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기본 원칙/빌 코바치,톰 로젠스틸/번역이재경/ 한국언론진흥재단ㅡ2021.12
저자 : 빌 코바치 ≪뉴욕타임스≫의 워싱턴 지국장을 역임했다.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The Atlanta Journal Constitution)≫의 편집인과 하버드대학 니먼 펠로십(Nieman Fellowship) 큐레이터를 지냈다.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 창립 회장이었고, 우수한 저널리즘 프로젝트(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의 자문위원이었다.
저자 : 톰 로젠스틸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미국언론연구소(American Press Institute)의 소장이다. 우수한 저널리즘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역임했고,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 부회장으로 일했다. 그전에는 ≪LA타임스≫의 미디어 담당 기자, 뉴스위크의 의회 출입 기자로 일했다. 『저널리즘의 새로운 윤리: 21세기를 위한 원칙들』 등 여러 권의 저널리즘 관련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역자 : 이재경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학부 교수다.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하와이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 석사학위를, 아이오와대학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MBC 기자, 한국언론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냈다. 2007년부터 윤세영저널리즘스쿨(YJS) 책임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 『텔레비전 뉴스의 품질』(공저, 2020), 『기사의 품질』(공저, 2018), 『한국형 저널리즘 모델』(2013), 『인터넷 취재보도』(공저, 2010), 『기사작성의 기초』(공저, 2005) 등이 있다.
목차
옮긴이 서문
네 번째 개정판에 부쳐
서문
01 저널리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알고자 하는 본능
저널리즘의 탄생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대의 자유 언론
조직된 협력적 지성으로서의 저널리즘
기자의 민주주의 이론
공중연동의 이론
새로운 도전
02 진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혼란스러운 원칙
저널리즘의 진실
진실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검증
진실에 도전하는 새로운 저널리즘 규범들
오늘의 저널리즘적 진실
03 기자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독립에서 고립으로
거리 두기의 반작용
시민은 고객인가?
벽
독립을 위한 5개의 핵심요소
04 사실 확인의 저널리즘
객관성의 의미 상실
객관성 아니면 도덕적 명료성?
현실에서 사용되는 객관적 방법
주장 저널리즘 대 사실 확인 저널리즘
“나를 믿어 주세요” 시대가 아니다 “나에게 보여 주세요” 뉴스 시대다
객관적 방법을 사용한 저널리즘의 실제 사례
추가하지 마라
속이지 마라
투명하라
취재원을 오도하지 마라: 투명성의 다른 측면
오도하는 취재원들을 부지런히 드러내라
위장취재: 특별한 경우에 한해, 수용자에게는 설명돼야
자신만의 보도: 자기 스스로 하는 취재에 의지하라
겸허한 자세로 보도하라
디지털 시대의 사실 확인에 대한 도전
오보에 대응하기: 몇 가지 도구들
진실의 샌드위치
거짓 정보에 대한 제목 쓰기
편견
사실 확인의 기법들
서사적 기사: 갈등을 흥미롭게 전하기
모순을 더 자세히 드러내라
상대방의 동기를 물어라
더 많이 더 잘 들어라
이것은 듣기다. 인터뷰가 아니다
인터뷰 주제를 정직하게 접근하라
진실의 다원적 뿌리들
05 정파로부터의 독립
마음의 독립
독립의 진화
현실에서의 독립
독립의 재평가
투명성, 독립, 그리고 속이기
독립과 계급 혹은 경제적 지위
다원성과 저널리즘의 독립
독립의 의미
선입견을 가려내는 기법들
팀으로 일하라
이름 붙이기를 피하라 -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
06 권력을 감시하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제공하라
원래적 의미의 탐사보도
해석적 탐사보도
수사에 관한 보도
제한된 감시견 역할
감시견 역할의 약화
기소로서의 탐사보도
07 공공 포럼으로서의 저널리즘
최초의 소셜미디어
지역에서 공공포럼을 다시 요구하고 다시 만들기
08 기사 흡인력과 독자 관련성
인포테인먼트와 선정주의 유혹
몇 가지 혁신적인 접근 방식
인터넷의 힘을 펼쳐 보여라
진실에 봉사하는 서사적 이야기
09 뉴스를 포괄적이면서도 비중에 맞게 만들어라
표적 인구집단의 오류
은유의 한계
과장하라는 압력
방문자 통계 분석
저널리즘을 위한 새로운 시장조사법
새로운 뉴스 소비자
10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양심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정직의 문화
진정한 목표는 ‘지적 다양성’이다
개인의 양심에 대한 압력
양심과 다양성이 잘 자라는 편집국 만들기
시민의 역할
11 시민의 권리와 책임
집단 지성으로서 뉴스의 미래
시민의 권리장전과 책임
감사의 글
미주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100년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 저널리즘 10대 기본 원칙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 “저널리즘이 가장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시민들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저널리즘의 10대 기본 원칙 가운데 앞의 세 개 내용이다. 나머지 일곱 개의 내용도 이들과 동등한 비중을 갖는 중요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언론의 자유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장되고 있는 미국 언론계에서 지난 100여 년에 걸쳐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 저널리즘의 원칙을 10개로 집약해 정리했기 때문이다.
