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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쉬운 詩 좋은 詩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by 이성근 2013. 7. 16.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
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해남,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깨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
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냐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
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濟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는 구나

 

(바다가 보이는 敎室  1987 창작과 비평)

 

정일근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를 언제 처음 보았든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아무튼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의 품격있는 고뇌와 인간적 그리움을 잘그려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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