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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by 이성근 2017. 11. 28.

2015년 12월 28일 오후 3시 32분,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적 대안'을 도출했다는 위안부 합의문이 발표됐다. 일본 총리의 직접 사과는 없었고, 합의 내용에도 일본 정부가 출연하겠다는 10억 엔 외에 새로운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했다. 역사에 과연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게 있을 수 있는가? 시간을 더듬어 올라갔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수치심을 이겨내고 공개석상에 선 이후,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이 추악한 만행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갖은 협박과 위협을 이겨내고 무단히 노력했다. 이동석 PD도 그 중에 한명이다.


1973년 TBC에 입사해 KBS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MBC를 통해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를 연출·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증인 이동석 PD가 1992년 프로그램 제작 취재기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총 8회에 걸쳐 연재될 이 취재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담겨 있다. 이동석 PD의 말이다. 

"나는 1992년에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3부작을 MBC를 통해 8.15특집으로 제작 방송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자료 수집 과정,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수회에 걸쳐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으로 그 용어가 바로 잡히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프로그램 당시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오히려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는 시도마저 하고 있다. 지금, 이동석 PD의 취재기는 우리가 역사에 묻힐 뻔한 진실을 어떻게 발굴해 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인지, 역사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마침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 작업에 착수한다고 했다. 이 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와 시민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글은 1992년 취재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할 목적으로,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가능한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봤을 때는 이미 수정된 개념이나, 용어 등이 서술 과정에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이동석: 1973년에 TBC에 입사, 이후 35년간 다큐멘터리에 매달렸다. 성철스님 일대기, 손기정 다큐멘터리 등 다수의 인물 다큐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진실을 밝힌 <잊혀진 전쟁>을 기획, 연출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추적한 <종군위안부>로 1993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정통다큐멘터리 월요기획을 만들었고, 인간극장, 한국탐구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기획, 연출했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증거를 찾아라 ① 사라진 역사를 찾아서 : 이야기의 시작 


1992년 봄.  
속리산 입구 어느 기념품 가게의 안방.  
TV뉴스를 지켜보고 있던 박아무개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고이던 눈물은 이내 흘렀다. 당황한 할머니는 슬며시 돌아 앉아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쳤다. 아들이 그 어머니를 목격했다. 그리고 의아해진 얼굴로 조용히 아내를 돌아 보았다. 아내는, 즉 며느리는 이미 뉴스가 시작될 때부터 시어머니를 흘깃흘깃 훔쳐보고 있었던 터였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쪽으로 돌아 앉았다. 그러다가 남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시어머니를 부축하여 건넌방으로 모셨다.  


"어머니, 무슨 일이셔요? 무슨 일이 있길래 밤마다 뉴스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셔요?"
며느리는 침착하고 다감하게 물었다.  

"아니다. 내가 언제 눈물을 흘렸다는 거냐?"  
"오늘 우셨고 어제도 우셨어요. 그저께도 텔레비 보시면서 몰래 우시는 모습을 보았지요. 벌써 사흘째네요. 어머니,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거죠?" 
".....말 못해. 그건 말할 수 없다!"  
"어머니, 자식한테 못 하실 말씀이 어디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알아야 어머니도와드리죠. 저는 어머니 며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듣더라도 저는 어머니 자식입니다." 


굳게 말문을 닫고 계시던 어머니는 효성깊은 며느리의 간곡한 설득에 한순간 무너지시며 오열을 시작하셨다. 등이 굽어 오래 버티지도 못하시는 어머니는 며느리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오래 오래 흐느끼셨다. 아들이 건너왔다. 아들은 어머니의 등을 토닥거려 드렸다. 어머니는 무겁게 고개를 드시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래, 내가 이제 말을 하마! 더 이상은 참고 견디지 못하겠구나. 이 말 끝에 내가 너희 에미의 자격을 상실한다 해도 말 하마. 지난 50년 세월을 죽은 듯이 살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말하겠다!" 

그 짧은 몇 마디를 내놓으시고도 벌써 어머니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신 것처럼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아들 며느리앞에 감춰두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 놓으셨다. (취재시에 며느리가 이 상황을 들려주었다)


그 봄 어느날. 
서울 탑골공원(당시는 파고다공원)앞에서 하얀 치마 저고리차림의 할머니 10여명과 그 뒤를 받치는 젊은 여성그룹이 경찰병력과 맞부딛쳐 있었다. 한번 밀면 그저 뒤로 나자빠져 버릴 듯한 나약한 '여성'들이었지만 젊은 경찰은 그들의 진로를 가로 막기만 할 뿐 아무런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대열속에서 할머니 한분이 소리를 지르셨다.

"니들이 뭘 알아? 니들이 뭘 알아?" 
할머니는 그 외마디 소리만을 반복하시면서 가늘고 매말라진 손으로 자식같고 손자같은 젊은 경찰의 가슴팍을 때리셨다. 

"니들이 뭘 알아? 니들이 뭘 알아?" 
그렇다!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아니 깊게 감춰져서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 일, 속리산의 할머니가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죽은 듯이 살아오면서도 도저히 말 할 수 없었던 그 일 - 종군위안부! 

"말 안 듣는다고 총을 빵 쏘았어"
"총을 쏴요? 어디에다?"
"자궁에다 쏘지 어디다 쏴? 그 뿐인줄 알아? 가랭이를 찢은 놈도 있는데…" (황할머니)
"한 여자가 하루에 삼사십명씩… 여자방앞에 쭉 줄서서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간 놈이 빨리 안 나온다고 뛰어 들어가서 그 짓하고 있는 놈 등에다 단도칼을 꽂아 죽인 놈도 있어!" (노할머니)
"열여덟살 먹은 여자애가 임신이 돼서 배에다 붕대를 칭칭 감아 누르고 있었는데 병원에 끌고가 태아를 꺼내서 죽였답디다."(노할머니)
"부대가 이동할 때 행군대열 맨 뒤에 여자들도 모두 따라가게 했거든. 그때 아무도 뒤를 못보게 해요 겁먹는다고. 뒤따라오는 동무가 쓰러져 죽어도 돌아 볼 수가 없어. 한참 가다가 누군가 눈에 안 보이면 뒤에서 총맞아 죽은 거야!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걸어가야 했어." (최할머니)


이십여년전, 내가 만난 할머니는 여덟 분이었다. 어떤 분은 치를 떨며 "그놈들"을 이야기했고 어떤 분은 초연한 듯 담담하게 그때를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만나는 일조차 극력 기피했던 그분들은 말을 시작하자 거대한 창고 저 뒷켠에서 쌓이고 쌓인 먼지 뒤집어 쓴 재고품을 꺼내놓듯 참고 참아왔던 말들을 쉬지않고 이어갔다. 그중에는 방송에 옮길 수도 없고 글로 쓰기에도 적절치 못한 "더러운" 대목도 있었다. 치를 떨면서 또는 초연한 자세로 그날의 일들을 이야기했지만 그분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분(憤)을 삭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든가 한국현대사의 치욕이라든가 그런 거창한 표현은 그분들의 머리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다. 그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가버린 "그 X들", 내가 죽기전에 기어코 무릎을 꿇려야 할 "그 X들", 내 인생을 처음부터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X들"이라는 공통적인 컨셉(CONCEPT)을 가지고 있었다.


"심장이 뛰어요 그 생각만 하면!"
"휴, 그 말을 어떻게 다 하겠어? 차라리 가슴에 묻어두고 가지..."
"내가 장본인인데 내가 보상을 받아야지,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1992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나라는 벌집 쑤신 듯 했다


우선 이분들을 부르는 이름부터 정리해보자. 처음에는 이분들을 '정신대'라고 했으나 '근로보국대'와의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의 관계가 혼란스러워서 '종군위안부'로 바꿔 불렀다. 그러나 '종군'(從軍)이라는 단어에는 어쩐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해서 군대위안부로 수정했다가 '위안부'라는 단어에도 자발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지금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일본군위안부' 또는 '일본군성(性)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 <종군위안부>는 그 용어가 바로 잡히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타이틀 앞뒤로 꺾음표를 사용한 것도 당시의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프로그램 당시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내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프로그램으로 착수한 것은 1992년 봄이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방송사를 찾아가 "나는 종군위안부였소!"하고 용기있게 신상을 고백한 직후였다. 사흘동안 이어진 그 고백으로 이 나라는 벌집 쑤신 듯 들끓기 시작했고 나는 그 문제를 최우선 소재로 결정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한인들의 희생을 추적해가는 <잊혀진 전쟁>시리즈를 제작하며 당시의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던 중이라 '위안부'문제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 전모와 진실을 밝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행(行)한 자는 창피스럽기도 하거니와 역사적 책임 때문에 입을 굳게 다물 수 밖에 없고 당한 자 또한 극도의 자괴감과 수치스러움으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Television이란 'vision'의 매체다. 그러므로 대상을 보여줘야 한다.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는 취재원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아도 되지만 Television은 본인이 등장하고 본인이 말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야 하는 문제의 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굳게 웅크리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카메라앞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요체였지만 그보다 앞서서 그 일에 연루된 당사자들을 찾아내는 일부터가 대단히 막연한 문제였다. 이런 경우에 늘 그랬던 것처럼 그날부터 나는 잘 드는 가위와 날이 꼿꼿이 서있는 면도칼을 손에 쥐었다. 


그날부터 나는 신문과 잡지와 학술논문 등의 매체를 뒤져 종군위안부에 관한 기사는 모조리 오려내고 잘라내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 한편으로 관계기관과 단체를 통해서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면담을 거부한다는 대답만 되돌아 올 뿐 주소도 연락처도 알 수 없었다. 면담을 거부당한 뒤에는 도대체 이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크랩된 자료는 쌓여서 이 문제에 대한 큰 윤곽은 웬만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여세를 몰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군부는 전장에서 살육을 경험하고 피냄새를 맡은 병사들의 군율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을 순화시키고 사기를 높이는 방법으로 젊은 병사들에게 조직적으로 섹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가로로는 중국대륙에서, 태국, 미얀마, 인도 접경지대까지, 세로로는 일본본토에서, 오끼나와, 사이판, 괌, 팔라우, 트럭, 파푸아 뉴기니아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주변의 광범위한 전장에 젊은 여성들을 보냈다.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에 끌려다니며 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된 수많은 여성들의 대부분은 일본여인도 중국여인도 아닌 이땅 조선의 여인들이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은 조선총독부의 면밀한 계획으로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 납치하였다. 


이 여인들은 대부분 현지에서 성병으로 죽고,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매맞아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종전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이 붙은 극소수 여성들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몸이 더럽혀졌다는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죽음보다 더 처절한 50년의 삶을 이어왔다. 그때까지 일본정부는 교묘한 태도로 정부에 의한 여성 강제동원사실을 부인해왔고 이에 분개한 피해여성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문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취재를 시작했을 때에는 몇몇 용기있는 피해여성들의 증언으로 문제의 일각이 수면위에 겨우 떠오르기 시작했을 뿐 물 밑의 더 큰 덩어리는 철저히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쌓이는 자료들을 분류하고 독파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뉴스와 정보 그리고 자료들이 가해자인 일본에서 생성(生成), 가공(加工)되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우리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의 TV에 출연하여 당시의 체험을 낱낱이 증언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나의 면담요청은 거부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통한의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피해자의 모국인 한국을 외면하고 가해자인 일본에 의해 독점된다면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통사를 기술할 때 그 사료를 일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날조된 자료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엮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한국여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유린당한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우리 여인들을 전쟁터에 끌고 다니며 야만적으로 짓밟은 당신들의 만행을 파헤쳐서 만천하에 알리려고 하니 당신들이 저지른 현장의 사진과 관련서류들을 좀 빌려주고 당신들의 소행을 사실대로 낱낱이 말해주시오"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판단이 서자 나는 서둘러서 일본으로 떠났다. 이미 내 손에 입수된 자료들은 일본의 손으로 가공되어진 것들일 뿐이라는 공소감 때문에 가공되기 이전의 생생한 원자료(原資料)를 입수하고 싶었다. 