2001년 초판을 출간한 이후 20년 만에 4판을 출간했다. 새 판본이 나올 때마다 책은 매번 많은 내용이 바뀌었다. 급속하게 진화하는 디지털 생태계가 뉴스의 생산과 배포 체제를 혁명적으로 흔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들의 큰 골격은 바뀐 적이 없다. 저널리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진실 추구는 왜 저널리즘의 첫 번째 원칙인지, 저널리즘은 왜 권력이 아니라 시민에게 충성해야 하는지 등은 아무리 기술적 변화가 극심해도 저널리즘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으로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뤄왔다.
이 책의 역자인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학부 이재경 교수는 이번 4판의 특징으로 저널리즘 환경과 관련해 저자들이 특히 3개의 흐름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독재적 정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겁박하는 현실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필리핀의 두테르테,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브라질의 볼소나로 등 정치 지도자들은 독단적 권력을 휘두르며 취재를 방해하고, 언론사와 기자를 협박하거나 가짜뉴스 생산자로 몰아붙인다. 이들은 광범위하게 보급된 SNS를 활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권력의 이익을 위해 저널리즘을 압박해 왔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두 번째 흐름은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 플랫폼 기업들의 부정적 역할이 강화되는 추세다. 저자들은 특히 플랫폼 기업들이 디지털 생태계의 정보유통 네트워크를 장악한 상태에서 이익 극대화를 위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소집단으로 쪼개는 행태를 걱정한다. 이는 각 개인의 특성과 집단의 성격에 맞춰서 광고를 팔기 위한 표적 마케팅 전략의 산물이고, 플랫폼 기업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엄청난 수익을 챙겨 왔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다. 문제는 이러한 플랫폼 기업의 영업 전략이 공동체를 분리하고, 공중들 간의 대화를 단절시켜 결국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세 번째 흐름은 사회의 양극화, 의식의 극단화 추세가 계속 강화되는 현상이다. 이는 특히 미국 사회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단이다. 부족화라고도 표현되는 이 현상은 인종과 성별, 진보와 보수, 부자와 가난한 사람, 늙은이와 젊은이 등으로 사회가 쪼개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또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모임인 공중의 형성을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재경 교수는 “우리 기자와 시민이 공유하는 저널리즘의 가치들을 세계적 윤리 기준, 기사 품질 기준과 견줘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서 “특히 디지털 혁명이 뉴스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혼란기가 계속되며, 이 책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20여 개 국가에서 중요한 저널리즘 교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봤어? 만나봤어?
신문사에 입사한 1997년 겨울,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수 이현우가 ‘헤어진 다음날’을 발표했다. 가는 곳마다 그 노래만 흘러나왔다. 누구나 비발디 사계의 겨울을 흥얼거렸다. 첫 출근 3주 뒤에 구제금융(IMF)이 시작됐다. 나라가 망했다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숙자’라는 단어도 처음 등장했다. 서울역 지하도에 종이를 깔고 자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선배의 지시를 받아, 2박3일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사줬더니, 노숙자는 국수 대신 소주만 마셨다. 얼마 뒤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선배의 지시를 받아, 한정식집에 불려 갔다. 김대중 정부의 부총리가 앉아 있었다. ‘재야의 대부’로 통하는 정치인이었다. 선배 기자와 부총리가 국수와 소주를 먹으며 시국을 논했다.
