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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든 조선인, 동북항일연군

by 이성근 2017. 12. 15.

정의와 헌신? 혁명은 그렇게 고상하고 달달한 게 아니다!”

중국 인민해방군 90주년 행사에 숨겨진 이야기

중국이 건군 90주년을 맞아 최초의 단독 열병식을 했다. 네이멍구(內蒙古)의 주르허 사막기지에서 시진핑 주석이 군복을 입고 사열을 받았다. 네이멍구 주르허엔 중국의 우주센터 발사장과 아시아 최대 군사훈련장이 있다. 중국굴기의 핵심 중 하나인 '강군몽 强軍夢'의 상징 거점이다. 내몽고는 유라시아 진출의 교두보라는 점에서 이 지역의 열병식은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과 군 현대화 사업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3개의 깃발이 등장했다. 낫과 마치 문양의 당기(黨旗)가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보다 먼저 등장했고, 이어 인민해방군기가 등장했다. 시 주석은 두 개의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영웅적인 인민군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승리해 나라의 위상과 군의 위엄을 떨쳤다.”

"우리의 원칙은 당이 총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니, 결코 총이 당을 지도하게 할 수 없다"

 

열병식 기수단 등장 순서가 당기, 국기, 군기였다. 하지만 이후 사열에선 군기가 앞으로 오기도 하는 등 순서는 자주 바뀌었다.신화통신

 

한국전에서 미국과 붙어 이겼다는 말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 UN의 대북제재에 동참할 순 있어도 역내에서 미국의 군사행동만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처럼 중조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아직은 살아있다. , 중 어느 한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전 국력을 동원해 참전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오히려 한미동맹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혈맹조약이다. 얼마 전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가 "북의 선제공격으로 한국전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킬 것이고, 미국이 먼저 군사행동을 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 중국의 정확한 속내 아닐까?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말은 사회주의 국가에선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중국 선당노선 先黨路線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참고로 북한의 경우 조선인민군(1932)이 조선노동당(1945)보다 먼저 창설되었지만, 중국은 그 반대다. 장정이나 내전 때에도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유지했다. 심지어 마오는 편애하던 동북왕 가오강 (高崗, 고강)선군론 先君論을 제기하자 한칼에 날려버렸다. 명실상부한 당 서열 2위에서 반당분자로 전락한 가오강은 결국 자살했다.

 

혁명은 글을 짓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시원은 192781일의 난창무장봉기다. 올해가 딱 90주년이다. 군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8개월 동안 공산당원 3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중공 당원의 무려 4/5에 달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며 공산당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일으킨 무장봉기가 바로 장시성 난창 南昌기의다. 국민당 좌파 군인들과 당원 2만여 명이 일시에 봉기했다. 원래 계획은 남쪽 항구도시를 장악해 소련의 지원으로 북벌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봉기군 대부분이 궤멸해 겨우 1천 명만 남았다. 나중 이야기지만, 봉기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신중국 건국 10대 원수의 반열에 올랐다. 인민해방군의 창설 원훈 주더 朱德, 허룽 賀龍, 류보청 劉伯承, 린뱌오 林彪 , 총을 잡은 난세의 영웅들이었다.

 

한 달 후 마오쩌둥이 주도한 후난성 湖南省 9.9 추수폭동이 이어졌다. 군중의 지지는 넓었지만 노농혁명군은 국민당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오의 계획을 들은 아내이자 혁명 동지였던 양카이후이 楊開慧글쟁이가 무슨 총이냐며 말렸다.

 

당신은 군대를 모르잖아요?”

마오가 답했다.

그래도 내가 군대를 좀 압니다. 심지어 총도 노획한 적 있소.”

6개월간의 창사 혁명군에서 지낸 사병 시절을 말하며 아내의 타박에 밀리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오는 산으로 가고, 양카이후이는 3년 후 창사 육군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첫째 아들 마오안잉이 형장에 끌려가는 엄마를 따라가려 울부짖었고, 양카이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오와의 부부관계만 청산하면 아이들과 함께 석방하겠다고 회유했지만, 양카이후이는 간단히 거절했다.

 

부부 이전에 혁명 전우다. 내 목은 잘라도 믿음은 자를 수 없다.”

 

당시 창사 육군감옥은 여성 혁명가들의 영혼을 고문했다. 품 안의 아이를 놓고 전향을 요구했고, 여성 혁명가들은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1927. 8. 1.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군인들이 일거에 난창에서 봉기했다. 중국에선 난창기의라고 부른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시원이다.바이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흔히 마오가 홍군의 장정을 통해 유명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전에 이미 마오는 탁월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마오가 농민운동을 지도하던 1926년 당시 후난성에만 농민협회 회원이 136만 명, 영향받는 군중이 600만 명이었다. 후난성 추수폭동 이전에 농민들은 이미 악질 지주를 처단하고 국민당 통치기구를 습격하곤 했다.

 

마오를 농민운동의 스타로 올려놓은 보고서후난성 농민운동 고찰보고가 이때 탄생했다. 점차 봉기 양상으로 치닫는 농민투쟁을 놓고 말이 많았을 때, 마오는 농민운동을 지지했다. 근거가 명확했고 주장도 뚜렷했다. 발로 쓴 보고서였기에 위력이 컸다.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유명한 마오의 경구는 이 시절 이미 기틀이 잡혔다. 현학적이지만 내용이 없고, 남의 권세를 빌어 말하고, 무슨 주의, 분자 하며 동지를 겁박, 고발하는 문장 (마오는 이를 팔고문八股文에 빗대었다)을 극도로 혐오했다.

 

장제스의 쿠데타로 당원이 대량학살 당하자 마오가 울분을 토했다.

혁명은 밥을 사는 것도, 글을 짓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하나의 계급을 엎어버리는 격렬한 행동이다” “정권은 총구로 얻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정권이 무슨 총구멍에서 나오냐? 맑스도, 레닌도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당 간부가 많았지만, 마오는 중공을 설득했고, 이날 그 유명한 말이 탄생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26. 87 중공 중앙회의)

 

추수폭동 후 마오는 천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 변계의 징강산 (井岡山, 정강산)에 들어갔다. “우리가 무슨 수호지 水滸誌 양산박도 아니고 산적이 되자는 거냐?”며 격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음 해 1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주더가 징강산에 합류하자 면모를 갖추었고, 이듬해 펑더화이가 8천의 봉기군을 이끌고 합류하자 비로소 군대 같았다. ‘주마오(朱毛:주더와 마오)’의 홍군 紅軍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상관의 갑질, 홍군에선 상상도 못했다

징강산에 입산할 때 중공의 노농혁명군은 말이 군대지 농민, 광부, 지식인에게 보총도 부족해 죽창과 낫을 쥐여준 게 전부였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냐면, 패전하자 짐 싸고 귀향하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하루아침에 중대 전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폼 나게 혁명하러 왔는데 산에 들어가 산적이나 되자니 정신 나간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대열을 선동하는 자도 많았다. 오죽하면 마오가 노잣돈을 쥐여주며 제발 집에 갈 사람은 가시오!”라고 했을까.

 

홍군을 강한 군대로 만들기 위해 마오는 절치부심했다.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가 인정한 숙달된 정치주임이었고, 펑더화이와 주더는 전쟁을 통해 단련된 장교 출신이었다. 게다가 린뱌오와 허룽은 군사전략의 귀재였다. 사병의 능력은 부족했어도 지휘관은 정치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원이었다.

