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식민지 트라우마 -한국 사회 집단 불안의 기원을 찾아서

by 이성근 2018. 1. 20.



<식민지 트라우마 -한국 사회 집단 불안의 기원을 찾아서>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

 

저자 유선영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0년대 청소년기를 보내고, 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로서 경험한 군사독재, 권위주의 공권력, 물질주의, 개발우선주의, 집단주의, 학력주의, 비교 콤플렉스, 국가폭력, 가부장주의, 자기주도성의 상실 등의 문제들에 민감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기 통제력을 방해하거나 훼손하는, 이러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압력들에 대한 감수성이 연구의 동력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천착하는 것은 이 같은 한국 사회의 집합적 문제들에 대한 불편한 심사의 소산이다. 홑눈정체성의 역사, 편쌈 소멸의 문화사, 육체의 근대화: 아메리칸 모더니티의 육화, 근대적 대중의 형성과 문화의 전환등 다수의 연구를 수행했다.

 

들어가며

 

1장 민족 모욕과 감정의 역사

세기말과 식민지배기를 규정한 4가지 힘/ 역사를 추동하는 감정구조/ 민족 모욕과 수치의 장기 역사/ 민족주의에 침습한 모욕감정과근대 트라우마’/ 모욕받은 민족의 탈식민화

 

2업수이 여김과 분노감정의 계몽

이민족의 모욕에 직면한 세기말/ 문명인의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 분노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감각

 

3장 문명의 트라우마, 민족의 스티그마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문명화 노선/ 물질문명의 경이를 실감하며 입문한 근대/ 자연정복의 의지를 결여한 민족이라는 스티그마/ 식민지민의 비교 콤플렉스/ 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

 

4장 모욕을 합리화하는 식민지 사회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간지奸智/ 경찰의 전지적全知的 감시망에 포획된 식민지 사회/ 문명화에 동원된 합법적 폭력/ 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 식민지 군중의 저항콜, 레라 소요

 

5장 식민지민이라는 저주

경찰범처벌령이 규정한 식민지민의 죄와 벌/ 문명화에서 소외된 식민지민의 흔들리는 자의식/‘ 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 저주의 주문배일排日 조선인’/ 불의와 모욕에 분노하는 식민지민의 거리 소요/ 풍속과 도덕의 규율 공간, 극장/ 식민지라는비참Les Miserables’의 공동체

 

6장 식민지민의 인정認定투쟁과 아메리카니즘

3·1만세운동 직후의 불온 정서/ 독립 역량을 가진 민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 미국에 보내는 구조 요청 신호, 2차 독립운동/ 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

 

7장 동정과 연예의 민족주의

상호부조의 민족주의/ 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同情熱/ 연예를 매개로 한 동정의 민족화nationalization/ 온 겨레가 거든해삼위 학생음악단전국순회공연/ 식민지 동정의 감정역학

 

8장 친일과 매판 협력의 존재양식

쫓겨 간 조선인이등신민이 되다/ 오갈 데 없는 재만조선인의 생존법/ 소수민족이자 일본국적자, 민족 갈등의 뇌관/ 친일의 얼굴, 얼궤이즈二鬼子/‘ 善良鮮人혹은나쁜 선인鮮人

 

9장 모욕과 폭력의 악순환

식민지민의 허위의식, 의사제국주의‘/ 일본의 개간주, 구축운동 벌이기도/ 모욕 받은 자들의 폭력, 중국인 집단학살(과장, 왜곡된 오보가 불질러/ 평양선 갓난아기까지 살해/ 서둘러 사죄, 구제 금품 모금도/ 1,300여 명 검거 600여 명 기소)/ 식민지민의 민족주의, 히스테리 그리고 공격성

 

10장 폭력과 호환된 소비 그리고 나르시시즘

비교의 욕망에 사로잡힌 식민지민/ 근대성이라는 근원적 공포와 히스테리/ 혼란스러운근대 레시피’/ 타인의 시선에 과민한 식민지민의 인상학

 

에필로그- 모욕받은 민족의 감정구조

 

출판사 서평

민족감정으로 꿰뚫어 본 식민사회 조선인의 민낯

피식민지 민족은 힘의 격차가 불러온 폭력적 사태들에 직면해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감정, 정신의 상흔들이 민족의 심연에 그리고 역사의 심연에 켜켜이 쌓여 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는 표면의 현실 역사와 심연의 역사를 동시에 바라볼 때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전체의 윤곽선을 그려볼 수 있다.”

