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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기생 이야기 외

by 이성근 2019. 1. 5.

‘48세 이황과 19세 두향이 사랑을 했다기려야할 서사라고?

 

지난해 113일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나루의퇴계 이황·두향 스토리텔링 공원풍경. 관광객들이 공원을 둘러보는 가운데 한 어린이가 퇴계 이황 동상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있다. 최미랑 기자

 

지난해 11, 김정숙 여사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허왕후 기념공원착공식에 참석한 것이 논란이 됐습니다. 힌두 근본주의 성향 정치세력이 설화 속 인물을 실존 인물인 양 포장해 이용하는데, 우리 정부가 관련 행사에 국가적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 적합하냐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허왕후 설화 사례는 역사를 날조해 문화콘텐츠로 만드는 것이 현실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지역사회에도 이런 일이 많습니다.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스토리텔링사업이 유행하면서 실체 없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인 양 지역 홍보에 활용됩니다. 역사를 소재로 문화콘텐츠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결과물이 우리 사회의 부정적 면을 강화한다면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2017년 퇴계 이황 관련 공원을 조성한 단양군의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나루는 남한강과 충주호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뱃길로 둘러보는 충주호 유람선이 들고 나는 곳입니다. 2년 전 이곳에 조그만 공원이 하나 생겼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비석이 그 의미를 알려줍니다. ‘퇴계 이황과 단양 관기 두향의 신분을 뛰어 넘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만나다.’ 요약하면 이곳은 1500년대 살았던 두 사람의 로맨스를 기념하고자 만든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조성된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황과 두향을 형상화한 조형물입니다. 선비옷을 입은 남성은 등 뒤로 매화나무 가지를 숨기고 서 여성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절경을 등지고 바닥에 앉은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거문고를 탑니다.

 

단양군은 스토리텔링 관광정책일환으로 2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지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발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겁니다. 2017년 공원을 열면서 단양군은 보도자료를 통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이황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단양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공원을 잘 가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천원권 지폐에 얼굴이 새겨진 인물이지요. 이 인물이 관기, 즉 관청에 소속된 기생과 나이와 신분을 뛰어 넘은 애절한 사랑을 했다니 어찌 된 일일까요.

 

지역에서 전해내려 왔다는 그 이야기

단양군이 보도자료를 통해 설명한 전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슬픈 스토리라고 소개됐을 뿐 출처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조선 13대 명종 무렵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에 부임한 퇴계에게 열아홉 살의 관기 두향이가 고이 기른 매화 화분을 선물하면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두향은 집안의 우환으로 시름에 잠겨 있던 퇴계를 위해 거문고를 타고 매화에 대신 물을 주는 등 온갖 수발을 들면서 위로했다 가끔 짬이 날 때면 퇴계를 모시고 장회나루에서도 풍경이 빼어난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를 탔다고 한다. 어느덧 퇴계는 자신이 평생 동안 사랑한 매화만큼이나 두향을 아끼게 됐다. 부임한지 9개월 만에 퇴계는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두향과 이별하게 된다.

 

퇴계가 떠나던 날 두향은 매화화분 하나를 이별의 정표로 보낸 뒤 관기 생활을 청산하고 평생을 강선대에서 수절하며 퇴계를 그리워했다. 20여년이 지나 임종을 맞은 퇴계는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고 유언했는데 그 매화분은 두향이가 이별의 정표로 준 매화였다. 퇴계의 죽음에 슬픈 나날을 보내던 두향은 이듬해 뒤따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두향은 살아생전 자신이 죽거든 퇴계선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두향의 유언대로 그녀를 강선대 아래에 묻어 주었다는 슬픈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열아홉 두향과 마흔 여덟 이황.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그리고 이런 관계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찬양하고 기념해도 되는 것일까요.

 

2016년 상연한 댄스컬 퇴계연가 매·포스터

 

소설팩트가 되기까지

퇴계와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꽤나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1970년대 이후 같은 얼개로 계속 재생산됐는데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8:남한강편>에도 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합니다. 먼저 마음을 둔 것은 두향입니다. 퇴계는 두향의 지극정성에 결국 마음을 열게 됩니다. 하지만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서 단양을 떠나게 됩니다. 두향은 퇴계가 떠나자 그를 몹시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납니다. ‘지조를 지키려고 기생을 관뒀다’ ‘곡기를 끊었다’ ‘남한강에서 몸을 던졌다등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史實)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닙니다. 두향의 삶은 조선시대 문헌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퇴계학 연구자인 정석태 부산대점필재연구원 교수가 2010년 발표한 논문 퇴계 이황 이야기의 서사화 양상을 보면, 두향이라는 이름은 1990년대 초반에 쓰인 <호서읍지>와 조선조 후기 시 몇 편에 등장합니다. 단양 고을의 이름난 기생이던 두향이 죽기 직전 강선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인데, 퇴계 이황과 관련된 내용은 어떤 곳에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생몰연도조차 밝혀진 적이 없어 두향이 과연 이황과 동시대에 살았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정 교수는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져 공원에 동상까지 세우기에 이르렀을까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러브스토리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숱한 변주의 원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정비석(1911-1991) 소설 <명기열전>을 통해서입니다. 정비석은 서울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으로 스타작가 반열에 올랐는데, 그 후 전국 팔도의 기생 이야기를 모아 조선일보에 연재하게 됩니다. 그 경위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회고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이니까 신문 연재소설의 힘이 막강했다.   

자유당 시절 서울신문에 <자유부인>을 연재해 뜨거운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정비석은 1962년 조선일보에 <여인백경>을 연재해 인기를 모았다.

 

그는 송지영(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 씨와 가까운 사이여서 종종 술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관훈동에 있는 요릿집 선천에 가면 두 분이 재기발랄한 음담패설을 주고받아 옆에 앉은 이 집 여주인이 배꼽을 잡고 아이고, 이래서 내가 살이 좀 빠진다고 익살을 부리곤 했다. 정비석 씨는 단아한 선비형의 외모에 살며시 웃는 표정이 꼭 시골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만날 때마다 내가 “<여인백경> 후속 작품은 언제 쓰실 겁니까하고 조르면 그는 이봐, 부친께서 데리고 놀던 기생이 몇 명이나 되는지 기억나는가?”하고 되물었다. 내가 글쎄요. 소학교 때 번번이 아버지께서 기생들을 집에 데리고 오셔서 어머니께 큰절을 시키고 동치미냉면을 먹이고 나면 흰 봉투에 화대를 넣어 보낸 기억이 납니다하고 대답하면 그렇지. 요즘 사람들이 그런 멋을 알까. 내가 그 이야기를 언젠가 쓰겠네하고 약속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청운각요정의 대머리 지배인 배씨가 <조선권번>이라는 진귀한 책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찾아가 긴요하게 참고할 일이 생겼으니 빌려달라면서 용돈을 집어주고 입수했다. 내용을 들춰보니 우리나라 권번(기생들의 조합 같은 것)의 유래와 팔도강산에서 이름을 떨친 명기들을 소개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정비석 씨를 만나 이 책을 건네주며 집필을 부탁했는데 이 책을 토대로 해 1974년부터 그의 유명한 <명기열전>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연재소설 써달라고 로비를 펼친 지 10년 만이었다. 작가의 감칠맛 나는 필치로 그려지는 옛 명기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전국을 들썩이게 했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던 농촌에선 막 시골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시골 촌부들이 아침이면 다방에 모여 그날 신문에 실린 명기열전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명기열전> 22단양기 두향부분에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정비석씨는 단양 지방과 퇴계 이황 후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이 사랑이야기를 엮었다고 했습니다. ‘야사에 살을 붙였다는 겁니다.

 

<자유부인> <명기열전>의 작가 고 정비석.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의 창작은 다른 작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1945-2013)2008년 발표한 <유림>은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 삶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인데, 여기에도 <명기열전> ‘단양기 두향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두향은 불행한 가족사와 거듭된 사화로 힘들어하는 퇴계를 일편단심 사모하고 위로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목에 칼이 들어온 때에 기생 놀음이라니

정석태 교수는 퇴계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분석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할 뿐더러, 당시 이황의 입장을 생각해 봐도 정치적 난국에서 수세에 몰려 기생놀음에 빠질 처지는 못 되었다는 겁니다.

 

퇴계는 15489개월 간 단양에 머무릅니다. 안동이 고향이었던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 청송부사로 나가기를 원했지만, 인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청을 들어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단양군수를 맡았습니다. 1월 단양에 간 그는 같은해 10월 풍기로 발령을 받아 옮겨가게 됩니다.

 

서울에 있던 그가 외직으로 나오기를 자청한 것은, 조정에 그대로 있다가는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정 교수는 분석합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가까스로 돌려받은 퇴계는 휴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년 반 이상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547년에 임금이 홍문관 응교로 임명하며 서울로 불러들이자 할 수 없이 조정에 돌아갑니다. 그런데 또다시 정미사화가 일어납니다. 이에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한 끝에 외직으로 나가겠다고 청해 얻은 자리가 단양군수였던 겁니다.

 

퇴계 이황 영정. 경향신문 자료사진

 

달아나듯 조정을 떠난 이황은 단양에 부임한 후에도 조정의 감시를 받습니다. 게다가 부임한 다음달 둘째 아들이 죽었고, 7월부터 이미 사직원을 제출해 휴가를 받고 고향에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정실인 권씨부인은 이황이 단양으로 부임하기 전인 1546년 별세했지만, 지방에서 벼슬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측실 부인이 있었습니다. ‘러브 스토리의 내용과 달리 홀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단양에서는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두향의 도움으로 단양팔경을 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합니다. 정 교수는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지금 단양팔경에 들어가는 중선암과 상선암은 당시에는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야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퍼진 것일까요. 누군가 이황을 음해하려 한 것일까요.

 

퇴계 전문가인 정 교수의 해석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정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요즘 관점에서 보면 퇴계의 명성에 오히려 해가 될 위험한서사를 자손들이 나서서 퍼뜨린 것은 이를 풍류로 본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근대 어름에 소실을 두는 것이 양반들 사이에 유행을 했고, 정인을 데리는 것이 멋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영향도 컸다는 분석입니다. 1970년대 <명기열전>을 쓴 정비석이 직접 밝힌 의도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입니다.

 

퇴계 이황의 업적을 기리고 칭송하는 이들은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전파하고 각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1700년대 단양팔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사랑이야기가 필요했고, 경상도와 서울을 잇던 교통 요지 단양에 기생 두향의 묘가 있으니, 오가는 이들 사이에 얘깃거리가 전해지기도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이에 대학자 이황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해 친근한 인물로 만들고자 하는 후손과 후학의 의도가 더해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정 교수는 봅니다.

 

각색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실인 양 계속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뉴스 아카이브 빅카인즈(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두향을 검색해 보면, “퇴계 이황의 그녀부터 평생을 수절하며 살다가 퇴계의 사망소식에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절개있는 기생등 설명이 사실처럼 나옵니다. 칼럼에서도 사실로 인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시아경제 빈섬의 스토리텔링 천일야화 14.5.10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21911270847428

중앙일보 [삶과 문화]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05.3.8

https://news.joins.com/article/457922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권번의 동기들 단체 기념촬영 사진

 

만약 두향과 이황이 실제로 만났다고 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으로 부르고 기념해도 되는 걸까요? 두향에게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당시 기생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비춰 짐작해 볼 밖에 없겠습니다.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는 1800년대 중후반 기생문학 작품집인 <소수록>을 완역해 2007<나는 기생이다>를 펴냈습니다. <소수록>에 실린 장편 가사, 토론문, 시조, 편지에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 도서관 등에 소장된 기생 작품을 두루 더해 엮은 책입니다.

 

책을 보면 기생의 삶은 몹시 고달팠습니다. 열 살도 안 돼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교방에서 기생수업을 받습니다. 그러다 머리를 얹고정식 기생이 되는데, 잔치나 의례에 참가해 남성을 상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양반집 첩이 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잘 풀리는 길이었으나 집안과 주위의 멸시를 견뎌야 했고, 노기로 남게 되면 가난과 사회적 냉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해주 기생 명선에 대한 가사를 한 번 볼까요. 1830년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7~8세에 기방에 나갔다고 말합니다. “사또에게 수청들랴 부인 행차 시종하랴, 이십이 늦잖거든 십이 세에 성인(어른이 되다·성관계를 의미)하니,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그는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한탄합니다.

 

열여섯에 명선은 이십대 중반의 김진사를 만나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김진사가 갑자기 서울로 떠나 버리자 홀로 출산합니다. 다행히 후에 김진사가 가마를 내려보내 명선을 데려가는데, 가사에는 이때까지 속을 끓이는 명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함경도 명천의 기생 군산월은 첩이 되지 못하고 버림받은 경우입니다. 상대는 서울에서 유배를 온 쉰셋의 홍문관 교리 김진형이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군산월과의 관계로 달랬는데, 유배 생활에 대한 그의 기록인 <북천록>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닭 울 때에 세수하고 군산월을 깨워내니, 몽롱한 깊은 잠에 이슬에 젖은 거동, 괴코도 아름답고 유정하고 무정하다” <북천록>에 실린 시조 <북천가>에서 그는 군산월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이어 유배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며 그와 연을 끊은 일을 회고합니다. 뜻밖에 유배가 일찍 끝나자 군산월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옛 일을 이를 게니 네 잠깐 들어봐라 / 이전에 장대장이 제주 목사 지낸 후에 / 정들었던 수청 기생 버리고 나왔더니 / 바다를 건넌 후에 차마 잊지 못하여/ 배 잡고 다시 가서 기생을 불러내어 / 비수 빼어 버린 후에 / 돌아와 대장되고 만고 영웅 되었으니 / 나는 본래 문관이라 무병과 다르기로 / 너를 도로 보내는 게 이것이 비수로다

 

수청 기생을 죽이고 후에 크게 된 인물도 있는데, 자신은 문관이라 차마 그리는 하지 못했다는 대목에선 스스로의 너그러움을 강조하는 느낌 마저 듭니다.

 

군산월이 직접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군산월 관점에서 쓰인 가사도 전해 내려옵니다. 가사집 <별교사>에 실린 <군산월애원가>를 보면 그는 열아홉에 김진형을 만난 것으로 나옵니다. 김진형은 떠날 때 군산월을 첩으로 데려 가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이 볼 세라 군산월을 남장시켜 떠나는데, 20일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에서 기생첩을 데려갈 수 없는 처지라며 군산월을 돌려 보냅니다.

 

이런 내용을 참고하면, 이황과 두향이 실제로 만났다 하더라도 그 관계를 러브 스토리로 미화해 널리 알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기생과 축첩 문화는 오랜 시간 풍류로 포장되고 사랑으로 각색되었지만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병설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황과 두향의 만남이 로맨스라는 인식은 남성 중심적이라며 기생 관점에서 쓴 자료들에 비춰볼 때 이 관계를 낭만화하기 어렵고, 이에 대한 성찰 없이 지역사회가 이야기를 문화콘텐츠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0대 여성들이 채팅앱을 통한 성매매에 내몰리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열아홉 살 기생 두향과 마흔 열덟 단양군수 이황이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했다는 서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19.1.5

 

나는 기생이다 소수록읽기 저자 정병설|문학동네 |2007.07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7년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다. 1997년에 조선시대 최장편 소설인 '완월회맹연'을 분석한완월회맹연 연구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주로 조선시대의 주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현재는 조선후기 매체 변화에 대해 연구 중이며 한중록, 구운몽의 번역, 주석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정병설 교수가 20077월에 펴낸 나는 기생이다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소수록'의 전 작품과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 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한 '별교사', '소원성취문', '염요' 등의 기생 관련 문학 작품을 현대어로 번역하고 해설한 책이다. '소수록'은 정병설 서울대 교수가 2001년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에서 찾아내 일반에 공개한 것으로, 해주 기생 명선, 종순, 청주 기생 등이 직접 쓴 가사와 시조, 토론문, 편지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생들의 인생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기생문학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천인이면서도 우아하고, 하층이지만 높은 교양 수준과 예술성을 지녔으며,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지만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었던,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었던 기생들. 이 책 속에서 기생들은 세상을 향해 자신은 꽃이 아니라 기생이라고, 한 사람이라고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들어가기 전에기생의 눈, 기생의 목소리

일러두기

 

1부 기생의 일생

해주 기생 명선의 인생

군산월의 애원

가련하다 첩의 신세

늙은 기생의 노래

 

2부 기생놀음의 현장

기생집에서 노는 법

기생잔치의 현장

기생의 출석부

 

3부 기생이 보는 눈, 기생을 보는 눈

기생이 본 다섯 유형의 남자

기생, 요물인가 보배인가

기생의 몸

 

4부 기생과 편지

그리워하다 죽어버려라

날 데려가주오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시조로 나눈 사랑

원문 및 주석

보론조선의 기생

참고논저

색인

 

출판사 서평

여기, 여자가 있다. 그녀는 기생이다.

 

기생이 되다

이내 행사 생각하니 호부호모呼父呼母 겨우 하니

산과 물 가르치고 저적저적 걸음할 때 초무初舞 검무劍舞 고이하다

명선으로 이름하여 칠팔 세에 기생되니 이르기도 이르구나

명월明月 같은 이내 얼굴 선연嬋娟하여 명선인가

명만천하名滿天下 큰 이름이 선종신善終身할 명선인가

사또에게 수청들랴 부인 행차 시종하랴

이십이 늦잖거든 십이 세에 성인成人하니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

남녀의 결혼에는 집안 지체 중요한데

순사또 가마 타고 서울로 돌아가니

운명의 정함인가 월하노인月下老人 지시런가

갑자기 부귀하면 상스럽지 않다더니 무슨 복이 이러하리

이는 모두 기생으로 세상 나온 내 자신의 잘못이라

 

* 初舞 :기생 춤의 하나. 춤판에서 맨 먼저 추는 춤.

* 成人 : 결혼, 여기서는 성관계

* 月下老人 : 배필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의 노인

 

시대를 잘못 만나, 부모를 잘못 만나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짐승과 일반으로 타인에 의해 성인成人하였으나, 그녀는 본래 기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다.

여자로 태어나다

 

천지개벽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사람이 태어난 후 고금 영웅을

낱낱이 헤어보니 한둘이 아니어든

이내 몸 어이하여 남자는 마다하고 일개 여자 되어 나며

공명현달功名顯達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남자의 할 일이나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지아비 섬김은 여자의 떳떳한 일

 

* 거안제미擧案齊眉 :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여 밥상을 눈높이까지 올려서 바치는 일.

 

공명현달功名顯達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못하더라도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한 지아비를 섬겨야 할 여자가 어찌하다보니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기생이 되었다. 일고여덟의 어린 나이에 기방에 나갔고, 겨우 열두 살에 머리를 올린 여자는 열다섯에 이미 이름을 날리지만, 손님이 몰려와 돈을 내밀어도 푼돈냥에 허신許身할까거부한다.

 

이름을 날리다

 

춘광이 얼풋하여 삼오십오 다다르니,

일성一城 중 허다 호객豪客 구름처럼 모여드니,

(……)

얻자는 것 무엇이며, 보자는 것 더욱 괴.

천금이 꿈속이라 푼돈냥에 허신許身할까.

기생이라 웃지 마소, 눈 속의 송백松柏일세.

 

그러다가 열여섯, 드디어 기다리던 님을 만나니, 관찰사인 형을 따라온 이십대 중반의 미남 재사才士이다. 그녀는 선비에게 푹 빠졌으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관찰사가 갑자기 경질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일 년 남짓, 길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여염집 아내가 지아비를 섬기듯, 여자는 남자를 기다린다. 사시사철 님 그리며, 일 년 열두 달 님 그리며, 새 사또가 와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그저 기다리던 중 한양동이가 태어난다. 절개를 지키며 손님을 받지 않아 죽게 된 상황에서 한양동이는 한 가닥 희망이다. ‘한양동이가 태어났으니 선비도 여자를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한양동이의 출생

 

(……)

우닌 소리 우렁차고 이마가 풍영豊盈하니

헌헌한 장부 기상 진사님을 상대한 듯

(……)

남자 아녀 여자라도 님의 기출 귀하려던

하물며 네 모양이 아버지를 닮았으니

사랑흡고 귀하기가 그 무엇에 비찬 말가

삼종의탁三從依託 좋을시고

천금같은 너를 보니 잡생각이 바이 없다

 

시간이 또다시 흘러 선비는 가마를 보내 여자를 정말로(!) 서울로 불러올린다. ‘집 사놓고 기별할 터이니 배신하지 말고 올라오라했던 그였지만, 그 역시 기방을 드나드는 손님의 하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으나 곧이 믿을 수 없었던 그녀였다.

홀로 계신 어머니가 마음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해주에서 서울까지 긴 여행 끝에 여자는 드디어 선비와 상봉한다.

