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역사 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일제에 희생된 이들의 절규가 아직 오늘의 역사로 남아 있다. 아직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피해 사례도 많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의해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조선인 피해자 문제 역시 해결이 난망하다. 이 문제가 현재진행형임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8.15 경축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문 대통령은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며 "그간 강제동원의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그 피해 규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일본과 시베리아, 남태평양 곳곳에 일제에 강제동원되어 혹사당하다 죽어간 조선인들의 원념이 서려있다. 이동석 다큐멘터리 PD(앤미디어 회장)는 1992년, 남태평양 곳곳에 남은 우리 선조들의 피해 사례를 파헤친 9부작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를 연출해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조선인들의 한을 재조명했다.
이 PD는 KBS와 MBC에서 수많은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특히 우리 다큐멘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 시리즈 <인간극장>을 처음 기획·제작해 휴먼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했다. 보통 사람의 삶을 다큐멘터리화한다는 발상은 혁신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졸속 합의함에 따라 일본과의 역사 문제는 다시금 두 나라 외교, 시민 문제에 첨예한 갈등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이 PD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용을 총 7차례에 걸쳐 재조명해, 잊혀서는 안 될 역사 문제를 환기하고자 한다. -프레시안 편집자
남태평양, 일본군복 입은 조선 여인의 기관총이 있었다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①] 일제의 '강제 동원', 다시 찾은 태평양 전선
다시 기록하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발자취
남태평양 여러 섬(남양군도)과 일본열도, 그리고 사할린을 헤집고 다닌 것은 1991년 가을부터였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선(戰線)을 추적하면 거기 아무도 모르는 중에 사라진 억울한 한민족의 영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르고, 세월의 흙더미를 파헤쳐 곧추 세워야 할 한민족의 통한사(痛恨史)가 이제나 저제나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에서였다.
가설은 맞았다. 그 전선에는 남의 전쟁에 끼여 들어가 억울한 희생을 당했기에 징용, 종군위안부, 학병 등으로 대분류해서 역사의 갈피에 끼워 넣고 접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분하고 슬픈 한민족의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 맞아 죽고 총 맞아 죽고 굶주려 죽고 성병으로 죽었다는 참혹한 사례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귀담아 듣고 집중해서 보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역사일 듯싶은 기막힌 증언들도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숱한 영혼들이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으며, 그때 그 비극을 막지 못했던 이 민족의 뼈저린 반성이 공명으로 울려왔다. 매 맞으면서도 굶주리면서도 그 현장 현장에 묻힌 한인의 흔적들이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개념 없는 숙제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1년6개월에 걸쳐 제작된 9부작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의 답사와 촬영현장에서 발굴한 생생하고 기구한 이야기들을 옮긴다. 시점은 1991년 가을부터 6개월 후까지다.***
펠렐리우의 신사산
"물 반(半) 고기 반입니다. 여기 보세요. 손바닥으로 떠 올리기만 해도 잡힐 것 같지 않습니까?"
모터보트를 운전하며 럭키 김(金)은 연신 자랑이었다. 경치가 좋아서 자랑, 공기가 맑아서 자랑, 그리고 고기가 많아서 자랑. 제 흥에 겨워 떠드는 그의 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이 연출가는 제가 몰두한 의문이 풀리기 전에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바다위에 그 가미카제 비행기는 떠 있을 것인가? 아직도 그 원주민 노인은 아리랑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 기관총은 아직도 신사산(神社山)에 남아 있을 것인가?
불과 닷새 동안의 답사기간에 섬과 섬, 섬을 돌아다니며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음에도 이 낙천적인 안내인은 애타는 내 속은 아랑곳없이 저 사는 곳 자랑에만 열을 올렸다. 가까스로 내 기분을 알아 차렸던지 그는 속력을 높여 분재 같은 섬과 섬 사이를 질주하며 신사산이 있다는 그 섬 펠렐리우(Peleliu)로 향했다. 탐험가 마젤란은 집어 삼킬 듯이 거칠고 사나운 대서양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칠레 남단해협을 지나게 되었다. 마젤란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지금껏 지나온 대서양과는 달리 잔잔하고 태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절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아, 태평한 바다!" 그래서 그 바다는 太平洋(Pacific Ocean)이 되었고 그 해협은 마젤란해협이 되었다. 정말 태평양은 태평하고 태평한 바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 마젤란의 감탄은 착각으로 입증되었다. 천둥 번개보다 무섭고 격렬한 20세기의 집단 히스테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면서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더 거세게 출렁거렸다.
남양군도(南太平洋)의 이 섬나라 팔라우(필리핀 동남방, 괌 서남방)에도 전쟁의 광풍은 무섭게 몰아쳤다. 일본군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있던 팔라우에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연합군과 일본 쌍방 간에 대 혈전이 전개되었다. 사흘 동안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한 연합군은 일주일치 탄약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 융단폭격으로 일본군을 궤멸시키고 마침내 이 섬나라를 점령했다.
유엔이 지정한 세계적인 청정지역 팔라우에는 그런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종전 50년이 가까워진 취재 당시까지도 곳곳에 전쟁의 흔적과 상처가 즐비했다. 포탄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일본군 지휘소 건물들이 정글 속에 방치되어 있었고 쌍방의 탱크와 기관총들은 아무데서나 눈에 띄었다. 섬 섬 섬마다 동굴 속에는 일본군의 기다란 대공포가 바다를 향해 설치되어 있었고, 바다 속 산호초위에는 일본군 가미카제 비행기가 물위에 떠 있었다. 이따금씩 정글에서는 해골과 갈비뼈, 등뼈가 발견되었으며 늙은 원주민들은 일본군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였다.
나는 그 속에서 한국인들이 머무른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동굴을 파고 대공포를 설치한 현장, 모래 대신 산호초를 빻아 활주로를 만든 정글속의 비행장, 포탄을 피해가며 등짐을 날라 건설했다는 다리, 음습한 동굴 속에 위치했었다는 종군위안소 현장…. 그런 중에 정글 속에 있는 신사산(神社山) 위에서 저 혼자 기관총을 들고 눈 아래 연합군에게 미친 듯이 총격을 가하다가 비참하게 사살 당했다는 일본군 조선 여인의 기관총이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는 원주민의 증언을 들었다. 그곳은 이 나라 300여개의 섬 중에 끝에서 두 번째 섬 펠렐리우였다. 나와 안내인 럭키 김은 그 현장으로 배를 몰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팔라우 정글 속에 방치된 옛 일본군 지휘본부.
▲ 정글 속의 옛 일본군 중화기.
▲ 옛 일본군 전차.
불과 40여 년 전에 벌어진 손에 잡힐 듯한 실화(實話)를 여기 와서 처음으로 듣게 된 다큐멘터리 PD에게 그것은 정말 피가 거꾸로 흐를 만한 이야기였다. 그 산위에 정말 그녀가 쏘아댔던 기관총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 비극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 하나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팔라우 바다에 물이 半 이고 물고기가 半인지, 아니 물고기가 물보다 더 많다고 야합을 해줘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었다.
"저기 잠깐 내려서 한사람 태우고 들어가야 합니다. 정글이 무성해서 우리끼리만 들어가면 길을 잃습니다. 엄청 큰 도마뱀도 위험하고요."
펠렐리우섬 한켠에 보트를 대었다. 저쪽 얕은 바다에서 원주민 대여섯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고기를 잡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한 사나이가 눈 위에 두 손을 펴서 햇빛을 차단하고 바다를 응시했다. 잠시 뒤 그가 손가락으로 바다 한켠을 가리키자 모두들 그 쪽으로 달려가 기다란 그물망을 쳤다. 다시 손가락신호가 떨어지자 일행은 잽싸게 물을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며 그물망 쪽으로 고기를 몰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던 그 모습과 같았다. 팔뚝만 한 열대어들이 그물망에 목이 걸린 채 바둥댔다. 그들은 바둥대는 열대어들을 한 마리 씩 움켜쥐고 힘차게 목을 깨물었다 놓곤 했다.
"사자가 동물을 사냥할 때처럼 목을 물어뜯어야 물고기가 힘을 못 쓴답니다. 그냥 두면 힘이 센 물고기들이 그물을 뚫고 빠져나갈 수가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신호를 보냈으니까 저기 저 사람 곧 올 것입니다."
얼마 후 그가 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땅딸막하고 콧수염이 성성한 원주민이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엷은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이 먼 섬까지 들어오셨습니까?"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느 한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한국말이었다. 옆에서 럭키 김이 깔깔대고 웃었다.
"이사람 한국사람이에요. 원주민하고 똑같죠?"
"정말입니까? 아니 김형, 사람을 이렇게 놀리십니까? 기다리는 동안에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고요.”
"이 PD님의 눈썰미를 본 거지요. 자, 얘기는 차츰 나누시고 어서 떠납시다. 다들 보트에 오르세요."
김정곤 씨를 그렇게 만났다. 그때가 1991년이었고 그가 원주민으로 산지 14년째였다. 우리는 서둘러서 보트에 올랐다. 서둘러야 할 이유를 김정곤 씨는 설명했다.
