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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늦은 밤에 읽는 시

by 이성근 2020. 9. 13.

 

가족사진 / 나태주

아름다운 문상 / 권영준

산파 / 김정미

활엽 카메라 / 김정미

멸치 / 이건청

눈물 -19 / 정진규

그리운 옛집 / 김영남

의자 위의 흰눈 / 유홍준

등나무가 내 목을 비튼다 / 김영남

만월 / 이은림

 

 

쓸쓸하게 저무는 날에 / 박동진

봄이 오기 전 / 김두일

직소폭포 가는 길 / 정영경

기차를 놓치다 / 손세실리아

개펄 / 이재무

노숙 / 김사인

송아지 / 박형준

봉인된 방 / 이은림

피안(彼岸) / 이은림

보따리 / 함민복

 

호박 / 김용락

빨래하는 맨드라미 / 이은봉

1 / 손현숙

당기세요를 당기며 / 임화수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 손택수

자일을 던지다 / 김정미

먼지의 방 / 김정미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김성수

마당가의 저 나무 / 강문숙

물먹는 하마 / 강문숙

 

면온리(綿縕里)* 겨울 풍경 / 이용환

풀과 함께 / 이승희

흑백사진 / 최경민

어라! ! / 이희철

실업 / 여림

3/ 조은길

빵구집 / 김영탁

마늘밭 가에서 / 안도현

소금창고 / 김영탁

감나무에 오르면 울 밖이 보였다 / 임재정

 

 

고강동의 태양 / 유미애

껍질의 힘/ 이정록

곱창 / 임희구

요약 / 이갑수

농사법 / 한광구

집장구 / 손택수

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 복효근

우물 치는 날 / 정인섭

죽은 나무 / 김근

들판의 노을 / 한성례

 

진눈깨비 / 기형도

흰둥이 생각 / 손택수

어미 쥐의 말씀/ 오봉옥

비 오는 날의 전화 / 박경자

오늘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 서정춘

공룡발자국화석 / 이동호

담쟁이 / 이경임

비 그친 뒤 / 이정록

뒷짐 / 이정록

이불 / 김나영

 

내가 드디어 곰이 되다 / 박 찬

열매생각 / 이정록

새벽까지 / 김명인

살을 섞는 일이란 / 손세실리아

시인 앨범 3 / 김상미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 김영남

하현달 / 김영남

푸르른 소멸·63 / 박제영

연민 / 이상국

기발한 인생 / 정병근

 

 

/ 정일근

물에게 절을 한다 / 정일근

이 복도에서는 / 나희덕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봄밤 / 이기철

돌에 대하여 / 이기철

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

봄 기도 / 강우식

헌책방에 대한 기억 / 서상권

얼룩 / 서상권

 

나는 어느 봄날 길을 건너다 깨닫는다 / 서안나

깨꽃 / 마종기

시간을 뒤적이다 / 반칠환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 김성옥

고딕체로 서 있는 당신 / 변종태

지네 / 김충규

개가론改嫁論 / 신달자

옛날 빵집 / 김영탁

/ 김종해

水墨 정원8 / 장석남

 

 

가족사진 / 나태주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25년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아름다운 문상 / 권영준

 

꽃나무의 나라에서는

꽃이 지기 전날

조등을 내건다

 

봄밤

문상 온 나

 

화사한 시포(屍布)에 싸여

등을 활짝 켜놓은

목련꽃잎

 

소멸이 환하다

 

 

산파 / 김정미

 

검은 자갈돌 위에

흰목물떼새가 알을 낳는다

까만 돌이 햇빛을 받아

잘잘 기름을 흘리며 끓고 있는데

어미 새는 번갈아 다리를 들어올리며

알들의 주위를 돌고 있다

산도를 막 빠져나온 알들에게

나무 그림자가 짧은 곰배팔이라도 뻗으면

으름장을 놓으며 쫓고 있다

자갈돌은 어미 새의 맘을 아는지

정오의 햇살을 배터지게 먹고 또 먹는다

터질 듯 배를 불린 자갈돌은

어미 새와 약속한 포란을 한다

잘게 부순 햇빛 알갱이들이 껍질 속으로 스며든다

알들이 술렁거린다

날개가 꿈틀거린다

자갈돌의 숨죽인 마지막 일격에

! 껍질이 아픔을 쏟아낸다

자갈돌은 강물에 손을 씻고

어미 새를 부른다

! 보세요

 

 

 

활엽 카메라 / 김정미

 

가을 볕 옹송그린 굴참나무 숲에서 셔터 소리가 들린다

 

늠름한 참나무 초록빛 이파리에 누가 야금야금 작은 구멍을 내고 있다

겉늙은 피사체도 젊게 찍어내는 광합성 초박형 렌즈라?

(오늘 운세에 횡재수가 있더라니)

한쪽 눈을 감아야 눈을 뜨는 파인더, 점멸하는 기억의 붉은 창을 연다

 

놀랍게도 작은 잎사귀 한 장에 커다란 굴참나무 한 그루 들어 있다

갈래갈래 찢어진 고랑을 따라

무수한 팔과 다리들이 허우적거리며

까마득한 벼랑 끝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쩍쩍 갈라진 껍질에도

흰털 돋아난 잎맥에도

빽빽하게 씌워진 매뉴얼

읽어도 알 수 없는 비책들이

바싹 마른 갈잎 필름에 둘둘 말려 있다

그 순간이었을까?

외눈박이 바람이 번쩍 플래시를 터뜨리며

굴참나무 뻥 뚫린 뼛속을 환히 비춘다

 

 

 

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눈물 -19 / 정진규

 

소설가 이청준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나긋나긋하고 맛있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슬픈 이야기인데, 그의 입술에는 끝까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깊이 내 가슴을 적셨던 아흔 살 어머니의 그의 어머니의 기억력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즈음 말로 하자면 알치 하이머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난 설날 고향으로 찾아뵈었더니 아들인 자신의 이름도 까맣게 잊은채 손님 오셨구마 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 쉬었다 가시요 잉 하시더라는 것이었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책을 나무라 하고 이불을 멍서기라하는가 하면, 강아지를 송아지라고, 큰며느님더러는 아주머니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더라는 것이었는데, , 주로 사물들의 이름에서 그만 한없이 자유로워져 있으셨다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사물들의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는 아직 빈틈 같은 것이 행간이 남아 있는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었는데, 다시 살펴보니 이를테면 배가 고프다든지 춥다든지 졸립든지 목이 마르다든지 가렵다든지 뜨겁다든지 쓰다든지 그런 몸의 말들은 아주 정확하게 쓰시더라는 것이었는데, , 몸이 필요로 하는 말들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갇혀 있으시더라는 것이었는데, 몸에는 몸으로 갇혀 있으시더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빈틈도 행간도 없는 완벽한 감옥이 있더라는 것이었는데, 그건 우리의 몸이 빚어내는 눈물처럼 완벽한 것이어서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그리곤 꼬박꼬박 조으시다가 아랫목에 조그맣게 웅크려 잠드신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子宮 속 태아의 모습이셨더라는 것이었는데

 

 

 

그리운 옛집 / 김영남

 

옛집은 누구에게나 다 있네. 있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라도 남아 있네. 팽나무가 멀리까지 마중 나오고, 코스모스가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길. 그 길에는 다리, 개울, 언덕, 앵두나무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잡아당기면 고구마 줄기처럼 이것들이 줄줄이 매달려 나오네.

 

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어느 날 나는 전철 속에서 문득 나의 옛집을 만났다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옛집이 아니었네.

 

 

 

의자 위의 흰눈 / 유홍준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로부터 피곤한 눈 감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의 흰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길

붙잡을 수 없었다

 

 

 

등나무가 내 목을 비튼다 / 김영남

 

등나무가 온몸을 비비 꼬며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밧줄이 있는 그의 행동이 맘에 든다.

모험에 가득 찬 그의 사고가 부럽다.