 

상봉의 기쁨

(……)

어와 벗님네야 이내 말 웃지 마소

낙양성 도리원桃李園에 꽃시절이 매양이며

폈다 지는 화류계에 오입객을 믿을쏜가

웃음 파는 우리 처지 견국부인 못 바라나 우선 상봉 즐겁도다

 

이 작품에는 해주 감영의 명기 명선이 지었노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기생 명선이 첩이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절절히, 그러면서도 경쾌하게 그리고 있는 그의 회고는 첩 되기에 성공한 지점에서 끝나고 있어서 일단은 해피엔딩이다. 적어도 여기까진 그렇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생활이 어떠했을지는 함부로 짐작할 수가 없다. 여염집 출신의 첩들도 그렇지만 기생 출신의 첩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생은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다. 천인이면서도 우아함을 뽐내고, 하층이지만 높은 교양 수준과 예술성을 자랑하였다.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지만,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었다.

 

기생을 보는 시각 역시 모순적이다. 한편에서는 저급한 창녀라고 무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준 높은 예술인으로 선망한다. 남자들은 기생을 멸시하면서도 가까이 하고자 했고, 여성들은 얕보면서도 질투하고 경계하였다. 기생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 기생은 가정의 적이자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또한 기생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대표한다.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 유교적 조선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번성한, 욕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기생은 숫자로 보나 역할로 보나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음악, 무용, 문학 등의 문화적 기여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월등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들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사랑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기생에 대한 언급과 기록은 적지 않지만, 그들의 생활이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소수록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미국 버클리 대학 아사미문고 및 정병설 교수 개인 소장의 기생 관련 작품을 번역, 주석, 해설한 것이다. 특히 소수록은 전 책을 완역하였다. 소수록은 본문 총 125면의 한 권짜리 한글 필사본으로, 소제목이 붙은 열네 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모두 기생과 관련된 것들로, 장편가사, 토론문, 시조, 편지글 등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는 종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기생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품들로, 말하자면, 소수록은 일종의 기생 문학작품집인 셈이다.

 

열네 편의 작가는 해주 기생 명선, 종순, 청주 기생 정도로만 밝혀져 있으며, 그 편자 역시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책 끝에 갑오 졍월 이십오일 동?? 필셔라는 필사가 있어, 필사자가 동객이라는 사실과 필사년이 갑오년임은 알 수 있다. 동객은 東客 洞客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대개 기생집 주위를 떠돈 남자로 볼 수 있을 듯하며, 갑오년은 작품 내용과 이 책이 도서관에 들어간 시기로 볼 때 1894년이 분명할 듯하다. 수록작품들은 대체로 19세기 중후반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33쪽에 달하는 장형의 가사는 명선이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입으로 풀어낸 자술가自述歌, 이런 형식의 기녀가사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기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만하다. 이외에도 소수록에는 한양 손님과 기생이 나누는 '문답가' 나 늙은 기생이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嘆老歌’, 해주 감영이 기생을 점고點考,일일이 세는 것할 때 불렀던 점고호명기등 이색적인 작품도 여럿 들어 있다.

 

*‘소수록은 한글 표기로만 되어 있으나 "내용이 거의 상사相思와 관련한 것이어서 소수록이란 제목은 쓸쓸한 회포를 없애버린다는 의미(消愁錄)로 보인다"고 정병설 교수는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제 새로 찾은 기생 시문들을 통해 조선 기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기생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돈이 최고라고 한다거나 눈을 흘긴 작은 원한까지도 모두 갚아주겠다는 정도는 그 한두 예에 불과하다.

 

욕망과 함께 드러난 기생의 주장은 그러나 참으로 단순하다. 한마디로 하자면 기생도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생의 외침은 비단 남성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여자들도 다를 바 없었다. 남성들이 기생을 해어화解語花, 말하는 꽃으로 보았다면, 여성들은 이들을 여우로 지목하였다. 꽃이건 여우건 기생을 물화物化하고 타자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나는 기생이다’ ‘나도 사람이다외쳤던 것이다.

 

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 살림지식총서 294 2007. 7.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꽃을 잡고 ; 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경덕, 2005)의 후속 작업을 위해 연구한 그 결과물을 하나씩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고려조문인졸기, 조선조문인졸기, 문학의 이해, 한국문학의 흐름과 이해, 우리문화이야기, 글쓰는 절차와 방법, 중국간체자여행등을 만들었다

 

목차

1. ··일 기생사 더보기

1.1 우리나라의 기생

1.2 중국의 기생

1.3 일본의 기생

 

2. 관기의 행방을 찾아서

 

3. 권번의 탄생, 그리고 영욕의 세월 더보기

3.1 서울의 권번

3.2 지방의 권번

3.3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4. 기생, 대중스타로 태어나다 더보기

4.1 대중매체의 보급과 기생

4.2 화려한 연예인 스타의 선조

4.3 놀랄만한 권번 기생의 수입

4.4 기생 자선 연주회, '온습회'

 

5. 평양 기생학교 방문기

 

6. 기생과의 만남, 그 공간 더보기

6.1 기생 사진엽서의 공간

6.2 박람회 공간에서의 기생

6.3 일제강점기의 요릿집 공간

6.4 명월관,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

6.5 서울의 기생촌, 그 공간

 

7. 정체성의 혼란

8. 저자소개 - 신현규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 · 평양 · 성천 · 해주 · 강계 · 함흥 · 진주 · 전주 · 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 p. 8

 

일제강점기 권번의 기능면에서는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규일이 운영하던 조선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과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댄스, 서화를 가르쳤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의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내었다. --- p. 32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다. 재주와 끼도 많고 스캔들도 만들고, 대중 인기의 수명을 가졌다. 항상 안정된 삶을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멀티플레이어의 전형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 레코드 가수로 성공하면 영화에 진출하고 경성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면서도 사생활을 밝히기 싫어하며, 예뻐지기 위해 뭐든 하였다. 그 당시 잡지와 신문의 연예란은 그들을 봉건적인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의 대중스타로 대우해주었다. --- p. 41

 

조선사회에서 유일하게 여성 문학과 전통 예술을 계승하였던 기생은 매력적인 문화콘텐츠의 대상이다. 더구나 문화콘텐츠의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탁월한 제재와 소재가 될뿐더러 대외 경쟁력도 뛰어나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문화의 콘텐츠에서 비교우위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대표브랜드 중에 하나가 바로 기생이다. --- p. 90


우리나라의 기생

우리나라 기생의 대표 브랜드는 누가 뭐라고 해도 황진이(黃眞伊).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종 6(1511)에 태어나 중종 36(1541)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진랑(眞娘)이고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기에 '개성기생 황명월'로 불러야 맞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를 살았던 황진이는 약 270년이 지나서 19세기 화풍으로 풍속화를 그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에 의해 '풍속화 기생 이미지'로 치장하게 된다.

 

또한 1909년 기생조합에서 일제강점기의 권번 기생으로 이어지는 '전통예악의 기생 이미지' 역시 오늘의 입장에서도 황진이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황진이의 기생 이미지는 '16세기에 태어나 19세기 옷으로 치장하고 21세기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퓨전형 기생'이다. 기생 황진이는 아무리 다른 기생을 비추어도 늘 항상 '황진이'만 보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 기생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조선해어화사(1927)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기생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층으로 취급받은 기생들의 자료를 역사서와 각종 문집에서 모았다. 기생의 기원과 각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각종 일화와 시조 및 시가 등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기생이 비록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기나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으며,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게 공헌했음도 재확인시켜주었다.

 

대한제국 궁정 관기 정장 사진(1900년대)

 

기생을 부르는 별칭 '해어화''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생(妓生, a gisaeng 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호칭이다. 지난날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기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또한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교생, 서생, 선생, 학생, 이생, 허생 등과 같은 경우이다.

 

기생의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찾는다. 무당의 유녀화는 인류의 매춘 역사를 논의하는 일반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약용과 이익은 기녀의 문헌 기록을 들어 고려 때에 그 기원을 찾았다.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

 

고려 때에는 관기(官妓)를 기첩(妓妾)으로 맞고 사대부들이 집마다 둔 기록이 있어 공물이면서 사물로도 여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하였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할 수 없다'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막료의 수청기(守廳妓) 구실로 삼았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관기이면 딸도 관기가 되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면서도 고약한 경우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 지방 수령관이 관기 모녀와 관계를 맺고, 모녀가 번갈아 가면서 수청을 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습되는 기생이 아닌 때는 고아거나 빈곤하여 팔리는 것처럼 외적 환경에 의했다. 그밖에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은 허영심에 본인이 희망하거나, 과부가 되어 자원하거나, 양반의 부녀로서 음행하여 자녀안(恣女案)에 기록된 경우가 있었다.1)

 

고려사의 기() 출전(129권 열전 제42 반역3 최충헌)

 

조선시대의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 9살이 된 기생은 동기(童妓)라 하는데, 교방에서는 12세부터 교육을 시켰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라 불렀다. 또한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 하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라 했고,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물론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 기생으로 도기(都妓).

 

어두운 호칭으로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娼妓), 천한 기생이라는 천기(賤妓), 퇴물기생이라는 뜻의 퇴기(退妓)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포교·궁가·외척의 겸인 청지기·무사 등이 등장하여 후대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원군 시절에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오직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으로 허락하였을 뿐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기생서방에게 돈을 주고 그 몸을 속량(贖良)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였다.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기생

기생에서의 '()'는 형성문자로 '계집 녀()'의 뜻과 '가를 지()'에서 바뀐 음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한··일 기생 호칭의 변별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기생이라는 호칭 대신에 '' 또는 '기녀' '창기' 등을 널리 사용하였다. 기생이라는 호칭의 용례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인용조차도 않았다. 중국의 문헌 기록을 보면 우리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의 차이다. '기녀(伎女)'는 고대의 여자 가무예인을 가리키는데, '기녀(妓女)'는 여자 가무예인이지만 매음을 위해 영업하는 여자로도 그 용례가 보인다.

 

중국의 옛 문헌에는 '()'보다는 '()'으로 불리었다. 특히 옛 시대 창녀는 음악에서 기원한다. 이런 까닭으로 후세에 창녀가 비록 살기 위해 매음을 하지만 음악과 가무가 그들의 주요 기술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은 남녀로 구분되지 않았다.

 

중국 한나라 이래로는 창(), (), 여창(女倡), 여기(女妓), 어기(御妓)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이후에 관기(官妓), 가기(歌妓), 영기(營妓), 음기(飮妓), 교방여기(敎坊女妓), 성기(聲妓), 가기(家妓)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악(女樂)의 연희가 전제되고 있다.

 

()은 은나라 시대에는 종교매음의 '무창(巫娼)'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서주 시대에 노예 '창기''관기'가 처음으로 생겨나고, 춘추전국 시대 이후 '여악''창기' 발달이 이루어졌다. 한무제 때 군영에 설치되었던 창기를 '영기'라 하였다. 서언고사 書言故事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기()가 없었는데, 한무제가 처음으로 영기를 설치하여 아내 없는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하여 위만조선 땅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면서 함께 들여온 것이 '영기'였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사노예처럼 집안에 둔 '가기''성기'의 전성기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그 유명한 '진사''창기'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당나라에서는 관원들이 창기와 함께 있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창기와 함께 연희를 즐기는 풍조가 생겼다. 송나라 시대에는 '태학생''창기' 관계가 많이 회자된다. 그 후 청나라 시대에는 예전 왕조처럼 교방을 두고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나중에 개인이 창기를 경영하는 식으로 유지되다가 폐창(廢娼)으로 진행되어간다.

 

청나라 말기 상해 10대 명기 사진

 

일본의 기생

일본에서는 기생이라고 하지 않고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예기(藝妓)'는 일본 기생을 일컫는 말로,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 ~1704년경부터 생긴 제도로서 본래 예능에 관한 일만 하였다. 하지만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전문적으로 질 높은 접대를 제공해야 했던 그들은 높은 수준으로 일본 전통예술의 훈련을 받았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일본 게이샤 사진엽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여자로 바뀌었으며 젊은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예술분야 즉, 음악·서예·다도··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악기를 배운다.

 

그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하얀 얼굴에 아주 빨간 입술로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일반 게이샤의 수는 크게 증가하여 지방도시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의 정도에 관계없이 매춘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권번은 예기 중심의 기생권번이 아니라 유곽의 공창(公娼)인 예창기(藝娼妓)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일본인 예창기가 수입되어 당시 남대문과 태평로에 5, 6호의 애미옥(曖昧屋)이 있어서 '어요리(御料理)'의 간판을 붙이고 10여 명의 매춘부가 비밀 영업을 하였다.

 

러일전쟁 때 일본인이 격증하여 예창기가 증가하면서 예기의 권번도 생기고 창녀의 유곽도 생겼다. 일본의 유곽제도는 집창제(集娼制)로 매음업자를 일정한 곳에 모아 사창(私娼)이 일반주거지역으로 침투·난립하는 것을 단속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1924년 당시 일본에 생겨난 유곽은 544개소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중구 묵정동 일부 지역이 '신마치' 유곽의 소재지가 되어 여기에서만 매음업이 허용되었다. 신마치 유곽지대는 동·서로 나누어져 동쪽은 조선인이 경영하여 창기들도 주로 조선인이었으며, '한성대좌부조합'을 결성하였다. 서쪽은 '다이와신치'라고 해서 주인·창기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신마치유곽조합'을 결성하였다. 그 뒤 유곽은 개항지에 예외 없이 먼저 생겼고, 이어 내륙 도시들로 번져갔다. 당시 유곽에서 여자를 사는 사람은 큰 홀의 벽에 기대어 늘어앉은 여자를 직접 고르거나 번호가 붙은 사진첩 또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번호를 지정하였다. 유곽이 설치되자 임질·매독 등의 성병도 번져 대개의 유곽에는 그 구내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하였다.

 

서울에 있던 일본인의 예기권번은 욱정 1정목 28번지에 있던 혼권번, 신정 12번지의 히가시권번, 원정 2-1번지의 난권번, 그리고 츄우나가권번이 있었는데 1924년 기준으로 혼권번의 예기 숫자가 268명이었다. 묵정동의 신마치권번은 창기 권번으로 일본인 창기가 340명이었으며, 또 용산에 야오이마치 유곽이 있었다. 지방의 일본인 권번은 거의 몸을 파는 창기 중심의 유곽들이었다.1)

 

일제 과거사 청산의 대상으로 '집창촌(集娼村)'도 예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유곽'이 집장촌의 유래이면서 당시 전국에 설치된 지역이 대부분 현재 집장촌 지역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산의 속칭 '완월동' 집창촌은 일제에 의해 소화통(昭和通)으로 불리던 충무동의 완월동 지역에 1907'미도리마치 유곽'을 조성하면서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부터 일제에 의해 생겨난 유곽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광복 후 미군정 시대에 '공창제도'가 폐지되자 '완월동' 집창촌은 사창화된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미도리마치(綠町) 유곽 사진

 

관기의 행방을 찾아서

기적(妓籍)에 올라있는 관기는 그 부역(賦役), 즉 기역(妓役)에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관기의 정년(停年)50세이기에 더욱 그랬다. 1894년 갑오개혁의 노비 해방과 관기의 해방은 별개였다. 조선의 관기를 관장하던 궁중악은 1895년 예조에 소속되어 있던 장악원이 궁내부 장례원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1897년 관제 개혁 때에는 장악원이 교방사로, 1907년에 교방사는 장악과로 개칭되면서 궁내부의 예식과에 소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장악과를 이왕직아악대로, 1913년에는 이왕직아악부로 교체했으며, 교방사 설치 시 772명의 악원 수가 191757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또한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조선 궁중 아악의 말살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895년 이후 궁중 관기는 장악원 직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의원(太醫院)과 상의사(尙衣司)로 소속되면서 관기 해방 기록에 혼동이 일어났다. 내의원(內醫院)의 의녀(醫女)1907년에, 상의사의 침선비(針線婢)1907년에 폐지되었다. 따라서 직제상 관기가 폐지된 것은 1907년이다. 19071214대한매일신보에 관기가 자신의 소속을 밝히고 자선 연주회를 개최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광고] 기등(妓等) 백여 명이 경성고아원 경비규세하야 유지극난지설(維持極難之設)을 문하고 난상(爛商)협의하여 자선연주장을 야주현 전 협률사에 개최하여 수익을 급수히 해원에 기부할 터이옵고 순서는 여좌하오니 자선하신 인인군자(仁人君子)는 내림 완상하심을 복망(伏望).

 

순서

평양랄탕패환등창부땅재죠승무검무가인전목단선유락항장무포구락무고향응영무북춤사자무학무. 기 외에도 자미있는 가무를 임시하야 설행함. 1121일 위시하야 한삼야(限三夜) 개장함. 매일 하오 칠시에 개장하야 지 11시 폐장함.

 

자선연주장 발기인

궁내부 행수기생 계옥 태의원 행수기생 연화 상의사 행수기생 금화 죽엽 계선 앵무 채련 등 고백.

 

이 기사에서 궁내부 행수기생, 태의원 행수기생, 상의사 행수기생 등이 자선 연주회를 발기했다고 했는데 궁중에 속해 있어야 할 관기가 궁중 밖에 궁내부, 태의원, 상의사의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연주하였다. 행사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관기들이 연주회를 주최한 것이다. 이는 궁중 윗전의 허락이 있어서 가능했거나, 궁중의 허락과 상관없이 기생들이 독자적으로 연주할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 그런데 궁중무와 민속무의 종목이 섞여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궁중 소속 관기라면 민속무, 즉 승무·북춤은 추지 않았다. 이것은 여악의 전통이 흔들렸거나 궁 밖에서의 연주였기에 가능했다.1) 1908711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자선연주(慈善演奏)] 경성고아원 역사비에 보충하기 위하여 관기(官妓) 백여 명이 자선지의로 협의하고 음력 금월 십삼일 동구 내 장안사로 관기자선연주회를 개최하고 해수입금은 몰수해 경성고아원에 기부한다더라.

 

1908713일 경성고아원을 위해 장안사에서 열었던 자선 연주회,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는 조선 관기들의 마지막 무대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여악(女樂)이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이다.

 

관기 사진엽서(한말 궁중의 연희가 끝난 후 기념촬영)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인 예술가로서 '관기'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08915'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 때부터이다. 1908915황성신문을 보면 상방과 약방과 장악과에 관련되었던 관기를 앞으로는 경시청에서 관리한다는 기사가 실린다. 기생들은 이제 궁내부와 전혀 관련이 없게 되었으며, 경시청을 통해 관리 받게 되었다. 그날 바로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되었고 106'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심득'이 내려졌다.

 

경시청에 의해 모든 기생들이 기생조합소에 조직되어 가무영업 허가를 받아 활동하게 된 것이다. 기생에 대한 감독과 통제는 이미 치밀한 준비하에 계획되고 있었다. 결국 궁중 관기가 사라진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 궁중 관기를 요릿집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말 요릿집의 기원은 일본식 요정에 있다. 1880년대에 들어 서울에는 청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일본인의 거주는 주로 진고개 즉 지금의 충무로 일대였다. 당시 일본인 3천 명이 모여 살면서 일본식 과자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 과자점에서는 '왜각시'라 불리는 일본 여자들이 과자였던 '눈깔사탕'을 팔았는데 일본 남자들이 여기에 몰려들자, 조선 남자들도 '왜각시'를 보려고 진고개 출입이 잦아졌다.

 

당시 진고개에 여럿 들어섰던 일본 요릿집에서 '왜각시'의 인기에 주목하게 되었고, 단순히 요리를 파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시까지 파는 발상을 한 결과가 술과 요리, 그리고 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1887년 처음으로 일본식 요정인 '정문루(井門樓)'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화월루(花月樓)'가 생겼다.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송병준이 '청화정(淸華亭)'까지 내면서 한말의 3대 요릿집이 생겼던 것이다. 일본식 요릿집은 목욕간을 두었는데, 조선식 요릿집은 이를 따로 두지 않았다. 이 일본식 요릿집을 이어받으면서 조선식 궁중요리를 내놓은 집이 바로 명월관이다.2)

이처럼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요릿집들은 매일 밤 성시를 이루어 장사가 잘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여기에도 골치 아픈 일이 차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찾아온 손님이 부르고 싶은 기생의 이름을 대면 일일이 연락해서 불러와야 했고, 한 기생을 놓고 신분의 고하가 있는 몇 사람이 서로 불러오라고 으르렁대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불려온 기생이 실수를 범하거나 손님이 너무 무례하여 시비가 벌어지는 날에는 요릿집 주인이 일단 책임을 져야 했으니, 무척 번거롭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편을 덜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기생조합이다.