"여긴 만조 때가 되면 모기가 억수로 많습니다. 한국 같은 그런 모기가 아니라 하루살이 있죠? 그만한 놈들인데 물리면 잠을 못잡니다. 그동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만조가 가까워지면 점점 모여들어서 바닷가나 늪지대 숲속 같은 곳을 새까맣게 덮습니다. 저녁에 더 심하죠. 그놈들 덤비기 전에 빨리 그 산에 올라갔다 오는 게 좋습니다."
태평양전쟁 자료필름에는 남양군도의 일본군이 모자에 방충망을 달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연합군이 미세한 모기를 배양하여 일본군이 주둔한 남양군도에 살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김정곤 씨가 설명한 모기가 바로 그 모기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섬을 오른쪽으로 돌아 이 섬 유일한 선착장에 배를 대었다. 그곳에 김 씨의 트럭이 있었다. 바삭바삭 낡고 작은 짐차였다. 김 씨의 차는 무성한 잎을 스치며 좁다란 길을 따라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일본군의 진지가 보였고, 거미줄과 넝쿨이 뒤섞여 팔랑거리는 일본군 지휘부 건물이 유령처럼 거무튀튀하게 서 있었다. 이따금씩 대공포와 전차들이 세월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아직도 전쟁의 포염이 식지 않은 느낌이었다. 무표정한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그 전장(戰場)에 왔다는 임장감(臨場感)으로 긴장했고 내 눈은 분주했다.
정글 속에 활주로가 있었다. 모래대신 산호를 찧고 다져서 만든 작은 활주로였다. 일본군이 그들의 전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도록 건설한 것이었다. 김 씨의 차는 활주로를 달렸다. 활주로 저 끝에, 작은 산이 보였다. 신사산(神社山)이었다. 일본의 神社가 있었다는 산, 그녀가 총 맞아 죽었다는 산. 그녀가 쏘아댄 그 기관총이 있다는 산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 펠렐류섬 정글과 활주로. 반대편 끝에 신사산(神社山)이 있다.
▲ 신사산(神社山)의 일본 神社.
펠렐리우 섬의 조선 여인, 일본군의 '성노예'였다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②] 정글을 지키는 기관총 한 대
조선 여인과 기관총
신사산(神社山)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단숨에 오를 수 있어 보였으나 정글이 무성했고, 이따금씩 팔뚝만한 도마뱀들이 어기적어기적 기어 다니며 걸음을 가로막곤 했다. 해는 아직 수평선위에 떠 있었다.
정말, 거기에 기관총이 있었다. 40여 년 전의 그 기관총이었다. 개머리판은 떨어져 나가 없었고 총구는 붉게 녹슬어 막혀 있었으며, 가늠자도 방아쇠도 붙어있지 않았다. 녹슨 기관총은 살점 떨어져 나간 시신처럼 총신만 앙상하게 콘크리트에 부착되어 전쟁기념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제는 무력이나 위력을 상실한 늙은 쇠붙이에 불과했다.
그 날 이 신사산에서 일본군은 최후를 맞았다. 섬 중앙에 자그맣게 솟은 이 산봉우리에서 한 병사의 처절한 절규가 들렸다. 동물의 울음소린지 사람의 울부짖음인지 모를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병사는 전방위(全方位)로 아무렇게나 기관총을 갈겨댔다. 광란의 총탄은 바위에 맞아 튀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허공을 가르며 하늘로 치솟기를 계속하다 잠시 숨을 죽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산 밑에 은폐해있던 연합군 저격병이 그를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병사의 몸에 박히자 병사는 그 자리에서 깡충 솟구치다가 풀썩 쓰러져 죽었다.
여자였다.
군복을 입은 여자였다.
일본군복을 입은 한국여자였다.
그녀는 종군위안부였다.
이 섬나라에 끌려와 이 섬 저 섬 일본군 병사가 있는 섬으로 끌려 다니며 핏발이 선 전쟁터 사내들의 '위안부'가 된 이 한국인 여자는 일본군이 패하는 순간 망가진 몸, 잃어버린 자아, 찢어지고 헤쳐진 정신, 그리고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정조! 그런 혼돈에 빠져 미쳐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나라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자신의 고향이 어디 있는지, 자신의 부모가 안녕하신지도 알 수 없는 남양군도의 산위에서 이름 석 자 남기지도 못하고 들짐승처럼 죽어버렸다. 그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김 씨였는지도 이 씨였는지도 박 씨였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뿐 시간은, 역사는, 그리고 조국은 그녀를 알지도 않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조선 여인의 마지막 울부짖음을 대신해줬던 무기- 녹슨 기관총은 이제 격렬했던 현장을 저 혼자 지키며 저 아래 침묵의 정글을 무심히 겨누고 있었다.
나는 행여 그 조선 여인이 입었다는 일본군복이나 그녀가 흘렸을 핏자국을 찾으려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에 있었던 그 비극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 총을 왜 여기에 전시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안내판도 없었고, 그 총을 마지막으로 쏜 사람이 조선인 종군위안부였다는 설명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쇳덩어리가 녹슬고 그 위에 또 녹이 슬다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만큼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 저편에서 하루에 40~50명씩 性에 굶주린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가 드디어는 발광해서 기관총을 난사하다 사살된 이름 없는 조선인 처녀 이야기 따위는 이곳 사람들에게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그 처녀의 시신을 누군들 수습했을 리 없고, 그러므로 처녀의 원혼은 아직도 이 산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갈겨댄 기관총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자리에 선 한국인 PD의 감회와는 아무 상관없이 잊힌 전쟁의 기념물로만 장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 펠렐리우 신사산 위의 기관총(1991). 본문의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난사했다는 그 총.
"김형! 여기에는 이 기관총을 마지막으로 쏜 사람이 종군위안부였다든가 한국여자였다 라는 기록이 전혀 없는데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게 원주민들의 증언인데요, 그때 원주민들이 도대체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를 어떻게 알아서 한국 여자라고 말했겠습니까? 한국사람 또는 한국과 관련 있는 사람을 이미 만나고 있었거나, 조금이라도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여기 끌려왔던 한국인 징용자나 한국 여자들의 모습이나 고통을 눈으로 보고 마주치고 했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그때 총 맞아 죽은 여자가 한국여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겠죠. 터무니없이 그냥 한국여자라고 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원주민들이 한국인 징용자나 종군위안부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이죠. 여러 사람들한테서 들었죠."
"어떤 이야기들이었습니까?"
"아리랑요. 내 딸 이름이 아리랑이거든요. 딸을 낳고 이름을 뭐라 할까 생각하다가 아리랑이라고 짓자 대뜸 어느 노인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우리 민요 아리랑 말입니까?"
"맞습니다. 더듬거리긴 했지만 발음이나 멜로디가 비교적 정확했어요!"
"어떻게 그 노래를 배웠답디까?"
"이 PD님 내려가서 이야기하시죠. 해가 넘어갑니다. 모기가 모여 들어요. 저런! 벌써 볼에 몇 대 맞으셨네요."
김정곤 씨는 일행을 재촉하며 앞장서서 산을 내려갔다. 김 씨는 모기가 앉은 팔뚝을 툭툭 때리며 걸었다. 나에게도 볼뿐이 아니라 벌써 손등 팔뚝 정강이에 모기가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조선 처녀의 억울한 영혼이 떠돌고 있을지 모르는 그 봉우리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느덧 새로운 화두가 커져가고 있었다. 원주민노인은 한국의 아리랑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게 되었을까….
산을 내려오자 김 씨는 차에서 식칼처럼 생긴 크고 날카로운 칼을 꺼내들고 야자나무 밑을 두리번거렸다. 나무 밑에 떨어져있는 머리통만한 야자열매를 찾아 들더니, 그 윗부분을 좌우로 한 번씩 툭툭 쳐내고 내 앞에 내밀었다.
"마시세요. 갈증이 나셨을 겁니다. 이걸 마시면 갈증 없어집니다. 하나는 아셔야 합니다. 이걸 마시는 날에는 어찌 알았는지 모기가 더욱 덤벼듭니다. 아마 무슨 체취를 만들어내는 모양입니다."
그 야자수액을 마셨다. 담백하면서도 약간은 거북스럽고 달달한 것 같으나 밋밋한 맛이었다. 야자열매의 안벽을 둘러싼 하얀색의 두터운 코코넛. 비스킷 같은 쿠키를 만드는 코코넛. 전쟁 말기에 일본군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이 코코넛마저 군량으로 지정해, 야자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 오를 때 봤던 팔뚝만한 또 다른 도마뱀이 어기적거리며 지나다녔고, 몇 미터 저쪽의 야자나무 밑에서 두꺼비만한 붉은 색의 게가 기어가고 있었다. 코코넛크랩이라 불리는 정글 게였다.
"저 게에게 물리면 팔뚝이고 정강이고 그대로 잘립니다. 이 단단한 야자열매도 잘라내고 수액을 빨아 먹어요."
