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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전범이 된 조선청년

by 이성근 2018. 1. 27.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저자 이학래|역자 김종익|민연 |2017.12.

원제 敎科書かれなかった戰爭 PART64

 

저자 이학래는 1925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일본군의 포로 감시원 모집에 응모하여, 19429월부터 19458월까지 일본군 군무원으로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 감시 업무에 종사했다. 1947320일 전범으로 체포되어 오스트레일리아 관할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1720년으로 감형되었다.

 

일본인으로 취급되어 중형을 살았지만, 일본 정부는 외국인으로 구분해 원호와 보상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1955년 처지가 같은 한국·조선인 전 BC급 전범자와 함께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현재까지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동진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한국 독자 여러분께

 

죽음의 철로포로 감시원

포로 감시원이 되기까지

패전, 역전되는 입장

사형 판결과 죽음을 각오한여덟 달

스가모 프리즌Sugamo Prison이라는 곳

택시 회사 설립과 유골 송환 운동

조리條理를 요구하는 재판 투쟁

일본 정부의 대응을 요구하는 입법 운동으로

 

한국어판 후기

끝나지 않은 질문,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 우쓰미 아이코

오늘 하루, 이학래가 되어 보자 - 이상의

역자후기

 

특정 연합국 재판 피구금자 등에 대한 특별급부금 지급에 관한 법률안

이학래 연보

참고 문헌

이 책의 이해를 돕는 키워드

 

출판사 서평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부문에 걸쳐 국가의 총력을 총동원하는 전쟁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조선인들도 대거 동원됐다.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까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약 8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민간인 군무원, 포로감시원이 그들이다.

 

지원을 빙자한 강제동원, 포로감시원

1942523일 매일신보 1면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렸다. 민간인 군무원으로 수천 명을 채용한다고 했고, ‘반도청년의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라고 했다. 20~35세의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청년들이 모집 대상이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달랐다.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강제동원이었다.

 

징병제 시행이 발표된 시점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언젠가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이때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로감시원이 되면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포로감시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열일곱 최연소의 나이로 포로감시원이 된 이학래

이학래는 열일곱의 나이로 최연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3,000여 명의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부대의 훈련소로 끌려가 훈련을 받았다. 민간인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그들이 받은 건 철저한 군대식 교육이었다. 포로는 감시와 감독의 대상일 뿐,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고 배웠다.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이려면 협박과 구타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들이 너희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게 될 거라고 배웠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각지로 파견되어 13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감독했다. 이학래도 타이에서 11천명의 포로들을 만났다. 후일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에 자리했다. 이학래는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 A급 전범 18명 사형, 한국인 BC급 전범 23명 사형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기 위해 재판을 시작했다. 동남아시아 49곳에서 BC급 전범재판이 벌어졌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이학래와 같은 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 감시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로 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이학래는 1947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이학래는 환자에게 무리하게 노역을 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는 그가 말단의 군무원일 뿐, 포로와 관련하여 어느 것도 결정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학래는 7개월간 사형수로 살았다. 이후 감형되어 수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맡아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되어야 했을까? 이학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와 평생 동안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에 자신의 한 손을 빌려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과 각성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끝까지 망설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전범이 되어야했던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주신다면 좋겠다.

여기 역사의 희생자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이 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을 내기로 결심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를 움직이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해설] 오늘 하루, 이학래가 되어 보자

이상의(인천대학교 초빙교수)

 

1.

전범戰犯, 무서운 말이다. 더욱이 조선인 전범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데 수십 년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면 참으로 두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구순을 넘긴 이학래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BC급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과정과 이후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해 써내려간 글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 속에 휘몰려 어찌할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해서.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진행하면서 그 중 한 주는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에 대한 내용을 수업한다. 이를 통해 역사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하곤 하는데, 한 학기 수업 중 학생들이 가장 진지하면서도 가슴 아리게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일본의 시종일관 무책임한 태도에 분개하는 학생도 있고,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학생도 있고, 역사의 비정함을 탓하는 학생도 있다. 토론의 결론은 대개 뒤틀린 역사 속의 억울한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2. 전쟁 그리고 강제동원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쟁과 영토 확대로 연속된 일본의 근대사는 우리의 근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중에도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과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황국신민 운운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시켜간 시기다.

 

일제는 전시에 정부는 어떠한 것이든 다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국가총동원법을 급조하고 그에 근거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여기에서 강제란 육체적인 강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인 구속·회유, 취업사기, 법적인 강제에 의한 인력동원도 강제동원에 포함된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물리적 강제만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대되는 행위는 강제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3·1운동 이후의 민족분열통치를 일제가 문화통치라고 불렀다고 해서 우리가 문화적인 통치였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 게다. 마찬가지로 지원이라 부르면서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 지원을 하도록 하면, 그것은 형식상은 지원이지만 실제로는 지원이 아닌 강제동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한 1938년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800만명에 가깝다. 그 중에는 이학래 등의 포로감시원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노무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필 포로감시 일을 맡은 군무원, 포로감시원이었다. 아니 그 일을 지원했다고 한다. 포로감시를 하고 싶어 지원했을까, 포로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지원했을까.

 

1942년 일제는 조만간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전까지는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청년들을 부분적으로 병력에 동원했지만, 1944년부터는 전면적인 동원으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후 신문에는 모집! 포로감시원, 거듭되는 반도청년의 영광, 군속으로 수천 명 채용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대상은 20~35세의 국민학교 졸업 이상의 남자로, 형식상은 모집이었으나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하여 행정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징병제 시행을 앞두고 지원이라는 허울을 쓴 채 추진한 강제동원이었다.

