 목적으로 전환돼 해녀 수입도 늘었다.
그러나 해녀들이 번 돈으로 자식 공부를 시키면서 그들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눈을 떴고 특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4.3 사건과 6.25 발발시까지 자식들은 비운을 맞게 됐다. 전쟁특수로 인해 높은 수입을 얻은 해녀들은 자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고, 몇몇 자식들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히며 사회주의자가 되어 제국주의와 싸웠다.
통영 봉평동에 열 척의 해녀배가 정박하고 있다. 한 척당 10여명의 해녀가 생활하고 있다. 열 척의 해녀배가 부지런히 불턱 연기를 피어 올리며 전복과 해삼, 성게를 잡아 올린다. 그 물질에서 자란 해녀의 아들이 글질을 하며 써내려간 ‘뭍으로 간 해녀’를 펴냈다.
신석기 시대 사람의 인골이 연대도에서 발견됐다. 1987년 셀마 태풍이 통영을 강타하자 2,500여 년 전 연대도에서 활동하던 신석기인의 인골이 발견돼 이목이 쏠린 적이 있다. 2,500여 년 전 이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조사도 실시됐다.
이 조사에서 해녀의 잠수병 일종인 외이도골종이 발견되면서 신석기인이 잠수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줬다. 외이도골종은 오랜 기간 잠수하는 사람의 고막 안쪽 뼈가 튀어나와 외이도를 좁게 만드는 것으로 이시기에도 잠수어로를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국립진주박물관으로부터 영구임대 돼 통영시립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태풍이 잊혀진 역사를 불러왔다.
출향해녀들의 삶을 보면 비진도 고인순 해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진도 총각과 결혼했다. 제주도에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들어갔지만 오빠들의 반대로 인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비진도 5명의 해녀 가운데 마지막 해녀이다.
비진도 홍덕자 해녀도 21살 때 갓난 아기를 안고 섬으로 들어왔다. 물질을 하지 못해 비진도 섬에서 배웠다. 덕자씨가 물에 나서면 아기는 동네 주민들 젖을 먹고 자랐다. 1년 늦게 비진도에 입도한 남편은 큰 딸이 유치원에 입학하자 요리사가 되어서 섬에 중국집을 열었다. 섬 아이들은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허윤선 해녀는 포항과 부산에서 물질하다 고향 서귀포로 돌아갔다. 뭍에서 전복을 캐고 번 돈으로 서귀포에 밀감나무를 심었다. 포항의 전복이 위미리 귤나무가 됐다. 송옥자 해녀는 1948년 4.3 사건이 발발한 해에 태어났다. 허윤선 해녀와 함께 부산에서 물질을 함께 하다 그녀와는 달리 뭍에서 정착하게 됐다.
제주해녀문화가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음에도 제주도와 달리 출향한 해녀 지원은 미비하다. 안미정(49 문화인류학 박사)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뭍 농사도 짓고 바다 신을 중요하게 인식한 점에서 제주 해녀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연구를 해 왔다.
안 교수는 해녀배가 곧 탈의장이 되고 불턱이 된다는 통영의 특징을 전했다. 배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합리적인 공간이자 한 배를 탔다는 해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고 했다. 한국 해녀 문화가 남해안 지역의 해녀문화 특수성도 동시에 봐가면서 이 문화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그분들에 대한 어로 환경 개선도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녀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해야 될 역할이자, 이제부터 고민을 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 국내는 삼면의 바다이고 어촌마을이 있고 여성들도 있다. 지역의 해양 특수성이 한국 해양문화 다양성으로 표출해나가야 하고 어촌이 잘 살아야 여성 해양 문화가 더 돋보이게 되는 점을 전했다.
‘뭍으로 간 해녀’는 총 3장으로 1장 출향해녀의 역사, 2장 살아있는 도서관 해녀 3장 다도해 물빛 해녀로 구성돼 있다.
1장 출향해녀의 역사에서는 ‘전쟁은 해녀를 뭍으로 보냈다’, ‘연대도에 다녀가셨군요’, ‘고된 삶, 눈물 씻겨주는 해녀배 불턱’, ‘평화의 섬과 포로수용소’, ‘지속가능한 물질을 위한 방안’이 수록돼 있다.
2장 살아있는 도서관 해녀에서는 ‘전복 수명은 해녀가 잡을 때까지’, ‘추자도 테왁에 핀 동백꽃’, ‘통영의 출향해녀’, ‘해녀의 노동시간, 물 때’, ‘세계인류문화무형유산과 소외받는 출향해녀’가 수록돼 있다.
3장 다도해 물빛 해녀에서는 ‘성게 떡국과 해삼냉채’. ‘포항 전복이 위미리 귤밭이 되다’, ‘비진도 짜장면’, ‘사랑의 야반도주’, ‘잃어버린 해녀의 이름’이 수록돼 있다.
척박한 삶에서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출향 해녀들을 문학적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사실에 근거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지방성에 함몰되지 않고 이를 넘어서 다양한 지역성을 찾으려는 그들의 입장에서 기록했다. 고향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태어났지만 그들이 자란 시간도 포함한다. 그 긴 시간 동안 해녀들은 제주 고향을 떠나 물질했지만 영원한 고향은 바다다. /통영뉴스 2017/03/28
어머니의 저승을 취재하다
사람들은 섬에 가면 대부분 비슷한 감상을 얘기한다. ‘여기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섬의 시간은 멈춰 있지 않다. 오히려 육지보다 빨리 흐른다. 섬의 시계는 두 번 흐르기 때문이다.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해의 시계가 한 번, 물이 차고 빠지는 달의 시계가 한 번. 그래서 섬에 사는 사람은 두 배로 부지런해야 한다. 물때를 놓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바다는 고요한 듯 분주하다. 해녀 배의 출항 역시 물때가 결정한다. 해녀 배는 물이 빠질 때 띄운다. 수면이 낮아야 작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흔히 물질하는 해녀를 일컬어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라고 한다. ‘출향 해녀(제주를 떠난 해녀)’인 저자의 어머니는 또 하나의 저승을 찾아 제주를 떠났다. 그렇게 저승에서 벌어온 돈으로 공부하고 자란 이승의 아들은 글질하는 기자가 되어 어머니의 저승을 취재했다. 저자는 출향 해녀의 기원부터 오늘의 모습까지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해녀들이 걸리는 잠수병의 일종인 ‘외이도 골종’은 최초의 직업병이다. 1987년 통영 연대도에 태풍 셀마가 지나간 뒤에 발견된 신석기인의 뼈에서 ‘외이도 골종’이 관찰되었다. 해녀는 또한 초기 해외 인력 진출 사례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으로 화약 원료인 요오드화칼륨(질산칼륨 대체물)을 얻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는 감태 채취에 매진했다. 이때 제주 해녀들이 중국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대마도와 가라쓰 등에 진출했다. 해녀들에게 ‘테왁(물질할 때 쓰는 부력 도구)’은 국경을 넘는 여권이었다.