김정곤 씨의 집은 이 섬 펠렐리우의 주택가에 있었다. 펠렐리우는 팔라우 300개의 섬 중 아래에서 두 번째 섬이다. 주택가라고는 하지만 선착장에서 시작되는 기다란 신작로 양편에 원주민의 집 30여 채가 드문드문 자리한 주거지역으로, 우리가 당도한 저녁시간에는 사람을 볼 수가 없는 조용한 어촌이었다. 주택가 한쪽 끝자락 두 번째가 김 씨의 집이었다. 대부분의 원주민 집들이 그런 것처럼 김 씨의 집도 곧게 뻗은 야자나무아래 공사장 함바처럼 지은 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원주민들은 어느 한 곳 어느 한 사람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영토'를 멋있게 꾸미는 일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로 남양군도 사람들이란 해지면 들어가고 먹으면 잠드는 사람들이라 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파파야를 따먹거나, 바다에 나가 물고기 몇 마리 잡아오면 그만이었다. 외지사람들에게는 배타적 성향이 강하고 밤눈이 밝아 한밤에도 외지인들의 차량을 알아보고 돌팔매질을 한다는 사람들이었다. 김 씨는 그런 땅에서 그들과 더불어 14년째 살고 있었다. 한국인이란 배타고 한 시간 쯤 떨어진 코로르(Koror)라는 수도섬에 통틀어서 일곱 세대가 살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이 몇입니까?"
"저기 저 사람이 제 아냅니다. 지금 만삭이라 움직이지 못해요. 그 옆의 노인네가 장모님이죠. 그리고 이 녀석이 내 딸 아리랑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쯤 되려나요? 엄마 옆에 붙어있는 저 녀석이 둘째입니다. 아들이지요."
안방이라 할까, 조금은 넓은 방에 김 씨보다 열살은 젊어 보이는 원주민 부인이 만삭의 몸으로 누워 있었다. 딸 아리랑은 얼굴이 갸름하고 윤곽이 뚜렷해서 영리해 보였다. 아빠보다는 엄마에 가까운 까무잡잡한 피부였지만 어쩐지 엄마를 닮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시장하실 텐데 잠깐만 기다리시죠. 이곳 음식은 드시기 거북할 것이고 라면이라도 끓여 보겠습니다. 형님, 김치 가져왔다고 하셨죠?"
럭키 김이 김치통을 내놓았다. 서울에서 내가 가지고 온 고춧가루를 럭키 김의 부인이 이곳 배추와 버무려서 담근 김치였다. 더운 지방이라 어제 담근 김치는 벌써 맛나게 익었다. 일을 돕는다고 나는 김치통의 뚜껑을 열었다. 냄새를 맡았던지 갑자기 어디선가 왕파리들이 날아와 김치통 위에서 윙윙거렸다. "뚜껑을 얼른 닫으세요." 럭키 김이 말하며 다가왔다. 그리곤 슬그머니 뚜껑 한쪽을 열어 젓가락으로 김치조각 몇 개를 집어내더니, 천천히 십여 미터 저쪽으로 걸어갔다. 왕파리들이 럭키 김을 따라갔고, 이어서 근방의 파리들도 모여 들며 럭키 김을 따랐다. 럭키 김은 풀 속에 김치를 던졌다. 그러자 파리들이 그 김치에 문자 그대로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 바글거렸다. "여기선 하나하나 경험으로 배우죠." 럭키 김이 말했다. 그렇게 파리 떼를 소개한 우리는 느긋하게 이 섬나라까지 침투한 일본라면에 김치를 넣고 대충 저녁을 때웠다.
울부짖은 '짐승인간' "난 조선 사람입니다"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③] 짐승인간
조선인이 만든 일제 비행장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뒤 나는 말을 이었다.
"아까 하다 만 이야기 계속합시다. 따님 이름을 아리랑이라고 짓자 동네 노인이 대뜸 아리랑을 부르더라고 했죠?"
"네, 맞습니다. 선착장 부근에 사는 노인인데 죽었습니다만, 아리랑을 잘 불렀어요. 하도 신기해서 그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죠."
"잠깐, 방금 그 노인 죽었다고 하셨습니까?"
"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쉽게들 죽어요 이곳 사람들은."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내심 그 노인을 만나면 이 섬나라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았던가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실망이네요. 그래,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다던가요?"
"징용 왔던 조선인들한테서 들었다더군요. 조선여자들한테서도 듣고요. 호칭을 '조선인, 조선인'이라고 불러서 어색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한국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 노래를 어느 상황에서 들었답디까?"
"글쎄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매 맞았을 때나 배고팠을 때 울면서 아리랑을 많이 불렀다더군요. 조선인들은 격리되어 있어서 원주민과 쉽게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매 맞는 모습이나 우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답니다."
"매 맞았을 때…. 배고팠을 때…."
가슴이 아려왔다. 사실을 취재하면서 냉정할 수만은 없는 순간들이 있다. 닷새 동안의 팔라우 답사는 가슴이 메고 아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죽었다는 그 원주민 노인이 아리랑을 자주 들었던 때는 1945년 이전일 테니까 최소한 40여 년 전(답사당시 기준)일 것이다. 정서가 다른 남의 나라 민요를 40년 넘도록 기억하고 부른다는 것은 그때 그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조선인들이 얼마나 자주 매를 맞거나 배고파 울었으면, 그리하여 얼마나 자주 아리랑을 불렀으면 원주민이 아직까지 그 민요를 기억하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팔라우에 오기 전 태평양전쟁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 검토하고, 창원 사천 광양 여수 등 남부 지방을 돌면서 징용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노인들을 많이 만나 증언을 들었다. 그 노인들의 머리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기억도 배고프고 매 맞은 아픈 기억들이었다.
그 중 몇 가지.
사이판 앞 티니안 섬에서는 이글거리는 땡볕아래서 조선인 징용자들이 비행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났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오줌을 받아 소중히 숨겨두곤 했다. 오줌을 마시면 갈증도 해소해주고 공복도 어느 정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징용자 한사람이 자신의 오줌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여자의 오줌을 훔쳐 마셨다. 이를 알아챈 여자가 내 오줌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며 대거리를 시작했다. 갑자기 공사장이 소란해졌다. 오줌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군 감시병이 이를 목격했다. 그날 밤 두 남녀는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았다.
▲ 모래 대신 산호를 빻고 다져서 건설한 일본군 비행장. 주로 조선인 징용자들이 동원되어 땡볕 아래에서 굶주려가며 노동했다.
일본군 수송선에 태워졌던 할아버지는 이렇게 증언했다. 남양군도로 향하는 수송선이 검푸른 바다위에서 연합군의 기뢰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아비규환이 돼버린 상황에서 남자는 겨우겨우 나뭇조각을 붙들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바다위에서는 더 이상의 공격도 없었고 반격도 없었다. 해가 뜨면 낮이요 해가 지면 밤일 뿐, 아무도 아무 생각도 없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밤바다가 무서웠고 바다위의 적막이 무서웠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습격할까 무서웠고 며칠째 계속되는 굶주림이 무서웠다. 몇 날이 지났을까? 나뭇조각 하나가 물 위에 둥둥 떠서 다가왔다. 그 위에 사람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죽어 있었다. 남자는 손을 뻗었다. 죽은 사람을 잡아 당겨,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가슴을 먹었다고 했다. 먹고 나니 짜더라고 했다. 얼마가 지나자 얼굴이 퉁퉁 붇더라고 했다. 노인은 멋쩍었던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신이 아니라 종전 후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어떤 남자의 이야기라고….
남양군도 어느 섬에서였다.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패색이 짙었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보급로가 끊겼다. 태평양에 형성된 일본군의 전선(戰線)에 균열이 생겼다. 군량(軍糧)이 떨어지자 그 섬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일본군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이 하나씩 없어졌다. 없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조선인들이었다. 일본군이 조선인 징용자를 하나씩 먹기 시작한 것이다. 섬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단결했다.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의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씩 사살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이 끝났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연합군에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출됐다.
남의 전쟁에 휘말려 그렇게 굶주림의 공포, 폭력의 공포, 죽음의 공포 앞에서 불렀던 아리랑. 그것은 단순히 한국인의 정서가 깃든 민요일 뿐만이 아니라, 그립고 안기고 싶고 평안을 얻고 싶은 조국이거나 '어머니'라는 이름의 다른 표현인지 모른다.
▲ 팔라우에는 섬마다 개미굴과 같은 천연동굴이 많다. 이런 동굴에 종군위안소가 있거나 연합군을 겨냥한 대포들이 위장 설치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공사에 조선인 징용자들이 투입되었다.
▲ 연합군 함대의 예상항로를 향해 설치된 동굴 속 일본군의 대포.
그런 생각에 빠져서 나는 잠시 침잠했다. 럭키 김이 분위기를 세우고 나섰다. 그는 한국의 모 방송사에서 근무하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 공기가 맑은 이 섬나라에 들어와서 식당과 관광업을 겸하고 있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코로르(Koror)에 가면 '아이고 다리'가 있습니다. 이쪽저쪽 작은 섬을 연결하는 연륙교인데 이름이 '아이고' 다리입니다. 한국인 징용자들이 건설했다는데 굶주려가면서 무거운 자재를 등에 지고 다니느라 '아이고! 아이고!' 매 맞고 배고파 울면서 '아이고! 아이고!' 그래서 훗날 원주민들이 이 다리 이름을 '아이고 다리'라고 했다더군요."
