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
엄기호-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했다. 2008년 한국정신분석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도시 심리학』 『심야 치유 식당』 『사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공부 중독』(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갈등 해결의 기술』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 있다.|||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중학교 때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저서로 《닥쳐라, 세계화!》(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2009),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10),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2011)를 냈고, 이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목차
책머리에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부 고통의 지층들
고통의 곁, 그 황량한 풍경에 대하여
1 아파보니 알겠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통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2 당신들은 모른다, 내 억울함과 외로움을: 극심한 고통은 개인의 내면과 세계를 파괴한다
3 주님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실존의 위기를 신이나 동식물에 기대는 경우
4 그건 됐고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며 제도의 언어에 기대는 경우
5 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뭐든 붙잡고 싶어요: 고통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는 없다
6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말할 수 없는 그 불가능에 맞서야 한다
7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아픈 사람은 다 외롭더라: 고통이 가져온 외로움, 그 외로움이 통한다
2부 고통의 사회학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1 더 ‘쎄게’ 말해야 눈길을 끈다: 존재감을 위기에 빠뜨린 성과 사회의 풍경
2 도대체 뭘 어떻게 믿고 사랑을 하나: 존중을 모르는 사랑, 친밀성의 세계를 무너뜨리다
3 애걔, 넌 고작 그거밖에 못하냐: 내가 타인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대하여
4 저 자식, 그래도 재미는 있대: 타인의 고통을 재미 삼고 그것을 전시하는 이들
5 아무리 친해도 신상이 알려지는 건 끔찍해요: 관종, ‘정의’의 이름으로 신상털이 카니발을 벌이다
6 억울한 내 사연에 ‘좋아요’는 몇 개나 달렸나요: 피해자를 관종으로 만드는 플랫폼의 시대
7 결국 자기를 빼곤 누구든 혐오한다: 고통을 대결하는 콜로세움이 되어버린 공론장의 모습
3부 고통의 윤리학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1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고통의 곁에 선다는 것에 대하여
2 고통의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 고통의 곁에 선 사람을 지키는 법
3 ‘지금 당장’에서 ‘지금 여기’로 나아가기: 고통을 매개하는 간극과 시야가 필요하다
4 세계를 보좌하는 글쓰기는 가능할 것인가: 동원의 언어를 넘어, 동행의 언어를 찾아서
참고 문헌을 대신해서
신중한 읽기와 쓰기를 위하여
책 말미에
고통과 연대하는 우회로를 찾아서
출판사 서평
고통의 지질학 _고통을 겪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곁의 풍경에 대하여
남편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선아는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잡았던 그의 마음은 무너져버린다. 친정 부모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그는 혼자 끙끙 앓으면서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을 하며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백혈병 진단을 받은 승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문병하러 찾아오는 것이 귀찮으면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외롭고 원망스러운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돈독한 이였지만, 그럼에도 하필이면 왜 자기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알 길이 없다며 절망하고 있다.
젊은 시절 집안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잘 키워냈고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했던 재희 어머니에게는 일흔을 넘기면서 온갖 노인성 질환이 찾아들었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그는 가족에게 하소연과 비난을 반복하고 있다. “너넨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병원을 전전한다.
대학 교수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덕룡 아버지는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을 겪은 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덕룡 아버지는 동생을 통해 접하게 된 신흥종교에 기대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고립감을 떨쳐내고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준석은 실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말에서도 상처받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이 ‘순진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손대기 시작한 것은 식물이었다. 그에게는 말 못하는 식물이 오히려 사람보다 정직하게 느껴졌다.
영화 [공동정범]에 등장하는 이충연의 경우,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나눈 뒤,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명망가들과 이야기하며 자신이 겪은 참사를 세상에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차갑게 바라보기도 한다.
대안 학교 교사인 태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학생들의 질긴 무기력을 깨트릴 수 없었고 자신의 좌절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결국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된 태석과 점점 거리를 둔다.
고통의 언어학 _고통과 대면하고 그것을 말하는 언어에 대하여
이 책의 1부에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자극적이랄 것 없는 모습들이다. 엄기호가 묘사하고 드러내는 이 고통의 풍경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고통에 갇힌 이들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운다. 물론 고통을 겪는 이에게는 주문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종교에 ‘주문’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견디게 하는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문이 방편을 넘어서서 실체가 되면 ‘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된다. 잠시의 고통을 잊게 해줄지 모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의 노예가 되게 한다. 고통에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방해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문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게 만든다.
