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받으며 퇴임한 대통령, ‘룰라 신화’ 왜 무너졌나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대통령’에서 퇴임 뒤 검찰에 체포되기도 한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사민주의자도 아닌, “선반공”이라고 말했던 룰라의 명암
중남미에서 가장 성공한 좌파 정당으로 여겨지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이 몰락 위기에 놓인 까닭은 무엇일까? 한때 전 세계 언론과 정치학자들의 찬사를 받던 정당이 갑자기 추락한 까닭은 무엇일까? 2016년 8월 말에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으로 쫓겨나더니, 그로부터 1년도 채 안 되어 지난 7월12일에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이하 룰라) 전 대통령이 10년에 가까운 실형을 선고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대통령’으로 불리며 브라질 국민 대다수의 박수를 받으면서 퇴임한 룰라 전 대통령이 최악의 위기를 맞았고, 노동자당은 1980년 창당 이래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룰라와 노동자당이 브라질 정치에 처음으로 등장하던 시기로 돌아가보자.
1980년 2월10일, 브라질 상파울루 중심가에 있는 조그만 학교 강당에 300여 명이 모여 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참석자들의 행색은 모두 평범했지만 눈빛만은 빛났다. 그들은 자동차 기계공, 농민, 도시 빈민, 전직 게릴라, 해방신학 신부, 지식인, 전 공산당원 등이었다.
1978년 상파울루 총파업 당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창당식이 열리던 소강당에는 연단도 없었다. 탁자만 하나 달랑 놓였다. 곧 당 대표로 선출될 35세의 선반공 룰라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참석자 중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깃발은 있었다. 이탈리아 천에 직접 수를 놓아 깃발을 만든 사람은 룰라의 부인 마리자 레치시아(1950~2017)였다. 한 지지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만든 정당”이라고 감격했다. 훗날 13년간 브라질을 통치할 정당의 시작은 그렇게 조촐했다.
이 신생 정당과 당 대표에 대해 브라질 언론의 관심은 매우 컸다. 브라질 기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룰라에게 물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입니까?” 룰라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선반공입니다.” 룰라는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이와 비슷한 유사한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사회주의자입니까? 사민주의자입니까? 좌파입니까?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선반공입니다.”
룰라의 이 대답은 그의 인생과 정치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룰라가 상파울루 위성도시의 금속노조 위원장에서 브라질 노동계급 전체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1978년에서 1980년까지 3년간 벌어진 총파업 때였다. 당시 독재정권은 물가상승률에 연동하는 임금제도를 시행 중이었다. 이 제도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국가가 임금 인상 상한선을 직접 정했고, 임금 인상을 막으려 물가상승률을 낮게 조작했다. 이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독재정권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다.
상파울루 파업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데뷔
상베르나르두의 금속 노동자들은 그때까지 동맹파업을 벌여본 적이 없었다. 1978년 한 공장이 파업을 개시하자 다른 공장이 연달아 기계를 멈추었다. 파업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브라질 경제의 기관차’로 불리던 상파울루 대도시권 전역의 노동자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집단적인 저항을 벌인 것이다. 시작은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었지만,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와 차별에 반대하고 독재정권의 억압 등에 맞서는 집단적인 저항이 되었다. 해가 지날수록 파업 일수가 늘어났고, 파업 가담자 수도 불어났다.
브라질에서는 파업과 시위가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파업 기세에 독재정권도 놀라고, 민주화운동 진영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파업 지도부가 놀랐다. 파업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파업의 기세는 예측하지 못했다. 룰라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신들린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독재정권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고 헬기를 띄우면서 파업 집회를 탄압했지만 노동자들이 물러서지 않고 파업 대열을 유지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브라질 민주화운동 진영도 상파울루 노동자들의 힘을 인정했다. 노동자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었다.
훗날 룰라는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활약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이 전진하면 나도 앞서 나갔다. 노동자들이 후퇴하면 나도 뒷걸음질쳤다. 나는 나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를 대표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소망이 곧 내 소망이다.” 룰라에게 세상을 바꾸는 재미는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파업으로 공장을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브라질 사회 자체를 바꾸고 싶었다. 그는 일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기는 이랬다. 연대파업 첫해인 1978년 9월 룰라는 노조 지도자들과 함께 수도 브라질리아를 방문했다. 연방의회를 찾아가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의원 482명 가운데 그들을 만나준 이는 고작 2명이었다. 룰라의 신당 창당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드는 의원이 없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1980년 2월10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노동자당(PT) 창립회의 당시 모습(가운데 팔짱 낀 이가 룰라).
룰라가 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총파업을 응원하던 사람들도 반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거의 모든 사회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업가들도 군사정권이 물러나길 바랐고, 노동 빈민들의 파업이 군사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총파업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룰라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당을 만든다고 하자 ‘이방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좌파 세력도 반대했다. 그들에겐 독재 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정당이 여럿 있었다. 공산당도 레닌주의 계열과 마오쩌둥주의 계열로 나뉘어 활동 중이었다. 굳이 새로운 좌파 정당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선반공 룰라의 생각은 명쾌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직접 만들지 않은 정당이 노동자를 대변할 리가 만무하다고 반박했다. 이 관점에 동의하는 인사라면 룰라는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더 진보적인 정당이 만들어지길 바라던 인사들이 노동자당(PT)에 합류했다. 신생 정당의 이념과 노선을 결정하는 데도 쾌도난마였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가 특별히 다른 사상을 신봉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브라질 자본주의 독재체제나 공산주의 체제나 노동자에게 모두 억압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도, 파업권도, 야당도 인정하지 않는 이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간명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낡은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좌파 정당이 탄생했다.
