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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황금 비늘 外

by 이성근 2019. 1. 26.



이번엔 뒷문으로 - 전동균

황혼 - 김점용

그냥가게 -윤임수

명왕성을 보내며- 안차애

겨울 강 - 김선아

즐거운 오줌 - 곽구영

그리운 통증 -양현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박제영

겨울 숲 - 성영희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김왕노

언덕 위의 집 -정희성

아스팔트 위 지렁이 -김종원

묻어둔 고백- 이창윤

첫눈 - 이현우

첫눈 - 강연호

단풍을 말하기 전 -고영민

별 우체국 - 이영춘

흑산도 홍어- 이재무

황금 비늘 - 함명춘

빈집 - 박봉희

개의 정치적 입장 - 배한봉

밤 눈 - 김광규


이번엔 뒷문으로 전동균

 

두 달 만에 면회를 갔지요

연분홍 꽃무늬 새 옷 입혀드리자

좋아라, 콧노래 흥얼대는 어머니

 

갑자기 집에 가자 그러시네요

식구들 기다린다고

아버지 좋아하는 가자미조림 해야 한다고

 

어쩌나,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는데

집은 십년 전에 도망갔는데

 

공원 나무 그늘에서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 친척들이며

달이 솟는 우물들이며

모여서 활짝 피는 수국꽃 얘기로

서너 시간

 

무언가 내 옆을 자꾸 지나갔어요

이름을 부르면 어머니도 나도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사람들이, 짐승 그림자가

들끓는 물결들이

 

어둑해지는 저녁에 다시 병원으로 왔지요

이번엔 뒷문으로 왔지요

세상에 제일 좋은 집이 여기예요, 어머니

아시는 듯 모르시는 듯

내 손만 꼬옥 잡고 아장아장

잘도 따라오시고

 

계간시와 사상(2018년 가을호)

 

황혼 김점용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은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월간월간문학(201812월호)

 

그냥가게 윤임수

늙은이가 구멍가게 하나 차렸는데

당최 이름 짓기가 어렵더라구

그래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뭐라고 지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봤지

근데 누가 뭐 그런 것으로 고민하느냐구

그냥 가게라구 하라구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더라구

뭐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바로 나무 간판 하나 달았지

달고 나서 보니 그냥가게도 그냥저냥 좋더라구

쓸데없이 거창하지도 않구 웃기 좋아하는 나처럼 편하기도 하구

그렇더라구 그건 그렇구 기왕 왔으니 뭐라도 사가야지?

왜 그냥가게?

 

-충청신문아침을 여는 (2015917)

 

명왕성을 보내며 안차애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떨어져나갔다.

잘 가라

그리고 이해해 주렴

요즘 대세는 우주 팽창론이란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자연시간에서 과학시간, 천문학 강의에 이르도록

한 세트 한 두름으로 묶어 외우던 태양계의 별들,

한 계보이거나 한 가족이라는

무겁고도 단단한 고리가 툭 끊어졌다

예고도 없이 후드득, 툭 툭 끊어져나가던.......

세상의 모든 관계는 별무리 같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광년 속으로 약속도 없이 흩어지는........

빅뱅이론이라니

한 폭의 이별 풍속도였다.

까딱 한순간에 손 영영 놓쳐버린 것들의 심중,

그 깜깜한 슬픔이 우주를 넓힌 것이다.

그 절멸의 결핍이 와- -

혼절하도록 온 우주에 번지고 또 번져서.........

우주 팽창론이다.

 

그래도 너, 기억해 두렴

너는 앞으로도 내 가슴 별자리 지도의 중심 란다

 

시집치명적 그늘(문학세계사, 2013)

 

겨울 강 김선아

 

거두절미의 자세가 저것일까. 세상사 밑바닥 혼자 견디는 겨울 강을, 꽝꽝 얼어 혹독한 빙판에 이마도장 무릎도장 새겨넣듯 오직 한 가지 자세로 드문드문 놓아준 억새방석마저 밀쳐놓고, 천만 개의 손으로 잔등을 엎어주려 다가서는 함박눈마저 거절하고, 삶의 급물살에서 빠져나와 숨소리도 납작 엎드린 겨울 강을, 어서 몸 일으키라고 잡아끄는 북풍의 가슴깃도 끝끝내 털어내는 저 겨울 강의 시린 어깨를, 본다. 따순 물 한 숟갈 떠 넣어주려 무릎 세우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저녁노을의 눈꼬리도 가만가만, 눈물 마를 때까지 본다.