전쟁 특수를 누린 해녀들은 높은 수익을 얻었다. 그 돈으로 자식들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그런데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힌 자식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해녀의 아들인 이덕구는 4·3 사건의 주동자가 되었고, 고준석은 일본 사회주의자의 대부가 되었다. 이들의 고향인 구좌읍 행원리는 4·3 사건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곳 중 하나다.
고재열 기자 sisain.2017 5.4
해녀 박말애는 바다로 돌아갔을까
국립민속박물관 오창현 학예연구사와 김만석 독립 연구자가 한반도의 바다를 둘러싼 사람과 해산물의 이야기를 번갈아 연재한다. 첫 번째는 부산 해녀 박말애에 관한 이야기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영도의 수산시험장에서 우치다 게이타로가 주도해 기록한 조선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 어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정문기는 <한국어도보 (韓國漁圖譜)>(1977)에서 우치다에게
이 자료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치다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나 ‘물고기’에 관한 지식이 식민지 학지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현장’에 밀착해 조사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우치다는 현지 조선인의 지혜를 공유했지만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의 관료와 식민지 조선인 사이에 놓여 있는 위계적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노출한 것이다. 즉, 한반도 각지의 현지 조선인이 우치다를 안내하고 여러 현장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답사와 조사는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집합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이들 (해녀·선원·해양기술자·제조업자 등)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이 요긴해진다.
ⓒ김나현 제공 평생을 부산 기장군 대변에서 산 박말애 해녀는 지난 4월10일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14년 8월 물질을 하는 박말애씨의 모습.
공교롭게도 우치다가 남긴 기록을 읽은 뒤 국립해양박물관의 해안 데크에 나왔을 때, 영도 ‘해녀’가 숨비 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을 식민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지혜를 동시대 우리 삶의 지혜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해녀로부터 바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말애(1956~2019)는 해녀였다. <해녀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샤인텔, 2014)와 <파도의 독백>(샤인텔, 2016)을 남긴 수필가이기도 했다. 지난 4월10일 그녀는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다시는 뭍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해녀가 바다에서 실족사해 죽었다니. 좀체 믿기 어렵지만, 현재까지 그녀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바다가 부르기라도 했던 것일까? 원양어선을 탄 선원들이 저녁까지 잘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아무 흔적도 없이 증발되는 일이 흔했다는 어느 선장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죽음은 ‘세이렌’이나 ‘인어’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박말애의 죽음을 낭만화하고 신비화하기보다 그녀가 남긴 두 권의 수필집을 통해 해녀의 ‘자기 진술’을 귀하게 대접하고 우리 삶의 문맥으로 옮겨놓는 일이 중요하다.
그녀는 평생을 부산 기장군 대변(大邊)에서 살았다. 대변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름을 바꿔달라고 청원해 용암초등학교로 바꾼 바로 그 대변이다. 대변은 대동고라는 창고 근처에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대변항은 동해안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국가 어항이다. 풍어제로 동해안 별신굿이 열리며 멸치축제가 개최되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항구 근처 해녀촌 (대변어촌계 해녀특산물판매장)에서 ‘가성비’ 좋은 수산물을 먹을 수 있어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어촌이다. 그녀는 수필집에서 대변을 반농반어(半農半漁)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대대적인 개발로 농지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저승에 목숨 맡기고 이승에서 일해”
대변에서 박말해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제대 후 가족을 건사하겠다고 멸치잡이 배에 올랐다가 풍랑에 배가 난파되면서 다시는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박말애는 바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절절하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둘째 언니가 물질을 하다 심장마비로 죽고 장례를 치른 뒤에도 곧장 물질에 나서는 자신을 깨닫게 되면서 앞으로도 바다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저승에 목숨을 맡기고 이승에서 일을 하는 게 해녀”라는 말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구순에 가까운 노모를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모시면서, 대변 바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모든 고통을 넘는 법을 바다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수필집에는 그녀가 대변 바다를 떠난 때가 짧게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 초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안리에 있던 피복창에 취업하기 위해서였다. 군인들의 상하의와 의류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미싱사로 평생 일할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 이하는 취업할 수 없다는 노동법 규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고 한다. 또 한번은 1970년대 후반인 20대 초반 무렵, ‘여공’으로 동래 보세공장에서 일하면서였다. 대변에서 기장역까지 10리를 걸어 기차를 타고 출근하고, 다시 동래에서 기차를 타고 기장역에 내려 10리를 걸어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바다로 돌아오게 된 것은 새벽 5시에 나서 밤 10시에나 돌아오는 노동강도나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해녀 노동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공장에 고여 살기엔 이미 그녀의 몸이 바다와 밀착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흔히 해녀는 제주와 동격이지만, 제주를 제외하고 해녀가 가장 많은 곳이 부산이다. 특히 부산 기장의 해안선은 해녀의 삶과 뗄 수 없다. 2009년 발간된 <해녀 복지 증진 및 관광자원화>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당시 부산시 수협 소속 해녀가 437명, 부산동부수협에는 598명, 의창수협에는 24명으로 모두 1059명이 등록되어 있었으며 미등록자도 20%가량이었다. 부산광역시가 발간한 <2018 수산편람>의 나잠어업인(맨몸 잠수 어업인) 현황에서는 해녀가 총 93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집계된 수만 보아도 거의 10년간 해녀 121명이 사라진 셈이다. 그런 점에서 척박한 뭍에 바다를 들려주던 해녀의 상실은 바다를 잃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부산 해녀의 역사는 제주 해녀와 이어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주 해녀의 이주에서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울산과 부산 기장 앞바다였다. 제주도 여자가 각처로 벌이를 나가는 것은 당초 경상남도 울산과 기장 두 연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보통 어선 한 척에 여덟 명에서 열두 명의 해녀와, 사공과 감독을 겸한 남자 대여섯 명이 같이 탔다. 이들은 보통 6개월 동안 부산으로부터 울산 방면으로 가는 해로의 각 암초 근처에서 벌이를 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부산 남천동에서 해녀들이 미역을 채취하고 있다.