 

오른손, 왼손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난관을 극복할 줄 아는

사고, , , 머리, 가슴을 분간할 수 없는 사고, 여체

를 탐험할 때 쓰는 사고 ......

 

, 오늘은 내게 없는 능력이 내 목을 비틀면서 올라가고 있구나!

내 목을 비틀어주니까

세상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학문이 보이고, 시가 보이고, 마누라가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내 목을 비틀어주니깐.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비틀어지면 이상한 사람이 될까봐

비틀어진 목을 반대로 비틀면서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시원한 그늘을 남에게 선사할 수 있을까 하고

은은한 향기까지 그 속에다 예쁘게 퍼뜨릴 수 있을까 하고

 

 

만월 / 이은림

 

1

달은 제 몸을 부풀리며 신음한다 月下, 나도 식은땀 흘리며 앓고 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달빛, 붉다 양손바닥에 달빛 고인다

덜거덕덜거덕, 갑자기 귓속에 쌓이기 시작하는 소리 희미한 사각의 어둠이 흔들린다 달포 전, 이사오면서 두고 온 녹슨 세탁기의 웅얼거림 같은 저 소리 나는 눈을 감는다

 

2

절은 때투성이의 나를 삼키고 덜거덕덜거덕 쉴새없이 웅얼대는 세탁기, 싸구려 세제와 표백제가 내 몸을 에워싼다 누런 호스가 붉고 비릿한 찌꺼기를 토해낸다 아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위태로운 빨랫줄에 걸려 너풀거리는 텅 빈 내 가죽, 허옇게 탈색된 채 버석버석 메말라 가는 나를 노려보는 세탁기도 빠른 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3

창문 가득 끈적거리는 붉은 달빛, 흐른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것들이 창백하던 달을 가득 채워 놓았다 부푼다 넘쳐 흐른다 저 달 그러다 어느 순간, 붉고 뜨거운 것을 다시 내 안에 밀어 넣는다 차갑게 지친 몸 쓰다듬는 달의 손가락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린다 굳어버린 뼈들을 부러뜨려가면서

 

4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달빛의 신음,

누가 이 깊은 밤에 빨래를 하나 웅웅거리는 세탁기 소리가 어둠을 돌돌 만다 머리 속은 어느새 소용돌이로 가득 찬다 붉은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킨다 서쪽 창을 기웃거리며 지나가는 달, 제 살들을 내게 조금씩 옮겨 놓으며 그렇게 가라앉는 저 붉고 끈적한

 

 

 

 

쓸쓸하게 저무는 날에 / 박동진

 

 

친구들 다녀간 후

식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진 빈 술병과 술잔

어젯밤, 아니 조금 전까지 침 튀기던 열기가

잠깐 사이에 식어 마음 휑하다

 

새가 날아가버린 빈 새장을 생각한다

전처가 되어버린 아내와 옛친구 옛사랑 옛 애인 옛고향 등

생기 돌고 열기 넘치던 이전의 것들은

옛 이라는 무거운 관을 인 채 가라앉았고

지금 남아 있거나 다가올 일들도 왠지 빈 그릇만 같다

 

죽음의 나이테 늘리며 자라는 나무,

꽃 피워내 듯 아름다웠던 기억은 늘 흐트러져 있으며

씻어낼 수 없는 기억의 잔재는

그릇에 묻은 찌꺼기처럼 고약한 냄새가 난다

 

오십 다 된 사내가 밤샘 술자리

뒤끝에 깨진 술잔에 손을 베고 마는 것은

새로 판을 짤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숨어버린 옛 기억의 퍼즐 조각 찾다가 빈 그릇

채울 여문 조각들까지 흘려보냈기 때문이었을 게다

 

내 생의 어떤 옛 기억들도

세척되지 않을 것이고 태우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가끔 짧은 희열을 줄 뿐이다

허나, 닦아서 다시 사용하는 그릇보다 훨씬 형편없겠지만

어딘가에서 나처럼 영혼이 허한 새

날아들도록 가만히 봄 창열어놓는다

 

 

 

봄이 오기 전 / 김두일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더딘 열차에서 노곤한 다리, 두드리는 남루한 사람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도에도 없는 간이역 풍경들과 눈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급행열차는 먼저 보내도 좋겠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운영이 피고 진 넓은 들을 만날 수 있다면. 들이 끝나기 전, 맨발로 흙을 밟아 보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 흙내음에 한참을 젖겠습니다. 쉬엄쉬엄 걷는 길, 그 끝 어디쯤에 주저앉아 혼자 피어있는 동백이며 눈꽃이며 키 작은 민들레의 겨울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봄이 깊기를 기다리라고 이르기도 하겠습니다.

 

기차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열고 해지는 들에서 노을 한 개비를 말아 피우겠습니다. 이제껏 놓지 못한 시간을 방생하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 완행열차를 타고 남으로 가겠습니다. 남녘 어디라도 적당합니다.

 

 

 

직소폭포 가는 길 / 정영경

 

나 몹시 외롭거든 내변산 직소폭포 갈대 무덤길로 갈 것이다 황백색 붉나무랑 한나절 붉어지다가 남몰래 신들림을 당한 신나무 되어 보리라 장구밥나무의 장구를 빼앗아 놀다 쥐가 똥을 싸서 무릎팍이 헐어버린 쥐똥나무 아래 슬쩍 실례도 해보리라 질감이 좋고 향이 기가 막히는 까마귀배개 꽃잎에서 한숨 자다 보면 공작꼬리 흔들며 자귀나무 날 깨우리라 복사나무 그늘에선 복사꽃을 꿈꾸면 안 된다고 꽝꽝 나무 온몸으로 꽝꽝대리라 더러 수려한 수리딸기 잎 지어 누워있는 바로 그 옆에 숨어 있다가 덜꿩나무 엉덩이에 박혀 있는 밑구멍에 똥침을 가하리라 아직은 안된다 배꼽을 숨겨 앙살 떠는 팥배나무 배꼽도 벗겨 보고 때가 많아 발발이 휘어져 있는 때죽나무 등딱지도 밀어 주리라 다리 꼬인 합다리 나무와 아서요 아서요 손 저어 나무라는 서어나무 그러다 작살난다 벼르는 작살나무 정주면 가슴에 금이 간다 찌어대는 정금나무 모두 저 샛길 담장 아래로 유혹하리라 이도 저도 싫으면 푸레 푸레 눈두덩이 우물진 물푸레나무에 주저앉아 봉래곡 암벽단애 사이 떨어져 내리는 실상용추 물이 되어 흘러가 볼 거이다 분옥담에 엎드려 딱 한번 울음 되어 너를 불러 볼 거이다

 

 

 

기차를 놓치다 / 손세실리아

 

골판지 깔고 입주한지 얼마 안 되는

말수 없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불에 가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개펄 / 이재무

 

사내는 거친 숨 토해놓고

헛기침 두어 번 뱉어 내놓고는 성큼,

큰 걸음으로 저녁을 빠져나간다

팥죽 같은 식은 땀 쏟아내고 풀어진

치마말기 걷어올리며 까닭 없이

천지신명께 죄스러워 울먹거리는,

불임의 여자, 퍼런 욕정의 사내는

이른 새벽 다시 그녀를 찾을 것이다

냉병과 관절염과 디스크와 유방암을

앓고 있는 여자, 그을음 낀 그녀의 울음소리

아내가 되어 낮고 무겁게 마을을 덮는다

한때 그 누구보다 몸이 달고 뜨거웠던

우리들 모두의 여자였던 여자

생산으로 분주했던 물기 촉촉한 날들은

가고 메마른 몸 속에 온갖 질병이나 키우며

서럽게 늙어 가는. 폐경기 여자

그녀는 이제 다 늦은 저녁이나 아른 새벽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몸을 탐하는

사내가 노엽고 무서워진다

그 여자가 내민 밥상에서는 싱싱한

비린내 대신 석유내가 진동을 한다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니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송아지 / 박형준

 