 

언젠가는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이들에게, 포로감시원에 지원하면 2년간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 준다는 말은 반가운 제안이었다. 2년만 무사히 지내면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징병이 되어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솔깃한 조건이었다. 태평양전쟁기 13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노역시키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일본군 조직의 최말단에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3,200여 명이 포로감시원이 되었고, 지금의 부산시민공원 자리에 있던 노구치부대의 임시군속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군사훈련을 받았고, 포로가 되는 것은 수치라는 말, 체구가 큰 연합군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는 말을 새겨들었다.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만불손한 포로들이 무시하게 될 거라고,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구타와 협박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수없이 들었지만, 전쟁포로를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한 제네바협약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학래는 포로들을 만났다. 그들을 감시하고 관리하였다. 일본인 하사관 17명과 조선인 군무원 130명이 11천명의 포로를 관리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 포로들, 덩치가 큰 포로들, 명예로운 대우를 원했던 포로들, 당당하게 휘파람 부는 낯선 포로들과 마주하였다.

 

3. 전후의 전범재판

2차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진행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범죄와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재판을 진행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7개국 주도로 동남아시아 49곳에서 BC급 전범재판이 행해졌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에는 148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일제의 전쟁 책임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전가되었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전범 판결을 받은 조선인 148명 중 대다수인 129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일하던 군무원이었다.

 

재판은 일심즉결로 진행되었다. 대개의 경우 연합군 포로의 증언이 포로감시원의 생사를 결정하였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의 맨 앞에서 매일 포로와 마주했던 존재로서, 포로들은 그들을 눈앞에서 학대했던 감시원으로 고발하였다. 판사, 검사, 변호인은 연합군에서 지명하였고, 검사측 증인만 있었으며, 진술할 기회와 통역이 없는 법정도 있었다.

 

조국은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로감시원들은 귀국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본인으로서 연합국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조국을 해방시킨연합군에게 전범으로 판결을 받았고, 수형자가 되었고, 사형을 당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를 배운 식민지민으로서, 황민화교육을 받고 일본을 위해 분투한 자신의 무지가 후회스럽다고 재판정에서 한탄한 사람도 있었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포로를 학대했다는 것이다.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금기시하는 일본군과 포로 학대를 범죄시하는 연합군의 인식 차이가 판결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감시 체계에 따라 노역을 시켰고 일본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보급되지 않아 포로들에게 줄 수 없었지만, 이러한 사정은 재판정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독일 나치에 붙잡힌 영·미군의 포로 사망률이 3.6%였던 데 비해 일본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이 무려 27%에 달하는 데 분노하여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이학래 역시 1947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수용소 포로가 죽은 책임을 이학래에게 물었다. 변호사는 그가 군속일 뿐 캠프를 지휘할 권한이 없었으며, 약품공급, 식량배급, 포로의 일상과 관련된 결정은 그의 직무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고 하였다. 재판 결과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유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석방되었으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그 처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 누가 이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는가

도대체 일본은, 연합국은, 미군정은, 한국정부는, 그리고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한국정부의 책임, 일본정부의 책임,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의 책임, 그리고 아,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1) 연합국의 전범재판과 조선인의 이중 피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연합군의 포로 4명 중 1명이 사망한 전쟁인 동시에 일제가 1,800만 명이 넘는 아시아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이다. 연합국은 전범 재판에서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민간인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비중 있게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아시아의 피해국들은 그 재판에 참가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이 재판에서 조선과 타이완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군인과 군무원을 일본인으로 심판하는 잘못을 범했다.

 

전범재판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처벌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재판에는 국제정치의 틀에서 승자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조선인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한 일본도,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전범으로 처벌한 연합국도 모두 제국주의 시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민을 수탈한 가해자였다. 재판에서는 전쟁에 강제동원된 식민지민으로서,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포로들을 관리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특수한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주의 침략 과정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가해자로 몰리면서 전범으로 희생되어 이중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수용소에 배치된 이후 일본인과 연합군 포로 사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가해자 일본에게 버림받고 피해자 연합군에게 비난받았다. 당시 포로감시원의 행위 그 자체는 존재했지만, 이들에게 씌워진 전쟁범죄의 책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이들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진 전범이 되고, 나아가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을 물은 재판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나. 연합국의 재판에서는 이들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그 책임이 식민지민에게 전가되고, 개인의 인생이 무참히 짓밟힌 과정을 그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2) 일본의 전쟁책임 전가와 보상 회피

연합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해 일본정부에 일본인의 형 집행을 위임하였다. 포로감시원들은 19524월 조약의 발효와 함께 일본 동경에 있는 스가모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조약에는 이후의 형 집행은 일본인에 한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일본 법원은 이들이 선고 당시 일본인이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여 형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후 이들의 원호, 보상에 대해서는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를 들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해 형 집행을 계속했던 일본정부가 이번에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인의 이름으로 동원되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고,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후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일본인 군인, 군무원과 전범에게는 연금, 위로금, 유족연금이 지급되었고, 타이완인에게도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한국 국적자들에게는 아무런 배상이나 보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일회담 일괄타결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한일회담에서는 이들의 문제가 논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정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학래를 비롯한 한국인 BC급 전범과 유족들은 199111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전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사람들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에게 응당한 사죄와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긴 기간을 거쳐 나온 최고재판소의 결정은 기각이었다.

 

이러한 조치와는 반대로 일본정부는 1997년부터 연합군 포로의 초빙사업을 벌이고 그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5년 미국에 방문한 일본총리 아베신조는 미군포로를 초청해 함께 만찬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포로감시를 시키고 책임을 떠넘겼던 조선인들은 방치하고 있다.

 

일본은 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일본군 조직의 맨 밑바닥에서 상관에게 명령받은 내용을 포로에게 전달하고 관리하는 것이 포로감시원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 천황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없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도록 명령한 일본군 실무자들도 면책이 되었지만, 가난을 벗고 징병을 피하기 위해 군속이 된 조선농촌의 17살 소년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으로 동원된 이들이 왜 침략자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들을 외면하면서 역사의 희생양으로 만들 것인가. 한일 간에는 역사 차원에서 진정한 반성과 사과의 과정이 필요하다.