이후 해녀의 활동이 점점 왕성해져 벌이 나가는 곳도 점점 넓어졌다. “전라남도 소속의 모든 섬, 경상남도 거제도, 부산 근처, 울산 근처, 기장 근처, 경상북도 연해 각처, 강원도 연해 각처, 함경남도 연해 각처, 황해도 연해 각처, 지나(중국) 웨이하이 연해. 그러하나 지나 방면으로 나가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며 아직 시험적 ‘출가 물질’에 불과하더라 (<매일신보> 1916년 8월3일).” 부산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대원수산조합 (大原水産組合)의 조사를 번역해 실은 연재 기사 가운데 일부이다. 1895년 이른바 첫 ‘출가 물질(외지로 떠나 하는 물질)’을 시작했던 제주 해녀들은 한반도 전 해역은 물론이고 도쿄, 오사카, 칭다오, 다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다. 일본 쪽의 출가 물질은 극성스러웠다고 한다. 이런 활동들 때문에 제주 해녀들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수산업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소르방’ ‘다르방’이라 불린 강계바다의 바위
당시 수산업자와 객주는 해녀들에게 선금을 주고 배 삯이나 식대 등을 고비용으로 책정했다. ‘고리대’를 활용한 방식으로 해녀들을 꼼짝할 수 없도록 장악했다. 또 해녀 객주를 통해서만 해산물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싼값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다. 즉, 이 시기에 일본인 수산조합과 객주가 공모해 해녀들을 예속화한 것이다. 이 시기 제주 해녀들이 출가 물질에 나갔던 현지에 이주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수산조합과 해녀 객주들로 인해 생긴 채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말애에 따르면 제주도 해녀들이 대변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공식적인 지명이 입말로 남아 있다. 대변항에서 죽성리 방향의 해안도로로 가다 보면, 부산 사람들조차 생소한 ‘강계바다’가 있다. 이곳은 대변 해녀와 어부 그리고 낚시꾼 일부에게만 알려진 이름이다. 이 바다 아래에는 현재 해수 담수화 사업을 위해 대륙붕까지 이어지는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한때 해녀들에게 황금어장이었던 강계바다는 더 이상 물질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박말애에 따르면 이곳 해녀들은 강계바다에 솟아나 있는 해안 바위를 ‘소르방’ ‘다르방’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하르방(할아버지)’에 ‘소’와 ‘다’가 결합되면서 축약된 말로 보인다. 작은 바위는 소르방, 작은 할아버지 ‘신’, 여러 바위는 다르방, 여러 할아버지 ‘신’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보호하려는 열망이 제주도식 입말에 투영되어 이렇게 불린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지명은 제주도와 경상도의 어법이 결합된 것으로 이주 해녀의 토착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토착화 과정이란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접속, 충돌해 변이를 경험하면서 현지화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한 번에 완결되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토착화 과정에서 한 문화가 완전히 상실되기도 하고 상호 변용으로 애초 두 문화 자질이 모두 사라지기도 한다. 어촌의 도시화나 관광화가 특히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가령 해녀들이 직접 물질로 얻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가게와 해녀들의 물질 없이 저렴한 가격에 사들인 해산물을 판매하는 곳이 이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면, 해녀들의 물질 노동과 자율적으로 만든 규약, 그리고 관계들이 상실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바다에서는 파도에 맞서지 않고 타고 넘어야 한다’ ‘물속을 오르내리기 위해선 테왁과 무게추인 납에 의지해야 한다’ ‘망사리엔 충분히 수확해도 괜찮은 해산물만 담아야 한다’ 등 해녀들이 바다를 아껴 일구는 지식과 지혜 역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뭍에서는 죽은 말이지만, 바다에서는 생존의 말이다.
‘현직’ 해녀 급감은 해를 넘길수록 가속화할 모양새다. 기장의 항포구에는 신규 해녀가 사실상 없다. 해녀 대다수가 60~70세 이상 고령이고 30세 이하는 없으며 30~59세가 44명뿐이어서 부산의 바다 속내를 들려줄 해녀들을 만나기는 점점 어려워질 전망이다. 그러니 해녀들의 바다를 받아 적는 일이 서둘러 이루어져야 한다. 아직은 ‘천 개’의 바다가 살아 있으니 말이다. /김만석 (독립 연구자) sisain. 2019.7.16.
저승의 숨으로 이승의 여신이 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농사지을 땅은 변변치 않은
제주의 해안마을에서 제주 여성들의
직업적 선택지는 오로지 해녀뿐이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 직업이
어찌나 힘들고 고달팠던지
해녀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일러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 자조하곤 했다.
그런 해녀가 2016년이 저물기 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숨’ 하나에 의지하면서 자연,
생태계와 공존하는 에코 페미니즘의 전사,
애기 해녀의 망사리에 자신의 ‘물건’을 던져주고
나이 든 해녀들에게는 ‘할망바당’을 보장하는
공동체 정신의 소유자,
제주 해녀는 살아서 여신이 된 여자들이다.
서명숙(제주올레 이사장)sisain.2017 01 03
유네스코 한국무형문화유산> 제주해녀문화
등재연도 : 2016년
Culture of Jeju Haenyeo(Women Divers)
요약
제주도의 여성 공동체에는 최고령이 80대에 이르는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수심 10m까지 잠수하여 전복이나 성게 등 조개류를 채취하는 해녀(海女)가 있다. 바다와 해산물에 대해서 잘 아는 제주 해녀들은 한번 잠수할 때마다 1분간 숨을 참으며 하루에 최대 7시간까지, 연간 90일 정도 물질을 한다. 해녀들은 물속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독특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해녀들은 저마다의 물질 능력에 따라 하군, 중군, 상군의 세 집단으로 분류되며 상군 해녀들이 나머지 해녀들을 지도한다. 잠수를 앞두고 제주 해녀들은 무당을 불러 바다의 여신인 용왕할머니에게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며 잠수굿을 지낸다. 관련된 지식은 가정, 학교, 해당 지역의 어업권을 보유한 어촌계, 해녀회, 해녀학교와 해녀박물관 등을 통해서 젊은 세대로 전승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정부에 의해 제주도와 제주도민의 정신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지정된 ‘제주 해녀 문화’는 공동체 내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해왔고, 생태 친화적인 어로 활동과 공동체에 의한 어업 관리는 친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예능보유자
일반적으로 물질하는 사람을 해녀(海女)라고 부르는데, 제주도의 몇몇 마을에서는 잠녀(潛女) 혹은 잠수라고도 부른다. 물질은 노련한 해녀들을 관찰하고, 다른 해녀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배운다. 또한 반복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익힌다. 일반적으로 물질은 어머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족 내의 여성들 사이에 전승된다. 물질 기술과 제주 해녀 문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제주 해녀 공동체에서 오랜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왔다.