부뚜막에 앉아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온돌 아래

깊디깊게 겨울밤이 지펴졌다

갓 낳은 송아지의 발바닥을 만지며

잠이 들었다

온돌의 불기처럼 부드러웠다

 

엄마 소가

난산 끝에 죽은

기나긴 밤이었다

 

 

 

봉인된 방 / 이은림

 

조간신문 국제면, 직사각형의 흑백사진

누워있던 소녀미라가 내 눈을 보며 말을 건다

안데스 산맥 어디쯤 코 박고 엎어져 있었다고

몇 백년도 더 된 말을 주절주절 내뱉는다

나는 반쯤 썩은 사과를 먹으며 그래그래,

고개 끄덕이다 말고 거울 앞으로 간다

언젠가, 길에서 주운 이 둥근 거울에는

알 수 없는 풍경들이 살고 있다

다섯 개씩이나 되는 태양이 박혀있고

날개 달린 뱀들이 떼지어 지나다니기도

한다 (맨 처음 담았던 기억을 읽은 것일까)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한 움큼쯤 꺼내와도

모른 척 일렁이는 풍경들 나는 그 속에

나를 빠뜨리고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빗었다

등 뒤, 또다시 미라의 웅얼거림이 들린다

나랑 같이 안데스로 가자,

몇 백년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어느 새 나는, 사과의 썩은 부분을 먹고 있다

벌레 한 마리 꾸불텅한 내 몸 속 길을 내려간다

거울 속엔 붉은 옷을 입은 낯선 여자가

메마른 손 내밀며 잉카잉카, 울고

 

 

피안(彼岸) / 이은림

 

저 집들, 언제 강을 건너

저렇게 무덤처럼 웅크리고 앉았나

아무도 몰래 건너 가버린 저 산들은

어떻게 다시 또 데려오나

젖은 길만 골라 가는 낡은 나룻배가

산과

나무들과 꽃들,

풀밭을 다 실어 나른 건가

남아있던 불빛마저 참방참방 뛰어서

저 편으로 가는구나

환하다,

내가 없는 저곳

 

 

보따리 / 함민복

 

한 시간 걸려 버스가 읍내에 도착하면

저것 내 것! 저 것 내 것!!

보따리 들고 내리는 할머니들보다

좀더 젊은 할머니들

보따리를 향해 버스문을 후벼판다

 

휜 허리로 짐보따리를 내리는

몸집보다 큰 익모초 단을 내리는

할마니들의 쪼그락

 

저 작은 보자기

수만 번 꾸렸다 폈다 했을

저 작은 보따리

 

어느 겨울 밤

눈물

한줌

꾸렸을

저 보따리가

 

 

 

호박 / 김용락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끓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등등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모성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빨래하는 맨드라미 / 이은봉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듯한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리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1 / 손현숙

 

1

엄마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든

아가의 맨발이 포대기 밖으로 쏙 빠져 나와 있다.

한번도 자신의 무게를 실어보지 못한 발.

아무 것도 경계할 줄 모르는 태초의 꽃.

아가의 말랑말랑한 발을 보며

언젠가는 저 발이 견디며 가야 하는

땅위의 돌들과 음모와 때로는 돌아서야 하는 사랑과

어느새 두터워진 발바닥의 감각들로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모멸들을 생각하며

엄마의 등에 업혀 환하게 잠든

아가의 발을 좇아 횡단보도 초록불의 깜박임을 건넌다.

 

2

장난스럽게 떠돌던 어린 발이 쉴 곳을 찾아 숨어든다.

신설동 로터리 노벨극장 동시상영관,

모르는 발을 따라 슬며시 의자 속으로 몸을 묻는다.

월하의 공동묘지, 한 발 잘려 한 발로만 떠도는 영혼.

내 다리 내놔! 내 다리 내놔!

스크린 밖으로 나를 잡으러 오는 저 맨발의 귀신

한 발로 콩콩거리며 아직도 나를 따라 다닌다.

무서운 세상으로 사정없이 내몰아 친다.

오래 전 어머니 등에 업혀 꽃처럼 피어났던 저 발.

그 이후로 일평생 죄를 싣고 다녀야했던 에덴 그 이후로의 족적.

 

3

깜박임도 없이 켜지는 빨간 신호등의 의미는 단호하다.

상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34번 국도변에

검정 하이힐 한 켤레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횡단보도 선에서 조금 비껴

삶의 기억을 담은 채 비틀거리는 발은

우리들의 내일처럼 방향이 모호하다.

운명을 달리 하는 바로 그 순간

이승을 움켜잡았던

꼬일 대로 꼬여진 생의 발바닥

그녀 살아 마지막 체온을 감당했을

신발 속으로 사운거리는 가을 햇살이 차다.

 

 

 

당기세요를 당기며 / 임화수

 

미세요가 나를 확 끌어당긴다

당겼기 때문이다.

문턱에 발이 치인 유리문이

빠질 듯 덜컹이며 짜증이다.

이미 많은 문맹자들이

당기세요 와 미세요 를 사이에 두고

유리문을 아프게 만들었는지,

옥신각신 밀고 당기는 소란에도

돌아보는 이가 별로 없다.

미세요라고 써 붙인 언니의 등을

당긴 죄로 평생 덜컹임에

시달리는 형부,

당기세요라고 써 붙인 가슴을

밀친 죄로 고장난 문짝이 되어

삐꺽대는 아들의 삶을 아직도

열고 닫아 주고 있는 어머니

변기에 급한 마음을 쏟아 내고

느긋이 바라보는' 당기세요'

 

시무룩한 당기세요를

활짝 끌어당기자

몇 주째 나를 기다리다 지친

아홉살박이가 도어벨처럼

신나게 딸랑대며

와락 열어 준 가슴속으로

면목 없는 어미가 들어선다.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자일을 던지다 / 김정미

 

민달팽이가 15층 유리벽에 찰싹 붙어

빌딩 안쪽을 탐색한다

더듬이를 안테나처럼 길게 빼고

지워진 물길을 찾고 있다

조금씩 밀어올린 욕망이

까마득한 공포에 저를 걸 줄이야

헛발 딛은 바람이 곤두박질 칠수록

달팽이는 미끄러운 유리벽을 움켜쥔다

맨살로 만년설을 녹이기라도 할 듯

유리벽에 온몸을 밀착한다

등반은 길어지고

자웅동체의 몸뚱이가 놓인 슬라이더 위에

햇살이 긴 혀를 날름거린다

한순간에 녹아 떨어져내릴 것 같다

더듬이의 수신호가 점점 빨라지고

나는 목이 탄다

빙벽이 녹아 물이 맺힌 자리에

문득 암각이 나타난다

그래, 저 거야!

네 품에서 자일을 꺼내

던져!

위험한 꿈을 향해

 

 

먼지의 방 / 김정미

 

멀쩡하던 청소기가 말썽을 부린다. 닥치는 대로 삼키는 놈의 식욕에 언젠가 탈이 나지 싶더니 드디어 숨을 헉헉 토해놓는다. 꽉 조인 나사를 풀자 시커먼 내부가 흉물스레 드러난다. 먼지가 전부인 주머니 속, 양복단추빈혈약유리파편몽당연필압정과자부스러기바퀴벌레 온갖 잡동사니들이 궁핍한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엮어 튼튼한 둥지를 짓고 있다. 불룩해진 자루는 자궁처럼 먼지의 알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다. 잿빛 둥지에 가만히 손가락을 넣어본다. 뾰족한 부리가 톡톡 살갗을 쫀다. 하얗게 일어나는 살비듬, 숨이 막힌다.

 

햇살이 기웃거리자 착한 먼지들이 반색을 하며 날아오른다. 한 줌 먼지로 돌아가는 세상, 그들이 만든 방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아늑하고 편하다.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김성수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마당가의 저 나무 / 강문숙

 

세상 모든 흔들리는 것들로부터 가을은 오네.

마당가의 저 나무 흔들리므로 아름답네.