그 겨울,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다. 기자는 사람 만나는 직업이구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다 만나는 게 기자 일이구나. 두렵고도 흥분됐다. 선배들은 자꾸 물었다. “가봤어?” “만나봤어?” 도리가 없었다. 가야 했다.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철거 현장에서 시위 현장으로 옮겨 다니는 데 써버린 택시비가 월급보다 많았다. 이래서는 죽겠다 싶을 무렵, 수습기자 생활이 끝났다. 살만해졌지만, 직접 가보는 일이 줄었다. 처음엔 전화로 물었고, 나중엔 보도·발표 자료만 보았다. 기껏 ‘현장’에 간다고 해봐야 기자회견장이었다.
‘직접 가보라’고 종용하는 이를 다시 만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이었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1판에 ‘너 자신의 일을 하라’, ‘독자적으로 확인하라’는 짧은 문장이 등장한다. 이후 원저자들이 개정증보판을 내놓으면서 그 분량이 길어졌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가 번역한 개정 4판을 보면, ‘자기 스스로 하는 취재에 의존하라’는 단락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그걸 읽으며 흥분한 나는 나중에 박사논문과 연구논문에서 이를 다뤘다. 기사의 원천성(originality)에 관한 연구였다.
단순한 상식을 어렵고 복잡하게 쓴 논문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기자가 정보의 원천(original source)을 직접 취재한 경우에만 다른 기사와 구분되는 원천 보도(original report)가 나온다. 이때 원천 보도는 이중의 개념이다. 정보 원천인 현장, 사람, 문서를 직접 취재했으니 원천 보도이고, 다른 기사와 비교해 어떤 점에서건 독창적이니 원천 보도다. 또한 원천성은 점증 또는 점감하는 개념이다. 보도자료를 옮긴 기사보다 보도자료를 작성한 공무원을 직접 만난 기사의 원천성이 높다. 공무원의 말을 받아쓴 기사보다 그 공무원이 담당하는 정책의 현장을 직접 찾아 살펴본 기사의 원천성이 높다. 아울러 원천성은 취재보도의 기본 원칙이다. 기자가 직접 취재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면, 그 기사는 표절이거나 선전·홍보물에 불과하다.
논문을 쓰면서, 한국 언론계에 ‘기사 품질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심층탐사 기사를 쓸 때는 문서, 현장, 당사자를 직접 취재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이를 모두 생략하는 관행이 만연해 있었다. 국내 기자상 수상작 가운데 퓰리처상 수상작에 못지않은 탁월한 기사가 있지만, 시민이 접하는 절대다수의 기사는 받아쓰고 베껴 쓴 재활용품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1997년 이후, 한국의 계층계급만 양극화된 것이 아니다. 기자의 일과 생산품도 극단적으로 갈라졌고, 특히 높은 품질의 기사는 천의 하나, 만의 하나의 비율로 쪼그라들었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세상이 앞으로 어찌 변할지, 산업으로서 언론이 어찌 생존할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런 세상에 휩쓸리기만 해서는 기자로서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건 안 오건, 표절과 선전·홍보에 몰두한 기자가 장차 재밌게 살아갈 방법은 없다. 노숙자부터 정치인까지 누구건 직접 만나고 보고 들어야, 기자 일의 재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두렵고도 흥분되는 일이다. 진짜 해 볼 만한 일이다. 그리 하라고 다그치는 선배가 주변에 없다면, 자신의 순전한 이기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어떻든 한번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그 마음을 품고 직접 가는 것, 그게 살길이다. 그 길을 가보면, 원천 보도를 쓰다가 기자상을 받게 되고, 단행본까지 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 기자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미디오오늘
기자와 단순 정보제공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실 확인과 검증
2003년 3월 6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의 이유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보다 앞선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를 공격했고, 이라크가 알카에다에 협력했다는 명분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이 열리는 52분 동안 알카에다 혹은 9·11 테러를 무려 14번 언급했다.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라크-알카에다 협력’에 의문을 제기한 상태였고 이라크가 9·11 테러 공격에 연관됐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없었지만, 회견장의 기자 중 누구도 “이라크가 알카에다와 협력했다는 증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Cunningham, 2003). 언론은 부시 전 대통령의 발언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데만 집중했을 뿐 발언 내용에 대해 질문하거나 검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은 이라크-알카에다 커넥션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의 또 다른 명분이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여부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미국인은 알카에다 혹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며 그 이유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 탓이 크다(Gains et al., 2007; Newport, 2013). 언론이 대통령의 발언을 ‘정확하게’ 보도한 것이 미국인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진실이라 믿게 만들었고 이후 미국이 전쟁에 군사비 수백조 원을 지출한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언론이 대통령이나 정치인과 같은 유력 인사의 발언 혹은 보도자료 등을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 적는 ‘받아쓰기 저널리즘’이 언론의 사명인 진실 추구와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진 사례는 수없이 많다. 1971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보고서’ 특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정부 행태도 한 사례다. 1963년 미국 베트남 전쟁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지시로 베트남을 찾았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부 장관은 귀국길에 기자회견을 열고 전쟁 상황이 미국에 유리하다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8년 뒤 워싱턴포스트가 단독 보도한 펜타곤 문서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나쁘게 변해가고 있다”고 적혀있었다(코바치·로젠스틸, 2021, p.65). 