물질 실력을 기준으로 제주 해녀공동체는 상군, 중군, 하군의 세 집단으로 나뉜다. 상군 해녀는 오랜 기간 물질을 하여 기량이 뛰어나며, 암초와 해산물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어 흔히 해녀회를 이끈다. 제주 해녀들은 상군 해녀들로부터 물질에 필요한 지식뿐만 아니라 해녀 문화에 대한 지식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배운다.
마을 어촌계가 마을 주변 어장에 대한 입어권(入漁權)을 독점하기 때문에 물질 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은 어촌계에 가입하고 해녀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촌계와 해녀회는 제주 해녀 문화를 실천하고 전승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진다.
무형유산의 의미
제주도 주민이라면 거의 대부분 가족 중에 해녀가 있기 마련이므로 제주 해녀 문화는 제주도민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작은 부표(테왁) 하나에 의지하여 거친 바다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해녀의 이미지는 제주도민의 정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런 이유로 제주특별자치도 정부는 해녀를 제주도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지정하였고 ‘해녀노래’는 많은 제주도민들이 가장 즐기는 노래가 되었다.
제주도는 토양이 비옥하지 않은 화산섬이기 때문에 대규모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한때 제주 해녀들은 각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한편, 특별히 지정된 일부 바다에서 공동 작업을 해서 얻은 이익으로 공동체 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학교 바당’이라 불리는 구역에서 얻은 모든 소득은 공동체 어린이를 위한 초등학교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활동은 해녀와 그 공동체가 가진 연대와 조화의 정신을 증명한다.
환경 친화적인 채취 활동에 해당하므로 제주 해녀들의 물질 작업은 지속가능성을 강화한다.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적인 욕심이지만 호흡을 돕는 장비의 도움 없이 물속에서 머무는 개인 능력의 한계 때문에 지나친 욕심을 버려야 하는 자제가 가능하다. 공동체 전체가 해마다 잠수 일 수를 결정하고 작업 시간, 채취할 수 있는 해산물의 최소 크기를 정하며 남획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 기술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제주 해녀 문화는 자연에 순응하며 삶을 일구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승정보
제주 해녀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물질에 적합한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반복된 물질과 훈련을 통해서 강하고 능숙한 해녀로 거듭나는 것이다. 과거 제주도 해안 마을의 소녀들은 ‘애기바당’이라고 부르는 얕은 바다에서 물질을 배우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해녀의 삶이 더 이상 모든 소녀들이 따라야 할 자연스러운 삶이 아닌 것이 되면서 해녀라는 직업은 고민스런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각 마을의 제주 해녀 공동체는 새로운 해녀들을 위한 직업학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8년 한 마을의 어촌계가 설립한 해녀학교는 보다 체계적으로 물질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한 제주 해녀가 강조했듯이 물질 작업은 ‘눈치껏 배우는’ 것이다. 여러 형태의 사냥이나 어로 작업이 흔히 그러하듯이 물질의 경우도 해녀들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지식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을 수 있다. 해녀들이 불을 피워 몸을 덥히는 해안가의 불 턱에서, 또는 해녀들을 위한 현대적인 휴게 시설에서 신참내기 해녀들은 다른 해녀들, 특히 상군 해녀들의 경험을 귀담아들음으로써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능력을 향상시킬 동기와 책임감을 배운다.
이렇게 물질 기술을 포함한 제주 해녀 문화는 제주 해녀 공동체 안에서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으며, 각급 학교와 해녀박물관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본문
제주도는 한반도 남해 바다의 화산섬으로 인구 약 60만 명이 살고 있다. 제주도의 일부 지형은 2007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제주 해녀들은 보통 잠수를 할 때마다 1분 정도 숨을 참고 수심 10m 아래 바다로 내려가 해산물을 채취한다. 잠수를 마치고 수면에 떠올라 숨을 내뱉을 때는 매우 특이한 소리를 내는데 이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해녀는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연간 90일 정도 작업한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통해 얻은 소득은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 속의 암초와 해산물의 서식처를 포함하여 바다에 관한 인지적 지도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조류와 바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이러한 머릿속 지도와 지식은 저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물질을 통해 경험으로 습득된다. 해녀들은 물질을 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공식적인 일기예보보다 물질 경력이 오래된 상군 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의 여신인 용왕할머니에게 제사(잠수굿)를 지내 바다에서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다. 잠수굿을 지낼 때는 해녀들이 ‘서우젯소리’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물질을 할 바다로 나갈 때 불렀던 ‘해녀 노래’ 역시 제주 해녀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사단법인 제주해녀문화연구원
왜 그랬을까요?
상군 이상의 해녀는 물질하러 해안에서 비교적 먼 곳까지 나갈 수 있지만, 하군 해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가기도 어렵고 설령 나간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숨도 짧아져서, 깊은 바다가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통해서 하군 해녀도 생계를 위한 소라, 전복 등의 물건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불턱'회의는 해녀공동체가 추구하는 ‘공존’ 가치가 실현되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해녀공동체의 이 약속은 마을 사람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는 어선은 그날 수확한 어패류 중 일부를 이 ‘할망바다’에 던졌습니다. 자발적으로.하군 해녀를 위한 어패류이기도 했지만, 혹여 가능하다면, 먼 바다에 가서 더 자라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도 해양생태계와의 '공존'가치를 실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하게 말하자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실천인 셈입니다.
제주해녀물질실태조사
해녀에 대한 현재까지의 여러 연구 문헌을 살펴보면, 해녀 노래, 무속, 의식주, 신화, 물질이 신체에 미치는 여러 영향 등으로 상당히 다양합니다.