내면적 언어나 사회적 언어에 기대더라도 고통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말할 순 없다. 고통은 그렇게 하나의 언어로 ‘봉합’되지 않는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이는 절망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온전히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고통에 찬 사람들은 그 무의미함으로 인해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언어의 가능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모든 언어가 결국 허무하기에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는 세계의 파국만이 있고 새로운 구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파국적 결론은 ‘주문’의 기만과 짝패를 이룰 뿐이다. 엄기호는 당사자가 고통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기만을 경계하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장벽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이를 기록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사회학 _고통을 소비하고 전시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 책의 2부에서 살펴보는 지점은 고통의 사회학적 측면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는 유령이 되어 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이 유령들이 죽었을 때만 오로지 그 존재를 눈치 채는 잔인한 사회다. 그렇기에 유령이 되지 않으려면 고통의 참담함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전시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이게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되어 있다.
이런 미학과 윤리학에서 그 곁에 선 이는 그저 ‘현존’하는 존재여야 한다. 현존이란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들어야 하고,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해야 한다.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겨우 유령을 면하고 그나마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곁에 선 이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저 유령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현존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된다. 이렇게 곁에 현존을 강요함으로써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에서 ‘모든 것이 끝장남’이라는 파국을 맞이한다.
이 파국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회’라는 말로 기대했던 것은 반대였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다. 고통의 곁에 선 이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버틸 수 없을 때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물러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고통을 겪는 이를 돌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곁에 선 이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사회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어떠한가.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관종(關種)’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아닌가. 이들이 사람들을 발가벗김으로써 세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신상털이 카니발을 벌이는 시대가 아닌가. 이런 일을 더해질수록 관종들의 명망은 더더욱 올라가고, 심지어 피해자조차 관종으로 만드는 선정적 플랫폼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사회가 아닌가.
엄기호는 이를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에 빗대어 설명한다. 한편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고 와 사자 밥이 되게 하는 노예 상인, 즉 관종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비참과 고통을 밀쳐내며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검투사, 즉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콜로세움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팝콘을 들고 와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구경하고 소비한다. 때로는 값싼 동정을 보내지만, 이들의 관심은 곧 새로운 구경거리로 넘어간다. 이 시대의 공론장은 해상도 높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좀더 세밀하게 읽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콜로세움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관종의 먹이가 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객석에 있으면서 고통의 당사자들이 펼치는 참혹함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키기 위해 ‘사라짐’을 택하는 것이다.
고통의 윤리학 _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마지막 3부에서 짚어보는 지점은 이러한 사회에서 고통을 어떻게 다뤄내야 할지의 윤리적 문제다. 이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의 옆에 있는 고통의 ‘곁’이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곁의 역할은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에서 빠져나와 그 곁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대체로 바깥은 붕괴하고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는 상태다. 이러한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매개하는 간극과 시야다. 지금 당장 자신의 고통을 타인과 소통하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책속으로
한 번의 고통으로 자기에 대한 앎에 이르고 그 앎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린다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고 겪어볼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통은 이제 겨우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다시 반복된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더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찾아온다. 그렇게 고통을 통해 도달한 기쁨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며 내가 도달한 앎이 앎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
자기에 대한 앎이란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 pp.39-40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통에 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통의 절대성이 만드는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움을 마주 대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이 세계를 파괴하고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몸부림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苦痛)이 고통(孤通)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通)하게 된다. --- pp.125-126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 p.209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당사자의 말에는 빠져 있다. 이야기는 듣는 이가 나누고 보탬으로써 이야기로 이어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속된다. 그런데 고통의 당사자는 자기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보태고 나눌 수 없다. 응답이 가능하지 않은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말은 모든 보태고 나누는 행위를 거부·파괴하고 그 자리에 절대적으로 자기의 호소, 즉 소리만을 위치시킨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고통의 당사자는 절대 고통을 말할 수 없는가? 반드시 남을 필요로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당사자의 ‘위치’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당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위치에서 나와야 한다. 고통이 아니라 이 말을 하는 자리다. 따라서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 pp.233-234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동행은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곁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곁에 선 이의 위치는 고통의 곁의 곁이 된다. 이렇게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는 것, 그것이 고통의 곁을 지킨 이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곁에 선 이는 고통을 겪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이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관건은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다. --- p.249
'고통 올림픽' 보며 '팝콘각'? 공론장이 무너졌다
"이 시대가 거의 완벽하게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태도가 신중함"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신간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는 '신중함'으로 가득 찬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무거운 주제 중 하나인 '고통'과 그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이는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난무하는 이 시대에 더욱 요원한 일이 됐다.
