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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전쟁은 사기다

by 이성근 2018. 12. 29.



전쟁은 사기다 저자 스메들리 버틀러|역자 권민|공존 |2013.06

원제 Europe and elsewhere

 

저자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DARLINGTON BUTLER)1881730일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체스터에서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퀘이커교 집안 출신이었고, 아버지 토머스 스토커 버틀러는 변호사이자 판사였으며 31년간 펜실베이니아 주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냈다. 외조부는 펜실베이니아 주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스메들리 달링턴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1898년에 스페인-미국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소위로 임관한 뒤 쿠바로 파견됐다. 이후 필리핀과 중국, 중남미로 파견되어 약 120회의 전투에 참여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해병대 최고 훈장인 브레빗 훈장을 수훈하고 미국 최고의 훈장인 의회 명예 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유일한 전쟁 영웅이 됐다. 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에 위치한 미군 상륙 기지의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 마흔여덟에 최연소로 당시 해병대 최고 계급인 소장에 올랐다. 하지만 평소 평화주의, 반파시즘 언행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해병대 사령관 인사에서 밀려나 1931년에 퇴역하고 말았다. 퇴역 후에는 반전 평화주의 연설가로 미국 700여 개 도시를 돌며 1,200여 회의 연설을 해 전국적인 명성과 지지를 얻었으며, 1935년에 자신의 연설을 보강해 전쟁은 사기다라는 책을 펴냈다. 출간과 동시에 화제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오늘날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클래식으로 손꼽힌다. 그는 또 대공황 시절 부유한 자본가들이 그들에게 불리한 경제 정책을 펴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축출하고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려고 한 음모를 폭로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음모는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지만 음모 가담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는 1930년대의 반전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다가 1940621일 필라델피아 해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차

추천사

번역자 서문

 

1장 전쟁은 사기다

2장 누가 이득을 보는가?

3장 누가 빚을 갚는가?

4장 이런 사기를 없애는 방법!

5장 전쟁일랑 집어치워라!

 

전쟁을 위한 기도

주요 서평

 

반전주의자가 된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

1881년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1898년에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분위기에 휘말려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신병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해 쿠바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34년 동안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에서 미국의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무려 121회의 전투에 참여했고 목숨이 위태로운 큰 부상을 두 차례나 입었다. 그러면서 미국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퇴역하기 전까지 모두 16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5개는 무공 훈장이다. 미국 군 역사상 해병대 최고 훈장인 브레빗 훈장과 두 개의 의회 명예 훈장을 수훈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스페인-미국 전쟁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와 간섭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가이면서 평화주의자였다. 퇴역을 즈음하여 그는 자신의 과거, 조국과 세계의 변화를 회고하고 통찰하며 열정적인 반전 연설과 평화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현역으로 있으면서 더 이상 자본주의의 앞잡이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맞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창한 헌법상의 기본 원칙을 널리 전파하는 연설가로 변신했다. 즉 자유민주주의와 평화 수호하기 위한 고립주의, 비간섭주의, 평등 외교를 호소했다.

 

그는 1930년대에 미국 700여 개 도시를 돌며 1,200여 회의 연설을 했다. 기업들의 전시 부당이득 취득,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 미국에서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 파시즘에 반대하는 거리낌없는 연설로 전국적인 명성과 지지를 얻었다. 이후 해외 참전군인들의 권익 신장, 미국의 군비 확장 반대, 국외 전쟁 개입 반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반대를 주장하며 활발한 반전 평화운동을 펼치다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군산복합체의 실체를 최초로 고발한 화제작, 전쟁은 사기다

1935년 버틀러는 미국 기업들의 전시 부당이득 취득에 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전쟁은 사기다를 출간했다. 1930년대 초 전국을 누비며 한 연설을 보강해서 펴낸 이 책에서 그는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밝히고, 애국심과 영웅심으로 포장된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해 뜨거운 찬사와 차가운 비난을 함께 받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문학으로 손꼽히는 이 짧은 에세이는 지금도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교양서이자 교육서로 널리 읽히고 있으며,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사실상 비간섭주의를 포기한 미국의 군사적 침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비판하는 중요한 준거 자료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다. ‘군산복합체라는 용어는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퇴임 연설에서 비롯됐지만 버틀러는 이미 한 세대 전에 선구적으로 군산복합체의 적나라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책에서 그는 미국의 군사 조직이 부유한 미국 기업들의 이득을 위해 어떤 식으로 이용됐는지 실명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현대인들조차도 그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또 그는 전쟁 지지자들이 대중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밝힌다. 그들은 참전 행위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사역으로 미화하면서 군사적 모험에 따르는 경제적 이득 편취는 함구한다.

 

버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쓴 이 책에서 새로운 전쟁의 임박,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위험성 증가, 미래의 가공할 무기들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또 군사력을 자국 방어용으로만 제한할 것을 주장하면서 일본 군함이 미국 서부 연안에 출몰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 나중에 정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사람들은 버틀러의 이런 언급에 전율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의 공격 때문에 고립주의를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전쟁에 내재된 경제적 의미와 제국주의에 관한 버틀러의 관점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수록

본서에서는 3장 누가 빚을 갚는가?(104~105)에 나오는 아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마크 트웨인의 반전 엽편소설 전쟁을 위한 기도를 함께 수록했다.

 

이 전쟁 프로파간다는 너무나 악랄해서, 하느님까지 끌어들였다. 그러지 않은 이가 더러 있긴 했지만, 우리의 성직자들까지 함께 나서서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라고 부르짖었다. 독일인들을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편이고 독일인들을 죽이는 것은 그분의 뜻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명망 있는 목사들이 나서서 독일인들에게 연합국 사람들을 죽이라고 외쳐댔다. 그것은 우리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전쟁 의지와 살인 의지를 갖도록 하기 위한 보편적인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다.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분노한 마크 트웨인은 전쟁을 위한 기도(The War Prayer)를 써서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에 보냈다. 하지만 이 여성 잡지는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했다. 이 작품은 마크 트웨인이 19104월에 죽을 때까지 발표되지 못했다. 신성 모독으로 여겨질까 봐 두려워한 가족들이 만류하기도 했고 친구들도 발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삽화가 겸 작가인 대니얼 카터 비어드(1850~1941)가 그에게 어떻게든 이 작품을 발표할 건지 묻자 트웨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나는 거기서 온전한 진실을 말하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지요. 필시 내가 죽은 뒤에야 발표될 거요.”

 

퓰리처상 위원회 위원이면서 마크 트웨인에 정통한 전기 작가인 앨버트 페인(1861~1937)에 따르면, 트웨인은 1904~1905년에 이 작품을 쓴 후 곧바로 발표하려 했지만 잡지사로부터 게재를 거부당했다. 페인은 1910년 그가 죽은 후 미발표 원고 가운데서 이 작품을 발견했다. 페인은 이것을 자신이 1923년에 편집해서 펴낸 마크 트웨인 에세이 선집 유럽 그리고 다른 곳에서(Europe and Elsewhere)에서 처음 발표했다.

 

매우 함축적이고 짧은 풍자소설이면서 산문시의 특징을 지닌 이 작품은 종교와 전쟁의 관계, 전시에 조장되는 무분별한 애국심과 군중심리, 전쟁에 대한 그릇된 환상과 전쟁의 무시무시한 실상을 칼날처럼 예리하게 그려내 반전 문학의 백미로 불린다. 극적인 반전으로 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결말이지만 누구나 금방 그 웃음을 그치고 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본 번역에서는 시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독서의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시 형식으로 편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남북한은 지금도 휴전 상태로 심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나 발표가 있을 때마다 방산주가 들썩이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될 때마다 경협주가 급등한다. 전쟁은 대개 정치에서 시작되고 정치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 전쟁과 가장 큰 실질적 영향을 주고받는 분야는 경제다. 전쟁이 민족 감정이나 이념보다 경제적 이득에 의해 시작되고 끝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아직도 민족 간 대립의 틀에 갇힌 채 전쟁에 대해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 책은 현대 전쟁의 속성을 이해하고 반전 평화 의식을 가지는 데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1936)

버틀러 장군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투쟁하는 평화주의자.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전공(戰功)을 자본주의의 침탈 행위로 규정하면서 미국이 앞으로 외국의 모든 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살롱(2010)

버틀러는 늘 기득권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평생 동안 필리핀과 중국부터 아이티 그리고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누비며 군사 작전을 폈던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1960년대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미국의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전쟁은 사기다라는 책을 펴냈다.

 

랠프 네이더(변호사, 시민운동가, 논픽션 저자, 미국 녹색당 대통령 후보 5, 2003)

버틀러는 책에서 전시 부당이득을 취득하는 기업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데 한 장()이나 할애했다. 또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하지 않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도록만들면서 하느님까지 끌어들일 정도로악랄한 프로파간다에 대해서도 썼다.

버틀러 장군은 이런 사기를 없앨 수 있는특별한 방법을 제시했다. 전시 부당이득을 취득할 자들을 먼저 징병하라!