그러나 정작 해녀의 잠수시간, 잠수깊이, 그리고 개인적 혹은 계급별 물질 행태의 차이 등에 대해서 다룬 연구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던, 2015년 5월 어느 날, 제주해녀문화연구원, 좀녀바당지킴회 그리고 한림수협내 귀덕1리 어촌계가 함께 모여서 ‘제주해녀물질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연구결과, 4시간 정도의 물질 시간 동안 총 240여 회의 잠수, 이는 시간당 60회의 잠수를 의미합니다. 잠수깊이는 계급에 따라 다른데, 상군은 12m 전후, 중군은 7m 전후, 그리고 하군은 3m 전후에서 물질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단법인제주특별자치도해녀협회
국가중요어업유산제도(KIFHS)
오랜 기간 동안 형성·진화해 온 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적 어업활동 시스템과 그 결과로 나타난 어촌 경관·문화 등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통칭함
사라져가는 어촌의 고유한 문화를 발굴하여 어촌 방문객 증대 및 지역 경제 활성화 도모를 위해 국가중요어업유산제도 사업을 추진함
근거법령 : 농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 제30조3(국가중요어업유산의 보전·활용)
관련 법령
※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 제30조의3
제30조의3(국가중요어업유산의 보전·활용) -해양수산부장관은 어업인이 해당 지역의 환경·사회·풍습 등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형성시켜 온 유형·무형의 어업자원 중에서 보전할 가치가 있는 어업자원을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국가중요어업유산에 관하여는 제30조의2제2항부터 제5항까지를 준용한다. 이 경우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은 “해양수산부장관”으로, “국가중요농어업유산”은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농림축산식품부령”은 “해양수산부령”으로 본다.
제주 해녀어업(제1호) (’15.12)
대상지역-제주도 전역 (14,346ha)
특징-제주 해녀어업은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 소라, 미역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전통적 어업방식으로 불턱, 해신당 등 세계적으로 희귀하고 독특한 문화적 가치 존재
보성 뻘배어업(제2호) (’15.12)
대상지역-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암리 일대(35㎢)
특징-밟으면 매우 깊게 빠지는 아주 미세한 갯벌 진흙(mud) 특성 때문에 뻘배는 꼬막 채취를 위한 유일한 어업활동 이동 수단
남해 죽방렴(제3호) (’15.12)
대상지역-경남 남해군 삼동/창선면 지족해엽 일원 (537.2ha,죽방렴 23개소)
특징-삼국시대 이래 현재까지 어업인 생계수단으로써 자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반도 유일의 함정어구를 사용한 어로방식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대표적인 전통적 어업시스템
신안 갯벌 천일염업(제4호) (’16.10)
대상지역-전남 신안군 천일염전 일대 (29.7㎢)
특징-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 들여 전통 기술과 노하우를 이용해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만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전통어업활동시스템
제주해녀의 명칭
해녀 / 녀 / 잠수(潛嫂)
제주에서는 주로 ‘ 녀’ , 고문헌에서는 ‘잠녀(潛女)’
조선시대 ‘포작(鮑作)’ : 남성들로 주로 깊은 바다에서 전복 채취 ‘잠녀(潛女)’ : 여성들로 미역과 청각 등 해조류 채취
17세기 후반부터 물질은 여자만 전담
제주해녀의 역사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어획물이 줄어들면서 외부세계와 연결망 형성
1895년부터 제주해녀가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
경상도, 강원도, 다도해, 경상북도, 함경도 등 한반도는 물론,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따오(靑島)와 따리엔(大連),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까지 진출
출가해녀 수 (1937년 기준)
제주해녀항일 운동
독립유공자 신재홍, 강관순, 문도배, 오문규, 김순종 등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생존권을 위협 받자 해녀 야학을 여는 등 항일의식 고취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연계해 생존권 투쟁에서 항일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
제주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맞선 생존권 수호 투쟁인 동시에 일제 수탈 정책에 저항했던 여성항일운동으로 평가
1960년대 이후의 제주해녀
해녀들 저자 허영선|문학동네 |2017.07
허영선-1957년 제주도에서 출생했으며시인이다.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 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제주 4·3연구소 이사·제주대 강사로 있다. 제주대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 석사,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논문 「제주 4·3시기 아동학살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뿌리의 노래』, 문화 칼럼집 『섬, 기억의 바람』, 역사서 『제주 4·3』, 4·3구술집(구술 정리) 『빌레못굴, 그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늘속의 4·3』 (공저), 그림책 『바람을 품은 섬 제주도』, 『워낭소리』 등을 펴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해녀전
- 울 틈 물 틈 없어야 한다
해녀들
해녀 김옥련 1
해녀 김옥련 2
해녀 고차동
해녀 정병춘
해녀 덕화
해녀 권연
해녀 양금녀
해녀 양의헌 1
해녀 양의헌 2
해녀 홍석낭 1
해녀 홍석낭 2
해녀 문경수
해녀 강안자
해녀 김순덕
해녀 현덕선
해녀 말선이
해녀 박옥랑
해녀 고인오
해녀 김태매
해녀 고태연
해녀 매옥이
해녀 장분다
해녀 김승자
해녀 오순아
2부 제주 해녀들
-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
우린 몸을 산처럼 했네
몸국 한 사발
북촌 해녀사
우리 애기 울면 젖 호끔 멕여줍서
우리는 우주의 분홍 젖꼭지들
한순간의 결행을 위해 나는 살았죠
파도 없는 오늘이 어디 있으랴
다려도엔 해녀콩들 모여 삽니다
바닷속 호흡은 무엇을 붙잡는가
먹물 튕겨 달아나는 문어처럼
잠든 파도까지 쳐라!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만날 수 있나
우리가 걷는 바당올레는
물질만 물질만 하였지
혹여 제주섬을 아시는가
심장을 드러낸 저 붉은 칸나
테왁이 말하기를
모든 시작은 해 진 뒤에 있다
내 먹은 힘으로 사랑을 낳았던가
울고 싶을 땐 물에서 울어라
단 한 홉으로 날려라
딸아, 너는 물의 딸이거늘
해녀는 묵은 것들의 힘을 믿는다
어머니, 당신은 아직도 푸른 상군이어요
산문|그들은 물에서 시를 쓴다
추천의 글|고은(시인)
출판사 서평
1부는 '해녀전'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울 틈 물 틈 없어야 한다'는 부제가 달려 있다. '전(傳)'이라 하니 '사(史)'이겠구나 싶은 짐작 속에 역사 속 우리 해녀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제목부터가 이들 해녀들의 이름이다. 이름이 곧 시가 되는 인생사, 이는 제 온몸을 제 하나의 생을 말마따나 말이 되게 세상에 던졌다는 증거일 텐데 그래서일까,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일이 참으로 뼈아프다. 해녀 김옥련, 해녀 고차동, 해녀 정병춘, 해녀 덕화, 해녀 권연, 해녀 양금녀, 해녀 양의헌, 해녀 홍석낭, 해녀 문경수, 해녀 강안자, 해녀 김순덕, 해녀 현덕선, 해녀 말선이, 해녀 박옥랑, 해녀 고인오, 해녀 김태매, 해녀 고태연, 해녀 매옥이, 해녀 장분다, 해녀 김승자, 해녀 오순아……
비록 한 편의 시로 완성되어 시집 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이들과 함께 물질했던 수많은 이름 모를 우리 해녀들 실은 물거품처럼 얼마나 많았을까. 이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징용 물질을 끌려가기도 했고, 제주해녀항쟁으로 모진 고문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4?3이 휘몰고 간 '무남촌'을 지키느라 억척으로 매일같이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짐작할 수도 없고 또 짐작한다 해도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지난한 해녀들의 삶. 부제로 삼은 구절 '울 틈 물 틈 없어야 한다'라는 대목에서 이제야 무릎이 툭 꺾이는 바다. '틈'을 보이고 '틈'에 빠지는 순간 해녀들에게 닥치는 건 죽음밖에 없다는 걸, 그 죽음은 비단 해녀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 드리울 생의 암막이라는 걸 그들은 해녀가 된 그 순간부터 알아버렸던 탓일 게다.