증거를 찾아라! 
동경에 도착한 나는 먼저 실력있는 코디네이터를 선임하여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대한 많은 자료들을 입수하고 분석했다. 그 작업을 통해 네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 이 문제를 세상에 가장 먼저 제기하고 현지취재와 면담취재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라는 책을 저술한 일본인 르포작가가 가장 객관적이고 양심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둘째, 당시 전쟁터에서 '위안부'들의 사진을 촬영했던 일본인 종군사진기자의 딸이 살아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찍어놓은 수많은 원판사진(原版寫眞)이 그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셋째, 당시 강제동원되어 전장에 도착한 조선여인들을 신체검사하며 성병감염여부를 검진 했던 의무장교의 딸이 후꾸오카에 살고 있다. 
넷째, 간다(神田, 도쿄 도 지요다 구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역의 이름)의 고서점가(古書店街)를 뒤지면 일본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을 구할 수가 있다.  


나는 코디네이터에게 일러 종군사진기자의 딸이 기거하는 곳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나이 40에 이른 이 베테랑 한국인코디는 수사관처럼 집요하게 캐들어가는 나의 자세에 다소 불만을 가지는 듯 했다. 남들은 출장 나와서 대강대강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는데 같은 봉급쟁이 주제에 뭐 그리 중뿔나게 설쳐대느냐는 눈치였다. 나는 그를 앉혀놓고 말했다. 


"당신과 나는 한국대표다. 한국여인들이 당한 울분의 실상을 밝혀 내려고 적진에 뛰어든 첨병이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우리 할머니들의 恨이 밝혀질 수도 있고 아니면 할머니들이 恨을 그대로 품은 채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우리 둘이 열심히 하면 된다. 우리 둘이다. 우리는 수사관이 되어야 하고 탐정이 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위안부'였다는 마음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힘들면 나 혼자라도 하겠다." 


내가 훌륭한 PD라거나 민족을 겁나게 사랑하는 애국자라거나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위대한 지성이라는 따위의 거창한 감정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한일전 축구가 벌어지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살이 떨릴 만큼 열렬히 조국팀을 응원하는 재일교포1세 할아버지들과 같은 심정, 거기에 더하자면 저희들 때문에 처참하게 오그라진 우리 할머니들 앞에서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의 위선적인 자세를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공분같은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도 일본의 폭로 잡지 <문예춘추>는 한일관계를 다룬 한국 언론을 문제삼아 "오류기사"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 기사를 쓴 한국 기자의 이름과 함께 기사의 내용을 조목조목 게재했던 것이다. 한국 언론에 대한 경고 또는 협박의 분위기였다.


"여기서 두시간 가량 기차를 달리면 그 여자가 사는 집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주소, 전화번호를 파악했습니다." 
코디가 조사결과를 이렇게 보고한 것은 이틀 뒤였다. 그의 눈빛도 이제는 수사관처럼 달라져 있었다. 
"그래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납시다. 그 여자 외출하기 전에 만나야 하지 않겠오?"

다음날 새벽 우리는 기차를 탔다. 조선 여인들이 능욕을 당하는 현장에서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남겼던 종군기자의 딸-. 그녀가 보관하고 있을 생생한 사진들-. 왠지 내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비오는 날 그의 집 앞에서 ②
일본 종군기자의 딸, 그녀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아침 일찍 동경을 떠났다. 조선의 여성들이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피해자가 되어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으로 끌려갔을 때 현장에서 그들의 모습을 직접 사진으로 찍었다는 그 일본인 종군사진기자, 아니 그 사람은 죽었고 그가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을 그의 딸이 사는 집을 찾아 코디와 나는 아침 일찍 동경을 떠난 것이다.


그의 딸이라도 만나면, 그가 찍은 사진 몇 점이라도 입수하게 되면 마치 내가 그 현장속으로 들어가 장면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것 같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기차를 탄지 두시간 남짓 되어 그 도시에 닿았다. 한적한 지방도시였다. 주소에 적힌 집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길가에 있는 집이었다. 흔히 보이는 일본의 집들처럼 작은 대문이 있고 그 너머로 현관이 보이는 그런 집이 아니라 현관이 바로 길가에 닿아있는 집이었다
   
코디와 나는 마치 어떤 권한이라도 있는 사람들처럼 서슴없이 현관으로 다가갔다. 사실 그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일본에서 사전 승낙없이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석학 김용운 박사가 설파한 일본인의 원형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긴장의 사회이며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치고 일본에서 장기간 공부한 나의 코디네이터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그런 관습을 무시해버릴 만큼 두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어떤 사명의식에 묶어버린 경직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사이를 두고 우리는 거듭거듭 초인종을 눌렀으나 그래도 역시 반응은 없었다. 어느덧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실망감이 떠 올랐다. 

"외출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래 응답이 없을 수는 없잖습니까?"
"옆집에 물어보면 어떻겠소?" 
"상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 시골처럼 이웃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설사 알렸다 해도 아침부터 예고없이 찾아온 사내들에게 옆집의 행선지를 알려줄리 없잖습니까? 더구나 지금 PD님과 나의 행색이 그다지 점잖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겠군. 그럼 어쩌지?" 
"우선 비를 피하면서 요기나 하시죠."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우리 둘은 동경을 떠나면서 자판기를 눌러 따끈한 옥수수 스프 하나씩을 마셨을 뿐이었다. 마침 길 맞은 편에 우동집이 있었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때늦은 아침을 우동으로 때우며 잠복근무하는 형사와도 같이 유리창 너머로 그 집을 지켜보았다.

한시간쯤 지났다. 그동안 그 집에서 나오는 사람도 그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저만큼 떨어진 공중전화박스를 코디가 다녀왔다. 


"받던가요?" 
"아닙니다. 신호만 가더군요."
"아무도 없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그나저나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저 집 관찰하는 것을 이 집에서 눈치챘을지 모릅니다. 당국에 신고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비록 단순히 기다렸다 만날 목적으로 그 집을 지켜보고 있을 지라도 만일 우동집의 여자가 우리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긴다면 이 작은 지방도시에서 무슨 일이 생겨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우동집을 나왔다. 그리곤 그 옆의 찻집(喫茶)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두어시간이 지났다. 비는 제법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 집 앞에는 강아지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코디는 찻집의 공중전화 버튼을 열심히 눌렀으나 역시 신호만 갈 뿐이었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나는 지금 기다리는 것인가 감시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빼앗으려 하는 것인가 얻어내려 하는 것인가? 기다리고 얻어내려는 것임이 분명하건만 그 집을 지켜보는 우리의 눈에는 감시하여 빼앗으려는 사람의 감정이 배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찻집에서도 더 이상 앉아 있기가 꺼림직하여 우산을 들고 근처의 길을 걸었다.


"홍형! 작년여름에 <잊혀진 전쟁> 취재하러 남양군도 팔라우에 갔었는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팔라우라면 필리핀 동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거기서 사나운 파도를 뚫고 배로 24시간쯤 남으로 내려가면 작은 섬 하나가 있답디다. 이름은 까먹었소. 그동네 이름들이 하도 생소해서 까먹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그 섬에, 그 섬의 원주민 할머니중에, 한국여인이 하나 있더래요. 이름도 잊었고 한국말도 거의 잊었고 고향도 거의 잊어버리고 사는 한국인 할머니... 더듬거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조선 처녀였답니다. 정글속에서 그 놈들 성욕받이가 됐던 그 처녀는 종전후에 아무도 거둬주는 이 없이 그 외딴 섬에 버려진 나머지 원주민이 돼버린 것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그 섬에 선교하러 갔다가 알아내고 귀국하는 길에 팔라우교민에게 들려줬다는 이야기를 내가 전해들은 겁니다. 문제는 그 섬에 직접 가지 않고는 그 할머니에 관한 어떤 것도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 섬에 가려고 팔라우에서 온갖 방법을 다 뒤져봤죠.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수송편이었어요. 24시간 거친 풍랑을 견디며 항해할 배가 없고 왕복할 연료를 싣고 날아갈 비행기도 없는 겁니다. 결국 못갔죠.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 같아서 말이오."


"기가 막힌 이야기네요. 우리는 그저 건성으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말지만 그 할머니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글쎄 말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디다. 나주에 사시는, 징용 다녀오신 할아버님 말씀인데, 팔라우 정글속에 끌려온 한국 여자들 틈에서 고향 처녀를 만났다는 겁니다. 둘 다 사지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 여자는 오빠오빠 하면서 이 할아버지를 많이 의지하려 했다던데, 그 처지에 무슨 도움이 됐겠소? 일요일이면 그 처녀의 방앞에 일본군 병사들이 수십명씩 줄 서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결국 그 여자도 다른 여자들처럼 죽었다더군. 성병으로... 그 이야기 하시면서 할아버지 우십디다." 
 
그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며 근처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찻집에 들어가 그 집을 관찰하였다. 그렇게 또 몇시간이 지난 저녁무렵이었다.



▲ 위안부 평화비 ⓒ연합뉴스


"나의 아버님께서 두나라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피디님, 불이 켜졌습니다!" 
"뭐요?" 
"누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문앞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잖아?"
"후문이 있었나보죠. 전화 할까요?" 
"아니요! 그냥 가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전화로 방문이유를 설명하기도 그렇고, 만일 거절이라도 당하면 우리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맞는 이야기입니다. 가시죠."
  
거리엔 더욱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건너 그 집 대문으로 걸어가면서 어떻게든 그 집안으로 들어가 그 여자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손에 든 우산에서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문앞에 섰다. 코디가 초인종을 눌렀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빼꼼히 중년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인은 우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완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굳어져 그 자리에 섰다.  문틈 저쪽에서 겁먹은 채로 서 있던 중년 부인은 잠시 뒤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당황한 코디가 큰소리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을 만나려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 집앞에서 기다렸습니다." 
"......"
"우리는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당신을 만나려고 한국에서 찾아 왔습니다. 문을 열고 우리를 만나주십시오." 
"......"
  
점차 애원의 어조로 변해가는 코디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저녁에 낯선 외국인 사내 둘이서 후두둑 후두둑 빗물이 튀는 우산을 하나씩 들고 문밖에 서 있다면 어느 여인인들 겁먹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우리의 목적의식이 투철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사정이고 이 여인이 받을 충격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겁먹은 여인이 보호기관에 신고라도 한다면 일은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코디에게 내가 말하는 그대로 통역하라고 일렀다. 


"나는 한국 TV방송의 다큐멘터리PD입니다. 나는 당신한테 중대한 협조를 받기 위해서 한국에서 건너왔고 오늘 하루종일 이 집 앞에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한테 받아야 할 협조는 너무나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라서 이런 어색한 상태로 설명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떳떳하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일입니다. 이 문밑의 틈새로 나의 명함을 밀어 넣겠습니다. 받아 보시고 우선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나는 작은 문틈으로 명함을 밀어 넣었다. 저쪽의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명함을 주워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망있는 한국의 TV PD라면 미리 연락을 하고 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지금도 가슴이 동당거립니다. 나에게 받아야 할 협조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것입니까?"  


여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굳은 목소리일망정 우리에게 항의를 하고 협조의 내용을 묻는 것 자체가 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 싶어서 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한국과 일본 두나라의 역사적 사건에 관여했던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 설명에 따라서 두나라의 역사중 한 부분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자칫 곤궁해질 수도 있는 우리의 위상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당당히 두나라의 역사를 끌어다 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아버님께서 두 나라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당신 아버지는 당신들에게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진들을 남기셨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터에서 찍으셨던 사진들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진들이 지금 당신에게 보존되어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해도 그것은 개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당신들에게 간섭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나는 다만 그 사진을 남기신 아버지의 뜻을 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진들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 사진들이 역사적인 가치를 발휘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문이 열렸다. 문은 차분하게 끝까지 열렸다. 여인은 옆으로 비켜서며 우리를 거실로 청하였다. 찻잔을 사이로 마주 앉았다. 여인은 긴장하면서도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의 아버지는 중국전선에서 종군사진기자를 하시면서 일본군의 전황은 물론 종군위안부, 당시 '조선삐'라고 불렀던 종군위안부들의 모습을 수없이 많은 사진으로 만들어서 일본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사진의 원판들입니다. 그 원판이 지금 당신에게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여인은 작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다 모아서 당신을 설득시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 원판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진들을 인화해 달라는 부탁을 할 것이고 그러한 사진들을 같이 보면서 혹시 그 사진속의 정황에 대해서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설명을 들은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을 나에게 말해 달라는 요청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해도 당신은 결국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진들은 일본인들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리석게도 설득노력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사진들이 30만명에 이르는 조선 여인들의 희생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


"그 당시 사진기자라 하면 공익을 생각하고 정의감에 불타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무장된 소수 엘리트 언론인들이었습니다. 당신 아버지께서도 틀림없이 그런 분이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인류애가 강한 분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군에 의해서 납치되고 강제동원되어 간 그 어리고 불쌍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렇게 오랫동안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사진찍어 놓았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 사진들을 찍고 보관하면서 그 사진들이 훗날 어떤 사료(史料)적 가치를 발휘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순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 원판들을 그토록 소중히 또 오랫동안 보관하셨다가 대를 이어 따님인 당신에게 넘겨 줄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거기까지 말하면서 나는 그 여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여인의 눈과 내 눈은 기싸움을 하는 것처럼 팽팽히 마주 보았다. 정황으로 보아 나는 공격수였고 그 여인은 수비수였다. 수비수는 이윽고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PD선생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그 원판사진은 나에게 있습니다. 바로 저 방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모두 2000점이 넘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그 사진을 물려주실 때 매우 귀중한 사진들이니 잘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어쩌다가 유출된 몇점의 사진들이 일본 주간지들의 선정적인 기사에 들러리 사진으로 게재되는 것을 보시면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곤 하셨습니다." 
 