 

신디 시한(반전운동가, 작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평화자유당의 부통령 후보, 2010)

오늘날 이 책에 강한 신뢰감이 가는 이유는 저자의 연설이 있고 나서 75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일부 고유명사들을 현재의 해당자들로 바꾸면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다. 전쟁 중에 부자들은 늘 이득을 챙기고 가난한 자들은 늘 그 이득에 해당하는 채무를 진다. 언제나 그렇고 예외란 없다.

 

"전쟁은 최고의 장사다"

[전쟁국가 미국·1-] 1차 대전, 'JP모건을 위한 전쟁

"최고로 신뢰할 만한 회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1차 대전 때 군인 1명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5000달러였다. 그런데 유럽의 어떤 대기업도 정부가 저지른 이런 극도의 낭비에 대해 단 한 차례도 항의하지 않았다. 살인을 개별 조폭들에게 맡긴다면 건당 비용은 100달러를 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기업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인이 이들 대기업의 주업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그들이 자랑하는 상품이다. 정부는 그들의 고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아군이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적군도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터지는 포탄 파편이 전선에 나가 있는 한 인간의 뇌와 심장과 내장을 파고드는 동안, 25000달러의 대부분인 이윤은 무기 제조업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19343월자 기사 '무기와 인간'의 첫 부분이다. 다음 달 별도의 소책자로도 발간된 이 기사는 유럽 무기산업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그러나 이 고발 기사는 유럽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이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며 참전을 단행했다. 나아가 민족 자결, 국제연맹 창설 등 14개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미국의 주도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윌슨의 평화 원칙은 지금까지도 미국 외교의 대원칙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도, 평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파산 위기에 빠진 미국의 은행가와 무기 제조업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재벌 JP모건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측의 무기 구입 및 차관 획득을 위한 유일한 대행자였던 JP모건은 연합국 측의 패배 가능성이 보이면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거액의 전쟁물자 외상 대금과 대출금을 모두 떼일 판이었다. 미국이 참전한 진정한 이유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1차 대전을 '세상을 JP모건에 안전하게 만들어준 전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자살극, 1차 대전

1914628일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인에게 암살된다. 7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그리고 오스만제국을 한편으로(Central Powers : 중부세력),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을 다른 한편으로(Allies : 연합국) 43개월여 동안 자본주의 열강 간에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다.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이후 100년간 지속됐던 유럽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19181111일 전쟁이 끝났을 때 군인 사망자가 1000만 명, 민간인 사망자는 2000만 명으로 무려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비용은 자그마치 1860억 달러. 미국 등 연합국이 1230억 달러를 사용했고 독일은 390억 달러를 썼다. 연합국 중에서는 영국이 540억 달러, 미국이 2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영국은 노쇠한 제국이었다. 전쟁 비용 540억 달러의 36%를 국민 세금으로, 64%(352억 달러) 외부 대출로 충당했다. 대출의 주요 공급원은 미국이었다. 19143월부터 19203월까지 영국이 지출한 540억 달러는 그 이전 225년간의 정부 지출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쟁 직전 71100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국채는 종전 즈음에는 82억 파운드로(390억 달러 ; 당시 1파운드는 4.76 달러) 6년 만에 정부 부채가 1150% 증가한다. 사실상 국고가 파산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전쟁을 치렀다. 이에 따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전쟁이 끝난 후 전쟁 부채를 갚느라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반면 미국은 191742일 참전을 결정했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종전 6개월 전인 19185월이었다. 미군은 연 인원 200만 명이 참전해 116000명이 전사하고 204000명이 부상을 당했다(반면 4년 이상 전쟁을 치른 프랑스는 100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영국 전사자 역시 10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중 영국, 프랑스 등에 제공한 군수물자와 신용 대출 덕에 전쟁 이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최대 채권국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향후 세계의 진로를 좌우하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전쟁 기간 미국 대기업과 정부는 유례없이 긴밀한 결탁 관계를 맺었다. 경쟁을 통제하고 대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면서 은행과 군수기업들은 크게 번창했다.

 

이처럼 연합국 측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전쟁 자금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21000명의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생겨났다. 반면 미국의 공공부채는 191310억 달러에서 1919년 말 250억 달러로 2500% 늘어난다. 미국 국민 1인당(13000만 명)200달러의 전쟁 부채를 진 셈이다. 국민들의 혈세와 수십만 군인의 목숨을 대가로 21000명의 거부가 태어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룩한 일본, 베트남전쟁에 참여해 경제 개발의 기반을 닦은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1차 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에서 연합국 측의 군수물자 공급 및 신용 대출을 독점한 JP모건은 도대체 얼마나 벌어들였을까. JP모건에게 1차 대전은 '최고의 장사' 기회였던 셈이다.

 

'죽음의 상인'

사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미국인들은 관심이 없었다. 1차 대전은 구대륙 제국주의 열강의 추악한 이권 다툼이었을 뿐이다. JP모건이 군수물자 공급과 신용 대출로 영국과 결탁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참전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전쟁의 실상, 즉 대다수 국민이 혈세와 목숨을 희생하는 동안 미국의 군수기업과 은행들은 떼돈을 벌었다는 추악한 진실은 1930년대 이후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 진실이 소상히 밝혀진 것은 19344월부터 2년간 지속된 미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의 조사에 의해서였다.(나이위원회에 대해서는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138~158쪽과 스메들리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참조)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 장군의 저서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 Feral House

 

공화당 소속의 노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제랄드 나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조사위원회는 일명 나이위원회, 또는 '죽음의 상인' 조사위원회로 불린다. 군수기업을 '죽음의 상인'으로 지칭한 것이다. 조사위원회는 조사관과 회계사 80명을 동원해 1차 대전 당시 미국 대기업들의 회계장부를 샅샅이 조사했다. 특위 위원들은 그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특위 위원 중 한 명인 제임스 포프 상원의원은 앞으로 청문회를 통해 "그 탐욕과 음모와 전쟁 공포를 조장하는 선전과 로비의 실태가 공개되면 국민은 경악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관련 정보가 공개되는 순간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참전 이유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 확대와 대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

 

나이위원회가 소집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191711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에 성공하며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차르 치하 당시 외무장관의 비밀서류를 발견해 이를 공표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전승국들이 전체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적절히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이 비밀협약은 19162월에 수립되었고 같은 해 5월 관련 국가 정부들로부터 비밀리에 비준을 받았다. 당시까지 명목상 중립을 지켰던 미국 정부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 국가들은 물론 관련 국가의 국민들도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단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전쟁 당시 비밀 외교 등을 연구하면서 미국이 참전한 진짜 이유는 민주주의나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영토 획득과 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윌슨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이 의원은 19342월 상원 외교위에 무기, 탄약 등 전쟁 장비 제조 및 판매에 관련된 개인과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다.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과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19344,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가 설립됐고 군수품재벌 관련 청문회가 시작됐다. 조사위원회의 활동 목적은 전쟁을 통한 부당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문회 시작되기 직전 미 군수산업을 고발하는 두 권의 책이 같은 날 발간됐다. H. C. 엥겔브레히트와 F. C. 해니건 공저의 <죽음의 상인들>, 그리고 언론인 조지 셀드스가 쓴 <, , 이윤>이 그것이다. 두 책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특위 조사관들에게 많은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서두에 말한 <포춘> 3월자 '무기와 인간' 이 별도의 소책자로 발간됐다.

 

영국과 JP모건의 결탁

1차 대전 발발 당시 중립을 표방했던 미국은 어떻게 전쟁에 끌려들어 간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금융재벌 JP모건이 영국 정부와 결탁한 때문이었다.

 

석유, 금융, 식량 등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해 30년 넘게 비판적 글을 써온 윌리엄 엥달은 저서 <화폐의 신>(Gods of Money)에서 "월가의 머니트러스트는 전쟁에 참여해야만 유럽에 재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파산한 영국이 남겨놓은 공백을 치고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의 세기'를 창출한 첫 걸음이다"라고 지적한다.

 

1936224일 발표된 나이보고서는 "조사 대상이 된 군수업계는 때로 비정상적인 편법, 미심쩍은 특혜와 커미션 같은 방법을 써먹었다. 그들은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외국 정부 관료나 그들의 절친한 친구에게 뇌물을 먹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발발 직후 JP모건은 영국이 군수품, 무기, 군복, 화학물질 등 현대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구매하는 데 영국 정부를 위한 유일한 거간꾼 노릇을 하게 된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JP모건을 미국 민간은행에서 빌리는 모든 영국 전쟁부채의 독점적인 금융대행사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JP모건은 전시 구매를 조직하고 거기에 자금을 조달하는 일, 그리고 어떤 회사가 공급처가 될 것이며 물품 가격은 어떻게 책정할지 따위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모건가와 연계된 기업들은 모건이 눈치 빠르게 벌인 이 사업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겼다.