 

3) 한국사회의 방관 그리고 무책임

이학래는 전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개월간 사형수로 수용되어 있었다.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1년가량 구금되어 있다가 195610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친일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려 일제에 의한 희생자를 부일협력자로 취급하며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다.

 

친일세력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일제 지배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부일반역자라니, 화살의 방향이 잘못 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었다. 배신과 기만으로 자신의 안일만 꾀해온 진짜 친일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회가 오도되었다. 지켜주지 못한 이들에게 또 한 번 올가미를 씌워 귀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미숙함이 이들을 힘들게 했다면 이제라도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편지를 쓰면 빨갱이로 취급하여 고향의 가족을 못살게 굴고, 모처럼 귀국하면 형사가 따라 다니고, 일본정부에 마땅한 배상과 보상을 요구할 때 외교적으로 보호하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청구권 협정을 맺어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국가가 있었다. 하지만 강제로 동원되는 것을 막아주고, 부당한 재판과 형 집행에서 보호해주고,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가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국가에 대해 이들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2006년 한국정부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하였다. 전후 재판에서 전범으로 판결 받은 포로감시원 129명 중 86, 사형수 14명 중 13명에 대해 한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이들이 2차대전의 전범이 아닌 강제동원된 피해자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정’, 그 뿐이었다. 일본도 연합국도 해방 후 우리의 정치를 담당했던 미군도 한국정부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아직 다하지 못한 책임이 남아 있다.

 

5.

이들에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이들에겐 아직 식민지 지배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아직 귀국하지 못했다. 17살 소년으로 강제동원되어 92살 노인이 되도록 귀국하지 못하는 이들을 언제까지 방치하고 외면할 것인가. 그를 가두었던 형무소마저 사라진지 오래인데 그에게 여전히 히로무라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이들이 차라리 해방되지 않은 조국을 원했어야 하는 것인가. 이들을 전범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자. 하여 그를 히로무라아닌 이학래로 살도록 하자.

이학래는 비정상적인 역사의 희생양, 마침내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뒤틀린 역사의 상징이다. 이영채 교수는 말했다. “나는 이학래다.” 그래, 우리 모두 하루쯤은 이학래가 되어 보자. 그 기막힘, 그 억울함을 단 하루라도 겪어본다면 이들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이학래는 이 책에서 일본의 전범으로서 책임을 떠안고 죽어 간 동료들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책무입니다.”라고 한다. 고령의 몸으로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고 책임이라는 것이다. 60년 세월을 참고 또 참으면서 그 일을 위해 싸워온 그에게 전하고 싶다. “이학래님, 그 일은 우리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버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많이 미안합니다.”

 

 

60년 넘게 일본정부와 싸운 92'BC급 전범' 이학래

이학래 선생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

1948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7명에게 교수형, 나머지 18명에게는 종신형과 유기금고형이 선고됐다. 이로써 '평화에 대한 죄'의 용의자인 A급 전범에 대한 단죄가 끝났지만 '전쟁 범죄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규정한 포츠담선언에 따른 이 재판은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다(관련 글 : 1948년 오늘-도쿄재판, 일본 전범 7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태평양전쟁의 최대 책임자였던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비롯해 적지 않은 전쟁범죄자들이 처벌을 비켜 갔기 때문이었다. 맥아더의 참모였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찰스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장군이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고 한 언급은 그런 상황을 에둘러 짚은 것이었다.

 

'BC급 전범'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

난징대학살(1937)의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를 비롯한 주요 일본 왕족들도 처벌을 면했다. 왕족으로선 유일하게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만이 전범 지명자 명단 안에 포함됐지만, 그 역시 불기소로 석방됐기 때문이다.

 

생체 실험 부대인 731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와 관계자들 역시 미국에 연구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 밖에 만주국의 실력자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석방됐다.

 

도쿄재판에서 불기소로 석방된 A급 전범 가운데 기시 노부스케가 뒷날 총리가 되고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전후 우익의 실세가 된 배경이다. 처벌받아야 할 전쟁범죄자들은 전후 일본의 주류로 복귀했다. 지금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B, C급 전범은 각각 '통례의 전쟁 범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의 용의자다. ABC의 구분은 죄의 경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A급 전범이 주로 일본군이나 정부의 고위 지도자였고, BC급에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이 수행했던 포로 감시원과 같은 하위 군인과 군무원이 포함돼 있었으니 그런 뉘앙스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연합국 피해 당사국에 의해 이뤄졌다. 주로 포로 학대 혐의로 기소된 BC급 전범 가운데에는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고, 125명이 유·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오트럼 형무소에서 스가모 프리즌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전범들.(19518)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저자.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전범 재판을 담당하는 '국제군사재판소 헌장''모국어로 재판받을 권리와 변호권을 인정'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변호는 일본인 변호사가 맡았고 재판은 영어로 진행됐다.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변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목숨을 잃거나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1925~ )2016년에 일본에서 펴낸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의 한국어판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온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이 책은 1956년 도쿄 스가모형무소에서 가석방된 뒤, 이학래가 청원과 진정, 소송 등으로 일본 정부와 싸워온 61년간의 집념 어린 교섭 투쟁의 기록이다.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삶'(옮긴이 김종익)의 자취다.

 

그가 조선인 전범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요청서를 제출한 상대는 1955년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총리) 이후 아베 신조까지 역대 총리 2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답변은 한결같이 '배상과 보상'"한일조약으로 이미 해결이 완료됐다"였다.

