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비오는 밤에 읽는 시-사랑하는 사람

by 이성근 2020. 9. 18.

 

사랑하는 이에게 -오세영

연가 / 홍해리 |

배를 매며 /

굴뚝들 / 엄원태|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 오인태 |

생크림케이크 / 조은영 |

라면에 대한 斷想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Y를 위하여 /

별과의 일박 / 이성목|

사랑 / 공광규|

가을산 / 박진성 |

풀잎에게 / 이성목|

분꽃이 피었다 / 장석남|

사랑 / 고 영|

오렌지 / 김상미 |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 양선희

 

 

 

사랑하는 이에게 -오세영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 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 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오는 날에도

사람들속에 섞어셔 웃고 있을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 양선희

 

사랑아

내게 못을 더 박아다오.

짧고 가는 못보다는 굵고 긴 못을

장도리로는 빼낼 수 없게 깊이

아주 깊숙이 박아다오.

쇠망치로 박을 수 없는

면역이 생긴 곳에는 전기 드릴로

더 이상 빈자리가 없을 때까지

내게 못을 박아다오.

네가 박은 못들을 기어이

내 체온으로 썩혀

내 살로 만들 때까지

내 너를 추억할 수 있도록

사랑아.

제발 내게 더 많은 못을 박아다오.

 

 

 

오렌지 /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빨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사랑 / 고 영

 

두 사람이 한 자전거를 타고

공원 산책길을 따라

한 묶음이 되어 지나간다

 

핸들을 조종하는 남자 뒤에서

남자를 조종하는 여자

 

허리를 껴안고 중심을 잡는다

 

남자의 근육세포가

미세함 그대로

여자의 가슴에 전해진다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조종해가는

완벽한 합일!

 

지금,

세상의 중심이 저들에게 있다

 

 

 

분꽃이 피었다 /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풀잎에게 / 이성목

 

바람이 그대를 흔들고 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대가 꼿꼿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을 그대가 참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대가 한순간에 바람을 흔들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대 티끌이 되어 눈 속에 콕 박히는 느낌, 생각해보니 소식보다는 언제나 전율이 먼저 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가 초록에 물 드는 시간을 평정한다는 가을입니다.

 

모든 소식 끊어주십시오. 이제 불멸을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대를 대신하여 참아줄 울음이 내 안에도 가득합니다.

 

 

가을산 / 박진성

 

산의 이름은 적상赤裳,

붉은 치마가 은유라면 그 속에 내 사랑하는 여자가 산다네

구중심처에서 울울창창 나무들을 거느리는 내 사랑하는 여자가 산다네

고봉준령을 다 품은 적요로움으로 있는 내 여자여

 

나 다시 태어나면 네 치마 속 고로쇠로 서 있고 싶다

바람 탓이라고, 몸으로 농짓거리 하면서, 내 손바닥으로 슬쩍 네 하초를 더듬고 싶다

내 직립의 일생이 순전히 내 여자를 향한 발기이고 싶다

 

빳빳한 내 상상을 풍경으로 바꾸느라 온 몸이 치마가 되었네 저도 그리 싫지는 않아서 붉게 물들었네

 

나 다시 태어나면 적상산 고로쇠로 태어나리 이 깊어 적상을 찾은 이에게 수액을 다 내어주어도 좋겠네

 

 

사랑 / 공광규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꺾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다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

 

 

 

별과의 일박/이성목

 

너를 사랑하는 날은 몸이 아프다

너는 올 수 없고 아픈 몸으로 나는 가지 못한다

사랑하면서 이 밝은 세상에서는 마주 서지 못하고

우리는 왜 캄캄한 어둠 속에서만 서로를 인정해야 했는가

지친 눈빛으로만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는가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너를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나는

한숨도 못 자고 유리 없는 창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우리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디선가 별이 울음소리를 내며 흘러갔고

어디선가 꽃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그건 언제였던가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빗방울 가슴치며 너를 부르던 날