 

19151월 금융회사 JP모건의 수장 J. P. 모건 2세는 백악관에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 JP모건과 영국의 결탁 문제를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윌슨은 모건그룹이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행하는 그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1916년 한 해에만 미국 업계는 129000만 달러 상당의 군수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했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기 직전인 19174JP모건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50억 달러어치(현재 시세 900억 달러) 군수품을 수출했다. 만일 그 대금이 상환되지 않으면 심각한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JP모건의 동업자 토머스 라몬트는 19154월 필라델리아에서 열린 정치사화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전쟁이 미국의 금융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쟁 관련 품목을 취급하는 우리나라 제조업체와 상인들은 사업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중략)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척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미국이 국제적인 금융대출시장에서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역이나 금융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독일의 수출무역이 거의 완전히 바닥상태지만, 만약 전쟁이 조기에 끝나버리면 우리는 십중팔구 독일이 재빠르게 기사회생해서 다시 경쟁국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917년이 되면서 별안간 상황이 좋지 않게 굴러갔다. 19172월 러시아 군부가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러시아 황제가 폐위되었다. 러시아 군 지도부는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만일 러시아 군대가 전쟁에서 손을 뗀다면 독일은 더 이상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기진맥진할 필요 없이 오로지 서부전선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곧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패배를 의미했다.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에 15억 달러가 넘는 전쟁 차관을 주선해주고, 유럽 교전국에 제공된 50억 달러어치의 군수물자에 관한 인수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니만큼 끝내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는 거두는, 그들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735일 월터 하인스 페이지 영국주재 미국 대사가 윌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낸다. 그는 록펠러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영국 대사로 부임하기 직전 록펠러재단 산하 일반교육위원회의 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는 우리를 서서히 압박해오는 이 위기에 대처하려면 JP모건의 역량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봅니다. 일개 민간기관이 담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급박한 상황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우리가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가한다면, 연합국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아마도 신용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정부는 얼마든지 영국과 프랑스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우리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우리 정부는 당연히 그러한 직접적인 신용을 제공할 수 없을 겁니다."

 

4주 후인 191742,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한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윌슨이 참전을 선택한 진정한 동기는 참전을 해야만 전후 협상 과정에서 발언권이 보장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228일 백악관을 방문한 민간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의 수반이라면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립국 대표로 간다면 기껏해야 '문틈으로 떠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겠지요. 미국 대통령의 말이 먹히려면 협상 테이블에 참가해서 우리의 외교정책을 밀어붙이고 옹호해야지, 안 그러면 아무것도 될 수 없어요."

윌슨의 선전포고 요청에 대해 상원에서는 단 6명만이, 하원에서는 50명이 반대했다. 반대 의원들은 윌슨을 '월스트리트의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 "우리는 이제 성조기에 달러 문양을 그려 넣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은 참전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한다면 반대가 10배 이상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미국 국민들은 유럽 열강들이 벌이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호소했지만 참호전과 독가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열기는 식어갔다. 자원병 모집 공고 6주 만에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3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회는 징병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전포고 이후 19181111일 종전까지,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연합국에 938631만 달러를 대출해 준다. 영국이 413600만 달러, 프랑스가 229300만 달러를 빌렸다. 그러나 사실 영국 정부나 프랑스 정부는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 돈은 연합국에 공급되는 전쟁물자 대금으로 미국 재계가 부리나케 쓸어갔다. 미국 재계는 대부분 모건그룹, 아니면 록펠러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이위원회 활동은 성공했는가?

나이위원회의 근본 취지는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 그리고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1차 대전 동안 군수기업 등의 부당한 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무기산업 국유화)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193643차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친 나이위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했다. 첫째, JP모건과 록펠러, 듀퐁 등 미국 대기업들이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이윤을 취했다는 사실은 밝혀냈다.

 

둘째, 무기업자가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서, 즉 윌슨의 참전 동기가 JP모건 구하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으나 정치, 언론, 대학 등 제도권세력의 물타기 작전에 희석됐다. '미국 이상주의 외교의 위대한 선구자, 윌슨'이라는 신화는 큰 타격을 입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제거하겠다는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이 의원을 비롯한 위원들은 한때 무기산업 국유화라는 근본적 개혁까지 고려했고, 현실적으로는 전쟁 이윤에 대해 중과세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이 모든 노력은 5년간 미 의회 내에서 잠자고 있다가 194112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30년대 대중들의 분노에 전전긍긍했던 대기업들은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대기업은 2차 대전에서 1차 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이윤을 취했으며 이후 미국에는 군산복합체가 정착되면서 영구 전쟁 국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나이위원회의 활동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미 국민의 지지는 차고 넘쳤다. 출범 1년이 채 안 된 193412월 말 현재 나이위원회 활동을 지지, 격려하는 편지가 자그마치 15만 통이나 접수됐다. 위원회 활동이 끝나가던 193637일 갤럽 여론조사에서 "사적인 이윤을 위한 무기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82%'그렇다'(18% '아니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한 잡화상은 "지난 수 세대 동안 무기 관련 이윤 시스템이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이는 윌슨이 JP모건을 연합국 전담 금융거래자로 허용했을 때 이미 "참전으로 가는 길은 뚫렸다"는 나이 위원장의 발언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게 전쟁이란 국민을 속여 대기업을 배불리는 수단이다"(노엄 촘스키), 또는 "외국과의 전쟁은 부르주아계급이 생각하기에 이득이 생길 것 같을 때만 일어난다"(조지 오웰)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더글라스 맥아더보다 더 용맹했고, 그보다 훨씬 군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반전 고전 <전쟁은 사기다>가 출간된 것도 이때였다(1935). 이 책에서 버틀러 장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은 아마도 가장 오래됐고, 손쉽게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업이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다. 또한 이윤은 돈으로 계산되지만 손실은 인간의 목숨으로 지불되는 유일한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사기'야말로 전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믿는다. 전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권력) 내부'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전쟁은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하는 사업이다. 전쟁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334개월을 복무했으며 그 대부분을 대기업과 월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조폭(a high class muscle man)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를 위한 사기꾼, 조폭이었다.

 

1914년 나는 멕시코, 특히 탐피코를 미국 석유업계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티와 쿠바를 내셔널시티뱅크가 돈을 긁어모으기에 적당한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을 도왔다. 월가의 이익을 위해 중미 6개 국가를 침탈하는 것을 도왔고, 19021912년에는 브라운브라더스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 소탕을 도왔다.

 

1916년 미국 설탕업계가 도미니카공화국에 진출하는 것을 도왔으며, 1903년에는 온두라스를 미국 과일 기업들이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1927년에는 스탠다드오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중국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알 카포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나는 세 대륙에 걸쳐 그 짓을 했으니 말이다."

 

나이위원회는 19364월 발표한 3차 보고서를 통해 전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기심을 추구하는 조직(기업)이 국가로 하여금 군사행동에 나서도록 선동하고 겁박하는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세계 평화에 반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국민의 염원, 나이위원회의 지적을 미국의 지배엘리트는 교묘하게 회피하고 거부했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위에 말한 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 유력 언론, 월터 리프먼 등 저명한 언론인들도 나이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 회의적, 또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즉 대기업을 비롯해 미국의 제도권 세력은 전쟁을, 전쟁을 통한 이윤 획득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J. P. 모건, 나이위원회에 출석하다

193617, 미국 금융계의 최고 거물 J. P. 모건이 나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세기의 격돌이라고 할 만한 빅 이벤트였다. 만일 윌슨의 참전 결정이 JP모건의 군수물자 외상 대금 및 대출금 회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입증된다면 미국 정부와 대기업의 도덕성과 정당성은 추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해 위원회 측은 1년 가까이 금융회사 JP모건의 각종 문서 200만 건을 조사했다. 나이 위원장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국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대기업의) 상업적 이익 보장을 위해 미국의 중립정책을 연합국에 대한 대출을 허용하는 수준까지 밀고 갔습니다. 연합국들은 미국이 결국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결국은 참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구심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치부책을 누가 쥐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J. P. 모건은 이런 추정을 부인하는 9쪽짜리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은 (전쟁의 승패와 관련 없이) 회수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들이 '대출금의 안전 회수'를 위해 정부에 압력을 넣어 참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판타지 같은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7일 청문회에서 위원회 측은 전쟁이 일어난 1914년 윌슨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로버트 랜싱 전쟁장관 편에 서서 미국 은행가들이 교전 당사국에 대출하는 것을 허용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이 결정 직후 브라이언은 장관직을 항의 사퇴했다). 전쟁의 한쪽 당사국에 전쟁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중립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또한 나이 위원장은 윌슨이 참전 이전에 이미 연합국들의 밀약을(연합국이 이길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동맹국 영토를 분할 지배한다는) 알고 있었으며, 상원 외교위원들에게는 나중에(1919) 베르사유 평화회담에서 비로소 알게 됐다고 '허위'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윌슨이 의회와 국민을 기만했다는 얘기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의 공저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1차 대전 당시 윌슨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나이 위원회 조사는 윌슨이 사실상 국민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윌슨은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과 기타 지원을 허용함으로써 중립정책을 해쳤고, 독일군의 만행을 의도적으로 과장했으며, 연합국들 간의 밀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1차 대전은 민주주의 확보를 위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국의 전리품을 나눠먹기 위한 전쟁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53)

 

그러나 우드로 윌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민주당 의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워싱턴 포스트>"항의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이 몰아쳤다고 표현했다.