 

이와 같은 이해타산 속에서 태어난 조합도 출신 지방별로 따로따로 모이게 되어 광교 쪽에 자리 잡은 광교기생조합은 서울 출신과 남도 출신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고, 다동기생조합은 거의 평양지방 출신인 서도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합이 일제에 의해 1914'권번'으로 바뀌게 되는데,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조선 기생 권번

명칭

권번

주식회사

대표

주소

한성(漢城)

1914

1936.9.10

안춘민

무교정92

대정(大正)

1914

1923.10.4

홍병은

청진동120

한남(漢南)

1917

-

송병준

공평동 65

경화(京和)

1917

-

신태휴

남부시동

대동(大同)

1919

1920.8.14

황희성

청진동120

경성(京城)

1919

1923.10.4

홍병은

인사동141-2

대항(大亢)

1919

1923.10.4

홍병은

인사동106

조선(朝鮮)

1923

1936.4.30

하규일

다옥정45

종로(鍾路)

1935

1935.9.11

김옥교

청진정164

삼화(三和)

1942

1942.8.17

 

낙원동164

 

 

서울의 권번

한성권번(漢城券番)1908년에 광교의 '한성기생조합'을 효시로 창립되었는데, 이 조합은 1패 기생중심의 약방기생으로 기생서방이 있는 '유부기조합'이었다. 후에 광교 한성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이름이 바뀐다. 1938년에는 주식회사 한성권번 부속 기생학교가 인가되었다. 당시 기생학교는 보통과(2), 본과(1), 전수과(1)가 있었으며, 입학 연령은 12세로 19385월 초 개교 계획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한성권번은 1942817일에 삼화권번(三和券番)으로 통합된다.1)다동기생조합은 1913년에 조직되어 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바뀌면서 뛰어난 명기들이 즐비하여 장안 명사들의 화제가 되고 인기의 초점이 되었다. 대정권번은 평양의 서방이 없는 기생, '무부기'들을 중심으로 기타 서울과 지방 기생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하규일 학감이 1923년 대정권번에서 나와 새로 만든 것이 조선권번(朝鮮券番)이다. 이 권번의 초창기로부터 1936년까지 교육시킨 기생이 무려 3천 명을 헤아렸다. 1942817일 삼화권번으로 통합된다.



일제강점기 조선권번 기생 사진(노옥화, 윤롱월, 이난향, 이화향)

 

한남권번도 역시 다동에 있었고, 1918년 경상도와 전라도 두 지방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창립되었다. 당시 남도에서 기생 수업을 받고 서울생활을 위해 올라오는 많은 기생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35년에는 영업부진으로 유명무실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조선 기생 권번

명칭

권번

주식회사

대표

주소

개명(開明개성(開城야명(夜明)

 

1935.11.10

권용락

개성부 서본정 320

계림(鷄林)

 

1930.3.15

손승조

경주읍 노서리113

광주(光州)

 

1932.4.10

김승동

전남 광주읍 남정 21

기성(箕城)

1924

1932.9.23

윤영선

평양 신창리36

남선(南鮮)

1922

-

-

마산부 오동동

남원예기(南原藝妓)

 

1939.3.5

이정근

전북 남원읍 쌍교리 140

단천(端川)

 

1940.6.6

이성렬

함남 단천군 단천읍 주남리9-6

달성(達城)

 

1927.1.6

겸용산

대구부 상서정 20

대전(大田)

 

1935.12.23

오재흥

대전부 본정2정목 85

동래예기(東萊藝妓)

 

1932.12.20

윤상직

경남 동래읍 교동 357

동래예기(東來藝妓)

 

1932.12.20

이병진

경남 동래읍 온천정 188

마산(馬山藝妓)

 

1939.11.21

김영우

마산부 오동동 26-4

목포(木浦)

 

1942.3.18

김광일

목포부 죽동 132

반용(盤龍)

 

1929.1.24

이희섭

함흥부 서양리 100

봉래(蓬萊)

 

1938.2.11

임선이

부산부 영주정 674

소화(昭和)

1928

1937.2.7

박재효

군산부 동영정 55

연안(延安)

 

1936.8.1

서수남

황해 연안면 연성리 132-4

원춘(元春)

 

1939.5.3

이순철

원산부 상리 225

인천(仁川)

 

1938.2.12

김윤복

인천부 용운정90-4

인화(仁和)

 

1935.8.9

김명근

인천부 용리 171

전주(全州)

 

1939.9.15

최병철

전주부 대화정

진주예기(晋州藝妓)

1928

1939.9.10

전두옥

진주부 영정 177

해주(海州)

 

1935.10.15

오돈근

황해도 해주읍 남본정 317

[네이버 지식백과] 지방의 권번 (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일제강점기 권번은 기능면에서는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규일이 운영하던 조선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과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댄스, 서화를 가르쳤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의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내었다.

 

평양기생 - 평양협판사진부 발행(Wakizaka Shoten. Heijio)

 

이를 좀더 자세히 보면 조선권번의 예기 중 경성잡가는 주영화(朱永化), 가곡과 조선무용, 그리고 거문고는 하규일, 이도잡가(而道雜歌)는 양서진(楊瑞鎭), 사교댄스는 윤은석(尹恩錫), 양금은 김상순(金相淳) 등이 담당하였다. 한성권번의 경우에는 경성잡가를 주영화, 서도잡가를 유개동(柳開東), 가곡을 장계춘(張桂春), 사교댄스를 김용봉(金用奉), 거문고를 조의수(趙義洙), 양금을 김영배(金榮培) 등이 담당했다. 종로권번은 경성잡가를 오영근(吳榮根), 가곡과 조선무용을 황종순(黃鐘淳), 서도잡가를 김일순(金一順), 사교댄스를 기룡(奇龍), 거문고와 양금을 박성재(朴聖在) 등이 가르쳤다.1)

 

옛 조선의 기생은 궁중 향연에 불리어 '선상기(選上妓)'가 되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권번의 기생과는 달리 금전과는 멀리 떨어져 깨끗한 기생도의 수양에만 온몸과 정신을 쏟았다. 하지만 권번의 기생들은 돈 많은 사나이들을 사귀지 못하게 되면 그날그날의 생활이 문제였다. 그들은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몸치장을 하여서 뭇 사나이들에게 잘 보여야만 그들의 생활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여기에 권번 기생에 비애가 있었다.2)

 

조선의 기생을 1·2·3패로 나눌 수 있었다. 1·2패는 기생, 3패는 준기생(準妓生)으로 능력에 따라 1·2패로 진급할 수 있고, 3패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이는 기생이 왕실이나 관아에 소속했을 때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1패는 관기, 2패는 관기에서 첩이 된 자 혹은 관기에 준한 예능의 소지자, 3패는 사창 등으로 보는 관점은 예능만으로 살 수 없게 된 19세기 말의 새로운 개념이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는 1패 기생은 궁중연회에 참석하는 기생으로 가장 훌륭한 기생들이고, 2패 기생은 고관대작들이나 선비들을 벗하여 노는 그 다음가는 기생이며, 이들만 진정한 기생이었다. 그리고 3패 기생이란 가장 천하고 추한 종류의 기생계층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매음도 하고 천한 짓도 마다 않았기에 이를 기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이 기준은 기생과 창기의 차이가 애매하게 된 시기의 개념이다. 이러한 혼란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되는데, 1·2·3패의 구분을 '기생단속령''창기단속령'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한 기생의 숫자는 조선 기생이 3413, 일본 기생이 4891명이었다. 조선 기생을 출신도별로 보면 경상남도 1139, 경기도 626, 평안남도 469, 충청북도 11, 강원도 12명이며 소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을 읽지도 못하는 기생은 2780명으로 80%나 되었다.3)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 유명하였던 요릿집 '명월관' '천향원' 등이 재개업을 하면서 전국 5천여 명의 권번 기생도 부활한다.

 

당시 서울 4대 권번은 삼화·한성·서울·한강 권번으로 예전과 같은 부흥을 꾀하지만, 미군정 시기에 일제 잔재인 '공창의 단속'에 맞물려 청산의 대상이 된다. 미군정 이후에 그 명맥을 서울 2대 권번인 한성·예성 권번이 이어받는다. 하지만 1948년 당국은 가무음곡을 금지하면서 '접대부'라는 제도로 권번 기생을 강제 편입시키게 되면서 기생은 우리 근대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기형적인 요정이 생겨나면서, 과거 밀실정치라고 지탄받은 '요정정치'나 일본인에 대한 기생접대 중심의 '기생관광' 등을 통해 기생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조선해어화사 저자 이능화|동문선 |1992.10

 

이능화 조선시대 고종6(1869) 충북 괴산에서 출생해 1943년에 사망했다. 자는 자현(子賢)이고 호는 간정(侃亭), 상현(尙玄), 무능거사(無能居士)를 두루 썼다. 개화파 이원긍(李源兢)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여 전통학문인 유학(儒學)이 아닌 외국어에 매진해 프랑스어·영어·중국어·일본어 등에 통달했다. 1906년에는 한성법어학교 교장으로서 외국어전문가 양성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전후로 인생행로를 학문 연구로 바꾼 후 한국의 종교와 민속 연구에 개척적인 업적들을 남겼다. 저술의 상당수가 산일(散逸)되고 현재는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조선여속사(朝鮮女俗史)』『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등이 한문으로 전해진다.

 

목차                

1. 신라때 이미 창녀가 있었다

2. 고려시대 기생의 기원

3. 교려의 여악

4. 고려군왕의 애기

5. 고려인사의 애기

6. 고려 사람의 향영시

7. 고려시기

8. 조선시대 기녀의 설치목적

9. 군왕과 종친이 기생으로 즐거움을 삼다

10. 봉명한 사신이 기생으로 즐거움을 삼다

11. 일반 조관이 기생으로 즐거움을 삼다

12. 조관이 기생을 첩으로 삼다

13. 조관이 기생을 두고 다투다

14. 기첩을 두면 반드시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15. 국휼에 기생을 데리고 노는 일을 법으로 금하다

16. 교생, 조랑이 창녀를 데리고 노는 해괴한 풍속

17. 방백과 수령이 기생으로 즐거움을 삼다

18. 명기생과 명유생

19. 천객과 소인의 기생을 대하는 정

20. 유학자과 기생

21. 반역한 장수가 기생을 사랑하다

22. 상객이 기생을 사랑하다

23. 어리석은 남자의 짝사랑

24. 대머리인 사나이는 기생이 싫어한다

25. 기생으로서 잊을 수 없는 다섯가지 자격

26. 사랑하는 사이에 헤어지는 과로움

27. 조선시대 인사의 향염시

28. 기녀의 지방적 특색

29. 재모와 이채가 있는 명기

30. 시가와 서화에 능한 명기

31. 해학을 잘하는 명기

32. 절기, 의기, 효기, 지기

33. 지난 날과 오늘알의 엽기 풍속 기생

34. 갈보 종류 총괄

 

 

노름마치 저자 진옥섭|문학동네 |2013.06.

저자 진옥섭은 전통예술 연출가이다. 그는 1964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연극을 하다 탈춤을 통해 전통과 춤에 빠져들었다고 전한다. 전국을 춤 기행하였고, 1990춤터 세마루를 만들어 활동했다. 1993년에는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는데, 지금껏 평론 쓰기보다 보도자료 작성에 더 몰두해왔다. 1993년 서울놀이마당의 상임연출을 맡았으며 1995년 서울 두레극장의 극장장, 2001~2003KBS <굿모닝코리아> PD로 활약했다. 기획사 축제의 땅을 만들어 <여기 심청이 있다>, <이 땅의 사람들>,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 등을 올렸고, 2006<풍물명무전>으로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의집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어 <유랑광대전> <팔무전> <시나위> 등을 올렸고 2012년 여수엑스포를 치렀다. 솔직히 손님 끄는 재주 하나로 지금껏 버티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보고픔도 극심한 허기의 일종이다

 

1. 예기(藝妓), 이화우 흩뿌릴 제

지평선에서 약속이 있다

춤추는 슬픈 어미, 장금도

춤을 부르는 여인, 유금선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 심화영

 

2.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천리 아랫녘으로 영남춤을 마중 가다

춤으로 생을 지샌 마지막 동래 한량, 문장원

밀양강변 춤의 종손, 하용부

우조(羽調) 타는 '무학도인(舞鶴道人)', 김덕명

 

3. 득음(得音), 세상에서 가장 긴 오르막

소리 소문을 보러 가다

백 년의 가객, 정광수

"적벽강에 불 지르러 가요", 한승호

초야에 묻힌 초당의 소리, 한애순

 

4. 유랑(流浪), 산딸기 이슬 털던 길

보릿고개 언덕 위의 하얀 부포꽃

포장극장의 소년 신동, 김운태

흰옷 입은 심청 엄니, 공옥진

마지막 유랑광대, 강준섭

 

5. 강신(降神),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네가 배워라

한양 만신을 찾아서

아직도 '왕십리 개미'라오, 김유감

본향 꽃밭의 길라잡이, 이상순

작두 타는 비단 꽃 그 여자, 김금화

 

6. 풍류(風流), '춤의 삼각지대' 사람들

춤의 고을 사람들

춤을 일구는 농사꾼, 이윤석

한려수도의 마지막 대사산이, 정영만

진주라 천리에 제일무, 김수악

 

에필로그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지더라도

 

봄이 오면 길을 떠났다. 손님이 많으면 박수도 좋았지만 밥상이 달라졌다. 하루 5회가 넘는 공연을 할 때면 오랜만에 비계가 뜬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 소년은 판굿의 소고꾼으로 뛰었고, 개인놀이 때에 '채상소고춤''열두발상모놀이'를 했다. 평균 잡아 1회 공연에 200회전 정도를 했으니 5회면 1000회전이었다. 큰 대야에 소금과 설탕을 타놓고 짬짬이 마셔 탈수를 방지했다. 때로는 너무 어지러워 아까운 고깃국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도 10회 정도를 공연할 수 있는 큰 축제를 기다렸다. 그중 경주의 신라문화제가 가장 가고픈 곳이었다. 흥행이 잘되어 몇 사람에게 한 마리 꼴로 삶은 닭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행이 성공하면 불청객이 먼저 왔다. '호남 오토바이' 였던 아버지의 명성으로 큰 건달들에게는 구애받지 않았지만, 읍내 유지의 자제들로 구성된 족보 없는 패거리는 늘 말썽이었다. 술값을 안 줘도, 공짜로 안 넣어줘도 면도칼로 포장을 찢었다. 레슬러였던 큰누나가 스습하면 남자랍시고 한사코 달려들었다. 결국 가라데촙, 메치기 등의 고난도 기술 맛을 봐야 끝이 났다. 고소를 할 경우 큰누나는 스커트를 입고 출두했고 그때마다 애처로운 표정으로 따라가 훈방을 유도했다. 그 또한 유랑의 일상이고 기술이었다.

 

어느 날 사내들이 찾아왔다. 이광수, 김용배, 이부산, 조갑용, 또복이 또수 형제 등 오늘날 명성이 자자한 풍물인이지만, 당시에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머물며 몇 가지 기술을 소년의 수중에 남겨놓고 떠났다. 그중 이광수는 진득한 사람이었다. 묵묵히 잡일을 했고, 겨울 '도야' 때는 집집을 돌며 비나리를 하여 단체를 먹여 살렸다. 사내다움을 배우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형이자 스승이 되었다. 훗날 이광수가 사물놀이로 세계를 돌 때 그의 머리 위엔 당시 호남여성농악단에서 눈으로 익힌 부포가 피어 있었다.

 

- 본문 252~253, '유랑(流浪), 산딸기 이슬 털던 길 : 회전의 역사' 중에서

 

기생 말하는 꽃 저자 가와무라 미나토|역자 유재순|소담출판사 |2002.05.

원제 妓生 : ものう文化誌

 

저자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溱)일본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자 호세이대학(法政大學) 국제문화학부 교수이다. 그는 1951년 홋카이도에서 출생했으며, 1982년부터 86년까지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일본어 및 일본 문학을 가르쳤다. 현재 그는 일본에서 한국의 문학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그의 시선과 귀는 늘 한국을 향해 있다. 그래서인지기생의 곳곳에는 그의 탁월한 식견과 한국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녹아 흐르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타향의 쇼와문학」「전후문학(戰後文學)에 대해 묻다」「바다 건너간 일본어」「만주붕괴(滿洲崩壞)」「바람을 읽고 물에 쓴다」「서울이야기등이 있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서

추천의 글

 

서문 완월동(玩月洞)의 유리창(琉璃窓)

완월동이란 동네

녹색마을(미도리마찌)의 기생들

어둠의 딸들

 

1장 기생의 역사

1. 기생과 기녀

해어화(解語花)의 역사

유녀기와 백대부

 

2. 왕과 귀족, 그리고 기생

고려여악(高麗女樂)

성종과 연산군시대

기생정치 · 기생외교

3.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나타난 갈보의 종류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

여사당자탄가(女社堂自歎歌)

 

 

2장 기생열전

1. 시기(詩妓) 황진이

황진이의 시조

황진이의 한시

 

2. 시기 명기(名妓)

기생들의 시

김삿갓과 기생들

 

3. 의기(義妓) 논개(論介)

기생과 왜장(倭將)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의 혈통

 

 

3장 상징화된 기생

1. 소설 속의 기생

성춘향

기생의 원씨명(源氏名)

 

2. 야담 속의 기생

외담(猥談) · 골계담(滑稽譚)

명기 가지(加地)와 남원의 기생

 

3. 회화 속의 기생

조선시대의 풍속화가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과 그 외

춘화 속의 기생

 

 

4장 기생의 생활과 사회

1. 하꾸우와 교시가 본 기생

슬픈 나라의 기생

다카하마 교시(? 虛子)조선

노기(老妓) 소담(素淡)의 집

 

2.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기생세견(妓生細見)

이진봉(李眞鳳)과 이경란(李瓊蘭)

 

3. 기생의 경제학

경성화류계(京城花柳界)

화대라는 노임

경성기생 자산 순위

기생과 경찰

 

 

5장 기생학교

1. 기성기생 사진집

기생양성소 규정

기생학교 시간표

기생학교를 방문하고

 

6장 농염한 기생의 자태[艶姿妓生] - 식민지와 기생 문화 -

1. 센류(川柳) 속의 기생

조선센류(朝鮮川柳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기생

기생의 아버지는 지게꾼

하이쿠(俳句)와 단가(短歌) 속의 기생

 

2. 일본인이 쓴 기생 소설

토끼와 기생

공감과 엇갈림

경성의 일본인 거리- 신마찌(新町)의 조선인 유곽

나미키의 갈보집

 

3. 기생잔영(妓生殘影)

사라져 가는 기생

종주국 남성과 식민지 여성

비애의 미의 본질

 

7장 기생의 도상학(圖像學)

1. 그림엽서 제작소

다이쇼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와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

 

2. 기생의 도상(圖像)을 읽다

머리모양과 의상

배경과 자세

자세, 표정, 구도의 의미

화보(그라비어)의 기생들

 

8장 현대의 기생

1. 해방 후의 기생

윤락행위방지법

양공주와 기생

 

2. 현대의 기생

풍속산업의 종류

특정지역

 

역자후기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기생이라는 특수한 예술가들의 존재는 삶 자체가 한 편의 슬픈 시였지만 현재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남성들을 위한 성적 존재와 신분적인 차별이라는 족쇄에 갇혀 있다.

 

기생은 봉건제 사회에서 천민 계급에 속했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수한 존재였다. 이 책에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이별과 만남, 슬픔과 즐거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일견 낡고 치부(恥部)한 역사여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문화이지만, 일본인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 때문에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구한말 · 일제시대 국학자인 이능화는 기생을 말을 풀이하는 꽃이라는 의미에서 해어화(解語花)라 지칭했다. 여성을 꽃이나 나비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을 동반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기생>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라는 책 한 권 뿐으로, 그는 기생에 대해 봉건 사회의 천인계급에 속했지만 위로는 왕후귀족(王候貴族)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외교나 국내 정치의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시가(詩歌)를 비롯한 전통무용의 계승자로서 그들의 일부 작품들이 계승 발전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생, 그들은 여가와 풍류를 즐기면서 남성들과 교유하며 웃음과 몸을 팔았지만 시()와 서()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애절한 시와 문장으로 달래며 기생이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현실을 문학으로까지 승화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이면에는 남성에게 성적으로 봉사한다는 기생의 본질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는 현재까지도 왜곡되고 은폐되어 왔다. 그녀들은 특별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인생의 길가에 서있는 존재로서 애절한 문장들을 남기고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기생문화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음에도 체계적으로 연구되지도 못하고 슬픈 역사로만 기억되고 있다. 기생이라는 존재자체가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을 비하하고 민족적인 비하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수치심 때문이었을까?