제 몸 던지는 잎들이 저렇게 붉어지니

이제 지는 노을도 슬프지 않겠네.

- 그건 사랑이야. 꺼지지 않는 목숨이야

바람이 중얼중얼 경전을 외며 지나가네

흔들리자, 흔들리자

세차게 흔들릴수록 무성한 날이 오겠지

나무의 기쁨이 하늘을 덮네

오래된 저 나무 흔들리므로 더욱 아름답네

 

 

 

물먹는 하마 / 강문숙

 

어서, 하마를 치워야 할텐데

저 하마를 밖으로 끌어내야 할텐데

 

늦장마 끝나고 서늘한 바람 분다

커튼을 갈아끼우다 문득 떠올린

하마 사냥

 

장롱 속, 창문도 없는 독방에

켜켜로 쌓아놓은 이부자리, 베개들

햇살 대신 물먹는 하마 한 마리 들여놓고

짐짓, 눈 감아버렸다

하루에 두어 번, 하마의 안부를 확인할 뿐

여름 늦장마 견디고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열어보면 저럴까

보이지 않게 젖어 있던 속내

눈물로 차올라 있구나

소리없이 일가를 이루던 곰팡이

지독한 슬픔의 감옥이었구나

 

제 몸 안에 늪을 가두고

물소리를 듣고 있던 하마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면온리(綿縕里)* 겨울 풍경 / 이용환

 

한 짐에 70원짜리 박속같은 소나무, 굴참나무 장작이

무쇠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튀던 빈 교실

 

강냉이 주전자 설설 끓고

노교사(老敎師)는 귀퉁이 다 닳아 빛 바랜 책을 읽는다.

 

가끔 눈 쌓인 산하를 날아오르다

투명한 유리창에 머릴 부딪는 눈 먼 겨울 참새들

 

*)면온리는 둔내와 봉평터널 사이의 작은 산간 마을,

나의 초등학교 모교.

 

 

풀과 함께 / 이승희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 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흑백사진 / 최경민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어라! ! / 이희철

 

어디보자, 이게 피라민가 빙언가 속이 보여야 빙어이제. 어디 보자. 자리를 벌리고 비집고 들어와 냅다 겨울 햇빛 한 조각을 집어 들던 사람. 빵모자를 눌러쓰고 초집장에 한 번 찍어 소주잔을 걸치고 입술을 쓰윽 쓰다듬던 사람 어라! !

 

그 겨울이 그립네. 겨울의 깊이를 웅크리고 웅크려서 얼음의 두께로 한 겨울을 보여주던 저수지. 손도끼로 곡괭이 내리쳐야 닿던 완강한 겨울의 복판.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얼음을 깨어내 내부로 닿던 적막. 속이 투명한 빙어가 어라! ! 얼음빛을 닮아 빛나고 있네.

 

얼음 밖이 딴 세상이라, 얼음 밑이 딴 세상이라 조심조심 겁 많은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않다가 안심이다 정말 안심이다 마음놓을 때 쩡쩡 갈라지며 울음 울던 물의 소리 저 검푸른 빛 구들장만하게 떼 오고 싶었네, 몸으로 뗄 수가 없어 엎드려 어쩔 줄 모르던, 어라! ! 그래서 더욱 첩첩 산중이던 상주 어디 쯤에 아직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그리운 사람.

 

 

실업 /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내내

순환선 열차에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 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 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3/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빵구집 / 김영탁

 

빵구집이 있네

무엇이든지 구멍 나면 때워주는 그 집

홀아비 박씨 단 하나 못 때우는 게 있다면,

그 흔한 처녀는 그만두고

벙어리 과부 하나 못 때우는

그 빵구집

 

 

마늘밭 가에서 / 안도현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 순이 한 뼘씩 쑥쑥자랍니다

나는 밭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을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소금창고 / 김영탁

 

옛날 이발관 머리맡에 붙어 있는,

내 눈까풀에 아롱거리는, 낡고 바랜

흑백사진 한 컷으로 찍히고 마는,

염전 위에 떠 있는 소금창고

고적한 겨울 바람이 창고를 흔들 때마다

켜켜이 묻어 있는 소금의 추억들은

출렁거린다 빈 소주병들

벽틈으로 새어 들어와 꽂히는 빛살을

간간이 튕겨내는 파도 소리들

먼 길 왔다 지친 시린 바람에

고개 숙이고 화톳불에 몸 비비다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만 같아

돌아보면, 말라빠진 행운목 한 그루

서 있었네 그랬네 모두들 떠나기 전

소주를 들이켜며 추억했었네

출렁이는 바닷물 끌어안고 오뉴월

땡볕 아래 담금질하며 눈 먼 낙타처럼

걸었었네 끝 모르고 걸어갔지만

끝에 이르면 알았네 끝은 처음부터

나를 따라왔다는 것을.

먼 수평선 너머 달뜨는 밤마다

이미 완성된 소금이 알알이 출렁이던 것을

 

 

 

감나무에 오르면 울 밖이 보였다 / 임재정

 

울 밖의 일은 감감. 감나무 아래에선 여름의 오후가 가장 깊은 그늘이었다 무른 속살을 타고 오른 이파리 사이로 하늘이 고이고 물 속처럼 해지느러미가 반짝거리면 나는 그 반짝임을 속속들이 알아듣곤 했다 목젖을 보이며 바람에 화답하는 바알간 감나무 속은 이미 가을이었다

 

나는 지금도 얼음의 사다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감감. 깨어나자 어른이었다 메아리처럼 나는 조금 늦게 도착하고, 기어이 아무런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취중이었다 메아리는 쉽게 스러지지 않고 오래도록 떠돌다가 깨진 유리조각처럼 쏟아지곤 했다 비명을 지르면 목젖을 쏟아낼 것처럼 홍시가 익어가고 있었다

감나무 가지 끝, 나아갈 곳이 없다

 

 

고강동의 태양 / 유미애

 

푸르고 붉은 지붕들 태양연립 은하슈퍼

바람 돌아가는 모퉁이 금성여관 턱밑에는

노인이 꽝꽝 못 박아 걸어둔 전구가 있다

560번지 사람들은 그 아래서

부고장이나 밀린 고지서 등을 읽는다

바람 속에 한숨 넣어주며

비행기들이 낮게 나는 하늘 한 쪽

새들과 같은 방을 쓰는 노인을 보고 개가 짖는다

저 울음을 따라 흘러가고 오던 빛들

그을린 얼굴의 해가 천정으로 숨어들면

잠시 벗어놓은 어깨의 푸른 멍울이

별 대신 뜨는 이 곳, 02

지하방에 서식하는 내가 어둠을 퍼올릴 때도

전구는 얼어붙은 길을 풀어내고 있었다

떠나 있던 새들이 빈 방으로 모여든다

일성전기 전깃줄에 감긴 사십 년 시간을 지나

복지회관 쪽방에 남은 박노인 눈 속의

일렁거리는 불빛, 그 등 앞세우고 노인은

70년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뒤를 따랐다

손에 든 부고장에는 지상에 없는 주소가 적혀 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사람들은 달은 두고, 금성여관

턱 밑에 달랑거리는 전구를 바라본다

 

 

껍질의 힘/ 이정록

 

닭똥집에 소주를 먹는다 집 한 채가 왜 이리 쉽게 무너질까 똥집의 내장 벽지를 뜯어냈기 때문이다 유리로 만든 집에서 질긴 썬팅막을 걷어낸 격이다 내가 독한 소주를 견딜 수 있는 것도 내 똥집 속의 내장 벽지 때문이다 욕지거리를 참아내는 내 심장 속 가죽 부대도 질긴 막으로 묶여 있다

 

껍질을 깎아낸 감자는 독이 오르지 않는다

씨눈이 떠났기 때문이다 껍질은 오히려 나를 살리는 씨눈의 곳간, 껍질을 벗긴 갈대는 마디를 꺾는다

 