 

상원의원 톰 코널리(텍사스)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117일 상원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특위에서 주장하는 혐의들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니까요. (중략) 특위 위원장이라는 자가 우리를 평화로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돌아가신 분(윌슨)에 관한 역사의 기록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분은 위대했고 선하셨으며 살아생전에는 적들과 감연히 맞선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나이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1차 대전 관련 미국 역사 기록에 먹칠을 하려는 가증스러운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다음날에는 윌슨 행정부 말기 재무장관을 역임한 카터 글래스 상원의원(버지니아)이 공격에 나섰다. 그는 나이에 대해 "악랄한 중상모략, 돌아가신 대통령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방, 윌슨의 무덤에 오물을 뿌리는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주먹으로 탁자를 얼마나 세게 두들겼는지 들고 나온 문건에 마구 피가 튀었다. 글래스 의원은 이렇게 고함쳤다.

 

"아니 이런 악의적인 선전선동이 어디 있습니까. 거짓 주장입니다. 모건 가문이 우드로 윌슨의 중립정책을 바꿔놓았다니 말이나 됩니까!"

 

나이 위원장은 차분하게 반박했다. "정말 놀라운 일은 특위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 위한 '사전 조율' 같은 것이 없었는데, 모건과 그 일파들이 출석하면서 특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됐다는 사실"이라며 사과 발언을 하는 대신 관련 서한과 문건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전리품을 나눠 먹기로 한 사실을 알면서 참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연합국들 간에 비밀협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 가서야 비로소 폭탄 같은 뉴스로 알게 됐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181229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

[전쟁국가 미국·1-]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까지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한다. "초기 정착민이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도착하고 서쪽으로 이주하던 시절부터 미국은 정복을 추구하는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건국 이후 미국이 안고 있는 근원적 모순을 지적한다. 미국인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등 타자(他者)들을 정복해 온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살해됐다. 영국인이 처음 북미 대륙에 닿았을 지금의 미국 영토에는 약 100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900년 그 숫자는 20만 명으로 줄어든다. 미국은 처음부터 전쟁과 살육으로 세워진 나라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라는 부분에서 크게 고민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흑인도 포함돼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미국 경제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흑인 노예는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게다가 제퍼슨은 그 자신이 농장주로서 노예를 부렸으며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기까지 했다. 결국 흑인 노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백인들의 재산으로 규정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말하는 '사람'이란 결국 백인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경제발전은 흑인 노예의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 1800년대 초 미국의 흑인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0년대 백인 인구는 2700, 흑인 노예는 400만 명 가량(13%) 됐다. 자유 신분의 흑인은 488000명에 불과했다. 미국 북부에서 노예제도는 1804년 펜실베이니아주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영국은 1807년 폐지했다. 그러나 남부지역에서는 여전히 유지됐다.

 

노예제도는 1860년대 남북전쟁으로 폐지됐지만 흑인들의 실질적 참정권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민권운동에 의해 비로소 확보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American Freedom, American Slavery)'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자유와 노예제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즉 흑인 노예의 희생이 있었기에 백인의 자유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같은 제목의 책도 있다. 이처럼 미국은 출발부터 모순적인 국가였다. 이 근원적 모순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금 트럼프가 추구하고 있는 반()이민 등 백인우선주의 정책이 그 증거다.

 

지배와 정복으로 출발한 미국은 '()'를 모른다. 너와 내가 다르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자는 생각이 없다. 미국은 '()' 추구하는 국가다. '내 식대로 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은 세계를 향해 "우리 편 아니면 적(You are with us or against us)"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미국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178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789년 연방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이후 1850년까지 북미 대륙을 정복해 나간다. 이 시기를 영토 팽창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783년 독립 당시의 미국 영토는 북미 대륙 동쪽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애팔래치아산맥 동쪽에 13개 주가 있었고, 산맥 서쪽에서 미시시피 강까지는 오늘날 중서부(Midwest :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 등)라 부르는 곳으로 당시에는 아직 주권을 갖지 못한 영토(territory)였다. 대륙 서쪽의 절반 이상은 스페인 땅이었고, 북쪽(오늘날 캐나다)은 영국이 갖고 있었다. 또 남으로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요컨대 독립 당시 미국은 유럽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북미 대륙 각지에서 원주민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였다.

     

           

지도 1. 1783년 미국 독립 당시 북미 대륙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American Age> p.29)

 

그런데 이런 나라가 불과 60년 만에 북미 대륙 대부분을 석권할 정도로 팽창한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정세가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이후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날 때까지 4반세기 동안 유럽의 열강들이 혁명과 반혁명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즉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단숨에 영토를 두 배로 늘린다(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유럽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의 일전을 앞둔 나폴레옹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루이지애나(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로키산맥 동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와는 다르다)를 팔아버린다. 기존 영토와 맞먹는 넓이의 이 지역에서 훗날 13개 주가 생겨난다.

 

한편 1836년에는 미국 남서쪽 국경 넘어 멕시코 땅에 정착한 미국계 이민들이 텍사스 공화국(Lone-star state)을 설립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미국계 이민들은 타국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뿐만 아니라 멕시코가 금지한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 연방정부는 텍사스의 미국 합병을 꺼리고 있었다. 북부의 여러 주들이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5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텍사스를 미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미국과 멕시코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멕시코전쟁 1846~1848)

 

1848년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태평양과 맞닿은 서부지역까지 빼앗는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미국 서부의 도시 이름이 스페인어원인 것이 이곳이 원래 멕시코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과 정복을 통해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관통하는 영토 대국으로 성장한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캐나다와(캐나다는 18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멕시코까지 차지하려 했다. 캐나다를 정복하려던 전쟁이 1812년의 미영 전쟁(1812년 전쟁)이다. 이른바 '사촌간의 전쟁(Cousin's War)'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영국군이 미국 본토에 상륙해 백악관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20019.11 테러 전까지 미국 본토가 침공 당한 유일한 사건이다. 결국 계획했던 캐나다 정복은 실패한다.

 

미국은 원래 쿠바도 정복하려 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은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 미국이 1850년 이후 영토적 팽창을 사실상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종주의와 노예제가 그것이다. 우선 미국이 쿠바와 멕시코로 영토 팽창을 계속할 경우 비백인 인구가 늘어날 것을 우려했다. 비백인 인구가 백인 우위를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남쪽으로의 영토 팽창이 노예제를 확대해 남부 주들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도 달갑지 않은 사태였다. 연방정부를 장악한 북부 세력은 자유민들의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상공업 발전을 꾀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의 목표는 영토 팽창에서 상공업 발전과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로 바뀐다. 1850년대까지 미국은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제조업과 상업의 발전을 통해 해외로의 팽창에 나선 것이다.

     

  

지도 2. 1850년까지 미국의 영토 팽창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American Age> p.132)

 

'먼로 선언''명백한 운명'

 

그에 앞서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과정에서 제기된 두 가지 핵심 이데올로기를 살펴본다. 하나는 먼로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인 것처럼, 모든 국가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국익을 위한 행동을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대외정책의 경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도 좋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시기에는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19세기 말 미국의 해외 진출 때에는 문호 개방(Open Door)과 민족 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로 선언은 182312월 제5대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유럽의 그 어떤 국가도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 열강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먼로 선언을 고립주의 선언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미국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하게 이 선언은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독점적 세력권'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먼로 선언이 발표된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1823년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남미의 주요 국가들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직후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식민종주국 스페인 등이 몰락하면서 남미 여러 나라가 독립했다.

 

그러나 전쟁이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유럽의 구질서가 회복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과거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은 바로 먼로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개입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또는 '명백한 사명'1845년 존 오설리번이라는 언론인이 만든 말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 세계로 계속 뻗어 나가면서 자유를 전파할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얘기다. 미국은 워낙 특별한 나라라서, 미국이 세계로 진출할수록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는 자기 합리화다. 따라서 텍사스,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대륙 서부로 진출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합쳐져 먼로 독트린이 완성된다. 1945122일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먼로 독트린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면서 미국은 더 활발하게 서부로의 팽창을 계속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 멕시코전쟁이다. 먼로 독트린의 입장에서 본다면 멕시코전쟁은 타국의 영토 탈취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의 확대가 되는 셈이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은 이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미국이 가장 눈독 들인 시장은 중국이었다.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었기 때문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른바 '흑선'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것은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미국에 큰 일이 일어난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대전을 포함해 건국 이래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 중 미군 전사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이 남북전쟁이다. 4년간의 동족상잔에서 60만 명이 죽었다. 당장 내전이 발발했으니, 중국이고 일본이고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국의 해외 진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일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강제로 개항을(1854) 당하기는 했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과학계의 천황이라고 불렸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가토 슈이치라는 비판적 지식인과 나눈 대담에서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개항 직후 서구 열강이 남북전쟁 등 전쟁에 휩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853~56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가 크림전쟁, 1861~65년에는 미국의 남북전쟁, 1870년에는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을 벌였다. 이런 전쟁들이 없었더라면 일본도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 덕분에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 주들이 미 연방에서 탈퇴해 별도의 국가를 세우려던 것을 연방정부의 무력으로 저지시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에 커다란 상처를 안겼지만, 미국이 통합 국가로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했던, 거쳐야만 했던 과정이었다.