 

시집얼룩이라는 무늬(황금알, 2017)

 

즐거운 오줌 곽구영

 

산촌 상가喪家 가는 길 오랜 버스길에 오줌 급하다. 정류장에 내려 무작정 찾아 간 산골 작은 초등학교. 화장실이 어딘지 묻는데 솔씨 같은 일학년 아이 몇이 우루루루 달려와 소인국에 잡혀 온 걸리버처럼 나를 끌고 간다. 엉겁결에 구두까지 신은 채 끌려가 오줌을 눈다. 그 때 까르르 까르르르 폭죽처럼 터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화장실 창문 죄다 열려 있는데 창마다 아이들이 한여름 매미처럼 붙어 요란하게 웃는다. 낯선 손님 오줌 누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웃는다. 똑같이 생긴 마트료시카 같은 아이들. 웃음소리 속에서 똑같은 아이들이 나오고 아이들 속에서 똑같은 웃음이 나온다. 맑은 폭포처럼 쏟아지고 쏟아지는 산골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서서 오줌을 눈다. 햇살 속에서 오줌 누는 일이 이처럼 즐겁다니. 내 오줌 속에서 유년의 어린 내가 끊임없이 튀어와 달려간다.

 

시집햇살 속에서 오줌 누는 일이 이토록 즐겁다니(고요아침, 2018)

 

 

그리운 통증 양현근

 

1

길 건너편 똥개가 컹, 어둠을 한입 물면

온 마을의 개들이 일시에 일어나

컹컹, 적막강산 긴긴 밤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마을 불빛이

숲을 질러 처마 밑까지 왔다

장독대, 폭설, 고요

등허리가 시린 문풍지는

도란도란 솔바람소리를 베고 잠이 들고

길 잃은 눈발이 개집까지 마구 들이치는 밤

마루 밑 댓돌에는 밭은기침소리 고이고

눈이 침침한 금성라디오가 혼자 칭얼거렸다

2

소년은 꽁꽁 언 잠지를 딸랑거리며

얼어붙은 논두렁 사이를 펄럭거렸다

먼 저녁이 매달리던 참나무에게 돌팔매질을 날려대면

폭설은 마을의 길이란 길 다 지우고

아랫녘으로 가는 도랑의 물소리만 풀어놓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오늘의 날씨 큰 눈 왔음, 길이 지워졌음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다

소여물이 끓던 사랑방 아랫목

할아버지의 걸걸한 기침도 화덕처럼 끓고

외롭고 심심한 손가락이

장지문 여기저기 숨구멍 뚫어가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3

낡은 기와지붕이 고드름을 하나, 둘 매다는 동안

소년도 대나무처럼 몸의 마디를 키웠다

겨우내 눈발을 뒤집어쓴 대숲은

어디론가 보내는 울음 소인을 쿵쿵 눌러대곤 했다

아직 산골의 춘삼월은 멀고

산 그림자는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밤새 호롱불 깜박거렸다

돌팔매질로 멍든 참나무 껍질이 아무는 동안

눈은 몇 번이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겨울이 말없이 오가고

기침소리도 녹았다 풀렸다

 

4

궁금한 강바람이

구멍 숭숭한 돌담에 휘파람소리를 내려놓고

봄기운이 얼음 계곡에 숨구멍을 냈지만

어느 해부터 할아버지 밤 기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통증은 소년의 옆구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꿈을 꾸면 왼쪽 갈비뼈가 따라 올라오고

오래 숨겨둔 기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울음의 마디를 쏟아내곤 했다

아프고 시린 말들이 번식하는 계절이었다

 

5

며칠 전부터 왼쪽 허리가 시큰거리더니

왼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푸른 말발굽으로 내달리던 시절

드넓은 풀밭을 겁 없이 질주하다 자주 넘어진 탓일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엎지른 탓일까

등베개를 집어넣으니 비로소 균형이 잡힌다

세상과의 간격에는 적어도

등베개 하나 이상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안다

밤이 되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마른기침, 눌러 참을 수 없는

왼쪽 허리쯤에 도착한 그 저녁의 폭설이여

차마 그리운 통증이여

 

시집 기다림 근처(문학의전당, 2013)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박제영

 

며느리도 봤응게 욕 좀 그만 해야

정히 거시기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 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이런 꽃 같은 !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시집사는 게 참 꽃 같아야(늘봄, 2018)