 

지난해 벽두, 이학래는 2017년도 새 수첩에 올해의 목표로 "법안 제출, 입법"을 써넣었다. 신년 수첩에 BC급 전범 모임인 '동진회'(東進會) 운동의 경과 등을 적어넣고, 따로 유골 송환의 경과와 자살자에 관한 내용과 그 해의 운동 방침을 기록하는 것은 그가 동진회 활동을 하면서 해마다 반복하는 일이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운동 방침과 목표를 기록했지만 그게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는 한 그 실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죽어간 동료, 그중에서도 사형당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헛수고로 끝날 것 같은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지치지 않고 이어온 힘은 '내일, 내일하며 사형 집행에 떨며 지낸 8개월, 그사이 떠나보낸 동료의 얼굴, 교수대 발판이 떨어지는 소리, 사형수 감방 벽에 새겨진 글자와 손톱자국'(우쓰미 아이코) 같은 동료의 유한(遺恨)이었다.

 

1962년 저자는 부친의 환갑잔치를 위해 열일곱 살에 고향을 떠난 후 20년 만에 귀국했다. 뒷줄 가운데가 저자, 왼쪽과 오른쪽은 남동생과 여동생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전남 보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학래가 1942년 포로 감시원에 지원했을 때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시험을 보라는 면사무소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려웠으니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부친도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2년 계약이고, 병역도 면제된다면, 어차피 어딘가는 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마지못해 허락해줬다.

 

조선 전역에서 모집된 3224명과 함께 부산에서 훈련을 받고 배로 베트남으로 이동한 뒤 그는 타이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일본은 타이, 자바, 말레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감시원은 조선인 군무원을, 필리핀과 보르네오 포로수용소의 포로 감시원은 대만인을 배치했던 것이다.

 

아무런 권한 없는 포로감시원 23명이 처형됐다

이학래는 후일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415km의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 투입된 연합군 포로감시 업무를 맡았다.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수시로 끊긴 현장에서 포로들은 콜레라 등 전염병과 각종 열대성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그들을 감시하는 조선인 군무원들은 포로들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

 

건설 현장에 동원된 포로 55000명 중에서 13000명이 사망할 정도였으니 타이·미얀마 철도는 '강제노동''기아' '구타' 등의 '학대'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패전 후 포로의 원한이 폭발하면서 포로 감시원은 전범 재판에서 추궁의 표적이 됐다.

 

감시원의 얼굴은 물론 이름과 별명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포로들의 증언에 따라 조선인 포로 감시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전범으로 기소됐다. 연합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관리는 포로 대우를 정한 제네바 조약을 위반하고 있었고 포로 감시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제네바 조약에 위배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인도네시아의 항일 비밀결사인 고려독립청년당 사건을 다룬 <적도에 묻히다>(역사비평사, 2012)를 쓴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는 동진회 활동을 일관해 지지하고 도와주었다.(2012. 11. 6.)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부산의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포로 감시원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주입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군 포로를 강제노동에 동원했던 수용소 책임자이며 이학래의 상관이었던 분견소장 우스키 중위와 철도대 소대장 히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변호인은 이학래가 말단의 군무원일 뿐, 포로와 관련해 아무것도 결정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호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학래는 결국 1947년 첫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 그는 7개월간 사형수로 살았고 20년으로 감형돼 복역하다가 1956년에 가석방됐다.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열일곱에 떠나온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 동료 넷은 처형됐고 셋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유기형으로 감형됐다. 이학래는 자신이 왜 전범이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갓 스무 살이었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는 뒷날, 태평양전쟁의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고 술회한다.

 

조선인 전범 148명 가운데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현장에 배치된 포로 감시원 3016명 가운데 전범이 129명이나 나왔다. 일본군 가운데서도 이 정도 비율의 전범을 낸 부대는 없었다. 그것은 전범 재판에서 연합국이 조선인과 타이완인을 '일본인'으로 재판하는 데 합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져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돼야 했을까. 이학래는 이 물음을 화두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그것은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스러져간 동료와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참으로 길고 긴 싸움이었다.

 

그가 1955년 동료 70명과 함께 '한국 출신 전범 동진회'를 설립한 뒤 당시 수상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조기 석방과 생활 보장, 유골 송환 등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일본이 자신들에게 포로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기고 자신들을 방치한 데 대해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 초빙사업을 벌여 2015년까지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네덜란드 등의 전 포로와 가족 백 몇십 명을 초대했다. 외무장관이 이들을 면담하고 과거를 사죄하고 있으면서 정작 일본은 한국 전범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2005년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외교 문서로 '일본 전범으로 형을 받은 한국인의 문제는 애당초 한일회담 의제에 올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었다. 이는 한국인 전범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답변이 전적으로 궤변이라는 증거였음을 이학래는 지적한다(관련 글 : 1965, 한일기본조약 조인,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한국인 전범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는 자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전범의 멍에를 뒤집어썼고, 거기에다 조국의 전후 부흥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일을 전혀 꿈꾸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학래는 한국인 전범 피해 문제가 한일 교섭 초기부터 청구권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에 분노와 비애를 금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2006년 한국정부는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한국인 BC급 전범자를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했고, 보상책에 따라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한 위로금과 생존자 의료비를 지원했다. 비록 일본 거주 전범들에게는 지원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사망한 동진회원까지 이 신청에 응해 강제동원 피해를 인정받은 사실을 그는 조국이 인정하는 명예회복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19918, 오스트레일리아의 캠벨에서 만난 옛 포로 던롭 씨(가운데)와 함께 하며 과거를 사죄하고 용서받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91, 이학래는 7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국가 보상 등 청구사건을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해에 그와 동료들은 군무원으로 3, 전범으로 6, 정신병원에서 무려 40년을 보낸 이영길을 보냈다. 여름의 불꽃놀이를 함포 사격으로 착각해 겁에 질렸던 그를 보내며 그들은 망가진 그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책임을 추궁해 가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 소송은 1996년 도쿄지방법원이, 1998년에는 도쿄고등법원이 각각 청구를 기각했다. 1999년에는 최고재판소가 피해를 인정하고 입법부에 입법 조치를 촉구하는 판시를 했지만 역시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동진회원들은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입법' 운동을 이어왔지만, 여전히 입법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2017년 현재, 이학래는 포로 감시원으로 3, 전범으로 교도소에서 11,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며 61년을 보내고 올해 92세가 됐다. 1991년 제기했던 소송의 원고 7명 가운데, 전범 출신으로 살아남은 이는 그뿐이다.