 

일본의 기생인 게이샤가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그 명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반해한국의 기생은 멸종됐고 그 역사에 대한 연구성과도 전무한 상황이다.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무언(無言)의 말하는 꽃들의 역사가 이방인의 눈으로 파헤쳐져 이제야 본고장에 들어왔다. 그것도 침략을 자행한 일본의 남성이라는 미묘한 역사적인 시각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기생과 근대 이후의 기생들, 그리고 근대 이전의 기생의 의미와는 다른 현대판 기생의 역사와 문화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그는 또한 방대한 역사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기생>을 식민지주의와 섹슈얼리티 및 성의 왜곡에 의해 형성된 특수한 문화로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기생에는 대체로 세 종류가 있다. 일패, 이패, 삼패가 그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일패이고, 이패란 상당히 낮은 지위로 예전의 고등내시 격에 해당한다. 삼패는 갈보라고 하는데 숙장여랑 또는 밤거리 매춘부 정도의 수준으로 지위가 가장 낮다. 지난해 기생들 사이에서 서양 우산(양산)이 수입되었을 때의 일이다. 일패, 이패, 삼패 할 것 없이 마치 서로 경쟁하듯 모두 진홍 우산을 사서 쓰고 다녔다. 그러자 일패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패와 삼패가 구별되지 않아 불합리하다고.

그러자 삼패가 말했다. “이쪽이 알 바 아니다. 돈을 내고 구입했는데 불만이라고 해서 참을성 싶으냐며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 분쟁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진홍은 일패에 한해서, 이패는 분홍색, 삼패는 그 외의 색깔로 정해서 마침내 결말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기생의 붉은 양산은 일종의 등록상표가 되었다. --- p.70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저자 이수광|다산초당 |2009.07.

목차

                  

머리글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

 

1은 열정이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여인들

1. 남자들을 내 치마 앞에서 무릎 꿇게 하리라 한양 기생 초요갱

2. 나는 이제 모든 남자의 꽃이 될 것이다 송도 기생 황진이

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소를 올리다 용천 기생 초월

4. 임금도 나를 소유하지 못한다 보천 기생 가희아

 

2는 사랑이다

운명을 걸고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던 여인들

5. 젖가슴 하나를 베어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단양 기생 두향

6. 한 세상 다 가져도 가슴에는 한 사람만 남아 영흥 기생 소춘풍

7. 몇 번을 사랑해도 불같이 뜨거워 부안 기생 매창

8. 사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성주 기생 성산월

 

3는 영혼이다

세상을 향해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여인들

9. 군복을 입은 기생, 결사대를 조직하다 가산 기생 연홍

10. 네 개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백성을 구하다 제주 기생 만덕

11. 물결이 마르지 아니하는 한 혼백도 죽지 않으리라 진주 기생 논개

12. 뭇 나비에 짓밟히지 않았음을 세상이 알랴 함흥기생 김섬

 

4은 이별이다

실연의 아픔을 감당해야 했던 여인들

13. 율곡 이이와 플라토닉 러브에 빠지다 황주 기생 유지

14. 풍류남아의 부질없는 약속을 믿다 평양 기생 동정춘

15. 천재 시인의 꺾여버린 슬픈 해바라기 함흥 기생 취련

16. 어찌하여 여자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부령 기생 영산옥

 

에필로그

기생, 길가에 피는 꽃을 찾아서

 

조선 팔도에는 남자들을 치마폭에 두고 휘둘렀다는 황진이 말고도 그 미모와 재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생들이 많았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여자의 몸으로 금기서화를 익히고, 사대부들과 자유롭게 교제했던 기생은 조선의 또 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특별한 계층이었다. 기생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꼿꼿한 선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기생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는 조선의 춤과 노래를 전승한 예인으로 조명되는 기생들에게는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색다른 면모가 많이 있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조선의 기생들을 단순히 요부쯤으로 생각했다면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오늘날로 보면 인간문화재이기도 했고, 패션을 선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고, 부를 쌓은 성공한 여성이기도 했던 기생들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본다.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데 탁월한 저자 이수광식 묘사로 기생들은 지금까지의 선입견을 벗고 조선이라는 시대를 살다간 젊은 여성으로 복원되었다. 단양 기생 두향은 퇴계 이황과 시경의 시를 나눌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세종조의 궁중 악무를 유일하게 전승한 초요갱은 당시에도 예인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에 기생들의 이야기는 조선을 뒤흔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의 역사에서 지금껏 기생들의 이야기는 배재되고 소외되었다. 저자 이수광은 지배층인 사대부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의 기생들을 살피는 것은 조선의 여성사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생들의 모습과 성향은 지방에 따라 달랐고, 그 수는 생각보다 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생생히 살아 숨 쉬었던 기생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이수광식 시각과 필체야말로 조선의 여인, 기생을 똑바로 바라보게 한다.

 

사랑을 하는 여자가 세상을 뒤흔든다!

여자이면서 천민이었던 기생들이 학문깨나 읽는다는 사대부는 물론 왕까지 쥐락펴락했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특히 춤과 노래, 혹은 시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기생들은 당대에도 만인의 관심을 받으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그것은 그들이 규방여인들보다 자유롭고,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유를 사랑했던 기생들

남자들을 내 치마 앞에서 무릎 꿇게 하리라한양 기생 초요갱

초요갱은 평원대군 이임의 첩이었으나 화의군 이영과도 정을 통했다. 소위 두 형제가 초요갱과 간통을 한 것이다. 그러나 초요갱은 두 형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계양군 이증과도 사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증 역시 세종의 아들이오,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초요갱은 마음이 가는 대로 많은 남자들과 교류했다.

임금도 나를 소유하지 못한다보천 기생 가희아

1407(태종 7) 한양 저자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백주대낮에 병력까지 동원되어 저자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이 패싸움은 기생 가희아를 차지하려는 금군총제 김우와 이를 저지하려는 대호군 황상이 벌인 치정싸움이었다. 이 사건으로 가희아를 첩으로 삼았던 황상은 파직되었고, 궁중연회에 동원되는 기생을 첩으로 삼은 많은 대신들이 탄핵되었다. 조정을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던 가희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꽃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 돌아다니는 나비 같은 여인이었다.

 

세상을 사랑했던 기생들

지키기 위해서라면 칼을 드는 것도 불사하겠다가산 기생 연홍

변경 지방의 기생들은 무예를 연마하여 사열을 하는가 하면 군사들과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외적이 침입하면 창을 들고 나가 싸우기도 했다. 가산 기생 연홍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가산을 지켜냈다. 감히 기생의 업적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적의 기세에 맞섰던 그녀에게서 남성 못지않은 기개와 용기를 엿볼 수 있다.

배고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나의 업이다제주 기생 만덕

제주 기생 만덕은 의술과 상술로 부를 축적했다. 옷 한 벌 버리지 않는다 하여 억척녀로 소문이 난 만덕은 제주도에 돌풍이 불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나가자 전 재산을 들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이후에도 만덕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구휼미로 백성을 구제한 만덕의 공을 지금도 칭송하고 있다.

 

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기생들

젖가슴 하나를 베어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단양 기생 두향

퇴계 이황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은 단양 기생 두향은 이황과 시를 나누고, 풍류를 함께 했다. 하지만 이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풍기로 발령이 나 떠나버렸다. 이제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두향은 퇴계를 그리며 수절을 선택했다. 이황이 그리우면 강선대 위에 올라 울었다는 두향은 끝내 일편단심의 마음을 안고 강선대에 몸을 던졌다.

어찌하여 여자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까부령 기생 영산옥

관기는 관가지물(官家之物)이라 하여 거취를 옮길 수도 없었고, 첩으로 삼아 주지 않으면 기생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마음대로 수절을 할 수도 없었는데, 수절을 하기 위해서는 관장의 혹독한 벌을 견뎌내야 했다. 부령 기생 영산옥은 첫사랑 서시랑을 떠나보내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켜냈다.

 

조선 기생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여정

저자 이수광은 조선을 뒤흔든 기생들 이야기를 쓰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퇴계 이황과 단양 기생 두향의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을 때는 때마침 매화가 피어 두향의 맑은 영혼을 떠올리게 했다. 조선의 기생들이 미모와 재능으로 화려한 꽃처럼 살았다고는 하나, 미처 피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수많은 기생들을 잊을 순 없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꽃이라 하여 노류장화(路柳墻花)라 일컬어지던 수많은 기생들은 신분의 굴레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노류장화라는 말에는 기생을 하찮게 생각하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멸시와 밤마다 술과 웃음을 팔아야 했던 여인들의 가슴 저린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딸도 기생이 되어야 했던 숙명과 같은 삶, 기생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몸부림을 쳐도 남자들이 만든 신분의 족쇄는 풀 수 없었다. 기생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자 혼을 실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귓전을 암암하게 울리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와 탄식, 슬픈 노랫가락과 혼을 실은 춤사위가 떠올라 내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화려함 속에 가려졌던 기생들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속으로

이황과 두향에 대한 출처 없는 전설은 다양하다. 다만 기록이 뚜렷하지 않을 뿐이다. 육체적인 관계가 없었을 뿐 이황과 두향이 깊은 사랑을 나누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 군수로 갈리게 되었다. 이황의 형이 충청관찰사로 부임하자 이황이 단양 군수를 사임하여 풍기 군수로 명을 받은 것이다. 두향은 이황과의 이별이 너무 서러웠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내와 이별하려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소인의 젖가슴 하나를 베어 사또를 향한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두향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젖가슴 하나를 베어내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래야 이황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잘라낼 수 있다는 처절한 고백이다. 단양 지역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옷고름을 잘라내어 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할급휴서(割給休書)라고 하여 남녀가 헤어질 때 옷깃을 잘라주는 풍습에 따라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젖가슴 하나를 베어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단양 기생 두향

 

남장하고 말 달리는 제주의 아가씨

연나라와 조나라의 풍류가 기방에 가득하네

한 번 금채찍 들어 푸른 바다를 가리키고

봄풀 자라난 석성 곁을 세 바퀴 도네

다투어 집집의 귤나무 바라보며

곳곳에서 준마를 달리네

아리따운 아가씨를 훈련시켜 북방으로 보내

진작 무부에게로 시집가게 하리

 

제주도의 말 달리는 기생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신광수의 시다. 눈을 감고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려보자. 때는 꽃피는 춘삼월, 제주의 기생들이 남장을 하고 말을 달린다. 채찍을 휘두르는 기생들의 목소리가 바닷가의 초원에 울려 퍼지고 석성을 도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 집집마다 심어 놓은 귤나무를 바라보며 곳곳에서 말을 달린다.

군복을 입은 기생, 결사대를 조직하다 가산 기생 연홍

 

취련은 함흥에서 문장이 뛰어난 명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까닭에 이백의 시를 인용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취련은 서명빈에게 애타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취련은 답장을 기다리다가 지쳐 천릿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서명빈은 취련을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자 취련은 울면서 함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명빈은 취련을 함흥으로 떠나보내면서 다시 한 번 거짓 약속을 한다.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러 갈 터이니 몸을 함부로 하지 마라.”

지키지 않을 약속이지만 여자는 그 말을 천금처럼 믿는다. 믿지 않으면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해지기 때문이다. 취련이 한양에서 함흥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쓸쓸하고 비참했다.

천재 시인의 꺾여버린 슬픈 해바라기 함흥 기생 취련

 

초요갱은 궁중악의 유일한 전승자로 박연의 수제자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초요갱은 기생이라기보다 궁중예술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높은 긍지를 가지고 명성이 쟁쟁한 사대부들을 눈 아래로 보았다. 한양의 선비 최세원이 초요갱의 명성을 듣고 구애를 했으나 초요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세원은 이를 갈고 있다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유가(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3일 동안 장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시키던 일)를 하면서 장통방으로부터 내려왔다. 최세원은 검붉은 말을 타고 초요갱의 집 앞에 이르러 우부에게 말했다.

 

잠깐 들을 말이 있으니, 너는 소리를 높여 어허랑(유가 때 배우들이 부르던 노래)을 불러라.”

최세원의 지시에 우부들이 일제히 어허랑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내다보자 초요갱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초요갱은 검은 머리를 되는 대로 꽂아 올리고 동백기름이 흐르는 초록색 겹옷을 입은 채, 붉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네가 항상 교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오늘 일은 과연 어찌된 일인가. 내가 예조 좌랑이 되면 너는 나의 종아리채를 감당해 내겠느냐.”

 

최세원이 한껏 거들먹거리며 초요갱에게 호통을 쳤다. 궁중악을 담당한 부서는 예조다. 궁중악의 책임자가 되어 초요갱의 엉덩이를 때리겠다는 최세원의 심보는 가소롭기까지 하다.

! 이제야 엉덩이 위에 먼지를 털게 되었구나.”

 

초요갱이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초요갱은 장원급제를 하여 서슬이 퍼런 최세원의 위협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요갱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자들을 내 치마 앞에서 무릎 꿇게 하리라 한양 기생 초요갱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근대 기생의 탄생과 표상공간 글 이경민|그림 사진아카이브연구소|아카이브북스 |2005.02

이경민 한국 사진사 연구에 관심을 두고 사진 평론과 전시 및 출판 기획 등의 일을 해온 이경민은 현재 사진아카이브연구소(http://cafe.naver.com/fotoarchives.cafe)를 운영하면서 근대 사진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여 2005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사진비평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전시기획자를 대상으로 주어지는 '이동석 전시기획상'을 첫 회(2008)에 수상하였다. 기념사진전(문예진흥원미술관, 1999), 다큐먼트전(공동기획, 서울시립미술관, 2004),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대안공간 풀, 2004), 우리사진의 역사를 열다(한미사진미술관, 2006), 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일민미술관, 2007), 오월의 사진첩(광주시립미술관, 2008) 등의 사진전을 기획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사진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프랑뎅의 사진 콜렉션을 통해 본 프랑스인의 한국의 표상,잔더가 본 100년 전 한국의 풍경지리 등이 있으며, 지은책으로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공저),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구보씨, 사진 구경가다,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구보씨라는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전문적인 산보객이자 관찰자로서 다종다양한 근대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경성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복원·재구성하는 대경성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읽어내려는 엄청난 시도를 꾀하고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왜 기생사진인가? / 표상공간으로서의 근대, 그리고 기생

1. 기생의 표상공간과 조선미인보감

기생사진아카이브의 전형, 예단일백인

시각적 감시망으로서의 기생사진첩

근대적 기생제도의 확립과 억압기제

[사진자료] 기생의 복식, 기생의 초상

2. 위생담론과 기생의 신체

위생담론과 신체권력

매일신보를 통한 위생담론의 확산

세균설과 위생학의 시각주의

기생철폐론과 사회적 타자만들기

[사진자료] 기생의 춤과 음악

3. 식민주의 민속학의 대상이 된 기생

재현되는 조선의 풍속과 기생

풍속조사의 대상이 된 기생

[사진자료] 기생의 제도와 교육

4. 박람회로 간 기생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경연장, 박람회

박람회와 기생의 재현

기생의 발견

[사진자료] 기생의 공연무대

5. 기생의 경제학

조선실업시찰단과 기생

철도와 기생산업

상품화되는 기생

[사진자료] 기생의 일상과 여가, 기생과 조선이미지 창출

(나오는 말)

(보론) 가와무라의 말하는 꽃, 기생을 말함

 

전근대성의 표상으로서 기생 이미지가 완성되자, 이제 '이미지 기생'은 식민지 문화상품으로 물신화되거나 근대성의 이항대립적 타자로서 각인되어갔다. 즉 식민지 근대화 과정 속에서 기생은 한편으로 는 전통문화상품(특히 복식과 관련해서)의 코드로서 이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산해야 할 전근대적이고 전통적인 잔재로 치부되는 등 이중적으로 기획되었다.- 본문 201쪽에서

 

엽서속의 기생읽기 저자 국립민속박물관|민속원 |2009.01

발간사

전통공연계승자로서의 기생

-기원과 기생학교

기생의 기원과 호칭

권번 기생의 모습

평양 기생학교

가수 왕수복

-일제강점기 대중예술의 꽃

궁중무의 계승

민속춤, 승무와 살풀이 춤

기생의 신 춤

샤미센과 레뷰댄스

기생의 무대

-요릿집과 기생 엽서

기생엽서

제국주의 시각으로 본 기생 엽서

요릿집과 진통공연

'명월관'브랜드

20세기 패션리더, 기생

-기생의 차림새

-패션리더 기생

논문

-전통공련 계승의 관점에서 본 권법 기생 고찰 박미일, 신현규

-기생 엽서 속의 한국 근대춤 김영희

자료목록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단절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적 경제의 파행성과 왜곡된 근대화 과정 등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과거사 청산은 사회사적 검토의 대상으로 일제시대 '기생'의 이미지도 포함하고 있다. 기생을 매음하는 창기로 자리 잡게 한 것은 일제의 치밀히 계산된 문화침략 중의 하나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광범위한 직제 개편을 위해 기생들에게 일본제국 군대와 일본인을 위한 매춘의 사회화를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기생단속령''창기단속령'이라는 지침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는 일본의 윤락녀 이미지로 차츰 탈바꿈하게 된다. 10

 

그러나 우리나라 권번 기생은 대한제국 황실의 관기 예악문화를 전승하고 보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들은 현금, 가야금, 장구, 아쟁, 해금, 대금, 소금, 가곡 등의 기악과 성악은 물론 궁정무용인 춤, 가인전목단, 선유락, 항장무, 포구락, 무고, 검무, 사자무, 학무 등의 정재와 그 밖의 글씨와 그림을 익혀온 예악문화의 실현자이자 종합예술가들이었다. 특히 1920년대 초반에 서양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춤, 서양춤 할 것 없이 모든 춤을 기생들이 추었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졌다. 전문 음악가이자 무용가라고 할 수 있는 종합예술가들이 바로 당시 기생들이었기에 전통문화예술을 발전시켜온 주역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10

 

기생의 어휘에서 ''은 어떤 생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터 정확하게 '기생'의 어휘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중기부터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사대부와 기녀의 관계는 밀접했기에 유사한 방식의 어휘와 소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생'은 글을 써서 생계를 삼아 공부하는 사람이고, '유생'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은 선비라고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기생''기업(妓業)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기녀'라 할 수 있다. 174

 

"신라 중엽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는데, 이것이 기녀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신라본기'에 제 24대 진흥왕 37(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능화는 이로 미루어보면, 원화는 오늘날 기생과 같은 것이고 화랑은 오늘날 미동과 같은 것이고 풍류낭도는 오늘날 외입장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에 장덕순은 "애초의 원화제에서 남자 300명 속에 낀 두 미인은 남자들의 총애를 받으려고 서로 경쟁했을 것이 뻔했고, 그래서 죽이고,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것은 미상불 기생족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원화의 신화적 기록에 의하면 그 역할은 무녀와도 그리 거리가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물론 '서로 아름다움을 질투하였다'는 문구와 상징적으로 두 여인을 뽑아 무리를 이끌었다는 것도 무녀기원설과 서로 통한다. 175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변화에는 기생에 대한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도 들어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적어도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182

 




평양기생 왕수복 기생이 쓰는 기생 이야기, 10대 가수 여왕되다 저자 신현규|경덕출판사 |2006

 

목차

평전을 시작하며

 

1부 왕수복 평전

1. 평양 기생학교 시절

2. 첫 전성기, 10대가수와 여왕

3. 성악가 길에서 만난 두 남자

그에게 보내는 편지 - 이효석 선생을 그리워하며

내 인생의 두 번째 남자 - 노천명의 약혼자이던 김광진

4. 두 번째 전성기, 북한 민요가수 여신

5. 체제 선전을 위한 삶의 마무리

 

2부 왕수복 관련자료

1. 평양 기생학교 관련 자료

2. 첫 전성기, 10대가수 관련 자료

3. 성악가 길에서 만난 두 남자 관련 자료

4. 두 번째 전성기, 북한 민요가수 여신 자료

5. 체제 선전을 위한 삶의 마무리 관련 자료

 

3부 왕수복 연보

1. 왕수복 연보

2. 왕수복 노래 작품 목록

 

평양기생 왕수복(1917~2003)! 그는 마지막 평양기생이었고, 최초의 대중연예인으로 성공했고,

분단 뒤에도 북한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화려하게 살았다.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 일제 강점기 연예인이 된 기생 이야기 저자 신현규|어문학사 |2010

 

목차

머리말 3

1부 일제 강점기 연예인演藝人이 된 기생들

조선 문화 홍보대사, 명월관 기생

명월관 1호실의 놀음기생 13 | 메이저리그 선수단과 명월관 기생의 첫 만남 20 | 요릿집 명월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1)-황토현 시절 33 | 요릿집 명월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2)-명월관 별관 태화관과 3·1 독립선언문 36 | 요릿집 명월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3)-돈의동 본점과 서린동 지점 시절 40 | 요릿집 명월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4)-광복 후 현재 42 | 일본 동경의 명월관과 지방의 프랜차이즈 명월관 44