 

겨울 숲 성영희

 

겨울 산, 수런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고기들의 을씨년스러운 잔등을 만난다. 꼬리는 하류 쪽으로 꿈틀 거린다. 깡마른 나무들이 직립으로 견디는 가잠의 시간들, 고드름이 가시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는 떨어지는 소리들로 얼지 않는다. 튀어나간 물방울들만 빙벽으로 미끄럽다. 뼈를 드러낸 물고기의 잔등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있는 산등성이

 

나무들의 귀는 일년생이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앙상하게 남아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수백 년 동안 자란 물고기들이 산꼭대기를 헤엄치고 있다. 능선 지느러미 겨울을 달리고 있다.

 

물고기들의 조상은 앙상한 나무들이 줄 서 있는 저 산등성이다. 얼음장 밑에 귀를 대보면 넓은 대양의 물이 가는 줄기로 흘러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가득 찼던 푸른 정맥을 닫아버리고 앙상한 팔로 바람을 겪는 지느러미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몸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듯 겨울 산, 그 끝없는 능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시들이 공중을 향해 자라고 있다.

 

활시위를 당기듯 겨울 숲을 당기는 팽팽한 바람에 능선하나 걸린다. 꿈틀거리며 물살을 타는 지느러미들, 겨울이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계간학산문학』(2018년 겨울호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김왕노

 

이별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는 백년이 참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쓰린 몸에 감각에 눈물에 스쳐가는 세월이 무심하다 생각했습니다.

백년 산다는 것은

백년의 고통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상처고 아픔이고 슬픔이고 다 벗어버리고

어둠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축복이라 했습니다.

밑둥치 물에 빠뜨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엉거주춤 죽어지내듯 사는 주산지 왕버들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부터 백년은 너무 짧다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익히는 데도

백년이 갈 거라 하고 손 한 번 잡는 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주 보고 웃는 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백 년 동안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꽃 피우는 데도 백년이 갈 거 라 생각했습니다.

사랑 속 백년은 참 터무니없이 짧습니다.

사랑 속 천년도 하루 햇살 같은 것입니다.

 

시집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

 

 

언덕 위의 집 정희성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이

출렁거릴 따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창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이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 민박집 명함에 쓰인 이 글귀는 누구의 시구일까.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아스팔트 위 지렁이 김종원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2차선 도로 3분의 2쯤 겨우 지나

아스팔트 바닥에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던 그 모습이

선명하다

살아가는 일이 참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맨 살로 버티며

기어가고 또 기어가는

일이

누구에겐 아무 일 아닐 수도 있지만

지렁이에게는 참으로

힘겹고 먼 길이었다

그는 이미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더는 앞으로 나아 갈 수도

뒤로 물러 설 수도 없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을

기억조차 다 내려놓았다

비로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가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며 비굴하지 않아도 된다.

온 힘을 다하여 기어가던

그 모습 그대로다

아스팔트 위 지렁이

 

웹진시인광장(201812월호)

 

묻어둔 고백 이창윤

 

사람들은 그곳을 난곡(蘭谷)이라 불렀지만

내게는 난곡(亂谷)

갈 곳 없는 해거름 때면 산자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고

아침이면 버스 종점으로 구르듯 내려왔던 곳

드문 인적에도 맹렬하게 짖어대던 묶인 개

굳게 닫혀 있던 녹슨 철대문

진달래 지천으로 피던 봄이면 담을 넘었다가

늦가을 하얀 약봉지를 들고 돌아오던 Y

뒷집 술주정뱅이가 도끼로 찍어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따먹지도 못할 억센 깻잎과 잡풀들이 자라고

폭우가 쏟아지면 비가 새던 기왓장

질척거리던 언덕길

한겨울이면 얼어붙던 머리맡 자리끼

마중물만 삼키던 마당의 펌프

청춘이 독약 같다고 낙서하던 스무 살

천장이 낮아 일어설 수 없었던 다락방의 새벽

시집놓치다가 돌아서다가(북인, 2018)

 

첫눈 이현우

 

작별이다.

몸부림 한 점 없는 최후의 만남이다.

부스러기를 태우며

빈손으로 돌아온 저녁

길은 안인리에서 끝나고

저문 들마다 허수아비가 죽는다.

잘 가라

엇갈린 세상을 접고 또 접어

동면하는 삼라만상

돌아보면 우린 모두 걸인乞人이었다.