룰라는 노조에 가입하는 것조차 꺼려하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도 노조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도 없었다. 그런데 상파울루 노동계급의 지도자가 되더니, 신생 좌파 정당의 대표가 되었고, 그로부터 22년 뒤에는 대통령이 된다. 언젠가 룰라는 자신의 정치 인생을 브라질 국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에 빗대어 이렇게 묘사했다. “정치는 잘 빚은 카샤사(사탕수수 증류주)와 같다. 첫 잔을 마시고 나면 한 병을 다 비우기 전까지 절대로 멈출 수 없다.”
1980년대 내내 룰라가 이끄는 노동자당은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대거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먼저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인 정치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브라질 민주화 이행은 1979년 야당 설립 허용에서 1982년 연방의회 선거, 1986년 제헌의회 선거, 1989년 대통령 직선제 실시까지 10년간에 걸쳐 완만하게 이뤄졌다. 노동자당은 민주화 이행 속도를 높이는 구실을 했다. 민주화 진영과 손을 잡고서 1983년 “이제 직선제를!(Diretas Já)”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러 야당들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운동을 열심히 벌였다.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1982년 외채 위기 이후에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금융기관이 외채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강요한 긴축재정·민영화·무역자유화 등에 반대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기관이 브라질의 경제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해방신학 사제들이 주도한 도시빈민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이 탄생시킨 대중 조직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당이었다. 1993년 노동자당 전당대회 결의안에는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가 있는 한 인류에겐 미래가 없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공약도 매우 급진적이었는데, 외채 상환 거부, 은행과 광산 국유화, 급진적 토지개혁 등의 정책도 내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자당은 계급 간 대결을 강조하던 급진 정당이었다.
ⓒEPA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흡수한 노동자당은 각종 선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창당 이후 처음으로 치른 1982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하원의원 8명을, 1986년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하원의원 16명을 당선시켰다. 1989년에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선에 참여했다. 이 대선에서 룰라가 처음 후보로 나서서 결선투표 때 득표율 47%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동자당은 비록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지방정부를 운영하며 행정 경험도 쌓아갔다. 1988년 이래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루 시장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2명이 당선되면서 노동자당의 지방정부 시대가 열렸다.
세 차례 대선 패배 이후 온건 정당 변신
1990년대를 거치며 노동자당은 좀 더 온건한 정당으로 변신한다. 노선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연이은 대선 패배 때문이었다. 1989년 대선에서 선전을 거두고 다음 대선에서 곧 집권할 것만 같았던 노동자당은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그것도 결선투표까지 가지도 못한 채 1차 투표에서 완패해버렸다. 노동자당 내에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룰라 후보는 30%의 고정 지지층만 가진 후보로 굳어졌다. 1998년 대선 패배 직후 룰라는 당 지도자들에게 다른 후보를 찾아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당 지도자들이 전국 순회와 토론을 거쳐 다시 룰라를 압도적으로 신임했다. 룰라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우선 노동자당은 이념이 다른 정당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노동자당은 이미 지방정부를 운영하면서 중도파·우파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좌파 지지층은 30% 안팎에 머물렀기 때문에 과반을 위해서는 이념이 다른 정당과의 연합이 불가피했다. 그렇다 보니 노동자당의 원래 정책과 구상은 협상을 거치면서 온건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급진적 경제정책에서도 벗어났다.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대통령(1995~2002년 재임)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1993년 2500%까지 치솟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던 물가가 기적처럼 진정된 것이다. 카르도주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자 중산층은 물론이고 노동자당의 지지층인 노동계급도 환호했다.
노동자당은 인플레이션 억제 같은 거시경제 안정책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세계화된 브라질 경제에서 급진적 정책을 추진할 경우 오히려 자본 유출과 같은 혼란이 일어나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게 되어 지지층인 노동계급의 지지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적 제약도 받아들였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대선 전략도 새로 세웠다.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좌파가 단독으로 집권한다는 전략에서 벗어났다.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카르도주 정부가 만든 중도파·우파 정당연합을 좌파·우파 정당연합으로 대체하는 것, 다른 하나는 상층계급·중간계급의 유권자 연합을 노동계급·중간계급의 유권자 연합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당은 1989년 대선에서 “룰라를 찍어라! 나머지는 다 부자다”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면서 계급 간의 투쟁을 강조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숨기지 않던 정당이었다. 그런 정당이 수권 정당이 되기 위해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도 자제하는 온건 정당으로 완전히 변신했다.
퇴임 지지율 87%, 룰라형 협치 모델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타협의 대가였다. 선반공 출신 좌파였던 그는 기업가 출신 우파 후보와 연합해 정권을 잡았고, 임기 내내 좌우 균형을 맞추며 통합의 정치를 펼쳤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이하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역대급’ 변신을 선보였다. 먼저 우파와의 연합을 성공시켰다.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자유당(PL)의 주제 알렌카르를 지명했다. 알렌카르는 중도 우파 정당의 지도자이자,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브라질 최대 의류기업의 사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게다가 중남미 최대 재력을 자랑하는 개신교 단체의 명망가였다. 룰라는 가톨릭교도이자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자신과, 개신교도이자 기업가의 지지를 받는 알렌카르의 결합이 환상적일 것이라고 여겼다. 선반공 출신 좌파가 사장 출신 우파와 손을 잡는다? 룰라는 자신들의 관계를 가문끼리 철천지원수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에 빗댔다. “우린 서로 깊은 애정을 고백했다. 남은 것은 부모의 허락뿐”이라고 말했다. 양당의 승인을 부모의 허락으로 능청스레 비유한 것이다.