 

일제 36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당연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이들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영웅과 위인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보통이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을 끌고,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이들의 몫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도와 조직 같은 유형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이 같은 주역과 서술방식·대상에만 주목해서는 역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미시사며 문화사 등에 눈길을 돌리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일제 식민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의 폭력과 억압 그리고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투쟁과 부역에만 주목해서는 식민지의 역사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불의와 민족차별 그리고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 저항과 투쟁은 식민지 역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모욕이라는 집단경험을 축으로 재구성한 식민지배의 상흔

그 시대를 살아간 조선민족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각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혹 시쳇말로 엽전은 안 돼하는 자조의 말 역시 식민지배의 잔재 아닐까.

 

지은이는 근대 문명의 충격과 제국주의의 힘에 휩쓸린 식민지민의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경험이란 본질적으로 트라우마, 외상外傷의 경험으로 보았다. 이민족에 의한 폭력과 모욕이 반복되는 과정에 자신의 전통과 문화, 정체성이 온통 부정당하는 정신적 외상을 집단적으로 겪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 식민화를 문명화라 정당화하는 사태를 맞아 집단 불안과, 자신을 보호가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현되면서, 힘에 대한 열망, 비교에 집착하는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 등을,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꼼꼼히 그려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인의 외모에 대한 열패감, 중국인에게 이등신민으로서 우월감을 과시하는 얼궤이즈二鬼子, ‘평양사건에서 터져 나온 히스테리컬한 공격성, 속물주의에 가까운 서양문물 숭배 등 차마 마주 대하기 꺼려지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생생한 민낯이 드러나기도 한다.

 

책에 담긴 식민지 풍경 다시 보는 민족주의의 실체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는 근대성 그리고 식민지배의 두 가지 집단경험이 뒤섞인다. 그러나 외상은 역사가 되지 못했다. 외상은 정신분석의 영역이지 증거, 기록, 실증의 역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를 역사화하기 위해 식민지민에게 가해진 외상들을 재구성해 식민지민의 민족주의는 사실 민족적 감정의 다른 이름이며 식민지민의 진정한 자아는 그의 말도, 행동도, 스타일도 아닌 감정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개념과 프란츠 파농의 비판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민족모욕과 국치의 경험이 민족감정을 도발하고 민족감정은 다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목표로 흘러갔음을 보여준다.

 

업수이 여김을 벗어나기 위한, 힘을 향한 욕망

식민지배는 2, 3등의 하위민족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민족적 위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통제력 부재와 결여, 그로 인한 모욕과 수치, 불안이 가중될수록 힘에 대한 욕망도 깊이 뿌리를 내린다. 이는 서재필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며 한 고별연설에서 나라를 도와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한 데서 엿볼 수 있다.

 

폭력을 동반한 문명화 세례

공진회가 전시하고 있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다.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 실력양성주의, 인격주의, 개조주의는 식민지민의 저주받은 죄의식과 공격성의 산물이다. 근대는 적들의 저주받은 문명이므로 공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할 길 없는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근대였다.