그때 끝이 났던가 끝나지는 않았던가

울지 말자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은

누구나 마음이 아프다고

외로운 사람들이 일어나 내 가슴에 등꽃을 켜 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별빛을 꺼 준다

 

 

 

Y를 위하여 /최승자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라면에 대한 斷想 / 김상훈

 

 

파란 불꽃 위에서

쓸쓸한 오후가 익고 있는 것을

김이 서리는 안경 너머로 나는 보았네

펄펄 끓는 심장 속에서

지치도록 심방과 심실을 오가던

기관차 같은 정열이 증기를 뿜어 올리네

그래 사랑은

온전히 끓여야만 제대로 익는 것이지

깊은 밤 몰래하는 연애처럼

바스락거리는 네 옷을 벗기고

알맞게 부풀은 젖살을 입에 물어

뜨겁게 출렁이는 불꽃으로 애무하다

비등 점을 향하여 치달아 올라

나도 그만 후끈 달아올라

입술이 데이도록 욕망을 집어삼키네

눈물도 없이 마르게 부서지던

가슴 안에 이렇게 긴 인연을

어찌 감추고 살았을까

 

노릇하게 잘 익은

연애 한 소절이 후루룩

허기진 오후의 고개를 넘어가네

 

 

 

생크림케이크 / 조은영

 

군대간 애인 생일이었네

갈매빛으로 여물어가는 여름은

색색 풀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네

자동차는 더위로 흐물거렸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데

서녘 하늘에 붉새가 날고 있었네

클클거리는 낡은 자동차를

미시령은 자꾸 끌어 내렸지만

나는 무모했었네 일생처럼 기다린

그의 스물 두 살 생일이었네

어둠조차 뜨거운 군부대 면회소

후끈해진 트렁크를 열었네

달지근하게 녹아버린 케이크,

셈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움뿐이었네

달무리진 하늘이 금세 울 것 같았네

초코파이에 꽂아 밝혔던 애인의 스물 두 살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가장 뜨거운 순간이었네

 

주의사항에 꼼꼼해진 서른 살,

케이크를 고르다 한 시절을 맛보네

녹아든 첫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 오인태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레일이 사람의 가슴에도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 기차는 모를 것이다.

 

 

굴뚝들 / 엄원태

 

온산유화공단의 저 굴뚝들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 굴뚝들, 지상에서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외팔을 쳐들었다. 가장 높이 쳐들 수 있는 데까지, 저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해. 굴뚝들, 제 팔을 너무 쳐든 나머지 한쪽 팔만 남았다. 공장들은 저 굴뚝들 때문에 아주 어깨가 삐딱해지거나, 힘을 다해 용쓰느라 핏줄들까지 툭, , 불거져나온 게다.

 

불꽃을 태우는 굴뚝도 있다. 낮엔 그저 이글거리는 손짓으로만 보였을 굴뚝 끝의 화염. 밤 되어 어두워지자, 붉고 투명한 불꽃의 손바닥은 더욱 선명하고 애처롭게 흔들린다. 춤추는 불꽃의 손가락들은 파랗게 질려 있기도 하다. 나를 봐주세요! 그대여! 제발, 제발, 하면서.

 

 

 

배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연가 / 홍해리

 

맷방석 앞

둘이 마주 앉아 숨을 맞추고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 잡은 자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면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 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중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은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태처럼 쓴 슬픔과 미움도 집어 넣으며

둘이서 다붓 앉아 느럭느럭 돌리다 보면

알갱이만 고이 갈려 쌓이지 않으랴

여기저기 부딪치며 흘러온 강물이나

사정없이 몰아치던 바람소리도

추억의 날개 달고 날아올라

하늘까지 잔잔히 열리지 않으랴.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가을에 시 안 읽고 뭐하랴  (0) 2020.09.26
그 얼굴 생각 나 달 보고 읽는 시  (0) 2020.09.26
늦은 밤에 읽는 시  (0) 2020.09.13
시 읽는 밤  (0) 2020.09.13
시 읽는 저녁  (0) 2020.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