룰라 후보는 급진적 경제정책에서 탈피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라질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국제 금융기관에서 빌린 외채를 모두 상환할 것을 약속했고, 전임 카르도주 정부의 거시경제 안정책도 고스란히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변신의 와중에도 룰라는 노동자당의 색깔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며 “유토피아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장기적인 전망이다. 다른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생애 처음 먹어보는 강낭콩 한 접시이고, 생애 처음 갖는 일자리이며, 생애 처음 받아보는 진료이고, 생애 처음 가보는 학교이다”라고 말했다. 즉 노동자당은 장기적 전망으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를 계속 추구하지만, ‘생애 처음 먹어보는 강낭콩 한 접시’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놓는 정당으로 변신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급진적 개혁 대신에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노선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연히 당 안팎의 전통적인 지지층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우경화’ ‘배신’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룰라는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실천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책상 서랍 속에서 한 세기 이상 썩게 된다”라며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반대로 국제금융계와 브라질 우파는 룰라의 과감한 변신에도 반신반의했다. 그들의 눈에 룰라와 노동자당은 여전히 불온한 좌파였다. 룰라 후보의 상승세를 보여주는 여론조사가 발표될 때마다 자본 유출, 주가 추락, 국가신인도 하락이 발생하고, 브라질 헤알화의 가치가 출렁거렸다. 당시 카르도주 대통령은 “브라질이 아르헨티나가 될지 모른다”라면서 불안감을 자극했다. 여당 후보인 주제 세하를 찍지 않고 룰라에게 투표하면 브라질이 2001년 아르헨티나처럼 국가부도 사태를 맞을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세계 최고의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도 대놓고 “아르헨티나인가, 주제 세하인가”라고 물었다.
사회운동 단체들 정책 결정 과정에 끌어들여
하지만 룰라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상파울루 노동자들이었다. 1975년 선반공 룰라가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었을 때부터 2002년까지 늘 한결같이 지지를 보내온 이들이었다. 선반공 룰라가 기업가들을 만나느라 구레나룻도 다듬고, 정장과 넥타이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지만, 노동자들은 박수로 룰라를 연호했다. 그들 앞에서 룰라가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굳게 다짐했다. “브라질 엘리트들이 결코 이루지 못한 것을 한 선반공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야 말겠다!” 2002년 10월 말 룰라 후보는 지지율 61.3%로 승리를 거두었다. 2006년 대선에서 연임에도 성공했다.
ⓒAP Photo 2003년 1월1일 브라질의 새로운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취임식 후 부인과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룰라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브라질을 이끌면서 브라질 엘리트들이 일찍이 이루지 못했던 정치 스타일을 몸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였다. 그가 집권 초에 임명한 공직자들의 면면을 보면 얼마나 이질적인 인사들을 모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아마존 환경운동가, 전직 게릴라 같은 좌파는 물론이고 보스턴 은행장, 하버드 법대 교수 등 상류층 명사까지 평생 서로 만날 일이 없을 법한 인물들이 내각과 주요 정부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런 팀을 이끌면서 룰라는 외줄타기의 명수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잡아갔다. 너무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몸을 틀고, 왼쪽으로 너무 나가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모두를 만족시키는 통합의 정치를 펼쳐갔다.
먼저 룰라 정부는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데도 균형을 잘 잡았다. 노동자당 정부는 대의제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 정치는 무려 30여 개 원내 정당이 난립하는 ‘콩가루 정당제’가 지배했다. 룰라 정부가 연방 상원과 하원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연방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선 정당 간의 합종연횡은 필수였다. 매우 이질적인 역사를 가진 우파 정당들과도 연합을 맺어야 했기 때문에 기나긴 타협과 조정이 불가피했다. 이 고충에 대해 룰라는 “예수가 브라질 대통령이라면 가롯 유다와도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타협과 협상의 명수다운 발언이었다. 룰라는 집권 이후 다양한 시민 참여 제도를 도입했다. 경제사회발전위원회를 만들어 그가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이 기구는 재계, 노동계, 사회운동, 대학교수들이 참여하는 기구로 브라질판 노사정위원회였다. 또한 브라질의 심각한 대도시 문제들, 가령 치안과 주택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연방도시부를 신설하고 도시위원회를 설치했다. 도시위원회는 32만명이 참여하는 지역회의(시회의와 주회의)를 거쳐 선출된 2510명이 연방회의를 열고 다시 거기서 선출된 민간 대표 40명과 연방·지방 공무원 30인으로 구성된 도시위원회가 연방정부의 도시정책을 직접 설계했다. 이 같은 참여제도는 거리 시위를 유일한 집단행동으로 삼았던 사회운동 단체들을 연방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룰라 정부는 성장과 분배의 균형도 잘 잡아갔다. 우선 거시경제를 안정시켰다. 전임 카르도주 정부보다도 물가를 더 낮추고, 재정 흑자는 더 높이는 정책으로 좌파 정부로 인한 시장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정부 역할도 점진적으로 강화해나갔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때에는 불황을 막기 위해 ‘성장촉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간접자본과 공공주택 사업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또 정부가 산업정책을 수립하고 전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공은행의 신용 혜택을 비롯한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기도 했다. 행운도 따랐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원자재 부국 브라질 경제가 순풍에 돛을 달았다. 그 결과 브라질 경제는 2004년에서 2009년까지 4.8%의 건실한 성장을 이어갔고, 실업자 수도 줄어들었다. 수십 년 만의 호황이었다.