2부는 '제주 해녀들'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1부의 시편들을 건너왔으니 2부의 부제가 한눈에 이해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얹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죽음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다를 향해 자발적으로 뛰어듦을 삶으로 택한 해녀의 의지 뒤에는 오로지 그 '사랑' 말고는 있을 게 없기 때문이다. 보다 손쉬운 이해를 바란다면 2부를 읽기 전에 말미에 자리한 시인의 산문 「그들은 물에서 시를 쓴다」를 먼저 읽어봐도 좋겠다. 요긴한 해설서가 되어주기는 할 듯싶다. "부끄러우면 물질하지 못한다"가 그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비울 것 비우고 껴안을 건 껴안으라는 당부의 말을 먼저 새기고 돌아와 2부의 시편들을 읽어내면 그 읽기에 탄성이 절로 붙음은 물론이니 말이다.
딸이어서 뛰어들 수 있었고, 아내여서 뛰어들 수 있었고, 엄마여서 뛰어들 수 있었고, 할미여서 뛰어들 수 있었던 바다바라기 해녀. 젖줄을 바다에서 끌어오지 않으면 말라버릴 젖줄의 두려움을 평생 몸으로 새기고 사는 해녀들. 스스로 바다에 뛰어드는 건 사랑이 시키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 그 사랑의 근원이 말로 다할 수는 없음이라 할 때 이는 ‘시’의 그러함과 똑 닮아 있기도 한 듯하다. 특히 2부의 제목들을 보자면 시의 정의로 치환되는 대목이 여럿이다. ‘우린 몸을 산처럼 했네’, ‘우리는 우주의 분홍 젖꼭지들’, ‘한순간의 결행을 위해 나는 살았죠’, ‘파도 없는 오늘이 어디 있으랴’, '바닷속 호흡은 무엇을 붙잡는가', '먹물 튕겨 달아나는 문어처럼', '잠든 파도까지 쳐라!', ‘모든 시작은 해 진 뒤에 있다’, '울고 싶을 땐 물에서 울어라’, ‘해녀는 묵은 것들의 힘을 믿는다’ 등등에서 느껴지는 시라는 정신의 등뼈. 시를 쓸 때 백지와 나 사이의 긴장감과 거리감을 바다와 해녀 사이에 놓아봤을 때 일견 유지되는 생의 팽팽함. 이렇듯 시와 해녀는 똑 닮아 있구나. 이렇게 시와 해녀는 쏙 빼닮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나는『해녀들』을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로 읽는다. “어떤 절박함 없이 어떤 극한을 견디겠는가.” 삶이 무엇인가를 말없는 물노동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참으로 귀한 시집, 뜨거운 눈물과 차가운 바닷물이 섞여 덤덤한 듯 일렁이고 있는 시집『해녀들』을 나는 한 편의 탄탄한 시론으로 읽는다. 해녀들은 물에서 시를 쓴다. 없어질 것을 운명으로 아는 시를!
시인의 말
새벽길에 보았다.
물길을 가는 그녀들.
저무는 길에 보았다.
별처럼 우수수
붉은 바다로 뛰어드는 그녀들.
나는 그저 그녀들을 뒤따를 뿐이다.
물의 시를 쓰는 물속의 생과
몸의 시를 쓰는 모든 물 밖의 생을
한 홉 한 홉 기록해나갈 뿐이다.
내 안에 오래도록 꽉 차 있던 소리
숨이 팍 그차질 때 터지는 그 소리
숨비소리
그 소리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2017년 6월
허영선
죄명은 소요랍니다
기어코 이름 불지 않았습니다
문패 없는 바다에서 무자맥질한 죄
한목숨 바다에 걸고 산 죄는
있습니다만,
또하나 죄라면
전복 해초 바다 물건 제값 달란 죄
악덕 상인 파면하란 죄
바다는 우리 밭, 호미 들고 빗창 든 죄
돌담 위로 난바다 식민의 바람 편향적으로 불 때
죄 없이 죄인 된 스물둘 소녀회 회장
꽁꽁 팔 묶여
꿈마저 호송당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캄캄한 동굴 같은 감옥에서
갇힌 물은 때론 죽음 같은 고문 되는 것
우리 혈맥 다 끊어도 우리 사랑 막지 못한다,
사랑 없는 숨비질은 죽음이란 것
버티고 버텼습니다 뼛속 물의 힘으로
그해 겨울에서 봄까지
소금꽃 얼음꽃 물 아닌 감옥에서 피웠습니다
끝끝내 살아남아 이룬 것 하나
바락바락꽃 ---「해녀 김옥련 1」중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저자 유홍준|창비 |2012.09
유홍준-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십여 차례 갖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교수 및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주 추사관 명예관장도 맡고 있다.