 

일본과의 싸움 61, 아흔둘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1961년 서른여섯 살 때 동포인 강복순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그해, 모친이 사망했고 이듬해 부친의 환갑을 위해 20년 만에 귀향했다. 그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것은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다녀갔다. 아예 일본서 모시겠다고 했지만 부친은 마음을 바꿔 귀국했는데 친구들에게 "내 아들은 훌륭한 집을 짓고 사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했다고 한다. 부친은 17살에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홀로 선 맏이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회고록이지만 책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하다. 일본 문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은이는 놀라운 자제력으로 자신의 파란 많은 삶을, 거듭되는 좌절과 절망을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펼쳐놓는다. 61년 동안의 싸움에도 지치지 않는 것은 '삶과 존재가 일치'(김종익)하는 그의 의지와 신념의 힘이다.

 

그는 분노도 절망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기쁨과 기대도 함부로 표현하지 아니한다. 밋밋한 서술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술인데도 글쓴이의 절제가 빚어내는 것은 옹근 감동의 울림이 아닌가 싶다. 그가 담담하게 서술한 끝에 "신혼여행은 아타미(熱海)로 갔다"는 대목과 결혼식 사진, 부친과의 단란한 한때를 읽으면서 내가 나지막하게 흐느꼈던 이유다.

 

식민지 조선의 열일곱 소년이 역사적 격랑을 헤쳐나오면서 보여주는 인식과 투쟁은 그가 역사의 희생양이면서도 오히려 역사 앞에서 자신의 책무를 찾아내 거기 헌신하는 놀라운 반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한국 사회의 방관과 무책임을 환기해 준다. 이 아흔 노인의 맑고 그윽한 눈빛 앞에서 우리가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유다.

 

92세 고령에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BC급 전범 이학래 앞에 남은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올 2018년의 수첩에 적은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 목표는 실현될 수 있을까. 이 자서전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일본과 일본인에게 묻는다.

 

"전범이 되어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 간 동료들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해야 합니다.

 

제가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면 저는 납득하고 요구를 취하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합리한 요구일까요? 이것은 조선인 BC급 전범자인 제가 일본의 여러분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일본인 여러분의 정의와 도덕심에 다시 한번 강하게 호소합니다."

 

이 질문은 그가 지난 60년 넘게 모색했던,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동시에 이에 답하는 것은 그 진실의 확인이며 도덕과 정의의 추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일본은, 일본인은 알고 있을까. 오마이뉴스 1.27 / 장호철

 

남양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저자 조성윤|당산서원 |2017.11


목차

                

남양군도 연구에서의 회고록의 가치

회고록 서문(1981)

회고록 서문(1995)

어린 시절 회고

만주로 가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 단기대학으로 가다

동경고등척식학교

만주의 꿈은 수포가 되고 귀향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남양무역에 입사

사이판 지점으로 전근사령(轉勤辭令)을 받고

사이판섬에 상륙하여 상하(常夏)의 나라를 구경하다

파간섬으로 첫 부임사령(赴任辭令)을 받음

파간도() 상륙과 남양무역사무소

도민 인부들과의 충돌

파간섬에서 6개월 동안

자살한 오키나와 사람을 목격

일본인 하라())라는 자의 가면(假面)

사리간섬에서 3년을

사사모토는 관리인일 뿐 나는 남양무역회사 사원 견습인

사리간의 실태

양돈과 면화 재배의 실태

들쥐(野鼠) 퇴치(退治)

사사모토(笹本) 가족의 반목을 해소

인부들에게 오락을, 자녀들에게 간이초급 교육을

3년에 한 번인 귀성(歸省)이 연기되어 한 달 동안 사이판 지점에서 휴가, 10 일여에 바닥

섬사람은 섬에서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

아라마간섬으로 영전(榮轉)

신임(新任)된 후 새 출발을 구상

전쟁 시국 하에서 벗어난 이도(離島)는 평화의 나날이다

年中行事로 오락과 위안을

낚시와 쏠창 대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종자 돼지 새끼 도살 사건

정사(情事) 혐의(嫌疑) 소동

손손 부락에서 일어난 감독 가족과 다른 가족의 항쟁

마리아나군도(群島)는 적군 점령이 되려는 날만 가까워

육군 조사대 아라마간섬 상륙

시라미 함대(艦隊) 유인(誘引)으로 대환영하는 밤

드디어 예상했던 징용령이 내렸다

파간 섬에서 14개월 동안 생애 처음의 전쟁 경험

파간섬 미 기동대(機動隊)의 공습 하에서 생사의 투쟁(斗爭)으로

매일(每日)이 비행장 폭탄 맞아 뚫린 구멍 메우기 작전

야간작업(夜間作業)

돼지 잡이 일대 사건

비행장 수리작업을 포기하고 해군 진지 구축으로

19449월이 아닌가. 설부대 소량배급도 종말(終末)

파간섬 남단(南端)으로 이동작전

만사는 오케이. 야마다와 나, 카누 선장 오하라, 일체감

바리야르 격절지(隔絶地)에서의 희비극

육군 내부의 갈등과 카누 1대 변상의 말다툼

현재의 처와의 애정, 드디어 결혼

아라마간섬 인부들을 위해 운명을 같이 해

만사(萬事)는 실패로 나는 송송으로 출두, 군법 재판을

일개인으로 전락(轉落) 생활에서 가지가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차이점과 기질

해방(解放)이 온다, 복잡했던 심경

파간 일본군 백기 게양(揭揚), 선상에서 항복서명

LST 미선(米船)으로 도민(島民)들 사이판으로 인양(引場)

사이판섬 상륙의 초보(初步)까지

백여 일 동안 민간 포로(捕虜)로서 사이판 한인캠프(Saipan Korean Camp)에서 지내던 기억.

