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밍크이불
이진심
그 시절, 어지간한 집엔
장롱마다 그 놈이 살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려 해도
꼭 어딘가 한 군데는 주름져 있던
털이 여러 군데로 쓸려져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던,
가을철에 장롱에서 기어 내려와
겨울 지나 봄까지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켜지는 법 없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또르르 또르르
몇 년이 지나도 빨지 않아
털이 송곳처럼 딱딱해지던 밍크이불,
말뿐인 밍크이불
한번 물을 먹으면 너무 무거워
빨랫줄에 걸 수 없었던 짐승,
장사하는 엄마 따라 시장에 나가
한겨울 사과를 덮다가 배추를 덮다가
털갈이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밍크이불,
너무 순해서 내 동생 같았던
진짜 밍크 같았던
1966년 인천출생
1993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불타버린 집』『맛있는 시집』등
Butterfly - Robin Spie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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