평론집으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답사기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10, 일본편 1~4), 미술사 저술로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전2권), 『완당평전』(전3권),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추사 김정희』 등이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주허씨’를 위한 ‘제주학’ 안내서
제주답사 일번지 1―와흘 본향당
본향당 팽나무에 나부끼는 하얀 소망들
제주도 / 제주의 가로수 / 산천단 / 와흘 본향당 /
소지의 내력 / 회천 석인상
제주답사 일번지 2―조천 너븐숭이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조천 연북정 / 조천연대 / 큰물, 근돈지 / 너븐숭이 /
제주 4·3사건의 전말 / 「순이삼촌」 문학비
제주답사 일번지 3―다랑쉬오름
설문대할망의 장대한 대지예술
제주의 자연 / 다랑쉬오름 / 용눈이오름 / 김영갑 갤러리 /
아부오름 / 『오름나그네』
제주답사 일번지 4―용천동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용암동굴은 없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 성산일출봉 / 용암동굴 /
당처물동굴 / 거문오름 / 용천동굴
제주답사 일번지 5―하도리 해녀 불턱
숨비소리 아련한 빈 바다에 노을이 내리네
제주해녀항일기념탑 / 해녀박물관 / 세화리 갯것할망당 /
대상군 이야기 / 하도리 해녀 불턱 / 종달리 돈지할망당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기―영실
진달랩니까, 철쭉입니까
한라산 / 임백호 『남명소승』 / 오백장군봉 / 영실 / 팔도 아줌마 /
구상나무 / 윗세오름 / 겐테 박사 / 정지용의 「백록담」
탐라국 순례 1―삼성혈
전설은 유물을 만나 현실로 돌아온다
삼성혈 / 돌하르방 / 삼사석 / 일도 이도 삼도 /
삼양동 선사유적지 / 삼양동 검은 모래
탐라국 순례 2―관덕정
탐라국에서 제주도로 넘어가면서
탐라국에서 제주군으로 / 불탑사 오층석탑 / 고려왕조의 이미지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 제주목 관아 / 관덕정 / 관덕정 돌하르방
탐라국 순례 3―오현단
제주의 삼보(三寶)와 영주십경(瀛州十景)
무근성 / 오현단 / 귤림서원 / 향현사 / 제주성터 / 『탐라순력도』 /
사라봉 / 만덕할머니 / 김만덕 기념탑 / 한라수목원 / 제주어
제주의 서남쪽 1―하멜상선전시관
불로초를 찾아 오고, 태풍에 실려 오고
명월성 / 명월리 팽나무 군락 / 백난아 「찔레꽃」 / 산방산 /
하멜상선전시관 / 『하멜 보고서』 / 서복전시관
제주의 서남쪽 2―송악산
아, 다녀가셨군요
무태장어 / 용머리해안 / 형제섬 / 사계리 사람 발자국 화석 /
일본군 진지동굴 / 송악산 / 알뜨르 비행장 / 백조일손지묘 / 「빈 산」
제주의 서남쪽 3―대정 추사 유배지
세한도를 그릴 거나, 수선화를 노래할 거나
유배지로 가는 길 / 위리안치 / 아내에게 보낸 편지 /
찾아오는 제자들 / 「세한도」 / 추사의 귤중옥 / 수선화를 노래하며 / 방송
제주의 서남쪽 4―모슬포
모슬포 모진 바람은 지금도 여전하고
제주 추사관 / 대정읍성 / 삼의사비 / 대정향교 / 인성리 방사탑 /
육군 제1훈련소 / 강병대 교회 / 모슬포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1―조랑말박물관
순종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련다
천연기념물 347호 제주마 / 제주마 방목장 / 사려니 숲길 /
교래리 토종닭 / 가시리마을 / 조랑말박물관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2―제주학의 선구자들
잊어서는 안 될 그분들을 기리며
헌마공신 김만일 / 재일동포 공덕비 / 위미 동백나무 울타리 /
감귤박물관 / 이중섭 미술관 / 이즈미 세이이찌 / 돈내코 / 석주명 흉상
지명 찾아보기
제주의 새로운 발견ㅡ제주도가 정녕 이런 곳이었단 말인가
‘제주 답사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번째 ‘제주답사 일번지’에 등장하는 지역은 제주의 동북쪽 조천과 구좌 부근이다. 이 지역은 다랑쉬오름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오름, 돈지할망당?갯것할망당에서 엿볼 수 있는 제주의 신앙, 그리고 제주 해녀의 1/10이 여전히 활동 중인 하도리의 물질 풍경 등 제주의 자연과 인문의 속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제주의 현대사를 가장 비극적으로 만든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4?3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은 제주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인 기생화산, 즉 오름의 왕국이다. 특히 제주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기적적으로 발견된 용천동굴 이야기는 세계적인 평가를 통해 제주 자연의 가치에 한층 더 자긍심을 갖게 만들어준다. 또한 해녀 이야기를 제주어의 맛을 살려 풀어주는 ‘제주 삼춘’들의 에피소드는 육지사람들은 물론 제주인들에게조차 신비롭고 재미있는, 답사기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다.
두번째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기’에 등장하는 영실은 저자가 꼽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꽃이 흐드러지면 또 그런 대로 가장 아름다운 이곳은 험한 등반 코스가 아니면서도 한라산의 전모를 한껏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실 등반 코스는 서막인 울창한 숲길을 지나, 제1막 오백장군봉, 제2막 진달래 능선, 제3막 구상나무 군락지, 제4막 윗세오름을 지나 백록담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숨가쁜 등반 중에도 저자는 입담을 발휘하여 백호 임제의 『남명소승』과 오백장군봉의 설문대할망 전설을 소개하고,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를 노래한다. 진달래 능선에 도착해서는 아예 자리를 펴고 관광하러 온 팔도 아줌마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팔도 사투리와 입말이 살아 있는 ‘팔도 아줌마론’을 구성지게 풀어놓는다. 그 산길에서는 또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를 가져가 오늘날 크리스마스트리의 주종이 되는 나무 종을 만든 영국의 식물학자 윌슨과 한라산의 높이를 최초로 측정한 겐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세번째는 ‘탐라국 순례’로 탐라국에서 제주도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제주의 고?양?부 3성의 시조가 태어난 전설이 얽혀 있는 삼성혈과 삼양동 선사유적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 몽골에 항거한 삼별초의 유적, 제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 중 하나인 관덕정을 거쳐 다섯 성현을 모신 오현단, 그리고 조선시대 의녀 김만덕 할머니를 기리는 공간까지를 소개한다. 일반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덕정과 삼성혈은 그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모르고 간다면 사실 별달리 눈길이 가는 곳이 아니다. 스토리가 빠진 단순 관광이라면 어디라도 그렇겠지만 유난히도 현대화되고 화려한 관광코스가 많은 제주에서라면 더군다나 그런 곳은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다. “전설이 유물을 만나면 현실적 실체감을 얻게 되고, 유물은 전설을 만나면서 스토리텔링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 저자는 이를테면 삼양동 검은 모래 해수욕장은 육지의 관광객이나 일본 관광객들까지도 많이 찾는 모래찜질로 유명하지만 바로 그 위쪽에 있는 선사유적지에 들르는 사람은 극히 드문 점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학자들의 지나친 학문적 신중성과 엄숙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최근에 김만덕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표준영정까지 제작하는 등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된 김만덕 할머니를 돌아보는 공간에 들어서면 정작 그 묘소는 초라하게 방치되고 엄청난 규모의 기념탑이 세워져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며 애석해한다.