 

마오는 사병위원회를 만들어 간부는 사병의 조직적 감시를 받도록 했고, 군의 말단조직까지 당 조직을 둬 군에 대한 당의 절대적인 통제를 실현했다. 군에 대한 당의 지배 노선은 이때 탄생했다.(선당노선) 장교는 병사와 똑같이 먹고 자야 했으며 심지어 군복도 같았다. 장교랍시고 속된 말로 아랫사람의 쪼인트(정강이)’를 까거나 원산폭격(열중쉬어 자세로 머리 박기)’이나 우리나라 육군 박 대장처럼 공관병에게 잡일을 시키면 계급장은커녕 당적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편에 취해 부하에게 총질하거나, 사병을 삥 뜯기로 내몰았던 군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급 군부대에 파견된 당원은 정치 사상교육을 했고, 작전계획을 놓고 지휘관과 사병은 열띤 토론을 했다. 강한 홍군은 여기서 나왔다.

 

극단적 평균주의지만 나중에 장교의 갑질에 질려버린 국민당 군이 홍군에 귀순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나를 따라 앞으로!’를 외치며 지휘관이 먼저 죽고 병사들도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바뀌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는 걸 중국 젊은이들은 사회주도층으로의 진입으로 생각한다. 입대는 하늘의 별 따기다. 북경대 등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의 복무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는 걸 중국 젊은이들은 사회주도층으로의 진입으로 생각한다. 입대는 하늘의 별 따기다. 북경대 등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의 복무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신화통신

 

지금 중국군은 형식상 징병제지만, 청년 인구가 너무 많아 실제로는 엄격한 선발제로 운영된다. 안경 쓴 병사가 별로 없고 신체등급이 낮으면 입대를 포기해야 한다. 지금은 덜하지만 마오쩌둥 시절엔 제대 날 펑펑 우는 인민해방군이 많다. 영예로운 감격의 눈물이다. 우리나라 사법연수원 졸업한 거와 비슷했다. 군인과 노동계급이 먼저 당원이 될 수 있고, 제대 후에도 당의 지원이 보장되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통계자료를 봐도 중국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북경시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입대지원 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병력은 200만으로 줄였지만, 국방비는 1444억 위안으로 7년 만에 2배가 늘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175조 원 정도다.

 

중국인의 애간장을 움켜쥐었던 조선인 천재 작곡가

홍군이 팔로군이 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이 되는데, 좌우지간 나중에 중공군이 가장 뜨겁게 불렀던 노래가 팔로군 행진곡 八路軍進行曲이다. 팔로군 행진곡이 지금의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 또 신중국 1세대, 그러니까 지금의 중국 노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가 옌안쑹 (延安頌, 연안송)이다. 완전한 국민가요다. 이 노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행사가 있으면 우리나라 교회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듯 이 노래를 부른다. 중공의 위훈을 기리는 드라마의 단골 주제곡이다. 두 곡 다 한 명의 조선인 청년이 작곡했다.

 

작곡가는 조선인 혁명가 정율성이다. 중국에 가서 당신들 군가를 조선인이 만들었다는 것은 아냐고 물어보면 미친놈 취급당한다. 팔로군 행진곡은 심지어 중국 국가로 거론될 만큼 대단했다. 이후 정율성은 북한의 군가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해 세계적으론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유래없는 천재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8 12 민중의소리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들었던 조선인들 823 민중의소리

항일투쟁의 전설, 동북항일의용군

194477일 장준하는 동료 3명과 함께 일제 쓰카다 병영을 탈출했다. 충칭 임시정부를 향한 6천 리 장정의 시작이었다. 병영에서 조선인들이 보인 비루한 모습이 그의 결행을 재촉했다. 일본 고참병이 외출로 배를 채우고 돌아와 짬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달걀에 비벼 한 숟갈 먹곤 남은 밥을 조선인 병사들에게 던졌다. 조선인 사병들은 마치 개처럼 몰려들어 맨손으로 그걸 먹었고, 한 입이라도 더 먹겠다고 일본 고참에게 갖은 아양을 떨었다. 태어날 때부터 일장기부터 보고 자란 청년들이었다.

 

그가 모멸감을 견딜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육군 지휘관이었던 자도 그 속에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동료와 함께 잔반불식동맹 殘飯拂拭同盟이라는 자존심 비밀동맹을 만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국민당) 중앙군관학교를 거쳐 충칭 임정으로 향했다. 중앙군관학교에 한국광복군훈련반이 있었지만 죄다 쓸모없는 정신교육뿐이었다. 3개월의 교육 기간이 얼마나 지루했던지 장준하가 강연을 자청했다. 내용은 아가페와 에로스였다. 이마저도 얼마나 참신했던지, 훈련반의 조선 청년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국민당의 장제스와 리쭝런은 의열단과 임시정부를 지원했지만, 실속 있는 지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 독립지사들이 좋은 선전 소재라는 점을 활용했다. 일제 병영을 탈출한 50명의 조선 청년들은 대일항전을 호소하는 연극을 했다. 공전의 히트였고 임정과 각 당파는 청년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나는 돌아가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질 것입니다.”

 

충칭의 임정에 도착한 장준하의 인사말로 환영식장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린 우리나라 국기도 본 적 없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이 임정 청사에 높이 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우리 울음을 삼키며 눌렀던 감격, 이것 때문에 우린 6천 리를 걸어왔습니다. 왜놈들은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 일인이 되길 원한다고 날조하지만, 그 반증은 여기 서 있는 우리 50명입니다!”

 

김구가 훅! 하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처절한 통곡이 이어졌다. 모처럼의 좋은 음식에 손대는 자가 없었고, 말도 없는 울음바다는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김구가 너무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갑시다.”라는 말로 산회 되었다.

 

감격이 환멸로 바뀌는 데는 2주가 걸리지 않았다. 장준하는 임정 내각과 교포 100여 명이 모인 주회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해 충칭 폭격을 지원할 것입니다.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왜놈에게 받은 설움을 모두 잊었습니까? 어찌 임정이 네 당 내 당 하며 겨누고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시 임정에는 정당만 6, 계파는 셋집 임정의 의자 수보다 많았다. 심지어 일인 일당도 있었다. ‘좌우통합 전선정부성격의 임정을 이해할 만큼 청년들의 피가 식진 않았다.

 

장준하가 OSS 대원이었던 19458.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OSS 작전명은 '독수리작전'이었다. 1기생의 훈련은 84일 종료되었다. 장준하가 OSS 대원이었던 19458.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OSS 작전명은 '독수리작전'이었다. 1기생의 훈련은 84일 종료되었다.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의 통한, OSS 특전임무

이후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의 주선으로 시안비행장에서 OSS(미 육군 극동전략사무국)의 특전훈련을 받는다. 400여 특전요원의 임무는 미군의 조선 진입 시 최전선에서 첩보활동과 유격대 조직 및 군 시설 파괴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상륙지점은 한국 서해안이었다. 하지만 장준하 일행을 태운 수송기는 여의도까지 갔다 돌아오는 해프닝 끝에 무위에 그쳤다.

 

예상보다 빨리 일제가 항복했고, 미 항모가 도쿄 만에서 피습되는 등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미 극동사령부가 태평양사령부로 개편된 이유도 있었다. 장준하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광복군 작전을 위한 C-47 수송기 한 대마저 아깝다고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폭죽 소리가 대포 소리였던 거리와 달리 임정 청사가 고요한 침묵에 빠진 이유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노련했고 반공정부를 주장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8.15는 이렇게 달랐다.KBS 방송 캡쳐

 

이승만은 비록 개인 자격이지만 1016일 미 군정의 사이드 카 호위를 받고 들어와 20일 연합군이 주최한 환영대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미 일본에서 맥아더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한 미 사령관 하지에 이승만을 소개한 뒤였다.