철면피에 녹 방지용 웃음도 피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소주잔을 털어 넣고 집으로 향한다 저 질긴 내장 벽지 안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씨눈을 흘기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감자를 썰어 넣은 된장국이 졸았든지 식었을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힌 감자의 독오른 눈초리가 초침을 뽑아들고 있을 것이다 내 온몸의 씨눈들이 문을 열고 눈치를 살핀다

 

당신이 독이 오르는 이유도 다 씨눈이 싱싱하기 때문이다

 

 

곱창 / 임희구

 

흰눈이 팡 팡 팡 쏟아지는 밤

양철 깔대기에

능글능글한 돼지창자를 까뒤집어 놓고

썩은 똥찌꺼기를 훑어낸다

돼지똥을 만진다

라디오에선 주의 탄일을 축하 축하하고

고무통 속 찬물에 담긴 돼지창자에선

죽어 나자빠질 똥냄새가 퍼진다

모락모락 퍼진다

진동한다

손가락이 얼어터져

손가락이 똥이 될 것만 같다

찜통 속 펄 펄 펄 끓는 물이

똥 뺀 창자를 기다린다

얼어터지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기가 막힌 돼지창자의

싯누런 똥냄새 울려 퍼지는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요약 / 이갑수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농사법 / 한광구

 

잘못 앉은 돌은 골라내고 굳어진 흙을 바수어 잡풀은 뽑아내고 하늘이 주신 말씀을 받아 이 땅에 엎드려 사는 목숨의 숨결과 섞었습니다. 보세요. 말씀이 파릇파릇 싹이 돋고 꽃 피고 열매를 맺는, 보십시오. 별이 지고 난 하늘에도 꽃이 피고, 길이 나고, 땅에서 하늘나라 저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말이 복음처럼 파란 잔디밭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이게 제 필생의 농사법입니다.

 

 

집장구 / 손택수

 

일 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 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 입 가득 머금은 물을

-- 분무기처럼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헤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 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우물 치는 날 / 정인섭

 

비가 갠 그 이튿날

우물을 치려고

어른들은 머리를 감아 빗고 흰옷을 갈아입었다

신발도 빨아 신었다

 

손 없다는 날

마을은 개도 안 짖고

하늘이 어디로 다 가서 텅 비었다

 

우리들은 늬들 누렁코도 부스럼도 쌍다래끼도 우물 땜시 벗었니라던

할매 말씀이 참말이라고

턱을 누르며 믿었다

 

울타리도 절구통도 살구나무도 언제 본 듯한 날

우물가엔 아래서 올라온 것들이 쌓였다

 

삼대 부러진 것 바가지 실꾸리 신발짝 호미자루 쇳대 뼈다귀 동쩌귀 이끼 못 흐레 쇠시랑날 연필 눈썹 꿈동 텡

 

 

죽은 나무 / 김근

 

할미는 알약을 세어본다 문풍지 바깥으로 눈보라 거세고 방안엔 동그란 햇빛 햇빛을 핥아먹고 하얀 알약들 무장무장 늘어가고 할미는 오늘이 어제인지 알지 못한다 짓무른 눈 속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할미는 알약을 한 움큼 삼킨다 줄지 않는 알약들 할미는 봄처럼 노곤해지고 아지랑이 아지랑이 방안의 모든 모서리들이 일그러지고 문득, 할미는 물기 없는 제 가랭이가 가렵다 스멀스멀 가랭이 사이로 기어나오는 하얀 벌레들 벌레들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약을 먹고 내가 버러지를 낳았나 버러지가 나비가 되나 흐흐흐흐 이도 없는 입으로 할미가 한 번 웃자 일제히 구겨지는 천 개 주름살 헐거운 제 가랭이를 할미는 들여다본다 에휴 몇 밤 자고 나면 가랭이 사이로 자식들이 멀쩡하게 걸어나왔니라 눈보라 그치고 할미의 몸뚱이가 자꾸 동그랗게 말린다 말려서 할미는 제 가랭이 열고 아주 들어가 버린다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눈 뜨자마자 할미는 알약을 세어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죽은 나무 한 그루

 

 

들판의 노을 / 한성례

 

지평선 너머로 지는

꼭두서니빛 노을은

서서히 번지는 땡감물처럼

발끝으로 스며든다

온 세상이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녘

세상의 변혁도 구원도 모두 남의 어깨너머로

내다보았듯

텅 빈 들판에서

나는 그림자 하나 만들지 못한다

멀리 깜박깜박 불빛 한둘이

웅크린 짐승처럼 숨죽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어

그나마 피가 도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땅 속 깊이 숨쉬는

깊고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향해 솟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일상은 청동색으로 흘러가고 있어

무거움을 이기고 고개 들어

노을을 보면

역설처럼 모두가 한 주먹 깃털로 가벼워진다

 

문득

숨을 고르며 내려가던 노을이

요염하게 타오르며 얼굴을 붉히는

순간

그 배면에 얼비치는

파르라한 슬픔의 빛깔이

시선을 붙잡으며 훅 달려든다

뒤를 좇을 수 없는 아득함

유년의 배들평야 만석보 뚝길에서 바라보던

현기증 일던 노을

그 황홀함에 갇힌 채 나는 지금껏

길을 잃고 서 있다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흰둥이 생각 /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의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 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어미 쥐의 말씀/ 오봉옥

 

저 죄 많은 두 발 짐승은 시인이란다. 끼끼, 시를 쓴답시고 지금 동강을 간단다. 절집을 찾는단다.

 

저들이 느릿느릿 게걸음질치는 건 꽃길에 취해서가 아니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건 속죄의 옷자락이 무거워서란다.

 

저들에겐 고통을 키우는 유전자가 있단다. 너희는 아득한 구멍 속에서 캄캄한 희열을 느끼지만 저들은 환한 길을 가면서도 터널 같은 외로움을

 

느낀단다. 이 어미의 눈엔 저들의 내장까지도 보인단다. 저들이 가고 있는 길, 밑도 끝도 없이 꿈을 꾸며 가야할 길, 가서는 다시 돌아올 그 길이 다 보인단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두 발 짐승으로 태어났을꼬, 몇 생이나 닦아야 우리 같은 존재가 될꼬.

 

 

비 오는 날의 전화 / 박경자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 소리마저 지우더니 적막이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요란한 전화벨 소리 울리더니 여보세요 439-8696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아 예 그라믄요 저 혹시 대구에서 살다 오신 분 맞습니꺼 예 그런데요 아 그럼 너 성식이 아이가 성식이 맞제? ? 아니 아닌데요 아이라꼬? 내 다 안다 니 성식이 맞데이 아 아닙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어허 니 사람이 그라믄 못쓴다 니 분명 성식이 맞는데 왜 자꾸 아이라카노 여보세요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전화 이만 끊습니다 니 참말 너무 한데이 니 성식이 맞데이 내는 못 속인다 아이가 여보세요 저는 성식이가 아니고 김경호입니다 전화 끊습니다 아 잠깐 잠깐만 니 정말 성식이가 아이라 이기가? 예 아닙니다 그럼 좋데이 니가 성식이가 아이고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거 뭘로 증명할끼고 예?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하며 전화 끊어지더니 제 소리 마저 지운 빗소리 적막이더니 '니가 너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소리만 온종일 들려 오더니

 

 

 

오늘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 서정춘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

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

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

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

어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공룡발자국화석 / 이동호

 

수수 억 년 동안

한 자리에 찍힌 육중한 저 발자국을 보고

그저 발자국 정도로만 말하는 것은

큰 실례다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발자국 주인보다도

세월을 너무 오래 견디어 왔으므로

이제 진흙조차 단단한 반석이 되어

발자국을 모시고 있다

땅 위의 무수한 존재들이 생멸을 거듭하는 동안

진화의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는 듯

아예 지구를 한 켤레 신발로 벗어둔 그의

나머지 발자국들은 지금쯤 쿵쿵 중생대 어디쯤에서

막 뛰어오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 떠 있는 해 또한 그의 숨구멍이다

급하게 몰아쉬는 숨소리처럼 구름 몰려들었다 흩어지고

수수 억 년이란 겨우 한 호흡이라는 듯

발자국을 신은 허공이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다

중생대가 현대 어디쯤 도달해 있는지

산이 저수지를 발자국으로 찍어놓고

내 옆에 웅크리고 있다

 

 

 

담쟁이 / 이경임

 

내겐 허무의 벽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한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 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 지독한 사랑이네

 

 

비 그친 뒤 / 이정록

 

소나기가 안마당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가 대문 쪽으로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을 다듬듯 바닥에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를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치자 울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들이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를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내기 중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 몸에 초록 침을 맞는 무논의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맞는 자리로 구름 몇이 다가온다 개구리의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뒷짐 /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 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자신의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뒤에 양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낮은 언덕의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를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이불 / 김나영

 

아이 둘 순산한 내 몸엔 늘 찬 기운이 돈다.