 

근대 대중문화계를 뒤흔든 샛별

근대의 대중스타, 기생 53 | 1920년대 대중음악을 꽃 피운 명기·명창 54 | 대중스타로 등장한 평양 기생, 10대 가수여왕 왕수복 56 | 영화, 패션, 광고 등으로 종횡무진하는 기생의 활약상 60 | 놀랄 만한 권번 기생의 수입 63 | 웃음을 파는 이유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하는 현실 63

 

사진엽서 속에 담긴 기생과 식민지 조선

일제 강점기 최고 히트상품, 기생 사진엽서 69 | 제국주의와 히노데상행의 기생 사진엽서 76

 

그림 같은 자태의 기생, 전람회 모델이 되다

그림 모델의 효시, 권번 기생 일화 81 | 근대 조선미술계를 좌지우지한 조선미술전람회 84 |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그린 <춘향초상그리고 <간성>, <미인도86 | 춘향의 입혼식, 권번 기생의 명창 대회 88 | 기생 민산홍과 <푸른 전복, 기생 권부용과 <승무97 |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의 <가야금을 타는 여인> 101 | 화가와 기생 딸의 만남 102

 

모던걸, 신여성의 심벌이 되다

봉건사회의 표상에서 신여성으로 108 | 족쇄 같은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다 110 | 기생의 자유연애론, 기생 강명화의 죽음의 연애 114 | 독립운동 물결에 선봉으로 나서다 122 | 사회·노동운동가로서 투쟁한 기생 132 | 기생의 파업 노동운동 139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비운의 조선 여배우 4

여자로서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선 배우, 기생 이월화 146 | “웃음 속에 피어나는 눈물의 배우, 기생 석금성 154 | 영화 <아리랑>이 만들어낸 스타, 기생 신일선 160 | 조선영화계 유일의 화형花形 여우女優, <별건곤> 162 | 팜므파탈의 인텔리 배우, 기생 복혜숙 168

 

일제 강점기 여성들의 워너비 모델

연예인 뺨치는 유명 기생의 광고 효과 177 | 1920~30년대의 김태희 등장, 기생 장연홍 179 | 당대 최고의 인기와 미모를 증명하는 광고의 꽃,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다 181

 

타고난 방송 체질’,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하다

기생 중심의 경성방송국 190 | 조선 유행가를 최초로 일본 전역에 중계방송으로 알리다 192 | 조선 근대음악사를 새로 쓴 대중가수 기생 197

문학을 사랑한 기생, 문인과 사랑에 빠지다기생 왕수복과 작가 이효석의 사랑 이야기 202

 

2부 전문 연예인演藝人의 기예를 닦다

공연예술가로서의 기생과 레뷰 댄스

양악대와 서양 춤에 적응하는 권번 기생 214 | 경성에 레뷰 극장이 생기다216 | 레뷰 댄스와 덴까스 219 | 레뷰 춤 대중화의 시대를 열다 220 | 우리식의 레뷰 무대를 연출한 권번 기생 223

 

한국 전통무의 전승자, 기생

궁중의 왕에서 저잣거리 서민을 위하여 231 | 한국 무용사에서의 권번 기생 춤의 위상 233

 

기생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전통악기의 선율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 기예 239 | 양금과 샤미센 연주 기예 241 |

기생 자선 연주회, ‘온습회’ 246

 

연예 매니지먼트사, 권번

전통예술의 계승, 교방에서 권번으로 249 | 연예인의 기획사 역할을 한 권번 251 | 권번의 탄생과 그 영욕의 세월 252 | 전통공연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255

 

조선왕조와 함께 스러져간 관기

관기의 탄생 259 | 관기의 폐지 변모는 조선의 아픈 역사성을 말한다 260 | 기생집에서나 볼 수 있게 된 관기 266 | 관기에서 권번 기생으로 267

 

평양 기생학교의 예비 기생들

일제 강점기 관광명물, 평양 기생학교 271 | 전국 팔도에 유일한 평양 기생 양성소 273 | 평양 관기학교와 노래서재 그리고 기생학교 275 | 평양 기생학교의 교과과정 277 | 평양 기생학교의 시대 변화 281

평양 대동강의 기생 뱃놀이 286

미주 289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가혹한 침탈을 당하던 시대부터 시작하였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조선의 정치, 문화, 예술, 사회 각 방면에 걸쳐 일본식 근대화를 이식시켰다. 그들의 근대화는 오직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수행하기 위해 대량의 군비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군수 공장을 조선에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 각계에 근대화 추진에 걸맞은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의 전통 기예의 육성과 계승을 담당하던 기생은 일제 시대의 근대화를 거치며 그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들은 기생이란 이름 대신 조선 최초의 연예인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연예인이란 말은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던 단어이지만, 연예인의 행태를 띤 기생들이 등장하였다. 전근대의 기생들은 근대화 과정의 모순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갔다. 조선시대의 전통무용이나 음악, 노래만 담당하던 기생이 음악기생, 무용기생, 극단 여배우, 대중가요 가수, 화초기생, 항일기생 등으로 분화되어 사회의 각 분야에서 신여성으로서의 놀라운 활약상을 펼친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끌어가고 육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연예인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체계화된 비즈니스 산업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스포츠, 외교,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방면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러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원형이 일제시대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 문화 홍보대사 역할을 한 명월관 기생, 사진엽서와 전람회의 모델로 활약한 기생, 영화연극 부문에서 여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탄 4인의 기생들, 대중가요 가수와 광고모델로 국민적 인기를 얻은 기생 등 당대 기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살펴보면 오늘날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한 연예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근대의 빛을 받아 화려한 인생을 살면서도, 왜곡된 근대의 그늘로 인해 고통 받는 인생을 살았던 일제시대 기생들의 삶을 21세기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탄압이었고,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으로 영구 예속화를 의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 사회는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의해 강제된 근대를 체험하게 된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에게 다가온 근대의 모습은 라디오, 축음기, 영사기와 같은 발명품, 혹은 미술 전람회, 물산 박람회, 운동회, 영화관, 유람단, 광고 모델 등이었다. 여기에서 권번 기생의 화려한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고관대작들이나 학자들의 회합에서만 하더라도 기생이 나오지 않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연예인의 효시가 되는 기생들은 전통 예악문화의 계승자이면서 근대적 연예인이었다. 라디오 방송에 권번 기생을 빼놓고는 방송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축음기의 SP레코드는 권번 기생 출신 대중가수들,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 등에 의해 폭발적인 판매를 이룬다. 영화의 여배우로 당시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기생은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 등이었다. 그리고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한 기생 신일선도 빼놓을 수 없다.

 

초창기 미술 전람회의 모델도 권번 기생이 거의 장악할 정도로 중요했다. 조선 물산 박람회에서는 공연과 여흥의 중심을 차지했다. 신문 및 잡지의 광고 모델로서는 장연홍, 노은홍, 김영월, 김옥란 같은 기생들이 매력적인 존재였다. 요즈음 행사 도우미처럼 각종 행사에는 기생의 공연이 늘 한결같이 따라다녔다. 더구나 레뷰댄스의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도 바로 기생이었다.

 

근대 대중문화계를 뒤흔든 샛별

조선 문화 홍보대사, 명월관 기생

궁중에서 일할 수 없게 된 관기들은 대다수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요릿집 중에서도 잘 알려진 명월관은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 프랜차이즈까지 내면서 크게 번창한다. 당시 경성은 조선의 수도로 내외인의 교류가 빈번했는데 마땅히 음식을 대접할 만한 요리점이 없었다. 그때 생긴 명월관은 청결하면서도 신식의 요리점으로서 조선식의 궁중요리를 선보였다. 또한 큰 규모의 환영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서도 으뜸으로 인식되어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거의 명월관에서 회합을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명월관 안에서 활동하는 명월관 기생 역시 유명세를 누리며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전통 문화나 관습 등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단순히 여흥을 즐기기 위한 보조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스포츠 선수나 요직의 인사들과 가까이 교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는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본문 p.45

신문 광고 문안 <동아일보> 1932110일자

 

일본 제일의 조선요리

동경東京 명월관明月館

동경 시 고지마치 구麴町區 나가타 초永田町(山王下)

전화 긴자銀座 57-0057, 57-3009

 

최고의 역사를 두고 찬란한 광채를 가젓든 우리 문화가 세월의 추이됨을 따라 부지중 소멸 되어감은 누구나 다 통탄하는 바이외다. 그 잔해(殘骸)의 일부나마 외인(外人)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것이 해외에 있는 우리들로서 마땅히 할 의무의 한 가지가 아닌가. 확신하여 통속적으로 고국을 선전하는 기관으로 명월관을 경영하던 바 사회의 동정과 원조를 받아 소기(所期) 이상의 성과를 얻었음으로 그의 일단을 보고함도 무익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중략)

 

특히 저자는 1922129일 미국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 야구 시범 경기를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사례를 들어, 명월관 기생과 미국 야구 선수단의 이색적인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명월관 기생들의 본분이 유명한 노래를 부르고, 아름다운 춤을 추어 귀빈들의 심신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기생들이 미국직업야구선수단에게 조선 춤의 대표인 검무, 승무 외에도 사고무, 춘앵전 등의 춤사위를 선보여 미국선수단을 매혹시켰다고 하니, 조선의 전통 춤과 음악을 알리는 문화 홍보대사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제 강점기 최고 히트상품, 기생 사진엽서

일제시대 조선왕조와 함께 관기는 스러져 갔다. 관기는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인 예술가였다. 하지만 1908915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관기 제도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기생에 대해 철저한 통제와 감시를 하여 공연 예술가로서의 기생을 몰살한 것이다. 이윽고 일본의 제국주의는 기생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은 관기의 모습을 사진엽서에 담아 팔았는데,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예인 브로마이드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사진 속 기생의 이미지는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되어 소비된 것이었다. 가장 최초의 근대 관광 산업의 부산물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전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치욕의 상징이었다.

 

모던걸, 신여성의 심벌이 되다

당대 기생들이 하나 같이 유흥을 즐기기 위한 문화 예술 활동을 펼쳤던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근대사회에서 여성들이 봉건사회의 폐쇄된 활동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사회활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때 사회진출에 눈 뜨기 시작한 신여성으로서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기생이었다. 기생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이라든가 수재민 구호작업, 조선물산장려운동, 파업노동운동, 모금운동, 기부 등 사회운동에도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 물결에 선봉으로 나서다

술과 웃음을 팔아 모은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낸 인천 상봉루의 9명의 기생,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부른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형인, 남편 현정건을 따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한 현계옥(玄桂玉) 등 수많은 기생들이 조선의 독립투사로 활동하였다.

 

사회·노동운동가로서 투쟁한 기생

이뿐만 아니라 1925년 한강이 범람하였던 을축년 대홍수 때 수천의 가옥이 유실되고 사상 최대의 수재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 최초의 여기자 추계 최은희 지도로 명월관 기생들이 동원되어 수재민 구호작업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920년대 기생들은 사회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재주를 자선행사와 모금운동 등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공연 수입으로 수해의연금 또는 유치원 기금 등에 내어놓은 것이다. 1936년에 안악권번의 기생 최금홍崔錦紅은 안악에 고등 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은 돈이나마 써달라고 하면서 현금 100원을 희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생들은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그들에게 덧씌운 유녀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사회의 공익을 위해 일하는 당당한 일원으로서 비춰지길 원했다.

 

기생의 자유연애론, 기생 강명화의 죽음의 연애

한편 당대 기생들을 신여성, 모던걸이라 부르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자유연애자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자유연애는 일반 여염집 여성들보다는 기생들에게 훨씬 더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자유연애의 시초로 잘 알려진 인물로는 이미 여러 매스컴에서도 잘 알려진 강명화가 있다. 당시 강명화의 이야기는 일제가 구국운동의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의 자살을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보도한 면도 없지 않으나, 기생이라는 꼬리표가 그녀의 삶에 평생토록 따라다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고, 그녀에 대한 책도 출판되는 등 큰 이슈를 불러왔다.

 

본문 p.115

또 강명화는 당시 여자의 몸으로 단발을 하고 손가락을 잘랐다 하여 세간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발과 단지(斷指) 같은 독한 행위를 감행한 동기도 역시 연인 장병천을 위한 것이었다. 장병천이 기생의 몸인 자기의 신용을 믿지 않을까 의심하여 삼단 같은 머리채도 아낌없이 잘라버리고, 병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손가락 하나쯤 잘라내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기생 강명화의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회자되어 당시 자유연애의 한 단면을 짐작하게 한다.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비운의 여배우 4

한편 영화, 연극 부문으로 진출한 기생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당시 영화 여배우로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기생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 등과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한 기생 신일선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하여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화려한 전성기와는 달리 기구한 운명 탓에 외로운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여자로서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선 배우인 기생 이월화,



이월화는 여배우가 등장할 수 없었던 인습을 깨고 최초로 카메라 앞에 등장하였다.

그녀는 조선 키네마 최초의 영화 <의 비곡悲曲>(1924)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영화의 초창기에 여배우를 쓰는 일조차 획기적이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타락한 여성이나 남자들의 싸움에 희생되는 청순가련형이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던 때, 연극배우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영화배우로 성공했던 것이다.

 

웃음 속에 피어나는 눈물의 배우, 기생 석금성

 

본문 p.154~155

 

석금성은 신극 초창기 여배우의 한 사람으로 타계할 때까지 인기를 누린 최장수 여배우였다. 무성영화와 흑백·컬러 영화 시대 및 텔레비전 시대를 섭렵한 한국 영화계의 증인이었다. 그녀는 1925년 광무대(光武臺) 공연의 <추풍감별곡>의 주역인 추향(秋香)을 맡아 데뷔 공연을 가진 뒤 <간난이의 설움>, <스잔나>, <카추샤>, <희생하든 날 밤>, <춘향전>, <산 송장>, <쟌발쟌>, <혈육> 등에 출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첫 무대부터 개성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연극 무대의 신데렐라로 선배 복혜숙과 쌍벽을 이루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과 재혼했는데, 그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한국 최초의 PD’로 불린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뒷바라지하며 8·15 해방 후에도 월남하지 않자, 19484남매를 모두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아리랑>이 만들어낸 스타, 기생 신일선

 

본문 p.162

 

신일선을 대형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바로 처음 출연한,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명작인 <아리랑>이었다. 4개월 만에 만들어진 <아리랑>이 개봉되자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됐다. 그 후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전국 방방곡곡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아리랑>이 만들어진 1926년 한 해,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풍운아>와 이경손이 만든 <봉황의 면류관>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27년에는 <괴인의 정체>, <들쥐>, <금붕어>, <먼동이 틀 때>에 출연했다. 1926년과 1927, 두 해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신일선이 총 7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팜므파탈의 인텔리 배우, 기생 복혜숙

복혜숙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3년까지 마치고, 일본 요코하마의 고등여자기예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토월회>에서 10년간 신극운동을 하다가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재원이었다.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 금성학교 교원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는데, 연극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가출한 뒤 서울의 단성사를 찾아간다.

여배우가 귀하던 당시, 복혜숙은 거의 같은 무렵 연기 생활을 시작한 이월화(李月華)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여배우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토월회, 조선극우회, 조선영화사의 단원으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라디오 방송 성우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복혜숙이 1928년 인사동 입구에 개업한 비너스라는 다방은 영화인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연극인, 문인, 신문기자들도 단골로 출입했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품으로는 1973년 최하원 감독의 <서울의 연인>이며 TV드라마는 주인공 안인숙의 할머니 역으로 나왔던 동양방송 TBC TV<사슴 아가씨>였다.

 

일제 강점기 여성들의 워너비 모델

오늘날에는 TV광고가 가장 대중적이고 효율적인 광고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신문광고가 가장 대표적인 광고매체였다. 이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광고모델은 A급 모델로서 유명 스타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기생이 등장하는 신문광고는 거의 대부분이 미용 제품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샴푸, 비누, 화장품() 등의 광고에는 대부분 기생이 등장한다. 기생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생이 등장하는 샴푸 광고와 화장품 광고는 곧바로 대중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광고모델인 기생은 일반 여성들에 비해 미용과 패션, 화장 등 미적인 면에서 월등히 시대를 앞서나가며 유행을 선도해 나갔다. 1920~30년대의 김태희인 얼짱 기생 장연홍은 당대 최고의 화초기생(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화장품 신문 광고. 김월색, 최옥희, 강연화가 등장하는 화장품 광고 기생)답게 아름답고 복스런 웃음을 가져,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를 강조해야 하는 비누나 신제품 화장수에 잘 들어맞았다. 서울권번의 기생 김화중선(金花中仙)의 비누 광고도 뛰어났다. 노은홍을 모델로 등장시킨 화왕샴푸광고는 그녀의 미발의 비결을 화왕샴푸라고 소개한다(일주일 화왕샴푸로 세발하면 기분을 명랑케 하고 발륜을 빛나게 합니다). 기생의 활약은 단지 미용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김월홍, 이금도와 같은 기생은 각각 치약이나 옷을 보관할 때 쓰는 좀약과 같이 생활과 밀접한 용품의 광고에도 등장하였다.

 

타고난 방송 체질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하다

기생들은 그들의 기예를 TV방송, 연극, 영화, 라디오를 통해 발산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나 TV방송을 통해 그들의 타고난 노래 실력이나 입담을 전하여 대중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였다. 기생들은 방송국이 들어서고, 음악방송이 시작되고, 음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하였다.

 

본문 p.54~55

레코드 산업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기·명창들이었다. 1925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의 일본 유행가를 처음 우리말로 부른 노래인 <시들은 방초>를 취입한 사람이 기생 도월색(都月色)이었다. 또 하나의 대중가요 <장한몽>은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는데, 그녀 역시 기생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 레코드 산업이 본격화되자, 당대 명기·명창들은 서둘러 레코드 업계로 진출한다.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한 대표적인 여가수로는 왕수복이 있다. 레코드 판매 매수도 조선 레코드계에 있어서 최고를 기록했다. 이외에도 선우일선, 최연연, 김연월, 한정옥, 김복희, 최명주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왕수복은 일제 강점기 권번 출신의 인기 가수로, 신민요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유행가나 신가요와 같은 새 노래들을 부른다. 1930년대 후반 비권번 출신의 신진 남녀 가수의 등장 이전까지 작사자와 작곡가에 의해서 창작된 유행가와 신가요의 가수로 활약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가요사의 전환기적 임무를 수행한 주인공이다. 뒤를 이어 등장한 비권번 출신의 신진 남녀 가수들이 주로 유행가와 유행소곡 또는 신가요의 가수로 데뷔했다.

기생은 조선의 근대음악사를 새로 쓴 대중가수이기도 한 것이다.

 

2부 전문 연예인(演藝人)의 기예를 닦다

공연예술가로서의 기생과 레뷰 댄스

 

본문 p.213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 예술의 춤사위 계승자는 권번 기생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관기들이 민간으로 나오면서 요릿집 무대에서 궁중 무용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이쇼 시대(1912~1925)에 재즈(jazz)와 서양 댄스가 수입된다. 이때 유학생들은 고풍스러운 기생의 요릿집이 아니라 댄스홀, 카페, 다방으로 몰려간다. 이 때문에 기생들의 춤도 변한다. 손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연 춤사위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뷰 춤이란 레뷰(Revue)에서 추는 춤을 말한다. 레뷰는 드라마, 희극, 오페라, 발레, 재즈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취하고, 음악과 춤을 뒤섞어 호화찬란한 연출을 하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레뷰 춤은 전문적인 발레나 모던 댄스가 아니고 쇼에서 추는 흥미 위주의 춤이었다. 무거운 주제나 소재를 다루기보다는 관객의 관심을 끌만한 가벼운 테마를 화려하고 재미있게 다룬 춤을 말한다.

 

쇼쇼쇼의 한 장면

우리나라의 레뷰 춤은 1913년 덴까스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후, 1920년을 전후해서 사교춤, 외국 민속춤 등의 서양 춤이 다양하게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대개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따라서 덴까스 곡예단이 추었던 춤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레뷰 춤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반까지 덴까스 곡예단에 의해 추어진 <서양춤>, <우의무> 혹은 <호접무>, <바다의 마녀>, <청춘댄스>, <역광선을 이용한 댄스> 등은 우리나라에서 추어진 레뷰 춤들이다. 1930년대에 악극이 등장하면서 재즈나 탭댄스가 추어져 기생들이 레뷰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레뷰 춤은 대중화되었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후반까지 레뷰 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기생들이 레뷰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된 것이다. 레뷰 춤은 일제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 명맥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

 

본문 p.227~228

그러면 그 레뷰 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흔적을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196412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1MC50분 동안 진행한 쇼쇼쇼프로그램이다. 동양방송(TBC)의 개국과 함께 시작되어 19838월까지 방영한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동양방송은 다른 방송국보다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그때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바로 쇼쇼쇼였다.