여인이 나의 주파수 속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이 귀중하다고 강조하셨던 그 사진들이 정말 귀중하게 쓰여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그동안 숨어있던 '위안부' 여성들이 하나씩 둘씩 말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커다란 반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실상을 밝히고 규명하기 위해서 나선 PD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있지만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사진들이 바로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 
"나는 지금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괴변일지는 모르나 당신들의 약점을 파헤치기 위해서 당신들이 지닌 자료를 빌려 달라고 설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외면하지 않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오늘 당신에게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사전승낙 없이 당신을 찾아와서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전화로 이런 설명을 드리고 당신이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열정과 간절함을 지금처럼 당신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적으로 실례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놀라시게 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인사로 나는 고개를 숙였고 여인도 따라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거실의 분위기는 무겁지만 부드럽게 풀려가고 있었다. 잠시후 여인이 말을 시작했다.

"아까는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여러분의 입장이 이해됩니다. 나도 경솔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무엇이든 보관이라는 것 자체가 언젠가 다시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 사진들을 보관해 오면서 언젠가는 가치를 발휘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PD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한국에서 그 여성들이 들고 일어난다고 하니 그 분들과 아픔을 같이 한다는 취지에서 나도 협조해 드리고는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물려 주실 때 한장, 한장을 짚어가면서 정황을 설명해 주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진 전부를 같이 보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모두 다 인화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진중에서 증거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진 몇점 정도 일 것입니다. 그 이상을 도와드린다는 것은 저에게 부담이 될것입니다." 
 
여인은 제한적 승낙을 하고 있었다. 난공불락일 줄 알았던 성(城)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틀 뒤에 와 주십시오. 사진을 고르는 시간, 인화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오늘 내일은 어렵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결심을 하신 당신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틀뒤 오전에 이 근처에 와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여인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면서 빗속에 파묻혀 동경가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온몸을 휘감았던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풀려 신간선을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피하라, 그저 피하라 ③
女국가대표 별칭 '낭자군'은 위안부를 가리키던 끔찍한 말

다음날 나는 동경의 매일신문(마이니치신분)사에 들러 미리 주문해놓은 몇점의 사진을 인수했고 일본 국회 도서관의 여러가지 자료들 속에서 몇점의 관련사진들을 찾아냈다. 그날 나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우리 언론이 한국 스포츠의 여자단체팀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낭자군(娘子軍)'이라는 별칭이 태평양전쟁당시 중국전선에 끌려 다니던 종군위안부를 지칭하던 단어였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군 주둔지 천진에 여인들을 끌어와 위안소를 차려놓고 여성을 이르는 '낭자'라는 단어 끝에 군인을 말하는 '軍'자를 붙여 그들과 심정적인 일체감을 조장하며 혈기와 살기로 가득찬 전쟁터의 사내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여인들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군위안부' 바로 그것이었다. 
 


▲낭자군 도착을 알리는 벽보. 일본인들은 위안부를 '낭자군'으로 불렀다.


일본의 고서점들이 밀집되어있는 간다(神田) 고서점가는 한 시대(時代) 서울의 명소였던 청계천 고서점가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간다는 청계천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방대했다. 길 양편에 쭉 늘어선 고서점들은 도대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았다. 세계최고의 독서인구와 세계최고의 출판량을 자랑한다는 일본의 탐구열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없는 책이 없고 없는 자료가 없다는 곳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가 다 모여 있는 곳이라고도 하지요." 
"방법이 없겠군. 다 뒤집시다."
"네? 며칠이 걸릴 지 아십니까?" 
"오늘 안 되면 내일 뒤지고, 또 모레 뒤지고..."
"내일은 그 여인에게 사진 받으러 가는 날입니다." 
"좌우간 뒤지면서 판단합시다. 무슨 수가 나겠죠."
  
한쪽 입구에서부터 뒤지기를 시작했다. 저인망으로 훑듯이 한집 한집씩 뒤지고 다녔다.
  
"종군위안부라고 아십니까? 아시면 그것과 관계되는 아무것이라도 보여주시오." 그렇게 묻기를 몇 번이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해가 지고 네온사인이 켜지고 다리가 아프도록 뒤지고 다녔다. 보람이 있었는지 나는 다음의 희귀한 사진등 자료 몇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우선은 그 길고 방대한 간다 서점가를 뒤져서 많지는 않지만 그나마 여과되지 않은 사진과 자료들을 입수했다는 보람으로 가슴이 뿌듯했고 또 내일은 그 여인이 약속한 미공개 사진을 받게 된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과연 몇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그 사진들은 참상을 얼마나 진실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뒤척거리기를 되풀이하다가 일본 <NHK> 방송이 마감시간에 틀어주는 일본국가를 귓전으로 흘리며 잠이 들었다. 


"PD님, 중국전선에서 여성들의 성병을 검진했었다는 군의관의 딸 말씀입니다. 후꾸오까에 살고 있는데 아무때라도 오면 만나주겠다고 합니다. 어쩌실 겁니까?"
"다큐멘타리 작가 센다 가쿠오씨는 선이 닿았습니까?" 
"네. 조금 특이한 사람 같습니다. 동경 변두리 작은 찻집에 거의 매일 앉아 있으니까 날짜 약속은 필요없고 아무 때나 편한 시간에 오라는 겁니다. 우리가 꽤 긴시간을 이야기 할 것 같은데 설문을 미리 보내겠다 해도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뭐든 물으면 아는대로 대답해 주겠다더군요. 자신만만해요." 
"그래요? 잘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여인에게 사진 받는대로 후쿠오카에 내려가서 군의관의 딸을 만나고 내일 밤에 동경으로 돌아와 모레 작가를 만나면 어떨까요?"
"동경과 후꾸오까를 왕복하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먼 거리인데요? 신간선을 타거나 비행기를 이용하면 안될 것은 없지만, 몹시 고단할 텐데요...." 
"아직 간다 서점도 더 뒤져야 할 것이고 방위청, 주오대학... 찾아가야 할 곳이 많지 않습니까?" 


기차는 어느덧 그 역에 닿았다. 우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여인의 집으로 향했다. 길 건너에 그 집이 보였다. 코디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송수화기를 놓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맛있게 몇 모금을 빨고 나서 그는 다시 박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왠 일인지 몇차례나 다이얼을 돌렸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위안권, 중국


"왜, 안 받습니까?" 
"네. 화장실에라도 갔나 보죠."
"화장을 꽤 오래 하는군." 

나는 코디를 재촉하는 것 같아서 몇 걸음 저쪽으로 비켜 서 주었다. 계속해서 코디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놓곤 했다. 박스 속 그의 얼굴이 점차 상기되어 가는 것 같았다. 왠 일일까? 얼핏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 모르는 사이에 손마디까지 담배가 타 들어왔다. 연거푸 담뱃불을 붙였다. 코디가 다가와 말했다. 

"저기 찻집에서 차 한잔 하시면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깐 외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얼굴 펴십시오." 

오히려 내가 코디의 기분을 부추겼다. 그 찻집의 창가에서 저번날처럼 우리는 다시 그 집을 지켜 보았다. 차는 저 혼자서 식고 있었다. 코디가 불쑥 말했다.

"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조금만 계시죠." 
"어딜 말입니까?"
"저 집에 가서 노크라도 해 보겠습니다. 뭐라도 어떻게 해봐야지 마냥 이대로 앉아 있기가 영 편치 않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찻집을 나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창밖으로 여인의 집으로 다가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후에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시계를 보고 나서 그는 또다시 초인종 누르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왠 일일까? 이틀 전에 여인은 충분히 이해했고 충분히 공감한 것으로 보였다. 자기 스스로 이틀의 말미를 요구하기도 했다. 약속한 시간은 바로 오늘 이 무렵이었다. 어느덧 두시간여가 지났다. 코디는 다시 찻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침묵속에서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PD님, 피하는 것 같습니다. 급한 일로 외출을 했다해도 한두시간이지 이 작은 지방도시에서 이렇게 늦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그런 생각이 들긴 했소마는 스스로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오. 내 짐작으로는 그 여인이 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두고 봅시다." 
"두고 보나마나 만일 후꾸오까에 오늘 가신다면 지금쯤은 일어나셔야 될 시간입니다. 가부간 결정을 하시죠." 
"......"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일본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필시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라고 100퍼센트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너무나 참담해질 것 같은 생각에 나는 아직도 그 집 대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PD님, 더 연연하시면 더 초라해질 것입니다. 이쯤에서 졌다고 생각하시는 게 어떨지요."
  
결국 '종군 사진 기자'의 딸은 우리를 피했다

잠시 뒤 우리는 무겁게 일어섰고 한사람당 세잔씩 여섯잔의 찻값을 지불했다. 그길로 후쿠오카행 신간선에 올라 푹신한 의자에 깊이 파묻혔다. 온갖 생각이 두서없이 떠 올랐다. 기대했던 사진을 얻지 못했다는 실망감도 컸지만 그 보다는 배신감같은 불쾌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는 듯 했다. 자료를 내줄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약속대로 만나서 말로써 사과하고 양해를 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를 회피하면서까지 약속을 깬다는 것은 엊그저께의 그 의미심장했던 만남 자체를 묵살하는 셈이었다. '일본'이라는 실존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고 애써 왔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 통제력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다. 


얼마쯤 남으로 달렸을까. 달이 뜨는 밤이었다. 맥주 한잔을 마신 코디는 끝내 그 일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듯 객실과 객실사이의 전화박스로 들어갔다. 내 좌석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코디가 다이얼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신호가 가는 것 같았다. 한번 두번 세번쯤 울릴만한 사이가 지나자 코디가 고개를 들더니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바로 나에게 손짓을 보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전화박스로 달려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까지 불과 10여미터 거리를 뛸듯이 걸어갔다. 