2010년 룰라는 집권 초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취임했을 때만 해도 브라질은 자본 없는 자본주의였다. 그래서 당시 우선 자본주의부터 만들고 봐야 사회주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배하기 전에 분배할 것을 먼저 만들자고. 가진 게 없는 국가는 나눠줄 것도 없으니까.”
그는 자본주의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다. 당장 ‘강낭콩 한 접시’가 필요한 빈민들을 위해서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최저임금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빈민층을 줄이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복지정책도 추진했다. 집권 초부터 당시 인구 약 1억8000만명 중 5000만명에 달하는 빈민층을
줄이는 데 착수했는데, 룰라는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 하고, 빈민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말한다”라고 반박하면서 빈곤 퇴치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족수당(Bolsa Família)’ 정책이었다. 가족수당은 아동의 취학과 예방접종을 조건으로 빈민 가구에 주는 생활보조금을 말한다. 빈곤 가정에 국가교육 서비스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제가 성장하자 정부는 지급액을 꾸준히 늘리고, 수혜 범위도 계속 확대했다. 2011년에는 1200만 이상 가구(약 5000만 인구)가 23~178달러의 가족수당을 받게 되었다. 극빈층을 위한 기초소득 제도와 아동수당 제도도 도입했다. 가족수당 제도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도 효율적인 빈곤 퇴치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그 결과 2003년 집권 원년 당시만 해도 전체 인구의 약 25%에 달하던 빈민 수가 2011년에는 11%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에 브라질 국민 3200만명이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다. 중산층이 늘고 빈민이 줄어들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인 브라질에서 불평등이 줄어드는 반전이 일어났다.
룰라 정부는 외교에서도 균형을 잘 잡았다. 미국의 부시 정부와는 반제국주의와 같은 이념적 태도를 버리고 실용 관계를 맺었다. 당선 직후 먼저 미국부터 방문한 룰라는 “미국이 아직도 브라질을 축구와 삼바의 나라로만 알고 있다”라고 꼬집으면서도 부시 정부와 소통이 잘 되는 정부라는 위상을 유지했다.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둘러싼 논쟁을 좌우파의 이념 대결이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실리 논쟁으로 바꾸어놓았다. 룰라 정부는 미국이 자국 농민들에게는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면서도 개발도상국 정부에는 농업보조금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이중성을 비판했다. 오히려 미국이 농업보조금 지급을 철폐하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공을 넘겼다. 미국은 브라질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미주자유무역지대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칠레와 우루과이에서도 ‘룰라형 좌파’ 인기
ⓒEPA 2008년 5월23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남미국가연합(UNASUR)이 공식 출범했다(가운데가 룰라 대통령).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룰라 정부의 균형감은 두드러졌다. 룰라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같은 좀 더 급진적인 좌파 정부들과 콜롬비아·페루·멕시코의 우파 정부들 사이에서 타협의 대가다운 실력을 과시했다. 급진 좌파와 우파 정부 모두가 참여하는 통합기구 건설에 앞장섰다. 2008년 남미국가연합(UNASUR) 창설을 주도하고, 2010년 중남미·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창립을 주도했다. 룰라는 이념적 잣대보다는 강대국에 맞서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공동 이해를 도모하는 경제적 실리를 내세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EPA 2011년 1월1일 룰라 전 대통령(오른쪽)이 새로 취임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손을 들고 있다.
정치·경제·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룰라 정부가 보여준 균형의 정치는 브라질 다수 국민의 통합에 기여했다. 집권 마지막 해인 2010년에 룰라 정부는 무려 87%에 이르는 지지를 받았다. 이는 브라질 민주주의 사상 최고의 지지율이자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이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깊이 감명을 받은 나머지 룰라를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내 우상”이라고 고백했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브라질 정치인들은 좌우 정파를 막론하고 룰라 대통령과 사진을 찍고자 줄을 섰다. 대선에 출마한 우파 후보도 룰라를 계승하겠다고 공언했다. 세계적인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룰라 정부의 성취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기울어진 세계의 균형을 잡는 데 기여한 정부”라고 평가했다. 역사의 시계추가 시장만능주의로 완전히 오른쪽으로 치우친 시기에 등장해서 왼쪽으로 시계추를 옮기는 구실을 했다는 지적이다. 룰라 정부의 성공은 2010년과 2014년 브라질 대선에서 연달아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1999년부터 2015년까지 중남미 주요 10개국에 좌파 정부가 집권하고 재집권한 현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등장한 정부들 가운데 온건 노선을 걸은 칠레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과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우루과이 광역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과 호세 무히카 대통령 등은 ‘룰라형 좌파’로 불렸다(다음 호에 계속).
부메랑이 된 룰라의 사법 개혁
룰라는 재임 시절 연방경찰의 규모와 인력을 두 배로 늘리고 사법부도 통합해 독립성을 강화했다. 퇴임 후 그들은 룰라를 공격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룰라)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브라질 노동당은 ‘외줄타기’로 성공했다. 상황에 따라 좌우를 종횡하며 정치적 균형을 잡는 데 능숙했다. 룰라는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로 박수를 받았다.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외줄타기를 하다 보면 낙마할 수 있다. 또한 ‘적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다.