 

기생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전통악기의 선율

오늘날 국악에서 여성 음악가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 배경을 논함에 있어 일제 강점기 기생의 활약상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여류 명창 중에는 기생 출신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진정 예술가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회적 차별의 한 단면이었다. 창악계에 떨친 기생들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본문 p.238

이처럼 권번 기생들은 각종 공연을 통하여 전통예능교육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 공연의 명목은 음악무도대회’, ‘기생조합연구회’, ‘고아원 및 학원후원연주회’, ‘이재민구조연주회등 다양한 타이틀로 공연되었다. 음악무도대회는 대중적인 연예물과 민속 예능 중심의 공연이었다. 기생들의 공연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연주회가 바로 기생조합연주회였다.

 

전통공연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을,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 무용과 민속 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 댄스와 서화를 가르쳤다.

권번에서 기생들이 갖춘 것은 분명 남자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기교가 아니라 예술 활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권번은 곧 기생들의 학교인 동시에 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연예기획사 연습실이라 할 수 있다.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은 곧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삶의 체취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책속으로

신문 광고 문안 <동아일보> 1932110일자

 

일본 제일의 조선요리

동경東京 명월관明月館

동경 시 고지마치 구麴町區 나가타 초永田町(山王下)

전화 긴자銀座 57-0057, 57-3009

 

최고의 역사를 두고 찬란한 광채를 가젓든 우리 문화가 세월의 추이됨을 따라 부지중 소멸 되어감은 누구나 다 통탄하는 바이외다. 그 잔해(殘骸)의 일부나마 외인(外人)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것이 해외에 있는 우리들로서 마땅히 할 의무의 한 가지가 아닌가. 확신하여 통속적으로 고국을 선전하는 기관으로 명월관을 경영하던 바 사회의 동정과 원조를 받아 소기(所期) 이상의 성과를 얻었음으로 그의 일단을 보고함도 무익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45

 

또 강명화는 당시 여자의 몸으로 단발을 하고 손가락을 잘랐다 하여 세간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발과 단지(斷指) 같은 독한 행위를 감행한 동기도 역시 연인 장병천을 위한 것이었다. 장병천이 기생의 몸인 자기의 신용을 믿지 않을까 의심하여 삼단 같은 머리채도 아낌없이 잘라버리고, 병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손가락 하나쯤 잘라내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115

 

석금성은 신극 초창기 여배우의 한 사람으로 타계할 때까지 인기를 누린 최장수 여배우였다. 무성영화와 흑백·컬러 영화 시대 및 텔레비전 시대를 섭렵한 한국 영화계의 증인이었다. 그녀는 1925년 광무대(光武臺) 공연의 <추풍감별곡>의 주역인 추향(秋香)을 맡아 데뷔 공연을 가진 뒤 <간난이의 설움>, <스잔나>, <카추샤>, <희생하든 날 밤>, <춘향전>, <산 송장>, <쟌발쟌>, <혈육> 등에 출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154~155

 

신일선을 대형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바로 처음 출연한,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명작인 <아리랑>이었다. 4개월 만에 만들어진 <아리랑>이 개봉되자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됐다. 그 후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전국 방방곡곡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아리랑>이 만들어진 1926년 한 해,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풍운아>와 이경손이 만든 <봉황의 면류관>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27년에는 <괴인의 정체>, <들쥐>, <금붕어>, <먼동이 틀 때>에 출연했다. 1926년과 1927, 두 해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신일선이 총 7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62

 

레코드 산업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기·명창들이었다. 1925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의 일본 유행가를 처음 우리말로 부른 노래인 <시들은 방초>를 취입한 사람이 기생 도월색(都月色)이었다. 또 하나의 대중가요 <장한몽>은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는데, 그녀 역시 기생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 레코드 산업이 본격화되자, 당대 명기·명창들은 서둘러 레코드 업계로 진출한다. 54~55

 

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 일제 강점기 기생의 이야기 저자 신현규|북페리타 |2014.

목차

 

1부불꽃같은 사랑을 한 기생 이야기

지독한 사랑의 전설, 기생 강명화(康明花, 1900~1923)

동백꽃 같은 내 사랑, 기생 박녹주(朴綠珠, 1906~1979)

슬픈 배따라기 같은 사랑, 기생 김옥엽(金玉葉, 1901~?)

자야(子夜), 백석(白石)의 비련 주인공 기생 김진향(金眞香, 1916~1999)

 

2부파란만장한 내 인생, 기생 이야기

자아실현을 위한 일편단심, 기생 주산월(朱山月, 1893~1982)

단발머리 남장소녀, 기생 강향란(姜香蘭, 1900~?)

그윽한 난초 향기, 기생 이난향(李蘭香, 1900~1979)

기생 생활 23년의 자서전, 기생 백모란(白牧丹, 1905~?)

 

3부여배우가 된 기생 이야기

조선의 여배우, 기생 이월화(李月華, 1904~1933)

토월회 여배우, 인텔리 기생 복혜숙(卜惠淑, 1904~1982)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 기생 신일선(申一仙, 1907~1990)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 기생 석금성(石金星, 1907~1995)

 

4부인기 대중스타가 된 기생 이야기

오디오형 명창가수, 기생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3)

얼짱미인 기생 장연홍(張蓮紅, 1911~?)



민요의 여왕, 기생 이화자(李花子, 1915~1949)

인생은 설레는 바다, 기생 왕수복(王壽福, 1917~2003)

꽃을 잡고, 기생 선우일선(鮮于一扇, 1918~1990)

 

5부항일 독립운동 및 사회참여를 한 기생 이야기

항일독립의 의열단원 기생 현계옥(玄桂玉, 1897~?)

여성들이여 가정을 버려라기생 정금죽(丁琴竹, 1897~1958)

3·1독립만세를 외친 사상기생, 이소홍(李小紅, 1903~?)

 

6부다양한 모습의 기생들 이야기

 

미주

인명 찾아보기

 



 

백석을 그리워한 나타샤

기생 김진향은 천재시인 백석의 나타샤다. 일제강점기 장동건처럼 잘생긴 천재시인 백석이 있다. 그는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던 1930년대 후반에 실감나는 농촌의 정서를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승화시킨 시인이다.

 

젊은 시절 그가 사랑한 여인은 기녀였던 김진향이다. 백석 시인은 함흥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중 김진향을 만났다.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딴 것이다. 서역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을 뜻한다. 그 말처럼 김진향을 평생 백석을 기다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진향은 당시 유명한 기녀이자 소리꾼이었다. 생활고 때문에 권번(券番)으로 들어가 기생이 되었으나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문학인이자 신여성. 함흥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금세 불같은 사랑을 하게 된다. 명문가의 자손인 백석은 기생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의 때문에 고향 여자와 강제 혼인을 한다. 식만 올리고 김진향이 있는 청진동으로 도망쳐 살림을 차리고 3년간 함께 지낸다. 김진향과 꿈같이 사랑하는 시기에 그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나왔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김진향은 거절한다.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난 백석은 그 후 영영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북에서 생을 마감한다. 북에는 백석, 남에는 김진향 그 둘을 갈라놓은 38. 김진향은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천억, 백석의 한 줄만 못해

그녀만의 소중한 의식인 듯, 평생 동안 시인의 생일에는 곡기를 끊고 금식을 했다고 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자야 김진향은 1988년 백석에 관한 회고록과 수필집을 출판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그녀 삶 또한 시인이자 문학인으로 물이 들었나 보다. 그녀의 활동은 백석의 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의 이름을 빛낸다.

 

그녀는 말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서 자신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스님에게 기부한다. 당시 금액으로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이었고 <길상사>가 세워지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녀가 운영했던 요정 대원각이 부처를 모시는 숭고한 절이 된다.

 

마치 연꽃처럼.

어찌 그렇게 큰돈을 기부할 수 있냐는 질문에

이 돈은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 나는 다시 태어나면 시를 쓸 거야라고 답한다. 시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 동경이 드러난다. 지금쯤 두 사람은 그 누구의 반대도 없이 하늘나라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겠지. 그 노부부처럼 손을 잡고 걸으며 아름다운 온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을 거다.

 

사랑을 간직하는 방법은 시를 쓰는 일밖에 없다.’

시를 사랑하고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한 여인. 아무나 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기에. 그 둘의 사랑이 세상을 울린다. 나만의 자야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시 하나로 여인의 삶을 지탱시키는 천재시인 백석은 언제 내 앞에 나타나려나? 닮아있는 두 사람. 이 겨울 백석의 시를 김진향의 호흡으로 읊고 싶은 오늘이다.

[출처] 詩人이 사랑한 기생, 김진향|작성자 미디어인사이트

 

 

1894년 평양근교의 숙천에서 주병규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주옥경은 8살 때 평양의 기생학교에 입교하며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시작한다. 기명은 산월(山月). 19살 때 서울의 유명한 한식요릿집인 명월관 기생이 된 산월은 평양기생학교에서 배운 뛰어난 가무음곡으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됐다. 당시 명월관에 자주 드나들었던 의암은 이런 산월을 눈여겨 보았다. 22살때 맺은 가연(佳緣)으로 산월은 의암의 세번째 부인이 됐다.

 

이후 산월은 3·1운동을 주도하던 의암을 뒷바라지했다. 이때를 우이동 봉황각에서 거사준비를 하는 동안 저는 혹시 누가 가까이 와서 엿듣지 않을까 파수를 보았다고 산월은 회고했다. 거사 후 의암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자 산월은 옥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26살의 젊은 여인의 몸으로 감옥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봉양했다. 그러나 의암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구의 몸이 됐고, 1922522일 새벽 36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

 

의암 사후 주옥경 여사는 의암으로 향했던 마음을 천도교에 바쳤다. 1924년 천도교 조직내 흩어져 있던 여성단체를 통합해 천도교 내수단을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조직은 오늘날 천도교 여성회의 모체가 됐다. 19292년간의 도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본격적인 천도교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주여사는 의무는 있으면서 권리는 없고, 입은 있어도 말할 길이 없고, 노력은 있어도 보상이 없는여성들의 권익향상과 남녀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주여사는 의암의 유택이 바라다 보이는 봉황각에 25년 동안 기거하며 수의당(守義堂·의암의 정신과 명예를 지키는 사람)의 당호를 지키기 위해 추호의 흐트러짐 없는 일생을 살았다. 천도교는 이런 그녀의 삶을 기려 1971년 천도교 최고의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했다 05.3.25 경향

 

장학선. 평양 기성권번출신으로 일세를 풍미한 대 명창이다. 1920년대 팔도명창대회 2년 연속 우승에 이어 1969년 서도소리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오산월. 활동분야는 조사된바 없으나 당시 192,30년대 기생화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중 한명이었다.

 

조선 최초의 단발머리 기생 강향란

19226, 서대문 안에 있는 정칙강습소에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남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겠다고 나타난 주인공은 강향란(본명 강석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사상과 이상을 가지고 머리를 깎은 여자는 강향란이 처음이었다.

 

강향란이 단발한 사연은 무엇일까. 14세에 기생에 입문해 한남 권번 소속 으뜸으로 꼽히며 서울 화류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20세가 되던 가을, 부유한 어느 청년 문사와 사랑에 빠지면서 기생을 그만두게 된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에 부푼 그는 서울 적선동에 사는 김 씨라는 남자를 통해 글을 배우고 19219월 배화학교 보통과 4학년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과 1학년에 진급했지만 갑작스럽게 자신의 학자금을 대주던 애인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생각지 못한 시련에 한강 철교 위에서 자살하려는 순간, 그에게 글을 가르쳐준 김 씨에게 발견돼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강향란은 나도 사람이며 남자와 똑같이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뢰하고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근본부터 그릇된 일이다. 세상 모든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한 곳에 있다. 여자로서의 고통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 남자같이 살아보겠다는 의미로 22세에 시내 광교에 있는 중국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고 남자의 양복을 입었다. 당시 배화학교에서는 머리 깎은 여자는 다닐 수 없다 해서 퇴학을 당했고, 시내 정칙강습소에 다니며 공부했다. 그녀가 남자 복장을 한 사진은 동아일보 1922624일 자에 실릴 정도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후 러시아말을 배우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뒤, 또 한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8살의 강향란은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동아일보 1926108일 자 신문에는 강향란에 대해 기생에서 배우까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그녀의 삶을 총 6막으로 정리했다. 기생을 던지고 배화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던 공부막실연 소동을 일으켜 한강에 투신소동을 하였던 실연막여자로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하지 않다고 사회주의에 감염돼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하고 남학교에 출석하던 단발미인막지금의 조선 여자란 꼭 세 가지 길이 있는 바 한 길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할 길, 한 길은 춤추고 노래하며 질탕히 놀아볼 길, 또 한 길은 자살할 길, 세 길밖에 없는데 첫 길은 몸이 약하여 못 가겠고, 둘째 길은 기회가 많아 가본 길이라 다시 갈 수 없고, 나머지 셋째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음독하고 자살하려도 못 죽고 살아난 자살막상하이, 일본 등지로 무턱대고 돌아다니던 방랑막맨 끝으로 영화계로 나선 배우막이다.

 

당시 여성들이 감행했던 단발은 근대를 살아가는 깨인 여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남성들의 단발은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여성의 단발은 좋은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행위로 인식하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했다. 신여성을 자칭하는 여성들은 지금까지 예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긴 머리를 과감히 자를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세정(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매일신문 15.7.17

 

이화중선(李花仲仙)

18981943. 여류명창 중의 한 사람. 부산출생. 김초향(金楚香)과 더불어 당시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17세 때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살던 중,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집을 나가 장득주(張得周)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로 몇년 만에 춘향가·수궁가·흥보가를 공부하였고, 서울로 와서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지도를 받아 당시 여류명창으로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불러 청중을 매혹시켰으나, 오히려 거침없이 쉽게 부르는 것이 감동을 덜 주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때에 임방울(林芳蔚)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하였고, 일본 공연도 많이 하였다.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차 일본을 순회하던 중에 죽었다. 그녀의 장기는 심청가중에서 추월만정(秋月滿庭)’, 춘향가중에서 사랑가였다.17세 때 판소리공부를 시작하고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에게 사사하였다. 1940년대에 대동가극단(大東歌劇團)을 조직하고 축음기에 많은 취입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차 일본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객사하였다.

 

항일독립운동의 꽃 사상기생현계옥

말을 타는 기생항일무장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신문지상에서 말을 타는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가 바로 현계옥(玄桂玉, 1897?)이다. 우리나라 근대 승마의 역사에서 기생 출신의 여성들은 여성 최초의 서구식 승마를 했다는 타이틀을 얻었다.

 

계옥은 경상북도 달성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그녀의 용모는 풍만했고, 재주는 민첩했다. 경박하지 않고, 풍류가무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가곡, 정재무, 승무, 그리고 절묘한 가야금 연주도 그녀의 일부와 같았다. 그녀가 하는 소리와 산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춤과 가야금에는 대적할 이가 없다하여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당대의 명기였다. 남보다 재주가 많으면 남보다 정조도 더 굳은 걸까.

 

그런 콧대 높은 계옥이 현정건(玄鼎健, 18871932)이라는 남성을 만나 뜨거운 연애사건을 벌이게 된다. 현정건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사촌 형으로 일찍이 일본·중국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유학한 인텔리이다. 그가 때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친구와 어울려서 기생집을 한 번씩 찾곤 했는데, 이후 계옥에게 운명의 남자가 된다. 그녀의 나이 19, 시국에 불만을 품고 중국, 일본으로 돌아다니던 그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계옥은 거처를 경성의 한남권번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정건의 집안에서는 기생과 친하게 지내면 못 쓴다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엄중히 감시하기에 이른다. 계옥의 집안에서도 돈이 없는 그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느냐며 그녀를 닦달하였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젊은 남녀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계옥은 자신의 기생생활을 저주하며 박명을 한탄하던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어 밤잠을 못 이루고 신음하는 몸이 되고 만다.

 

몽매에 그리워하던 정건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 중국 상해로 들어가고, 한 이탈리아 신문의 기자로 있게 되자

 

날 데려 가오.”

잠깐만 더 기다리오.”

 

하는 편지가 황해 바다를 덮을 만큼 끊임없이 오고갔다.

 

그런데 계옥의 손님 중에 전()씨 성을 가진 한 청년은 같이 한 번 살아보면 여한이 없겠노라고 애원하기까지 하였다. 계옥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실망한 청년은 현정건을 빗대어 ()’씨끼리 살면 ()’씨가 된다고 비꼰다. 구변 좋은 계옥은 ()’씨와 ()’씨가 같이 살면 ()’씨가 된다고 대응한다. 절묘한 거절이다. 똑똑한 계옥의 재치가 돋보이는 이 일화는 유명하다.

 

애국투쟁을 위해 만주로 떠나다

계옥은 현정건의 소식을 듣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독립 청년들과 자주 사귀게 된다. 그 덕분에 중국 신해혁명에 유명한 손문(孫文)과 함께 한 혁명가 황흥(黃興, 1874~1916)의 사적도 전해 듣는다. 당시 중국의 기녀들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는 긴급한 상황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애국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녀들은 청루(靑樓)구국단을 조직하여 직업은 비록 천하지만 애국하는 것은 한 가지다라는 성명을 낸다. 적지 않은 연예인과 가녀(歌女)들도 애국투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연극과 노래를 중지한다. 또한 중국 천진(天津)의 기루(妓樓)에서 기녀 정추진이 여자 혁명결사대를 통하여 이름을 일세에 떨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자신의 새로운 앞길을 결정하고 마침내 험난한 만주 벌판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다.

 

이제 계옥은 정건의 애인이자 동지가 되었다. 경찰들이 기생집에 감시가 허술한 점을 틈타 모임을 주선하고 여러 핑계로 요릿집 놀음에도 나가지 않았다. 노래는 물론이요 일흔 두 가지 춤을 출 줄 알고, 한문 글씨 잘 쓰기로도 당대의 기생 중 대적이 없었다는, 특히 말 잘 타기로 이 유명한 기생. 아무리 애를 쓰고 마음을 태워도 그녀를 볼 수 없었던 풍류객들은 애가 탈대로 타서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황금정 승마구락부에서 남자처럼 승마복을 입고 말 타는 그녀를 찾아다니는 풍류객까지 생길 정도였다. 당시 계옥이 승마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자신의 키보다 높은 말 위에 앉아 화살같이 달리는 늠름한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보면 어떤 남성이라도 미혹할 만하지 않을까.

 

드디어 21살이 되던 해 봄, 19192월에 계옥은 몰래 가산을 정리하여 길 떠날 준비를 마친다. 그런데 같이 가려던 정건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고 만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가 석방되던 때는, 남녀노소 할것없이 모두 만세들을 부르고 투옥되던 처절한 3월 중순경이었다. 계옥은 밤을 새워 잡히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한다. 정건과 중국에서 만날 약속을 한 후, 그가 소개해 준 청년의 뒤를 따라나선다. 계옥은 중국옷으로 변장하고 귀를 뚫어 중국 여자 모양으로 고리를 걸어서 교묘히 피하기도 하였다.

 

중국 안도현에서 이틀 밤을 자고 봉천에 이르러 황사후루(皇寺後褸)’란 곳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다. 하지만 일본 관헌의 감시는 여전히 심하고 계옥을 알지 못하는 청년들은 그녀의 행색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러저러한 상황에 몰려 계옥은 북릉어화원(北陵御花園)’이란 곳으로 옮겨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정건은 계옥이 뛰어난 용모로 해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믿을 만한 친구에게 부탁하여 먼저 떠나보낸 터였다. 정작 자신은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서 늦게 길림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봉천에 있는 계옥에게 오라고 통지를 하면서 동시에 첫 활동을 준비하게 된다.

 

길림, 그곳에는 1918년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간 김원봉,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미 와 있었다. ‘의열단’, ‘광복단을 조직하고 각종 기관을 만들어 내외의 연락을 도모하고 동지를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등 무장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정건의 부름을 받고 길림에 다다른다. 그리고 비전(秘傳) 혁명전기중에서나 보던 인물들과 비로소 만난다. 지금까지 사귀어 오던 뭇 사나이들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정성껏 그들의 일을 돕는 한편, 정건과 단란한 가정을 이룰 꿈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 많고 시기 많은 세상은 그녀의 알뜰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꿈에도 없던 소리를 지어내기만 한다. 무성한 소문으로 그녀의 집까지 습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계옥은 더 마음을 다잡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의 결심을 드러낸다.