연기처럼

땅에서 하늘로

연기처럼 피어올라 가루가 된 소망이

다시 모여 쌓이는

여기

끝 모를 심연深淵에도

생명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

낯선 거리를 떠다니다가

뿌리째 마르다가

한 아름 맞이하는 축제의 등불

꽃잎 지듯

꽃잎 지듯 날아 앉는다.

 

시집문밖에서 부르는 노래(책만드는집, 2009)

 

첫눈 강연호

 

죽은 자의 빈집에

산 자들이 다들 모여 왁자지껄 신이 난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웃음이 없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

 

첫눈이, 아 첫눈이

조등을 적시며 밤새 내릴 기세다

 

이 세상의 눈은 모두 첫눈인 듯 반갑고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첫사랑인 듯 그립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울고 싶었던 그는 왜 죽자고 웃고 있는가

 

그럼 울어? 첫눈인데?

우아한 용서는 첫눈이 다 한다

 

정말 이 세상의 죽음은 모두 첫죽음인데

초상집의 소주는 왜 이리 늘 달디단가

 

산 자들은 저마다 살 궁리에 바빠 돌아가고

죽어 빈집을 나온 그는 노숙이 걱정이다

 

계간파란(2018년 가을호)

 

 

단풍을 말하기 전 고영민

 

단풍이 들면 마을이 더 아름다울 테니

때맞춰 찾아오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는 단풍이 언제 드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길섶의 잎들은 여전히 푸르렀으나 손으로 만져보니 말라 있었습니다

이 푸르나 말라있는 잎도 단풍입니까

단풍은 어디를 거쳐 오는 물기 없고 거칠어진 손님입니까

멀리 산 밑으로 살을 다 발라내고 뼈만 남은 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문득 인간이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과 직립보행과 툭툭,

중력이 따가는 늙은 상수리나무의 잎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느린 만큼 보이는 숲과 잎들, 발자국을 따라 오는 어린 남루(襤褸)를 생각해봅니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것은 당신과 함께 그린 그림꽃 몇점과 바람뿐입니다

이것도 단풍이 될 수 있습니까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춰보지 않고서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이

나는 영원히 단풍을 보지 못합니다

시들어야 다시 태어나고 저물어야 비로소 타오르는 날처럼 해는 저물어가고,

가을이 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늦가을 바람 앞에 서서

온통 붉은 단풍의,

당신이 사는 마을의 오랜 지명(地名)을 불러보았습니다

시집사슴공원에서(창비, 2012)

 

별 우체국 이영춘

 

너무 멀리 갔다

발자국이 지워진 너의 길

지상의 풀벌레도 어느 새 길을 잃고

밤새 목청 터지도록 너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계절을 끌고 가는 저 허공의 길

허공을 채우는 별 잎사귀들이

점점이 붉은 방점으로 너를 깨우는데

별 우체국,

너는 어느 유목민의 자손인가

아득히 소식이 멀다

그 먼 나라에 잠들었을 너에게

나는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쓴다

어느 별 우주 정거장에서 붉은 귀 세우고 있을까

별들이 소리 없이 우는 밤,

그 울음소리에 귀 묻고 앉아 눈 먼 편지를 쓴다

밥알처럼 한 스푼씩 떠 음미할 눈물을 쓴다

 

지상에는 네가 사랑하던 너의 꽃잎들 소식은 멀고

네가 등 기대고 눕던 붉은 탯줄도

너를 따라 그 나라에 든 지 오래다

지상은 텅 빈 정거장

붉은 꽃잎들 뚝뚝 떨어진 빈 집 뿐이다

네 혈흔처럼, 발자국처럼

나는 오늘 밤 아득한 그 나라에

별 우표를 붙인다

 

계간시인수첩(2017년 겨울호)

 

흑산도 홍어 이재무

 

목포에 가면 흑산도산 홍어를 먹을 수 있지

묵은 김장 김치 한 장 넓게 펴서

푹 삶은 돼지고기에다가 거름에 삭힌

홍어 한 점 얹혀 한입 크게 삼켜

소가 여물을 먹듯 우적우적 씹다보면

생활에 막힌 코가 뻥, 뚫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다네

빈 속 싸하게 저릿저릿 적셔가며

주거니 받거니 탁배기 한 순배

돌리다 보면 절로 입에서 남도창 한 자락

흘러나와 앉은 자리 흫을 더욱 돋기도 하지만

까닭 없이 목은 꽉 메면서 매캐한 설움

굴뚝 빠져나온 연기처럼

폴폴 새어나와 콧잔등 얼큰, 시큰하게도 하지

사투리가 구성진 늙은 여자 허리를 끼고

소갈머리 없는 기둥서방으로 퍼질러 앉아

잠시 잠깐 그렇게 세월을 잊고

농익은 관능 삼키다보면 시뻘겧게 독 오른

생의 모가지쯤이야 한숨 죽여 삭힐 수 있지

시집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황금 비늘 함명춘

 