 

미국을 영어로 하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 여기서 스테이츠(States)는 곧 '국가들'을 말한다. 미국의 주() 하나 하나가 곧 국가인 셈이다. 그래서 남북전쟁 이전 미국을 영어로 설명할 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아(are)'라고 복수형 동사를 사용했다. '(are)''이즈(is)'라는 단수형 동사로 바뀐 때가 남북전쟁 이후다. 드디어 미국이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다

 

미국, '2의 서부' 동아시아로 진격하다

[전쟁국가 미국·1-] 스페인전쟁과 '문호 개방' 정책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2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는 생산 과잉에 의한 공황을 낳았다. 이로 인해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미국의 선택은 해외 시장 확대였다. 1898년 스페인전쟁을 통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하와이도 합병했다. 이후 미국은 카리브해 지역을 자신의 경제 영역으로 통합하는 한편 하와이, 필리핀을 발판으로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한다.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이다. 이후 '문호 개방'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원칙이 된다.

 

미국의 비약적 산업화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6456, 윌리엄 헨리 세워드(William Henry Seward) 국무장관은 마드리드 공사에게 미국은 "이미 충분한 영토를 갖고 있다"면서 더 이상의 "정복"을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300년 간의 영토 팽창이 종말을 맞고 미국 역사는 기술적, 상업적 팽창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1870년 통일을 완수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과 함께 2차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로 나선다.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이 주도했다. 주로 개인 사업자들이 석탄과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초의 산업화를 이룩했다. 187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독일 주도로 석유와 전기, 철도와 내연기관, 그리고 화학공업 등에 의한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된다.

 

1869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다. 1880년대부터는 법인기업이 나타나 경제 운용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존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대표적이다. 1870년대 에디슨의 개인연구소였던 곳이 1901년에는 제네럴 일렉트릭(GE)이라는 거대 회사로 변모한다. 록펠러를 비롯해 앤드류 카네기(철강), J. P. 모건(금융, 철강, 전기) 등 미국 자본주의의 거인들이 모두 이때 등장한다(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20세기 초).

 

남북전쟁 직전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제철공장이 없었다. 석유는 이제 막(1859) 발견된 상태였다. 당시까지 미국은 농산품을 주로 수출하던 농업국가였다. 그러나 40년 뒤가 되면 미국은 철강과 석유산업에서 세계 최고가 된다. 1902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영국과 독일을 합친 것보다 많아진다.

 

건국 이후 무역 적자국이었던 미국은 이 산업혁명에 힘입어 1874년부터 무역 흑자국으로 전환하고, 이 기조는 1971년까지 100년 간(1875, 1888, 1893년은 적자) 이어진다. 세계 교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686%에서 191311%로 거의 2배가 된다. 증가분은 거의 모두 공산품이었다.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10년 사이 미국 인구는 2배로 늘어난다.

 

제국의 시대

그러나 2차 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생산의 과잉을 불러왔다. 생산 과잉은 공황을 초래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열강들은 생사를 건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자국의 상품을 독점적으로 소비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00년 사이 영국의 영토 확장은 자그마치 123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프랑스는 906, 독일도 25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1878년 유럽 열강과 식민지가 차지한 면적은 지구 전체의 67%였고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는 84%로 늘어난다. 근대사 4부작을 쓴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1875~1914년을 '제국의 시대'로 명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열강이 독점적 해외 시장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벌인 시기다.

 

미국은 생산 과잉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미국 역시 1873년과 1893년 공황의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18935월 시작된 불황은 1898년까지 5년간 계속됐으며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893년 첫 해에만 은행 500개와 기업 15000개가 문을 닫았고 1894년의 실업자 수는 400만에 이르렀다. 한 미국 언론은 "이토록 사람 목숨이 값싼 적은 없었다"고 개탄했다.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동자와 농민들이다. 1870년대 후반 이후 철도파업을 비롯한 수많은 파업이 벌어진다. 노동절(메이데이, 51)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폭동이 1886년 일어났고, 정부와 자본가들은 군대를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농민들은 농민동맹과 인민당 결성 등 정치투쟁에 나섰다.

 

두 번째 희생자는 군소 자본가들이다. 대형 자본에 먹히기 때문이다. 즉 경제 위기를 계기로 경제력의 집중이 심화된다. 금융력을 앞세운 이른바 머니트러스트가 등장한다. 1912년 미 하원 특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J. P. 모건을 비롯한 6개 대형 금융기관이 철강, 철도, 공익사업, 석유 등 기간산업을 독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J. P. 모건의 통제 아래 있는 기업은 자그마치 112개나 됐다. 2차 산업혁명은 공황, 노동자.농민의 저항, 경제력 집중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메리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1893년 공황에 대한 해법은 해외 시장 개척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정치가든 농민이든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나는 수출업자다. 나는 세계를 원한다." (찰스 러버링 매사추세츠 주 직물업자, 1890)

 

"우리는 우리의 공산품과 농산물을 위한 우리만의 시장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위한 해외 시장을 원한다." (윌리엄 매킨리 오하이오 주지사, 18951)

 

"미국의 공장은 미국인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의 토지는 미국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 우리의 정책이 돼야 할지를 정해 놓았다. 세계의 교역은 우리의 것이 돼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 18974)

 

이제 문제는 팽창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팽창을 할 것인가로 좁혀졌다. 미국 경제가 해외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미국 사회에 혼란, 나아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우리는 매우 어두운 밤을 앞두고 있다. 상업적 번영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중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기업인 F. L. 스테츤)

 

"중국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윌리엄 프라이어 상원의원)

 

1895년 전미제조업자협회(NAM)가 결성된다. 이 협회의 목표는 해외시장 확보였고 이를 위해'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시장 확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897년 시어도어 서치 위원장은 "우리 제조업자의 대부분은 국내 시장을 초과했거나 초과하고 있다. 해외 교역 확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한편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시장 확대"를 내걸고 팽창주의 성향의 후보 윌리엄 매킨리를 당선시킨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

이런 가운데 한 군사전략가와 역사학자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옹호하고 촉구하는 이론을 내놓는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1840~1914)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1861~1932)가 그들이다.

 

1890년 미 해군대학 교장 테이어는 <역사에 미치는 해군력의 영향>이라는 책을 발간해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군사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그는 이 책에서 '한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을 통제하거나 해외 지역의 원자재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면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국의 상선단을 보호하고 비협조적인 외국으로 하여금 통상과 투자의 문호를 개방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해군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테이어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해외 각지에 해군 운용을 위한 보급망을 갖춰야' 하며 따라서 '중미 지역에 운하를 건설하고, 카리브해든 태평양이든 통상을 하려는 지역에 해군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미국의 점증하는 생산력이 해외 시장을 요구한다. 미국은 해외로 팽창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후 테이어(군사)는 헨리 캐봇 롯지 상원의원(의회),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군부 차관보(행정부)와 함께 미국 경제의 대외 팽창을 강력히 추동하는 3인방 중 한 명이 된다.

 

한편 젊은 역사학자 프레데릭 잭슨 터너는 1893, 콜럼버스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역사학회 총회에서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국 영토의 태평양 연안 확장으로 "미국 역사상 첫 시기가 마무리됐다"면서 미국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 상태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북미 대륙을 넘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대답은 물론 끊임없는 프런티어의 확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팽창은 지난 삼백년 간 미국적 생활방식의 확고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에 백인이 정착하고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면서 팽창은 이제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팽창의 에너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경솔한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그리고 카리브해 및 주변 지역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들이야말로 미국의 대외 팽창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른바 프런티어 사관이다. 이렇게 해서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제시한 '명백한 운명'은 터너의 프런티어 사관으로 진화한다. 미국은 세계를 정복할 '명백한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이제 제2의 서부인 동아시아를 향해 프런티어를 확장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쟁탈전과 미국

이런 와중에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한다. 청은 일본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주었고, 타이완과 산둥반도를 빼앗겼다. 이후 산둥반도는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토해내야 했지만, 어쨌든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해외 진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에게 청일전쟁은 조선이 일본에 식민화되는 첫 번째 계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벌이는 미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관심은 달랐다. 한마디로 청일전쟁은 중국을 먹이로 한 제국주의적 경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러한 사태는 우리의 점증하는 상업적 이익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가장 엄중한 주의를 요한다"고 우려했다.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침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8971114일 독일은 자국 선교사의 피살을 계기로 산둥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한다. 일본과 유럽 열강이 중국을 분할 지배할 것이라는 미국의 우려는 더욱 증폭된다. 이에 앞서 1897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해군부 차관보는 매킨리 대통령에게 "우리는 필리핀을 보유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11월 오빌 플랫 하원의원은 마닐라야말로 전체 아시아 위기의 핵심이라며 마닐라 점령을 촉구한다. 마닐라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핵심 중계항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스페인이 마닐라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는 은()의 규모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중국 교역을 합친 것과 같은 정도였다고 한다.