정치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브라질처럼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는 더욱 그렇다. 브라질 대의제가 불안정한 이유는 ‘파편화된 정당제’ 때문이다. 1979년 당시 브라질 독재정권은 민주화 세력이 단일 정당으로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다당제를 도입했다. 원내 의석을 가진 정당이 20~30개 난립했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은 많게는 10여 개의 정당과 연합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룰라가 여러 정당 간의 합종연횡으로 구성된 정부를 이끌어가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연립정부 유지에 골몰하다가 ‘시민 참여제도’를 뒷전으로 밀어내버릴 정도였다. 새로운 노사정 기구나 도시위원회 같은 참여제도를 환영했던 사회운동 단체들은 룰라 정부가 우파 정당과 협상을 우선시하자 강한 실망감을 표출했다. 정부와 사회 간의 소통 창구가 막히게 되면 시민들은 거리에서 의사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룰라의 후임자였던 지우마 호세프 정부가 2013년 6월, 201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다.
브라질 정당제도는 고질적인 정치 부패의 근원이었다. 브라질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5위의 면적, 2억이 넘는 인구(세계 6위)를 가진 대국이다. 연방 단위 선거를 치르는 데는 막대한 선거자금이 소요된다. 문제는 30여 개 정당 대부분이 계층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한정되어 의석 점유율이 20%대에 머문다는 점이다. 대선을 치르는 정당들은 선거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성하는 일이 잦았다. 선거 이후 정당연합을 만드는 데도 비용이 들어갔다. 극소수 의석으로 이권을 극대화하려는 소수 정당들을 검은돈으로 달랬기 때문이다. 정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라도 ‘콩가루 정당제’를 3~5개 정당이 경쟁하는 ‘온건 다당제’로 개편하는 정치 개혁이 필요했다.
집권당이 정치 개혁에 나서는 순간 다른 당들이 연합에서 이탈하며 연립정부가 무너질 위험이 매우 컸다. 룰라 역시 정치 개혁을 목표로 헌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다른 정당들의 반대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신 추진한 것이 바로 사법 개혁이었다. 수사권을 가진 연방경찰의 규모와 인력을 두 배로 늘려 대형 사건을 수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검찰청이 직접 검찰총장을 추천하도록 했다. 사법부도 효율적이고 응집력 있는 조직으로 통합시켰다. 그 결과 독립성이 강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건설됐다. 부패 정치가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강도 높게 이뤄질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사법 개혁으로 노동자당 정부가 위기를 맞았다. 노동자당도 연방 단위의 대규모 선거를 치르고 정당연합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기성 정당의 불법적인 관행을 수용했던 것이다. 2005년 노동자당이 여러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당 의원들에게 월급처럼 검은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월급 스캔들’로 노동자당의 지도자들이 구속되고, 룰라도 사임 위기에 몰렸다.
호세프가 재선 임기를 시작한 2015년에도 대형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브라질 공기업 페트로브라스와 여러 기업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다. 무려 200여 명의 정치인·기업인·로비스트들이 연루되었다. 여러 정당의 정치가들이 연루되었지만, 집권당이라는 이유로 노동자당과 호세프가 가장 큰 정치적·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경제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잡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룰라는 호황기(2004~2011)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성장과 분배를 골고루 챙길 수 있었다. 당시 브라질 경제는 국제적인 원자재 붐으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4%대의 안정적인 성장기를 누렸다. 그때 인구의 25%에 달하는 5000만 빈민들에게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펼쳤다. 성장을 원하는 계층과 분배를 바라던 계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87%에 가까운 기록적인 지지율의 비결이다.
ⓒEPA 8월28일 브라질 리우그란데두노르테 주에서 지지자들에게 유세를 펼치는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가운데).
후임 호세프 정부는 외줄타기 정치에 실패
룰라 정부의 노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호세프 정부는 불황기에 집권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에 이어 2014년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까지 지체되면서 브라질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브라질처럼 천연자원, 농축산물 등 1차 산품을 수출하는 나라는 국제 원자재 수요가 급락하면 바로 위기를 맞는다. 호세프 정부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성장과 분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놓였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가 있었다. 성장을 택하면 지지층이 등을 돌릴 것이고, 분배를 택하면 반대 세력이 결집할 것이다. 최악은 모두가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당시 우파와 부유한 중상층은 더욱 강력한 긴축정책을 압박했다. 반면 좌파와 하층은 분배를 더욱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호세프 정부는 대중교통과 교육, 의료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미루고, 경제 안정을 위해 재무장관을 재정 긴축파에서 골랐다. 좌파와 지지층은 배신감을 느끼며 지지를 철회했다. 우파와 중상층은 만족하지 않았다. 더 강력한 긴축이 필요하다며 아예 탄핵을 주장하고 나섰다. 호세프 당시 대통령은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
호세프는 거리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해 정치 개혁에 나서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우파 세력과 타협해 연립정부를 유지하지도 못했다. 호세프는 더 많은 분배로 전통적인 지지층을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더 강력한 긴축으로 비토층을 달래지도 못했다. 외줄을 타며 균형 잡다가 낙마한 것이다. 아무도 적으로 만들려 하지 않다가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EPA 지난해 8월31일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 권한대행(가운데)이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 확정 직후 공식 취임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립정부의 한 축을 구성하던 우파 세력은 호세프 대통령의 위기를 철저하게 악용했다. 호세프 탄핵을 주도한 정당은 노동자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었다. 이 당에는 당시 호세프 정부의 미셰우 테메르 부통령, 헤난 칼례이루스 연방 상원의장, 에두아르두 쿠냐 연방 하원의장이 속해 있었다. 이 3인방이 연립정부를 붕괴시키고 탄핵을 주도했다. 지난해 8월31일 ‘브라질에서 가장 청렴한 정치가’로 불렸던 호세프 탄핵이 확정되었다. 부통령이던 테메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테메르는 호세프의 잔여 임기(2018년 12월31일까지)를 채울 예정이었다.