1963년 미국 국방부 장관은 전쟁이 미국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기자회견에서 공공연히 거짓을 말한 것이다. 당시 베트남 현장을 취재했던 몇몇 기자가 미국 정부 발표와는 다른 기사를 게재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훗날 워싱턴포스트의 벤 브래들리(Benjamin C. Bradlee) 편집국장은 자문한다. “맥나마라가 베트남에서 겪은 ‘진실’이 1971년이 아닌 1963년에 알려졌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치인 발언 의존도 높은 한국 언론
한국 언론도 정치인이나 유력 인사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는 받아쓰기 저널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내 연구 자료들은 한국의 주요 언론마저도 받아쓰기 저널리즘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치부 기사의 받아쓰기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해 왔다. 특히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정치인들의 소셜미디어 이용이 많아지면서, 정치인의 발언뿐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작성한 내용까지 확인 없이 보도하며 받아쓰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가 2019년 9월부터 1년 동안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한국의 주요 일간지 여섯 곳의 정치 기사를 비교 분석한 결과는 한국 받아쓰기 저널리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기사 내용 중 정치인 발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취재원의 발언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내용이 기사의 70% 이상인 기사가 한국은 12%(117건), 뉴욕타임스는 2.7%(3건)이었다. 한국은 정치 기사 100건 중 12건이 발언만으로 작성됐지만, 뉴욕타임스는 100건 중 3건 미만이었다. 대통령 관련 기사에선 단순히 대통령이 어디를 방문했다는 일정을 밝힌 동정 기사가 21.7%에 이르렀다. 대통령 관련 기사 중 정책 기사가 33%인 것과 비교하면 과도하다.
특히 이러한 대통령 동정 기사는 대부분 대통령의 발언만으로 구성된다. 이러다 보니 정치 기사는 단순 전달형의 기사가 대부분이고, 평가를 곁들인 기사의 비중은 매우 낮았다. 국내 기사 중 평가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는 21.9%에 불과했으나 뉴욕타임스는 65.5%였다.[표] 또한 뉴욕타임스에는 인터뷰 기사가 없었던 반면, 국내 신문사에는 19건(2%)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정치인의 소셜미디어 게시물 내용만으로 작성한 기사가 없었지만, 한국 언론에선 이런 기사도 자주 눈에 띄었다.
기자가 추구하는 것은 객관성 아닌 진실
국내 언론사들이 받아쓰기 저널리즘을 지속하는 데에 이유는 있다. 첫째, 기자의 관점에서 대통령 혹은 유력 정치인은 영향력과 뉴스 가치가 높은 취재원이므로 이들의 발언은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시대의 역사가’로서 유력 인물의 발언 내용을 기록하고 이를 시민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미디어 환경과 달리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는 언론이 보도하지 않아도 이들의 발언은 시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취재원의 발언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사의 중요성은 크게 퇴색했다(물론 수많은 발언 중에서 뉴스 가치가 높은 발언만을 선택하는 것도 기자의 중요한 역량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더구나 발언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전달하는 것은 기사 작성 목적을 의심하게 한다. 기자도 모르거나 혹은 추정해야 하는 단어를 기사에 포함한다면 뉴스 이용자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발언 중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기자는 그 의미를 직접 묻고 확인해야 한다. 가령 지난 8·15 경축사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이 누구인지를 직접 물어봤다면, 기자가 추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주요 언론들은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이들’이 누구인지는 지칭하지 않았지만 야당 내 운동권 출신 정치인 등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거나 “윤 대통령의 ‘공산 전체주의 맹종 세력’ 겨냥 발언은 (…) 정부를 비판하는 민주노총 인사 등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 등을 염두에 두고 야권 일부 인사들과 무관치 않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등으로 보도했다. 만일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거나 답변을 회피했다면, 대통령실도 언론을 자신들의 정견을 전달하는 나팔수 정도로 여기는 왜곡된 언론관을 지녔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자들은 취재원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원칙인 ‘객관주의’를 실천하는 방식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할 수 있다. 즉, 취재원이 특정 발언을 한 것은 ‘팩트(Fact·사실)’고 시민에게 팩트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기자의 역할이므로 취재원 발언의 진위(진실을 속이는 것) 여부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기자 역할에 대한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임을 되새겨야 한다.