 

18983월 말 독일이 자오저우완(膠州灣)에 대한 99년 조차권을 확보하는 등 중국의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자 미국 기업계와 정부는 드디어 스페인과의 전쟁 방침을 굳히게 된다.

 

스페인전쟁과 쿠바 : 경제적 통제

왜 스페인인가? 스페인이 필리핀과 쿠바의 식민 종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미국의 목표는 마닐라를 빼앗아 대중국 교역의 전초기지로 삼는 한편, 쿠바인들의 독립 쟁취로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미국 기업의 대쿠바 투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18984월 시작돼 그해 7월에 끝난 스페인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카리브해 최대의 섬인 쿠바였다. 당시 미국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 엄청난 규모의(5000만 달러) 투자를 해놓고 있었는데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독립에 성공할 경우 자칫 기존의 모든 투자를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스페인에 대해 쿠바를 안정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노쇠한 제국 스페인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미국이 직접 무력행사에 나서 쿠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는 한편 필리핀을 식민지화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살펴보면 세계에 자유와 평화, 인권과 정의를 전파하겠다는 미국의 행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페인전쟁 자체의 추이는 간단하다. 425일 미 의회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51일 존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다. 스페인 병사 4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군은 1명의 사망자만 발생했을 뿐이다. 526일 미군 선발대 16000명이 쿠바로 떠나 3주 후 도착, 전투가 시작됐으며 약 한 달여 만인 717일 스페인 육군이 항복한다. 미군 400명이 전사했고 2000명은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722일 워싱턴에서 평화협상이 시작돼 812일 백악관에서 평화의정서(protocol of peace)가 교환됨으로써 사실상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1210일 파리에서 정식 평화협정이 체결돼 미국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영토로 확보한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2000만 달러를 지급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전쟁은 미국에서 '작지만 화려한 전쟁(little splendid war)'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추악한 전쟁이 이어진다. 3년여에 걸쳐 그 뒤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19027월까지 3년 반 동안의 반란진압작전으로 필리핀인 약 20만 명을 살해했고, 쿠바에서는 19033월까지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미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선 쿠바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실 1898년 기준 쿠바 독립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스페인의 철수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쿠바인들의 피어린 독립투쟁이 있었다. 쿠바인들은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1819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868년부터 1878년까지 10년간 독립전쟁을 벌인 데 이어 1879~80년에도 봉기했다.

 

특히 1895년부터는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주도 아래 스페인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있었다. 당시 마르티는 "쿠바의 독립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이 서인도제도를 비롯해 우리 아메리카에(중남미)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스페인은 반군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스페인은 미국에 대해 쿠바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내심 쿠바인에 의한 쿠바의 독립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411일 매킨리 대통령이 의회에 '군사 개입' 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고, 425일 의회는 선전포고를 단행한다. 당시는 매킨리는 자원병 125000명 모집을 계획했는데 실제 자원자는 그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쟁 열기가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참전의 의도에 대해 쿠바 혁명 세력과 미국 내 반제국주의 세력이 경계심을 표하자 팽창주의 세력은 한 가지 꼼수를 낸다. 선전포고에 대한 이른바 텔러 수정안(Teller Amendment)을 받아들인 것이다.

 

텔러 수정안은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헨리 텔러가 제안한 것으로 "쿠바 인민은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이며, 사태가 안정된 후 "쿠바 정부와 섬에 대한 통제를 쿠바 인민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이 쿠바에 대한 야욕이 없음을 보증한 것이다. 420일 상원은 텔러 수정안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닷새 후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 군이 항복하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돌변한다. 우선 717일 스페인 군의 항복식에 쿠바 독립군 사령관의 참여를 거부한다. 또한 189911일 거행된 승전 축하 행사에도 쿠바 독립군의 참여를 막는다.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은 향후 쿠바는 "피정복 영토로서 미국은 참전국의 자격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쿠바 혁명세력의 참전 자격을 부정했다. 쿠바의 독립은 쿠바인들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미국의 참전으로 가능했다는 억지다. 따라서 미국의 통치를 받으라는 얘기다. 또한 존 그리그스 법무장관은 쿠바 임시정부 부통령에게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이 주둔하는 곳은 모두 미국 주권에 따라 통치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지도 3. 1860년대 이후 미국의 카리브해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p.150)

 

이러한 미국의 표변은 다음과 같은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정당화되고, 미국 국민들에게 선전된다. 우선 매킨리의 최측근이며 <뉴욕 트리뷴> 발행인인 화이트로 라이드는 텔러 수정안에 대해 "국가적 히스테리 상황에서나 가능한 자기 부정적 법률"이라고 폄하하면서 "미국 본토 방위를 위해 쿠바를 통제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열렬히 주장했던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텔러 수정안이 "의회가 충동적이며 잘못된 관대함에 빠져" 승인했기 때문에 구속력이 없다고 강변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게는 잘못된 판단에 의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의무"가 있으며 "쿠바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영구히 쿠바를 소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선의 극치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군사 점령하면서 미국의 쿠바 내정 간섭을 쿠바 헌법에 보장할 것을 강요한다. 1901227일 미 상원을 통과하고 32일 매킨리 대통령이 법으로 공포한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이 그것이다. 오빌 플랫 상원의원이 제안한 이 법은 미국이 쿠바 내정에 계속 개입할 권리가 있고, 쿠바의 국가 채무 규모와 조약 체결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관타나모만 해군기지를 미국에 영구 임대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국가 채무를 제한한 것은 차관을 빌미로 한 유럽 국가의 영향력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곧 건설할(1907~1914) 파나마운하를 동쪽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플랫 수정안을 쿠바 헌법에 부대조항으로 삽입하지 않을 경우 쿠바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플랫 수정안은 19033월 쿠바 헌법에 포함된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1934년까지 미국의 보호국으로 남게 된다. 1909-1913년에는 마군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이 쿠바 대통령이 되는 기막힌 사태도 벌어진다. 1925-1933년 쿠바를 통치한 독재자 게랄도 마차도가 하야할 당시 쿠바 내 자산의 70%가 미국인 소유였다. 1934년 미군이 쿠바를 떠난 것은 그 전 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함포외교를 포기하는 '선량한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채택한 덕택이다.

 

그러나 쿠바의 예속적 지위는 1959년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때까지 지속된다, 쿠바 '독립' 후 미국 기업은 쿠바의 온갖 자산을 사들여 쿠바를 미국인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사탕수수 농장 190만 에이커(23억 평)을 에이커(1224) 20센트에 사들였으며 베들레헴 철강 등 미국 기업이 쿠바 광물자원의 80% 이상을 소유했다.

 

1900년 당시 미국이 쿠바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는 군정장관 레오나도 우드가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람들은 내게 미국이 말하는 쿠바의 안정된 정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온다", "나는 그들에게 적절한 금리에 돈을 빌려줄 수 있고, 자본가들이 기꺼이 쿠바에 투자하려 할 때, 그때가 쿠바가 안정됐음을 의미한다고 대답해준다"고 적었다.

 

또한 매킨리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안정된 정부냐고 물어오면 '6% 이자로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때'라고 말해줍니다"라고 보고했다. 미국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는 것이 안정된 쿠바 정부의 역할이란 얘기다.

 

스페인전쟁과 필리핀 : 무력에 의한 영토 정복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이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할 만큼 쿠바는 미국인에게 친숙한 땅이었다. 반면 필리핀은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인은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항을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야욕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다. 20만 명의 무고한 필리핀인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은 순식간에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189851일 조지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데 대해 한 반제국주의자는 "듀이는 마닐라를 접수하면서 부하 하나만 잃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가 추구해온 체제는 몽땅 날아갔다"고 개탄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동남아 전문가인 스탠리 카르노는 "필리핀 합병은 미국인의 경험에서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면서 "역사상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서 전투를 했고, 또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 외부의 영토를 정복했으며 이전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이제 식민종주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당초 마닐라항만을 장악하려 했다. 마닐라가 대중국 교역의 최대 중개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에서는 스페인의 300년 통치에 대항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주도하는 독립투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마닐라항을 가지려면 필리핀 전체를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독립세력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18981028일 매킨리 대통령은 미군에게 필리핀 전체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매킨리는 훗날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필리핀 문제를 놓고 몇 날 밤 고민을 하면서 백악관에서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어느 늦은 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필리핀 모두를 차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필리핀인들을 교육시켜 그들을 향상시키고(uplift) 기독교로 개종시켜라.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그들을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주어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역사가에 따르면 매킨리는 "필리핀인을 전혀 몰랐다. 그들이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해 비극적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완전히 오판했다." 필리핀인은 이미 300년동안 기독교도(가톨릭)였다. 또한 스페인 지배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매킨리의 신의 계시를 앞세운 결정은 아시아 최초의 반식민혁명에 불을 붙였다.

 

매킨리의 본심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착한 이웃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에 스페인과의 파리평화조약 비준을 요청하며 "우리는 (필리핀을) 프랑스나 독일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그들은 동양과의 교역에서 우리의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밑지는 장사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본심은 대중국 교역 확대였다.