준공 후 처음으로 동양 최대의 댐 수문이 열릴 때

수많은 기자와 인파들 사이에서 내가 기다렸던 건

수백 미터의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물줄기들의 곡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들은 한쪽 눈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물속에 사는 잉어였다 불치병에 걸린 노모를 위해

잉어잡이를 나온 나이든 총각 어부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산 채로 가마솥 속으로 던져졌다 뜨거움을 참지 못해

뚜껑을 차고 나온 그녀는 인간으로 변했고 살려만 준다면

노모의 불치병을 고쳐주겠노라며 자신의 한쪽 눈을 파내어

어부에게 건네주었다 감쪽같이 노모의 불치병이 완치되었다

어부는 그녀를 살려주었다 한쪽 눈이 없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들은 정이 들었고 부부가 되었다

어부는 아홉 형제 중 장남이었다 큰 집이 필요했다

그녀가 지신의 비늘을 한 움큼 떼어내자 비늘은 황금이 되었다

어부는 황금 비늘로 큰 저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통해 그녀의 신통력을 알게 된 동생들은

온갖 구실로 비늘을 얻으려 했지만 어부인 형이 가로막았다

별 한 점 없는 밤이었다 동생들이 독약을 탄 술을

형에게 먹인 뒤 잠든 그녀를 밧줄로 묶고

몸에 붙은 비늘을 하나씩 뜯어 가방에 넣었다

비늘이 뜯겨나갈 때마다 그녀는 강물처럼 출렁거렸고

피를 쏟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한쪽 눈마저

파내기 위해 막내동생이 호미를 들고 다가갔다

순간 그녀는 펄펄 끓는 부엌의 가마솥 속으로 몸을 던졌다

형제들은 가마솥 뚜껑을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통째로 가마솥을 들고 나가 강물에 처넣었다

한 해가 지나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에 한 명씩

마을의 젊은 청년이 한 명씩 익사체가 되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익사체는 노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쪽 눈이 뽑혀 있었다 수시로 경찰차가

드나들었지만 사건은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마을은 댐 건설 수몰지구로 선포되었다

하나둘 주민들이 떠나면서 적막이 마을의 주인이 되어 가더니

적막도 미궁의 사건도 마을과 함께 수장되고 있었다

마침내 댐의 수문이 열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가운데 물줄기들의 곡예가 펼쳐지고 강 하류엔 그물과

족대를 든 사람들이 수문에서 떨어져 내린 고기를 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미터급 대어(大魚)가 그물에 잡혔다는 소리가 들려와

난 기자들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수십 번 버둥거리다가

그물을 찢고 나온 대어는 두어 바퀴 공중제비를 하더니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때 난 강가의 자갈 위에 떨어진

대어의 비늘 하나를 주웠다 그물의 주인은 대어의

한쪽 눈이 없었다고 했다 떠난 줄 알았던 대어는

한 번 더 솟구쳐 올라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분명 대어는 한쪽 눈밖엔 없었다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비늘은 어느새 황금이 되어 있었다

난 황금 비늘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 잠시 치어처럼 꿈틀거리더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대어가 솟구쳐 올랐던 자리엔 저녁노을이 곱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더 대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난 하염없이 서 있었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8년 가을호)

 

빈집 박봉희

 

텅 빈 새장 옆

찌그러진 개밥그릇만 남았다

 

남은 것만 남은

그 마당에 비가 내린다

 

실직, 가출, 비웃음 불면이

깨어진 창문에 흘러 내린다

남아도는 것들로 꽉 차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고 젖는다

 

때 묻고 무성한 털 엉겨붙은 유기견처럼

짖다가 저물다가 젖는다

 

죄다 떠나가고 저무는

저 물빛 적막

결국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다

 

시집 복숭아꽃에도 복숭아꽃이 보이고(문학의 전당, 2018)

 

 

개의 정치적 입장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격월간시사사(20189-10월호)

 

밤 눈 김광규

 

겨울밤

노천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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