마음의 온기도 차츰 빠져나가고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곧 중학생이 될 아들 녀석이 내 배 위에 찰싹 옮아붙는다.

녀석의 어리광이 때때로 나를 귀찮게도 하지만

제 몸과 내 몸이, 제 피와 내 피가 서로 부르는 걸

아무도 벌려놓을 수 없는 이 간격을 어쩔텐가.

아들의 몸무게와 온기가 내 몸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온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견딜만한 무게와

가장 따뜻한 온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아 따뜻해, 너도 따뜻하냐

내 평생 이렇게 너를 덮고 살련다

너는 내 살과 피로 부풀려 만든 이불 아니겠냐

이 세상에 너 만한 온기가 어디 또 있겠냐

끝까지 나를 덮어다오.

 

 

 

내가 드디어 곰이 되다 / 박 찬

 

오랜 세월 - 함께 살아오면서, 팔베개 해주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며,

마다 가슴팍을 파고 들던 아내가, 지난 여름, 백두산을 다녀온 뒤부터 진절

머리를 내며,나를 안방에서 쫒아내버렸다. 동물원, 곰우리 근처에서나 맡은

적이있다는, 요상스럽고도 역겨운 냄새와, 너무도 우렁차 견디기 힘든 코고

는 소리, , , 되새김질하는 소리, 팔 벌리고 온 방을 굴러다니는 나의 잠

버릇 때문이었다.(백두산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거울처럼 맑고 잔잔한 천지

물을 보며 웅담술 한 잔 마신 것밖에 없다) 사람인 내 암컷에 따르면 그동안

나는 죽은 듯이 고요히, 아마도 무엇엔가 열심히 쫒디가가 들키지 않으려고

한곳에 머리만 처박고 숨는 등 마는 둥. 눈감땡감, 조용히 잠을 잤다고 한다

한 일주일쯤 지나, 이젠 괜찮아졌겠지, 살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 암컷옆에

누웠다가, 얼마 못가, 나는 또다시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동안 냄

새는 없어졌지만 발버둥치듯 온방을 뒹굴며, 우렁차게 코를 골아대는 잠버

릇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밤마다, 나는 맨 마루바닥에 하듯 누워

멀뚱 거리는 눈으로 창 밖에 빛나는 별이나 보았다. 그러다 알았다. 내가 곰

이 되었다는 것을,

 

. ! 내가 드디어 곰이 됐다! 이제 마늘과 쑥을 먹고, 칠흑같이 어두운 동

굴속에서 백 날만 지내면, 나는 비로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여지

껏 사람의 행색을 하고 살아왔지만 그동안, 나는 사람도 아니었다!

 

 

 

열매생각 / 이정록

 

나무는 골치 아픈 생각을 몸통과 뿌리에다

디밀었습니다 갈수록 밑동과 뿌리는 검고 우툴두툴해졌습니다

나쁜 생각이 내려가는 나무 안창은 방고래처럼 까매졌습니다 몸 안에

검은 허공을 품은 까닭으로 우듬지의 꽃과 이파리는 아름다이 피어나고

여린 가지도 하늘로 시원스럽게 뻗어나갔습니다 한 해 한 번씩은

단단해진 고민들이 어둠을 차고 올라가 열매가 되었습니다

열매는 꽃이나 이파리보다도 향기로웠습니다 그곳에는

오래 여문 생각이 씨앗으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새벽까지 / 김명인

 

한 장씩 더듬으며 너를 떠올리는 것은

내가 이 풍경을 대충 읽어버린 까닭이다.

어두워지더라도 저녁 가까이

창문을 달아두면

검은 새들이 날아와 시커멓게 강심(江心)을 끌고 간다.

마음의 오랜 퇴적으로 이제 나는

이 지층이 그다지 초라하지 않다.

그 창 가까이 서 있노라면

오늘은 더 빨리 시간의 전초(前硝)가 무너지는지,

골짜기를 타고

어느새 핏빛 파발이 번져오른다.

곧 어둠의 주인이 찾아들겠지만

내가 왜 옹색하게 여기

몇 가을 째 세 들어 사는지,

헤아리지 않아서 이미 잊어버렸다!

어떤 저녁에는 병색 완연한 새 한 마리가

내 사는 일 기웃거리다 돌아가면

나도 아주 하릴없어져 어스름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불붙는 아궁일

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정 심심해지면

땅거미 가로질러

하구 저쪽 갯벌 끝 끝까지 걸어가곤 한다.

거기에는 소금을 모두 비운 한 채

소금막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

시간의 무딘 칼날에 베여도 이제 더는

아프지 않도록

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

불꽃을 훨씬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

 

 

 

살을 섞는 일이란 / 손세실리아

 

얻어왔음직한 소국 몇 단 보도블록에 병렬로 늘어놓고 웅숭그려 졸고 있는 노파를 본다 주위 얼쩡거리던 견공이 꽃무더기 헤집어 오줌 갈기고 사라져도 꼼짝 않더니만 한참만에야 눈을 떠 뜯겨나간 꽃의 살점 다독이며 울상이다 느닷없이 오줌 세례를 받은 꽃들이 지린내나는 낯바닥 털어낼 생각은 않고 잔솔가지 같은 노파의 언 손 덥석 끌어다가 제 허벅다리 사이에 묻어주는데 꽃이 하자는대로 순순히 내맡기는 노파나 풀빛 살 속에 노파를 품어주는 꽃이나 둘 다 금세 발그레하다 하기사 우리네 생의 발원도 한 외로움이 또 한 외로움을 만나 시리디 시린 맨살 맞부딪쳐가며 간신히 일궈낸 불씨 한 톨 아니던가 시든 꽃이 저렇듯 사력을 다해 노파의 살가죽 다숩게 보듬는 일이나 갓난아이가 제 어미의 젖꼭지를 힘차게 빨아대는 일도 알고 보면 살과 살의 만남이니 자고로 잘 섞으면 만물을 살리는 기가 되기도 하고 섣불리 섞으면 독이 되기도 하는 이것을 섞으려거든 제대로 섞을 일이다 살 안팎의 마음까지도 듬뿍 섞어서

 

 

 

시인 앨범 3 / 김상미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 김영남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 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 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꺾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주마 하시던

고무 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

아름다운 등이 있다.

 

 

하현달 / 김영남

 

어느 날 밤 마당가에서 서성이다가

나는 보고 또 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달빛,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흰 옷자락을.

잠 못 든 댓잎 소리, 싸락눈도 잘게 뿌리고 있었다.

그때 동네 대밭 머리 위로 떠오르던 하현달.

이윽고 우리 집 신발장 위로

싸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릴적 무서운 그림자의

기억, 무서운 꿈처럼.

 

사납게 개 짖는 소리를 끌고 달빛이

집 대문을 막 넘어오고 있었다.

받아올 것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그 흔한 싸리울 하나 세우지 않고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밤

까닭 없는 부름으로 대문을 나섰다

흰 고무신 두 짝만 남기고

맨발로, 맨발로.

 

그 뒤로

문고리를 꼭꼭 잠그셨다, 할머님은.