"나도 들은 이야기가 있네요. 전쟁이 끝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럭키 김의 말을 김정곤 씨가 받았다. 한국을 떠난 지 14년, 정말 가끔씩 한국인을 만날 때 한국말을 했을 뿐이라는 김 씨는 느릿느릿 고국의 단어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느릿느릿한 그의 말속에서 전쟁영화 같은 기막힌 사실이 풀려나왔다.
"아까 다녀온 신사산(神社山) 주변마을에서 집집마다 낮이고 밤이고 음식물이 없어지더랍니다. 농사지은 것도 없어지고요. 일하러 정글에 가지고 나간 점심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없어지는가 하면, 부엌에 둔 저녁거리가 없어지기도 하더랍니다. 마을사람들은 한 번 두 번 그런 일이 생길 때는 내 착각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여러 번 되풀이 될 때까지도 마을에 살기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라고 안쓰럽게들 해석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집 저집 돌아가면서 그런 일이 생겨나고 한 달 두 달 지속되자 섬주민 누군가가 도둑으로 변했다면서 민심이 차츰 흉흉해지기 시작했답니다."
그 일은 해를 넘겨 가면서 계속되었고 온 마을에 괴담(怪談)으로 퍼져나갔다. 사람이 아니라 맹수의 짓이라고도 했고,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했다. 소문은 섬 전체로 확산됐으며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드디어 마을사람들은 수호대를 만들어서 마을을 지키기로 결정하고 잠복근무에 돌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호대가 소리 없이 마을로 기어드는 한 마리 짐승의 형체를 발견했다. 수호대는 숨을 죽이며 짐승을 지켜보았다. 짐승은 살그머니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싶더니 잽싸게 빠져나와 산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수호대는 소리를 지르며 횃불을 켜고 짐승의 뒤를 쫓았다. 깊은 밤 정글 속에서 짐승과 수호대의 쫓고 쫓기는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정글에서 바닷가로, 바닷가에서 동굴로, 동굴에서 다시 정글로 이어지는 한밤의 도주와 추격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끝내 그 짐승은 그가 숨어 지냈던 개미굴 같은 동굴 속에서 생포되었다. 횃불에 비친 짐승은 쫓고 쫓기는 싸움에서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며 불안감에 휩싸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생포순간 수호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잡은 것은 짐승이 아니라 눈도 입도 머리도 짐승으로 변해버린 사람이었고 낡아서 갈기갈기 헤진 군복을 입은 일본군이었기 때문이다. 생포된 일본병사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낮에는 동굴 속에 숨고 밤에만 기어나와 목숨 걸고 식량도둑질에 나섰던 이 병사는 횃불 앞에서 퇴화돼버린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멋대로 자라 늘어지고 더럽혀진 머리카락, 그대로 짐승이라 할 입과 이빨, 갈라진 손등, 찢겨지고 떨어져나간 손톱,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더구나 동굴 속에 배인 표현할 수 없는 짙은 악취-.
"날이 밝자 마을은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었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얼마나 시달린 사람들입니까? 짐승이라고도 했고 괴물이라고도 했으니, 그 짐승이나 괴물을 보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 도둑을 단죄하러 섬사람들 거의 모두가 모여든 것이지요. '죽여라, 죽여야 한다.' 분위기 그대로라면 그는 틀림없이 죽을 사람이었겠지요. 그런데, 사람목숨 그게 아니더랍니다. 죽이라는 고함과 함성 속에서 이상한 현상이 생기더래요. 어느 구석에선가 작은 웅성거림이 일더니, 차츰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갔다는 겁니다."
저 사람 불쌍하다. 일본군으로부터 얼마나 혹독한 정신교육을 받았으면 몇 년 동안이나 혼자서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까?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마을에 내려왔을까? 저 사람도 우리와 같은 희생자인지 모른다. 그런 동정심이 군중 사이를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팔라우, 이 섬도 일본에 점령되어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설치되었었고 전쟁의 폭풍 그 핵 속으로 휩쓸려 조선과 같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 피해를 입은 곳이다. 일본말이 강제로 교육되었고 일본신사가 들어섰다. 동굴을 파고 비행장을 건설하고 사령부를 짓는 노역에 이들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동원 되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사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그는 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공포에 질려있던 그의 모습이 조금씩 침착해지고 잃어버린 단어들을 더듬더듬 연결하면서 일본말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죽여주십시오. 나는 더 살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 왔고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저 군복을 줘서 입었고, 총을 줘서 들었고, 배를 타라 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아아! 그는 조선 사람이었다. 일본 군인이 된 조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뜻 없이 군인이 되어 힘없이 끌려왔고, 이유 없이 패잔병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야밤에 음식을 훔쳐 먹는 정글속의 짐승이 된 조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항복하면 연합군이 너를 잔인하게 죽일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무서워서 여태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여러분의 음식과 곡식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저 죽고 싶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습니다. 나를 죽이십시오. 죽고 싶습니다."
20대 후반의 이 조선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빼앗긴 세월이 분하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는지, 짐승으로 변해버린 탈인격(脫人格)의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죽음을 눈앞에 둔 한 인간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그는 점점 격정적으로 울었다.
일본군 병사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가 그랬다. 요코이는 1972년 괌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최후의 일본군이었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알면서도 '살아서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하지 말라'는 일본군의 전진훈(戰陣訓)을 지키기 위해 28년 동안 대나무 동굴에서 혼자 숨어 지내온 '일본 군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발견된 뒤 일본으로 귀국하여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유사한 상황의 이 조선 사람은 고립무원의 남양군도에서 원주민에 둘러싸여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 괌 박물관에 전시된 일본군 병사 요코이의 사진.
▲ 요코이는 군대의 지급품은 '천황'이 하사한 것이라 해서 발견될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였다. 열매를 따먹거나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했으며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 요코이는 둥근 보름달이 한 번 뜨면 한 달, 열두 번 뜨면 일년이 지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윤달까지를 감안하여 자신이 28년 동안 대나무 동굴에 숨어지낸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의 죄인입니다. 나를 죽이시되 몇 년 뒤에 죽여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몇 년 동안 이 섬의 머슴이 되겠습니다. 이 섬 머슴으로 뼈 빠지게 일하여 내가 여러분께 끼친 피해를 이 몸뚱이로 다 갚고 죽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눈을 감을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이 된 뒤에 여러분의 손에 죽겠습니다. 나는 도망칠 방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 섬 밖으로 도망쳐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목숨을 애걸하는 말이 아니었다. 죽음을 모면하려는 흥정도 아니었다. 사람을 빼앗긴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원초적인 절규였다.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다. 다혈질이면서도 따뜻한 남양의 섬 주민들은 절규하는 그를 그 자리에서 단죄하지 않았다. 몇 날이 지나면서 어떤 이는 옷을 주고, 어떤 이는 목욕시켰으며, 또 어떤 이는 손톱이나 머리를 깎아주면서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섬의 머슴이 되게 해달라는 조선인의 소원은 결코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이 팔라우에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펠렐리우에서 배를 타고 수도 코로르(Koror)로 나가 다시 큰 배로 갈아타고 태풍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오래오래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곳,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50년대의 이 사실은 당시 한국의 일부 신문에 작게 보도 되었다 한다. 나는 귀국 후 백방으로 그 기사를 추적했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분이 귀국해서 건강하게 사셨다면 지금은 100세 가까운 노인으로 당신의 조국 땅에서 살고 계실 것이다. 오래오래 행복하시기를 빈다.)
남태평양 외딴 섬에서 낳은 딸 '아리랑'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④] 남양군도에 남은 삶
한국인의 딸 아리랑
"김형! 그 이야긴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원주민요. 그런데 그분도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렇지만 동굴 속의 그분이 용서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동분서주하면서 도와주고 여비도 대주고 했다는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코로르(Koror)에 살고 있어요. 한국계 원주민이죠."
"어? 코로르? 누구야 한국계라는 사람이…."
"참, 형님은 아시겠네요. 노부르 킹이라는 분."
"아, 노부르 킹! 그래 그분이 그랬단 말이야?"
목구멍에 침이 말랐다. 그분을 만나면 팔라우 동굴의 비극을 더욱 생생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아십니까 그분?"
"아다마다요. 팔라우에서 사업 크게 하는 분인데, 한국인 아버지에 원주민 어머니를 두신 분입니다. 60이 훨씬 넘었죠 지금."
"한국계 혼혈인? 여기서도 그럴 수 있습니까?"
"전시였으니까 무슨 일인들 없었겠습니까? "
"이번에 만날 수 있을까요? 꼭 만나야 합니다."
"그럼요. 내일 코로르로 돌아가면 당장에 뵙죠. 요즘 건강이 매우 안 좋다고는 하지만."
밤이 깊어졌다. 김정곤이 모기장을 폈다. 그 작은 모기들에 물린 내 종아리와 허벅지, 그리고 팔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럭키 김은 가져온 병뚜껑을 열고 몇 잔은 될 만한 양주를 내 허벅지와 팔뚝에 골고루 부었다. 소독도 되고 웬만큼 마취효과도 있다는 것이었다. 살갗이 심하게 따끔거리더니 이내 화끈대기 시작했다.
"김형, 지금 몇이요?"
"허허! 참으로 오랜만에 내 나이 이야기를 듣는 군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서른여덟인가 봅니다."
"어떤 인연으로 이 먼 나라 작은 섬으로 장가를 드셨수?"