 

그런가 하면 콜레라 예방을 위한 위생계몽도 민족차별의 경험을 더해 우발적인 콜레라 소요가 벌어지기도 했다. 의사도, 병원도 아닌 (위생)경찰이 주도하는 방역에서 빚어지는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들, 비위생이 공개리에 까발려지는 모욕과 수치, 방역관계자들의 천시와 협박, 경찰과 순사의 칼과 몽둥이에 의한 매질과 피범벅이 되어 유치장에 갇히고 격리된 채로의 죽음이 위생계몽의 실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정투쟁과 아메리카 짝사랑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모든 조선 사람들은 미국의원단을 천사단과 같이 알고 고대하는 중.” 1920년 중국을 거쳐 조선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영접하기 위해 특파된 매일신보기자 백대진이 미국의원단에게 전한 말이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기대어 독립을 호소하려던 조선민중의 열망은 자모慈母를 기다리는 유아幼兒의 마음과 애인을 고대하는 정인情人의 가슴에 비견되었다. 이를 두고 일제 식민 당국은 이를 뇌미賴美사상이라 일축하기도 했다.

 

왜곡된 민족감정, 약자를 겨냥한 공격성

서구 열강의 근대성과 문명 앞에서 스스로의 열등성을 충격적으로 자각한 이래 식민지민의 모욕과 수치심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분노, 공격성, 그리고 자기파괴적인 무력감을 야기했다. 물질적 부를 향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향한, 학력과 명예를 향한 열망 역시 이러한 공격성의 표출이다. 100여 명의 애꿎은 중국인이 살해된 평양사건은 자기파괴적 공격성에 포획된 식민지민의 또 다른 집단불안 징후를 보여준다.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나르시시즘의 표출

식민체제는 민족차별과 서열구조에 의존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식민지민은 자기보호를 위해 방어기제로서 나르시시즘에 의존한다. 나르시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대성이다. 근대교육과 고등학력, 근대적 지식, 근대적 생활방식과 취향, 영어 등 외국어의 구사, 그리고 서구와 일본에서 수입된 상품의 소비이다.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개벽기자 등을 역임하며 1930년대 다수의 소설을 썼던 장덕조(1915~?)내 이상理想하는 스윗트홈이라는 글에서 남편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가정, 햄 샌드위치를 만들며 피크닉 준비로 소란한 가정, 한강 상류에서 피크닉, 연애감정으로 한 결혼, 월급쟁이 남편, 가난하지만 (미국여배우들과 같은)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 (자신의) 얼굴, 계란 하나와 버터 칠한 빵 한 조각이 진수성찬인 식탁, 명랑과 쾌활함이 있는 가정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식민지 지식인이 꿈꾸던 근대였다.

 

책속으로

조선 사람끼리 싸우고 시기하며 강한 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업수이 여기면서 외국 사람을 대하면 병신들 같이 행신行身하는까닭에 외국 사람이 조선을 업수이 여긴다.”

-문명인의 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40)

 

제일 못나고 제일 가난하고 산천도 남만 못하고 시가市街도 남만 못하고, 가옥도 의복도, 음식도 남만 못하고 과학도, 발명도, 철학도 예술도 없고 일을 할 줄도 모르거니와 할 일도 없고 아마 이러케 불상한 백성은 다시 업슬 것” -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75)

 

청결 여부 판정은 순전히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판단에 맡겨졌으므로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은 물론 없는 살림에 음식 접대, 뒷돈도 챙겨야 했다. 머리에 먼지가 앉았다고 몽둥이로 먼지 털듯이 실컷 두들기는 것을 경찰은 청결한다고 했고 이런 식으로 70대 노인도 청결하고부녀자도 두들겨 팼다. -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107)

 

요보 호명은 하등민이라는 낙인이었다. …… 요보는 일제가 지배하는 제국 안에서 정상인이 아니라는 낙인stigma이고 민족적 범주였다. 요보라는 호명은 개개인의 개성, 신분, 인격의 차이는 삭제되고 다만 요보 조선인으로, 즉 조선인이라는 민족범주로만 존재하게 하는 장치였다. -‘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140)

 

인도주의와 정의를 완전히 결여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동정하는 미국 의회의 일원이고 위대한 미국 인민의 대표들에게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두 눈에 피눈물을 머금고 감사를 표한다.” -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188)