제주의 심장으로서 광장의 역할을 해야 마땅한 관덕정 앞마당의 오늘날 모습에 대한 아쉬움, 테마파크처럼 복원해놓은 채 출입을 금해놓은 제주목 관아 보존 방식에 대한 충고, 본래의 소박하고 조촐한 다섯 기의 비석 옆에 현대식 비석들이 난립한 오현단의 모습에 대한 개탄 등 여전히 갈 길이 먼 문화재 행정과 지자체의 인식 부족에 대한 아쉬움 등을 토로하는 대목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네번째 지역은 ‘제주의 서남쪽’으로 하멜과 서복의 흔적이 남은 산방산 일대, 일본군 진지동굴과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송악산 일대, 추사가 유배 왔던 대정, 그리고 제주 추사관이 자리하고 있고 대정향교와 대정읍성에서 가까운 모슬포 일대가 펼쳐진다. 이 지역에서는 『완당평전』을 썼던 저자의 김정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제주 추사관을 재건하며 경험했던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마지막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에서는 제주마, 토종닭 마을, 재일동포 공덕비 등을 둘러보며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특히 제주의 자연, 문화, 신앙, 언어, 역사 등을 집약하며 ‘제주학’의 경지를 지향했고 저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주요한 두 인물인 ‘나비박사’ 석주명과 일본인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이찌(泉靖一)를 소개한다. 이 책 전편에는 오늘의 제주를 만든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특히 이 두 인물의 이야기는 이채롭고 뜻깊다.
청사포에 해녀가 산다 저자 배은희, 최봉기|빨간집 |2017.10
『청사포에 해녀가 산다』는 에코에코협동조합 화덕헌 대표의 기획으로 배은희와 최봉기가 2016년 5월부터 약 4개월간 청사포 해녀들을 만나며 사진과 글로 남긴 기록이다. 제주출신이 아닌 자생적 육지해녀인 청사포 해녀들의 물질하는 이야기와 살아온 이야기를 채록하고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청사포 해녀만이 가진 이야기와 속성을 담아내려고 했다.
<청사포 마을 가는 길>은 청사포와 청사포 해녀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짧은 안내문이다. 청사포 해녀의 주요 물질 장소인 다릿돌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한 자료는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 해녀들이 알려준 다릿돌의 이름을 표기하며 청사포 해녀와의 관계를 담았으며, 청사포 해녀도감에는 뒤에 이어질 해녀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물질 도구 명칭과 특징들을 일러스트로 담았다,
<청사포에 해녀가 산다>는 8명의 해녀와 해녀들을 배로 나르는 선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았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해녀들이 어떻게 물질을 하게 되었으며, 해녀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시선은 어떤지, 물질 방식과 바다 속은 풍경 등에 대한 해녀들의 일상 이야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과 속내까지 솔직하게 풀어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청사포 해녀의 기원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지은이의 말
2016년 5월부터 약 4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씩 청사포 해녀들을 만나러 장산 신도시와 청사포 어촌을 잇는 고개를 넘었다. 그들과 만남은 쉽지 않았다. 바다 날씨가 좋으면 말 걸어볼 틈 없이 배를 타고 나가버리니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돌아와서는 장사준비에 바빠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런 날은 해녀들의 이야기와 움직임들을 관찰했다. 인터뷰는 물질하지 않는 날에만 가능했는데, 물질 여부는 당일 아침에 결정되었다. 허탕을 치더라도 우선 가야 했다. 그래도 그 덕에 짧게나마 해녀들과 마주치고 인사하는 횟수가 늘었고 마음의 거리는 좁혀졌다. 카메라를 들고 매번 찾아간 우리를 거부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경제활동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는 것이 너무 비루해 넘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사람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놀았으니 물질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초만 캐다가 제주 해녀가 물질하는 모습을 보고 전복, 소라, 성게를 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이 지금도 같이 물질을 하고 있다. 매일같이 만났을 텐데 해녀 휴게실에 모여 있으면 얘기가 끊이질 않는다. 그럴 때면 소녀 시절 모습들이 살짝 엿보였다. 그러다가 물질을 나갈 때는 치열한 삶의 전선으로 향하는 여전사가 따로 없다.
청사포에는 윗마을 해녀와 아랫마을 해녀가 따로 있다. 동시에 취재할 여건이 되지 않아 이 책에는 아랫마을 해녀들의 이야기만 실렸다. 청사포 해녀가 들려주는 바닷속 이야기와 도시 속 어촌에서 사는 삶을 그들의 언어로 직접 느껴보기 바란다.
책속으로
젊은 사람이 비아가 뭐할라꼬. 힘이 들고. 이제 젊 은 사람은 안 해. 아무도 없다. 뭐할라꼬. 끊어지지 우짜노. 뭐 아쉬 울 게 있노. 아이고, 머 할라고 숨 안 쉬고 벌이는 돈을, 젊은 사람 이 그리 벌이가 살라 하나. 78
전에는 뻘건 산호랑 풀이 많이 있으니까 너무너무 색깔이 보기 좋았 거든. 근데 지금은 그 산호도 없어졌어. 빨간 산호, 흰 산호도 없어졌 고, 누루무리한 그런 산호도 많았거든. 물밑에 들어가면 풀이 마이 없어. 옛날에는 물고기도 엄청 마이 왔다 갔다 했지. 방어 그런 게 떼를 지어 가지고 가고 이랬거든. ‘쿠쿠쿠쿠’ 소리 내고. 그래 ‘엄마 야’, 옆에 올까 봐 겁내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혹돔이 우리가 전복 찾 으러 다니면 지도 옆에서 이래 헤아 가고 그랬거든. 91
오늘도 물질할 때 위험을 느낄 때가 있냐는 질문에 “뭐, 위험할 끼 있나.”는 심드렁한 대답뿐이다. 사람 속을 아는 것만 힘든 일이랴. 열 길 물속을 아는 것도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211
기다리는 마음 (김정미)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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