"글쎄 말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받게 되니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저기…."
"이사람 뭘 더듬거리나? 남자들끼리 감출 게 뭐 있어? 신문에 날 일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 사람요, 연애 걸다 잡혔대요. 이 섬 원주민 처녀를 건드리다 붙잡혀서 나가지도 못하고 저도 원주민이 된 거죠. 하하."
"형님ㅡ!"
그때부터 우리는 모기장속에 웅크리고 앉아 조니워커를 마셔가며 김정곤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 사실은 PD님이 제 나이를 물으시니 울적해지네요.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나고요."
김정곤 씨는 목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의 딸 아리랑이 얼굴을 디밀었다. 밤 인사를 나누는 듯 부녀는 가볍게 한마디 씩을 주고받았고 아리랑은 돌아갔다.
"아 참, 저 딸아이 이름을 왜 아리랑이라고 지었습니까?"
"글쎄요. 나도 딱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 낳고 보니 그날부터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더군요. 부모님 생각 동생들 생각이 마구 뒤섞여서 울적하고 심란한 거예요. 애 이름은 지어야겠고, 고향에서는 이름을 아버님이 지어주실 텐데… 싶다가 퍼뜩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거예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래, 애 이름을 아리랑으로 하자!' 그렇게 된 겁니다. 나 사실 저놈 낳고 혼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김정곤의 눈이 젖었다. 네모난 얼굴에 쌍까풀진 눈, 구릿빛 피부, 검은 콧수염. 아끼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천천히 이어가는 김정곤의 감정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 원주민들과 고기를 잡는 김정곤 씨(하얀 티셔츠를 입고 그물을 메고 있는 이가 김정곤 씨).
▲ 김정곤 씨의 딸 아리랑.
"이 PD님, 한 번에 두 분의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십여 년 만에 처음입니다. 여기가 고향 같아요. 오늘밤에 고향형님들과 마주 앉았으니 십여 년 동안 벙어리같이 살아온 이야기들 다 쏟아놓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참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 너무 참으면 병 됩니다."
"병은 이미 깊어진 걸요! 허허허, 오늘 내가 왜 이러나…. 저는 사실 가난 때문에 이 섬나라 구석까지 흘러 들어온 사람입니다."
70년대 후반이었다. 김정곤이 군(軍)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가난한 집안형편은 여전했다. 부모님은 소작농이었다. 입대하기 전에도 가난한 집이요, 배고픈 가족이었다. 그가 제대한 때는 봄이었다. 지금 당장 부모님을 도와 농사에 나선다 해도 수확 때까지의 끼니가 걱정이었다. 봄철에 그가 돌아왔다는 것은 가을 수확 때까지 구부러진 부모님의 등에 양식을 축내는 입 하나 더 얹어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 입 하나라도 빨리 덜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양어선을 탔다. 빨리 집을 떠나야 부모님의 고통을 덜어 드린다는 것. 그것이 힘들고 험한 원양어선을 타는 단 한가지의 명백한 이유였다.
처음 보는 남태평양의 거친 바다위에서 고기떼와 씨름하기 몇 달 뒤, 어선은 정비를 위해서 3개월 예정으로 선박수리소가 있는 태평양의 어느 섬에 입항하였다. 그곳이 팔라우의 수도 코로르였다.
"고참 선원을 따라서 배에서 외출을 나와 팔라우 땅을 처음 밟았죠. 촌놈이 야자수도 처음보고 원주민도 처음 보니 모두가 신기했습니다. 그날 밤엔 외항선원을 위한 술집에서 신나게 한잔 마셨죠."
젊은 사람이 몇 달이나 바다위에 떠 있었으니 흙냄새 사람냄새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한두 번의 외출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차츰 혼자서 팔라우를 즐기기 시작했다. 경치를 즐기고 야자나무를 즐기고 원주민의 모습을 즐기고….
"이 사람, 그 얘긴 왜 자꾸만 빼놓는 거야? 외출 때마다 여자를 만났다면서."
"그 얘기 꼭 해야 됩니까?"
"아 그럼 이 긴긴 밤에 뭐하고 있으란 말이야? 당신 질질 짜는 모습이나 보라고?"
"형님도 싫죠? 그런 궁상맞은 이야기."
"아니야. 마음이 너무 짠해서 그래."
김정곤은 원주민 처녀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마다 처녀를 만났고, 외로웠던 그는 그 처녀와 정이 들었다. 다 좋았다. 그런데 김정곤은 그걸 몰랐다. 이 섬에선 원주민 여자가 외국인 남자를 가리키며 "저 남자 내 남자요!"하고 점찍으면 그 남자는 출국금지가 된다는 것을. 그는 열 번째 외출에서 그만 여자에게 점 찍혔다.
"생각해보니 돌아가 봤자 기다리는 것은 가난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는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이 섬에서 이 여자와 사는 것도 하나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선원수첩을 반납하고 이 나라 원주민 여자의 남자가 됐죠."
".............."
"벌써 십사 년 됐습니다. 가난만 면하면 살 줄 알았는데, 산다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더군요. 그때는 한국사람 하나도 없었지요. 아내는 여고 3학년생이었습니다. 그 어린 여학생을 아내라고 의지하고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온종일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어린 여고생이 집에 바로 돌아옵니까? 제 남자 눈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해질 때까지 신나게 친구들과 수다 떨고 놀다가 돌아오지요. 그렇게 돌아온 아내와는 말이라도 통하느냐? 천만에요. 아내와도 손짓 발짓으로 겨우 뜻이 통하는 우리는 서로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섬에서 이웃의 사랑받고 살겠습니까? 눈물로 말 배우고 고기잡이 배우고 눈물로 이웃의 이웃이 되었지요. 원주민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참고 아첨하고 보는 사람 없을 때는 얻어터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몸으로 때워 가면서 십사 년을 살았습니다."
침침한 백열등에 비치는 김정곤 씨의 얼굴이 슬퍼 보였고 단단해보이던 그의 어깨가 쓸쓸해보였다.
"그 아내가 애를 낳았습니다. 저 놈요! 아리랑이지요. 세상천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의 나라에 와서, 이 남양군도 섬나라까지 와서 핏덩이를 낳았는데 그래도 이것이 유일하게 내 것이요, 내 핏줄이라 생각하니 얼마나 고맙고 서럽던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거예요. 내 곁에 돌봐주실 부모님이 계십니까, 기뻐해 줄 형제가 있습니까? 달보고 울고, 파도소리 들으며 울고, 밤마다 바닷가에 나 앉아서 어머니! 아버지! 마구 소리치며 울었죠. 평생의 남자울음 그때 다 울었을 겁니다. 이 넓고 넓은 바닷가에 저 핏덩이 하나 있구나 생각하니 기쁘기도 했지만, 저걸 어떻게 기르나 겁나기도 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사무치는 그리움이라는 것이 뭔지 그때 알았습니다. 그때 눈물 흘려보고 오늘 처음인 것 같네요."
".............."
"제가 장남입니다. 불효막심한 놈이지요. 불쌍한 우리 부모님은 이 장남의 효도 한번 받아 보시지도 못하고 지금도 땡볕을 등에 지고 소작인 농사를 지으실 겁니다."
"................"
"이제 그만 진정하라고. 부모님께 죄송한 사람이 당신뿐이겠어? 철든 자식이면 다 그렇지. 분위기 바꾸자. 당신 말이야, 배에서 내려와 열 번째 데이트만에 붙잡혔다고 했는데 한 여자와 열 번째 데이트하고 잡힌 거야, 아니면 열 번째 여자에게 덜미를 잡힌 거야?"
"형님, 오늘 내 망신시킬 일 있습니까?"
다 쏟아놓고 마음이 후련해졌는지 김정곤 씨는 모처럼 웃었다. 밤이 더욱 깊었다. 우리는 편한 대로 누웠다. 내일은 모터보트로 이 섬 저 섬에 널린 태평양전쟁의 흔적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나는 누우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김형, 혹시 가족 중에 남양군도에 징용 다녀오신 분계십니까?"
"으음…. 우리 큰아버님께서 징용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아직 살아계실까요?"
"아마 살아계실 겁니다. 고향의 우리 집 바로 뒷집에 사셨는데요."
"그렇습니까? 오늘 꽤 피곤하네요. 그만 잘까요? 내일 일정이 많은데…."
그리고 우리는 잤다. 그러나 생각 없이 주고받은 이 간단한 대화가 내가 김정곤 씨를 이토록 장황하게 소개하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리라는 것을 당시는 그도 모르고 나도 몰랐다.
달팽이까지 잡아먹던 강제징용 조선인들 흔적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파도소리에 잠이 깼다. 야자나무 사이로 강렬한 아침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청정해역 팔라우의 아침은 상쾌했다. 파도소리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싫지 않았다. 모래밭에는 모래보다 산호가루가 더 많아 보였다. 바닷가엔 전쟁에 쓰였을 철 구조물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위로 하얗고 또 하얀 파도가 밀려들어오고, 그 파도너머로 잉크빛 바다가 출렁거렸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김정곤 씨의 집을 찍기 시작했다. 14년 동안 단 한 번도 고향에 가보지 못했다는 김정곤 씨의 얼굴, 더구나 앞으로도 고향을 찾을 가능성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김정곤 씨의 생활을 사진에라도 담아 그의 혈육들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바다를 찍고, 야자나무를 찍고, 그 밑의 김정곤 씨의 집을 찍고-.