등잔불도 아예 치우고 누워만 계시다가

어둠이 되셨다, 할머님은 끝내.

누구의 부름을 받으신 걸까?

 

등불 없어진 자리처럼 허전한 우리 집.

마당가에 서서 문득 신발장을 다시 올려다 봤을 때

마지막 유언처럼 남아 빛나는 신발.

그 속엔

밝히지 못한 어둠이 있다, 읊조리며 시린 눈을 감았다 뜨면

마당 가득 쳐들어오는 시퍼런 물결. 그 무서운 기억의 달빛 속

싸락눈으로 나는 싸늘하게 깨어 서성이고 있었다.

 

 

 

푸르른 소멸·63 / 박제영

- 등이 아프다

 

가 내 등을 툭 쳤다 그 뒤로

이 내 등을 툭 치고 갔다 그 뒤로

또 다른 이 내 등을 후려 치고 갔다 그 뒤로

이 내 등을 냅다 치고 도망쳤다

 

등 뒤에는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어쩌면 불가항력인

그 곳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C가 내 등을 쳤다 그 뒤로

K가 내 등을 후려쳤다 그 뒤로

J가 내 등을 쳐먹었다

 

등 뒤에는 손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 곳에 시퍼런 못이 출렁거린다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등 뒤에 시퍼런 못 박힌 사람들 자주 보게 된다 그들도 나처럼

등이 아프다

 

 

 

연민 / 이상국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기발한 인생 / 정병근

 

명절도 아닌데 막히는 길 어찌 알고

차들 새를 비집고 다니며 뻥튀기나 오징어를 팔고 다니는

저 남자의 인생을 나는 알고 있다

불과 5분 사이에 그는 나타났다

어디에서 왔다기보다는 그냥 불쑥 출몰했다

그는 한때, 시덥잖은 마술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회충약을 팔았거나 살모사의 꼬리를 슬슬 당기며

정력제를 팔았거나 이상한 씨앗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물을 펄펄 끓였으며 관광버스에 올라와

당첨된 금시계를 나눠주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내게 불쑥,

밍크코트를 내밀지는 않았던가

맑은 날에는 장작불에 닭을 구웠고

비가 오면 어느새 그는 우산 장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의 호주머니를 후려내던 야바위꾼이었으며

비장의 한 수를 유혹하던 박포장기였다가

최근엔 도청 장치 사기도박으로 쇠고랑을 찬 적도 있다

그에게 나 같은 인생은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그는 요리조리 잘도 피하고 도망 다니면서

언젠가는 보란 듯이 한밑천 잡고 말 것이다

비장의 무기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는 언제든 출몰할 태세가 완비되어 있다

 

 

 

/ 정일근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 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 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 같이 귀중히 여겨 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물에게 절을 한다 / 정일근

 

아내가 찻집을 하면서부터 물이 고맙다

수도 꼭지만 틀면 쏴쏴쏴 달려오는 물이 고맙다

 

솥발산이 푸른 정수리에 하늘을 받으셨다

은현리로 돌려주시는 정갈한 물

제 품에 안겨 사는 모든 식구들에게

젖을 물리듯 나눠주시는 맑은 선물

 

새벽마다 그 선물로 나는 쌀 씻어 밥을 하고

아내는 그 물 받아 찻집에서 찻물을 끓인다

 

물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생명을 물이 기르니

물에서 쌀이 나오고 물에서 밥이 나온다

 

물쓰듯이 물을 쓰다보니 귀한 줄 몰랐는데

물을 받아먹고 살면서부터

한 잔의 물도 고마워 물에게 절을 하는 날이 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물을 보내주시는 그분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그분의 발을 씻겨드리고 싶은 날이 있다

 

 

 

이 복도에서는 / 나희덕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

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7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 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둣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버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도 허지, 그것을 안 맨들 양반이 아닌디 아닌디......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의 두 입술은 설핏 웃는 듯도 하였다

상자 속에는 버선 대신 삼베 두 조각이 들어 있어서

그걸로 잘 마른 장작 같은 두 발을 싸드렸다

삼베 두 조각을 두고

할머니는 왜 끝내 버선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1978715일자 신문지 에 싸여 있던

수의 한 벌과 삼베 두 조각으로 따뜻하게 여며 입고

할머니는 1998119일 아침

흰 눈이 내리는 새로운 집으로 걸어들어 가셨다

 

 

 

봄밤 / 이기철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돌에 대하여 /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漁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든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봄 기도 /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 ,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헌책방에 대한 기억 / 서상권

 

'信友書店'이란 간판이 달린 헌책방은

읍 차부 옆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간판 글씨의 일부를 비바람이 벗겨 먹어

'信友書店'처럼 보이기도 했던.

가 허공에서 샅바싸움을 벌이는 동안

나는 중 3 주제에 낡은 시집의 옛 철자법을

해독하기 바빴다 풀풀 풍기는 좀 냄새가

자음 모음을 행간의 오솔길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툭툭 불거져 나오는 토속어는

날 퀴퀴한 헛간 속에 가두곤

게으른 노을빛 울음을 울게 했다

반백의 책방 주인은 늘 나무 주판알에

손가락을 넣고 살았다

내 훔쳐보기를 표나게 제지하진 않았지만

책 속에서 알밤을 줍거나 동전을 떨어뜨릴 때마다

수시로 視針을 뒤통수에 쏘아댔다

책방 주인과 외상 없는 눈치싸움하는 사이

60년대 말은 못물처럼 저물어 가고 있었다

쓸만한 책 한 권 눈치 안 보고

책가방 속에 넣는 날은

책가방이 휙휙 날아다녔다

책 속에서 누군가 의 추억을 훔친 날

가슴 속에서 콩 튀기는 소리가 났다

책갈피에서 나온 빛바랜 쪽지 하나가

내게 상상의 오르가슴을 일으키게 했다

밤새 생각이 종이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녔다

불면은 그 주위를 수줍게

수줍게 비추는 달빛이었다

 

*정지용의 '- 향수'에서 변용

 

 

얼룩 / 서상권

 

거울 속 얼룩을 닦아내면서

얼룩에게 내내 미안했다

오랫동안 누구의 얼룩도 되지 못한 내가

괜한 죄 짓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고

거울 속의 나는 안개처럼 흐려졌다

 

한때, 나는 그녀의 얼룩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 적 있었다

그 얼룩이 상처로 전이되는 과정을

숨막히게 지켜보았다

그녀가 입술 동그랗게 벌려

후후 입김 불며 다가올 때

나는 뼈저리게 황홀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얼룩 속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상처의 꽃,

내가 회심의 미소도 짓기 전에 그녀는 돌연

행선지 없는 막차를 타고 훌쩍 떠났고

나는 오지에 오래오래 남았다

 

그녀 없는 나의 얼룩은

금간 거울 속에서 부랑아처럼 떠돌았다

독방에 갇힌

無期 수인이 되었다

 

 

 

나는 어느 봄날 길을 건너다 깨닫는다 / 서안나

 

봄날

몸 반쪽이 중풍으로 굳어버린 노인

횡단보도를 힘겹게 건넌다

살아있는 몸이 죽은 몸을 끌며

봄 길을 끌고 세상 밖으로 건너고 있다

지팡이를 집고

허공에 굳은 몸을 기대면

꽃잎처럼 무너져 내리는 거리

살아있는 몸이 움직이면 죽은 몸이 따라오고

죽은 몸이 끌고 가는 노인의 젊은 날의 기억들

이끄는 기억과 이끌리는 기억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노인의 몸 안에 팽팽하게 맞서있다

 

나는 어느 봄날 길을 건너다 엿본다

길고 긴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노인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몸 안이 저승이고 몸 안이 삶이다

횡단보도 위에서

노인이 몸이 봄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소리들을

 

 

 

깨꽃 / 마종기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알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시간을 뒤적이다 / 반칠환

 

시간을 뒤적이지 말걸 그랬다. 신학자가 시간을 뒤적이는 그 아까운 시간을 기도하는데 쓸걸 그랬다. 저 통계는 마치 느닷없이 들이닥친 손님 앞에 너절한 살림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다. 저 모든 시간을 더하니 661개월이다. 나머지 811개월은 개별적인 자유시간인가? 그 시간을 쪼개어 사랑을 하고, 싸움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 평균치로부터 각각 얼마나 다른 자기만의 편차를 지니고 있는가?시간의 다소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순간 달게 자고,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보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줄 섰다면 저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에게 기도한 시간이 5개월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반대로 747개월을 신에게 기도해야만 하고 나머지 5개월 동안 저 모든 일을 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신을 경배할 자신이 당신에게 있는가? 신은 당신보다 우리의 삶에 경배할 시간을 더 많이 배려해 놓았으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 김성옥

 

콩나물이 그렇다.