 

1123, 김구를 비롯한 임정 각료와 장준하는 텅 빈 김포의 벌판에 내려야 했다. 그들을 기다린 건 미군 장갑차 6대였다. 귀국환영을 준비하고 있던 측조차 일정을 몰랐다. 임정으로 권력 이양을 주장했던 김구는 방송국 환국 연설을 하며 이 말을 콕 찝어 넣었다.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OSS 도노반 국장과 국내진입작전을 협의하고 광복군 제2지대 정문을 나서는 김구 (서안, 1945.8.7)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임정 인사들이 3달을 기다려 오직 개인 자격으로 환국했는데, 사정은 북한도 비슷했다. 조선으로 진격하던 2만의 중국공산당 계열의 조선의용군역시 소련군에 막혀 북한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나중 11월이 되어서야 개인자격으로 입국한 이들이 소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된 연안파의 모태다. 장준하는 ‘OSS의 작전만 실행되었더라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 개탄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한 축이었지만, 중국은 동북지방의 조선인 항일의용군의 투쟁을 크게 평가해왔다. 사회주의 계열과 혼재되어 국내 방송에선 소개하기 껄끄러운 소재지만, 1920~30년대의 동북지방을 모르면 씨줄과 날줄로 얽힌 한국, 북한, 중국의 현대사를 모르는 것과 같다. 독립을 위해 중국 땅에 피 흘린 조선인이 너무나 많다.

 

항일투쟁 전설의 시작, 동북 항일의용군

19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을 침공했을 때 중국인은 두 번 놀랐다.

첫째는 거대한 땅덩이에 수백만 정규군을 확보하고 있던 대륙을 감히 섬나라가 넘봤다는 것이고, 더 큰 충격은 중화민국 최강이라던 장쉐량의 동북 군이 총소리 하나 못 내고 퇴각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동북 3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정규군보다 강력한 반격에 부딪혔다. 장쉐량의 이동 명령에 불복하고 남은 지휘관들은 혈전을 치렀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조선인이 들고일어났고, 헤이룽장성에선 국민당 잔류부대와 의용군이 모여 3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육박전 끝에 일본군을 천여 명 가까이 사살했다. 동북지역에 남은 인민들, 당시 이들이 유례없이 간고한 10년 대혈투를 벌일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북항일연군바이두

 

중국당국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일본 침략자와 장장 14년 동안 전투를 해 40여 명의 지도자가 장렬하게 희생되었고, 76만 명의 일본군을 견제했으며 18만 명의 침략자를 소멸해 중화민족이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며 불굴의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했다. 또한 전국의 항일전쟁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을 지원했다.”

 

조선 청년들은 돈이 조금 생기면 총을 사기 위해 암시장을 뒤지고 다녔고, 중국인은 창검술을 할 줄 아는 청년을 모아 유격대를 만들었다. 심지어 병력과 총을 얻기 위해 감옥을 털었다. 명칭은 달랐지만, 이들이 바로 동북 항일의용군이다. 20대는 물론 10대 소년도 많았다.

 

일제가 동학군을 진압할 때 쓴 총이 무라타 연발 소총이었다. 당대엔 이 총이 최고였고, 러시아제 소총도 꽤 쓸 만했다. 조선 청년들은 총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빛이 돌았다. 아편은 물론, 담배와 술 마저 끊는 젊은이가 많았는데 돈 모아 총을 사려 했다. 3.1항쟁의 의의와 제한성을 지도자들이 떠들지 않아도 부모형제의 주검을 봐야 했던 조선청년은 몸으로 체득했다. 무장투쟁이 답이었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유격전이 벌어졌다.

 

총맛을 알아버린 조선 청년들

총 이야기를 하자면 철혈광복단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20년 간도의 조선 청년 6명이 일본영사관으로 가는 현금수송 차량을 털었다. 총을 쏴 마부와 호송 경찰을 죽이고, 반항하는 놈은 쇠몽둥이로 내려쳐 죽였다. 조선은행의 만주철도 자금 15만 원이 나왔다.

 

청년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을 살 계획이었다.당시 러시아 5연발 소총 한정과 100발의 탄환, 탄띠가 30원에서 100원이었으니 잘만 흥정하면 4천 정가량의 총과 탄환을 구할 수 있었다.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했던 독립군이라 여긴 변절자와 상의한 것이 화근이었다. 총값을 흥정한다고 무기업자와 거한 술판을 벌였는데 이날 한 명만 탈출하고 모두 체포되었다. 거금 또한 그대로였다. 변절자는 엄인섭이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은 배역, 염석진과 묘하게 닮았다.

 

중국인은 만주사변 이전엔 조선 청년들이 죽기 살기로 무장투쟁에 뛰어드는 걸 이해 못 했다. 중국 군벌이 독립군부대를 찾아와 시끄러우니 제발 저 멀리 연해주로 가서 싸우라고 하소연하는 건 양반에 속했다. 일제와 결탁해 독립군 사냥으로 돈 버는 중국 마적이 득실거렸다.

 

37년 전 동학 항쟁이 있었고, 이 항쟁에서 살아남은 이가 의병 전투를 이어가고, 3.1 운동은 연해주, 만주의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은 의열단과 임시정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탄생한 영웅의 시대이며, 대학살의 시대였다. 무대는 연해주에서 길림을 중심으로 한 만주일대다.

 

연길은 전시상태며 조선인은 흥분상태다.”

1910년대에 이미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는 한 달이 멀다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했다. 작은 전투들이었지만 국내 진공이었다. 연해주와 간도의 조선인들을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처음엔 함북지역의 포수들을 불러 모아 유격전을 했고 이후 독립단체와 연계해 400명 단위로 진공해 한 번에 수십 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놀란 나머지 두 명의 요원을 급파해 사실을 확인할 정도였다.

 

일제 정보기관은 홍범도와 지역 민심을 이렇게 보고했다.

 

홍범도는 간도와 백두산을 넘나들며 지형을 익혔는데 조선과 간도의 지형 읽기는 신 에 가깝다.”

 

의란구 지방(연길)은 전시 분위기며 정신은 일종의 흥분상태다. 사람들은 홍범도를 심히 숭배하고 있다. 한족(조선) 독립이 다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아주 많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이라 불렀고 평안도 지방 민중은 축지법을 쓰는 장군이라는 전설을 믿었다. 험한 준령 타기를 업으로, 호랑이 잡으러 다녔던 산포수 부대의 대장이었던 홍범도에게 걸맞은 평가다.

 

홍대장 가는 길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

 

당시 평안도를 풍미했던 '날으는 홍범도'의 가사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를 부르며 일본놈을 이기기만 하면 스포츠 스타와 비행사에게도 열광했던 시절이다. 일제 경성헌병대 정보자료엔 당시 만주와 러시아에 결집한 독립군 병력이 16천이고, 국내 진공은 시간문제라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

 

여천 홍범도는 김좌진에 비해 저평가되었다. 사망한 곳이 카자흐스탄이라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김좌진과 함께 전투했던 이범석은 회고록 을 통해 그를 많이 깍아내렸기 때문이다.

 

여천 홍범도는 김좌진에 비해 저평가되었다. 사망한 곳이 카자흐스탄이라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김좌진과 함께 전투했던 이범석은 회고록 을 통해 그를 많이 깍아내렸기 때문이다.국가보훈처

 

홍범도가 크게 이길수록 동포들은 더 많이 학살당했다

192064, 홍범도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일제 헌병대를 박살 내고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다. 추격한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전멸하고, 다시 덤빈 추격군이 봉오골에서 무리 죽음 당했다. 대한독립군 1,200여 명이 일본군 500명을 궤멸시켰다. 독립전쟁 1회전, 봉오동 전투는 무적황군의 신화를 처음으로 깼다.