 

미국의 모든 이들이 필리핀 정복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철강왕에서 평화주의자로 변모한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이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스페인에 지급한 2000만 달러를 자신이 내고 필리핀인들에게 독립을 주겠다면서 "대통령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를 비판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양심적 인사들이 필리핀 정복에 반대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는 찬성이었다. 필리핀 정복을 가장 열렬히 주창한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인디애나)19001월초 상원 연설은 이들의 속내를 잘 말해준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입니다. (중략) 앞으로 우리 무역의 최대 거래처는 아시아가 될 것입니다. 태평양은 우리 바다입니다. 유럽은 물건을 많이 만들수록 식민지에서 소비처를 확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소비해줄 곳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당연히 중국이 소비처가 돼야지요.

 

필리핀은 우리에게 아시아 전체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기지가 됩니다. (중략)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대부분 무역 관련 분쟁이 될 겁니다. 태평양을 지배하는 힘은 따라서 세계를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써 그런 힘은 영원히 미국 것이 될 겁니다"

 

한편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612일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고, 1899123일 헌법 제정과 함께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초대 대통령은 아기날도였다. 필리핀공화국은 24일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26일 첫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3년 반 동안 잔인한 살육전이 벌어진다.

 

지도 4. 미국의 태평양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p.89)

 

당시 전쟁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은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니그로들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필리핀에 왔으며 "인디언들을 없앤 것처럼 니그로들을 소탕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의 '반란 진압'은 인디언 학살을 방불했다. 실제로 전쟁을 지휘한 미국 장군 30명 중 26(87%)이 본토에서의 인디언전쟁 경험자였다. 사령관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이었다.

 

'반란 진압'은 잔인했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는가 하면, 어린이들까지 죽였다. 물고문도 자행했다. 필리핀 주민들에 대한 민간인 사찰도 시행됐다. 훗날 FBI, CIA, NSA 등 미 정보기관에 의한 민간인 사찰의 시작이었다.

 

190111<필라델피아 레저>는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희가극에 나오는 한가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반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반군 활동 적극 가담자와 반군인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여 버린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필리핀 사람은 개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까지 만연하고 있다"

 

팽창주의자들은 적극 반박했다. <뉴욕 월드>"지배하기 위해서는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한 섬유업자는 "우리 자신이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부터 우리는 식민지를 보유해 왔다"고 변명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주장해온 헨리 캐봇 로지와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미국은 이미 인디언들을 가혹하게 다뤄왔다. 지금 필리핀인들을 대하는 것처럼'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1901323일 아기날도가 미군에 생포된다. 같은 해 928일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사마르섬의 발랑기가 해변에서 필리핀 반군이 미군 9연대 C중대원 48명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주변 지역 1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최소 수 천명이 살해됐다. 수 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토벌대장 제이컵 스미스 대령은 "포로는 필요 없다. 죽이고 불태워라.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이 불태우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중략) 사마르섬을 들짐승이 울부짖는 황무지로 만들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은 당시 발랑기가에서 약탈한 교회 종 3개를(이중 1개는 반군의 공격 개시 신호로 쓰였다) 117년만에 최근(20181215) 필리핀에 반환했다.

 

190274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평정을 선언했다. 3년 반의 전쟁 동안 동원된 미군은 126000, 사망자는 4374(쿠바전쟁의 10배 이상)이었다. 필리핀 반군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 4억 달러. 그러나 진짜 비용은 독립 이후 오랜 기간 전 세계 민주주의 혁명 운동에 영감을 주어왔던 미 공화국의 타락이었다. 미국은 의미 있는 세계 변화의 적으로, 현상 유지의 수호자로 변질됐다.

 

하와이 합병 :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

189877일 미국은 하와이를 50번째 주로 합병한다. 필리핀은 무력 점령하고 쿠바는 군사력을 앞세워 보호국화 한 반면 하와이는 미국이 문화적, 경제적 정복을 끝낸 다음에 합병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합병 전 이미 하와이는 백인에게 문화적, 경제적으로 정복당한 것이다.

 

1819, 하와이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 들어간다. 이들은 하와이 왕족을 개신교도로 개종시키고, 그 영향력을 발판으로 장관 등 주요 정책 결정권자가 된다. 또한 사탕수수 등 하와이의 경제적 가치에 눈을 뜬 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농장주로 변신한다. 1849년이 되면 토지 거래를 가능케 하고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1850년대가 되면, 미국 선교사 16개 가문이 1인당 평균 493에이커(60만 평)의 토지를 보유한 하와이 최대 지주로 성장한다. 1892년에는 미국인과 유럽인이 하와이 토지의 3분의 2를 보유한다. 하와이의 설탕 생산은 1876년에서 1885년 사이에 6배나 증가하는데 설탕농장의 3분의 2가 미국인 소유였다. 당시 미국의 한 외교관은 이들 선교사를 일컬어 "공동체의 흡혈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890년 하와이의 인구는 원주민 40,612, 중국인과 일본인 27,391,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노르웨이인 6,220명이었다. 미국인들은 하와이의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투표권은 재산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31월 새로 취임한 릴리우로칼리니 여왕이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하와이에 대한 하와이인의 주권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현지 공사 조지 스티븐스와 짜고 미 해병 162명을 동원해 쿠데타로 대응한다. 쿠데타의 명분은 미국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여왕을 쫓아내고 하와이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민주혁명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이는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이었다. 그것도 하와이 경제를 장악한 민간인이 주도하고 미 정부와 군대가 후원하는 형태의 것이었다.

 

1894년 하와이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샌퍼드 돌이 취임한다. 이 사람은 파인애플로 유명한 회사 돌(Dole)을 만든 제임스 돌의 사촌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정부에 합병을 요청, 하와이 합병이 성사된 것이다. 돈과 이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문호 개방 정책 : 미 제국의 백년대계

미국은 스페인전쟁으로 카리브해 일대를 장악하고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중국 시장 진출은 부진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1889년 사모아 문제로 독일과 전쟁 일보 직전에 갔을 때 미국의 해군력은 세계 12위였다. 터키, 중국보다도 뒤졌다. 1890년대 말 영국의 아시아 주둔 해군 전함은 미군 전체보다 많았다. 당시에는 해군력이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에야 철갑 군함 건조 등 해군력 증강에 나선다.

 

또 미국 내에서 미국의 군사주의적, 영토주의적 팽창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력 범위(spheres of influence)'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토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1899년에 영국이 그의 '세력 범위' 안에서 중국 정부에 관세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주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영국의 선례를 따름으로써 중국은 분할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력 범위'를 갖지 못한 미국은 그러한 분할의 위기에 대해 불만이었다. 중국이 분할되면 미국은 중국 진출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묘안이 바로 '문호 개방 정책'이다. 미국의 우월한 생산력을 앞세워 중국 시장에 '공정하게' 접근하자는 얘기다. '공정하게' 무역을 하면 당연히 미국이 우위를 점할 것이기 때문이다. 1846년 당시 세계 최강의 산업국가였던 영국이 자유무역을 제창한 것과 같은 이치다.

 

189996일 국무장관 존 헤이는 첫 번째 '문호 개방 문서(Open Door Note)'를 발표한다. 열강의 '세력 범위'를 포함해 중국의 모든 지역에서 모든 국가에 대해 통상과 항해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190073일에는 두 번째 '문호 개방 문서'를 선포한다. 중국의 영토 주권 보장을 요구한다. 즉 어떤 열강도 중국, 중국 영토의 일부를 식민지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 등 강대국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애매모호한 답변을 미국에 보내 왔다. 일본만이 분명히 반대했을 뿐이었다. 존 헤이는 모든 강대국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문호 개방'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문호 개방 원칙을 강제할 수 없었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성하면서 연해주로 뻗어오는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야 했다.

 

결국 미국은 같은 해양세력인 영국, 일본과 제국주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국을 공동 경영하기로 한다.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영일 동맹 : 19세기 이후 영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동맹)을 맺었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에 군자금을 대준다. 나아가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조약을 중재하고, 1905년에는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양해하기로 한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중국의 독점적 경영에 나선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독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중국 시장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간의 갈등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문호 개방이 현실화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다. 냉전 당시 이른바 '자유세계'에서 미국의 문호 개방 원칙이 관철된 것이다. 그리고 냉전 이후에는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에 문호 개방된다.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가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호 개방은 미국 경제의 세계 진출을 위한 백년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미국이 문호 개방 원칙에서 물러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너네 다 집으로 돌아와”1228 한겨레21 1244

시리아 2천 명·아프간 7천 명 미군 철수 선언

세계 경찰국가그만두겠다는 트럼프미국 일방주의비판도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분쟁 지역인 이라크 안바르주 공군기지를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26일 주둔 장병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약 160떨어진 안바르주 칸 알바그다디란 소도시가 있다. 그 외곽에 이라크군과 미군이 함께 사용하는 알아사드 공군기지가 자리잡고 있다. 안바르주는 이라크 소수 종족인 수니파 무슬림의 집단 거주지다.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수니파 출신인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뒤, 수니파 대미 항전의 구심점이었던 팔루자가 안바르주에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2014년 초엔 이슬람국가(IS) 무장세력이 안바르 일대를 장악하고 이라크 정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안바르는 위험한 지역이다.