반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탄핵을 주도한 이들의 뇌물 혐의가 드러났다. 에두아르두 쿠냐 전 하원 의장은 뇌물죄로 수감되었다. 지난해 12월 브라질 대법원은 부패 혐의로 헤난 칼례이루스 당시 상원 의장의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다. 이 결정은 하루 만에 번복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부패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테메르 대통령은 부패 혐의가 드러나 기소되었다. 지난 5월 말 대통령이 직접 대기업 사장에게 “돈으로 증인의 입을 막아라”고 말하는 음성파일이 공개되었다. 6월 말에는 또 다른 부패 혐의가 드러났다. 연방검찰청이 500만 달러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대통령을 연방대법원에 기소한 것이다. 브라질 국민의 81%가 대통령에 대한 기소를 찬성했다. 테메르는 사임하기는커녕 연방 하원의 우파 의원들을 동원해서 자신에 대한 재판을 막아버렸다.
ⓒAP Photo8월2일 상파울루 시내에서 시위자들이 테메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우파들이 호세프 탄핵을 추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에 취임한 미셰우 테메르가 미국 뉴욕에서 헤지펀드 및 외교 엘리트들을 만나 직접 실토한 기록이 있다. 그 자리에서 테메르는 “호세프가 예산을 편법으로 운영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자본과 브라질 재계가 원하는 수준의 긴축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핵했다고 말했다. 테메르가 원하는 강력한 ‘긴축정책’이란 13년간 노동자당 정부가 빈민들에게 제공해온 복지 재정을 감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혜택을 줄이는 한편으로 기업가의 자유를 늘리는 것이다. 실제로 테메르 정부는 지난 7월11일 의회에서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브라질 재계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이른바 ‘노동 유연화’ 정책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가령 휴가일수와 야근수당, 최저임금과 남성 출산휴가 등을 단체협약으로 변경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외주화로 직접고용 노동자들을 간접고용 노동자로 바꿀 수 있고, 노동계약 대신에 ‘서비스 제공 계약’으로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둔갑시키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브라질 통화인 헤알화 가치와 주가가 치솟았다. 테메르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호세프보다 더 낮은 5% 수준으로 추락했다.
부패한 우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노동권을 무너뜨린 것을 지켜본 브라질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13년간 노동자당 정부가 이룬 성취를 지키기 위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38%까지 오른 이유였다. 그런데 브라질 사법부는 7월12일, 룰라 전 대통령에게 10년 가까운 실형을 선고했다. 그가 건설회사로부터 3층 주택을 선물받은 대가로 정부 발주 공사를 맡겼다는 것이다. 룰라는 이 주택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최종심에서 룰라의 형이 확정되면 앞으로 20년 동안 피선거권이 중지된다.
룰라, 형 확정 시 20년 동안 피선거권 중지
법정 공방과 별개로 브라질 사법부가 룰라에 대해 기습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이 일었다. 지난해 3월 룰라 전 대통령을 강제 구인하겠다고 나서서 탄핵 위기의 호세프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이번에는 룰라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시점에 서둘러 실형을 선고해 출마 자체를 막으려 한다는 지적이다. 정파를 막론하고 부패가 벌어졌는데도, 유독 노동자당 정치인들의 구속 비율이 높다. 여전히 우파 정치가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2014년 대선에서 호세프와 대결한 아에시우 네비스는 부패 혐의가 드러났는데도 아직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모든 사건이 ‘브라질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이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으로 선출한 호세프를 사소한 이유로 탄핵시킨 우파가 노동자당 정부의 13년 성취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정당한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의 피선거권이 사법부의 기습 판결로 박탈되는 것은 정당한가? 이런 의문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브라질 정치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은 우파 대통령과 사법부 엘리트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17.9.21 시사인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브라질 룰라 대선 행보 탄력…북동부 이어 남동부 캐러밴 나서 1023 연합
잇단 부패 의혹에도 여전히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 있는 브라질 좌파 노동자당(PT)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2018년 대선 출마를 위한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부터 대선의 전략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남동부 미나스 제라이스 주 10여 개 도시를 방문하는 캐러밴에 나선다.
오는 3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캐러밴을 통해 룰라는 과거 2002년과 2006년 대선 승리의 원동력이 됐던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대선에서 룰라는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주요 도시에서 53∼80%대 득표율을 기록했다. 앞서 룰라는 지난 8월 17일부터 9월 5일까지 20일간 북동부 지역 9개 주 25개 도시를 찾아가는 4천㎞ 캐러밴을 진행한 바 있다. 북동부 캐러밴 과정에서 룰라는 "노동자당과 당원들이 나를 대선 후보로 결정하면 회피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선 출마 의사를 밝혔다.
지난 8월 17일부터 9월 5일까지 북동부 캐러밴을 진행한 룰라(왼쪽)가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브라질 뉴스포털 UOL]
룰라가 잇달아 캐러밴에 나서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높은 지지율을 앞세워 2018년 대선 출마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선주자들을 대상으로 투표 의향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35∼36%로 2위권과 배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선두를 질주했다.
극우 기독교사회당(PSC)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연방하원의원이 16∼17%, 중도좌파 지속가능 네트워크(Rede)의 마리나 시우바 전 연방상원의원이 13∼14%로 2∼3위에 올랐다. 우파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의 제라우두 아우키민 상파울루 주지사와 주앙 도리아 상파울루 시장이 나란히 8%를 기록하며 4∼5위권을 형성했다.