 

1920년대 민족주의는 동정-감정에 의해 추동되었고, 연예에 의해 매개되고 실감되었다. …… 무대와 관객은 구분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라를 잃은 망국민이고 식민지민이었다. 이 일체감이야말로 식민지민이 향유한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이고 쾌락이었을 것이다. -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221)

 

센료나 센징은 중국과 일본,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이간질, 밀고, 정탐, 앞잡이, 친일매판 협력행위로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일본의 비호하에 유흥업, 마약류 취급, 인신매매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다. -‘善良鮮人혹은 나쁜 선인鮮人’(239)

 

패거리를 이룬 장정들이 핏물 떨어지는 곤봉을 든 채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200~300명의 무리가 따르면서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중국인을 찾아 다녔다. -평양선 갓난아기까지 살해(266)

 

인텔리 여성 89명을 대상으로 미래의 남성상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고전으로는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햄릿, 톨스토이의 부활을, 현대작품으로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등 작품의 개요와 주인공 이름쯤은 알아야 하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감상할 귀, 야구?정구?럭비 경기규칙 정도는 알고 있는 남성이라 했다.-타인의 시선에 과민한 식민지민의 인상학(312)

 

 

상처가 만든 내 안의 괴물

자기 자신을 확신하거나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참 드물다. 오히려 자아 정체성의 혼란, 나아가 자아의 분열과 환멸을 겪고 사는 게 흔한 일이다. 언감생심 이 나라 이 민족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빠른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강한 나라임과 동시에, 세계 최하위권의 국가지수가 즐비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나라다. 우리의 정신 속에는 늘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혼재해서, 때론 열광(熱狂)하고 때론 냉소(冷笑)한다.

<식민지 트라우마-한국 사회 집단 불안의 기원을 찾아서>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저자가 꼼꼼하고 촘촘하게 찾아낸 식민 치하 사실들과 인간 군상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 모습과 자꾸 중첩된다.

식민지민의 삶이란 어떤 것이던가? 더러운 개돼지 취급을 받는 것이며, 스스로를 타고난 열등민(劣等民)이라고 내면화하는 것이며, 일상화된 모욕과 수치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이등화(二等化)하는 것이며, 강자를 추종하고 닮아감으로써 자기도 일등민(一等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좌절이 거듭되고 폭압적 현실이 오래될수록 약자의 정신과 육체에는 강자(가해자)DNA가 이식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빛나는 표면이면의 어둠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 사회 모든 부문에 침투한 권위주의, 부정과 부패, 국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한 인생의 성공이 물질로 환원되는 물질주의, 경쟁 위주의 사교육, 성형 한국의 외모주의, ‘갑질이 만연한 폭력과 착취. 이 모든 부정적 현상의 뿌리는 생존 불안이며, 거기에서 싹튼, 자기 생명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다. 그리고 우리가 민족이라는 감정공동체로서 겪었던 식민지 경험이야말로 이 거대한 불안과 욕망의 온상이다. 혈통 같고 문신 같은, 그래서 씻거나 지울 수 없는, 몸과 정신에 아로새겨진 이 깊은 상흔은 식민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성공과 실패의 심연(深淵)으로 작동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비극적으로 닮아가듯이 식민의 정신사는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계속된 것이다.

언제라도 삶이 벼랑 끝에 몰릴 수 있고,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자식에게 올인하고, 소수자와 약자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킨다고 믿으며, ‘빨갱이쪽바리를 말함으로써 늘 자신을(우리를) 피해(약자) 영역에 가두고 있다면, 감히 이 책을 민주시민이고자 하는 모두에게 권한다. 이근행 (MBC PD) 사사인 18.1.12

 