기자는 왜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기자의 객관성이 담보될 때, 어떠한 선입견이나 가치나 주의(정파)로부터 독립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할 때,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자가 추구하는 것은 객관성이 아니라 진실이다. 즉, 진실과 무관한 ‘객관적 보도’는 객관주의라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아닌 명예훼손이나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적 의례(Tuchman, 1972)’에 불과하다. 특히, 커닝햄(2003)의 주장처럼 여론을 조작하려는 정치인이 넘치는 현실에서 우리가 객관주의를 내세우며 유력인의 발언을 받아쓰기하는 데 그친다면, 저널리즘의 객관주의 원칙은 거짓을 전파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 미국에서 정치 분야의 팩트체크 저널리즘은 정치인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사명에 어긋나고 오히려 거짓을 전파한다는 자성(自省)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검증 과정 없는 소셜미디어 내용 보도
최근 정치인들이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면서 그들의 소셜미디어에서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는 행태도 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언론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비해 정치인의 소셜미디어를 취재원으로 자주 활용할 뿐 아니라 정치인의 소셜미디어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는 기사 유형이었다. 정치인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처럼, 국내에서 정치인의 소셜미디어 발언 내용을 인용해 작성한 기사 중 그 내용을 검증한 기사는 찾기 어려웠다. 특히 정치인의 소셜미디어 게시물은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적거나(본인의 추정), 혹은 특정인에 대해 편향되거나 부정적인 의견이나 평가를 담고 있음에도 자주 인용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국내외에서 소셜미디어를 취재원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처럼 사실 확인의 의무가 문제로 지적되며, 주로 타블로이드와 같은 선정적인 언론, 그리고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분야 등의 기사에서 소셜미디어를 활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Lecheler & Kruikemeier, 2016).
코바치와 로젠스틸(Kovach·Rosenstiel, 2021)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기자뿐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정보를 제공하지만, 기자와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라고 강조했다. 기자 혹은 저널리즘과 여타 정보 제공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정보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역할, 바로 사실 확인의 규율이며 따라서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기자의 최우선적 임무는 여전히 ‘진실확인자(Authenticator)’라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는 정치 분야라고 해서 다를 수 없다.
얼마 전 한국일보에 게재된 한 정치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언론계 외부의 판단도 내부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일보에 칼럼을 게재하느라 정치 기사를 꼼꼼하게 검토했다며 국내 정치인들의 몰염치뿐 아니라 언론에도 크게 실망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치의 몰염치>의 일부를 옮겨본다.
“두 번째 감상은 다름 아닌 언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사안과 언행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언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계적 균형이라는 외형 뒤에 숨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비판적 사고와 질문은 포기하고 받아쓰기에만 열중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한국 정치의 퇴행이 정치만의 책임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몰염치한 언론이 몰염치한 정치를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염치는 정치인이 타고나는 도덕성이 아니라 감시와 비판,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인에게 강제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장승진, <한국 정치의 몰염치>, 한국일보, 2023.9.1).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발언을 사실 검증하지 않고 발언 내용의 의미를 묻지 않는 언론은 뉴스의 생산자가 아니라 뉴스를 이용하려는 세력의 수동적인 수용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나연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신문과방송> 2023년 11월호
https://blog.naver.com/kpfjra_/223098071351 신문과 방송
‘해장국 언론’과 뉴스 신뢰도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최근 펴낸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 표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나라 언론인들을 주눅들게 하는 보고서가 하나 나온다.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펴내는 <디지털 뉴스 리포트>다. 세계 40여개 나라 국민들의 뉴스 이용 실태와 뉴스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보고서다. 성적순 줄세우기 문화가 뿌리 깊어서일까? 보고서 내용 중 한국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뉴스 신뢰도’ 순위다.