 

유일한 여성 의혈단원이 되다

계옥은 독립운동 청년들의 고달픈 심경을 위로하고자 송화강변에서 달빛을 담아 가야금을 연주한다. 그 달빛의 선율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면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보듬어 주었다. 차차 계옥의 정성을 알게 되자, 의열단장 김원봉의 인정을 받아 여성으로 유일한 의열단원으로 인정해 주게 된다.

 

그 후 계옥은 정건에게 영어를, 김원봉으로부터는 폭탄제조법과 육혈포 쏘는 방법을 배워 조직의 비밀활동을 담당하였다. 얼른 보기에 여자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신을 감행하곤 했다. 그녀는 때때로 교묘한 꾀로 의열단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한번은 중국 천진에 있는 폭탄을 상해로 운반해야 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관헌의 감시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조해지던 차였다. 계옥은 양복을 입고 폭탄을 가지고는 단신으로 배를 타고 상해로 돌아간다. 관헌의 취조가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사람 옆으로 가서 공연한 말을 걸어서 남 보기에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꾸며 무사히 운반에 성공하였다. 풍속이 다르고 말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계옥과 그 일행들이 조석으로 변장을 하며 신출귀몰하였을 것을 상상해 보면 박진감 넘치는 활극을 방불케 할 것이다.

그 후 계옥은 정건과 같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있으면서 동생 계향(桂香)과 월향(月香)을 조선으로 보낸다. 계향은 사회주의 운동가 박일병(朴一秉, 1893~?)과 같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고, 월향은 독립운동가 신백우(申伯雨, 1887~1959)를 도와주게 된다. 상해에서는 현정건과 윤자영(尹滋瑛, 1894~?)과 더불어 여전히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사이사이 꾸준히 영어공부를 계속한 덕분에 이제는 웬만한 영문소설까지도 넉넉히 볼 정도의 실력자였다.

 

30세가 되던 해, 정건이 1928년에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출옥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계옥은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이제 당대에 대표적인 행동파 사상기생(思想妓生)’이 된 것이다. 현정건에게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한편 그 못지않게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현계옥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버려진 묘비처럼, 망명 후에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사진제공_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서울신문 11.8.21

 

김영월. 평양기성권번출신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였다.

 

현매홍, 김옥엽.

평양 기성권번 출신의 현매홍과 김옥엽은 서울 상경 후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에 적을 두며 많은 활동을 했다. 현매홍은 가곡, 가사, 시조에 능통했으며 김옥엽은 초창기에는 궁중무용과 서도잡가와 경기잡가 그리고 30년대 중반부터는 가곡, 가사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김옥엽의 '수심가'는 워낙 뛰어나 당시 장안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연예인중 한명이었으며 문학가 김동환과의 로맨스는 인구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현매홍은 기생조합 최초의 잡지인 '장한' 편집인중 한명으로 활동했으며 일동축음기레코드 등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다.

김옥엽 역시 빅타, 콜럼비아, 태평 레코드 등에 수십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노은홍. 평양기성권번 출신으로 황야의 고객, 정화와 같은 가요곡을 부르며 인기를 끌었다.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박록주. 1920년대말부터 활동한 판소리 특히 동편소리의 전설이자 대명창으로 김유정과의 로맨스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1964년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도영심, 이화자, 선우일선, 김산월.

1930년대 들어 신민요와 가요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인기를 끌게된 최고의 연예인들.

선우일선과 김산월은 평양에서 이화자는 인천에서 기생으로 소속되어 있다가 발탁되었다.

 

김산호주. 평양 기성권번 출신으로 임방울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10930년대에는 조선관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옥란

한성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국악과 양악 양쪽을 오가며 활동했다. 특히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한 가요곡 기생수첩, 눈물의시집, 꽃같은 순정 등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윤채선. 대정조합(권번) 출신으로 조선무용에 능통했다

 

한성권번의 김화중선. 조선무용과 잡가에 두루 능통했다. 30년대 경성방송국에 자주 등

 

고전문학에 나타난 기생시조와 한시 저자 황충기|푸른사상 |2015.

저자 황충기 黃忠基는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및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저서(編著書)校註 海東歌謠(1988) 古時調註釋事典(1994) 蘆溪 박인로 연구(1994) 역대 한국인편저서목록(1996) 해동가요에 관한 연구(1996) 가곡원류에 관한 연구(1997) 韓國閭巷時調 연구(1998) 閭巷人과 기녀의 시조(1999) 長時調 연구(2000) 註解 장시조(2000) 한국학주석사전(2001) 한국학 사전(2002) 여항시조사연구(2003) 기생 時調漢詩(2004) 고전주해사전(2005) 청구영언(2006) 靑丘樂章(2006) 증보 가곡원류(2007) 가사집(2007) 성을 노래한 고시조(2008) 기생 일화집(2008) 名妓 일화집(2008) 海東樂章(2009) 조선시대 연시조 註解(2009) 古詩調 漢詩譯註釋反譯(2010) 協律大成(2013) 六堂本 靑邱永言(2014) 등이 있다.

 

책머리에

일러두기

 

1부 시조(時調)

2부 한시(漢詩)

 

作家 索引

作品 索引

 

()로 주고받는 정()

공자와 맹자를 말하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논하는 선비, 학자, 고관대작들도 그녀들 앞에서는 한갓 남자일 뿐이다.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교양과 기개만큼은 남자들 못지않았던 기생들은 우리 문학사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직접적인 창작자뿐만 아니라 창작의 원천으로서도 끊임없이 문학의 역사에 등장한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기생시조와 한시는 바로 기생이 창작의 원천이 된 시를 한데 묶은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시들은 모두 기생을 대상으로 또는 주제로 삼아 지어진 작품들이므로 시인들의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감상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송강 정철, 율곡 이이, 이규보, 김부식, 이제현, 정몽주, 조광조, 이항복, 윤선도, 정약용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이들이 기생들 앞에서 근엄함을 벗고 관습에서 일탈하여 자신의 재치와 정감을 마음껏 표현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머리말 중에서

기생(妓生)은 분명 재주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라는 글자는 ()’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는 재주나 기술이라는 뜻이지만 광대, 배우라는 뜻도 있다. ()는 이런 역할을 남자가 아닌 여자가 대신한다는 뜻이다. 남자로서 할 수 없는 재주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전문학을 보면 기생들이 시조도 짓고 한시도 짓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시를 짓기까지에는 많은 사연들이 있었음을 각종 문헌이나 일화(逸話)를 통해 알 수 있다. 과거 봉건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처럼 다루어졌고, 더구나 기생은 남성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기생 하나를 두고 환심을 사려고 경쟁하고,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또는 기생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어리석은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기록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

 

저자는 일찍부터 기생을 화두(話頭)로 삼아 기생들이 지은 시조와 한시를 모아 주석하였고, 기생들의 일화를 모아본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기생을 두고 지은 시조와 한시를 모아보기로 하였다. 시화(詩話)와 만록(漫錄) 등에 기생과 관련 있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들을 모두 모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기생을 대상으로 한 시조는 대부분 안민영(安玟英)이 많은 기생들에게 지어준 작품들로, 그의 개인 가집인 ?금옥총부(金玉叢部)?에 남아 있다. 한시의 경우에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하여 이름을 떨친 유학자들이 대부분 기생을 대상으로 시를 짓거나 기생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여항시인들을 비롯해 기생들도 기생을 대상으로 시를 지었다.

 

기생(妓生)은 분명 재주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라는 글자는 ()’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는 재주나 기술이라는 뜻이지만 광대, 배우라는 뜻도 있다. ()는 이런 역할을 남자가 아닌 여자가 대신한다는 뜻이다. 남자로서 할 수 없는 재주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전문학을 보면 기생들이 시조도 짓고 한시도 짓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시를 짓기까지에는 많은 사연들이 있었음을 각종 문헌이나 일화(逸話)를 통해 알 수 있다. 과거 봉건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처럼 다루어졌고, 더구나 기생은 남성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기생 하나를 두고 환심을 사려고 경쟁하고,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또는 기생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어리석은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기록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

 

저자는 일찍부터 기생을 화두(話頭)로 삼아 기생들이 지은 시조와 한시를 모아 주석하였고, 기생들의 일화를 모아본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기생을 두고 지은 시조와 한시를 모아보기로 하였다. 시화(詩話)와 만록(漫錄) 등에 기생과 관련 있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들을 모두 모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기생을 대상으로 한 시조는 대부분 안민영(安玟英)이 많은 기생들에게 지어준 작품들로, 그의 개인 가집인 ??금옥총부(金玉叢部)??에 남아 있다. 한시의 경우에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하여 이름을 떨친 유학자들이 대부분 기생을 대상으로 시를 짓거나 기생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여항시인들을 비롯해 기생들도 기생을 대상으로 시를 지었다.

 

이 책에 수록한 작품들을 보면 시조와는 달리 한시 작품들 중에는 특정한 어느 기생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드물다. 그러므로 한시들은 시조만큼 친밀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작가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하겠다. ---머리말중에서

 

기생, 작품으로 말하다 저자 이은식|타오름 |2010

이은식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은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을 구실을 찾아낸다.' 이러한 믿음 하나로 학교를 퇴직한 후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일가 위한 집필 작업에 몰두한다. 단순히 텍스트 상으로만 존재하는 역사가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면서 보고 듣고 느낀 역사의 현장들을 기록함으로써, 지나간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학자이다.

 

문학박사로 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 사육신현창회 연구이사, 성균관 부관장, 서울문학사확회 이사, 사명당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사의 희망 부모와 청소년 이야기,피바람 인수대비 상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목차

"작가의 말

 

1부 기생이란 신분은 타고나는가

기생재상

왕을 모신 첩과 기생들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 정종의 짧았던 재위 기간

조선 시대 여성관의 일대 변환

제도로 존재한 특수 전문직

수청을 드는 것은 기생의 의무라 했으니

기생에게도 등급과 계급이 있었다

지방에서 뽑아 올리기 바빴던 명기名妓

중종도 포기한 장안 기생

기생을 감독하는 기생 서방

모갑某甲이란 무엇인가

국운國運과 함께 기울어진 기생 신세

꽃값 못 받은 평양 기생들의 삶의 터전

개화기 단발머리가 말해 주는 신 풍속

면천을 위해 절에 머물다

기생을 만나기 위해 동원한 수단들

사처소 오입쟁이들의 횡포

백인 창녀와 혼혈 창녀

품위 있는 기생에게 내린 정오품 벼슬

창기에게도 혈연은 있었다

 

2부 조선조의 여성 시관詩觀과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작詩作

진솔한 감정을 표했한 고려가사高麗歌詞

명문대가의 규방가閨房歌

명기의 삶과 그녀가 남긴 작품

사랑은 붉어서 퇴색하기 쉬워라 황진이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 벽계도정 이종숙의 가계도

- 당당히 자신의 무덤을 갖고 있는 황진이

- 황진이로 인해 파직을 당한 임제

- 대담하나 여린 황진이의 작품들

* 옛이야기 한 꼭지 삼척 바위와 기녀의 한

한 사람에게 순정을 바친 기생들

운초 김부용의 사랑과 시

- 59세의 나이 차는 문제 되지 않았다

- 정이 있으되 말이 없으니 흡사 정이 없는 것 같구나

- 기녀는 열녀가 될 수 없나

재기와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매창

-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대와 살고지고

- 매창과 교분이 두터웠던 이귀

- 매창과 시를 주고받은 허균

- 세상의 권력을 거부한 허균

- 가곡원류에 실린 매창의 시조 12

- 명산名山 변산이 낳은 가사 문학

- 초운사로 주목받기 시작한 부안의 가사 문학

- 그리던 임과 다시 만났으나 병마가 죽음을 재촉하고

* 기행문 부안 700리 길에 자리한 아담한 매창의 무덤

- 매창이 평생을 사랑한 유희경

- 신분의 귀천은 있으나 하늘이 준 노래는 같은 소리이다

생애를 건 기다림을 예술로 승화시킨 홍장

- 박신과 조운흘의 평생 잊지 못할 기억

* 운봉 박씨 박신의 가계도

- 홍장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는 기류 문학

- 한송정과 한송정곡

기생 홍랑, 명문가의 묘소에 묻히다

- 기구한 운명의 장난

- 사랑이라는 천형

- 세 번째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 기행문 최경창과 홍랑의 묘소를 찾아서

순정을 위해 몸을 바친 기생 경춘

- 월기 경춘 순절비

- 낙화암에 전하는 여랑女娘을 위한 시

* 옛이야기 한 꼭지 방랑 중에 만난 사람들, 이달과 최경창

대학자와 기생의 인연

퇴계와 단양의 관기 두향

- 단양에 부임한 이황의 민생 시찰

- 이 차는 아무에게나 주는 차가 아니옵니다

- 깊은 거문고 소리로 이황의 마음을 빼앗다

- 뜨거운 노래 가슴 속에 지닌 시인 두향

- 신선이 내려앉는 강선대에서 시를 주고받다

- 강선대와 두향을 읊은 선비들

- 단양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

반평생의 귀양살이 윤선도와 관기

-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교류한 벼슬관들

- 윤선도의 제2차 유배지 영덕에서의 행적

- 마지막 밤 관기들과 나눈 시

* 옛이야기 한 꼭지 정철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전란에서 빛을 발한 기생들

논개의 열아홉 청춘

- 최경회와의 인연

- 실존 여성 중 유일한 논개의 사당

- 논개의 묘가 함양에 있게 된 연유

고성 기생 월이의 지혜

임진왜란이 낳은 또 다른 의기 계월향

매국적의 천금을 거부한 진주 기생 산홍

* 옛이야기 한 꼭지 기생 화선의 혼이 남긴 화몽정

알려지지 않은 명기들의 발자취

소춘풍의 기지로 대신들의 희로喜怒가 바뀌다

소백주와 백년 동포同抱 하시이다

색향 평양의 명기 구지

경기도 화성 기녀 명왕

소나무 같은 푸른 절개를 다짐하는 송이

황진이 못지않은 매화

이곡이 완계사에게 전한 시

신광수가 농월선에게 선사한 시

임제의 시에 한우가 화답하다

오지 않는 임을 체념하는 다복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기생들의 작품

이서구가 만든 기생들을 위한 노래"

 

책속으로

태종太宗은 기생의 폐단을 염려하여 기생 제도를 폐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정승 하륜河崙의 반대로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반대하던 하륜의 이유가 그럴 듯하였다.

만일에 기생을 없이 하면 뭇 사나이들이 양가良家의 부녀를 기웃거릴 것이니 그것을 막으려면 기생을 두는 것이 가합니다.”

 

한편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신분이 추락해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경우를 들면 역신逆臣의 부녀자들로서 고려 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遊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의 처자식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인목仁穆 대비의 친정어머니를 제주 감영監營의 노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부 기생이란 신분은 타고나는가 - 기생재상妓生宰相 中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시조를 읊었다. 벽계수는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황진이는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량일 뿐이다.”

하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이는 영조英祖 때의 문장에 능했던 무신 구수훈具樹勳의 저서 이순록二旬錄에 있는 기록이며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종실 이종숙은 평소에

나는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 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이종숙이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하며 시조를 읊으니 이종숙은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2부 조선조의 여성 시관과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작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희고 곱던 김부용의 얼굴도 기다림의 고통과 상심한 슬픔에 시들어 버리고 몸은 야윌 대로 야위었다. 김부용은 김이양을 기다리는 괴로운 시간 동안 넘치는 시문으로 임을 기다리며 많은 연모시를 남겼다.

 

한 번 서울로 떠나 이별하니 생각은 하염없고

뜰에 떨어지는 꽃은 비 내리듯 하는구나.

처마 밑 까치 소리에 어린 꿈 깨고 보니

꿈에 본 길 희미하게 실낱처럼 떠오른다.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고

서산에는 또 하루해가 저문다.

오늘도 임 소식은 끝내 없건만

그래도 아쉬워 문을 못 닫소.

 

그러던 중 꿈에도 기다리던 김이양이 때가 되어선지 몰라도 사람을 보내 김부용을 부르니 그녀는 한양으로 오게 되었고 이들은 남산 중턱에 살림을 차렸다.

2부 조선조의 여성 시관과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작 - 기녀는 열녀가 될 수 없나

 

사랑에 빠진 매창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전쟁보다 더한 아픔이었다. 유희경이 전장으로 떠난 뒤 오장육부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고독과 외로움에 매창은 견딜 수 없었고 밤낮으로 임을 그리며 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팔도강산은 일본인들의 천지가 되는가 싶었다. 전쟁 중이다 보니 세월이 가도 글월 한 장 오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매창의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 찼다.

 

송백같이 굳게 맹세하던 그날

서로 사랑하기가 바다같이 깊었건만

한 번 가신 임은 소식조차 끊겨

한밤중 나 홀로 애간장만 태우오.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 가고 지나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 듯 보인다. 인적이 끊긴 뜰에는 꽃이 피고 낙엽만 뒹굴었다. 매창은 원망이 지나쳐 사랑하는 임을 미워도 했으나 유희경 없는 세상은 이제 하루도 상상할 수 없었다.

-2부 조선조의 여성 시관과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작 -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대와 살고지고

 

이별을 하고 난 홍랑은 집으로 돌아와 고독과 비애를 참을 수 없어 울고 또 울었다. 홍랑은 북받치는 설움에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아래의 시 한수를 지었다고 전한다.

 

고운 뺨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

이별이 서러워 꾀꼬리도 우누나.

타관 천리로 정든 임 보내자니

홀로 가시는 길은 풀빛도 아득하랴.

 

다시 만날 것을 간절하게 염원하는 홍랑의 마음을 몰랐던 것일까. 어쩌면 하늘이 두 사람의 사랑을 시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583(선조 16) 한양으로 돌아가던 최경창은 종성 객관에 이르러 잠을 자던 중 돌연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홍랑은 최경창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마자 다시 지체 없이 행장을 꾸렸다.

-2부 조선조의 여성 시관과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작 - 세 번째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고려의 기생 시

동인혼(팽원 창기) | 우돌(용성 관기) | 홍장(고려 말 ~ 조선 초, 강릉 기생)

 

조선의 기생 시

소춘풍(笑春風 성종조, 영흥 기생) | 소춘풍(小春風, 연대미상) | 황진이(중종조, 송도 기생) | 진옥(선조조) | 한우(선조조, 평양 기생) | 홍랑(선조조, 경성 기생) | 매창(선조조, 부안 기생) | 승이교(선조조, 진주 기생) | 복개(부안 기생) | 계향(진주 기생) | 온정(평양 기생) | 죽향(평양 기생) | 죽서(평양 기생) | 노화(평양 기생) | 운초(정조~순조, 성천 기생) | 무명(의주 기생) | 소염(양덕 기생) | 능운 | 금춘(성조~광해조, 함경도 기생) | 소백주(광해조, 평양 기생) | 문향(선조조, 성천 기생) | 매화(영조조, 평양 기생) | 다복(18세기 중반 추정) | 계담(송화 기생) | 구지(평양 기생) | 송이(18세기 중반 추정) | 계단(18세기 중반 추정) | 입리월(18세기 중후반 추정) | 송대춘(18세기 후반 추정, 맹산 기생) | 강강월(18세기 후반, 맹산 기생) | 부동(18세기 후반 추정) | 명옥(수원기생) | 천금(19세기 전반 추정) | 매화(진주 기생) | 금홍(평양 기생) | 소홍(평양 기생) | 옥선(진양 기행) ; 외 다수

 

기생 주제의 시와 헌시

정지상 | 정습명 | 이규보 | 이율곡 | 서경덕 | 임제 | 이지온 | 박충좌 | 이문형 | 김수온 | 함부림 | 김척 | 남곤 | 조인규 | 강혼 | 심수경 | 송인 | 신식 | 윤현 | 김안국 | 유공 | 성현 ; 외 다수

 

녹파잡기 조선 문화예술계 최고의 스타, 평양 기생 66명을 인터뷰하다

저자 한재락|역자 안대회|휴머니스트 |2017

저자 한재락은 자는 정원(鼎元), 호는 우천(藕泉우방(藕舫우화노인(藕花老人)이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도회지 소비문화와 예술 세계를 거침없이 향유한 인물로 꼽힌다. 신위, 이상적 등과 교유했다.

 

역자 안대회는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대동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장의 품격, 벽광나치오, 정조치세어록, 궁극의 시학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추재기이, 북학의등이 있다. 지식인들의 삶과 지향이 녹아든 18세기 산문 문학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풀어낸 ‘18세기 지식총서의 총괄기획을 맡았다.

 

목차

서설

 

이상적李尙迪

1 한재락韓在洛

2 한재락韓在洛

제사題辭 신위申緯

제시題詩 강설絳雪

 

원문

영인본

녹파잡기는 개성 한량 한재락이 1820년대 평양에서 가장 뛰어난 기생 66명과 기방 주변 명사 5명을 직접 인터뷰한 책이다. 한재락은 그들의 예술 세계와 삶의 애환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여기에 당대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신위, 이상적, 강설이 각각 비평과 <제사>, <>, <제시>를 덧붙였다.