'공론의 장'에서의 소통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언어와 글을 통해 타인의 경험과 이의 한 극단인 고통에 대해 소통하고 그 고통을 배태한 공동체(사회)의 문제에 대해 협상과 타협을 거쳐 합의를 도출하던 시스템은 인터넷의 시대에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쇄술로 만들어졌던 공론장과 전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쇄술이 바깥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안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었다면, 인터넷은 반대로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내부와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며 바깥을 끊임없이 적대시하도록 한다. 가까운 것을 밀쳐내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넘어 가까운 것을 적대로 돌리고 멀리 있는 것을 지나치게 끌어당겨 새로운 '내부', 그것도 절대적인 내부로 만들었다. 마을도 아닌 언어의 철옹성, 게토가 만들어져 갔다. 새로운 내부가 바깥, 세계에 대해 수행하는 것은 전쟁이다. (...) '우리'를 억압하는 '바깥'과의 싸움에서 나는 더 많은 전과를 올려 내부에 '충성'해야 하며, 그 충성을 통해 나는 내부에서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의견 충돌이라는 '정치'가 아니라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이다. (...) 사람들은 내부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부를 조롱하고 비웃고 사냥하는 글들이 난무했다. (...) 그 결과 글을 읽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떨어졌다. 사물과 사람, 사태를 보는 입체적인 이야기는 배척받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는 선악 이분법이 매우 또렷한 글들이 채워갔다. 해상도는 떨어지고 색감만 자극적으로 올라갔다. 공론장에 선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줄을 서야 했다. 줄을 서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 받고 단죄되었다.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
이제 '공론의 장'은 '혐오'의 언어만 넘쳐난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윤리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혐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론의 장'에서 물러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사라지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고통 받는 이들이다. 이전에도 고통 받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는 공유되고 치유되기 힘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소수자들은 '고립'을 넘어 연결을 통해 '세계'를 지을 수 있게 됐지만, 앞서 설명한 '세계'의 역설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공론의 장에서 고통 받는 자들은 공감하는 이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경쟁적으로 전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플랫폼에서 고통끼리 경쟁하는 '고통의 올림픽'을 사람들은 '팝콘'을 먹으며 구경하며 품평한다. 처절하게 파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은 그 진실성을 오해 받고 바로 정치적 공격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일부 보수 진영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나 백남기 농민 유가족들을 상대로 '가짜 뉴스', '비난', '조롱' 등을 쏟아낸 것은 이런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공론의 장'의 작동 방식이 이렇게 바뀐 것은 소통 방식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적 영역 만이 아니라 친밀성의 영역에서마저도 '성과'가 평가 기준이 되며, 이로 인해 사적 영역에서마저도 '대체 가능성'이 상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사랑과 우정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랑은 도통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모른다. (...) "저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 말은 존중이 모욕으로 도착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성별 이분법에 기초한 사랑은 여성을 역할로 존중하고 열광하는 법만 알았지 그 역할과의 차이로 존재하는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법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능했다. (...) 존중을 모르는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동안 사랑과 우정의 다른 측면 역시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랑과 우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익을 바라지 않고 현존으로 기쁨을 얻는다. (...) 현존의 기쁨에 대한 확신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친밀성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유익한 존재'가 되어 그의 관심을 끄는 수밖에 없다. (...)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친밀한 관계가 산산히 부서진 이 시대에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저자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저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인정 투쟁이자 혐오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린 이 시대의 '공론의 장'에 사라졌던 많은 이들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받는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다른 이와 동행하며 세상을 보좌하기 위한 '신중한 글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내가 혐오하는 집단에 혐오의 책임을 전가하며, 증오를 정치적 힘으로 동원하는 정치 기술로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고통(孤痛)'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 엄기호는 이 책에 앞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단속사회>,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등 이 시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최전선'의 문제를 다룬 책을 꾸준히 써왔다. 19.1.5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Tiempo Y Silencio - Cesaria Ev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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