대개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키 크는 것과 달리

발이 뻗으며

키가 큰다.

 

하늘을 넘보지 않고도

할 일을 다 하는 셈이다.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법을 깨친

수도승처럼

담담하고 단호하게

발을 뻗는다.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고딕체로 서 있는 당신 / 변종태

 

어제라는 시간은 정말로 편안하더군요.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이던 사람도 어제라는 말에서는 미소를 띄고

어제 죽을 죄를 진 것도 오늘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오늘, 지금, 현재, 지금, 이곳, 여기, 이 자리는 늘 불편해서

자꾸만 어제라는 시간을 호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립니다.

그래 간밤, 만지작거리던 어제는 자꾸 부피자람을 하고,

괜시리 끌리는 당신을 생각했어요.

 

당신이 누워 있던 페이지에 누워보았어요.

아버지라는 단어가 참으로 낯설게만 느껴지더군요.

명조체의 문장 가운데 유독 고딕체로 누워 계신 당신,

당신 뒤로 도래솔이 대여섯 그루 서 있더군요.

명조체의 바늘을 꽂은 채 비를 맞고 선

솔잎에선 솔내음이 나지 않았어요.

 

지난 해 벌초 갔을 때,

소나무 아래 새로 돋아나는 어린 소나무들은 낫으로 쉽게 잘리더군요.

유년처럼 서 있던 도래솔 아래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니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 공기의 이동으로 대기가 흔들리는 현상,

그처럼 저에 대한 바람도 수시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녀에 대한 바람도 방향을 바꾸었지요.

 

다시 바·람이 붑니다.

당신이 누워 있는 페이지는 많이 낡았더군요.

떨어진 솔잎도 솔내음을 잊은 채 바싹 말라버렸더군요.

추억의 페이지에 명조체의 글씨가 희미해 갑니다.

다만 아직도 아버지란 고딕체만 선명하게 남아 있더군요

 

 

 

 

지네 / 김충규

 

지네가 세상으로 나오는 것은 어딘가에 틈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틈을 지네는 본다 나는 한때 세계의 틈을 보려고 열망한 적이 있었다 그 틈 속으로 내 감각을 더듬이처럼 집어넣고 더듬고 싶었다 세계는 무수한 틈을 갖고 있으면서도 틈 속을 들여다보려는 나를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늘 음흉하게 웃고 마는 세계에 의해 떠밀려진다 지네가 기어간다 다리가 저렇게 많은 까닭은 그만큼 더듬고 싶은 틈이 많다는 것이다 지네는 틈에서 나왔다가 틈으로 사라진다 틈이 없다면 지네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지네는 제 몸에도 무수한 틈을 갖고 있다

 

 

 

개가론改嫁論 / 신달자

 

앞으로 살 날이 멀었다면서

나보고 팔자를 고쳐 보라고 하네

내가 알기로 우리말은

망가진 것을 새로 손보는 것을

고친다라고 하지 않는가

내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 것일까

망가진 인생을 고쳐보면 이음새 없이

고쳐지기는 하는 것일까

바늘자국도 못자국도 없이

고쳐지기는 하는 것일까

앞으로 살 날이 멀었다면

그래 그렇지 한번 팔자를 고쳐보는 일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행복의 얼굴을 몰라서

아무거나 행복인 줄 안아버리면 어쩌나

안겨버리고 나서

운명이라고 다시 참고 주저 앉아버리면 어쩌나

달콤한 맛에 내 혀는 우둔해서

행복을 먹여도 맛을 모르면 어쩌나

너는 너무 억울하니 팔자를 고쳐보라는

그 목소리 앞에서

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어물어물

절절 쩔쩔 얼굴만 붉히고 있네.

마음으로는 네 네 네 감읍하면서도

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나

까짓 거 한번 고쳐봐도 될 일인데

한바탕 뜨거워져 불이 나도 될 일인데.

 

 

 

옛날 빵집 / 김영탁

 

칠십 연대 고향빵집 빨간 페인트로 함부로 휘갈겨 쓴 상식이네 빵집

애 머리만한 찐빵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 아침을 거른 탓에 출근길 마을버스 속에서 겨우

밥 밖에 모르는데, 덜커덩거리는 낡은 마을버스 바퀴가

일으키는 몸의 연동운동 일환인가, 왜 옛날 찐빵이 생각나는지

 

그 찐빵 때문에 빠알간 초여름에,

순진한 크리스마스가 생각나고

산타클로스 할배가 문득 생각나기도 하네

전봇대가 없다면

고압선이 없다면

밤낮 없이 차들이 씽씽 달리지 않는다면

산타클로스 할배가 선물 나르기도 편할 텐데,

이미 그 어른은 항상 하늘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와

가정방문을 한다는 내 관념의 그림카드들이

전봇대와 고압선과 무정한 차들을 걱정할 것이네

 

다시, 빵집안은 뜨거운 김으로 메워져

유리창엔 뿌연 우유가 흐르고 상식이는 부르튼 손으로 찐빵을 만지네

, 자전거 술배달 가신 아부지를 기다리며

찐빵이 집채만큼 부풀어 문짝도 기둥도 지붕도 벗어버린 빵으로 된 집을 꿈꿀 것이네

이윽고 자전거와 술통이 덜컹거리고 서늘한 찬바람에 진한 막걸리 냄새를 작업복에 묻혀 오신 아부지는

뻑뻑한 막걸리에 불어터진 두꺼비같은 손으로 한지에 싼 찐빵을 머리맡에 툭 던져놓고 휑하니 나가시네

찐빵과 막걸리 냄새에 난, 달고 몽롱한 꿈에 취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진빵, 찐빵이 그 할배의 빨간 모자를 쓰고

내 낮잠 위의 조선이불을 밟고 지나가네

그리고 와르르 선물을 쏟아놓고 가네

 

 

 

 

/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감자꽃 사연 / 변삼학

 

산간 다락 밭에 감자꽃들,

그 사연 전해들은 듯

온몸 흔들어 아프게 웃는다

어디서 손가락 잃은 사연 들었을까

그 하얀 웃음 속에 살 하나 부러진

갈고리 같은 손으로

씨감자 쪽 심던 어머니가 보인다

 

오래 전

내게도 씨감자 하나 있었다

일생 단 한번 화려한 약속을 맺는

여자의 왼손 약지를 잃은 내게

어머니

당신의 약지를 씨감자처럼 심어주셨다

뚫린 빈터에 한줄기 깊은 상처를 보듬고

단단한 열매로 달렸을 때

그 굴곡의 손마디 고갯길

빠듯이 아픔 뚫고 결혼반지 끼었던 날

 

혼주 석에 앉아 눈물 훔치시던

어머니의 장갑 낀 왼손

빈 손가락 하나

흰나비의 날개처럼 흔들렸다

 

지금 내 약지, 반세기의 세월이 실려

묵은 감자처럼 주름져있지만

그 골마다 품은 어머니의 세포가 아직

씨감자 순인 듯 생생이 눈뜨고 있다

 

 

 

水墨 정원8 / 장석남

- 대숲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고름처럼 마을을 흘러 질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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