 

홍범도의 기질은 청년 이봉창만큼이나 독특했다. 자신을 착취하던 제지소 주인 3형제를 도끼로 죽이고 항일의병에 나섰다. 함경도 철령 고개에서 동료 김수협과 단둘이서 화승총으로 일본군을 10명을 죽여 총을 노획했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결심도 순간이고, 일본군에 대한 습격도 간단했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정보원들의 자료를 종합해 홍범도의 특질을 기록에 남겼다.

 

홍범도는 호걸의 기풍이 있어 (중략) 독립군 각파가 항상 행동일치를 하지 못하고, 각 독립군이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고 단독행동을 취해 함남 삼수, 갑산의 국경을 습격해 여론을 환기하고 독립군의 의기를 보이려고 하는 등 본격적 기백을 토로하기도 하여, 역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봉오동 전투 후 일제는 25천의 병력으로 북간도를 포위했다. 훈춘, 왕청, 화룡 일대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경신참변). 영아를 대창에 꽂아 어미 앞에 던졌고, 여성은 강간 후 죽이고 아이들을 한 줄에 말아 불구덩이에 던졌다. 독립군과 가깝다 싶은 사람은 얼굴 가죽을 뜯거나 눈을 파냈고, 이미 살해당한 아버지를 땅에 묻으면 다시 파내게 해 유골이 모두 바람에 날릴 때까지 석유로 태웠다. 실험용으로 독가스도 동원했다. 10월부터 두 달간의 통계만으로도 이 일대 조선인 3664명이 살해당했다. 학교, 교회, 민가 등 남은 곳이 없었다.

 

북이 모두 인정하는 항일명장 양세봉

같은 시기 10, 화룡현 청산리 부근에서 1,200의 조선독립군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6일간 10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연대장, 장교 200여 명을 비롯해 1,200여 명의 일제 토벌군을 죽였다.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 북로군정서가 주력이었다.

 

조선독립군의 승전 뒤엔 학살이 잇따랐다. 크게 이길수록 학살의 범위도 넓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모르면 이후 1930년대 폭풍같이 일어선 조선청년들의 무장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도, 왕청, 용정, 화룡 등 길림의 항일유격대는 조선인의 피를 먹고 성장했다.

 

김좌진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소련으로 넘어간 홍범도 부대는 무장해제 당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끼리 서로 죽이는 자유시 참변이 빚어졌다. 소련 영도자 레닌에게 권총도 선물 받았지만, 강제이주와 노동으로 말년은 불우했다. 지도자는 곧잘 죽거나 떠났지만, 조선인은 약간의 쉼도 없이 반일 무장투쟁을 했다.

 

조선혁명군 대장이었던 양세봉은 홍범도, 김좌진의 빈자리에 남아 1934년까지 항일유격전쟁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모두에게 존경받았고, 지금은 중국과 남과 북 모두 그의 업적을 인정한다.

 

길림의 항일유격대바이두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엔 한일관계처럼 큰 불신의 강이 있었다. 중국인은 조선일을 전투 한번 없이 일제에 나라를 바치더니, 이젠 일본인이 되려고 안달한다.”고 보았다. 만주엔 중국말과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일제 앞잡이 조선인도 있었고 무엇보다 간도이주정책으로 대거 둥지를 튼 조선인과의 갈등도 심했다.

 

양세봉은 조 중 연합유격부대를 만들어 조중 단결의 모범을 보였고 민중에게 헌신적이었다. 일제와 싸우겠다면 이념과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아무리 훌륭한 싸움꾼이라도 인민 위에 군림하면 가차 없었다. 823 민중의소리

 

중국의 오성기엔 조선인의 피가 스며있다.”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든 조선인

중국의 오성기 五星旗엔 조선인의 피가 스며있다.”

 

마오쩌둥은 오성기엔 조선인의 피가 스며있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에 투입되는 인민해방군 병사는 사상교육 두 가지를 받아야 했다. 하나는 중국혁명에 조선인 혁명가가 기여한 것에 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항미원조 보가위국 (抗美援朝 保家衛國). 즉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 것이 가정과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전쟁 성격교양이었다.

 

따져보면 중공의 광저우 봉기 때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사망한 이들이 조선인이었고, 중일전쟁 시절 타이항산맥 太行山戰鬪 최선두에서 일제에 맞서 수천의 피를 뿌린 이들이 조선의용군이었다. 타이항산맥은 홍색 수도 옌안의 교두보이자, 일제의 침략로이기도 했다. 얼마 전 중국은 지하 5Km의 대륙간탄도 미사일 기지를 공개했는데 바로 이곳 타이항산맥 지하다.

 

1930년대 상하이 극장가는 항일영화가 휩쓸었다. 풍운아녀에 나온 주제곡을 중국은 국가로 선정했다.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중국인의 기억과 당시 중공의 입장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바이두

 

국기 國旗만 그런 건 아니다. 지금은 중국의 국가가 된 의용군행진곡 義勇軍行進曲에도 조선인의 피가 녹아있다. 1930년대 상하이 영화계를 집어삼킨 건 당시 국민당 정부 대신 유격전을 벌였던 동북지방의 영웅들이었다. 의용군행진곡은 이 시절 동북항일투쟁을 그린 영화 풍운아녀 風云兒女(1935)’의 주제가다. 영화의 말미, 동굴에 운집한 이들이 횃불을 밝혀 낫과 몽둥이를 들고 항일전투에 나서며 의용군행진곡을 목청껏 부른다. 당시 영화가 끝나면 극장엔 전단이 살포되고 항일의 구호와 노래가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쳤다. 의용군행진곡의 가사는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처럼 선동적이다.

 

가자! 노예를 거부한 자들! 우리의 피와 살로 새 장성을 쌓아 올리자!”

 

1932년에만 50, 항일기간에만 100만 명의 동북항일의용군이 활동했다. 북만 지역에선 자오상즈라는 청년이 유격전을 벌였고, 헤이룽장 성 주석이었던 마잔산 馬占山은 가장 먼저 항일의 횃불을 올렸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관인 양징위 楊靖宇는 항일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국민당 계열의 유격대는 초기 국민 구국군’ ‘국민 의용군등으로 활동했고, 공산당 계열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활동했다. 1936년 흩어졌던 유격대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 동북항일민주연군 東北抗日民主連軍이다. 장정 때라 동북지방에 중공 당원이 별로 없었다. 항일연군은 조 중 항일부대가 결집한 반일 전선부대였다. 1군에서 11군까지 편재했는데, 남만, 북만, 동만을 나누어 일제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초기 지린성 유역의 유격대엔 조선 청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백색 지구의 홍색 근거지, 중공 당원 천지 조선인 마을

1932년 조선인 촌락이 집중되어 있던 옌지(延吉 연길), 왕칭(汪清 왕청), 훈춘(琿春 혼춘), 허룽(和龍 화룡)20여개 항일유격 근거지가 있었다. 근거지 군민 2만여 명 중 1,200명이 중공 당원이고 1,300명이 공청 단원인(공산주의 청년단) 희한한 지역이었다. 안투(安圖 안도)유격대라고도 불렸고 왕칭 유격대로도 불렸다. 1937년 이후 일본군 현상수배 전단에 김일성이 빠지지 않았고, 현상금도 꽤 높았기에 조선 사람들은 그냥 김일성 부대라고 불렀다. 일제는 김일성()金日成匪라 기록했다. 소속은 동북항일연군이었지만 1936년 코민테른이 "조선 혁명가는 응당 조선 혁명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전한 이후, 조선인과의 사업에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도 했다. 김일성이 지휘하던 유격대엔 조선인과 중국인이 섞여 있었다.