"그 여자요? 뭐라 합니까? "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코디가 송화기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집을 떠나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군요."
"내 말 그대로 통역해주시요."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나는 우선, 당신에게 뜻하지 않은 어떤 일이 발생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우리를 피했던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뜻하지 않은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면 우리는 다시 약속날짜를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과 나는 코디를 통역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 약속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지금 무척 실망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지성을 지닌 사람끼리 진지하고 의미있는 토론끝에 합의한 약속을 당신이 묵살해 버린 것에 대한 모욕감 때문에 나는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뭐라고 변명을 하겠습니까?"
"내 짐작으로는 당신 주위의 누군가가 약속이행을 방해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PD님이 다녀간 뒤로 나는 아버님의 친구 몇분에게 이 문제를 의논 드렸습니다. 그분들은 거의 모두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분들이지요. 내 설명을 듣자 그분들은 하나같이 펄쩍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아버님이 찍어둔 그 사진들은 화약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개되면 우리 일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 대답들이었습니다. 일단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저 피하라, 집에 있지 말고 피하라-.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무서웠습니다. 무서워서 당신들을 피해 하루종일 집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실려가는 여성들, 중국


역시 짐작한대로 였다. 당시 일본에는 신우익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들이 발호하면서 일본정신회복, 북방영토회복 등등을 외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제국주의의 부활을 부르짓던 상황이었다. 아니 보다 근원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세대들이 아직까지 일본정계의 실력있는 배후로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들 중에는 종군위안부 문제의 직간접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 누구도 솔직해 질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여인은 비오는 밤중에 찾아온 피해 당사국 PD의 말을 듣고 비장의 사진을 선뜻 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여인이 만약 나와의 약속에 얽매어 몇장의 사진이라도 내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상할 수 없는 비난과 책임추궁, 나아가서 극우세력들로부터의 테러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자 나는 거대하고 두터운 저항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여인이 가엾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처지가 이해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짚어 드릴 것은 만나서 말씀하셨더라도 나는 충분히 당신을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랬더라면 나는 당신과 당신의 아버님을 오랫동안 기억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당신을 이해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미련없이 전화를 끝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사진 몇점 구하는 일에도 이토록 반응이 예민하고 저항이 심한 것으로 미루어 태평양전쟁의 책임문제속에는 감춰지고 인멸되고 왜곡된 사실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두나라 근현대사의 정치 경제 외교문제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인가? 단단하게 휘감아진 이 베일속에서 무엇을 얼마나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달리는 신간선에 몸을 맡긴 채 잠에 빠져들었다. 


후쿠오카(福岡)는 두번째 방문이었다. 1982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도공들의 핏줄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가슴이 메이는 아픔을 느끼면서 이 도시를 거닐었는데 이번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듯 싶었다. 


후쿠오카에는 중국 전선의 일본군 진영에 근무하면서 '위안부'로 끌려오는 여인들의 성병 보균 여부를 검진했다는 군의관 아소 데스오(麻生徹男)의 딸이 있었다.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



▲군표



▲ 위안소 앞 일본인들, 중국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두 일본인을 만나다 ④
일본군 보고서, 그들은 위안소를 '공동변소'로 불렀다
'위안부' 성병 검진 담당 일본군 군의관 아소 데스오의 딸을 만났다
중국전선의 일본군 진영에 근무하면서 '위안부'로 끌려오는 여인들의 성병 보균 여부를 검진했다는 군의관 아소 데스오(麻生徹男)의 딸은 선선이 우리를 맞았다. 중년의 그녀가 조심스레 차를 다려 내는 품이나 단정한 매무새속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있는 듯 했다. 그녀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따금씩 나의 승락을 받지 않고 우리 아버님이 남기신 자료들을 사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한국 언론들도 몇차례 그랬죠. 다 적어놓고 있습니다."  
 
한국언론사들의 분별없는 취재관행에 일침을 가하는 듯 싶어 그녀와의 사이가 약간은 경직되어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정리했다는 <戰線女人考>(전선여인고, 전선의 여성에 관한 고찰)라는 자료집을 꺼내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이 이 사진과 자료들을 발표한 것은 전쟁은 특히 전쟁에서의 여인은 비참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언론에 대한 그녀의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이 말 또한 그다지 의미를 두지않고 듣기만 했다. 그저 그녀가 빨리 책장을 넘겨 사진과 자료들을 보여주기만 기다렸다. 그녀는 내가 마신 찻잔에 다시 차를 공손하게 채워주고 책장을 넘기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위안소에 도착한 여성들입니다... 군복을 입은 이분이 나의 아버님입니다...이 사진이 나의 아버님이 고안하여 사용하신 성병검진대입니다..."


그저 공손히 그녀는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이지 나는 설명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첫번째 사진에서부터 치미는 울분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한장한장 페이지를 넘겨가는 동안 그 책을 통채로 빼앗아 맘대로 보고 맘대로 묻고 싶은 충동이 이글거렸다. 사진책속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도착한 순진한 모습의 조선처녀들이 들어 있었고 그 처녀들을 발가벗기고 가랑이를 벌리도록 고안된 성병검진대가 있었으며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군직영위안소의 안내팻말이 들어 있었다. 이글거리는 충동은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썼다는 자필 검진보고서를 설명할 때에 극에 이르렀다. 



▲일본군 군의관 아소데스오와 그가 쓴 자료집



▲중국 상해로 끌려온 처녀들이 성병검진여부를 검사를 받기위해 검사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복을 입은 여인도 보인다.



▲군의관 아소데스오가 고안했다는 성병검진대. 의자에 기대고 앉아 다리를 벌리도록 고안되었다.


일본군 보고서, 그들은 위안소를 '공동변소'로 불렀다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1군 제14병참병원 육군군의 소위 아소 데스오(麻生徹男)는 자신이 직접 쓴 보고서 일본군의 <화류병(성병)의 적극적 예방법>에서 상해의 일본군 주둔지역에 끌려온 100명의 여성(그중 80명은 조선여성)에 대한 성병검진결과를 보고하면서 이들 여성을 "천황의 군대 장병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을 장병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그 가증스러운 규정에 그치지 않고 그는 위안소를 출입할 때의 주의사항을 제시하면서 "(위안소는) 위생적인 공동변소이므로 (…)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는 아니된다"라고 썼다.  


시선이 그 대목에 이르자 내 얼굴이 감출 수 없을 만큼 닳아 올랐다. 끌려온 여인들을 '장병에게 주는 선물' 또는 '공동변소'라고 이름지은 군의관의 보고서, 전쟁터의 여인은 비참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료를 공개했노라고 그 아버지를 두둔하는 딸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였다. 어찌하나-. 꾹 눌러 참으며 설명을 듣고 자료를 받아가는 일에 충실할 것인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실어 몇마디라도 쏘아 부치고 일어서야 할 것인가.


아소 군의관은 보고서에서 조선반도의 여성들은 성병이 의심되는 자가 극소수고 내지(일본)여성들은 "대부분" 현재 급성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척박한 땅에서 궁핍하게는 살았을 망정 정조 관념에서는 기모노를 입고 있는 일본의 여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선 여성들이었다. 그런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섹스에 굶주린 일본군들의 정액을 받아주는 '공동변소'로 치부해버린 것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었고 그러한 인식을 가감없이 드러낸 어휘가 '공동변소'였던 것이다.  
 
표정이 굳어지며 말이 없어졌다. 참을 수도 있었고 터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눈치를 챈 코디가 내곁으로 바싹 붙어 앉으며 손가락으로 내 발을 지그시 눌렀다. 참으시오, 여기는 일본땅입니다, 그런 사인인 듯 했다.  

"아버님은 참으로 대단하셨던 분 같습니다. '천황'의 군대를 위하여 위생적인 '공동변소'를 만드는 일에 그토록 헌신하셨고 또 그 '공동변소'의 청결위생을 위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성병검진대까지 착안하여 만드셨다하니 일본군의 입장에서보면 참으로 훌륭한 군의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전쟁속에서 자신이 '공동변소'로 치부해버린 여성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때늦게나마 전쟁에서의 여인은 비참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그 자료들을 공개했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아버님께서 구사하셨던 용어의 사실성에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천황의 군대 장병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든가 '위생적인 공동변소'라는 당돌한 용어들은 당시 일본군 내부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짚어 보게 하는 생생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한국에 알려지면 아버님의 이름은 한국인들 머릿속에 깊이 새겨지리라 믿습니다."



▲군의관 아소 데스오의 보고서 표지


자료를 얻어낼 욕심으로 치미는 감정을 끝까지 억누르며 최대한 격조있게 마무리를 한다는 것이었으나 나도 모르게 비수가 들어있는 비아냥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흐름을 간파한 코디가 잽싸게 허리를 자르고 들어와 수다를 떨었다. 

"PD님,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동경의 약속시간을 맞추려면 더 이상 여유가 없습니다. 아소 데스오상(樣)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정리하시도록 하시고 모처럼 꺼내주신 자료들이니 빨리 집어 넣으시죠. 신간선 예약시간이 입박했습니다."
  
눈치껏 그렇게 손발을 맞추고 우리는 아소의 딸이 꺼내놓은 자료들을 잽싸게 집어든 채 서둘러 그 집을 나섰던 것이다. 신간선에서 커피잔을 사이로 마주 앉자 코디는 그 순간을 곱씹으며 말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했습니다. 이PD님의 말씀이 점차 비꼬임투로 변해가는 것을 듣고 아, 이집에서도 자료를 얻기는 틀렸구나 싶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는 한바탕 감정적인 말다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조마조마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취재하는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지만 이번 취재에서는 냉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군요." 
"이해합니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민족감정이라는 원초적인 요소도 외면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마주보며 쓸쓸히 웃었다. 그리고 신간선에 의지하여 도쿄로 달렸다.

이튿 날 오후, 도쿄의 변두리 작은 찻집으로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갔다. 바로 눈아래에 큰길이 내려다 보이는 자그마한 2층 찻집의 창가에서 그는 자료들에 파묻혀 원고를 쓰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굵은 테 안경, 멋대로 늘어진 머리칼에 냉정하고 근엄해 보이는 얼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르뽀작가 센다 가쿠오(千田夏光) 씨였다.  



▲'황군 장병에게 주는 선물'



▲'위생적인 공동변소'


일본인 최초 '군위안부' 문제 파헤친 르뽀작가 센다 가쿠오 씨를 만나다
   
그는 일본인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파헤쳐서 역사의 갈피에 끼어 그냥 넘어갈 뻔했던 여성들의 통분을 공론화했으며 한국 동남아 남태평양일대를 탐방하여 전모를 밝혀낸 그의 저서<종군위안부>는 1992년 당시까지 40만부가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다. 우리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센다 가쿠오 씨는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1962년이었던가요, 소화 37년이었습니다. 마이니찌(매일)신문 본사 출판국장에게서 위촉을 받고 사진자료정리를 시작했습니다. 2만5000점이나 되는 일본군의 전쟁사진이었죠. 한점 한점을 정리하던 중에 나는 희한한 사진한장을 발견했습니다. 중국 화북지방에서 적진을 향해 황하(黃河)를 건너는 일본군의 사진들 끝에 이 한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하도 이상해서 선배 기자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조선삐"라고 대답하더군요. 종군위안부라는 말이었지요. 종군위안부. 그 대강의 내용을 알고 나서 나는 이 희한한 일의 실체를 캐내는 작업에 뛰어들어 8년을 바쳤던 것입니다." 


센다 가쿠오 씨는 준비해간 질문을 던질 틈도 주지않고 차분하고 거침없이 이 길고 깊은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펼쳐 놓았다. 그의 설명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에게는 일본의 명예나 일본의 자존심 따위보다 역사적 진실이 우선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에서 이따금씩 발견되는 고집스럽고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그동안 우리가 발로 뛰며 입수한 자료와 사실들이 드디어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고 줄거리가 세워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계속)  



▲르뽀작가 센다 가꾸오씨와 이PD. 이PD가 들고있는 사진은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단서가 된 중국 황하를 건너는 '조선삐'(일본군위안부의 은어)사진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피해 여성의 사례를 듣다 ⑤   
센다 가쿠오 씨를 만나고 나서 나는 만행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그 현장들을 찾아 나섰다. 저 멀리 남양군도에서 태평양 지역 일본군의 여러 사령부가 있었던 팔라우, 트럭섬을 찾았고 중간거점이었던 괌과 사이판 티니안 등등 일대를 헤매고 다니며 현장을 확보하고 원주민의 증언을 듣고 자료들을 수집하며 퍼즐 조각들을 맞춰 나갔다. 그 나라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강점을 받아 쓰라린 고통을 받은 지역들이라 원주민들은 나와 감정선이 일치하였다. 늙은 원주민들은 기억을 더듬어 비교적 상세하게 과거를 증언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와 큐슈 등 일본에 다시 들어가 관련 지역을 훑고 다녔다. 일본 큐슈의 한 방송사에서는 중년의 PD가 나와 의기투합하여 자기가 만든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복사해주었다. 그 속에 놀랍게도 우리 피해 여성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인터뷰하는 장면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접근조차 어려웠던 피해 여성들 아니었던가.  


그렇게 나라 밖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마친 뒤 귀국하여 나는 회사 회의실의 기다란 테이블에 일본에서 내가 수집하고 얻어내고 사진기로 찍어온 자료들을 쭈욱 펼쳐 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당시 종군위안부 문제와 연관된 관계자들을 불러들였다.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친절하고 소상하게 설명한 뒤에 내가 말했다. 