룰라는 부패혐의로 수차례 기소됐고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항소 절차를 거쳐 실형이 확정되면 대선 출마가 좌절될 수 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룰라가 앞으로 진행될 고등법원과 연방대법원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아도 피선거권이 제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노동자당 지도부는 룰라가 재판에서 부패혐의로 실형을 선고받더라도 그를 대선 후보로 추대할 것이며 룰라 대신 다른 인사를 후보로 내세우는 '플랜 B'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자당은 또 2018년 대선 승리를 위해 지난해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을 탄핵한 세력과 협력할 수 있다는 뜻까지 밝히면서 결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2018년 대선 투표일은 10월 7일이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10월 28일에 결선투표가 치러진다.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 "여론은 내 편"…재집권 의지 거듭 확인 10 5 연합
부패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를 겪는 브라질 좌파 노동자당(PT)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앞세워 재집권 의지를 거듭 밝혔다. 4일(현지시간) 브라질 언론에 따르면 룰라 전 대통령은 전날 리우데자네이루 시에 있는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 본사 앞에서 열린 노동계 주도 행사에 참석, 사법 당국과 언론이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2019년에 대통령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법 당국이 자신을 부패혐의로 처벌하려는 시도를 정치적 탄압으로 규정하면서 "룰라라는 이름은 한 개인에 그치지 않고 수백만 명이 가슴에 품은 이상"이라면서 "그들이 육신을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상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룰라 전 대통령이 3일(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시내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 본사 앞에서 벌어진 노동계 행사에 참석했다. [브라질 일간지 폴랴 지 상파울루]
룰라의 이 같은 발언은 부패 스캔들에도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여론조사업체 다타폴랴(Datafolha)가 최근 시행한 대선주자 투표 의향 조사에서 룰라는 35∼36%를 얻어 2위권과 배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선두를 질주했다.
극우 성향 기독교사회당(PSC)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연방하원의원이 16∼17%, 중도좌파 성향 지속가능 네트워크(Rede)의 마리나 시우바 전 연방상원의원이 13∼14%로 2∼3위에 올랐다.우파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의 제라우두 아우키민 상파울루 주지사와 주앙 도리아 상파울루 시장이 나란히 8%를 기록하며 4∼5위권을 형성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고 1∼2위 후보 간에 결선투표가 시행되면 룰라가 어떤 후보를 만나더라도 승리할 것으로 전망됐다. 결선투표에서 룰라가 부패수사를 전담하는 세르지우 모루 연방 1심 판사와 만나면 대등한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됐으나 모루 판사는 대선 출마 가능성을 부인한 상태다. 2018년 대선 투표일은 10월 7일이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10월 28일에 결선투표가 치러진다.
리우데자네이루 시에서 3일(현지시간) 테메르 대통령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국영 뉴스통신 아젠시아 브라질]
한편, 룰라는 우파 미셰우 테메르 대통령 정부가 추진하는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남미에서 전력 부문 최대 기업으로 꼽히는 국영전력회사 엘레트로브라스를 포함해 상당수 공기업이 민영화 대상에 포함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테메르 정부 인사들은 사기업 경영자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브라질 정부는 지난 8월 말 고속도로와 공항, 항만 터미널, 송전선을 포함한 57개 국유 자산을 매물로 내놓는 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대부분 올해 3분기부터 내년 말 사이에 매각이 이뤄질 예정이며,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445억 헤알(약 16조 원)의 투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남동부 미나스 제라이스 주 전력공사(Cemig) 소유의 4개 수력발전소 운영권과 287개 석유·천연가스 광구 가운데 37개를 국내외 기업에 매각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acio Lula da Silva ]
1945년 브라질 동부 페르남부쿠(Pernambuco)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2세부터 일하기 시작했으며, 14세에 정식으로 근로자 자격을 얻어 금속공장에 취직하였고, 1963년 선반공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1964년 근무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인이 출산 도중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아이와 함께 사망하자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였으며 1978년 브라질 철강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1980년 노조 지도자 및 지식인들과 함께 PT를 결성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1985년 20년간의 브라질 군정이 무너진 후 처음 열린 1986년의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89년, 1994년, 19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서민들의 지지로 당선되어 브라질 사상 최초로 노동자 계급 출신의 좌파 대통령이 되었다. 2003년 1월 취임 당시 브라질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는 침체기에 있었으나 좌익 노선을 밟은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초기 7개월 동안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을 실시하고 사회비용을 줄였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기아 퇴치이며, 브라질 재정 위기의 큰 원인인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였다. 한편 국가 신임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정치 성향을 탈피하여 시장주의정책을 추진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걸음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서민층의 압도적인 지지로, 2005년 집권여당의 야당 의원 매수사건으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하고 브라질 사상 두 번째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파벨라 출신의 대통령 룰라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살아서 다섯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브라질 북동부에서 룰라는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남부의 상파울루로 이사 온 그는 열두 살에 구두닦이를 시작했고, 금속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룰라는 밤을 새면서 선반 작업을 하던 중 잠시 졸던 동료의 실수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손가락이 없는 게 부끄러워 여러 해 동안 사람들 앞에 손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첫 부인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출산 도중에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룰라는 노동조합에 들어가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노동당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파업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된 그는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어 빈부 격차를 줄이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브라질은 면적이 미국과 비슷하다. 숲이 우거진 열대 우림과 열대 초원, 그리고 온대 기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광석 등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인구도 1억 8천만 명으로 대국이다. 그만큼 자존심을 뒷받침할 힘을 갖고 있다. 브라질은 21세기에 새로 뜨는 네 강대국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 속한다.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하다. 미국이 9.11테러 이후 미국 입국자들에게 범죄 혐의자에게나 하는 지문 검사를 실시하자, 브라질도 브라질에 입국하는 미국인에게 똑같이 맞대응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과의 관계도 한몫하고 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콩 등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브라질에게 중국은 미국을 대신할 무역 상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브라질과 중국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와 브라질도 대통령의 상호 방문을 통하여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기술력과 브라질의 풍부한 자원은 앞으로 서로에게 득이 되는 동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빈민촌 파벨라
해수욕장에 나온 소매치기들은 거의 가난한 동네에 산다. 브라질에서는 가난한 동네를 파벨라라고 부른다. 파벨라는 브라질의 수많은 도시에서 볼 수 있으며, 한 도시 안에도 여러 곳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파벨라 수만 해도 800여 개나 된다. 그러나 파벨라에 외부 사람들이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는 경찰도 들어가기가 어렵다. 파벨라에 사는 사람들은 불법으로 총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경찰에게서 총을 사기도 한다. 파벨라 조직은 수류탄뿐 아니라 기관총도 가지고 있어 그 화력은 일반 경찰의 것보다 강하다. 파벨라에서는 종종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버스 기사에게 파벨라 부근을 천천히 달려 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버스 기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서 외부 사람이 자동차를 세우거나 천천히 달리면, 주민들은 그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파벨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보호구역인지도 모른다. 마을 입구에 경찰이 서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외부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마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부근의 넓은 도로에서 다른 자동차와 똑같은 속도로 달리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명한 파벨라 중의 하나
파벨라는 빈민 지역으로 경찰조차 들어가길 꺼릴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다. 동네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었다.