 

초창기 만주지역의 공산당 세력 주력은 조선인이었다. 1929년 당시 중공 만주성위원회 중국인 당원이 120명이었는데,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방침'으로 조선인이 가입하기 시작하자 당원 수는 1,100명으로 폭등했다. 당시 항일투쟁의 쟁점은 어떻게 싸울 것이며 어떤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였다. ‘준비론을 주장하는 민족지도자도 많았지만, 만주의 조선 청년들은 당장 무장투쟁을 선택했고 독립한 조선은 계급이 철폐된 평등 국가여야 한다는 꿈을 품었다.

 

보천보 전투에 앞서 국내 진공을 한 유격대도 있었다. 조선인 이홍광 유격대다. 동북항일연군 1군 참모장이었던 이홍광은 보천보 전투 2년 전인 1935년 평북 후창으로 진공해 일제 군경을 타격했다(동흥 전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도 며칠간 크게 다루었다. 이후 발생한 보천보 전투를 언론은 2의 동흥 습격 사건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동흥 전투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습격했고, 친일부역자나 지주라고 지목해 납치한 사람 상당수가 무산계급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라는 논문도 있다. 당시 지주를 납치해 몸값을 받아 풀어주는 건 마적이나, 반일무장단체의 관행이었는데, 일종의 보급 투쟁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양상보다 기습 목적과 무장대에 대한 선전 내용이 제한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일성 최대의 정치적 자산, 보천보 전투

2년 뒤 김일성 부대가 야간에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를 습격했다. 그 시절 동포들은 군복 입고 총을 든 독립군만 봐도 펑펑 울었다는데, 백여 명의 조선청년이 단숨에 부락을 점령하고 주민을 한데 모아 자신을 조선혁명군이라고 소개하며 연설했다.

 

심야에 일제 기관들이 불타오르고, 도열한 군인의 총열에 화염이 번쩍거리는 장면만큼 극적일 수 있을까. 보름 후 김일성 부대는 추격에 나선 일본군 연대를 창바이 (長白 장백)현 간삼봉에서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보천보 전투(혜산전투)가 더 많이 알려졌다. 보천보라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였지만 인근에 혜산진이 있어 소문은 국내는 물론 국경 넘어 만주까지 퍼졌다.

 

주민들은 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당시 조선 사람에게 이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인 유격대 이야기는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레퍼토리였고, 두만강을 넘어가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곤 했다. 공산당이라면 고개를 저었던 임정 주석 김구마저 요원을 파견해 김일성 부대와 만나려 노력했다.

 

보천보 전투는 중일전쟁이 고조기에 일제의 후방 조선에서 터진 사건이라 그 상징성으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조선인 독립군은 죄다 전멸했고, 전 중국을 점령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선전하던 일제의 뒤통수를 후려친 사건이었다. 하지만 손실도 컸다. 일제의 대규모 토벌이 동만 지역 항일연군에 집중되고 두 달 뒤 조국광복회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는가 하면 군사훈련을 하며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던 국내 노동자 비밀조직도 파괴되었다.

 

조선인 토벌하러 다닌 조선인들, 간도특설대

보천보 전투 다음 해 1938년 극한의 추위 속에 김일성 부대가 100일간 토벌군에 쫓겨 설원을 헤치며 나갔던 행군을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러왔다. 그리고 이듬해 토벌군 75천의 병력이 동만 지역을 집어삼켰다. 2만 명이 넘던 근거지 유격구도 토벌당해 4천 명의 주민만 남았다. 1938년 일제의 대규모 토벌이 시작될 무렵의 동북항일연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1만 명의 유격대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공에선 유격부대와 주민과의 관계를 흔히 물과 고기로 비유해왔다. 유격대의 생존기반은 생산하는 주민과 유격 근거지였다. 일제는 고기를 잡기 위해 먼저 을 없앴다. 유격전의 묘미모순으로 바꾸었다. 유격전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인근 부락을 청소했다. ‘간도 특설대는 일본군에 뒤질세라 더욱더 악랄하게 주민을 학살했다. 동북지역의 조선, 중국 의용군의 처절한 투쟁은 1940년까지 이어지다 끊겼다. 지휘관이 대부분 죽었고, 대원들 역시 극악한 일제의 토벌전에 희생당했다.

 

간도특설대 (間島特設隊)1938년에 옌지현(연길) 특무과장 오고에가 설립한 항일연군 토벌대다. 주적이 김일성 부대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천황에 대항하는 조선 빨갱이는 조선인 황군이 잡아야 한다며며 조선인 병사로만 채운 토벌대였다. 전과는 별거 없었지만, 주민에 대한 토벌은 잔인했다. 효수, 강간, 방화, 집단학살이 주특기였다.

 

이들 중 백선엽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고, 신현준은 해병대 초대사령관으로, 이후 김석범, 김대식이 2, 3대 사령관 바통을 이어받았다. 만주군, 일본 육군, 해군 출신 장교를 모두 해병대에 몰아넣었기에 초기 해병대는 일제 병영의 가혹한 '후임학대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전에 조선인 때려잡던 간도 특설대출신이 지휘했지만, 해방된 나라에선 반공하나면 독립군 고문 기술자였든, 일본군 위안부 사냥꾼이든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한국군을 조직하며 승승장구했다.

 

간도에서의 주민토벌 경험은 1948년 봄, 제주도에서 정확히 재현되었다. 섬에 갇힌 무장대와 주민을 소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무장대와의 교전이 발생하거나 산에 올라간 가족이 있으면 남아도 죽고 산에 올라도 죽는기구한 운명이었다. 끔찍한 소탕을 피해 밭고랑에 숨어있다 걸린 자도 죽이는 기이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중국 국민당이 중공에게 연전연패해 인민해방군이 창장을 향해 노도와 같이 남하하고 있었을 때라 미국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무렵이다. 1950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 계엄사령관이었던 신현준은 예비검속으로 48년에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던 좌익 의심 도민을 마저 학살했다.

 

유학자를 땅에 묻었던 진시황도 우리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친일이 반공으로, 반공이 애국으로 포상되던 시절이었으니 신분세탁도 간단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면 육군대학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별 몇 개쯤은 우습게 땄다. 오히려 일본군 시절 토벌 경험을 자랑으로 뇌까렸다. 여순사건 등으로 좌익경력 군인에 대한 숙군작업이 한창이었으니 이승만에게 믿을 놈이라곤 빨갱이 사냥꾼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 청산과정은 장엄했던 조선인의 투쟁을 생각하면 꺼내기도 부끄러운 이야기다. 입법의원에선 친일파 20만 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피의자는 7천여 명, 기소 221, 선고 건수 40, 징역 14, 사형 집행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징역을 받은 이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중국은 친일파는 물론 신중국 건설 후에도 후방을 교란했던 국민당 패잔병 등을 중국답게청산했다. 3년간 280만 명을 체포, 징역형에 120만 명, 70만 명은 그냥 죽여 버렸다. 이 중 반동 친일 지식인만 46천 명에 달했다. 마오는 틈만 나면 최초의 통일국가를 수립했던 진시황에 자신을 빗대었다.