캠프 자치 행정 조직

사법주임(司法主任)이란 감투를 쓰고

사법주임 행세(行勢) 중 기억이 나는 몇 가지

Camp 속의 인물들

우리 한민족은 해외에 살아도 단합(團合)이 힘들어

우리 캠프에서 보고 들은 소감(所感) 몇 가지

본국으로 인양(引揚)하는 교포들과 작별 후 이도(移島)

마쓰모토 라는 성으로 된 삽화

일제시대하 보고 들은 소견

회고록 소감

 

 

출판사 서평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36년 동안,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삶은 어땠을까. 어떤 이는 친일파로 살며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춘을 빼앗기고 아까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 시절을 살아냈던 어느 조선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경운이다. 한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평안도의 오산고보 24기 졸업생이었는데 중학 시절에는 홍준명, 이중섭과 함께 임파 임용련 선생의 그림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림은 취미에 그쳤다. 이중섭은 그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화가가 되었다. 그 또한 일본으로 유학하였지만 동경고등척식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생 전경운은 스물 다섯이 되던 1939년에 사이판섬으로 간다. 태평양의 섬들을 남양군도라고 칭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 제국은 태평양의 섬을 개간할 회사로 남양무역주식회사를 지원했고, 그 회사에서는 그곳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전경운은 남양무역주식회사의 사이판 지점에서 야자원 관리인이 되었다.

 

전경운은 일본 회사에 입사한 조선인이면서, 야자원에서 일하는 원주민 인부들에게는 일본인 관리자였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 또는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보다는 어떤 조직의 관리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열중한다. 그는 사이판섬 북쪽 5도에서 근무하며 야자원 관리에서의 효율화를 꾀한다. 그의 방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주변은 빠르게 변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사이판섬 또한 전쟁터로 변했다.

 

그가 있던 사이판의 주변 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은 그를 포함한 농장 인부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려 한다. 그는 징집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일본 회사의 사원이었다가 일본군의 명령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는 야자원에서 일하던 인부들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도우러 나갔고, 비행장 공사와 일본군의 식량조달 등의 일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그를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분류한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결혼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후로 그는 티니언섬으로 이주해 갔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친다. 1939년에 조국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은 그로 하여금 지난 삶을 기록하게 한다. 1981년에 쓴 그의 회고록의 제목은 <남양살이 40년을 회고>였다.

 

10여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쓴 첫 회고록을 잃어버린 그는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쓴다. 10여 년 사이 그는 조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고, 6.25 때 월남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 이후, 그는 첫 번째의 회고록에서는 쓰지 못했던, 평안북도 정주에서 살던 시기, 오산학교에 다니던 때의 추억을 덧붙인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쓰게 된 것이다.

 

그가 볼펜으로 쓰고 여러 번 복사해 묶은 회고록은 그 후 한국의 방송이나 역사가들에게도 전해졌고, 그가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정착해 살았던 티니언섬에도 일부 지인들에게 남아 있었다. 남양군도 연구, 특히 일제 강점기에 남양군도에 갔던 조선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조성윤 교수가 전경운이 남긴 회고록을 입수하였고, 내용을 편집하여 <남양 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를 살던 어느 조선인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그가 묘사한 사소한 장면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노동자 임금이나 물자의 가격, 일본군과 일본 회사의 경영 행태, 남양군도에 가게 된 조선인들과 그에 수반하는 모집책, 일본과 조선, 태평양 섬을 이동하는 교통편이나 남양군도에 살던 현지 주민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자필 회고록은 개인사 속에 펼쳐진 역사가 구체적이고 생생하기에 마치 어제 일을 보는 것처럼 잘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이 보고 느낀 남양군도의 사회와 문화 및 역사를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전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살던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나 인간적인 모습 등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고, 개인의 기록이 모여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해야만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후세로 이어진다.

그의 회고록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이었던 조선인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다양한 모습에서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한다. 어떤 사람의 개인사 속에서 사람을 보고, 그 너머의 역사를 보는 경험을, 이 책에서 하게 될 것이다.

 

엮은이의 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절에 지금은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고 부르는 태평양 섬 지역으로 이주했던 한국인들을 조사해 왔다. 그 시기 일본은 그 지역을 남양군도(南洋群島)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남양군도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노동자로, 병사로, 위안부로 끌려갔고,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된 지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남양군도에서 죽어간 이들을 잊고 있었다.

-티니언섬에서 나는 몇 명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90년 이후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 분들은 10년 이상 현지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일단 그분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다음 한 분씩 집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남양군도 시절에 이주해 와서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돌아가지 않고 남은 한국인 남성은 모두 원주민 여성과 결혼한 경우였다. 1세대로 남양군도 여러 섬에서 생활한 전경운(全慶運)의 회고록 필사본은 읽기 시작하자 손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생이었구나, 감동과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을 쓰는 조선인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의 회고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남양군도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1945년 수용소 캠프 시절부터 1951년 티니언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야기였다. 세 시기가 모두 특징이 있고, 각각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야기들이 넘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농업 이야기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전경운이 회고록을 적어가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맡아서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일들에서 부딪친 문제, 또는 자신이 나서서 해결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갔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실감나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국면에 처하든지 부딪치는 일을 적극 해결해 나갔다. 매우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때로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가족을 돌보는 일은 물론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부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본문: 전경운의 회고글

- 저는 일본말로 쓰는 게 쉽지만 그럴 수도 없어 한글로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일본말, 한자가 많이 들어있고 더구나 일제강점기의 섬 이름이나, 일본인을 대상 했던 만큼 일본말로도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위해서는 약도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읽기에 매우 힘들 것입니다.