안대회 교수는 2006년에 녹파잡기를 처음 소개한 이래 십여 년 만에 신위가 쓴 비평까지 번역하여 온전한 완역본을 출간했다. 우연히 고서점에서 잘 보존된 판본을 찾은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이 번역본에서는 최초로 소개되는 비평을 제외하고도 다른 문헌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문화예술계의 중요한 정보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역자는 유려한 번역으로 이백 년 전 평양 기생들의 삶과 예술은 물론 평양 지역의 풍속과 문화까지 꼼꼼하게 살펴 전한다.

 

1. 기생에 대한 조선시대 최초의 단행본이자 심층 인터뷰집

조선시대 단행본 중에 기생을 주제로 한 것은 녹파잡기가 유일무이하다. 조선시대에는 인물의 용모와 특징을 묘사하고 평가하는 품제(品題)의 대상을 사대부에 한정했다. 그런데 한재락은 조선 사회에서 천한 대접을 받았던 기생만을 따로 모아 그들의 용모와 예술적 소양 등을 평가하여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당대의 금기를 깬 것이다.

한재락은 개성 갑부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적·예술적 소양이 뛰어났지만 개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비운의 한량이었다. 그는 출셋길 막힌 울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도회지 문화와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풀었는데, 덕분에 기생과 음악, 연희 등 문화예술 영역에 풍부한 경험과 월등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국 기생 집단에서 최고로 꼽히는 평양 기생들을 만나 시··화는 물론이고 춤과 노래, 연주를 일일이 감상하여 녹파잡기에 기록한 것이다. 당시 평양 기생들은 특히 기예가 뛰어나기로 유명하여 한양이나 개성 등지에 진출하면 큰 환영을 받았다. 그 수준 높음은 단순히 기방에 한정되지 않았는데,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신위가 직접 시 제자로 삼으려 했던 이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 책은 19세기 조선 문화예술계의 정수만 골라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재락은 예인으로서 훌륭한 면모를 갖추고도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기생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여 그들의 삶의 애환을 드러내는 데도 집중했다. 덕분에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자신의 처지와 삶을 대하던 태도를 엿볼 수 있으니 이 책은 기생들의 예술 세계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까지 담은 심층 인터뷰집이라 할 만하다.

 

조금 있다가 풍악이 울려 퍼지자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제자리로 갔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떼어서 맑고도 시원스러운 노래를 뽑았다. 곡조는 높고 소리는 빼어난지라 이야말로 정녕 가장 높은 수준의 노래를 연주하니 거기에 화답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격이었다.

-기생 현옥에 대한 내용 중(50)

 

소첩이 기생 명부에 들어가 떠도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천성이 뜻을 굽히거나 남에게 지지 못합니다. 기생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기는 해도 남들이 문에 기대어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기가 꺾입니다.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리 황금 한 바구니와 진주 한 말을 들고 날마다 찾아와서 저를 유혹해도 어찌 제 마음이 흔들리겠습니까?”

-기생 일지홍에 대한 내용 중(91)

 

2.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 신위의 비평을 더해 십여 년 만에 출간된 완역본!

안대회 선생은 2006년에 최초로 녹파잡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원본을 찾지 못해 번역서를 내진 않았다. 녹파잡기원본에는 이상적의 에서 권1, 2에 이르는 본문 대부분에 비평이 달려 있는데, 단국대 연민장서와 고려대 육당문고에 소장된 각 판본에서는 비평을 확인할 수 없어서다. 비평은 조선시대 후기 문학작품 중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에만 들어가는 요소로 평자의 감상과 의견을 간결하게 시적으로 쓴 것이다. 그 자체가 문학작품으로 여겨질 정도라 비평을 빼놓고는 저작의 가치를 제대로 논하기 힘들다.

녹파잡기에는 신위가 한재락의 문장과 평양 기생들의 삶에 대해 평을 달아놓았다. 글을 읽고 든 느낌을 편하게 써 내려간 듯 보이는 신위의 비평에서는 촌철살인식의 은근한 유머가 드러나 학술적 가치를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한 문장 정도의 평이 달려 있을 뿐이지만, 사대부의 시각에 갇히지 않은 신위만의 독특한 관점과 문체는 한재락의 섬세한 필치와 잘 어우러져 이 특이한 저작을 한층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역자가 20176,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잘 보존된 필사본을 손에 넣은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발견된 필사본은 이미 알려진 2종의 이본보다 가장 원본에 가까우며, 보존 상태와 필사 상태가 좋아 비평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역자는 이를 저본으로 삼아 2개의 이본과 꼼꼼히 교감하여 원전을 확정하고 번역했다. 또한 확인된 비평을 분석하여 신위를 평자로 밝히고 근거를 제시했다. 책의 말미에는 저본의 영인본을 실어 참고하도록 했다.

 

나를 대신하여 일지홍에게 말 좀 전해주게. 평소의 뜻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그러나 황금 한 바구니와 진주 한 말을 물리치는 일도 어렵단다. 그대의 뜻을 채우려면 아무래도 지렁이가 된 뒤에야 가능할 뿐이야.

-‘일지홍편에 달려 있는 신위의 비평(91)

 

3. 19세기 조선 문화예술계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한재락은 문인들과 시··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학식을 갖추었거나 예술에 조예가 깊은 기생을 최고로 꼽았다. “첫 번째 가는 여인으로 꼽힌 기생 영희는 평양의 서화가로 유명했으며, 영희와 절친한 것으로 소개되는 죽향19세기 평양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기록에서도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역자는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다른 문헌에서도 발굴해 실어 당대 문화예술계에서 그들이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역자는 기생과 기방 주변의 명사들이 기예를 펼치는 장면을 꼼꼼히 살펴 예술사에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사실까지 상당수 밝혔다. 음악사에서 위상이 높은 평양 서도소리작품들의 목록을 새로이 확인하고 작자를 밝혀 가사를 소개하거나, 문장이 뛰어난 기생 명애죽향의 작품을 다른 문집에서 찾아 소개하는 식이다.

전국을 방랑하며 풍류를 즐긴 한재락이 평양 지역의 기생과 명사 들을 기록의 대상으로 택한 것은 19세기 평양이 물자가 풍요로워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풍류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기방은 풍류의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세기 평양의 기방 문화를 살

 

피는 것은 당시 조선 문화예술계의 분위기와 수준을 살피는 것과도 같다. 이 책에서는 본문에 자주 언급된 명소의 모습을 담은 도판을 함께 수록해 독자들이 평양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면서 당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이매창 평전 시와 사랑으로 세상을 품은 조선의 기생 저자 김준형|한겨레출판사 |2013.

저자 김준형은 1967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조 패설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야담과 패설문학을 공부해왔으며, 좀더 폭넓게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가운데서 고전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매창 평전을 필두로 우리 고전에 대한 발굴과 소개, 그리고 새로운 해석 작업도 계속 시도할 예정이다. 한국 패설문학 연구외에 15여 권의 공저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이명선 전집(4) 등이 있다.

 

목차

발간의 글 _‘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 (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 _그들이 사랑했던 기생, 매창의 자취를 찾아서

 

1장 매창, 기생이 되다

아전 아비와 관비 어미의 슬하에서기생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한 밑그림들관기로서 매창의 삶을 재구하다예비 예술인으로서의 훈련 과정

 

2장 어린 기생, 매창

기생 명선을 통해 본 동기의 삶기역과 기명에 관한 추적계생, 계수나무 위로 떠오른 둥근 달성인 기생이 된다는 것은전문 기예인이 된다는 것은기명을 얻은 후 매창의 일상매창의 성장기를 함께한 부안현감들

 

3장 유희경과의 사랑, 그리고 이별

아전들이 엮어준 매창집』|매창과 매창집에 대한 오해42세 시객 유희경과의 첫 만남유희경의 문집에 남은 매창의 흔적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십여 년 만의 해후

 

4장 기첩으로서의 매창, 그리고 서울 생활

서울에서 보낸 삼 년, 그 흔적 찾기매창의 첩살이를 증명하는 이야기들매창과 류도의 깊은 인연매창을 첩으로 들인 의문의 주인공누군가의 첩이 된다는 것은관기를 첩으로 들이는 네 가지 방법첩살이 덕분에 피한 아찔한 사건들

 

5장 다시 돌아온 부안, 그리고 전쟁

꿈만 같았던 서울 생황을 마치고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웠던 부안의 사정성숙해진 매창, 시기로 거듭나다

 

6장 매창, 연회에 나서다

하층민의 삶을 재구하다스물아홉, 허균과의 첫 만남매창의 연인 이귀허균을 통해 이어진 인연의 고리들관찰사와 기생의 관계연회의 꽃 기생위로받고 위로하는 존재매창의 시제를 아낀 이들문인들의 기록에 남은 서른셋 기생의 삶매창이 남긴 의문의 시 한 편

 

7장 동지 허균과 그 벗들

허균과 민인길, 운명의 첫 만남민인길의 뒤를 이은 현감들양반 유람에 빠질 수 없는 동반자들변산의 아름다움에 취하다유람에서 주고받은 시허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매창의 시에 담긴 허균의 부안 생활권세와 부귀에 연연하지 않는 삶허균, 변산 유람에 나서다허난설헌의 시로 허균을 위로하다그들이 꿈꿨던 소박한 세상

 

8장 문인들과 당당하게 교유하다

시끌벅적했던 부안 생활하나둘 매창의 곁을 떠나고조선 최고의 시인 권필과의 인연뱃놀이에 나선 매창과 문인들신분적 주종 관계를 넘어서몇 번을 이별하고 다시 만나다고홍달과 매창의 관계죽을 때까지 이어진 기생의 부역사라진 매창의 흔적을 찾아서발견되지 않은 시첩을 기대하며

 

9장 매창, 죽다

윤선의 선정비, 논란의 시작매창, 논란의 중심에 놓이다허균에게 매창의 존재란문제의 시를 지은 주인공파문의 중심에서새장에 갇힌 새가 날아가듯시로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다매창의 죽음, 그 이후

 

10장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맑고 고운 노랫소리로매창을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대대손손 사랑받은 까닭

 

주석주요 저술 및 참고문헌 목록연보찾아보기

 

평전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앞서 살아간 옛사람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마음과 시대를 헤아려보는 여정일 겁니다. 우리는 그런 여정에서 나 자신이 옛사람이 되어 헤아려보기도 하고, 옛사람이 내 귀에 속내를 속삭여주는 경이로운 체험을 맛보기도 할 것입니다. 때론 앞길을 설계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겠지요. 퇴계 이황은 그런 경지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까라고.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옛사람이 맞닥뜨린 갈등과 옛사람이 고민했던 선택을 헤아리며 그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는 그런 가슴 벅찬 공명이 가능한 까닭은 그도 나도 시대를 벗어나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란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것이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 시대에 굳이 평전이 필요한 까닭일 것입니다.

-한겨레역사인물평전 발간의 글중에서

 

통념에 갇힌 기생의 이미지, 그 허상을 벗기다!

실증적 자료를 통해 되살려낸 기생 매창의 숨겨진 이야기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꽃이라 하여 노류장화(路柳墻花)’라 일컬어졌던 수많은 기생들. 이 말에는 기생을 하찮게 여기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멸시와 그들에게 웃음을 팔아야 했던 여인들의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남자들만의 세계, 양반들만의 세상에서 천민으로 살아간 기생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기생들 가운데 유독 매창은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평생토록 유희경을 유일한 정인으로 삼으며 춤과 노래, 시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펼치다가 38세에 짧은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기생. 하지만 그녀가 일편단심의 사랑을 했다는 통념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각색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 혹은 후대 사람들의 각색을 폄하할 순 없다. 매창은 허균을 비롯한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름을 떨쳤다. 그녀가 당대 사람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예술과 사랑을 나누었고, 그런 그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시대를 넘어 지속되었기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 아닐까. 이 책은 매창과 그 주변 사람들의 관련 자료들을 씨줄과 날줄 엮듯 엮어가며 그녀의 삶을 복원한다. 섬세한 시와 따스한 사랑이 녹아 있는, 인간 매창의 모습을 만나보자.

 

사랑은 과연 하나뿐인가, 일편단심만이 사랑인가?

지고지순함으로 가려진 조선 명기의 본모습을 찾아서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지라 학창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일별했을 이 시조에는 임과 이별하는 매창의 안타까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기생이란 여러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지만, 매창은 한평생 이 시조에 등장하는 임, 즉 유희경(劉希慶)만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과연 실제로 그러했을까? 기생이었던 매창이 일편단심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가능했을까? 또한 그것이 매창을 드높여 칭송하는 이유였을까?

 

매창이 유희경만을 사랑했다는 에피소드는 1876년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곡원류(歌曲源流)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는 위의 시조와 함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자 매창이 이 노래를 지어 수절했다는 짧은 설명이 덧붙여 있다. 이는 매창이 유희경만을 사랑하며 수절했다는 오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물론 매창의 시조가 뿜어내는 애절함이 그녀를 지고지순한 여인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힘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덧붙이자면, 매창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의 풍토도 한몫했다. 열녀를 칭송하는 담론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도 강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으며, 이를 통해 기생 매창의 지고지순한 이미지가 구축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그녀의 다채로운 면모를 주목하는 데 방해요인이 되었다. 또한 실제로 매창이 유희경 한 사람만을 곁에 두었던 것도 아니다. 매창이 지은 시편들, 그리고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남긴 여러 자료들을 통해 그녀의 삶을 간략히 재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매창은 1573년 전북 부안에서 아전 이탕종(李湯從)과 관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와 춤, 악기를 익혔고, 수령 주변에서 갖은 심부름을 하며 성장했다. 앞서 언급한 내용과 달리 매창은 여느 기생들처럼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했다. 유희경과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누다 헤어졌고, 이후에는 서울에서 첩살이를 하기도 했다. 당시의 기생에게 첩살이란 좀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으며, 특히 매창은 이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부안에 있었더라면 기축옥사에서 역모에 연루되어 죽은 전라도사(全羅道事) 조대중(曺大中)과 함께 저세상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청춘을 보낸 매창은, 퇴기 취급을 받을 나이에 다다르면서 오히려 시를 짓는 시기(詩妓)로서의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각종 연회에 초대받아 양반들과 시를 주고받고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연회의 흥을 돋우는 기생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대 최고의 시비평가였던 허균과 교유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매창에게 행운과 함께 불행도 가져다주었다. 연인이었던 윤선(尹鐥)의 선정비 옆에서 매창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 일이 엉뚱하게 비화되어 허균을 비롯한 벗들, 그리고 매창의 말년에도 생채기를 냈기 때문이다. 38세의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삶은, 이처럼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기생 매창의 삶을 다룬 최초의 평전

매창과 문인들의 시를 비롯한 각종 사료를 통해 그녀의 삶을 복원한다!

 

우리 역사 속 인물들 중 평전을 집필할 만큼 사료가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 얼마나 될까.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들이란, 대부분 당대에 권력을 누렸던 이들이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권력과 거리가 멀었거나 신분이 낮은 인물의 경우 현재에 그들의 삶을 재구하는 일은 지난해 보인다. 게다가 한 인물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평전을 집필할 때는 더더욱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창 역시 많은 사료가 전해오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가 당대에 명성을 얻어 황진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기생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또한 당나라 최고의 여류시인인 설도(薛濤)와 견줄 만하다는 찬사를 받으며 저명한 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천민이라는 신분은 그녀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충분한 제약이 되었다. 이러한 제약은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매창 평전은 우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매창의 시 58,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시들을 기초 자료로 사용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조선시대에 창작된 고아하고 품격 있는 시들을 통해 매창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매창 주변 인물들의 문집 역시 평전 집필을 위한 실증적 자료로 사용되었다. 다행히도 매창이 유희경, 허균, 이귀, 고홍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양반들과 당당한 벗으로 교유한 덕분에 그들의 문집에 매창에 관한 기록들이 간간히 남아 있고, 그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매창의 삶을 재구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을 평전 집필의 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했다. 그리하여 더해진 것이 기생의 일반론과 관련한 사료들이다. 성장 후의 매창에 관한 자료들은 다소 남아 있지만, 어린 시절 매창에 관한 자료는 그 어디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다른 어린 기생의 삶을 기록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일반론을 도출해내어 비어 있는 삶의 편린들을 추정해보는 방식으로 매창을 그려낸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이매창 평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기생 매창의 삶을 오롯이 복원해낸 작업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기생사(妓生史)를 조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즉 이번 평전은 매창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면서 역사 속에 잠들어 실체에 대한 조명이 미흡했던 기생의 삶을 실증적으로 복원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소설을 비롯해서 드라마나 영화 등 많은 매체들에서 기생이란 존재에 주목하는 것은, 소재의 특이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실에 부합하는 실증적 연구들은 좀더 진척되어야 할 터. 이매창 평전은 구체적인 자료의 고증을 통해 조선 중기의 대표적 기생인 매창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그려낸다. 눈 밝은 연구자의 고증을 통해 당대 문인들과 당당히 교유한 시기(詩妓)이자 사랑에 아파하며 눈물 흘리던 여인 매창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련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꽃을 잡고 파란만장한 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 저자 신현규|경덕출판사 |2005.

목차

 

추천사

발간에 대한 변명

 

1장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생이란

오늘날 연예인 같은 기생

기생 사진엽서의 식민지 타자화 이미지

조선 관광안내 책자와 박람회에서의 기생

기생과 인력거, 그리고 자동차

 

2장 기생조합 권번 시대가 열리고

서울의 권번과 지방 권번의 모습들

서울의 요릿집과 기생촌

평양 기생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칠까

권번의 기능과 직업으로서의 기생

 

3장 파란만장한 기생의 일생

죽음으로 보여준 지독한 사랑

단발머리 남장소녀

동백꽃 같은 내 사랑

나는야 인텔리 기생

신세대 연기파로 기억해주세요

그 때의 인기가수를 기억하시나요

기생은 생계형 예술은 자기만족

잠꾸러기 미인의 연인, 메밀꽃 필 무렵

팔방미인의 회고

내 사상을 이해해주세요

왜 미인은 박명일까

민요의 여왕

나는 오디오형 가수

얼짱 기생의 귀여운 선택

여성들이여 가정을 버려라

손병희 선생과의 사랑

지아비의 뜻이라면

 

4장 파란만장한 기생의 모습들

1.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고

2.미인 얼짱 화초기생

3.세상 속으로 행동하고

4.넘치는 끼를 소리에 품고

5.소용돌이치는 그녀들의 삶

6.이런 기생은 조심 하세요

7.우리도 책 내요-기생 잡지 <장한> 글 모음

 

인명색인

13세 어린 나이에 술집에 의탁 전전하다가 19세에 민요가수로 대출세한 그녀는 남자 없이는 단 하룻밤도 못 산다는 말이 떠돌 만큼 뜨거운 여자이기도 하였다. 왼손의 둘째, 셋째 손가락의 절반이 온통 노랑 물감을 들인 것처럼 담뱃진이 배어 있는 골초이기도 했다. 워낙 골초인데다 말년에는 아편에까지 손을 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일제 말기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들을 상대로 한 쇼 공연에서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가짜 이화자를 등장시키기까지 했을 정도로 해외 교포 사회에서도 이화자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 p.154 '민요의 여왕 이화자' 중에서

 

그해 잡지 <삼천리>와의 대담에서 복혜숙은 기생이 된 이유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서울서 이화학당에 다닐 때는 입으로 괴테·바이런의 시를 외우면서 <부확>네튜로브 공작같은 순정적 남성을 그리었지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그런 연애를 그리었지요. 사내란 상냥하고 다정하고, 깨끗하고, 착한 어른이거니 하였었지요.

이 생각은 요코하마에 유학할 때나 동경유학생시대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그 때는 인생이 열분 분홍안개 속에 잠기어 판도라의 상자 모양으로 온갖 신비와 온갖 미지의 행복이 그 속 깊이 감추어 있는 듯 하였지요. 내가 걸어야 할 거리거리에는 장미꽃이 송이송이 피고, 에그 다 말해 무었해요.

그리던 것이 사내들에게 속기 시작하여, ‘청춘은 덧없이 시들고 세상일은 내 뜻대로 안되고 보니 자유로운 새나 된다고 여배우, 기생, 끽다점 마담으로 구르고 굴러 오늘에 왔지요. 이마엔 주름살 잡히고, 이제는 이성 육체의 비밀까지 다 알고 앉으매 세상의 대부분은 다 알아진 듯해요. --- p.118~119 '나는야 인텔리 기생 복혜숙'중에서

 

Aguas Passadas - Piedade Fern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