 

유학자를 생매장했던 진시황은 우리가 지식인을 처형한 것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새로운 통일 중국을 위해 쓰레기 치울 땐 과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 체제, 구 사상의 완벽한 파괴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터전이라는 마오의 지론은 문화대혁명때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달랑 16명의 대원과 소련으로 넘어간 김일성

옌안의 마오가 동북지역에 대한 보고를 받을 때 김일성은 조선인 유격대장 중 중국어에 능통하고 말하기 좋아하며 대원에게 신망 높은 인물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초기 존안 자료엔 민생단 의심이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김일성은 달랑 16명의 대원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갔지만 빨치산 대장 김일성의 정치적 자산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윈난 육군강무단을 나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을 했던 최용건은 마오쩌둥이 앙징위와 함께 항일연군의 핵심인물로 꼽을 만큼 중공에서 영향력이 컸다. 주더의 난창봉기, 마오의 추수폭동의 시절 광저우에서 무장폭동을 일으켰으니 중공 무장투쟁 1세대다. 항일연군 내의 서열 또한 김일성에게 뒤지지 않았다. 김책, 최현, 강건, 최용진, 김일 역시 경력에선 김일성에 밀리지 않았지만, 소련 88저격여단 시절 하나같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지목했다.

 

 

제일 아랫줄 오른쪽 끝에서 2번 째가 김일성이다. 앞줄 한가운데가 여단장인 저우바우중이다. 사진에흑룡강당사 자료 ()바이두

 

동북항일연군 23사장 시절부터의 노선에 대한 결정력과 강력한 전투지휘능력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소련의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중공이 조선 정치에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조선 문제와 관련해선 토종 조선인 파르티잔들과 합을 맞추려 했다. 1938년에 이미 소련은 마오쩌둥을 중공 영도자로 인정하며 단결을 주문했다. 마오와 대결했던 그룹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소련 88여단 시절 책임자는 중공의 저우바우중(周保中 주보중)이었지만 중공이나 소련이나 모두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유격대를 조선공산주의 그룹의 적통으로 인정했다. 소련 88 독립저격여단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미, 영이 자금을 대고 소련이 훈련시킨부대였다. 극동전선 정보과 소속으로 중국에선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 불렀다. 장준하의 OSS 특임이 실패로 끝난 반면, 88국제여단은 4588일부터 소련의 100만 병력과 함께 일제 관동군을 소탕하는 전쟁을 치렀다. 북한에선 매우 중요한 진격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처형 직전 웃을 수 있었던 항일청년들의 낙관주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전력을 놓고 국내에선 가짜 김일성주장이 한동안 돌기도 했다.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과 함께 싸웠던 중국에선 만주에서 개장수도 해 본적 없는 사람들의 객쩍은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중공과 구소련의 기밀문서가 풀리기 전 우리나라에선 상당한 영향을 발휘했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계통과 김일성의 지위, 소련으로의 월경 이유 등인 것 같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릴 들을 만큼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중공과 소련의 지휘체계나 기록이 허술하진 않았다. 아직도 옌볜엔 중공 당사 연구가들의 깨알같은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1935년 동만 특위 서기였던 웨이증민 (魏拯民 위증민)이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동만 지역의 상황을 보고했고 동북항일연군 2군 지휘관이었던 저우바우중과 공산당 만주성위 지린성 순시원이었던 양쑹 楊松이 조선청년의 처절한 투쟁을 중공에 소개했다. 저우바우중은 김일성의 반민생단 투쟁에 결정적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이다. 항일연군 4군을 창설했던 리옌루 李延祿는 해외에 동북의용군 연락사무소를 차려 김일성과 조선인 유격부대의 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주보중은항일유격일지를 남겼고, 양쑹은 중공의 기관지해방일보에 조선인 항일유격대를 소개했다. 2014년 용정시당안국은 저우바우중이 교열하던 동북항일련군 계통표를 길림신문에 기증했다. 1934까지 김일성과 함께 싸웠던 동만특위 서기, 퉁창잉 童長英의 무용담이 아직 중국 노인들 사이에 남아있다.

 

가운데 작은 청년이 중국의 항일영웅 자오상즈다. 동북항일의용군은 주로 청년의 힘으로 진행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체구는 작았지만 무려 동북항일연군 3군장이다.북경일보

 

중국의 항일영웅인 자오상즈 趙尙志와 동북항일연군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다. 중앙의 군복 입은 작은 청년이 자오상즈다. 홍안의 청년 자오상즈는 항일연군 3군장으로 북만지역의 관동군을 격퇴했다. 23살에 유견전에 뛰어들어 34살에 사망했다. 북만의 설산에서 나무껍질 씹으며 유격전 한 것이 그의 청춘 전부였다. 사망 후 자오상즈의 사진이 없자 중국당국은 시신의 사진을 토대로 그의 초상화를 만들었다.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주역은 청년이었다.

 

처형을 앞두고 동료들과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해맑게 웃는 항일연군 청년들의 사진도 있다. 당시 아리랑을 부르며 비장하게 가는 청년이 있었고, ‘오늘도 싸우기 좋은 날이라며 웃으며 가는 청년도 있었는데 "나를 대신해 끝까지 싸워달라!"는 말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청년들이 뿌린 피가 유난히도 빛났던 만주 설원의 이야기다.

 

항일무장투쟁의 흑역사, 민생단과 김산 사건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든 조선인, 동북항일연군

축복받은 중국의 붉은 별, 저주받은 아리랑의 노래

 

마오쩌둥은 선전의 달인이었다. 장정을 마치고 옌안에 도착할 무렵 장정을 소개해 중공의 건재함과 노선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에 대한 글을 공산당에서 편찬할 경우 삐라취급 받을 것이 분명했다. 저명한 중국전문 외신기자였던 에드거 스노에게 다리를 놓았다. 마오가 구상하고 저우언라이가 기획했다. 적색 수도 옌안의 토굴에서 마오를 인터뷰한 에드거 스노의 글과 강연은 중국인은 물론 세계를 흥분시켰다. 중공 또한 에드거 스노의중국의 붉은 별을 극찬했다.

 

장정을 최초로 알린 이는 에드거 스노가 아니다. 일 년 전인 1936년 영국인 선교사 보샤트 (Rudolf Bosshardt)가 홍군의 포로로 겪은 장정 이야기를 엮어The Restranining Hand(묶인 손)을 출간했다. 또 같은 해 장정 대오에서 비밀임무를 받고 소련으로 향한 천윈 陳雲수군서행견문록 隨軍西行見聞錄을 영국과 소련에서 출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중국의 붉은 별을 기억한다. 마오의 생각이 맞았다.

 

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Helen Foster Snow) 역시 걸작을 내놓았다.Song of Ariran:The Life Story of a Korean Rebel(이하 아리랑의 노래)로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은 장지락)을 알렸다. 그러나중국의 붉은 별과는 달리아리랑의 노래는 중국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이 책은 중공에겐 조선인 간첩의 회고록일 뿐이었다. 헬렌 포스터 스노에게 장지락은 문학적 축복이었지만, 간첩 심사를 받던 장지락 張志樂에게 외국인 기자와의 잦은 인터뷰는 죽음만을 재촉했다.

 

책의 운명 또한 불우했다. 1941년 출판된 아리랑의 노래는 미국 지식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1945년 매카시 광풍으로 헬렌은 두 차례나 청문회에 끌려 나와야 했다. 서점에서 책은 사라졌다. 한국에선 46신천지에 연재되다 사라졌고 1983년에야 서적으로 소개되었다.

 

장지락은 헬렌이 만난 동양인 중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옌안에 머물던 헬렌이 루쉰예술학교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빌릴 때마다 대출카드엔 장명 (장지락의 중국 이름)’ 라는 단 한 명의 이름만 있었다. 헬렌의 정중한 인터뷰 제의를 고심하던 장지락은 조건을 달아 승낙한다.