일본을 이기는 쉬운 방법

예전에는 일본과 비교해 한국이 어지간히도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도 아니면서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고 그 때문에 내란도 겪었다. 패전하고도 국토를 온전히 지킨 일본은 한국전쟁을 틈타 빠른 시일 안에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우리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바라보며 식민통치에 이어 두 번이나 능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일본이 전처럼 커 보이질 않는다. 경제와 사회 지표는 아직 한국이 일본을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말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저 나라는 속이 곯았다.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 대가를 톡톡히 치르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이 나라는 군국주의를 깔끔하게 청산하지 못해 폭력적인 국가 가부장제인 천황제의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죽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최상위권이면서도 성평등지수는 OECD 국가 중 바닥을 기겠는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여성의 남성 혐오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가부장제 풍토에서라면 정치가 유력한 집안의 가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치 냉소와 급속한 고령화가 겹쳐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약진이 위험수위를 넘었다. 인권·평등·평화의 교두보 구실을 하던 진보 세력은 젊은 세대의 유입이 끊기는 바람에 거의 씨가 말랐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일본의 아베 정부가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면 합의를 한 것 역시 이 나라의 상태를 말해준다.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전시 성노예라는 본질적 진실 표현을 포기하고 소녀상 이전을 약속한 이면 합의는 피해자 기념과 존중을 명시한 유엔 국제인권법에 명백하게 반하는 행위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없던 일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일본 외교는 우경화라는 우물에 갇히고 말았다.

 

아베 총리가 이면 합의 사실이 드러난 뒤 1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뻗댄 것은 당사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일본 언론 대다수가 자기 정부 감싸기에만 바빴던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자기네 정부가 범죄를 모의하듯 밀실에서 전쟁 피해자를 다시 욕보이는 합의를 했다는 걸 비난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 놀랍다. 국수주의가 주류를 이룬 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를 꽃피울 리 없다.

 

일본 황군이 반인륜 단체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후발 제국으로서 군대를 압축 성장시켜야 했던 일본은 시계조차 볼 줄 모르던 문맹의 농촌 청년을 당장 전투에 투입할 근대적 군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지휘관들의 조장과 묵인 아래 고질적인 구타와 가혹 행위가 일본군 내에 자리 잡았다. 서구 열강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던 일본은 기계화를 포기하고 정신 무장을 택했다. 이른바 까라면 까라가 일본군의 구호가 된 것이다. 보급도 현지 조달을 원칙으로 삼아 2차 세계대전 중 적의 손에 죽은 병사보다 굶어 죽은 병사가 훨씬 많을 지경이었다.

 

 

 

만연한 불만과 공포를 잠재우려고 만들어 배급한 게 마약이었다. 황군의 초급 장교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중국군을 향해 군도를 빼들고 앞장서 도쓰게키(돌격)’를 외치며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히로뽕(필로폰)에 취해서였다. 황군에게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군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마약이 있었는데 그것은 섹스였다. 일본군은 국내는 물론이고 조선과 같은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여성 수십만명을 조달해 사병들에게 천황의 선물로 주었다.

 

어디든 군을 따라다녔던 이 위안부 집단을 일본은 황군과는 상관없는 조직이었다고 아직까지 우긴다. 일본인 위안부들의 증언에만 의지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다는 주장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동안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유럽의 여성들까지 미성년자도 가리지 않고 인신매매 조직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숱한 증언이 쏟아졌는데도 귀를 막고 있다. 군이, 결국 국가가 관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다는 걸 일본인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자국의 여성들에게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옳다.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전쟁 통에 가뜩이나 고통받으며 헤매던 가난한 계층의 여성들을 막다른 길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제대로 고백하고 반성하지 않아 지금의 일본 여성도 불우하다고 생각한다. 망각, 회피, 부정, 왜곡.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을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 피해자 중심의 접근에 충실하겠다는 방침인데 그게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위안부할머니들의 의식은 자신들의 피해 저 너머까지 확장돼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끊임없이 단순한 피해자에서 세계사의 증인으로 스스로를 격상해왔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봤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으며 전 세계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고 국가폭력에 경종을 울렸다. 할머니들은 한국의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지원했으며, 한국 군인에게 강간당한 베트남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금을 모았다. 이런 폭력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일본 황군의 악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은 불행하게도 한국군이었다. 신생 한국군의 지도부로 변신한 일본군, 일본의 괴뢰였던 관동군 출신은 황군의 문화를 한국군에 고스란히 이식했다. 군대 내 폭력과 인권유린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동안 비전투 인명 손실이 6만명에 달한다. 한국군은 1970년대까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도 매년 1000명이 숨지는 믿기 힘든 기록을 세운 것이다. 덧없이 스러진 값진 젊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과거를 청산하는 게 단순히 피해자의 명예 회복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한국군은 6·25 , 일본군처럼 위안소를 운영했던 전력도 있다.