원래 저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또 고향을 떠난 이후 우리말을 쓸 수도 없었고 듣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휘도 매우 변한데다 한국 표준말도 아니고 평안도 정주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그뿐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회고록이니 만큼 문법에서도 많이 틀리고, 오자 탈자도 많아서 읽기에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양해하고 천천히 읽어가며 전후가 맞지 않는 점을 미루어가며 이해하십시오.

 

-저를 소개한다면 1915년에 출생하여 당시 을묘생이라 하였습니다. 학력은 오산고보 24(고교)를 졸업, 1935년 일본 동경으로 가서 2년간, 단기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만주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서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중국어와 기초 지식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일제는 우리말을 말살하는 정책을 폈지만, 오산학교만이 비밀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쳐 준 것이 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양에 나와 있어서 60여 년을 우리말을 별로 써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우연히 기회가 찾아와, 1975, 36년만에 처음으로 서울에 갔습니다. 남하한 우리 가족들과 친지는 물론 모교 오산학교의동기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재회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과 대화에서는 알아듣기는 했으나 말문이 막혀 진땀을 흘린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 부터는 한글 책자와 신문 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겨우 말문이 열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빕니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육성동이다. 생년월일은 19151015일 을유생이다. 그때는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합병되어 식민지로서 수탈이 본격화 될 때요,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설되어 있었고, 정주에는 철도기관 수리정비 기관이 설치되어 다른 곳보다 개화의 물결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내가 난 시골은 정주 읍에서 20 리 정도 떨어져 있고 어느 읍이건 20 리를 걸어야 할 만큼 한촌 그대로여서 내 나이 네 살 때까지 삭발을 하지 않고 검은 댕기 머리털을 땋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척식과(拓植科) 소속이었다. 주로 야자원(椰子園)으로 간다고 했다. 포나페, 사이판 이 두 지점 어느 쪽이 될 것이다. 그러는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부른다기에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은 초면인데 대략 내 신분내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엔 포나페 섬으로 보낼 것이었는데, 그 섬은 일본사람이 적게 사는 섬이고 신입 사원이라 사이판 섬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사이판은 동경 시다마치와 다름없고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많다고 했다. 특히 임()모는 조선인은 남무(南貿)에서 매우 인기있는 인물이라며, 나도 우리 회사를 위하여 분발하여 달라는 격려의 말씀을 들었다.

 

- 회사에 입사하여 초봉이 46엔이었다. 수당 가산을 하면 약 70엔 정도로 매달 말에 봉투에 들어있다. 이것을 두 번 받았다. 전근을 가게 되니 사이판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체재비와 월급 외에 지도금(支度金)으로 본사에서 70, 지점에서 70엔이 지불된다고 하였다. 나는 여름의 나라로 가는 고로 서둘러서 마로 만든 하복을 준비하였다.

 

-당시는 중일전쟁이 터진 지 1년 남짓, 일본 동경에서는 계란 배급이 시작되었다. 사이판은 항구도시로서 남양청이 있는 팔라우, 얄트, 포나페, , 얍 섬 등으로 가는 현관이었다. 5,000톤 선박이 매주 2-3회 사이판에 들렀다. 사탕수수 제당회사가 티니안, 코타까지 들어서 있어서 상주인구는 3만 이상이었다. 출입인구를 합쳐 5만이 넘었고 일본해군 23(2-3?)이 주둔하고 있어 명목상 항구도시로서 번창했다. 특히 환락설비가 불야성으로 네온싸인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물건과 식품이 풍부해 어디서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육상교통은 버스와 경편철도로 섬 전체가 활기에 넘쳐 언제나 여름인 곳. 바닷물은 맑고, 산호가 넓어 고기떼 노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지상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조그맣고 초라한 일본식 숙사, 차모로식 생활, 먹는 것도 야채는 없고 물고기와 코프라 요리 뿐이니 자취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처음으로 사사모토(笹本) 가족 일원이 되어 차모로 식사를 먹게 되었다. 숙소와 취사장은 떨어져 있었다. 저녁밥을 먹자고 사사모토가 안내하였다. 집은 야자 잎으로 지붕 벽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돼지우리 크기 정도의 12척 곱하기 12척 정도의 크기에 마루만이 일본 목판으로 깔려 있을 뿐, 재료는 전부 섬에서 얻은 나무로 지어졌다. 외모는 보기 싫었으나 안은 매우 신선하였다. 조그마한 탁자상이 놓여 있다.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밥상이 더러운데다 새까맣다. 칼로 긁은 것처럼 밥그릇 녹슨 것이 조심스러웠다. 반찬은 코프라 요리로 된 생선국이다. 야채는 없고 밥뿐이다. 시장한지라 먹긴 했지만 내 맛이 아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해가 지는 무렵이었다. 야서군(野鼠群)의 습격(襲擊), 대형 쥐 대열이 기둥으로 올라가 밥상으로 떨어졌다. 놀랍게도 그 수가 100마리이다. 잠시만 눈을 팔면 태연하게 밥상으로 올라와 생선찌꺼기를 가로챈다. 그러므로 한 손을 단단한 회초리를 들고 쫓아 내지 않으면 손가락이 물린다. 나는 겁이 났다. 쥐를 쫓지 않으면 제대로 밥을 못 먹는 곤궁에 빠졌다. 그제야 밥상 위가 칼로 된 것이 아니고 쥐 발톱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가 지는 무렵 우리는 모닥불로 사무실 앞뜰을 밝히고 축음기에서는 군가가 연달아 울렸다. 부대(部隊)들은 황홀한 기분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었다. 감독은 능숙한 일본말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야자주가 나오고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인부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남양 고유한 나체 춤이 나오는가 하면 일본유행가가 나온다. 병대(兵隊)들은 깜짝 놀랐다. 노래와 춤이 다양했다. 군데군데에서 밤늦도록 담소가 이어져 밤 가는 줄을 몰랐다. 군인들은 이런 섬에서 인품 좋은 우대는 처음이라며, 다시 사이판으로 돌아가 불편한 식량으로 단일하게 먹게 될 터이니 애석하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환영에서 본선(本船)에 오르기까지 손수건을 흔들며 석별을 슬퍼했다. 그들은 4개월 후 사이판에서 옥쇄했을 것이다.