"이것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본에서 수집해온 자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해는 우리 여성들이 당했으나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일본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내가 입수하지 못한 더욱 생생하고 결정적인 증거들이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우리 여성들의 피맺힌 참상과 울분을 세상에 알리려 해도 가해자인 일본의 협조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가장 진실하고 가장 절대적인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 피해 여성들의 증언입니다. 그 증언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보다 더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분들 중 어느 한 분에게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연락처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남양군도를 헤매며 이 자료와 증거들을 어렵게 어렵게 구해온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피해 여성들 중에 어느 분은 일본 방송사에 직접 출연하여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테잎입니다."


나는 그 테잎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어느 분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 나라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기 어렵고 수치스러워 하시는 심정은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두면 우리 피해 여성들의 그 엄청남 괴로움, 고통, 비극, 울분을 누가 대변하고 누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습니까? 그 분들의 모국입니까? 그 분들을 괴롭힌 일본입니까? 당사자들이 침묵하고 계시면 저 뻔뻔스러운 일본이 그 역사적 사실을 지워버리거나 왜곡해서 날조된 역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극과 억울함은 없는 것이 됩니다. 그 분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입수해온 이 자료들은 방송이 끝난 뒤에 여러분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하시려는 작업에 직접 도움이 될 것이고 후세에도 남게 될 역사의 사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현장에 다시 나가 땀 흘리며 촬영을 하고 올 것입니다. 부탁하건데 귀국 후에 우리 피해 여성들한테서 그 한 맺힌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들을 수 있도록 그 역사적인 작업에 여러분들께서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장기 촬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꼼꼼히 촬영 계획을 짠 뒤에 촬영에 돌입했던 것이다. 베테랑 카메라맨 하재영과 이태술 씨가 합류하여 용기를 북돋았다. 두 분은 그 후에도 방송사에 빛나는 대작을 여러 편 만든 훌륭한 영상인 들이었다.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자를 찾아다니고, 남양군도를 헤매며 현장을 답사하고 원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국내로 돌아와 피해 여성들을 설득한 다음 다시 나가 2개월여에 걸쳐서 국내외 촬영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관련 단체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마침내 인터뷰를 승락한 용기있는 피해 여성 여덟 명의 인터뷰를 마쳤다. 그렇게 프로그램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다 채운 뒤에 전체의 큰 틀을 세웠다. 60분짜리 3부작이었다. 

첫 편은 이제는 할머니가 된 피해여성들 여덟 명의 피맺힌 증언과 생활상으로 뼈대를 잡았고 2편은 역사적 자료와 함께 문제의 전말을 정연하게 추슬렀다. 마지막 3편은 남양군도등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 야만의 흔적과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분노의 소리를 들었다. 방송은 1992년 8.15특집이었으며 다시 90분으로 종합하여 앵콜 방송되었다.


지금부터 그 3부작을 다시 추슬러서 '종군위안부' 문제의 가로와 세로 그리고 깊이를 글로 정리해보자. (이 글에서 언급되는 여러 상황들은 그 시점이 1992년 8월 이전이라는 것을 미리 밝힌다.) 

먼저 피해 여성들(오늘의 감성으로 뒷글부터는 '피해 할머니'라 칭한다)의 피맺힌 이야기를 옮겨보자.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으므로 편의상 네 분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자. 


노청자 할머니 이야기 "닷새 뒤 시집가려 사주까지 봤는데...만삭 여인 배 가르고 생으로..."

노청자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은 뒷면이 어지럽다. 주소지 이전 기록이 빼곡히 적힌 탓이다. 할머니를 만난 곳은 충청남도 어느 도시 변두리 길가에 몇 채가 닥지닥지 붙어있는, 큰 바람 불면 날아갈 듯 한 판잣집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허가 건축물이었다. 당시 73세의 노 할머니는 무거운 짐을 들듯이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휴~, 목숨이 참 길어! 매 맞고 발길로 채이고 할 때는 번갯불이 번쩍 나고. 그 이야기를 다 엇따대고 허며...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1937년/중일전쟁 개전). 어머니랑 품앗이랑 셋이서 밭에 씨를 뿌리다가 어머니가 점심밥 챙기러 집에 가셨는데, 이내 숨이 차도록 뛰어 오시면서 소리를 지르신단 말이에요. '야, 도망쳐, 빨리 도망쳐라! 빨리, 빨리 도망쳐!' 그러세요. '왜 그래요 어머니?' '저 마을에, 마을에, 처녀들 잡으러 쳐들어 왔단다. 헌병하고 경찰들이 처녀들을 마구 잡아간대. 아, 빨리 도망치라니까!' 어머니 말씀 끝나기도 전에 급히 밭에서 나와 고모네 집으로 피신하려고 새재를 넘어가는 참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헌병과 경찰한테 붙잡혔어요. 헌병, 경찰이 열 명은 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닷새 뒤에 시집가기로 돼있었어요. 시집가려고 사주까지 받아놨단 말이에요. 잡혀서 끌려가보니까 추럭(트럭)을 석대나 쭈욱 받쳐놓고 포장을 다 쳐놨는데, 앞차에는 몽땅 처녀들을 처넣고, 그 속에서 처녀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 속에 나를 밀어 처넣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잡혀온 처녀가 서른여덟 명이에요." 


그렇게 할머니는, 다섯 밤만 자면 시집갈 처녀는, 일본 헌병과 경찰에 붙잡혔다. 태평양전쟁 이전 중일전쟁시에도 일본 정부(군인과 경찰)에 의해 조선 여성 납치가 자행됐었다는 결정적인 증언인 것이다. 
 


▲노청자 할머니(1992년)



▲당시 노청자할머니가 살던 판자집(1992년)


"그 추럭을 타고 나흘을 끝없이 갔어요.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다가 주먹밥 주면 얻어먹고 밤낮주야 나흘을 실려간 거지요. (중국) 천진(天津)을 지나 태원(太原)이라는 곳에서 내렸어요. 영락없이 마방(馬房. 마굿간)같은 곳입디다. 판자로 칸을 막아놓은 그런 방을 주욱 연결해놓고 앞에는 천으로 포장을 쳐놓은 그런 방으로 처녀들 한사람씩 들어가래요. 방방에서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나고. 아이구머니 살려 달라고 우는 소리가 나고. 숨쉬는 소리까지 다 듣겨요(들려요). 그 부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부대에서도 왔어요. 하루에 삼십 명도 그만, 사십 명도 그만. 방방이 '나란이'를 섰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퍼져 있으면 바께스(양동이)로 찬물 퍼다가 들이 붓고요. 새벽 다섯시에 깨워서 간밤에 지들이 쏘아댄 탄알의 탄피 주워 도라무깡(드럼통)에다 모아 놓으라고 시켜요 헌병이. 오전 내내 탄피 줍고 점심 얻어먹으면 그 다음부턴 주야장천 들어와서 그짓이에요! 열아홉살 먹은 여자한테 애가 들어서 만삭이 되니까 병원에 데려가서 배를 가르고 애를 생으로 끄집어내서 죽였답니다..."


"......" 
"지들이 쌈 싸우러 나갈 때는 쭈욱 줄서서 잘 싸우고 오라고 인사시키고, 싸우고 돌아올 때는 또 나가서 수고하셨다고 절하라고 시켰죠. 하루는 어깨띠를 하나씩 주면서 이걸 두르고 성 밖으로 나가자고 해요. 죽인다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다 써먹고 우리를 죽이는구나. 울고불고 난리 났었죠. 성 밖에 끌려 나가서 보니까 중국 애들 한 사십여 명 잡아다 놨더군요. 스파이나 밀정들이래요. 그들을 하나씩 쭈욱 옆으로 무릎 꿇려 앉혀 놓았는데 각자의 몸 앞에 구덩이를 하나씩 파 놓았어요. 우리한테는 한눈팔지 말고 잘 보라는 거예요. 잠시 뒤에 그 부대에 갓 들어온 신병들이 포로 한 사람에 하나씩 붙어서 허리춤에서 기다란 군도를 빼가지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 뭐라고 외치고 나서 그 즉시 포로들의 목을 내려치는 거예요. 그 순간 피가 솟구치고 몸뚱이는 구덩이에 떨어져 실룩실룩... 아이구,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네요." 
".... 그 처참하고 잔인한 현장에 여성들을 왜 끌고 나간 겁니까?"
"독해지라고 그런데요. 독해지라고요. 전쟁이니까 신병들 독해지라고 시키고 우리들도 독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들도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아이구, 말로 어떻게 다 해요?" 
"......"
"그중에 열여덟 아홉 됐을까 싶은 어린 포로가 그 상황에서도 살려 달라고 싹싹 빌면서 몸부림치자 커다란 군견이 달려들어 얼굴 여기저기를 마구 물어뜯게 합디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몸뚱이를 발로 툭 차서 구덩이에 떨어뜨려놓고 신병을 시켜 킨 칼로 몸뚱이를..."


할머니는 치를 떨었다. 

"거기 다녀와서는 잠을 못 잤어요. 그 광경이 눈에 밟혀서. 나뿐만 아니라 이방 저방에서 거기 갔던 여인들이 밤마다 '와악'하며 놀래서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립디다. 아마 삼년 동안에 그런 광경을 열댓 번 봤을걸요. 돈? 군표? 그게 뭔지도 모르고 받아본 일도 없어요."

노청자 할머니는 그때의 충격을 잊고자 귀국해서 설악산의 한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16년을 지냈다. 이래저래 다시 속세로 내려온 할머니는 김삿갓마냥 남한일대를 이리저리 떠돌며 몸 붙이고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일거리가 어디 있나요? 쌀 10킬로에다 보리쌀 한 되 주면 그걸로 한 달 살기 힘들어요. 어느 때는 죽도 쑤어먹고 굶는 날도 있고... 마늘 1킬로그램 까주면 그 값으로 200원 줘요. 1킬로에 200원! 그래도 그게 조금은 도움이 되는데 그나마 몸이 아파 한 이십일 못 깠네."

1킬로에 200원이라 말하면서 노청자 할머니는 쓸쓸히 웃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고함을 지를 힘마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금주 할머니 이야기 "그들은 지껄이면 죽였다" 


서울 관악구의 어느 좁은 골목, 두 평 남짓한 순댓국집의 주인은 황금주할머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양녀로 들어가 살다가 1943년 주인집 딸을 대신해서 정신대로 끌려가게 된다. 할머니 기억으로는, 당시에 천황의 명령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열여섯 이상 된 여자들을 무조건 한집에 한사람씩 군수공장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인집 딸은 대학에 갈 준비를 하는 입장이라 부득이 그 딸을 대신해서 자기가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군수공장으로 돈 벌러 간다 하니 처녀들이 좋아라 집을 나섰다고 말했다. 할머니 열다섯 살 때였다. 



▲황금주할머니(1992년)



▲황금주할머니의 순대국집(1992)


"기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계속 갔는데 '길림성, 길림성~' 그러더라고. 거기서 내렸고 그 이튿날 낮부터 그 일을 겪는 거야. 공장으로 간다고 데려와서 처녀들을 발가벗겨놓고 그 짓을 하려하니 다들 말을 듣겠나? 모두 길길이 날뛰지. 나한테 장교가 다가와서 옷을 벗기려 하길래 반항하면서 이게 군속일이냐 하고 물으니까 이게 군속일이래. 이것 말고 시키는 일 다 할 테니까 다른 일 시켜 달라 하니까 여기서는 이 일밖에 없다는 거야. 미치지. 계속 거부하니까 발로 차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총 끝의 단도로 팬티를 짝 찢어버렸어. 그 순간 기절해서 사흘 만에 깨어났지. 그때부터 당하는 거야." 