 

중국당국에 체포되어 일제 관헌에 넘겨지기 전 톈진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사진. 김산의 호적에 따른 취조기록에는 이름이 장지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종 자료를 비교하면 김산은 장지락으로 사용했다. 재중 조선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적대적 방침은 한결같았다.구글캡쳐

 

장지락은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인 혁명가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세계에 알려달라고 했고, 헬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책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헬렌은 보안을 위해 가명을 제의했다. 이날 헬렌 포스터 스노는 님 웨일즈, 장지락은 김산이라는 가명을 선택했다.

 

김씨는 조선인에게 가장 흔한 성이고 산은 제가 요즘 흔들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넣었습니다.”

 

인터뷰는 헬렌의 거처였던 아치형 토굴에서 22차례나 이어졌다. 첫 만남, 헬렌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여행경험을 꺼내며 조선인은 유순하고 체념적이며 순종적인 민족이라고 했다. 장지락은 헬렌의 눈을 똑바로 보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아시는군요. 우리 조선인은 단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의병들의 무장투쟁, 독립군의 전투, 의열단의 공격, 지금은 만주의 파르티잔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수천 명이 투옥되고 처형당했지만 우린 굴복하지 않습니다.”

 

장지락은 시간을 지켰고 당당하고 품위 있었다. 인터뷰 시간에 늦으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180cm의 키에 굳게 닫힌 입술. 어두운 동굴에 호롱불이 흔들리면 그의 얼굴선은 더욱 굵게 보였다. 인터뷰할수록 식민지 조선과 혁명가 장지락에 대한 헬렌의 연민은 깊어만 갔다. 인터뷰를 끝낸 날 와인에 달뜬 헬렌은 장지락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헬렌에게 혁명가 장지락은 지금껏 만난 모든 동양인 중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죽음만이 나를 좌절시킬 수 있다던 혁명가의 죽음

장지락은 자신을 민족주의자였으며, 아나키스트를 거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사랑한 다수의 조선인 혁명가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부연했다. 헬렌은 당시 일제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요인암살을 위해 나섰던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혈관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희생의 순간에 자기를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장지락은 합니하 哈尼河(광화촌)까지 걸어가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15, 입학기준은 18세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무관학교 복도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년의 목청에 놀라 달려온 사람이 대한제국 육군 참의 출신이자 교장인 이세영 李世永이었다. 결국 장지락을 특례 입학시켰다.

 

장지락은 독립신문, 의열단, 국립 광둥대 의학부를 거쳐 중공의 광저우 봉기로 조선인과 함께 전투했고 하이루펑 海陆丰 소비에트’ (하이펑 海丰 · 루펑 陆丰 . 해륙풍)에서 공산주의를 인류의 양심으로 받아들였다. 북경시당 조직부장()까지 지낸 그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방침 결정 후 만주지역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입당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공 중앙의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거물이었다. (1928. ‘12월 테제’)

 

1930년 체포되었을 때 6차례의 물고문으로 폐가 망가졌지만 조직의 비밀을 지켜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고, 1933년 동지의 변절로 남의사에 체포되었지만 1년의 복역 끝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문을 견뎌 생환한 전력은 오히려 일제 특무로 의심받았다.

 

조선인 당원 한위건이 그의 당적 박탈을 주도했고 결국 그는 특무는 아니지만, 당원도 될 수 없는일종의 보류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장지락이 단검을 놓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선언할 만큼의 모진 악연이었다. 김산이 괴사한 폐를 안고 옌안으로 간 목적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승인보다 당적 회복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장지락은 유물론자였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음만이 나를 좌절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투쟁에 뛰어든 이후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제와 싸우는 시간보다 소탕전으로 동료들이 학살당하고 조선 청년들끼리 편을 갈라 죽이고 밀고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불신 지옥을 거쳐 얻은 건 만신창이 영혼과 육신이었다.

 

아리랑 고개 너머 죽음 위에 피는 꽃이 조선 독립이오

인터뷰는 장지락이 살벌한 심사를 받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당적을 복구하고 전선으로 나가길 원했지만 심사는 길었고 중공은 군정대학 강의 외엔 임무를 주지 않았다. 한가했기에 비참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장지락의 마지막 인터뷰는 성사될 수 있었다.

 

당적복구를 포기한 그는 전선으로 나가길 청원했고 당은 그를 호출했다. 전선으로 가는 줄 알았던 그는 외딴 길, 홍군에 둘러싸여 처형당했다. 혐의는 일제와 결탁한 특무이자 반당 행위였다. 19381119. 겨우 33살이었다.

 

국공합작 이후 옌안은 혁명적 낭만이 넘치는 황토 근거지로 보였지만, 내부에선 살벌한 숙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달 전 이미 중앙 서기처 사회부 부장 캉성 康生은 장지락에 대한 비밀처형 명령문에 서명했다. 그해 1월 캉성은일제 침략자의 함정이며 민족의 적인 트로츠키 비적을 제거하자는 글을 통해 공산당 내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다.

 

4월 마오쩌둥과 끈질기게 대립했던 실력자 장궈타오가 국민당에 투항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9월 중공 전체회의에서 반당분자 숙청을 결의했다. 문화대혁명의 저승사자 캉성은 이미 옌안시절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트로츠키파도 일제특무도 아니었지만 중공은 장지락을 그 교집합 어디쯤으로 보았다. 은밀한 내사, 조용한 처형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헬렌은 김산과의 공저로 책을 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메카시 선풍이 강해지자 헬렌은 스위스로 떠난다. 중공에 대해선 친화적 입장이었으며 중미 수교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구글

 

장지락 사망 후 신중국이 입수한 국민당의 자료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는 미련한 놈이라는 심문기록과 체포명령서가 있었고 일제의 문건엔 절대로 전향하지 않을 자라는 기록만이 있었다. 1983년이 되어서야 중공 중앙위 조직부는 장지락의 당적과 명예를 복권했다. 그가 죽은 지 45년 만이었다.

 

장명 동지(장지락의 중국 이름)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지락이 아리랑을 조용히 부르자 헬렌은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곡이라고 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 아래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죠.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입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략) 그리고 아리랑은 일본군 3천 명을 전멸시킨 독립군들이 모여 부른 노래입니다.”

 

장지락은 아리랑이 죽음으로 가는 노래라고 표현했지만, 청산리 전투 후 대원들이 승리의 감격으로 부른 노래 또한 아리랑이라고 했다.구글

 

장지락은 아리랑 너머가 끝이 아니라, 그 죽음 위에 새롭게 피는 꽃이 조선독립이고, 조선인은 이 고개를 오늘도 내일도 넘을 것이라 했다. 김산은 그렇게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김산을 체포한 남의사, 김구와 여운형을 암살한 백의사

2002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비밀결사 백의사를 다뤘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백의사 白衣社 단원이자, 미국 CIC(미 육군 방첩부대)요원이었으며 여운형 암살 또한 백의사와 연루되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저게 뭔 소린가 했지만, 사학자들은 나올게 나왔다는 반응이었다. 미군 방첩대(CIC) 소속 실리 (Cilley)소령이 1949년 김구(金九) 암살 직후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1933년 장지락이 두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끌고 간 조직이 남의사 藍衣社였다. 남의사는 황푸군관학교 극우파 군인들이 모여 만든 장제스 직할 첩보부대로 요인 암살, 테러, 고문, 방첩 활동을 전문으로 했다. 국민당 상징복인 남의를 따 남의사로 작명했다. 남의사에 체포된 혁명가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개전향 아니면 죽음이었다. 살인면허를 받았기에 누구도 남의사의 고문을 견딜 수 없었고, 시신을 새벽 시궁창에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조선인에 대해선 일본 영사관으로 이첩시키곤 했을 뿐이다.