김정곤 씨를 찍고, 김정곤 씨의 주름살을 찍고-.
그의 딸 아리랑의 순진한 눈매를 찍고-.
만삭이 된 원주민 부인과 장모를 찍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김정곤 씨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 찍는 이유를 말하면 그의 눈이 또다시 아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비행장에서 경비행기가 내리고 떴다. 비행장 활주로는 열대의 햇살로 이글이글 타올랐고 아지랑이 저편으로 일본의 그 신사(神社)가 섬뜩한 느낌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맨 아랫섬 앙가우르(Ngeaur)부터 시작하지요. 그 섬에도 노인들 많이 삽니다."
"이 PD님, 바다색깔이 왜 변하는지 아십니까? 하늘의 색깔이 바다에 그대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오늘같이 맑은 날은 하늘이 파라니까 바다도 파랗고요. 이러다가 흐려지면 바다도 잿빛이 되지요. 하늘색을 따라서 하루에도 일곱 번 바다색깔이 변한답니다."
럭키 김은 여전히 자랑을 늘어놓으며 맨 아랫섬 앙가우르를 향해 모터보트를 몰았다. 솜털 같은 구름이 몇 점 떠 있을 뿐, 하늘은 파랗고 바다는 투명했다. 움켜쥐었다가 흩뿌린 듯이 제멋대로 흩어진 작은 산호섬들이 천혜의 방파제가 되어 바다는 잔잔했다. 간간히 열대어가 떼를 지어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엔 낚시꾼, 저쪽엔 스쿠버들이 바다에 몰두해 있었다. 일만 아니라면 나는 남태평양 최고의 휴양지에 온 것이었다.
▲ 김정곤 씨와 원주민 아내. 김정곤 씨는 그물로 고기를 잡기도 하지만 바다낚시로 열대어를 건져올리기도 한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앙가우르섬의 수스 노인은 우리를 정글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 깊지 않은 정글 속에 일본군에게 격추된 미군전폭기 B-24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한 대, 두 대, 석 대…. 열대의 잡초들과 거미줄로 뒤엉킨 잔해는 유령의 집과 같이 괴괴한 모습으로 햇살을 받고 있었으며, 조종석에서는 도마뱀들이 혀를 날름거렸다. 엔진은 엔진대로, 부러진 날개는 날개대로 추락했던 그 순간의 참상을 보여주는 듯 선뜩거렸다. 어느 하나라도 들추기만 하면 이름 모를 어느 조종사의 유골과 마주할 것 같았다. 잔해 한 조각을 들추어 글자를 읽으려니 악명 높은 그 작은 모기들이 순식간에 덤벼들었다. 수스 노인은 재빨리 내 손을 끌어당기며 모기를 피해 도망치듯 앞장서서 현장을 빠져 나갔다.
마을로 들어가 노파를 만났다. 1917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팔라우에는 일본 이름을 가진 노인들이 많았다. 그 노파의 이름도 히데코였다.
"'아이고 잘났다, 아이고 잘났다.' 그런 말을 들었어요."
"어느 상황이었습니까?"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울면서…. 배고프다면서…."
"아이고 잘났다가 아니라 '아이고 죽겠다' 아니었습니까?"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어느 것이 맞는지 기억은 못하겠어요. 저 뒤 정글 속에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살았거든요. 그래서 자주 그들을 볼 수 있었죠."
우리는 서둘러서 수스 노인을 앞세우고 노파가 가르쳐준 정글로 들어갔다. 과연 그곳에 집단 거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넓게 깔려 있었고, 지붕으로 쓴 듯한 함석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히데코는 이곳에 삼사십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고 했다. 함석을 들추자 깨진 사기그릇들이 드러났다. 몇 개의 조각을 모아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다. 밥그릇이었다. 눈이 아파왔다. 누군지 모를 어떤 배고파하는 조선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그릇을 들고 밥줄에 서서 얼마나 비굴하게 먹을 것을 기다렸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이 이 그릇에 고였을까? 굶주림 앞에서 상실된 인격에는 얼마나 깊은 골이 새겨졌을까?
"먹을 것을 훔쳐 먹다 들키면 낮에는 아무소리 안하고 일 시켜요. 밤이 되면 경비대로 끌어가 몇 놈이 둘러서서 패 죽이죠. 말도 말아요. 그 비명소리….
광양의 서왈석 노인은 팔라우의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었다.
"도마뱀 잡아먹고 풀 뜯어 먹고, 풀 뜯어 먹다 독초 씹으면 그 자리에서 죽고…. 그렇게 2년을 살았죠. 맞아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죽고. 우리 광양에서 30~40명이 함께 갔는데, 살아온 사람은 나까지 열 명이 안돼요."
함석은 삭아서 비스킷처럼 바삭거렸다. 또 다른 함석을 들추었다. 달팽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엄지손가락보다도 더 커 보이는 달팽이들은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속살이 파내어진 껍질들이었다. 그곳은 깨진 그릇들이 발견된 곳과 거의 같은 위치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수스 노인에게 물었다.
"이 달팽이 껍질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습니까?"
"전쟁 때 배고픈 사람들이 삶아먹고 버린 껍질들입니다. 아침 무렵에 이 정글 속에는 달팽이들이 하얗게 깔렸죠. 조선인들은 그 달팽이들을 거의 씨가 마르도록 잡아 먹었답니다."
광양에서 만난 박노수 노인도 이렇게 증언했다.
"주먹 만해요 달팽이들이. 아침이 되면 정글 속에 그놈들이 하얗게 기어 나와 있습디다. 배고프다고 그놈들을 그냥 잡아먹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해요. 반드시 끓여 먹어야 하는데, 그놈들을 팔팔 끓여서 초즙에 찍어 먹으면 맛있어요. 나중에는 일본 놈들이 그것도 못 잡아먹게 했어요. 군량으로 쓴다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보급선이 끊겨 식량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군량으로 지정하여 허가 없이는 손대지 못하도록 하였다. 달팽이는 보고도 먹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달팽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수스 노인이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무엇으로 인해 침잠해 있는지 짐작하는 듯 했다. 그는 더듬더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도라지 도라지 배도라지. 신신 산쫀에 배도라지….' 그때는 내가 어렸을 때죠. 이곳에 조선인들이 삼사십 명가량 살았습니다. 참호를 파고 동굴을 파내어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대포를 떠메어다가 장치하고 그랬죠. 무기를 나르라면 무기를 나르고, 동굴을 파라하면 동굴을 파고, 비행장을 만들라면 비행장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 말입니다. 여기 사는 우리나 조선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조선인들은 무척 지치고 힘들어 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르 너무 간다. 몇몇이 모여 이런 노래들을 부르며 흐느끼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 조선인 징용자들의 참상을 증언하는 원주민 수스 노인.
나는 도라지와 아리랑을 그토록 슬프고 가슴 아리게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의 굽이를 몇이나 거슬러 올라 잊힌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집단적 흐느낌 같은 노래로 들렸다. 나는 수스 노인이 징용한인이기라도 한 듯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일행들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부서지지 않은 '가미카제' 비행기, 그리고 종군위안소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⑥] 가미카제 비행기
가미카제 전투기를 찾다
"그만 일어나시죠. 이러다간 오늘 일정에 차질 많겠습니다."
럭키 김의 조언에 밀려 우리는 앙가우르(Ngeaur)섬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옆으로 펠렐리우(Peleliu)섬을 지나고 안토니오 이노키섬(이 나라는 외국인에게도 섬을 파는데 수많은 무인도중의 하나를 왕년에 유명했던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가 구입해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을 지나며 럭키 김은 농담을 던졌다.
"이 PD님 내 계획이 뭔가 하면요, 이 낭만적인 섬나라에 무인도가 엄청 많으니까 그 중 몇 곳을 임대해서 한국의 신혼부부를 불러들이는 겁니다. 아침마다 섬 하나에 신혼부부 한 팀 씩을 옷을 홀랑 벗겨서 떨구어 주는 거죠. 아담과 이브가 되라고 떨구어 놓고 해 넘어 갈 무렵에 걷어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세계최고의 관광 상품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그는 명랑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모터보트는 점차 수도 코로르(Koror)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럭키 김은 먼 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고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 PD님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가미카제 비행기 아시죠?"
"네, 조종사가 기체와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서 스스로 폭발했다는 비행기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 비행기 한 대가 물위에 그대로 떠 있습니다. 물이 들어차면 잠겨서 볼 수가 없고 물 빠지면 드러나는데, 지금이 물 빠지는 시간입니다."
저 앞 200m쯤에 거뭇한 물체가 보였다. 가미카제(神風)비행기였다. 모터보트는 더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다. 앞은 산호밭이기 때문이었다. 산호밭이란 굳은 산호들이 얼음장처럼 바다위에 떠 있는 것이다. 떠있는 산호를 딛다가 산호가 깨져 그 밑으로 빠지면 얼음장 밑으로 빠지는 것처럼 다시는 세상구경을 할 수 없게 된다. 100m쯤 앞에서 보트는 멈췄다. 럭키 김은 목이 기다란 장화 두개를 꺼내었다. 산호밭에 들어갈 때 장화를 신지 않으면 산호가지에 종아리가 찢겨 바다 속에서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트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산호 밑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나는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보트에서 내려 혼자서 바다 속 산호밭 위에 섰다.