군수공장의 근로보국대에서 돈 벌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데려간 뒤에 전장의 종군위안부로 써 먹은 사례였다. 일본은 "나이 어린 여자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보국대'로 보냈고 종군위안부는 나이 든 여자들이 대상이었으므로 '근로보국대'와 '종군위안부'를 같이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둘을 합해서 '정신대'라고 하는 것이므로 종군위안부를 정신대라 칭하는 한국 언론의 무지"를 꼬집는다. 그러나 군수공장에 근로보국대로 보내겠다고 속이고 데려가 종군위안부 짓을 시킨 황 할머니의 경우를 일본은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
  
"평일날 한 20명, 공일날은 한 40명. 시일이 갈수록 더 많이 받아. 처녀들이 제대로 일어나겠어? 한 달도 못돼서 병이 옮는 거야. 무슨 병인지도 모르지. 성병인지 무슨 병인지 몰라. 그냥 붓고 아프니까. 606호를 놓더라고. 열일곱 살 처녀가 애를 배니까 606호를 놓더라고. 애가 떨어지고 나니까 그 처녀 몸이 이렇게 붓는 거야. 찬데서 자고 먹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여자들 살지 못해. 그렇게 임신한 여자들 많아." 
".... 그 안에서 여자들끼리 대화는 할 수 있었나요?"
"못 해! 지껄이면 죽여! 도망가려고 궁리한다고. 지껄이면 죽여. 중국 여자들은 없었어. 모두 우리 한국 여자들이었어.  나 가자마자 들은 얘긴데, 자빠뜨려놓고 자궁에다 총을 쏘더래. 그러니까 여자가 탁 파열이 돼버리더래." 
"그 이야기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자세히."


"여자들이 말 안 듣잖아, 20여 명이 달려들어 울고불고 몰려들잖아. 그러니까 본보기로,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인다고 하면서, 먼저 있던 여자들이 보니까, 병이 들어 못 일어나게 생긴 여자더래. 그 여자를 골라서 자빠트려놓고 총을 팍 쏘더래."
"어디에다? 
"자궁에다! 그 뿐은 줄 알아? 말 안 듣는다고 칼로 가슴을 이렇게 그어서 지금도 깊게 패인 여자가 있는데, 저기 할머니는 다리 병신돼서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 말 안 듣는다고 다리를 잡아 찢은 거야. 그때 뒤 허리가 잘 못 돼가지고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녀. 지금도." 


"할머니가 그런 일을 겪었다는 걸 누구한테 이야기 해본 일 있나요?"
"못해요. 챙피해서. 누구한테 해? 이 동네에서도 아무도 몰라."
황 할머니는 귀국 후에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자신의 삶이 너무 억울해서 일본에 직접 건너가 저들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고 국내에서 보상운동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내가 죽도록 고생하고 신세가 이 지경이 됐는데 내가 왜 직접 보상을 안 타? 안 그래? 내가 본인인데. 장본인인 내가 타야 하는 거야." 

장본인! 내가 장본인인데 내가 받아야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장본인의 울분과 피해를 먼저 장본인의 입장에서 풀어야 한다는 해법을 황 할머니는 강조하는 것이었다.

강덕경 할머니 이야기 "군수공장 탈출했는데, 잡혀서 위안부로 만들어졌다"


강덕경 할머니는 얼굴이 곱고 단정했다. 말씀도 차분하고 교양미가 있었다. 강 할머니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다가 7개월 뒤에는 종군위안부가 됐다. 경기도 남양주군 비닐하우스 단지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진주 기타공립학교 고등과 1학년 때인 1944년 봄 같은 반 학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우리 일본인 선생님이 돈 벌 수 있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좋다고, 부산에서 150명이 연락선을 탔지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미군이 겁나서 그랬는지 저 멀리 떨어져서 일본 군함 두 척이 연락선 옆에서 따라가고 공중에 비행기가 두 대 따라가고요. 시모노세키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쭈욱 가서 도야마껭(도야마현)까지 갔지예. 비행기 만드는 공장인데 부품을 우리가 깎았어요. 거짓말 안보태고 양재기에 밥이 요만큼(손바닥을 반으로 오므리며) 나와요. 배가 고프니까 어떤 애는 밥알 하나씩 헤아려가며 먹는 애도 있고요 어떤 애는 아꼈다가 나중에 먹는다고 오시레(일본식 붙박이 벽장)에 갖다 놓는 애도 있고 그랬지요. 하도 배가 고프니까 어떤 애는 일하러 가는 중에 공장 철조망 밖에 자라난 풀을 독초인줄도 모르고 뜯어 먹다가 죽은 애도 있어요. 미친 애도 있는데 되게 미치니까 집으로 돌려보낸 애도 있어요."


할머니는 너무도 고향 생각이 간절해서 당시 유행했던 일본 노래에 자신이 직접 지은 가사를 붙여 진주에서 온 동무들에게 가르쳐주고 큰소리로 같이 부르며 울기도 했다. '아~, 산을 넘고 바다건너 멀리멀리 정신대에, 아득하게 떠오르는 반도의 어머님의 얼굴이 또 떠오르네~'   



▲강덕경할머니(1992년)



▲강덕경 할머니가 기거하던 물탱크(1992년)


"아무리 참아도 견딜 수가 없어서 7개월 뒤에 둘이서 밤에 도망을 나왔어예.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군인 추럭이 왔어예. 내 친구를 찾을 새도 없이 벌벌 떨고 있는데 빨간 별 세 개짜리가 타라고 해서 탔어예. 차에 타가지고 그 밤에 산으로 어디로 끌려 다녔지예. 야산 어디쯤에서 내 손을 잡더니 내리라고 해요. 내렸더니 저쪽 어디로 붙잡고 가더니... 거기서... 처음으로 당했지요...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당시 14~5세) 내가 그 일을 무서워 하니까 하루밤에 너댓명 씩만 오고 그랬어요."


일본인 선생에게 속아서 군수공장 근로보국대에 끌려갔다가 배가 고파 탈출한 열너댓 살의 어린 소녀는 밤중에 야산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길로 끌려가 종군위안부가 됐다는 것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감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있는 현지까지 찾아가야 하는 고통을 강 할머니는 당해야 했다. 


"누구누구 이름을 부르며 너희들은 담요를 가지고 따라오라 해요. 그리고는 저 산위로 데려가요. 거기 나가 있는 일본 놈들이 총을 옆에다 놓고 지랄들 하고 가고 그랬죠. 어떤 놈은 방공호 속에서 그 지랄하고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할머니는 5년 전 남양주의 그곳 비닐하우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관할 관청으로부터 이집마저 철거 대상이라는 통보를 받고 있다.


"사회계장님이 나오셔서 양로원에 가실 의향은 없으시냐고 묻대예. 지금까지 숨어살면서 내가 정신대 갔다 왔다는 이야기 아무한테 안했는데 거기 가서 다 드러나면 따돌림 받겠다는 생각이 들고, 비밀이 보장되겠어요, 그런데 가면... 그래서 아무 대답 안했어요. 거기 안 가려 해요" 

강 할머니는 누구든지 밭일이라도 시켜주기만 하면 그저 열심히 하겠노라고 말하며 쇠약하지만 고운 얼굴에 눈물을 머금었다. 


박 할머니 이야기 "그놈들이 인두로 등을 지졌다" 

1941년 당시 혼인신고까지 끝내놓은 박 할머니(가명)는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는 다섯 명의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끌려갔다. 그분은 얼굴을 가린다는 조건으로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심장이 뛰어요. 그 말만 하면 심장이 뛰어요. 어디로 갔나하면,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나가사키라고 하는 것 같아요. 거기서 남자 상대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잘 상대해줘라 그런 내용이지만 처음 겪는 처녀들이 그게 뭔 소린가 싶잖아요? 그런 뒤에 군인 트럭에 실었어요. 한 30명이 차를 타고 가는데 어딘지 몰랐지요. 다 당하고 나중에 나올 때 들어보니까 구마모토라 해요. 조그만 다다미방이 쭉 연결돼 있는데 여자들 하나씩 방방에 들어가래요. 군인 상대하러. 다들 놀래가지고, 이런 일이 어딨어요? 어느 아가씨가 도망을 치다가 붙잡혔어요. 붙잡아서 심하게 기합을 주니까 여자가 놀라 자빠져서 끝내 죽었지 뭐. 군인들이 우리들 도망가지 말라고 칼로 죽은 사람 유방을 도려내고 배를 가르고 몸을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창자가 막 나온거요. 우리들 보라고 그 창자를 이리저리 흔드는데, 이거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나요." 


더 이상 그 아비규환의 위안소에서 견딜 수 없었던 박 할머니도 탈출을 감행하다 잡혀 들어왔다. 그에게도 어김없이 참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끌고 들어와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허리에다 뭐를 치고, 내 등허리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따끈따끈해요 등허리가." 
"할머니 등 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요." 

그랬다. 할머니 등에 대여섯 군데나 불로 지진 자국이 나 있었다.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인두 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 박아무개할머니의 등에 남은 인두로 지진 흔적(1992)


"거꾸로 매달아놓고 인두로 지진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언제부터 군인들을 상대했어요?"
"그날 저녁부터요." 


잔인한 고문이 있던 그날 밤부터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박 할머니는 그때부터 4년여 동안 갇혀 살면서 위안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아비 모르는 아이를 두 번이나 낳았다. 두 아이는 두 살 터울이었다. 날 때마다 아기들을 '어떤 아줌마'가 데려가 키우며 일주일에 한번쯤 엄마를 보게 해주었다. 물론 해산하고 사흘 뒤부터는 다시 일본군을 받아야하는 비극적인 삶이었다. 어느 날 폭격을 맞았다. 일본군 다수가 죽거나 도주해서 한명도 볼 수 없었고 위안부 여성들도 볼 수 없었다. 밟히는 시신들 위로 걸어 들어가 지하실에 있다는 아이들을 찾았다. 기적적으로 아이들은 거기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기구한 삶, 기구한 아이들과 기구한 엄마였다. 종전이 되었다. 엄마는 천신만고 끝에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박 할머니는 그 후 다행히 혼인을 할 수 있었고 아들을 낳았으며 효성 깊은 며느리를 얻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그 모진 세월 그 억울한 삶을 듣고 시어머니를 설득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용기 있게 관계기관을 찾아가 시어머니의 삶을 죄다 이야기했다. 속리산 부근 기념품가게 그 할머니와 그 며느리 이야기다.


할머니 한분 한분과의 인터뷰는 서너 시간씩 이어졌다. 마지못해 말을 시작하던 할머니들은 점차 울분이 치솟아 질문 없어도 말씀을 이어갔다. 다만 프로그램의 길이가 정해져 있으므로 말씀을 다 소화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도대체 이 천인공노할 더럽고 잔인한 만행이 어떤 틀과 흐름 위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가. 그 전말과 만행의 현장을 정리해보자. 그것이 프로그램의 제2편 3편이었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일본군 위안부 사건의 전모 ⑥
남경대학살, 일본은 미친 군인들에 여자를 주기로 했다 


비극은 1937년에 싹텄다.  
러일전쟁 후 만주국을 세워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획책하던 일본은 1937년 7월7일 북경 남서부지방에서 중국군에 생트집을 잡아 노구교를 점령하면서(노구교사건)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이다. 


7월 말에 일본군은 총공격에 나서 그 싸움을 전면전으로 확대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에는 상해(上海)를 함락시켰으며 12월에는 마침내 당시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했다. 전쟁이 점차 장기전으로 발전하고 일본이 북경과 상해 사이의 영구주둔을 획책하자 조기에 고향으로 돌아갈 전망이 어두워진 일본 군인들은 전선마다 약탈과 강간을 일삼더니 남경을 점령하자 급기야 야수로 돌변하여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을 자행한다.  



▲남경대학살 당시 포로를 학살하는 일본군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채 계단에 내버려진 현지의 부녀자들


그들은 남경에서 12월 13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동안 30만 명 이상(시신만 20여 만 구 발견. 강에 던져지거나 매장된 시신까지 감안하면 3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음.)을 학살하였다고 전해진다. 길마다 시체가 즐비했고 여인들은 하체가 벗겨진 시체로 변해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으며 일본군 트럭들은 쓰레기 치우듯이 시체를 쓸어 담아 싣고 어디론가 분주히 이동하였다. 양민의 목을 일본도로 내리치는 군인, 포로의 눈을 가리고 군도로 가슴을 찌르는 군인, 꿇어앉힌 채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 사냥꾼처럼 사람의 머리채 몇 개를 손에 들고 희죽거리는 군인, 그것이 당시의 일본 군인이었다. 군율이 완전히 무너진 미쳐버린 군대였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군 수뇌부에게는 전투도 중요했지만 날뛰는 병사들을 다스리는 일이 당장 시급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전황은 물론 군대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국면을 전환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군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위안부문제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르포 작가 센다 가꾸오(千田夏光)씨는 증언했다. 