 

-1차 징용 8명이 티니언섬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체격 좋은 그들이 돌아올 때는 뼈만 남았다. 징용 고역(苦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인부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고 휴일도 없다. 거기에다가 일본말이 능숙하지 못한 데다 소수이다 보니 일본인 노무자의 행패가 심했다 한다. 때리고 차고, 죄수 이상으로 취급(取扱)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도저히 체력유지를 못할 식량배급 하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비행장 공사장으로 갔다. 아직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일을 빨리 하여 성적을 올리자, 그런다면 우리는 몇 달 후면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범을 보이자. 누구나 힘들다. 불평을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 뒤에서 무슨 문제도 타개(打開)할 것이다. 이런 훈화(訓話)를 하였다. 비행장 공사의 책임은 육군이다. 오전 7시 현장사무실을 찾아, 코지마 부대 대장과 면접하여 작업용구(,곡괭이 등)을 받아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오전 8시였다.

 

-해가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더니 시가지는 그대로 남았다. 사상자가 50여 명이라 했다. 격납고에서 신음하던 군인 환자들이었다. 그 외는 별고가 없었다. 그러나 식량은 전부 타버렸다고 했다. 다음날은 비행장 파괴 수습작업을 하라는 설부대의 명령으로 우리들의 일이 시작되었다. 매우 무서웠다. 매일 한 차례씩 강습(强襲)한다. 하루 3차례 습격(襲擊)을 하고 연 280기가 습격을 가했다. 견디다 못해 산 속으로 모두 피난하여 하루종일 보냈다. 저녁에 돌아왔는데 식수가 불결한 탓으로 무서운 배앓이가 나서 식사를 못했다.

-너희들은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가 기다리고 있지만, 도민(島民)이 죽으면 소나 말, 개처럼 길가에 묻거나 팽개친다. 도민(島民)들은 소나 말과 다름없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 기억해 둬. 도민도 인간이야. ... 나는 미친놈이 되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일본인이라며 행세하는 통에 나 역시 조선인이라고 멸시를 받았다. 고만(高慢)한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났다.

 

-장인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인부 모집에 응해 남양의 섬에 왔다. 1917년 일본 해군은 세계 제1차 대전 시에 남양군도를 독일로부터 점령, 유엔신탁으로 99년 동안 위임통치권을 얻었고 남진정책을 펼쳤다. 당시 시모노세키시에는 마구로 어업회사가 니시무라(西村)척식을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사이판, 티니안, 로타섬에다 사탕수수, 면화 재배를 하며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총주임이었던 야마시다(山下) 씨는 광주 형무소 경관이기도 하였다.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인부 모집을 했고 장인은 그 제170명 중 한 사람으로 마리아나군도에 왔다. 장인은 처음에는 사이판섬, 다음에는 로타섬에서 주로 면화 재배 인부로서 5~6년을 일하며 지냈다.

 

-파간섬에는 군인이 2,500여 명이 있었다. 처가 아무리 정숙을 지킨다 해도 오래 못 간다. 벌써 십여 명의 일본인 처녀들이 군인과 성관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동물이다. 일본 패망은 틀림없다. 다시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미군하에서 살든지 죽든지 앞은 암담하다. 나는 애정의 맛에 사로잡혔다. 결심을 했다. 장인이 반대해도 당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우리 처를 포옹하고는 너와 나 전쟁시에 죽어도 같이 죽다고 하였다. 처는 아무 말없이 나를 두 손으로 끌어안지 않는가.

 

-194512, 차랑카노아 성당에서 세례식이 거행된다. 그 의식에서 나는 어린애로 돌아간다. 나를 하나님 나라에로 이끄는 두 교부(敎父)와 한 敎母(God Father, God Mother. 토어로 발리누, 말리나)와 동반(同伴)하여 성단(聖段)에 무릎을 꿇었다. 먼져 신부가 나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기에 한국 성명 그대로 전경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때 전입니다 하였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크게 잘못되어 버렸다. 신부는 나이 많은데다 귀가 멀어 나는 큰 소리를 내야 했다. 그러나 이 서반아(西班牙,스페인) 노신부는 우리말 발음이 어려워 졍경경 ? 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이다. 그러자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상기되어 수습할 바를 잃고 멍하여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옆에 앉은 敎父(발리누) 한 분이 마쓰모토 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말로 나를 젠 이라고도 하고, 마쓰모토 라는 두 이름으로 불러왔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교명(敎名)"헤수수, 마쯔모토"로 등록부(登錄簿)에 올려졌다.

 

그 당시 내 이름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자식들이 성인이 되자, 먼저 내 자식들이 마쓰모토 라는 성이 싫다며 나무람을 받았다.





























To Treno Fevgle Stis Okto - Mil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