▲ 산호밭에 떠있는 일본군 가미카제 비행기(바닷물이 차있을 때와 빠져있을 때의 모습).
10여 미터를 더듬거리며 비행기 쪽으로 다가갔다. 산호밭은 삭은 기왓장처럼 바삭거렸다. 출렁이는 파도에 따라 몸이 앞뒤로 기우뚱거렸다. 다시 조심조심 몇 걸음을 더 걸었을 때 내디딘 오른발이 어디에도 닿지 않았음을 느꼈다. 내 몸이 무중력 상태에 떠있는 것 같았다. 왈칵 겁이 났다. 지금 산호밭 밑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나 아닐까?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바다 위라는 두려움, 나 혼자뿐이라는 공포. 칭칭 감긴 티셔츠와 청바지가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빠져 들어가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허벅지에 닿았던 수면이 목까지 차 올라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버둥대었다. 배위에서 소리치는 어떤 소리를 들은 듯 했으나 의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짠 바닷물이 목구멍을 넘었다. 어느 결에 나는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 손바닥에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날카롭고 따끔한 어느 것이 손바닥을 찌르는 듯 했다. 그 느낌은 거의 동시에 팔과 등줄기에 전해졌다.
어느 틈엔가 어떤 반동에 의해서 나는 물위에 떠올랐다. 하늘이 보였다. 바다가 수평으로 보였다. 내 몸이 중심을 되찾고 있었으며 무엇인가가 몸을 받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닷물은 다시 가슴팍에서 찰랑거렸다. '아하 그랬구나, 산호밭에도 계단이 있구나!' 물속에서 뜻밖에 한 계단쯤 낮게 내려 앉아있는 산호밭을 딛는 순간 나는 어리석게도 산호밭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당황했으며, 허우적대다가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그 짧은 몇십 초 사이에 나는 겁에 질려 찻잔속의 태풍처럼 필사적으로 버둥거렸고, 날카로운 산호에 찔려 손바닥과 팔에 금이 그어졌던 것이다. 계면쩍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비행기로 다가갔다. 보기가 민망했던지 그제야 럭키 김이 장화를 신고 내려와 비행기로 다가왔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우리에게 이 비행기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비행기와 조종사가 함께 처박히는 폭탄이 되어 미군의 군함을 향해서 돌진해 그대로 폭발해버리는 일본정신의 상징. 2000년대에 들어서 중동에서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는 자살특공대의 전형(典型). 영식비행기(零式飛行機)라 명명된 이 비행기는 1인용 전투기로서 조종장치들만 떨어져 나갔을 뿐, 원형 그대로 산호밭 위에 떠 있었다.
"김형! 이 비행기가 적의 군함에 내리 꽂힐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알죠. 일본정신, 또는 천황이 하사했다는 그 술 한 잔의 힘 아니겠습니까?"
"지금껏 그렇게들 생각했지요."
"그것 말고 또 있습니까?"
우리는 태평양전쟁의 낡은 필름 속에서 가미카제 비행기의 어린 조종사(소년병)들이 탑승 직전 '천황이 하사한' 한 잔의 술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입안에 홀짝 쏟아붓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천황이 하사한' 이 술 한잔에 용기백배해서 '천황을 향한' 충성심으로 애기(愛機)와 함께 적함에 부딪쳐 폭발해 버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천황이 하사'했다는 그 술 속에는 필로폰이 들어있었고, 그 환각효과로 인해 어린 조종사들이 육탄공격의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 당시 필로폰은 식민 치하의 조선에서 만들어졌으며, 그때 그 환각제를 만들었던 솜씨가 야행성으로 전수되어 한국이 필로폰 생산의 메카가 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비행기는 어찌된 일인지 이 산호밭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50년 세월동안 태평양의 집단 히스테리를 증거하고 있었다
▲ 출격하는 가미카제 비행기와 환송하는 소년병 조종사들. 이들은 포탄을 뚫고 비행기와 함께 미군 함대에 돌진하여 폭발한다.
다시 모터보트에 올랐다. 뱃길에 익숙한 럭키 김은 코로르로 가는 도중에 이 섬 저 섬 전쟁의 흔적과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 커다란 동굴 속에는 수백 개의 일본군 오일드럼통이 있었고, 굶주려가며 그 드럼통을 운반했던 사람들은 어김없이 조선의 징용자들이었다. 오일은 새어나가 드럼통은 녹슬고 매말랐으며 비스듬히 밀기만 해도 얇은 기왓장처럼 깨졌다.
- 어느 작은 무인도에는 당시 사람들이 개미굴같이 여러 갈래로 동굴을 파, 포신이 엄청나게 기다란 대포를 위장 설치해 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 작업도 조선인 징용자들이 해야만 했다.
- 햇빛 들어오지 않는 어느 음습한 동굴은 함석으로 칸을 막아놓고 인근 섬들에 배치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던 종군위안소가 있던 곳이었다. 섬마다 동굴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전쟁의 자국들이 굵고 선명히 찍혀 있었으며, 그 자국의 뒷면에는 이름마저 남기지 못한 조선인들의 피맺힌 울음이 응고되어 있었다.
▲ 수백 드럼의 일본군 오일탱크가 저장되어 있는 동굴.
▲ 동굴 속의 위안소.
▲ 위안소는 음습했고, 크고 작은 조개껍질들이 널려있었다.
수도 코로르에 도착했다. 나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노부르 킹, 동굴에서 잡힌 짐승 같은 조선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던 그 사람, 조선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를 가졌다는 그 사람. 나는 럭키 김을 졸라 노부르 킹의 집으로 갔다. 3층 건물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팔라우에서 그는 유수한 실업가였다. 그러나 나이 탓에 요즈음엔 시름시름 누워서 지낸다고 했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방문이 열렸다.
영화배우 이예춘이 나왔다.
아니 신영균 같았다.
아니, 아니, 김승호 같았다.
그렇게 잘 생긴 노부르 킹이었다.
▲ 로부르 킹.
남태평양 그 섬, 45%가 징용 한국인 혈통이었다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⑦·끝]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남태평양의 한국인
일제, 시간을 넘은 큰아버지와 조카의 연원
노부르 킹은 거구에 호남(豪男)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를 둔 60대 중반의 노부르 킹은 너그러운 눈매와 품 넓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팔라우에서 이름난 실업가였다. 나는 그에게서 꼭 궁금한 몇 가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펠렐리우섬의 동굴 속에서 잡혔던 그 조선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 노부르 킹의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등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파했다. 오래 앉아 있기가 힘겨워 보였고, 기억을 모아 옛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더욱 무리가 될 듯 했다.
다만 그는 한국의 다큐멘터리PD가 면담을 청한다 하니 어렵게 몸을 일으켜 거실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동경했고 한국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방에는 한국노래 가라오케가 설치되어 있으며, 차에는 한국노래 테이프가 얼마든지 있다고 럭키 김이 귀띔했다. 그 노부르 킹은 지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어 역사를 증언할 기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PD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토록 편찮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나에게 그 질문서를 주고 가시면 기력을 회복하시는 대로 내가 알아내서 연락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단순히 몸살입니까? 아니면 어떤 숙환입니까?"
"글쎄요, 그동안 괜찮게 활동하셨는데…."
취재(取材)란 때때로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만일 노부르 킹이 숙환을 앓고 있다면 오히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 것은 알아내고 일어나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부르 킹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보였다. 그는 한 점의 서류를 건네주고 아쉬운 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가 고국 조선 땅을 떠나올 때 품고 왔다는 호적등본이었다. 신분증이 따로 없었던 당시는 해외여행자들에게 호적등본을 지참하게 했다. 호적등본에 노부르 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럭키 김이 평소 그에게서 들은 대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김해 김(金)씨였고 이름은 금등(金登)이었다. 登(오를 등)은 일본어로 '노보리'라 발음하고 金은 '긴'이라 발음한다.