"남경대학살은 정신이상이 된 군대가 저지른 만행이었습니다. 남경으로 진격한 13만5000명의 군대라는 것은 혈기왕성한 20대의 일본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쳐서 저지른 참상이었던 것입니다. 북경 상해 항주를 잇는 삼각지대에서의 영구주둔을 획책한 일본군 수뇌부는 미쳐버린 군대를 시급히 진정시키고 치안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그들은 '20대의 남자들에게는 여자가 필요하다. 여자를 나누어주자'고 생각했습니다."


(남경대학살이 "정신이상"이 된 군인들이 "미쳐서" 저지른 일이라는 사건의 원인 분석과 관련된 주장은 '일본군'의 문제가 아니라 '군인들 개개인의 문제'로 해석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일본군이 어느 정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는지 여부 등은 아직까지도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취재 상황의 재현을 위해 센다 가쿠오 씨의 주장 자체를 그대로 옮긴다.) 


문제의 혈기왕성한 20대 일본 남자들이란 이미 섹스를 경험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일전쟁의 전쟁터가 넓어지자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들을 재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제대 군인이란 이미 고향에 돌아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성생활을 했었던 혈기왕성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쟁터에 다시 끌려왔다는 불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젊은 욕정을 발산할 수 없는 불만 등이 쌓이고 쌓여있는 장정들이었다. 그런 불만에 일반 병사들의 불안 심리가 가세하여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 잔인한 남경대학살이었던 것이다. 


"여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한 군부는 나누어 줄 여자로 우선 중국의 창녀들을 떠올렸으나 反日적개심이 가득찬 중국여자들이 스파이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성병이 만연되어 전력이 약화될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전력의 10퍼센트가 성병으로 손실됐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의 어용상인들을 불러 20억 엔의 임시군사비중 일부를 풀어주면서 외지에서 여자를 모집해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종군위안부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일본 군부(일본의 군부는 당시 정부의 최고 실력자였으므로, 일본 정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차원의 '기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 수뇌부의 명령을 받은 어용상인들은 상해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땅 북구주(北九州, 기타규슈)로 향했다. 당시 그곳은 전시 경제의 심장부로서 광산과 군수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많은 유곽('성매매 산업'에 종사한 자들을 일정한 구획 안에 모아 영업한 공인성매매업소)들이 성업하고 있었다. 공창과 사창을 합해서 30만 명가량의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용상인들은 이곳의 성매매 여성들을 중국으로 수송하려 했으나 여자들을 빼내면 장사 밑천을 잃게 되는 성매매업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용상인들이 눈을 돌린 곳은 탄광 지대였다. 인근에는 많은 탄광이 있었고 탄광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그 노동자들에게는 '순진하고 깨끗한' 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중국의 공장이나 식당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해준다고 속이며 탄광 노동자의 딸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탄광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그들에게는 순진한 딸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겠다는 효성 깊은 조선의 딸들이 취직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상인들의 덫에 걸려들었다. 그것이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 들어가는 단초였다. '자발적'이라는 일본의 우익들의 주장과 달리 그들은 '사기'를 쳐서 여성을 모았다. 
  
우리 취재팀이 찾아간 북구주 아카사카 탄광지대도 그런 곳이었다. 야하다제철소로 가는 석탄을 캐던 이 탄광지대에도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딸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만난 교포 황학성 노인은 당시의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약 150여 가구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그 딸들을 밥쟁이들이 빼내어 팔아먹었습니다. 상해나 대만의 공장에 취직시켜준다고 속였지요. 그렇지만 낮에는 식당일 하고 밤에는 몸을 판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본인들에게 몸 판다는 이야기는 안 했겠지만... 물론 집에 돌아온 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가 소화12년(1937년)에서 16년쯤이었죠. "
  
그들은 여자를 '군수품'으로 분류해 선실 바닥에 쑤셔 넣었다

북구주 탄광 지대에서 이런저런 감언이설로 중국에 실려간 여성들 중에 조선 여성이 태반이었다는 것은 그 뒤의 보고서에서 밝혀진다. 아무튼 이렇게 어용상인들이 끌어 모은 여성들을 중국에 최초로 실어 보낸 것은 남경대학살이 자행된 2주일 뒤였다. 급하게 명령하고 신속하게 추진된 종군위안부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일본군에는 '황군의 수송선에 여자는 태울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군마와 군견과 군비둘기 등 온갖 군수품은 다 실을 수 있어도 여자는 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군부는 어렵게 끌어 모은 여자들을 군마나 군견에 해당하는 군수품으로 분류해서 3단으로 나눈 선실의 맨 아래 칸에 쑤셔 넣었다. 그 위 칸에 병사들이 탔음은 물론이다.
 


▲군수품으로 선실하단에 실린 '위안부'들


1938년 1월2일. 북구주를 떠난 최초의 여성들 100여 명이 상해에 도착했다. 취직하러가는 길이라 여겨 한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조선 여성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소학교 교실에 끌려가 성병검진을 받았다. 이때 그들을 직접 검진했던 군의관이 내가 후쿠오까에서 그 딸을 만났던 아소 데스오(麻生徹男)였던 것이다. 성병검진대를 직접 고안해서 만들었다는 그 군의관. 그는 검진보고서 <화류병(성병)의 적극적 예방법>에서 이렇게 썼다.


"피검자는 반도인(조선인)이 80명이고 내지인(일본인)이 20명이었다. 반도인중에 성병의심이  가는 자는 극소수이나 내지인은 대부분 현재 급성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아소 데스오(麻生徹男)는 일본인의 대부분은 급성 성병환자인 반면 조선 여성 중에는 성병이 의심되는 자가 극소수라고 썼다. 일본 군부는 이들을 바탕으로 1월 8일 상해 근교에 양가택위안소(楊家宅慰安所)라는 위안소를 만든다. 목조바라크로 된 열개의 건물을 짓고 그 하나하나에 작은 방 열개씩 모두 100개의 방을 만들었다. 방 하나에 북구주에서 실려 온 여성 한 사람씩을 배정한 것이다. 위안소 안에는 동병참사령부(東兵站司令部)명의의 위안소 규정을 써 붙여 놓았다. 그 규정에는 이렇게 명시했다. 

'이 위안소에는 육군의 군인과 군속 이외에는 입장을 불허한다.' 
'위안소 입장자는 위안소 외출증을 소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물 앞 길모퉁이에는 버젓이 위안소의 위치를 알리는 팻말을 세웠다. 남경대학살이 자행된 지 20일 만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세계 최초로 군직영위안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양가택위안소, 중국



▲양가택위안소 간판, 중국



▲위안소 규정, 중국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조선 여자 사냥 ⑥
일본은, 위안부는 조선의 나이 어린 여성이 적합하다는 '근거'를 만들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선(戰線)은 갈수록 확장되었으며 자연히 '여성 요구'가 많아졌다. 이미 전선에 여성을 끌어들여 병사들에게 버릇을 들이기 시작한 군부의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 이 많은 여성들을 공급해올 것인가? 다시 아소 데스오(麻生徹男) 군의관의 보고서 <화류병(성병)의 적극적 예방법>을 보자. 아소 데스오는 보고서에서 '조선 여성 중에 성병 의심이 가는 자는 극소수이나 일본 여성은 대부분 급성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검진소견을 쓴 다음 '조선여성은 나이가 어리다'고 평가하면서 '전선으로 보내는 창부('위안부')는 나이 어린 자를 필요로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늘어나는 여성의 수요를 공급할 지역으로 조선땅을 지목하는 근거로 삼기에 충분한 결론이었다. 



▲군의관 아소 데스오의 보고서 중 '창부는 나이 어린 자를 필요로 한다'


어용상인들은 조선땅으로 몰려들었다. 상인들은 전쟁터에서 세탁부나 취사부로 취직시켜준다고 속이면서 조선의 여성들을 모집했다. 예상보다 성과가 부진하자 그들은 경찰의 힘을 빌려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선땅에서는 공권력이 동원되어 끌어내고 숨기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한국과 동남아지역에서 8년 동안 광범위하게 위안부 문제를 탐사했던 일본의 르포 작가 센다 가쿠오는 조선땅에서의 사례를 이렇게 증언했다. 


"경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산속에 숨어 있다가 호랑이에 물려 죽었다는 등 많은 이야기를 한국에서 들었습니다만 가장 비참한 이야기는 경기도 지방의 한 사례였지요. 어머니가 딸을 산골짜기에 숨겨놓고 '내가 밥을 날라다 줄 테니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 당부했는데, 어머니가 그만 경찰에 붙잡혔답니다. 조사받는 동안에 어머니는 병에 걸려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겨우 겨우 풀려나자마자 산속의 딸을 찾아 갔더니 딸은 이미 굶어 죽어 백골로 변해 있더라는 거죠."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두 나라 논쟁의 핵심은 일본 정부의 강제동원 여부에 있다. 이미 많은 피해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참혹한 비극을 겪었음을 증언하고 있고 상식적으로 그런 참혹한 전장 속으로 자원할 여성이 있을 수 없음이 자명한데도 일본정부는 정부 차원에서의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직접 개입한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되다


그런데, 일본 중앙대학교의 요시미(吉見義明) 교수는 1938-1939년 사이에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에 직접 관여한 문서를 발굴하고 이를 세상에 공개했다. <군위안소 종업부등 모집에 관한 건>(軍慰安所從業婦等 募集에 關한 件)이라는 서류다. 이 서류는 일본 육군성 부관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북지방면군에게 보내는 통첩안으로서 주무부서의 결재를 차례대로 거치고 대신의 전결로 차관이 결재한 일본정부의 문서다. 이 문서에는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관계지방 헌병과 경찰이 긴밀하게 협조해서 비밀리에 시행하라!'

명백히 육군성이라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모집의 시행 원칙을 지시한 명령이다. 문서를 발굴한 요시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안에서도 경찰과 군이 관계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더욱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민간업자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강제나 반강제모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헌병이나 경찰이 동행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죠."


그 추측에 부합하는 실제의 상황을 노청자 할머니가 증언했다. 노 할머니는 중국 태원 지방으로 끌려갔었다.  

"열일곱 살 때 댕기 땋고 들에 나가 일하는데 점심 무렵에 어머니가 점심은 안 가져 오시고 두 주먹 쥐고 뛰어오신단 말예요. 숨이 차서 말은 제대로 못하시면서 '도망가, 빨리 도망가! 처녀들 잡으러 왔단다...' 그러신단 말이죠. 새재 너머 고모네 집으로 도망가는데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꽉 붙잡혔어요. 일본군인과 헌병들 열 명이 넘었던 것 같아요.. 그 뒤에 보니까 길가에 세워둔 세대의 추럭(트럭) 속에서 이미 붙잡힌 여자들이 울고불고 생난리치고 있었지요. " 


또한 길림성으로 끌려갔던 황금주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여자들을 군용열차에 태우면서) 무슨 서류를 주고받고... 몇 명 보냈다, 몇 명 인수했다 그런 서류인가봐. 이장이 헌병에게 주고 뭔가를 헌병한테서 받고... 그리고 열차를 출발시켰지.“


이렇게 한반도에서 일본정부의 밀명을 받은 군경의 노골적인 강제동원이 자행됐던 것이다.