한국은 2016년 이 조사에 참여한 이래 뉴스 신뢰도 조사에서 늘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최근 발간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을 보면, 올해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46개국 중 41위였다. 뉴스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28%에 그쳤다. 조사 대상국 평균(40%)에 한참 못 미친다.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다. 2020년까지는 줄곧 꼴찌를 차지했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신뢰도 조사는 ‘대부분의 뉴스를 거의 항상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문항에 ‘동의’ 또는 ‘적극 동의’하는 비율을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유엔이 해마다 실시하는 ‘세계 행복도 조사’만큼이나 주관적이다. 사실 ‘행복’이나 ‘신뢰’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인지라,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조사할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행복도 조사는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를 물으면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 등 6가지 지표들이 행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지도 함께 분석하는데, 신뢰도 조사에는 그것마저 없다. 왜 신뢰도가 낮은지(또는 높은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매년 10월께 나오는 <디지털 뉴스 리포트> 한국어판에는 미디어 학자들의 ‘논평’이 실린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신뢰도 독해법’이라 할 수 있다. 보고서에는 뉴스 신뢰도 외에 수용자들의 뉴스 소비 방식과 태도에 대한 다양한 조사 결과가 실리는데, 이것들과 신뢰도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낮은 뉴스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정파적 뉴스 소비’를 꼽는다. 최근 3년치(2020~2022년) 한국어판 보고서에는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간접 증거’들이 차고 넘친다.
우선, 한국은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 선호도가 매우 높은 나라다. 응답자의 44%가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다. 반면, ‘나와 반대되는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4%에 그쳐,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낮다.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 선호도는 ‘매우 보수’(67%), ‘매우 진보’(55%) 등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이들이 중도층(38%)보다 훨씬 높다.
정치적 성향은 언론 자유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진보층에서는 한국 언론의 정치적 자유에 동의하는 비율이 2017년 11%에서 2022년 32%로 크게 높아진 반면, 보수층에서는 그 비율이 21%에서 16%로 오히려 줄었다. 이 기간은 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과 딱 겹친다.
이런 상황에선, 정파성이 강한 독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보도를 하는 언론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중립적인 독자들마저 정파적 보도에 염증을 느껴 뉴스를 회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어판 보고서들을 보면, 연도별로 구체적인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뚜렷할수록 뉴스를 신뢰하지 않는 비율이 눈에 띄게 높다.
더욱이 한국은 유튜브를 통한 뉴스 이용 비율이 44%(2022년 기준)로, 46개국 평균(30%)보다 훨씬 높다. 올해는 그 비율이 53%로 9%포인트나 늘었다. 주지하다시피 유튜브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 이야기만 골라 들을 수 있어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허위 정보가 여과 없이 유통되는 플랫폼이다.
물론 뉴스 신뢰도 저하의 근본적인 책임이 언론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언론이 정치권의 진영 대결에 직접 ‘선수’로 뛰어들어 편향적인 보도를 해온 것이 ‘정파적 뉴스 시장’의 자양분이 됐다는 지적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정파성에 갇혀 사실 검증을 소홀히 하거나 사실을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등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수행한 ‘2022 언론수용자조사’를 보면, 한국의 뉴스 이용자들은 언론의 가장 큰 문제로 ‘편파적 기사’(22.1%)를 꼽았다. ‘허위·조작 정보(가짜 뉴스)’라고 답한 비율(19.9%)보다 더 높다. 또 한국의 뉴스 이용자 42%가 ‘뉴스 회피’의 이유로 ‘뉴스를 신뢰할 수 없거나 편향적이어서’를 꼽았는데, 이는 29%인 세계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2) ‘해장국 언론’을 선호하는 정파성 강한 독자들의 요구만 좇아 언론이 편파적인 보도를 차별화 전략으로 삼는 것은 미디어 산업의 동반 몰락을 재촉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한겨레 2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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