'노보리 긴'. 일제 치하에서 그의 이름은 그랬다. 金登은 당시 조선의 북쪽에서 붙들려온 징용자였다고 한다. 웬만한 지식인 그룹이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金登은 일본 패망 후 연합군에 의해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으나, 그를 실어 나를 곳은 조선의 남쪽이었다. 그곳은 그의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 땅이었다. 결국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원주민과 혼인하여 원주민으로 살다가 세상을 버렸다고 했다. 조선에서 지참해온 호적등본에 노부르 킹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조선 땅에서 이미 노부르 킹을 낳았고 팔라우로 끌려올 때 아들 노부르 킹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징용자가 아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징용자였는지 일본기관이나 남방관련 일본회사의 현지파견 임직원이었는지 그 신분이 애매하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동굴 속의 짐승이 돼 버렸던 그 조선인 청년의 이야기가 노부르 킹을 찾아온 핵심적인 이유였는데, 노부르 킹에게 그걸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튼 노부르 킹이 아버지를 잃고 그 섬 팔라우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살아남은 주민을 등록하면서 '노보리 긴'을 '노부르 킹'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적어 버렸다. 승자인 연합군은 그가 김 씨건 긴 씨건 킹 씨건 알바 아니었다. 등록 행위 자체를 마치는 게 중요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팔라우사람 '노부르 킹'이 됐다. 나라가 구심력을 잃었을 때 거센 역사의 바람에 날려 강남의 귤에서 강북의 탱자로 변해버린 잊힌 한국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분주히 남태평양 섬들을 돌아다니며 그곳 구천을 떠돌지 모르는 고혼(孤魂)들의 사연을 캐고 다녔다. 집터를 조성할 때 흙더미 속에서 발견해낸 이름 모를 유골이 혹시 조선의 징용자이거나 종군위안부일지 몰라 명절 때마다 태평양 절벽에서 한국을 향해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내주는 사이판 이장수 씨의 이야기, 온 섬 주민의 45%가 징용한인이 남긴 한국혈통이라는 티니안 섬의 슬픈 이야기…. 답사출장이었으므로 수사관이 취조파일을 만들 듯이 꼼꼼히 취재노트를 정리해놓고 귀국길에 올랐다. 부족한 것은 촬영 출장 시에 더욱 보충해야 한다는 메모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팔라우 답사사진들을 정리하는데 몇 장의 사진이 눈에 밟혔다. 김정곤 씨와 그의 딸 아리랑이었다. 애초의 생각대로 김정곤 씨의 고향집에 우송해주려고 사진을 봉투에 넣고 김정곤 씨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님댁 주소를 써서 우체통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편지로 부칠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전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뜬금없이 나를 압박했다. 다음날 나는 떠밀리듯이 경상남도 사천의 아버님댁 농가로 차를 몰았다.
김정곤 씨의 부모님을 만나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부모님은 중심을 잃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큰아들의 소식과 사진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묻고 대답하고 눈물 짓고 또 묻기를 한 시간여. 나는 슬프고 무거운 그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냥 물었다.
"큰아버님이 계시다는데 어디 사십니까?"
"바로 뒷집입니다."
"가면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라지요."
내외분과 함께 뒷집 큰아버님댁으로 올라갔다. 뒷산에서 칠십 노인 한분이 나뭇단을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큰아버님이었다. 다리를 절었다. 모두들 마루에 걸터앉았다. 편안하게 질문을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으니까.
"할아버님, 다리 왜 저세요?"
"징용 가서 피부병 옮아가지고…."
"징용 어디로 가셨나요?"
"남양군도지."
"남양군도 어디였나요?"
"어디라 캤더라…. 남양군도…, 가만 있거라…. 파…라…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라오요? 할아버님 혹시 팔라우 아닙니까?" (참고 : 팔라우=Palao)
"맞아요 맞아. 일본 놈들은 파라오라고 했지. 섬이 엄청스레 많은 나라요."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 했다. 그때까지 마루턱에 걸터 앉아있던 나는 마루위로 올라앉았다.
"할아버님, 저도 팔라우에 다녀왔는데요, 섬이 정말 많던데요."
"그럼그럼. 그 놈들이 섬 하나하나에 전부 지 군인들 배치했었지. 동굴파고 대포 숨겨놓고…."
"할아버님, 그 나라 섬이 삼백 개나 된다던데 할아버님은 어디서 일하셨죠?"
"찾기 쉬워. 끝에서 두 번째 섬이었으니까."
이런, 이런, 세상에 이런! 그 섬은 지금 김정곤, 당신의 조카가 살고 있는 섬이 아닌가? 입이 마르고 목이 잠겨들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큰아버님께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할아버님, 그 섬 이름이 뭐였습니까?"
"가물가물해. 그게 몇십 년 됐는데…. 페… 페…." (참고 : 끝에서 두 번째 섬 = 펠렐리우)
"그럼 어떻게 생겼었는지 생각은 하시겠습니까?"
"밀림지역이었어. 달팽이 잡아서 끓여 먹었으니까. 밀림 속에 우리가 비행장 만들었어. 죽을 고생 다했지 뭐. 전부 산호 빻아서 모래대신 깔고 활주로 만들고…. 그 끝자락에."
"네, 할아버님. 그 끝자락에…."
"끝자락에 일본 놈들 신사가 있었지. 일본귀신 모시는 절 말이야! 그 뒤에 자그마한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이름도 신사산이라고 했어."
나는 떨렸다. 세상에 어찌 이런 기막힌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섬과 그 밀림은 김정곤 씨가 살고 김정곤 씨가 자식 낳고 김정곤 씨가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는 펠렐리우섬이었던 것이다. 남양군도에 나라가 몇 십 개요 섬 또한 천 수백 개를 헤아리는데, 징용으로 끌려가 매 맞고 굶주리며 죽다 살아온 그 원한의 섬에 훗날 당신의 혈족이 상륙해서 원주민으로 살고 있다니…. 큰아버님이 매 맞고 배고플 때마다 흐느끼며 불렀던 그 노래 ‘아리랑'이 그 조카의 딸 이름이 되다니…. 이 기막힌 운명의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 나는 말문이 막혔는데, 되레 큰아버님은 말문이 열리고 기억이 40여 년 전으로 돌아가 혼자 도는 바람개비처럼 당신의 고생담을 술술 풀어놓고 있었다.
"치가 떨릴 만큼 고생했지. 배고픈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 달팽이 잡아먹고 팔뚝만한 도마뱀도 잡아 먹었는걸. 그렇게 굶주리면서 비행장 만들고 선착장 만들고 동굴파고 무기 들어다 숨겨놓고…."
할아버님! 정곤이가 할아버님이 만드신 선착장마을에 살고 있어요. 할아버님이 건설하신 비행장 활주로가 정곤이의 찻길입니다. 할아버님! 정곤이 처가 다음 달에 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셋째아이 낳으러 코로르(Koror)로 나간대요. 할아버님! 정곤이가 안내해서 제가 그 신사산에 올라갔다 왔어요. 내 입안에서 그런 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끝내 이 팽팽한 긴장을 더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님, 조카 정곤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남양군도 어디라 카더만…."
"그 이상은 모르시고요?"
"낸들 아나? 동생은 알랑가 그 섬 이름을."
"저도 모릅니다, 형님."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아직까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님, 그리고 정곤이 부모님! 정곤이가 바로 그 섬에 살고 있어요. 큰아버님께서 고생하고 오신 팔라우, 그 끝에서 두 번째 섬 펠렐리우에요. 큰아버님 말씀 들어보니 바로 그 섬이네요. 정곤이도 모르고 있어요. 큰아버님이 그 섬에서 고생하셨다는 거요. 제가 며칠 전에 그 섬에서 정곤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진 다 거기서 찍은 것들입니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 모두가 말을 잃었다. 큰아버님은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정곤이 부모님은 내가 찍어온 아들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어머님은 사진속의 아들을 쓰다듬었다. 큰아버님은 그러나 사진들을 외면했다. 침묵이 흘렀다. 불안하리만큼 긴 침묵이었다. 큰아버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씀을 하셨다.
"거기가 어디라고,
...............
거기가 어디라고,
...............
정곤아 이놈아! 거기가 어디라고 하필 거기 산다는 말이냐?"
맥없이 몇 마디를 내 놓으시는 늙은 징용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40여 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위로받지 못한 눈물, 참고 삭이는 것밖에는 할 바가 없었던 울분이 바위의 이끼처럼 달라붙은 얼굴이었다. 형제 넷 중 셋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그중 하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깊은 한이 서린 맏형의 눈물이었다. 그 섬 팔라우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든 이야기를 꺼내실 때 거기가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내가 그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르신의 충격이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힘을 잃어버린 늙은 징용자에게는 극단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감정의 힘마저 쇠약해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 집을 나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새벽녘까지 차를 몰아 서울집에 도착했다.
얼마 후 나는 팔라우로 돌아가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정곤 씨에게 큰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들려주었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허허… 참 희한한 일이군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당사자에게만 심각할 뿐, 한 뼘만 떨어져서 보아도 그 빛깔이 바래져 보인다. 세월은 억울함과 비통함을 두리뭉실하게 만드는 묘약이며 역사는 그런 아픔까지도 세세히 담아줄 여백이 없다.
▲ 펠렐리우 섬. 맨 오른쪽 끝에 선착장이 있다. 김정곤 씨의 큰아버님은 이 선착장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 나는 이 글에 쓴 거의 모든 과정을 담아 1992년 3월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3부작)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MBC를 통해 방송하였다.
10여년 뒤, 나는 KBS를 통해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5부작)을 기획 제작하면서 제작진을 팔라우에 보내 김정곤 씨의 삶을 기록했다. 나는 그 참에 김정곤 씨를 제 고향집에 다녀가도록 돕고 싶어서 편집중인 제작진에게 지시했다.
"원주민 인터뷰를 번역하려면 팔라우 원주민 말과 우리말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 김정곤 씨 말고 누가 있겠나? 왕복여비를 보내서 김정곤 씨를 초청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그는 20여 년 만에 고국에 왔다. 프로그램은 많은 감동을 남겼고 그는 고향집에서 이제는 가난을 면한 부모와 형제를 만났다. 그리고 또 갔다. 가면서 하는 말은 "거기에 처가 있고 자식이 있으니…."였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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