 

일본 황군의 악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한국군

 

일본 황군이 만든 위안소를 접수한 것은 한국을 점령한 미군이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군의 조선군 사령부 자리였다. 평택도 일본군이 비행장 터를 닦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미군은 공공연하게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주둔 지역 주변 매춘 조직을 유지하고 확대했다. 한국전쟁 중에 <부산일보>시 당국은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유엔 위안소 설치를 이미 승인했다. 며칠 안에 마산 신시가와 구시가에 위안소 5개가 세워질 예정이다라고 보도한 일도 있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뒤 기지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8년 인구 2200만명에 불과한 나라에 매춘 인구가 30만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기지촌에서 일했다. 한국 정부와 미군은 미군 전용 클럽이란 어항에 달러라는 미끼를 넣어 한국의 가난하고 불우한 여성을 몰아넣었다. 여성들은 클럽에서 폭력과 성 착취에 시달렸으며 한국 사람들로부터는 양색시, 양공주라 불리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들은 현대판 환향녀였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국 정부 역시 기지촌 여성들에게 국가 포주였다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19711231일 한국 정부는 10개 정부 부처의 차관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설치했다. 미군 철수 분위기를 바꾸고 기지 주변 클럽이 불결하다는 미군 측 불만을 무마하려고 한국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이 정화운동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증을 갖고 있지 않다가 미군 헌병에게 적발되면 즉심에 회부되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모두 몽키하우스(monkey house)’라는 시설에 격리되었다.

 

수용된 여성에게는 페니실린을 투약했는데, 내성이 생겨 투약량을 점점 늘려야 했고 부작용도 심했다. 대다수 여성이 주사를 맞으면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혹은 화장실에서 갑자기 죽었다. 미군의 70%가 성병에 감염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외출 외박이 자유로웠다. 책임은 오로지 기지촌 여성의 몫이었다.

 

한국 정부가 기지촌 여성의 포주였다는 증거는 도처에 널렸다. 1969년 미군의 밤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계획도시인 군산의 아메리카타운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백태하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었다. 이 도시는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 500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1964년 한국의 외화 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기지촌 미군 전용 홀에서 흘러나온 달러는 그 10%에 가까운 96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일본에 가서 돈을 쓰는 것을 막으려고 기지촌 여성에게 기본 영어와 에티켓을 가르치기도 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아마도 이런 짓을 하는 데 심리적 저항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도 위안부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지 않았을까. 이번 일을 둘러싸고 논의는,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맴돌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된다. 우리 정부부터 먼저 과거와 단절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하는 한편 미군 위안부로 만들어버린 기지촌 여성, 그리고 그들을 대체한 동남아 여성들에게도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분담금을 더 내놓으라고 몰아붙이지 않더라도 주한 미군의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과거의 망령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순간 일본은 한없이 작아지게 돼 있다. / 시사인 18.1.18

 

참고한 활자:<유신>(한겨레출판), <기지국가>(갈마바람)

 

Runaway - Del Shannon      

     

'세상과 어울리기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범이 된 조선청년  (0) 2018.01.27
양심을 지킨 사람들  (0) 2018.01.21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0) 2018.01.20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외   (0) 2018.01.13
烈女의 탄생 外  (0) 2018.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