전쟁은 8년이나 지속되었다. 장기전에 지친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에게 '위안부'는 정말 군수품과 같은 존재였다. 전선이 확장되고 이동하면서 그들은 위안소를 따로 짓지 않고 민가를 빼앗아 위안소로 쓰기도 했다. 중국 한커우(漢口) 지방의 제6위안소가 그중 하나다. 제6위안소에는 일장기와 '황군 만세'라는 격문을 써 붙여놓고 그 밑에 메뉴판처럼 '위안부'의 이름을 달아놓았으며 위안소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위안소에 도착한 자들은 우선 위안권을 제출해야 하는데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사병의 위안권이 각각 달랐다. 요금도 물론 달랐다. 그들끼리 요금은 군표(軍標)를 사용했는데 군표는 전시의 현금이었다. 일부에서는 '위안부'에게 군표를 주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내가 만나 본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군표라는 것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요금을 지불한 자들은 콘돔을 제공받았는데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는 섬뜩한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고 그 콘돔은 세척해서 재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제6위안소, 중국


'짐승'들의 만행, 미쳐버린 군대의 군수품 

위안소의 방 앞에는 병사들이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여성 한사람이 하루에 20~30명, 휴일에는 40~50명을 상대했다 한다. 방마다 가녀린 여성들을 상대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만행이 저질러지는 것이었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의 증언 중에는 방송윤리규정상 도저히 소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런저런 것들을 빼내고 방송된 내용 중에서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시퍼런 군검으로 내 팬티를 확 찢어. 임신하면 606호로 유산시키고. 여성들이 울고불고 20여 명이 몰려드니까, 본보기로, 죽게 생긴 여자 하나를 골라 자빠드리고 자궁에다 총을 쏘더래. 그러니까 여자가 팍 파열돼버리더래. 그뿐인 줄 알아? 말 안 듣는다고 다리를 찢은 놈도 있는데!(황금주 할머니)” 

“탈출하던 여성이 잡혀와서 기합받다 죽었어요. 그 여자 유방을 칼로 도려내고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흔들고... 나도 도망치다 붙들려 거꾸로 매달려가지고... 등을 인두로 지져...(박아무개 할머니, 박 할머니는 등의 인두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놈들 옷도 안 벗어요. 서서 그냥... 하루에 30명도 그만 40명도 그만... 어떤 성질 급한 놈은 앞서 방에 들어간 놈이 빨리 안 나온다고 뛰어 들어가 그놈 등을 단도칼로 찔러 즉사시켰답디다. 또 어떤 여자가 임신을 하자 끌고 가서 태아를 꺼내어 죽였답디다.(노청자 할머니)”


아무리 전시 상황이고 미쳐버린 군대라 해도 너무도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일들의 증언이라서 혹여 격분해 있는 할머니들의 과장된 표현인가도 싶고 50여년 전의 옛일이라 다소 부풀려진 측면이 있겠다 싶기도 했으며 전쟁이란 모든 행위를 내포하는 집단적 히스테리라는 억지논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만나는 할머니마다 끔찍하고 잔인한 증언을 하며 그 증언들이 내가 그 몇 개월 전에 취재했던 징용자들의 증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점으로 보아 할머니들의 증언에 신뢰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나라 잃은 조선의 여성들은 그렇게 그 밀폐된 방에서 아소 데스오의 표현대로 인간이 아니라 욕정을 받아내는 '공동변소'이거나 미쳐버린 군대의 군수품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위안소 안 일본 군인들



▲콘돔, 일본군용.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는 섬뜩한 문구가 인쇄돼 있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그 섬의 박꽃 ⑦
일본군 40명에 위안부 1명 필요..."길에 있으면 무조건 끌고갔다"
일본은 1941년 6월, 중일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어가는 중에도 남만주 요동반도 일대에 주둔시킨 관동군의 특별대연습을 준비한다. 독소전쟁을 계기로 소련과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80여만 명의 대군이 동원되는 이 특별훈련에도 '위안부' 동원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전 전쟁터에 여성을 동원한 군부는 이제 훈련장에도 여성을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군이 있는 곳에 여성이 있다는 선례를 원칙화시킨 것인지 모른다. 책임장교 하라시는 조선총독부로 달려갔다. 이 상황을 르포 작가 센다 가쿠오는 설명했다.


"여자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관동군사령부에서 계산했더니 병사 40명에 위안부 1명이면 병사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수치가 나왔답니다. 최소한 2만 명의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하라시는 서울의 조선총독부로 달려가서 여자 2만 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작전개시일인 8월말까지는 채 20일도 남지 않아 시간이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령'이라는 법률을 시행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국가총동원령이란 1938년 4월에 공포한 전시 통제의 기본법으로 이른바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운영함'을 말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법 제4조 징용령을 적용하여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여성들을 동원할 것을 검토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센다 가쿠오의 설명,


"이때부터 국가총동원의 이름으로 위안부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늙고 어리고 못생긴 여자는 군수공장으로 보내고 나이 찬 여자를 위안부로 보내는 것이죠. 이것이 정신대였습니다."

다행히도 국가총동원령에 의한 징용령이 시행되기 직전에 관동군특별대연습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미 8000명의 여성들이 사냥되어 있었다.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서 지난 50년의 세월을 숨 죽이며 살아온 마음 여린 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길에 있으면 무조건 끌고 갔어요. 집집마다 딸이 열서너 살 되면 무조건 시집보내. 안 뺏길려고. 나는 열세 살에 도쿄 방직공장에 끌려갔어요. 거기서 열일곱 살 먹도록 일했는데 어느 날 열아홉 명 조선여자들을 오사카로 이동시켰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자기들끼리 '물모리 간다'고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위안부로 빼내는 거래요. 어린 여자들을 공장에서 일 시키며 키워가지고 나이차면 위안소로 빼내는 거죠. 나도 그렇게 오사카로 물모리 갔어요."


달동네 할머니는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빼돌려 결국 종군위안부로 끌어간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했던 황금주 할머니와 유사한 경우였다. 

중국 전선의 끝없는 소모전의 수렁에 빠진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여 미국과 연합군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대동아공영이라는 기치를 세우고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일대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제 전선은 중국은 물론이고 미대륙 서해안에서부터 남태평양일원(남양군도) 그리고 인도양의 미얀마까지로 넓어졌다. 더 많은 병력 더 많은 군수물자 그리고 더 많은 여자가 필요했다. 한반도는 물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여성들도 '위안부'가 됐다. 현지에 주재했던 유럽 여성들까지 납치되어 '위안부'가 됐다는 사례도 있다.


총알받이로도 썼나...사살당한 일본군복 입은 조선인 위안부
나는 괌과 사이판, 멀리 팔라우(괌의 남서쪽)와 트럭(괌의 남동쪽)섬,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서 그 비극의 현장을 촬영하고 당시를 살았던 원주민들을 만났다. 중국 전선에서는 그래도 거리의 근접성 때문에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양군도라는 머나먼 태평양 위에 떠있는 섬들에서는 조국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도 없었고 점점 치열해지는 전투 속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의 광기와 살기는 극도에 달하여 '위안부' 여성들을 징용 한인들과 함께 총알받이로 앞장세웠다는 증언도 있다. 


나주에 사는 어느 징용자는 팔라우섬에서 '위안부'여성으로 끌려온 고향 처녀를 만났다. 숙소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이따금씩 스칠 때마다 오빠동생 하며 짧은 위로를 나누었는데 얼마 후 그녀는 성병으로 죽었다고 증언하며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광양의 서 노인은 사이판 앞바다에서 저쪽 수송선에 다수의 여성들이 타고(2000~3000명이라 했으나 분명치 않다.) 매일 아침 갑판에 나와 체조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날 그 수송선이 기뢰에 맞아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했다. 그 여자들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주저 않고 "다 죽었겠지 뭐!"하고 대답했다.


팔라우 펠렐류섬에서는 광란의 일본군이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다 연합군 저격병에 사살되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일본군복을 입은 조선인 위안부였다. 어찌 그 참상들을 필설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알아내지 못한 비극은 또한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이름 석자 남기지도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린 조선여성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10만 명이라고도 하고 30만 명이라고도 한다. 데려가고 끌어가고 납치하고 동원해 갔으면서도 동원해간 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는 한 정확한 숫자를 알 길이 없다.

트럭(마이크로네시아 연방. 옛 이름 추크)섬은 일본군의 태평양공격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인근의 일본군 주둔지에 전략물자를 분배하고 병력도 배치했다. 물론 '위안부'도 여기에 집결했다가 섬으로 분산되었다. 원주민 기미오는 당시 예인선에서 일했다.


"한국 위안부여성들이 내리는 것을 몇 십 번이나 봤어요. 한번에 20여 명씩 내렸죠."

당시 트럭의 수도였던 두블란섬은 5만명의 일본해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그곳에 해군사령부 터가 남아있었다. 사령부 담장 바로 밑에 위안소터가 있었다. 원주민 나카무라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일본여성이나 오키나와 여성은 없었고 조선 여성만 50명 정도 있었어요. 어느 날 밤 8시경에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그 여성들 다 죽었죠."


팔라우 원주민의 아리랑 "매맞고 괴로울때마다 여인들이 부른 노래"
그 위안소터 옆에 우리 눈에 익은 우물이 있었다. 둥그런 콘크리트로 통둘레를 치고 그 옆에 서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이었다. 물은 마르고 터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 만든 거냐고 물으니 위안소 여자들이 쓰던 거라고 나카무라는 대답했다. 그 우물 주변에 넓고 힘없는 잎들이 눈에 띄었다. 그 끝에 수줍고 옹색하게 박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우리 고향 담장위에 피었던 그 박꽃이었다. 이 섬 다른 곳에도 이 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딱 여기에만 있는 꽃이라고 대답하며 자신도 들은 이야기지만 위안부 여성이 가져와 심은 거라고 말했다.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선땅 어디에 살던, 어떤 이름을 가진, 뉘 집 따님이 이 씨앗을 가져왔더란 말인가. 전쟁터인 줄 모르고 식당일 할 거라는 기대 속에 순진하게도 박을 심고 키워 쓰겠다며 고향의 박꽃씨를 가져다 심었더란 말인가.


원주민 마리꼬 노파는 팔라우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더듬거리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폭격으로 죽은 그 여인들한테서 배운 노래라면서. 그 여인들이 언제 그 노래를 했었느냐고 물으니 매 맞고 괴롭고 고향생각 날 때마다 불렀다고 대답했다. 그 여인들은 얼마나 자주 매 맞고 얼마나 자주 괴로워 얼마나 자주 아리랑을 불렀으면 이 머언 땅의 원주민이 50년 전에 들었던 남의 나라 민요를 아직까지 기억한단 말인가. 내가 다닌 남양군도의 이 섬, 저 섬마다 늙은 원주민들은 아리랑을 부를 줄 알았다. 그들도 그 노래를 위안부 징용자들에게서 들었던 노래라고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위안소 터, 위안소 터 옆의 우물, 우물가의 박꽃들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그곳은 1945년 개전 후 처음으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최초이자 최후의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 다마쿠스크 마을에는 길이 200미터의 천연동굴이 있다. 도무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컴컴한 동굴이라 휴대용 발전기를 돌리며 들어가야 했다. 좁은 입구를 지나자 넓은 공간이 있었다. 일본군 이타이연대 최후의 요새였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연합군에 쫓겨 패퇴를 거듭하면서 이타이연대는 이 동굴로 숨어 들었다. 1000명 가까운 병사와 2000명의 주민들과 같이. 길이 200미터의 동굴에 3000명이 숨어들어 최후의 항전과 피난을 했던 장소다. 동굴 속까지 동행했던 오키나와 국제대학 이시하라 마사이에 교수는 증언했다.


"그 3천명이 이 비좁고 컴컴한 동굴 속에서 넉 달 동안이나 버텼답니다. 식량이 없어 죽을 지경이었겠죠. 병사나 주민이 죽으면 동굴 속 저쪽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한사람씩 던졌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던 지옥이었다. 축축하고 컴컴하고 음습한 동굴 속에서 3000명이 함께 숨 쉬고 땀 흘리고 대소변을 같이 했다면 그 공기는 어떠했을까? 저쪽 끝에 달팽이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반대편은 동굴의 유일한 입구였다. 마사이에 교수가 펼쳐준 탐사지도에는 입구에 '조선인위안부'라고 적혀 있었다. 연합군이 쳐들어오거나 동굴 입구를 향해 총탄을 쏘아대면 맨 처음 죽는 사람은 '조선인위안부'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여성으로 총알을 막겠다는 계획이었다. 연합군은 동굴 밖에서 4개월을 기다리다가 총을 쏘는 대신 흙으로 입구를 막아버려 동굴 속의 3000명 모두를 질식시켰다고 한다.


종전 후 어느 날 오키나와 홍등가에서 어느 벌거벗은 여인 하나가 큰 길을 갈팡질팡 뛰어다니며'나는 조선인이다!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외쳐댔다 한다. 임질, 매독균이 머릿속까지 침투해서 완전히 미쳐버린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