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
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해남,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깨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
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냐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
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濟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는 구나
(바다가 보이는 敎室 1987 창작과 비평)
정일근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를 언제 처음 보았든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아무튼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의 품격있는 고뇌와 인간적 그리움을 잘그려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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