 

미군 장병은 집에 돌아올 것이다

20181226일 저녁 7시께, 알아사드 공군기지 활주로에 특별한 비행기 1대가 사전 예고 없이 착륙했다. ‘미 공군 1호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 분쟁 지역의 미군 기지를 방문한 순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곳에서 3시간30분쯤 머문 뒤 독일로 갔다. 현지에 있는 동안 100여 명의 미군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지속할 순 없다. 모든 부담을 미국 혼자 지는 건 불공평하다. 미군은 세계 도처에 주둔하고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에도 미군이 주둔한다.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찾아 미군 장병을 위문하는 건 군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의 오랜 전통이다. 부활절·추수감사절·성탄절과 연말 등 미국의 연휴 기간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2년이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분쟁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니, 왜 지금인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내게 강력하게 말했다. 시리아에 남아 있는 이슬람국가 세력이 얼마나 되든 뿌리를 뽑겠다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를 실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터키는 시리아 바로 옆 동네다. 이제 미군 장병은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난 1224일 오후 154분께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다. 연휴를 앞둔 시점에 내놓은 덕담 수준의 말이 아니었다. 그는 미군을, 실제 으로 데려올 참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1219일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 2천여 명 전원을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 또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 14천여 명의 절반에게 철수령을 내리겠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란 말이 이유를 설명한다. 이라크 알아사드 공군기지에서 미군 장병이 보는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했던 말은, 사실 그의 2016년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미국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최후의 보루 매티스 국방장관도 사임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2017424일 미군 수송용 헬리콥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카불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두 번째 9·11 동시 테러로 가는 길을 열었다.”(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

 

트럼프 대통령이 분쟁 지역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보는 게 좋겠다. 시리아와 아프간에서 철군하기로 한 결정은 재고해야 한다.”(로저 위커 공화당 상원의원)

 

트럼프 대통령의 충실한 우군이던 공화당 중진들까지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오바마 행정부 출신인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223일 진보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보낸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백악관 자체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됐다. 매티스 장관을 사임하게 한 충동적 결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적성국가보다 더욱 미국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1947년 국가안보법이 만들어진 이래 미국의 국가 안보 정책 결정 과정이 이토록 엉망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결정을 갑자기 발표할 수 있었던 건, 국가 안보 정책 결정 과정이 위험할 정도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발표 다음날,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전격 사임 의사를 밝혔다. 워싱턴 정가의 혼돈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매티스 장관은 1220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이렇게 밝혔다.

 

동맹국을 존중하고, 적대 세력과 전략적 경쟁자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내 믿음은 지난 40여 년에 걸쳐 국가 안보를 다뤄온 경험으로 확고해졌다. 미국의 안보와 번영, 가치를 진작시키는 데 최선인 국제 질서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맹과 연대하는 게 이런 노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대통령은 안보 인식이 잘 맞는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삼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69년 입대해 해병 4성 장군을 지낸 매티스 장관은 아프간전쟁 초기에 현지에서 복무했다. 그는 국장장관 취임 후 줄곧 시리아·아프간 철군에 분명한 반대 뜻을 밝혔다. 그는 정부 안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외교·안보 정책을 견제하는 역할을 적극 수행한 인물이다. 미 정치권이 매티스 장관의 사임을 예사롭게 넘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백악관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남은 어른이 사라졌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장난감을 멋대로 집어던질 게다.”

 

스콧 루카스 영국 버밍엄대 교수(국제정치)1220일 인터넷 매체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매티스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에 참여한 예비역 대장 3명 가운데 1명이다. 루카스 교수는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감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막아내는 게 이들 3명의 임무였다고 표현했다.

 

이슬람국가는 손뼉 친다

 

시리아 텔 나스리의 폐허가 된 교회는 7년을 넘긴 시리아 내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EUTERS 연합뉴스

 

육군 대장 출신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4월 제일 먼저 퇴임했다. 뒤를 이어 해병 대장 출신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이 12월 말 사임하기로 했다. 매티스 장관은 1220일 사임 서한에서 후임자의 인사청문회 등을 이유로 2019228일 사임하겠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1223일 패트릭 섀너핸 부장관이 11일부터 국방장관 직무를 대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역시,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매티스 장관의 퇴장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아랍의 봄이 한창이던 2011315일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7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21세기 벽두에 터진 9·11 동시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2001107일 시작된 아프간전쟁은 172개월을 넘긴 지금껏 계속된다. 미 역사상 최장이자 최악의 전쟁인 베트남전쟁은 1955111일부터 1975430일까지 195개월여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아프간전쟁이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온 이유다.

 

미국이 시리아 내전에 지상군 병력까지 투입한 결정적 계기는 시리아 국경을 넘어 이라크 북부와 서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이슬람국가에 있다. 20149월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프랑스 등이 가세하면서 시리아 남부와 이라크 국경 지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이슬람국가의 세력은 미미해진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1220일 아침 810분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슬람국가와 싸워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 이제는 우리의 위대한 젊은이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주장은, 이라크 침공 초기인 200351임무 완수를 선언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15년 세월이 지난 지금껏 이라크는 혼돈의 땅으로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이슬람국가 세력이 현격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잔존 세력은 여전히 있다. 미군 지상군 병력 철수는 이들이 조직을 정비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영국·프랑스 등 동맹국도 미군 철수로 작전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과 나란히 이슬람국가에 맞서 싸워온 쿠르드족 무장단체는 당장 현실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자국 내에서 오랫동안 독립 투쟁을 벌인 쿠르드족을 테러범으로 여기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벌써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이는 쿠르드족 무장단체를 소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사전 준비 없이 미군이 전격 철수해 자중지란이라도 벌어진다면, 위기로 내몰렸던 이슬람국가만 손뼉을 칠 게 뻔하다.

 

아프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년 세월을 넘겨 싸웠음에도, 침공의 목적이던 탈레반 세력 소탕은 요원하기만 하다. 한때 파키스탄 국경 지대로 몸을 숨겼던 탈레반은 이미 아프간 국토의 절반가량을 세력권 아래 두고 있다. 아프간 주둔 미군이 2018년 들어 지난 17여 년 만에 최대 규모 공습을 단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 군사적 승리에 초점을 맞췄던 미국이 정치적 타결을 위한 협상으로 옮겨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미국과 탈레반은 아랍에미리트의 중재로 평화 협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아프간 주둔 병력 절반 철수 발표에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옛 공화당 주류 질서로 복귀 중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처럼, 아프간 주둔 병력이 7천 명 선으로 줄어들면 미군이 현지에서 해온 아프간군 훈련 프로그램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미군 병력도 주요 대테러 작전과 바그람 공군기지를 비롯한 거점 기지 방어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탈레반으로선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미군 철수는 탈레반의 오랜 요구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철군 결정으로 탈레반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도 협상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을 얻은 셈”(마이클 쿠겔먼 우드로윌슨국제센터 연구위원)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내렸을까? <노동계급의 공화당: 레이건과 블루칼라 보수주의의 복귀>를 쓴 언론인 헨리 올젠은 1220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스타일의 외교·안보 정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매티스 장관은 초당적 외교정책 합의란 그간의 전통을 강조해왔다. 그의 사임으로 앞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매티스 장관이 대표해온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오랜 전통이 충돌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미국의 개입주의에 노골적인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2016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 시리아에 군대를 보내 무엇을 얻었나? 장기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대체 뭘 위해선가?’ 적잖은 미국인이 이에 공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전격 발표한 것은, 이같은 오랜 신념을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기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집권 후반기,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준비에 시동을 건 모양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같은 사람이 왜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고, 수십억달러를 아끼는 데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적국인 시리아를 위해 미군이 싸워야 하는가? 이제는 미국에 집중해야 할 때가 됐다. 미국 젊은이들을 집으로 데려와야 할 때다.”

 

안팎의 비난이 폭주하던 1221일 새벽 422분께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그의 이런 주장을 두고 2차 세계대전 이전 공화당 주류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당시 공화당 주류는 이민 제한, 관세 강화, 외교적 고립주의를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현 공화당 주류와 엇나가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과 고스란히 맥을 같이한다. 그러니 트럼프 대통령은 단순히 공화당 주류의 인식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옛 주류 질서로 복귀를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올젠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이 지구촌 차원에서 개입의 그물망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을 믿지 못하면서다. 전통적 고립주의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미국의 국익과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게다. 소련의 몰락으로 개입주의는 근거를 잃게 됐지만,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경쟁국은 힘이 커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 경제의 위력이 줄고 있다. 해법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질문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일방주의는 동맹을 망친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1224일 매티스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명에 따라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 감축을 위한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미 정치권 안팎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와 달리 미군이 실제 시리아와 아프간에서 철군하지 않을 가능성은 여전하다는 전망도 없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여러 차례 중요한 정책 결정을 뒤집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안팎의 비난과 우려 속에 트럼프 대통령이 1226일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것도 이런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철군 발표가 던진 메시지. 일방주의는 동맹을 망친다. 존중 없이는, 동맹도 없다.

 



The First Of May (Lulu)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