리우데자네이루 사람들은 위험해서 아무 거리에서나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가서는 안 될 곳이 있기 때문이다. 가서는 안 될 곳에 가면 반드시 소매치기를 당하지만, 목숨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한다. 도둑이 착한 편이어서, “돈 좀 남겨 줘. 나도 택시 타고 가야 할 것 아니야?”라고 말하면 돈을 남겨 주기도 한다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약과 관련된 범죄가 많아서 갱 조직 간 총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잦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02년에만 브라질 전체에서 38,088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이 숫자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전쟁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반 경찰은 웬만하면 파벨라에 들어가지 않지만, 꼭 들어가야 할 때는 중무장한 헬기를 타고 특수 경찰이 투입되기도 한다. 특수 경찰은 이런 조직에 단호하게 대응하며, 필요하면 범죄자들에게 총을 쏠 수도 있다.
브라질의 빈부 차
브라질은 빈부 차가 매우 커 상위 5퍼센트가 브라질 부의 7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큰 건물 옥상에는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어, 부자들은 출퇴근을 하거나 쇼핑을 할 때 자가용 헬리콥터를 이용한다. 요트를 타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으며, 브라질의 유명한 축구 선수는 개인 전용기로 외국 나들이를 가기도 한다. 축구 선수 말고도 부자들은 많이 있다. 큰 공장이나 백화점, 또 넓은 농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이다.
브라질의 지역별 인구 및 1인당 GDP
1인당 GDP는 동남부와 남부에 비해 동북부와 북부가 매우 낮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축구를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경쟁자가 매우 많아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를 잘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다. 왜냐하면 가난하면 좋은 사립학교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사립학교에 다니는데, 매달 내는 학비가 일반 회사원 월급의 두 배나 된다. 공립학교는 시설과 교사 등의 수준이 낮아서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국가는 공교육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브라질 사람들은 대체로 학력이 낮아서 고등학교만 나오면 학력을 뽐낼 수 있다. 브라질에서는 대학을 졸업해도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은 마땅한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은 부모의 재산이 많아 그것을 물려받는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브라질은 빈부의 차와 학력 차가 크지만, 그것을 줄이기 위한 사회 구조의 개혁이 어려운 형편이다. 현지 교포의 말에 따르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철도 구간이 있어도 만들지 않는다. 버스 회사의 로비 때문이다. 상파울루의 인구는 1,700만 명이나 되나 지하철은 동서 간과 남북 간 두 개뿐이다. 승용차가 없으면 돌아다닐 수 없으며, 화물은 트럭으로 운반한다. 또한 자동차 도로가 좋은 편이 아닌데도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자동차 업자들의 로비 때문인데, 자동차가 빨리 망가지면 자동차를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삼바 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는데, 삼바 춤 극장은 그곳 하나뿐이라고 했다. 폭력 조직이 삼바 춤 극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바 춤 공연 모습 리우데자네이루에는 이러한 삼바 춤 극장이 한 곳뿐이다.
한 도시 안에서도 빈부 차에 따라 주거 지역이 달라지지만, 국가적으로도 지역에 따라 빈부 차가 뚜렷하다.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곳은 동북부 지방과 북부 지방이다. 동북부 지방은 예로부터 사탕수수를 재배해 왔던 곳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유럽 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강제로 데려와 일을시켰다. 그러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결과 사막화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토지가 거칠어지고 가뭄이 자주 발생하여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동남부의 커피 농장 일꾼들은 가난한 동북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농사철에 가족 단위로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북부는 아마존 강 유역의 셀바스 지역으로 동북부와 마찬가지로 주민 소득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이에 비해 남부 해안 지방은 주민 소득이 높다. 남부 해안은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유럽과 만나는 교통 요지이다. 이곳에는 브라질 최대의 도시 상파울루와 세계적인 관광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생태 도시로 유명한 쿠리티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라질의 빈부 차 (지리 교사들 남미와 만나다, 2011. 3. 1., 푸른길)
These Eyes - Guess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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