 

이 남의사에서 공산당원 색출하던 염동진(본명은 염응택 廉應澤)이 만든 조직이 바로 백의사 白衣社. 이름은 가당찮게도 백의민족 白衣民族에서 따왔다. 염동진은 관동군에 체포된 이후 일제 밀정 짓을 하다 광복 직후 월남해 백색테러 조직 백의사를 만들었다. 미군정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세력이 약해졌다. 표면은 반공이었지만, 내용은 반정부 및 좌익계열 지도자와 독립군 출신 인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김구와 여운형 암살은 성공했지만, 김책, 김일성 등에 대한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염동진을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이렇게 표현했다. (중략) 냉혈 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칼끝 찰나 그의 하루 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구글

 

장지락도 속한 바 있던 의열단이 군대창설을 목표로 갈라질 때 한 부류는 남의사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광복군으로 수렴되었고, 또 한 부류는 중공에 합류해 조선의용군으로 활약하며 관동군과 싸웠다. 남의사 출신이 백의사를 만들어 일제 앞잡이들을 모아 민족 지도자를 암살했다. 독립운동사를 추적해 중국으로 가다 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너무나 많다.

 

항일무장투쟁의 흑역사, 민생단 사건

아리랑의 장지락만 불우했던 건 아니다. 1932년에서 1936년 초까지 최대 2,000여 명의 조선인 혁명가와 유격구민이 살해당했다. 일제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조선청년들이 설산을 헤쳐 유격대에 합류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처형이었다. 민생단 사건이다. 1932년 동만 옌지(延吉 연길) 노두구 유격대가 일제 헌병 2명을 사살하고 통역을 생포했다. 유격근거지에 일제 헌병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역을 심문하자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만주성위 동만특위 노도구 구위원회 비서 송영감이 이미 작년에 투항해 민생단이란 간첩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송영감을 잡아 심문하니 더 충격적인 자백이 나왔다.

노도구 유격대장 박동근을 비롯해 옌지현 주요 간부 20명이 민생단원이며 목표는 일제와 결탁해 유격대의 소멸하는 것이라는 자백이었다. 동만이 발칵 뒤집혔다. 동만특위 서기 퉁창잉 童長英은 전 조직에 비상을 걸고 특무 색출에 들어갔다. 지난 날의 시련이 모두 해명되었다. ‘불패의 영도로 무장한 동북유격대가 일제 토벌대에 의해 심각한 손실을 본 것은 모두 민생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심문도 간단했다. 의심가면 우선 고문했고, 고문 끝에 얻은 자백은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처형방식도 잔인했다. 총알이 아깝다며 도끼로 찍어 죽이거나 구타로 죽였다. 물론 이런 처형방식은 동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군이 점령한 소비에트 구역에서 지주에게 가한 죽창처형은 더욱 끔찍했다. 집회 중 기침을 하면 암호로 의심받았고, 고향 노래를 부르면 혁명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심리공작’, 밥을 흘리거나 일을 게을리 해도, 오발 誤發해도 처형되었다. 심지어 옷을 깔끔히 입고 일을 열심히 해도 체포되었다. ‘특무 정체를 위장한다는 혐의였다. 희생된 유격대원은 하나같이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반민생단 투쟁이 광기어린 마녀사냥으로 치닫자 중공은 반경유를 순시원으로 내려 보냈다. 좌경방침을 바로잡기 위해 온 반경유 潘慶由는 유격대 현 책임자들을 좌경분자로 몰아세웠고, 이 과정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훈춘현 정치위원 박두남이 반경유를 살해하고 도주한다. 더 큰 문제는 도주한 박두남이 일제의 토벌대 대장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완화 기미를 보이던 반민생단 투쟁은 더 잔혹한 광풍이 되어 동만 지역을 휩쓸었다. 중공 중앙은 동만 지역 유격구민 80% 이상, 조선인 유격대원 95%가 민생단원이라는 보고를 끊임없이 받았다. ‘조선인 공산주의자 = 일제 특무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사실 민생단은 19322월 지린성 룽징에서 친일파 조병상, 박석윤, 김동한이 간도 조선인 자치를 주장하며 만든 단체지만, 일제가 정책을 바꿔 5개월 만에 해체된 조직이었다. 민생단은 유령이었다. 유령이었기에 실체가 없었고, 실체가 없었기에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민생단이 아닌 조선인 유격대원을 만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35년 웨이증민(魏拯民 위증민)은 동만특위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숙반 위원회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해 더 강한 투쟁을 주문했다. 그러나 숙반 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송일이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된다. 일제 특무가 일부러 간도협조회명의의 편지 한 장을 유격구에 떨어뜨리고 갔다. 수신인은 송일로 되어 있었다. 일제는 그토록 잡고 싶어 하던 유겨대 지휘관을 쪽지 한 장, 헛소문 한 번으로 쉽게 죽일 수 있게 되었다. 혼돈의 투쟁에 지친 웨이증민이 거의 울먹일 듯한 투로 중앙에 보고 헸다.

 

민생단이 아닌 조선인 유격대원을 만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일성 역시 민생단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다.”

 

반민생단 광풍은 1936년에 가서야 진정되었다. 길동위원회 우핑과 김일성이 다홍홰 회의에서 반민생단 좌경노선의 청산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일성은 이어 마안산 馬鞍山에서 민생단 혐의로 투옥되어 있던 100명의 대원을 석방하며 조사서류를 모두 불살랐다. 중공 고위 간부였던 저우바우중 周保中과 김일성의 신뢰는 더욱 강해졌다. 죽다 살아난 100명의 대원을 충원한 김일성 부대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고, 김일성의 발언권도 높아졌다. 왕밍 王明과 리리싼 李立三의 좌경모험주의에 진저리를 치던 마오나 홍군의 무분별한 체포와 잔인한 지주 처형을 금지시켰던 덩샤오핑 역시 김일성을 주목했다. 한국전 이후 연안파 숙청(19568월 종파사건)과 문화대혁명으로 북 중관계가 험악하긴 했지만 대체로 양국의 지도자는 배짱도 맞고 합이 좋았다.

 

김일성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의 많은 지면을 통해 민생단 이야기를 했다. 당시 동만 지역 항일유격대원은 일제와 싸우기 전 내부의 적과 싸워야 했다. 항일무장투쟁사가 영웅들의 무용담 대신 각종 노선투쟁과 구국군과의 갈등, 조중단결과 같은 내부소재로 점철된 이유이기도 하다.

 

민생단 주구로 몰려 처형되기 전 이들은 한결같이 혁명 만세!”를 외쳤다. 더러는 호송대원 두 명을 제압해 탈출하고도 며칠 뒤 다시 돌아와 총을 반납하고 순순히 처형당한 지휘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탈출로 부하들이 학살될까 염려했다. “나를 대신해 끝까지 싸워다오!”라는 말은 민생단으로 몰린 조선인 혁명가들의 임종당부가 되어버렸다. 영웅들의 대서사로 보이는 항일무장투쟁의 그늘엔 억울한 죽음이 많다. 장지락과 민생단 혐의자는 일제 특무, 트로츠키주의자, 반당분자로 몰리거나 심지어 민족주의자였기에 죽어야 했다. 지울 수 없는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그늘이다.

Hey Jude - Wilson Pick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